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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70여 년을 하루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94세 할머니 열쇠공

시간의 문을 여는 비밀 공간이 있다면 아마도 이곳이 아닐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세 평 남짓한 작은 가게. 먼지가 진득하게 쌓인 구형 열쇠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 포항 원도심 중앙로의 역사를 몸소 겪어낸 열쇠공이 여전히 고객을 맞이하는 곳. 포항시 북구 죽도동 135-105번지 ‘죽도열쇠’다. 죽도시장 건너편 골목 안 컨테이너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세월 고스란히 간직한 세 평 남짓한 가게 고윤기 씨가 문 열고 따뜻하게 손님 맞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서울내기 고 씨 이북 출신 남편 김흥준 씨와 사랑에 빠져 서울서 강릉·울산 등 거쳐 포항에 터 잡아 “손재주 뛰어난 남편, 손수레 하나 마련해 시장통 누비던게 ‘죽도열쇠’의 시작이지” “노점 생활 30년 만에 판잣집을 짓고 장사 우리 다섯 식구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아 세 아들 이곳에서 일 배우고 밥벌이 했어” 올해 94세를 맞은 고윤기 씨가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의외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근처에서 열쇠집을 운영하는 차남 김건식 대표와 함께 먼저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가게의 3분의 1 정도를 방처럼 만들어 놓은 이곳에서, 고 씨는 손님이 오면 자물쇠를 판매하고 열쇠 복사를 해준다. 바닥을 창문 높이까지 돋운 방에는 텔레비전과 밥솥, 이부자리까지 살림살이가 살뜰히 마련되어 있었다. 지내시기에 비좁지 않은지 물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단다. 손수레로 장사하던 시절에 비하면 대궐이라고 했다. 오는 길에 사 온 간식거리를 내놓았다. 죽도시장 난전에서 파는 옥수수빵을 군것질 삼아 대화는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렀다. ‘죽도열쇠’의 역사는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씨의 남편인 고(故) 김흥준 씨(1999년 작고)는 이북 출신으로 인민군 장교였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1년여 전에 국군에 귀순했다. 혈혈단신 내려온 남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고윤기 씨와는 서울에서 만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서울내기 고 씨는 사랑에 빠져 남편을 따라나섰다. 고생길이 훤한 고 씨의 선택을 부모도 말리지 못했다. 서울에서 강릉, 울산, 부산 등지를 거쳐 터전을 잡은 곳이 포항이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으나 젊고 명석한 머리와 고치고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난 남편은 낡은 손수레 하나를 마련했다. 연장을 싣고 시장통을 누비던 손수레가 바로 죽도열쇠의 시작이었다. 열쇠 수리에 필요한 재료와 장비뿐 아니라 지퍼나 라이터, 석유풍로 같은 잡화를 취급하는 난전이었다. “장사가 잘되었어. 우리 아저씨가 손재주가 좋았거든.”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가게를 냈다. 금은방을 운영하던 사장이 옆자리가 하나 비었으니 얼른 오라고 알려준 데가 여기였다. 목수를 불러 판잣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 1982년, 노점 생활을 한 지 30여 년 만이었다. □ 열쇠점은 다섯 식구의 삶의 터전 고 씨에 따르면 죽도 다리 위에서 난전을 시작했고, 가게도 멀지 않은 곳에 냈다. 가게 앞으로 개천이 흘렀다. 바로 눈앞이 물이었지만, 지대가 높아서 넘친 적은 없었다. 고 씨는 개천이 흙으로 덮이고,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는 도시의 변화를 고스란히 지켜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장교로 참전한 김흥준 씨는 폭탄 파편이 폐에 박히는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예비군 훈련대장을 맡았다. 고 씨는 훈련병들의 식사까지 손수 준비해 손수레에 싣고 연병장까지 날랐다. 남편뿐 아니라 훈련병들의 식사까지 챙기는 것은 소대장 아내의 책무라고 여겼다. 훈련이 없는 날에는 생계를 위해 시장에 나가 난전을 펼쳤다. 때마침 영일만에 제철소가 들어선 뒤 주택과 자동차가 늘면서 열쇠 수리 일감도 많아졌다. 고윤기 씨가 포항에 터를 잡았을 때가 스물한 살이었다. 남편과는 서너 살 차이였다. 고 씨의 친정은 서울 종로에 택시회사와 주유소를 소유했을 만큼 부자였다. 1931년생인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이라는 혼란한 시대를 보내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남편과 만나서 포항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힘든 시절은 떠올리기 싫다며 진저리를 냈다. “여기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다 갔어. 놀러 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이도 없고 그래.” 다들 변했지만 홀로 변하지 않은 섬과도 같은 가게를 지켜온 이유는 다섯 식구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세 아들은 수업이 끝나면 집이 아닌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 씨는 밥을 지어서 출근했다. 성장한 아들들이 아버지의 출장길을 따라나서면, 고 씨는 가게에 남아 손님을 맞았다. 세 아들 모두 손재주가 있었지만, 둘째 김건식 대표가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습득이 빠르고 머리가 비상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김 대표는 10년 전에 가게를 키워 독립했다. “잘되어서 나가니 무척이나 기쁘지.” □ 두 아들도 열쇠업에 종사 인터뷰하는 내내 손님은 없었다. 요즘은 손님이 있는지 물으니, 오전에 벌써 열쇠 세 개를 복사했다고 했다. 고 씨는 열쇠 하나당 5000원이니 제법 벌었다며 자랑했다.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바쁘던 시절에 비하면 초라한 액수다. 한창때에는 손님이 내미는 열쇠를 어느 회사 제품이라는 것까지 알아맞힐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 기술자도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육칠십 대까지 노안이라곤 없던 눈이 침침해져서 세 대의 복사기 중 두 개는 놀리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시력만 빼면 예전의 실력 그대로다. “집에서 놀면 뭐 해? 가게에 나와서 그냥 놀다가 집에 가서 자고, 아침이 되면 밥을 해서 또 나오는 거야. 딴 거 없어. 손님 있으면 일하고, 없으면 노는 거지.”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있다. 허탈한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툴툴 털고 출근한다. 젊은 시절부터 대낮에 빨래를 해본 적이 없다. 낮에는 가게 일로, 밤에는 집안일로 늘 바쁘게 살아온 삶이 몸에 밴 탓이다.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 될 텐데 왜 아직도 비좁은 가게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여기서 늙었어. 우리 아이들도 다 여길 거쳤지. 우리 영감님이 하던 거라, 되든 안 되든 내가 지키는 거야.” 세 아들 모두 이곳에서 자라며 일을 배우고 밥벌이를 했다. 세월이 흘러 맏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두 아들은 여전히 열쇠업에 종사한다. 고 씨에게 이 작은 가게는 가족을 지탱해준 고마운 공간이다. 이제는 이곳 말고는 가고 싶은 곳도, 마땅히 갈 곳도 없다고 말한다. □ 94세 할머니 열쇠공 가끔 “안 열리는 자물쇠가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호통부터 친다. 안 열리는 열쇠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자물쇠는 열리게끔 만들어졌고, 열고자 하면 안 열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혹시 안 열리면 “우리 건식이에게 가면 다 열린다”고 덧붙였다. 아들에 향한 믿음과 애정이 묻어났다. 지금도 자택이 있는 용흥동에서 가게까지 20분 남짓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고 씨다. 자전거를 20년 가까이 타다 보니 다리에 근력이 생겼다며 바짓단을 걷어 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고 씨의 일상은 변함없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겨 가게로 출근한다. 젊은 시절 다섯 식구의 끼니를 챙겨 가게로 향했던 것처럼 길을 나선다. 세 평 남짓한 가게의 자물쇠를 열고 오래된 과거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 앉는다. 여전히 제 할 일을 기다리는 오래된 열쇠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죽도동에 가면 70여 년을 하루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94세의 할머니 열쇠공을 만날 수 있다.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17

“노포는 오래 버틴 사람이 만든 자리”

죽도시장에서 40여 년 개복치로 가업을 지켜온 것이 결코 쉬울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IMF, 코로나19, 태풍, 불황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닥쳤다. 하지만 이 대표는 개복치를 꿋꿋이 지켜냈다. 장사는 정직하게 해야 고객들이 믿고 다시 온다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왔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확신이 묻어났다. ‘시장’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리를 만들어왔다는 자부심이었다. 부모가 35년, 내가 41년 넘게 이어온 가업 대학서 다양한 과정 수료•日 견학 등 노력 생선 넘은 생명, 상품 넘은 사명으로 지켜 어획량 급감… 동해서 사라져가는 개복치 해체 기술•노하우 등 전통 명맥 끊길수도 누군가는 계속 다뤄 다음 세대로 이어야 단순히 생선 장사가 아닌 인생을 거는 일 내가 이 생선을 왜 다루는지 잊지 않아야 포항의 고유한 역사를 개복치에 접목해 새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길 바라 “사람들은 노포를 오래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노포는 오래 버틴 사람이 만든 자리죠.” 가업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어깨는 무겁다. 부모 세대가 35년, 본인이 41년 넘게 이어온 수산물 유통의 중심에 ‘개복치’가 있다. 생선을 넘는 생명, 상품을 넘는 사명으로 개복치를 지켜온 이영태 대표는 수산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고 싶은 포부가 있다.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서울대학교 해양정책 최고과정, 경북대학교 산업대학원, 한동대학교 해양수산 CEO 과정, 계명대학교 최고위과정 등을 수료했다.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을 견학하기도 했다.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꾸준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래야만 고객에게 좋은 품질의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고 유통 또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생선 장수라고 부르지만, 나는 개복치로 포항을 알린다는 생각으로 일해요. 개복치가 포항에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생선이 아니라 여기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 그게 내 사명이라 여깁니다.” 이 대표는 앞으로도 개복치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가공식품 개발, 체험형 매장, 젊은 요리사와의 협업까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죽도시장의 작은 생선가게 안에는 개복치를 세상에 알린 한 남자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역 가업의 본질은 ‘상속’이 아니라 ‘기억의 실현’이라는 그의 말은 시장 어귀를 지키는 오래된 간판처럼 묵직하게 다가온다. 동해안에서 사라진 개복치 개복치는 동해안에서 매년 5월 보리누름에서 11월 나락누름 사이에 잘 잡혔다. 그래서 죽도시장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개복치 떼기’라 불리는 도매 행위가 활발했다. 하지만 수온과 해류의 경로 변화 등으로 개복치 어획량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포항, 강구 등 동해에서 잡히던 것이 해양 생태계 변화로 남해와 서해에서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지금은 대만에서 많이 잡힌다. 이제는 개복치의 공급량보다 수요량이 많다. 서울 63빌딩 뷔페에 개복치를 공급하다가 물량이 부족해 제공하지 못한 적도 있고, 중국 칭다오 수산박람회에서 130톤을 주문받았지만 공급을 미룬 적도 있다. 개복치가 많을 때는 한 해 70톤 이상 취급했고, 부산, 통영에서 잡힌 개복치가 하루 50마리 넘게 태영수산으로 들어왔다. 그럴 때는 이 대표가 밤늦게까지 개복치 55마리를 해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연간 물량이 하루치가 안 될 정도로 저조하다. 어느 해는 1년간 포항수협과 구룡포수협에 위판된 개복치가 12마리, 전체 양이 1070킬로그램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현재 태영수산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개복치는 대만 해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 대표는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만 해역의 개복치를 들여왔다. “포항에서는 개복치가 안 잡히지만 포항의 이름으로 계속 알리고 싶어 수입을 결정했죠.” 이 대표는 개복치를 ‘지키는’ 일을 넘어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다. 세계대표자대회 수출상담회, 수산박람회, 글로벌 회의, 죽도시장 퓨전 수산물 요리축제, 메가쇼(국내 최대 소비재 박람회), 팔도밥상페어까지 이어지는 개복치 홍보의 여정은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생선을 판다’는 생각을 넘어 ‘식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노포의 또 다른 과제는 ‘지속’이다. 개복치의 저변 확산이 지속되고, 다음 세대로 해체 기술이나 상품의 노하우, 유통기술이 이어지는 일은 중요하다. “개복치는 사라지는 생선입니다. 기술도 유통도 기억도 같이 사라지겠죠. 그걸 막기 위해 누군가는 계속 개복치를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포항에서 개복치를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곳은 손에 꼽힌다. 생선이 사라지면 먹는 사람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생선을 지켜온 전통 방식, 생선을 다루는 손의 감각, 생선을 기다리는 시간, 유통 노하우가 함께 사라진다. “가게 문을 닫는 순간, 이 생선은 다시 ‘듣도 보도 못한 물고기’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개복치 전문 유통은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 이 대표는 개복치 홍보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하지만 76년간 개복치 유통을 이어온 열정과 노력이 자신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느낀다. “내 손에서 끝나면 안 되잖아요. 다음 사람이 이어야 해요. 누군가 기술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대에 어떻게 이 노하우가 이어질 수 있을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최근에는 노포의 지속을 ‘가업 승계’가 아닌 ‘지속 가능한 가치’에서 찾는 시도가 많아졌다. 그는 “자식에게 물려주고도 싶지만 고생할까 봐 권하지는 못한다”며 “자식들이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단순히 생선 장사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선뜻 넘기기 어려운 거죠. 누구든 이 일에 진심이 있다면 기꺼이 넘길 겁니다.” 이 대표는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개복치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강조했다. 손님 한 명 한 명의 입맛과 반응을 기억하고, 계절에 따라 맛이 변하는 생선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이 생선을 왜 다루는지를 잊지 않는 마음이 전수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대표는 누군가가 개복치 일을 이어간다면, 개복치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지역 협동조합, 로컬푸드 플랫폼, 청년 창업 프로그램과 연계해 노포 기술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방의 소규모 노포들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한 ‘경영 승계’가 아니라, ‘지방 산업 문화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지역사회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포항 역사와 개복치를 접목해 관광 자원으로 만들고 싶어 “죽도시장 안에 개복치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몇 해 전부터 교육과 홍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해양수산부,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 개복치에 대한 연구, 기록, 시식 행사를 열고자 하는 구상도 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에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포항의 고유한 역사를 개복치에 접목해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킨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개복치는 포항이 ‘스스로의 바다’를 기억하는 상징이다. 영일만에 개복치가 사라졌다고 해서 개복치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게 두지 않겠다는 이영태 대표 같은 사람이 있는 한 포항은 ‘개복치를 기억하는 도시’로 남게 될 것이다. <끝> 글 = 정미영 수필가 사진 = 김 훈 작가

2025-09-14

“개복치에 한평생 매달린 게 헛되지는 않았네요”

개복치는 수질과 빛 등의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하다. 유통 중 폐사율이 높고, 살아 있는 상태로 출하하기 어렵다. 기온과 수온의 변화에 민감하고, 피부가 얇고 물렁해 쉽게 상한다. 운반과 손질도 까다로워 이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 드물다. 그래서 개복치는 전문적인 해체 기술이 필요하다. 해체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쓸개를 터트리면 안 된다. 쓸개가 터지면 개복치 전체에 쓴맛이 퍼져 판매할 수가 없다. 아가미 이빨에 독이 있어 조심스럽게 도려내야 한다. 날개 지느러미를 먼저 잘라내고 배 쪽을 절개해 내장류를 분리해 제거한 뒤, 피부를 벗기고 몸통을 분할한다. 일반 생선처럼 삼등분(머리-몸통-꼬리)이 아니라 살 부위 중심으로 나눈다. 그런 다음 살을 분리하고 부위별로 분류한다. 1980∼90년대, 포항은 죽도시장과 동빈내항을 중심으로 어시장 체계가 재편되었다. 이 흐름에 맞춰 이영태 대표는 개복치 전문 유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이었다. 부모 세대의 수산물 유통 경험을 기반으로, 개복치 유통 노하우를 포항에서 최초로 정착시킨 것이다. 포장 방식, 수조 온도 유지, 도착 즉시 손질 처리 체계를 개발해 개복치의 상품화를 이끌었다. 41년 전 처음 제조 시도한 껍질로 만든 수육 쫄깃한 청포묵처럼 초고추장 곁들여 먹어 유통 노하우 포항서 최초 정착 ‘상품화’로 지역 경조사 상차림에 ‘단골 메뉴’로 등극 2012년 버리는 살코기로 만든 장조림 히트 포항시 추천으로 ‘개복치 명인’ 신청 추진 중 SNS 등서 입소문 ‘자자’ 택배시스템도 갖춰 “전통은 지키되 시대 흐름에 맞춰 가야죠” 개복치 수육과 장조림 개발 태영수산은 개복치를 좀 더 먹기 편한 대중적인 음식으로 보급하기 위해 개복치 가공식품인 수육과 장조림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현재 개복치 가공식품은 상표등록 보유 및 포항시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식품, 개복치 명인’으로 신청을 추진 중인데,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박정자 씨는 개복치를 전문적으로 유통하려고 보니 개복치를 뚝뚝 잘라 파는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시어머니가 개복치를 팔 때는 뚝뚝 잘라서 2000원, 3000원 이렇게 대강 팔았어요. 그날 팔지 못한 건 버릴 수밖에 없었고요. 장사를 이렇게 해서야 뭐가 되겠냐 싶더군요.” 박정자 씨는 손님들이 개복치를 간편하게 사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걸쳐 탄생한 것이 개복치 수육으로, 개복치의 겉껍질을 벗겨 삶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41년 전에 태영수산이 처음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개복치 껍질에 각종 재료를 넣고 푹 고아 껍질이 흐물흐물해지면 틀에 넣어 굳힌 음식으로 초고추장에 곁들여 먹는다. 피쉬 콜라겐으로 피부 미용과 뼈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저칼로리 영양식이기도 하다. 모양은 청포묵과 비슷하고 비린내가 거의 없으며 단백하고 쫄깃한 식감으로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깔끔한 맛이다. 비린내가 없도록 개발한 수육은 포항에서 경조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대방예식장, 목화예식장, 청솔밭에 납품했으며 나중에는 포항의료원 장례식장, 포항시민장례식장 등에 공급했다.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 끝에 개복치 상품화에 성공 새길을 여는 일은 수고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개복치 수육을 상품화하는 과정도 그랬다. ‘그냥 대충 잘라서 팔걸’ 하고 여러 번 후회하기도 했다. 문어처럼 삶아서 팔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해체 작업을 거쳐 먹을 수 있는 부위와 먹을 수 없는 부위를 선별해 각각 조리법에 맞게 요리해야 하므로 시작부터 까다롭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개복치를 잘라서 팔면 손님들이 집에서 조개껍데기나 감자껍질 벗기는 숟가락으로 가죽처럼 질긴 개복치 껍질에 붙은 속살을 직접 벗겨냈다. 이렇게 벗겨낸 속살을 삶거나 쪄서 채반이나 짚 위, 대나무 발 위에 얹어 식힌 다음, 하얗게 덩어리가 되면 닭가슴살처럼 뜯어 먹었다. 그 모습이 불편해 보인 이 대표 부부는 손님들이 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연구해 조리법을 바꾸었다. 부부는 요리사가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이었지만 맛을 내기 위해 요리사처럼 고민하고 여러 시도를 해보았다. 비린내를 없애려고 식초, 마늘, 생강, 소금, 간장, 된장 등을 넣어보고, 식감을 위해 불 조절, 삶는 시간 조절을 되풀이하는 몇 년 동안 버려진 개복치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노력 끝에 태영수산만의 개복치 수육이 탄생했다. 수육이 맛있다고 소문나자,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독립해 상점을 차렸는데, 그 수가 일곱이나 되었다. 경쟁자가 많아지니 수육 판매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새로운 걸 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복치 장조림을 2012년에 개발했다. 개복치 속살에 물, 식초, 설탕, 간장을 넣고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태국 고추, 마늘 등을 넣어 조린 요리다. 요리 비법은 사흘 동안 달이고 식히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간장에 조려서 보관이 쉬우며, 짭짤한 맛과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입맛이 없을 때 밥반찬으로 기가 막힌다. 개복치 장조림을 개발하는 데에도 사연이 많았다. 개복치 껍질로 수육을 만들어 팔다 보니, 버려지는 살코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죽도시장에서 살코기 한 통을 쓰레기로 버리는데 1만 원이 들었다. 쓰레기 버리는 값이 100만 원이나 드니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당시 박정자 씨의 친정은 청송에서 사과 과수원을 했다. 사과나무 아래에 개복치 살코기를 갖다 묻으면 비료가 될 것 같아 흙구덩이를 파서 묻고 난 뒤에 등겨를 덮었는데, 며칠 뒤 친정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희들 나무 밑에 뭐 했냐?” 고기 냄새를 맡고 멧돼지가 산에서 내려와 사과나무 밑을 들쑤셔서 과수원이 엉망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골치 아픈 살코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장조림으로 만들어 판매하게 되었는데 시장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현재 중국, 홍콩,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 수출을 추진 중이다. “포항 가면 개복치, 개복치는 태영수산” 개복치의 도톰한 살은 젓갈과 장조림, 뼈와 내장은 국거리, 껍질은 수육, 이 밖에도 회, 두루치기, 대창구이 등으로 상품화되었다. 개복치를 꾸준히 연구하면서 조리법을 바꾸다 보니 손님들의 반응도 달라지면서 고객층도 확대되었다. 이 대표는 가공식품 개발과 함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급격하게 바뀌는 식문화와 유통 질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택배로 개복치를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어 놓았다. “이제는 매장에서만 파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노포라고 해서 전통만 고집해서야 되겠습니까. 전통을 지키되 시대 흐름에 맞춰 가야죠.” 그런 노력 덕분에 태영수산도 개복치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고 SNS와 유튜브에 화제가 되면서 입소문이 났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왔다는 젊은 층과 외지 손님도 많이 늘었다. 강릉, 광주, 심지어 제주에서도 개복치 상품을 찾는다. 이 대표는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왔어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뿌듯함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포항 가면 개복치, 개복치는 태영수산”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표는 “개복치에 한평생 매달린 게 헛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글= 정미영 수필가·사진= 김훈 작가

2025-09-10

인생의 위기에서 만난 ‘몰라 몰라’

죽도시장에는 ‘포항의 명물 개복치’라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은 수산물 가게가 있다. 2대에 걸쳐 76년간 개복치를 유통해온 태영수산이다. 그곳에는 개복치에 평생을 바쳐온 이영태(70), 박정자(69) 부부가 있다. 그들을 만나 개복치와 죽도시장 그리고 그에 얽힌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영태 대표의 할아버지는 포스코가 세워진 곳에서 살았다. 170여 가구가 살았던 동네에서 제법 땅이 많았고 집에는 일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배도 소유하고 있어서 영일만에 나가 조업했는데 가자미와 아귀가 많이 잡혔다. 할아버지가 가져온 어패류를 할머니가 시장에 나가 팔았는데 어머니도 그 일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도 돛단배 두 척을 가지고 영일만에서 어업에 종사했다. 1970년대 포항제철이 들어서자 지금 포항운하가 들어선 자리로 옮겨와 어로 작업을 하며 살았다. 올해 92세인 이 대표의 어머니는 20대부터 시어머니와 남편이 잡아온 조개, 멍게, 고등어, 대게 등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다. 그 시절, 노점상 이름을 ‘태영수산’이라고 지었다. 대개 장사하는 사람들은 상호(商號)를 맏아들이나 맏딸 이름으로 정한다. 처음에는 3남 1녀 중 장남인 영태의 이름을 따와 ‘영태수산’으로 하려고 했는데 손을 댄 사업마다 실패하니 주변에서 ‘영태’를 거꾸로 해 지어보라고 권했다. 그 바람에 상호를 ‘태영수산’이라 했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태영수산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죽도시장에 터 잡고 2대에 걸쳐 76년간 개복치에 평생바친 이영태·박정자 부부 바다일 시키지않으려는 아버지 만류로 오랫동안 떠났다 운명처럼 다시 돌아와 고등어·갈치 등 생선 파는 일에 점점 한계 죽도다리 지나다 개복치 잡는 장면 보며 “남이 안하는 것 하자” 품목 바꿔서 판매 점차 개복치를 포항의 명물로 만들어가 1998년 태영수산으로 등록 후 만든 간판 2006년 마침내 가건물 짓고 당당히 걸어 포항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다 이 대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안의 일손이 부족할 때면 아버지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일을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몰래 혼자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호미곶까지 갔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헤엄을 쳐서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도 그 경험을 밑천 삼아 며칠 뒤, 이번에는 친구 여섯 명을 배에 태우고 바다에 나갔다. 무사히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학교와 집을 포함한 온 동네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이 대표의 아버지는 “다시는 배를 타지 마라”며 크게 화를 내셨다. 또한 할아버지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은 이 대표가 바다에 나가 사고라도 당할까 봐 감시를 했다. 중학교 진학도 내륙인 대구에 보낼 정도로 바다로 이어지는 끈을 차단했다. 그 바람에 이 대표는 오랫동안 바다와 멀어진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부품 공장에 다니기도 했고, 결혼 후에는 울산에서 한국타이어 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잘못되어 사업이 망하고 말았다. 운명은 그를 다시 바다로 불러들였다. 살아갈 길이 막막해 여러 방도를 찾고 있을 때 포항 본가에서 부부를 불렀다. 이 대표의 아내 박정자 씨는 시어머니와 죽도다리 옆에서 상자에 생선을 올려놓고 팔기 시작했다. 죽도시장은 1950년대에 갈대밭이 무성한 동빈내항의 늪지대에 노점상들이 모여들어 축축한 바닥에 비닐이나 두꺼운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수산물을 놓고 팔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박정자 씨는 어린 두 딸을 위해서라도 ‘내가 이걸 안 하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악착같이 생선을 팔았다. 개복치와의 특별한 인연 이 대표의 아내 박정자 씨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생선을 파는 일에 서서히 한계를 느꼈다. 시어머니는 주로 고등어, 갈치, 멸치 같은 유통이 빠른 생선을 취급했다. 그 품목들은 빨리 팔리는 대신에 목돈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팔아도 그 수입으로는 두 집이 살아가기가 빠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죽도다리를 지나다가 다리 위에서 큰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보았다. 사람 몸집보다 큰 대물(大物), 개복치였다. 아직 복개하지 않은 때여서 어시장 사거리에서 죽도시장으로 들어가려면 죽도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 위에서 개복치 잡는 것을 본 것이다. 개복치는 포항수협에서 직접 경매로 받거나, 부산과 강구 수협을 거쳐 경매된 것을 상인들에게 공급받기도 했다. 개복치는 워낙에 커서 죽도시장 안으로 옮기기가 힘들어 죽도다리 위에서 바닥에 비닐을 깔고 팔 때가 많았다. 개복치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는데, 그때 박정자 씨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많은 노점상이 취급하는 생선을 팔아봐야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한다. 개복치를 팔아보자.’ 박정자 씨는 그렇게 유통 품목을 개복치로 바꿨다. “빨리 팔리지만 돈 안 되는 생선보다 내 손으로 정성을 들여 다룰 수 있는 생선에 집중하고 싶었지요.” 시어머니와 본격적으로 분리한 뒤, 죽도다리 위에서 개복치를 팔았다. 생선의 신선도를 물고기 눈알로 확인하는 법, 물 온도에 대한 감각, 생물을 다룰 때의 손 압력 조절, 계절별 유통 시점 등 부모에게 배운 수산물을 다루는 체화된 노동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부부는 점차 개복치를 전문으로 판매해 포항의 명물로 만들어갔다. ‘태영수산’ 간판을 점포에 걸다 이 대표의 어머니는 30대 중반인 1968년에 포항 수산중매인 1호가 되었다. 포항수협에서 중매인을 모집했는데 본격적으로 수산물 중매를 하고 싶어 신청했다. 당시 중매인 1호는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중매인 59번이었다. 이 대표는 부모님이 35년간 운영해온 중개업을 1984년에 승계받았다. 예전부터 태영수산이라는 상호는 있었어도 간판 없이 시장 한쪽에서 생선을 팔았는데, 1998년 태영수산으로 등록한 뒤에는 간판을 만들었다. 아직 건물이 없을 때라 파라솔 두 개를 가지고 20여 년 가까이 장사하는 동안 간판은 좌판 옆에 세워져 있었다. 2006년 이영태 대표가 수산중매인으로 등록하고 난 후 ㈜태양수산을 설립하면서 개미수산 옆에 가건물을 지어 그토록 원하던 간판을 점포 위에 당당하게 걸었다. 죽도다리 옆에서 시작한 시어머니의 노점상 ‘태영수산’이, 죽도다리 건너편에 가건물을 짓고 난 뒤 비로소 간판에 새겨진 것이다. 개복치는? 예부터 조상들이 사계절 선호하는 수산물로, 포항에서는 결혼식, 잔칫집, 돌잔치, 장례식 등의 경조사에 빼놓을 수 없는 바닷물고기다. 복어목 개복치과로, 비늘이 없고 길이 약 2~4미터, 몸무게 약 1∼2톤에 이르는 거대한 물고기다. 한 번 산란에 2억∼3억 개의 알을 낳지만, 성체가 되는 것은 한두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개복치’라는 이름은 머리만 뚝 잘라놓은 것 같은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학명인 ‘몰라 몰라’(Mola mola)는 맷돌을 닮은 개복치의 형상을 딴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영어 이름은 ‘오션 선피쉬’(Ocean sunfish)다. 납작하고 둥근 몸체를 가지고 파도가 없는 고요한 날에는 수면에 등지느러미를 보이면서 헤엄치거나 누워 뜨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태양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붙여졌다. 개복치는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키는데 내장을 열어보면 오징어, 해파리, 멸치 등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피부 점액질에는 독이 있어 일종의 항생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상처 입은 물고기들이 개복치 주위를 헤엄치기도 하는데 ‘바다 의사’ 노릇을 하는 셈이다. 개복치 껍질은 마치 하얀 묵 같은데, 껍질을 삶으면 우무나 곤약처럼 투명해진다. 회로 먹기도 하는 개복치살은 참치와 비슷하고 그 맛이 일품이다. 콜라겐이 풍부하고 단백질, 비타민 등이 풍부하며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춘다. 빈혈에 좋은 타우린도 함유하고 있다. 바다의 육류라고 불릴 만큼 육질이 쫄깃하고 고혈압, 당뇨병, 신경통 등 성인병에 좋으며 동맥경화 예방, 근육경화 방지, 뇌기능 향상에도 효과가 있다. /정미영(수필가)

202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