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老鋪 기행-죽도열쇠 분단의 상흔, 열쇠 장인 가문을 이루다 ③
열쇠업이 전성기였던 1990년대, 포항에는 열쇠집이 70여 곳 있었다. 지금은 열쇠를 복사하려면 수소문해야 할 정도로 줄었다. 그러나 죽도열쇠 김건식 대표는 ‘사라질 산업’이라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열쇠 제작은 기술입니다. 로봇은 사람의 손 기술을 이기지 못해요. 도어록이 보편화되어도 열쇠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의 출장 범위는 아파트와 상가를 넘어 은행, 선박, 군부대, 교도소까지 다양하다. 해병대 출장도 예사다.
“군대도 문이 있고 열쇠가 있거든요.”
문이 있는 곳이라면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전성기던 1990년도 중반 부도 겪었지만 기술 하나 믿고 가업 지켜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 신념으로 날마다 새 기술 정진
직접 개발한 디지털 도어록 전국 100여 군데 대리점서 1만개 판매
사양사업이라는 말에 고개 저으며 오늘도 ‘죽도 열쇠’ 역사 써내려가
열쇠 기술자의 하루는 종종 긴박한 구조 현장이 된다. 한여름 차 안에 갇힌 아이를 구한 적도 있고, 현관을 따고 들어가 쓰러진 노인의 목숨을 살린 적도 있다.
119구급대가 활동하지 않던 시절이라 급한 상황에서는 열쇠공이 곧 구조대였다. 반대로 어두운 순간을 마주하기도 했다. 경찰과 함께 들어간 집에서 자살 현장을 목격하거나, 부부싸움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예전엔 손님이 발을 동동 구르면 무조건 달려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먼저 상황을 살펴요. 자칫하면 큰일 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지만 자칫 나쁜 일에 휩쓸리기도 한다. 김 대표는 ‘문을 따는 기술’이 곧 ‘신뢰의 문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요즘은 집주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경찰을 대동하지 않으면 거절한다. 대화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단다. 구체적인 내용은 ‘영업 비밀’이라면서, “은연중에 실수하도록 유도하면, 본인 집인지 아닌지는 몇 마디만 해봐도 나온다”고 했다. 오래 일하다 보니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부도 맞고 큰 시련 겪어
김건식 대표의 성실함은 주위에서 정평이 나 있다. 성실함은 신뢰로 이어졌다. 출장 중에 만난 장모가 딸을 소개할 정도였다.
“장모님이 제가 못생겼어도 편하게 해줄 거라며 아내를 설득했죠.”
지금도 장모는 든든한 사위 편이다. 아내 역시 든든한 지원군이다. 집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는 그를 위해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부엌에서 매 끼니를 정성껏 챙긴다.
김 대표의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남의 문을 척척 열어주는 열쇠 기술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먹통인 시절도 있었다. 1990년도 중반, 한창 잘나가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다.
열쇠 도매상을 비롯해 주차장, 세차장, 식당 등 이곳저곳으로 확장해나가던 사업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사람을 지나치게 믿은 탓에 보증 문제가 터진 것이다. 그때 이미 아버지와 방송에 출연하며 이름이 알려져 도망가기도 숨기도 싫었다. 빚더미에 앉은 그는 좋아하던 술을 끊고 오직 빚 갚는 데 매달렸다.
“30억 빚을 지고 나니 돈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은 잃었지만 인생 공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건강마저 무너졌지만, 그는 기술 하나를 믿고 다시 일어섰다. “어려운 시기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기술이 있는데 왜 못 살아, 하고 오기가 생기더군요.”
결국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다시 열쇠 앞에 섰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 그는 어머니에게 가게를 팔아 빚을 갚자고 졸랐다. 흔들리지 않고 가게를 지킨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눈물로 버티던 어머니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디지털 도어록 기술 연구에 매진
이후 그는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그가 일을 대하는 원칙은 단순하다.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 열쇠는 정밀 기술이기에 작은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공부하고,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익힌다. 김 대표 스스로 다른 곳보다 비싼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쌓아온 기술 값’이 더해지니 당연하단다. 열쇠 일은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정밀도를 높이고 오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된다.
디지털이 보편화된 오늘날, 열쇠업은 사양산업일까. 많은 종사자가 열쇠업이 사양사업이라며 떠났지만 김 대표는 오히려 디지털 도어록 기술 연구에 매진했다. 실제로 수요가 많아지면서 설치나 수리 문의가 증가했다. 문제가 생기면 제작사보다 설치 기사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
김 대표는 애초에 고장이 안 나게 만들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예 ‘열쇠 기술자가 만든 도어록’을 직접 개발했다. 회원들과 힘을 합쳐 브랜드를 만들고, 3년간 무상 교환을 내세웠다. 현재 전국 100여 군데 대리점을 통해 판매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만여 개를 판매했지만 AS 요청은 극히 적어 품질이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장인의 자존심을 건 결과다.
김 대표는 디지털 도어록도 완벽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전히 보조 열쇠와 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어록은 사실 보안 수준이 열쇠보다 약해요. 드릴 하나면 뚫리죠.”
그러니 요즘은 디지털 도어록이 마모되면 교체하고, 보조 열쇠를 덧붙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열쇠 자체가 복잡하게 진화 중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열쇠 전문가인 김 대표는 도어록과 자물쇠 중 무엇을 선호할까? 그는 도어록을 쓰지만 무심결에 문을 열어놓고 다닐 때가 많다며 웃는다. 예전에는 낮에는 열어두고 밤에만 문을 걸어 잠갔다. 열쇠를 우체통이나 담장 위에 올려두는 일도 흔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문화였다. 자물쇠 추가 설치를 원하는 고객을 만나도 불필요한 곳이 더러 있단다. 불안하니까 설치해달라고 하지만 사실 시대가 달라졌다. CCTV가 보편화되면서 20년 전과 비교해 도둑 범죄가 확연히 줄었기 때문이다. 열쇠업에 타격을 준 건 디지털 도어록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CCTV일지 모른다.
“세상 모든 자물쇠를 열어야 직성 풀려”
생각해보면 열쇠업은 사람들의 불안이 만들어낸 직종이다. 열쇠 기술자의 일은 결국 그 불안을 덜어주고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출근은 아침 8시, 퇴근은 대중없다. 열쇠 하는 사람 두 명이 와서 못 따고 헤매는 걸 김 대표가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한 적이 있다. 그럴 때는 보람이 크다. 하루 수십 건의 출장, 밤까지 이어지는 일과. 몸이 고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는 말한다.
“노는 게 더 아픕니다. 옛 어른들 말씀 하나 틀린 거 없어요.”
그에게는 취미가 따로 없다. 젊어서는 당구나 골프를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계를 만지며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딸과 사위가 퇴직하고 가업을 잇겠다고 약속했다. 구순이 넘은 노모도 여전히 정정하고, 10년 넘게 함께하는 제자가 있어서 든든하다. 죽도열쇠가 지켜온 장인정신은 어느덧 76년이 넘어섰다.
벽면에 걸린 수천 개의 열쇠부터 최신의 각종 전자키까지 세월에 따라 자물쇠도 변해왔다. 변치 않은 것은 언제든 달려가 닫힌 문을 열어주는 열쇠공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모든 자물쇠를 열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김건식 대표의 말처럼, 죽도열쇠의 역사는 지금도 힘차게 이어지고 있다. <끝>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