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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혹한의 겨울, 한국 사람은 아직 ‘밥심’으로 살까?

몇 해 전 겨울이다. 가수 진성이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아/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고 노래한 ‘안동역’ 인근 조그만 식당에 갔다.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고, 무언가 따끈한 게 먹고 싶었다. ‘냄비밥’이란 메뉴가 눈에 띄었다. 알고 찾아간 게 아니었는데, 거긴 이미 기자 외엔 알 만한 사람이 다 아는 맛집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다른 메뉴를 쳐다볼 것도 없이 냄비밥을 주문했다. 기대했던 대단한 밥상이 차려지진 않았다. 그저 몇 가지 나물반찬에 담백하게 끓인 된장찌개, 거기에 고등어조림 한 토막. 헌데, 얇은 냄비에 갓 지어낸 밥이 기가 막혔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구수하고 달았다. 그 옛날 교주 최시형을 따르던 동학교도들은 “밥이 곧 하늘”이라 했다. 거창한 의미 따위를 붙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밥은 ‘섬김의 대상’이었다. 뿐인가? 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말에 토를 다는 이들이 없었다. 싱싱한 푸성귀 무침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따끈한 냄비밥을 깨끗하게 비운 그날. 냄비에 지은 밥이 선물한 ‘또 다른 별식’ 누룽지를 씹으며 기억의 회로 저 먼 곳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선친과 외조모에 얽힌 에피소드였다. 주전부리나 별식 따위가 없던 시절엔 반찬도 부실했다. 그래서였을 터다. 지난 세기 한국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주식이라 할 밥을 무지하게 많이 먹었단다. 물론 제 땅이 없고, 소작할 땅도 마땅찮아 극도로 가난했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리와 콩 등 잡곡을 섞은 밥도 양껏 먹지 못했겠지만.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 선교 등의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농부나 어부의 식사량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고 한다. ‘밥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먹는 조선 사람’에 대한 놀라움은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쓴 책에 고스란히 남았다. 커다란 밥그릇을 앞에 놓고 앉은 상투 튼 조선인 사진 몇 장도 함께 전해진다. 1947년에 태어난 모친은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농사일을 도우며 시골에서 살았다. 반면 선친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세련된 도회지’라 불러도 좋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1944년, 그러니까 해방 한 해 전에 나고야에서 부산으로 이주한 아버지는 혼인하기 전까지 내내 도시에서만 살았다. 그리고, 일생 소식(小食)했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기 주먹만한 조그만 밥그릇임에도. 그런 아버지가 장가를 갔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처음으로 처가에 갔을 때 몹시 곤혹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선친의 첫 번째 처갓집행(行)은 벼 수확이 한창이던 1970년 가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위는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이런저런 처갓집 피붙이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니 저녁밥 먹을 때가 됐다. 장모가 들고 온 밥상을 본 아버지는 대경실색(大驚失色) 했단다. 황소 머리통만한 밥그릇엔 푸른 염료로 큼직하게 ‘福(복)’자가 새겨져 있었고, 밥그릇에서 솟아오른 밥의 높이가 족히 10cm는 넘어 보였다는 것. 이른바 농사짓는 상일꾼이 먹는 ‘고봉밥’이었다. 선친은 매사에 과장이 없는 사람. “이걸 혼자서 어떻게 다 먹나? 쌀 한 되로 밥 한 그릇을 만든 형국”이란 혼잣말을 참지 못하고 했다는데, 그걸 장모는 듣지 못했을까? 만약 들었다면 꽤 서운했을 듯하다. 맏사위를 위해 정성껏 차린 밥상이었으니.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그 밥을 아버지는 결국 남겼고…. 세월무상(歲月無常)이다. 지난 2007년. 산처럼 높고 높은 고봉밥을 퍼주던 1920년생 외조모(아버지의 장모)가 세상을 떴고, 이듬해 시골 사람들 밥그릇 크기와 밥의 양에 경악했던 사위(선친)도 귀천했으니. 그리고 2025년 찬바람 매운 오늘.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믿던 1970년에서부터 55년이 흘렀다. 이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밥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나와 모친도 겨우 쌀 한 홉으로 밥을 지어 둘이서 나눠 먹는다. 그러고도 그걸 남길 정도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먹고 싶어진다. 외조모의 가마솥 고봉밥이나 낡은 냄비에 고슬고슬 지은 따끈한 밥이. 그런 걸 보면 기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 모양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30

‘깜밥’ ‘가마치’로도 불리던 별미

한국에 전기밥솥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아마도 20세기 중후반이 아닐까 싶다. 장작이나 연탄 없이도 전기를 사용해 빠르고 간편하게 밥을 지을 수 있는 수단이 생기면서 주부들의 ‘밥 짓기’ 고민은 사라졌다. 아쉽게도 그 고민과 동시에 하나 더 사라진 게 있으니 바로 ‘누룽지’다. 깜밥, 깐밥, 깡개밥, 깡개, 누룽갱이, 가마치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던 누룽지는 가마솥이나 냄비에 밥을 할 때 바닥에 밥이 눌어붙은 걸 지칭한다. 고소하고 묘한 단맛이 나기에 군것질거리가 많지 않던 1970년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별미로 먹었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룽지를 프라이팬에 구워 설탕이라도 조금 뿌리면 인기는 더 높아졌다. 어른들은 누룽지에 물을 붓고 푹 끓인 숭늉을 지금 사람들이 커피 마시듯 즐겼다. 요즘엔 일부러 밥에 열을 가해 누룽지를 만드는 가게도 있다. 옛 기억을 잊지 못하는 어르신들은 그렇게 만든 ‘21세기 스타일 누룽지’를 잔뜩 구입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과자처럼 먹거나, 식후 입가심용 숭늉으로 마시기도 한다고. 누룽지는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수분이 대폭 줄어들고, 적지 않은 양만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포만감이 생기기에 젊은 여성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누룽지의 쓰임새도 변하고 있는 모양. 한국인들의 ‘누룽지 사랑’을 알려주듯 사탕도 누룽지 맛이 나는 게 있고, 백미보다 건강에 좋다는 현미로 누룽지를 만들어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누룽지를 한국 사람만 먹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아직도 전기밥솥이 아닌 전근대적인 수단으로 솥에 불을 때서 쌀을 익혀 먹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 심지어 유럽 몇몇 나라 사람들도 누룽지를 즐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30

‘오미자’에 관해 우리가 궁금한 것들

보석처럼 붉은 조그만 열매. 매혹적인 빛깔과 여러 가지 효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오미자는 어떤 식물일까? 먼저 이 궁금증에 답해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산골짜기, 모가 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돌이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넓은 타원모양. 잎의 길이는 7∼10㎝, 너비 3∼5㎝로 가장자리에 작은 치아상의 톱니가 있다. 열매는 8~9월에 빨간색으로 익으며 둥글거나, 달걀 모양이다. 이 열매는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 가지의 맛을 낸다. 그 가운데서도 신맛이 가장 강하다. 한방에서는 약재로 이용된다. 대뇌신경을 흥분시키고 강장작용이 나타났으며, 호흡중독에도 작용한다. 또한, 심장활동을 도와 혈압을 조절하고, 간장의 대사를 촉진시키는 효과가 인정됐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차와 진액을 만들 수 있고, 각종 요리의 재료로 흔하게 사용되는 오미자가 건강에도 좋다면 그걸 먹지 않겠다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경북 문경은 오미자로 유명세를 탄 고장이다. 1993년에 야생 오미자를 이식해 재배 시험을 진행했고, 1996년엔 유휴산지에서 소득시범사업으로 오미자를 재배한 문경은 2006년 ‘오미자 산업특구’로 지정됐다. 전국 시장에 풀리는 오미자의 45% 이상이 문경에서 나온다. 오미자를 지역 특산물로 잘 키워왔기에 2013년엔 지역경제 활성화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문경에서 자라고 수확되는 질 좋은 오미자로 만드는 오미자청은 각지로 판매돼 ‘오미자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오미자청은 만들기 어렵지 않다. 흐르는 물에 씻어 이물질을 제거한 후 물기를 없애고 설탕이나 꿀에 버무린다. 이를 밀봉한 후 뚜껑을 덮어 공기를 차단한 다음엔 주 1회 정도 통을 잘 흔들어 준다. 직사광선을 피해 2~3개월 숙성하면 오미자청이 거의 완성된다. 이걸 잘 걸러 서늘한 곳에 두고 용도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는 게 요리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16

술도, 돼지고기도 맛있어진다...‘오미자의 마법’

오미자(五味子)를 재료로 만든 술을 처음 맛본 건 20대 초반 때다. 엄마를 대신해 생일상을 차려줄 정도로 터무니없이 날 귀여워했던 친구의 어머니는 곱상하고 귀티 나는 외모에 한식에서부터 양식, 일식까지 무엇이건 능수능란하게 차려내는 수준급 요리사이기도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50대 중반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재인박명(才人薄命). 다시 한 번 그녀의 명복을 빈다. 어쨌건 그 친구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1990년대 초반이다. 구멍가게에서 사간 맥주 한 박스를 다 비우고도 술이 모자랐던 우리는 주방 선반에서 매혹적인 빛깔을 뽐내는 담금주 한 병을 발견했다. 조그맣고 새빨간 열매가 독한 소주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망설일 것 있나? 주인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뚜껑부터 열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자다가 일어난 친구 어머니가 “아이고, 이놈들. 결국은 약하려고 만든 오미자주까지 너희들이 먹는구나. 그래 잘했다. 젊으니 한 말 술인들 못 마실까”라며 사람 좋게 웃어줬다. 기자와 친구도 도도한 취기 속에서 따라 웃었다. 새벽까지 통음한 그날 밤이 벌써 30년도 더 된 옛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오미자의 이름이 어째서 ‘오미자’인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오미자나무는 바위가 많은 산에서 자라는 덩굴성식물이다. 바로 여기서 열리는 열매가 오미자. 색깔은 다르지만 포도와 유사한 모양이기에 ‘붉은 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열매엔 달고, 쓰고, 시고, 맵고, 짠맛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다.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열매’라는 뜻에서 온 작명이 바로 오마자인 것. 한자를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터. 헌데,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감지해내는 절대미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쨌건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 사람들은 오미자나무를 재배했고, 그 열매를 따서 술을 담고, 차(茶)도 만들고, 설탕이나 꿀을 섞어 발효시킨 후 청으로도 먹었다. 병을 치료하는 한약재를 연구하는 ‘본초학(本草學)’에선 오미자의 효능에 관해 ‘쇠진한 몸을 완화시키고, 눈을 밝게 해주며, 신장을 데워준다. 여기에 더해 남성의 정기를 높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30여 년 전 친구 어머니가 “약에 쓰려고 담근 술”이라 말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주려고 정성껏 만들었을 귀한 술을 아들도 아닌, 아들 친구가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마셔버렸으니 마음속으론 밉지 않았을까? 너무 늦었지만 이 대목에선 용서를 구한다. 경상북도 문경은 이름난 오미자 생산지다. 오미자 열매는 초여름에 열리는데 그 시기에 맞춰 뻑적지근할 정도로 성대한 축제가 해마다 펼쳐진다. 취재를 위해 그 계절에 맞춰 두어 번 문경을 찾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문경 오미자 축제에 간 게 아마 7~8년 전쯤인 듯하다. 그곳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돼지불백 식당에 들렀다. 동료들과 함께였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리고 구워주는 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 맛은 유별났다. 잡내가 없었고 육질은 부드러웠다. 돼지고기 특유의 부들부들한 식감과 불에 익힌 단백질의 고소함, 과하지 않은 매운맛과 단맛이 근사하게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던 것. 기자들 서너 명의 논쟁이 시작됐다. “이건 돼지고기를 양념할 때 오미자청을 넣은 게 틀림없어” “아냐. 고추장을 만들 때부터 오마자를 재료로 사용한 것 같은데…” 운운하는. 정신없이 바쁜 식당 주인에게 “누구 말이 맞습니까?”라고 물어보기엔 미안했다. 사실 먹음직한 돼지불고기를 안주 삼아 오미자가 들어갔다는 핑크색 막걸리를 들이켜기에도 바빴고. 때마다 문경을 다녀올 때면 오미자청, 오미자차, 오미자 열매를 구입하곤 한다. 엄마는 오미자차를 즐겨 마셨고, 오미자청은 이런저런 볶음 요리의 재료로 사용했다. 지난해엔 오미자주도 만들었는데, 우리 집 거실에서 붉게 익어가는 그걸 다가오는 설에 마실 생각이다. 여전히 스물두어 살 때 친구 집에서 마셨던 그 맛일까? 궁금하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16

무침· 김밥·월남쌈까지…다채로운 ‘과메기 요리’

과메기의 재료가 되는 건 꽁치다. 한국의 재래시장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생선. 몸은 가늘고 길며 양턱은 돌출해 새 부리와 비슷하고, 아래턱이 위턱보다 긴 것이 특징이다. 등지느러미는 10~12줄, 뒤쪽에 곁지느러미 6~7개가 있다. 한류성 어류이며 우리나라 인근에선 5~8월쯤 알을 낳는다. 주된 먹이는 동물성 플랑크톤. 싱싱한 꽁치를 굽거나 김치를 넣어 함께 조린 요리는 누구나 좋아하는 반찬이고, 토막을 내 쪄서 통조림으로도 만든다. 꽁치를 반쯤 말려 먹는 게 바로 과메기다. 숙성 과정에서 감칠맛이 더해져 겨울철 별미로 손꼽히는 음식. 과거엔 꽁치나 청어를 반으로 가르지 않고 통째 말려 둘러앉은 식구들이 손으로 쭉쭉 찢어가며 먹었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추운 계절에 먹는 과메기는 천연 단백질 보충제 역학을 톡톡히 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과메기의 요리법도 다양해졌다. 마늘과 파를 넣어 미역이나 상추에 싸서 초장에 찍어 먹는 ‘클래식한 방식’ 외에도 과메기 섭취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과메기 무침은 푸릇푸릇한 미나리와 각종 양념을 더해 매콤하게 만든다. 입맛 없을 때 밥과 함께 먹으면 더없이 좋은 반찬이 된다. 과메기 김밥은 말 그대로 과메기로 속을 채운 스타일의 김밥이다.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잘 맞추면 괜찮은 일품요리가 된다는 것이 요리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취향에 맞는다면 라이스페이퍼에 과메기와 파프리카 등의 채소를 함께 싸먹는 월남쌈 형태의 요리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추장으로 얼큰하게 비벼낸 국수에 과메기를 섞어 ‘과메기 소면’을 즐기는 사람도 없지 않다고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02

‘귀한 손님’ 과메기와 함께 포항에 겨울이 왔다

세칭 ‘코로나19 사태’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던 2022년 여름이다. 어렵사리 섭외한 인터뷰를 몇 회에 걸쳐 진행했다. 10대 때부터 뱃일로 잔뼈가 굵은 80대 후반 어르신은 대게, 킹크랩, 오징어, 청어, 거기에 포경선을 타고 고래까지 잡으러 다녔던 이야기를 신명나게 들려줬다. 경상북도 포항 사람들의 겨울철 별미 ‘과메기’도 나와 어르신이 나눈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과메기의 유래에 관해선 원체 여러 가지 설(說)이 중구난방으로 떠도는 탓에 누구도 “이게 맞고, 저건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다. 여하튼 아래 그날 들었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옮긴다. “내가 젊을 땐 요 앞 동해에 청어와 꽁치가 넘쳐났다 아이가. 원체 싼 물고기라 그물에서 뗄 때도 신경 안 쓰고 ‘툴툴’ 아무렇게나 털었거든. 그라믄 어떻게 되겠나? 그물에서 튕겨나간 청어나 꽁치가 눈에 잘 안 띄는 배 갑판 구석이나 선장실 지붕에도 몇 마리 떨어질 것 아이겠나. 그 생선이 추운 날 밤에는 얼었다가, 해가 뜨면 녹았다가를 수차례 반복한다 아이가. 어느 날 선원 한 사람이 반쯤 건조된 그걸 먹어보고는 깜짝 놀란 거라. 생각 외로 맛이 꽤 좋았거든. 허허허.” 이상이 어르신이 주장하는 과메기 섭식의 출발점이다. 포항에서 생활한 지 10년. 이외에도 과메기의 유래에 관한 여러 건의 풍문을 거창한 ‘탄생 설화’처럼 들었다. 다 나름대로 일리 있고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그 출발이야 어찌됐건 과메기는 이제 포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음식이 됐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과메기 거의 대부분이 건조·숙성되는 구룡포엔 12월이면 말린 꽁치나 청어의 말랑한 식감을 느껴보려는 여행객들이 왁자지껄 몰려든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포항엔 과메기를 안주로 내세운 주점이 적지 않다. 사람에 따라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혹자는 물미역에 과메기 한 점을 넣고 채 썬 마늘과 파를 올린 ‘삼합 스타일’을 최고라 하고, 어떤 이는 산양삼 한 뿌리를 곁들여 먹는 것으로 과메기의 고급화를 도모한다. 드물게는 “과메기는 아무 것도 더하지 않고 본연을 맛을 즐겨야한다”며 말린 꽁치만을 먹기 좋게 찢어 입에 넣는 모주꾼도 존재한다. 관목어(貫目魚)라는 단어가 있다. 예전 과메기는 청어의 눈에 꼬챙이를 꽂아 그을음 피어오르는 재래식 부엌에서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뚫을 관(貫), 눈 목(目), 고기 어(魚)자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청어를 말려 먹은 건 수백 년 전에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이규경의 책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엔 ‘연관목(燃貫目)’이 등장한다. 눈을 뚫은 생선은 청어고, 연기를 사용해 부패를 더디게 했다는 제조 방식까지 드러나고 있는 것. 야담(野談)이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水軍)들은 일본과의 전투 이상으로 ‘청어잡이’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당시 바다엔 엄청난 양의 청어가 서식했다. 그걸 잡아 병사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피난민에게도 나눠 주고, 잡힌 생선의 일부는 팔아서 칼과 창, 화약 등의 무기를 구입했다고. 그러니 16세기 조선 수군은 해군과 어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고난 속에서 살았다고 해야 할까? 세월이 흘렀다. 직접 청어나 꽁치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돈만 주면 집에 앉아서 과메기를 먹을 수 있는 21세기가 왔다. 포항엔 과메기와 함께 쌈채소, 물미역, 초장까지를 깔끔하게 포장해 주문 다음날이면 집까지 가져다주는 업체가 흔전만전이다. 지난 주말 저녁. 올해 첫 과메기를 친구와 함께 먹었다. 16가지 재료를 배합해 만든다는 ‘비법 초장’이 맛있는 가게였다. 이건 빼먹은 이야긴데 과메기의 맛은 찍어 먹는 초장에 좌우되기도 한다. 비법 초장 듬뿍 찍은 과메기를 안주로 소주 한 병쯤을 달게 비우고 나니 동해에 겨울이 왔다는 게 실감으로 느껴졌다. 그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시절을 떠올리며 찬바람 부는 영일대 해변을 오래 산책했다. 어디선가 청어 비린내가 풍겨온 듯도 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02

오징어?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잡히는 개체수가 많을 때는 군대나 학교의 단체급식 반찬으로도 흔하게 올랐다. 국을 끓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채소와 함께 고추장 양념에 볶아도 인기가 좋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에도 ‘오징어OO’이란 이름이 붙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시기가 되면 동해엔 환하게 불 밝힌 집어등(集魚燈)을 매단 어선이 수백 척 떠다녔다. 오징어는 빛을 발견하면 모여드는 성질을 가졌기에 그런 어획 방식이 사용됐다. 바다 위에서 빛나는 집어등 불빛이 인공위성에서도 관찰될 정도였다. 지금은 어획량이 줄어 이전처럼 ‘심심풀이’로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된 오징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냉동된 오징어를 해동해 끓는 물에 데쳐 먹는 숙회는 오래전부터 주당들이 즐기는 안주였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오징어를 칼질 솜씨 좋은 횟집 주인이 썰어낸 산오징회는 식감이 일품이다. 몸통이 아닌 다리는 기름에 튀겨 고소하게 먹는다. 무, 파, 마늘 등을 넣어 칼칼하게 무치면 그 또한 색다른 맛을 낸다. 달콤짭짤하게 볶아낸 오징어는 아이들이 너나없이 좋아하고, 삼겹살과 함께 철판에 구워먹는 오삼불고기도 소박한 주점의 인기 메뉴 중 하나다. 오징어순대와 오징어 버터구이 역시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많은 한국인들이 땅콩과 곁들여 먹는 마른오징어.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미권 국가에선 이걸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를 구울 때 나는 냄새를 끔찍스럽게 여기는 탓이라고. 그럼에도 유럽 대다수 나라는 우리처럼 오징어 요리를 즐긴다. 남부 유럽 사람들은 오징어에 올리브유를 발라 구워 먹고, 오징어 먹물을 파스타에 넣기도 하는 것. 이처럼 오징어는 몇몇 국가를 제외한 동서양 모두에서 사랑받는 식재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8

그 섬에서 ‘오징어내장탕’을 먹어봤더니…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1980~1990년대 대학생들은 캠퍼스 잔디밭에서 곧잘 술판을 벌이곤 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인이던 사람들이 권력을 탈취해 권위적인 공포 통치를 이어가던 끝 무렵. 머리칼조차 마음대로 기를 수 없는 경직된 고교 시절을 보낸 학생들은 대학 입학의 해방감과 거기서 느끼는 자유를 ‘대낮 만취’라는, 어른들이 보기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끽하곤 했다. 그들 대부분이 철없던 스무 살 시절이었으니 있을 수 있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막걸리를 마실 때면 과자 부스러기가 안주였고, 소주를 마실라치면 마른오징어 한두 마리가 신문지를 깐 잔디밭 위에 놓였다. 쫄깃한 식감과 짭짤 고소한 맛의 오징어 한국인이라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호오(好惡)가 거의 갈리지 않는 식재료 울릉 별미 중 기억에 남은 ‘오징어내장탕’ 하얀 내장·콩나물 등 넣어 맑게 끓인 탕 혀 위로 부드럽게 녹아들던 내장이 생생 취기가 오르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 속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라는 염세적인 노래를 부르는 애들이 있었고, 또 다른 쪽에선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라는 비장한 가사가 들려오기도 했다. 어쨌건 그 시절엔 오징어가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을 만큼 값싼 안주였다. 많지 않은 아버지의 월급으로 내핍하며 살림하던 엄마도 냉동오징어 정도는 넉넉하게 사서 숙회를 만들거나, 찌개나 국을 한 냄비 가득 끓여 밥상 위에 올리곤 했으니까. 그때 학교를 다니던 세대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살아있는 오징어를 재빠른 칼질로 썰어낸 산오징어회와 따끈한 내장과 먹물까지 맛볼 수 있는 통오징어찜도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들 역시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의 만만한 안주 역할을 했다. 오징어는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과 짭짤하고 고소한 맛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렇기에 호오(好惡)가 거의 갈리지 않는 식재료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라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가릴 것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된 오징어를 즐겨 먹는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징어의 어획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바다 오염과 기후 변화가 이유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중국 어선들의 싹쓸이 조업으로 씨가 말랐다”는 말도 들려왔다. 실제로 그랬다. 몇 해 전 특정한 기간엔 산오징어회의 가격이 고가로 이름 높은 돌돔회 시세에 육박했다. 말린 오징어 한 축이 쌀 한 가마니 가격을 위협하던 때도 있었다. 오징어 값은 요즘에도 등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비싸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오징어 좋아하는 이들에겐 ‘굿 뉴스’가 분명하다. 동해가 지척인 도시 포항에서 생활하는 기자와 동료들은 가까운 어시장이나 해변에 즐비한 횟집에서 가끔 오징어물회를 맛보고 있다. 다른 어떤 생선으로 만든 물회보다 감칠맛이 좋다. ‘오징어’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쌍둥이 형제처럼 같이 떠오르는 섬이 있으니 바로 ‘울릉도’다. 55년을 살아오며 울릉도는 딱 한 번 가봤다. 울릉도 해안 일주도로가 완공된 2019년이었고, 버스를 이용해 울릉도를 한 바퀴 돌아본 후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취재를 마친 후 이틀쯤 더 울릉도에 머물렀다. 그때 따개비밥과 약소불고기를 시작으로 어지간한 울릉도 별미는 대부분 맛봤으니 운이 좋았다. 그 기간 먹어본 울릉도 음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오징어내장탕’. “내장을 많이 넣어 끓여야 제맛이 나기에 1인분은 만들기 어렵다”는 식당 주인을 억지로 구슬려 먹었던 요리. 하얀 오징어 내장과 콩나물, 무, 애호박 등을 넣어 맑게 끓인 탕이었다. 맛은 어땠냐고? 식당 주인의 말이 맞았다. 애초 기대했던 구수함과 눅진함은 없었다. 전문가의 말은 틀리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그럼에도 오징어의 내장이 혀 위로 부드럽게 녹아들던 느낌은 생생하다. 만약 다시 한 번 울릉도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친구들 여러 명과 동행해 내장이 듬뿍 들어간 제대로 된 오징어내장탕을 먹어보고 싶다. 2019년에 맛본 것과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진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8

트럼프, 치즈버거, 그리고 경주 돼지찌개

지난 10월 말. 경상북도 경주가 시끌벅적했다. 21세기 ‘지구 위 최강 2개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최고 권력자 도널드 트럼프와 시진핑(習近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라의 옛 도읍인 서라벌을 찾았다. 그들의 전용기가 착륙한 김해공항에서부터의 비까번쩍한 의전과 그들이 머문 경주 보문단지 숙소 주변 경호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유명인사가 왔다 가면 무성한 뒷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남는다.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경주를 찾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특별하게 수억 원대의 금을 사용해 제작된 신라 금관 모형과 무궁화대훈장을 선물 받고 입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난달 APEC 정상회의 참석 트럼프 ‘k-푸드’와 한국 스타일 별미 지천인데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 요청 안강엔 엄지척 돼지고기찌개 맛집 2곳 진미 맛볼 기회 영영 놓친 듯 안타까워 대부분이 짐작하듯 트럼프는 세계 어느 국가의 통치자보다 ‘이익’을 국제관계의 주요 잣대로 판단하는 인간. 어쨌건 이런 딱딱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경주 APEC 회의에선 트럼프의 ‘욕심 없고 저렴한’ 음식 취향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국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그는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단다. “채소는 따로, 베이컨은 빼고, 토마토케첩 많이”라는 구체적 요구까지 비서실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문이다. 한국에선 판매되지 않기에 곁들일 콜라는 미국에서부터 공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햄버거에 콜라…. 가진 재산을 헤아리기도 힘든 사람의 음식 취향치고는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시간이 흘러 트럼프가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때, 그는 한국 경주와 거기서 열렸던 APEC을 늘상 즐기던 ‘치즈버거’를 재차 먹었던 도시로 기억할까? 만약 그렇다면 딱하기 그지없다. 경주는 이른바 ‘k-푸드’와 한국 스타일의 별미가 지천인 도시인데. 생각해보자. 제 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총리도 결국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이 사는 공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그게 전용기를 사용한 국빈 방문이건, 좁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한 가난한 사람의 해외여행이건-을 떠나는 건 도착한 여행지의 낯선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느 곳이라 특정할 것 없다. 신문사의 사진기자는 이른바 ‘맛집’을 많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을 1년 365일 떠돌아다니며 혼자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사진기자는 북쪽으론 영주와 안동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경주와 포항, 때로는 푸른 물결 출렁이는 먼 섬 울릉도까지를 오간다. 직업이 그러니 어떤 곳을 지목해 “거긴 가기 싫다”고 말할 방법도 없다. 30년 가까이 경상북도 일대 사진을 찍으러 다닌 사진기자 한 명을 알고 있다. 그가 경주를 수백 번 오갔을 건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일 터. 그가 소개한 ‘숨겨진 경주 맛집’이 몇 곳 있다. 쫄면을 파는 저렴한 분식집에서부터 석쇠에 일등급 한우를 구워주는 제법 비싼 식당까지 프리즘이 넓었다. 가격을 불문하고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곳은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돼지고기는 닭고기와 더불어 동서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육류의 수위(首位)를 다툰다. 닭고기와 달리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돼지고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각종 요리 재료로 사용된 식용 고기일 터. 17세기 초반에 출간된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돼지고기가 ‘신장의 음을 보하고 위액을 충족시키며 간장의 음혈을 보하는 작용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보편의 상식과 달리 적당한 양을 먹는다면 몸에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소고기에 비해 가격도 헐하다.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이 즐기는 이유가 있다. 지척이라 불러도 좋을 거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경주 안강의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군데. 한 곳은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넣은 붉은빛으로 매운 맛을 좋아하는 이들의 혀를 유혹하고, 나머지 한 곳 식당은 얼핏 보기엔 맹물 같은 육수를 넣어 맑은 색깔의 독특함을 유지한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돼지고기와 채소 몇 가지를 넣은 찌개가 ‘놀라운 맛’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 돈 10달러 안팎의 싼 가격으로 맛보는 경주 안강읍의 돼지고기찌개는 각별하다. 낮과 밤 언제 먹어도 소주를 부르는 별미다. 만약 이걸 트럼프가 맛봤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좋아했던 형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다가 죽었고, 그런 이유로 트럼프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들과 손자에게도 금주를 금과옥조처럼 강조한단다. 반주 없는 돼지찌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만에 하나 다시 경주를 오더라도 트럼프의 선택은 돼지고기찌개가 아닌 치즈버거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경주의 애주가들은 이렇게 말할 듯하다. “안타깝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외국인들은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뜨거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삼겹살. 다수의 한국인들이 군침을 흘리게 되는 장면이다. 노릇노릇 잘 익은 삼겹살에 고추와 마늘, 쌈장을 넣어 상추에 싸먹는 방식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매혹시켰다. 당연지사 ‘삼겹살 쌈’은 손꼽히는 K-푸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시인 하재봉은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 잔하며 직장 상사 욕하는 재미에 회사 다닌다’는 내용을 담은 시까지 섰다. 이처럼 삼겹살 구이는 서민들의 가장 만만한 술안주이기도 하다. 삼겹살만이 아니다. 한국엔 돼지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요리가 많다. 돼지 다리를 각종 약재를 넣어 삶아낸 쫄깃한 족발, 구이보다 기름기가 적어 담백한 수육, 내장을 매운 양념에 볶아먹는 곱창구이 등등. 그렇다면 외국에선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독일 사람들은 돼지 다리를 오븐에 오랜 시간 익혀 먹는 ‘슈바인스학세’를 즐긴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이 맥주에 잘 어울리기에 독일을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맛보게 된다고. 이탈리아에서는 향신료와 소금을 바른 돼지고기를 일정한 온도와 습도에서 숙성시킨 ‘카포콜로’를 피자 위에 토핑으로 올리기도 한다. 독특한 향과 식감 탓에 호오는 갈리는 편이다. 돼지고기 어깨살을 결대로 찢은 ‘풀드 포크’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로 먹는다. 고기만 먹기도 하지만, 빵 사이에 넣어 먹는 방식이 보편적이다. 중국 또한 찌고, 굽고, 삶고, 튀기는 등 돼지고기 요리의 방식이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영양엔 고기보다 맛있는 ‘그것’이 있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에서 필체 좋기로 으뜸을 다툰 이가 있다. 한호(韓濩·한석봉)다.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풍류묵객 다수가 그러했듯 술을 어지간히도 좋아했던 모양. 한호는 종장(終章)이 근사한 시조 한 수를 남겼는데, 1980년대엔 그게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그 시절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기자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런 노래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16세기 말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조를 21세기 방식으로 다시 써보면 재밌을 듯하다. 대리석 바닥 깔린 근사한 살롱이 아니라도 좋다. 휘황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없으면 또 어떠랴. 보시게, 여기 산나물 한 접시에 탁주 한 병 가져오게나. 경상북도 영양군은 시인 조지훈과 소설가 이문열을 낳은 문향(文鄕)이다. 산이 깊고 골짜기마다 철따라 화사한 꽃이 피는 곳. 사람들에겐 알싸하고 달달한 고추의 산지로 유명한 영양엔 그럴듯한 산나물 식당이 몇 곳 있다. 군(郡)의 이름을 걸고 산나물축제가 열릴 만큼 이런저런 나물이 흔한 영양군에 처음 간 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이다. 동행한 둘은 당시 모두 예순을 넘긴 사람들. 서울에서 출발해 먼 길을 가느라 점심을 시원찮게 먹은 기자는 저녁엔 소고기 구워 선배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고급 양주를 마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선배들이 문을 밀고 들어간 식당은 산채(山菜)를 파는 곳이었다. 연이어 기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주문을 했다. “여기 산채정식 3인분에 막걸리 하나 주시오.” 식탁 위엔 열 가지는 분명 넘고, 아니 스무 가지도 넘는 온갖 나물에 된장찌개와 밥이 놓였다. 그 많은 나물 중 기자가 이름을 아는 건 겨우 고사리와 도라지 정도. ‘풀 반찬’을 싫어하는 얼굴은 찡그려졌지만, 그와 별개로 놀라움이 성큼 다가왔다. 세상에 사람이 먹는 나물이 그처럼 많다는 걸 그날 알게됐으니. 한국인, 그 가운데서도 나이 지긋한 이들의 ‘나물 사랑’은 대단하다. 유명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늘그막의 미당 서정주(시인)는 두릅을 먹기 위해 봄을 기다렸고, 노년의 정치인 김영삼의 아침상엔 언제나 시래깃국과 나물 한두 가지가 반찬으로 올랐다고 한다.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의 동물적 감각과 축적된 경험에서 오는 선별법은 기가 막힌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린 수백, 수천 가지의 풀 가운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 뜯어서 즉시 먹는 것과 데쳐서 말려 먹는 것, 약이 되는 식물과 독초를 신묘하게 가려낸다. 살아생전 기자의 외조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고 모친에게 들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등의 고문헌엔 약용 나물과 독초의 구별법, 철 따라 나오는 산채의 종류 따위가 기록돼 있다. 그러니, 우리가 나물을 상식(常食)한 건 아주 오래고 오래된 옛날부터가 아닐지. 시계를 2년 전 봄으로 돌린다. 두 번째로 영양군을 찾았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영양이 고향인 한 살 많은 선배가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이끌었다. 1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산채가 맛있다는 밥집 가운데 하나였다. 세월이 흘러서였을까? 나이를 더 먹어서였을까? 그날 맛본 곰취와 방풍나물, 씀바귀와 당귀는 향이 좋았고 식감 또한 독특했다.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 점심을 달게 먹고 이런 혼잣말을 했다. ‘육식주의자를 자처한 내가 지천명을 넘어 이순에 가까워지니 산채를 안주로 박주 마시는 즐거움을 알게 됐구나. 역시 사람의 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따끈한 밥에 향긋한 나물, 한국인의 소울푸드

한국인의 밥상에서 나물을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 팥소 없는 찐빵, 신랑과 신부 없는 결혼식이 돼버리지 않을까? 김 오르는 따끈한 밥에 고소한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무친 각종 나물을 함께 먹는 건 수백 년 이어져온 우리네 섭식 형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새’라고도 부르는 나물은 콩나물 등의 채소나 산마늘 등의 산채, 또는 야생초를 삶아 만든 것을 조미료와 기름에 버무린 것을 지칭한다. 채취하여 데치고, 양념에 뒤섞는 나물 조리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철마다 찾아낼 수 있는 재료가 원체 다양하기에 한국엔 수백 종의 나물이 존재한다. 채소의 재배와 채집이 힘든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나물을 삶아 말리는 방식도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를 ‘묵나물’이라 부른다. 채소만이 아니라 야생초, 나뭇잎, 식물 뿌리 중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양념한 것도 일종의 나물로 분류된다. 쌀의 수확량이 적었던 시기. 봄이 되면 산이나 들에서 채취한 산나물로 밥을 대신했던 춘궁기도 있었다. 이를 기억하는 70~80대 어르신들은 모든 것이 풍족해진 요즘도 그때 먹던 나물 맛을 잊지 못하며 추억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나물은 한반도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식을 금하는 불교의 본격적 유입 이후 나물이 중요한 반찬으로 정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나물은 건강에도 이롭다. 한국임업진흥원의 설명을 아래 옮긴다. “현대인은 육식, 술, 담배 등을 즐기면서 체질이 산성화되고 있다. 산성체질은 여러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산나물은 알칼리성으로 이를 섭취하면 산성인 체질이 알칼리성이 되도록 도와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대게와 함께 털게와 왕게도 별미

바람이 차갑고 바다도 차가워지는 겨울은 각종 ‘게’가 맛있어지는 계절이다. 곧 다가올 겨울. 얼어붙은 어시장 거리에서 게를 찌는 찜통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김 앞을 지날 때면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돈다. 겨울철 귀한 별미 중 으뜸은 대게라 하겠지만, 털게와 킹크랩으로 불리는 왕게도 여러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만드는 각별한 맛을 지녔다. 한국에선 게의 다리 살은 물론 몸통 살도 꼼꼼하게 발라먹고, 내장까지 볶음밥에 넣어 먹는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선 다리만 잘라내고 몸통은 버린다. 게 내장의 녹진한 맛을 즐기는 이들이 본다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듯하다. 영덕, 울진, 포항 등에서 주로 유통되는 대게는 높은 인기 탓에 금어기 때는 러시아 등지에서 수입해 판매한다.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등 북태평양에서 서식하는 털게는 진흙이나 모래 바닥에서 활동한다. 한국의 경우엔 고성 부근 동해 북측에서 주로 잡힌다. 털게 역시 달달하고 구수한 맛으로 유명하다. 살이 많고 향이 좋은데다가 내장 맛이 일품이지만, 어획량이 적어 가격이 만만찮다. 계절에 따라서는 비싼 박달대게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2000년대 초반 금강산을 여행하며 맛본 털게 맛을 기자는 아직 잊지 못했다. 통상 킹크랩이라 불리는 왕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계절의 별미다. 알루샨 열도, 알래스카, 극동 러시아, 일본 북부에서 서식하기에 우리가 먹는 왕게의 거의 전부는 수입산이라 생각하면 된다. ‘왕게’라는 이름값을 하듯 평균 무게가 3kg을 넘나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성큼’ 동해안 대게가 살찌는 겨울이 다가온다

동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경북 바다 ‘최고의 별미’인 대게의 계절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리를 쭉 펴면 가로 길이가 60~70cm를 넘나드는 대게. 경상북도 울진과 영덕, 포항 구룡포는 물론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서까지 ‘비싸지만 귀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로 대접받는 대게는 다른 갑각류에 비해 몸피가 크다. 그래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게’는 커다란 크기 탓에 대게라고 불린다고 착각한다. 한자인 대(大)가 ‘게’자(字) 앞에 쓰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건 틀렸다. 먼저 이것부터 수정하고 가자. 대게는 길쭉한 다리가 대나무의 마디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대게 앞에 붙는 ‘대’자는 ‘클 대’자가 아닌 ‘대나무 죽(竹)자’다. 허니, 대게를 ‘죽게’라 불러도 “그건 틀렸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도 대게와 유사한 것들이 잡힌다. 푸른 눈동자와 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쪽 어부들은 대게를 ‘스노우 크랩(Snow crab)’이라 칭한다. 눈보라 치는 차가운 바다에서 잡히는 게라는 뜻일 터. 알다시피 한국의 동쪽 바다도 물이 차갑다. 대나무 마디 닮은 다리에서 비롯된 명칭 박달대게·털게·왕게 등 통통한 속살 가득 회·찜·굽기 등 다양하게 조리…맛 일품 상인들 “대게는 찜이 최고∼” 한목소리 21세기 한국엔 부자가 적지 않다. 아직은 다수가 아니겠지만 “그게 맛만 있다면 나는 먹는데 돈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 호언하는 자칭 미식가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간다. 대게로 만든 요리 중 값싼 건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 ‘혀에 감기는 비싼 별미’가 대게니까. 움직임이 활발하고 살이 단단해 ‘박달대게’라 불리는 건 다리에 원산지 표시를 매달아 한 마리에 20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서민이 자주 맛볼 수 있는 가격은 아니다. 어쨌건 경북 동해안 일대엔 대게를 회치거나, 찌거나, 굽거나, 이런저런 채소를 더해 끓인 요리를 파는 식당이 흔하다.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가게 앞엔 겨울철 주말마다 관광객이 만들어내는 긴 줄이 생겨나기도 한다. 도로변에 서서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어서 우리 가게로 오세요”라며 손을 흔드는 호객 행위도 만만찮다. 맛있는 걸 감각하는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걸까? 대게는 고려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도 감탄하며 먹었다고 전해진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의 스승이기도 했던 점잖은 대학자가 겨울날 거친 물결치는 바다에서 아랫것들이 잡아온 대게의 다리를 들고 ‘쪽쪽~’ 고소한 속살을 빨아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이색은 대게를 소재로 시(詩)까지 썼다. 그의 작품 ‘잔생(殘生)’은 ‘서쪽 바다 등 푸른 생선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나, 동해의 대게는 어지간해선 맛보기 어렵구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맞다. 동서고금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게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주자학의 대가(大家)라 할지라도. 이색의 경우엔 ‘대가’가 ‘대게’를 먹었으니 책할 이들도 없을 듯하다. 700여 년 전 고려 시대에 잡힌 대게는 21세기 대게와 맛이 달랐을까? 기자도 궁금하고, 우리 모두 궁금하다. 여러 방식으로 조리가 가능한 대게지만, 수십 년 이상 대게 요리를 손님들에게 대접해온 경북 동해안 식당 주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대게 찜이 최고”라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더 맛있게 찔 수 있을까? 아래 30년째 대게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에게 얻어낸 답을 살짝 공개한다. 집에서 찜통 위에 대게를 올릴 때 참고하시기를. “일단 솥에 담을 때 대게가 물에 닿지 않게 하세요. 끓는 물과 대게가 직접 닿으면 물기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내장이 흘러버리니까요. 고구마를 찔 때처럼 대게를 올린 채반과 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쪄야 보다 맛있게 됩니다. 1kg짜리 대게를 찌는 시간은 20~25분이 적당해요. 배가 위로 향하게 해서 쪄야 하는 걸 절대 잊지 마시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외국에선 어떤 닭 요리를 먹을까

한국은 닭을 맛있게 요리하는 나라다. 몇 해 전부턴 세칭 ‘K-푸드’의 하나로 조각내 튀긴 닭에 매콤달콤한 양념을 바른 게 지목됐고,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서울과 부산, 경주와 제주에서 그걸 맛보며 만족해하는 모습이 TV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 몇 개 도시엔 최근 들어 한국식 양념통닭을 판매하는 식당이 생겨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닭은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 어느 곳에서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다. 그렇기에 동서양을 불문하고 다양한 닭 요리는 수백 년 전부터 있어 왔다. 일본의 닭튀김인 ‘가라아게’는 한국에도 안주로 판매하는 주점이 적지 않고, 중국 남부에서는 오래전부터 닭고기에 팔각, 육두구, 생강 등의 향신료를 더해 ‘자지가이(炸子雞)’를 만들어 먹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이 많은 인도네시아도 닭을 통째 튀겨 ‘아얌 고렝’이라 부르며 맛있게 먹는다. 당연하게도 대다수의 이슬람 국가는 닭고기의 주요 소비국이다. 닭 날개를 매운 후추 소스에 발라 튀긴 ‘버펄로 윙’은 미국에서 시작된 요리로 알려졌고, 인도는 각종 향신료와 버터를 넣어 오랜 시간 끓인 닭 스튜를 즐긴다. 붉고 선명한 토마토의 주요 생산지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에선 ‘토마토 닭조림’을 만들고, 이건 유럽인들에게 익숙한 음식이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코코뱅, 필리핀의 아도보(Adobo) 역시 닭을 재료로 만들어지는 요리. 앞으로는 또 어떤 새로운 닭 요리가 만들어져 사람들의 미각을 유혹할지 궁금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1

청도 별미 ‘옹치기’를 아시나요?

몇 해 전이다. 고색창연한 운문사 풍광이 좋고, 끈적끈적 달콤한 반시가 혀를 녹이는 경북 청도에 갔다. 군청 직원을 만나 물어볼 게 있었다. 일 때문에 갔고, 급히 돌아와야 했으나 점심을 굶을 수는 없는 노릇.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행위가 다 먹고살자고 버둥대는 짓인데. 옹그리고 있는 닭에서 비롯된 ‘옹치기’ 맹물에 삶은 닭을 간장 양념으로 조려 찜닭과 비슷하지만 당면은 넣지 않아 청도 방문땐 ‘옹치기 조림닭’ 맛보길 청도군청 직원에게 물었다. “점심때가 좀 지나긴 했는데, 어디 괜찮은 식당 없나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옆 자리 동료를 힐끗 보며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옹치기가 좋겠지?” 처음에는 옥호(屋號)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란다. 음식 이름이라고 했다. 50년 넘게 살아오며 먹어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음식이다. 궁금증이 일었으니 당연지사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옹치기? 그게 뭔데요?” 흔한 재료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어의 지느러미나 거위의 간, 이탈리아 특정 지역에서 채취한 송로버섯 등은 이미 재료의 희귀성과 이름값만으로도 만들어질 요리에 관한 기대치를 높인다. 그리고, 솔직히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면 비단 일류 셰프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듯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정성 들여 잘 기른 한우나 일본 와규가 숯불에 구워도 맛있고, 가스불에 구워도 근사한 맛을 내는 것처럼. 이야기가 멀리 갔다. 다시 청도군청으로 돌아가자. 옹치기가 뭔지 묻는 우리 일행에게 돌아온 대답은 “안동찜닭하고 비슷한데,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다”였다. 주인장에게 요리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가 뭔지 물어보려면 가볼 수밖에 없었다. 군청 공무원과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다행히 ‘옹치기’를 파는 식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닭은 지구 위에서 가장 흔해빠진 식재료 중 하나다. 어느 정도냐? 최근 조사에 의하면 1년 동안 도축돼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닭은 약 600억 마리. 한국에서만 1억2천만 마리가 넘는다. 길러서 잡아먹기까지 걸리는 기간도 짧아서 1~2개월이면 충분하다. 종교적 금기 탓에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힌두교도는 소고기를 안 먹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 닭고기는 사양하지 않는다. 육식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 아닌가. 2005년 초여름엔 인도를 한 달쯤 돌아다녔고, 2011년 5월엔 이란을 17일간 여행했다. 알다시피 인도는 힌두교도가, 이란은 시아파 무슬림이 국민의 절대다수다. 그랬기에 인도에선 소고기구이 식당을 보지 못했고, 이란 사람들은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즐긴다”는 기자의 말에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지사 이란엔 삼겹살집이 없다. 그래서였다. 누구보다 육식을 좋아하는 기자는 ‘꿩 대신 닭’ 아니, ‘소·돼지 대신 닭’이란 심정으로 인도에서도 이란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닭고기를 먹었다. 한국과 비슷하게 두 나라 모두 닭 요리법이 다양했다. 기름에 튀기고, 큰 솥에 삶고, 탄두르(tandoor)라는 화덕에 굽고, 걸쭉한 양념을 더해 졸이고…. 맛은 어땠냐고? 예상대로 한국 닭 요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옹치기’라는 이름이 왜 생겼는지 말해줄 때가 됐다. 예상과는 달리 특별하고 유별난 사연을 가진 호칭은 아니었다. 식당 주인이 어느 날 털이 벗겨진 채 ‘옹그리고 있는’ 닭을 봤고, 그게 식당 메인 메뉴의 이름인 ‘옹치기’로 바뀌었다고 했다. 맹물에 한 번 삶아낸 닭고기에 간장을 베이스로 만든 양념과 육수를 넣고 바특하게 조려낸 옹치기. 기억에 남을 대단한 맛은 아니었으나, 다시 청도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더 들르고 싶을 정도의 맛이라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중세 사파비 왕조의 고도(古都) 이스파한을 잇는 고속도로엔 몇 개의 휴게소가 있다. 그 휴게소 가운데 한 곳에서 페르시아 스타일로 요리한 ‘닭다리 조림’을 먹은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청도의 별미 ‘옹치기’와 너무나 비슷한 맛이었다. 맞다. 닭고기라는 같은 재료로 ‘사람이 만들어 사람이 먹는 음식’이 달라봐야 뭐가 얼마나 다르겠는가. 아주 먼 옛날에도 신라 사람들은 페르시아까지 걸어서 가곤 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1

마늘, 장구한 역사의 식재료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있었다. 열망을 이루기 위해 신(神) 앞에서 읍소했다. “100일간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고 마늘과 쑥만 먹는다고 약속해라.” 신의 주문이었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동굴을 나갔고, 곰은 약속한 기간을 지켜 사람이 됐다. 그 사람이 된 곰이 낳은 것이 단군이다. 위는 한국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단군신화’의 줄거리. 여기에 ‘마늘’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 민족이 까마득한 옛날부터 마늘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닐지. 한국만이 아니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마늘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의 주요한 먹을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던 고대 이집트에선 육체적으로 힘겨운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마늘과 양파를 먹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먼 옛날 그리스에선 마늘을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마늘. 한국에선 2가지 종류의 마늘이 재배되는데 중국에서 유입된 한지형과 스페인에서 온 난지형이 그것들이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김치, 각종 국과 찌개, 무침 등을 만들 때 마늘을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제주도 사람들은 마늘의 여린 잎을 간장에 담근 ‘마농지’도 즐겨 먹는다. 마늘은 스태미나 증강에도 사용됐다. 고대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에겐 빼놓지 않고 마늘을 먹였다. 항암과 고혈압,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전해진다. 마늘의 최대 생산지는 중국이다. 지구 위에서 생산되는 마늘의 78%를 중국이 재배한다. 한국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 마늘을 좋아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재배지가 줄어들고 있다. 값싼 중국산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탓이 아닐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14

의성 맛집들의 비결은 바로 ‘이것’

2019년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인 9월이었다. 지금은 여러 구설수와 논란에 휩싸여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처지가 됐지만, 그때는 백종원의 위상이 ‘요식업계 황제’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보통의 시청자가 보기엔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TV 출연이 잦았고, 그가 언급하거나 찾아간 식당은 당장 매출액에 0이 몇 개 더 붙을 정도로 손님들이 밀려들었으니. 마늘닭, 기름에 튀긴 특유의 느끼함 없이 미묘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마늘의 풍미 입과 더불어 코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줘 석쇠에 구운 소고기 옆에는 마늘 한 접시 누구랄 것도 없이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소고기 한 점에 마늘 한 쪽을 더해 ‘꿀꺽’ 의성은 한국서 손꼽는 ‘맛있는 마늘’ 산지 경상북도 의성. 튀긴 닭에 양념을 해서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백종원이 다녀간 곳이었다. 시골의 여느 식당과 다르지 않은 입구와 실내. 문은 열려있는데 주인장이 없었다. 가게 안 구석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기에 통화를 했다. “곧 갈 테니 10분만 기다려요”란다. 긴 시간이 아니니 “네 천천히 오세요”라고 답했고. 잠시 후 나타난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뚝딱뚝딱 자른 닭을 기름솥에 튀겨 꺼낸 후 불그스레한 양념을 꺼내왔다. ‘훅~’하고 풍겨오는 알싸한 마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념에 들어간 마늘의 엄청난 양이 짐작되는 순간이었다. 옥호(屋號)가 ‘양념통닭’이 아닌 ‘마늘닭’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짐짓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백종원이 이 마늘양념에 반했나봐요?” 기대와 달리 자랑이 아닌 심상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 양반? 뭘 엄청나게 아는 척 하던데, 자기가 닭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어.” 오랜 세월 닭을 고르고 만지고 튀겨내고, 거기에 어떤 양념이 어울리는지 수십 년 골똘하게 고민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프라이드였을까? ‘의성 마늘닭집’ 주인의 말에선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런 자긍이라면 까짓 백종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사 고든 램지(Gordon Ramsay)도 우습게 보일 듯했다. “닭튀김이라면 내가 너보다 훨씬 잘 알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유명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날 맛본 마늘닭은 기름에 튀긴 음식 특유의 느끼함이 없었고, 자극적이지만 미묘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마늘의 풍미가 입과 더불어 코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영어로는 갈릭(Garlic)이라 부르고, 중국인들은 산(蒜)이라 쓰는 마늘의 역사는 유구하다. 드라마틱한 소설처럼 재밌는 역사책 ‘삼국유사’에서도 곰과 마늘에 얽힌 토픽이 확인된다. 이 책은 자그마치 800여 년 전인 고려왕조 말기에 승려 일연(1206~1289)이 쓴 것이다. 더 멀리 가보자.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파라오(Pharaoh)가 지배하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도 ‘건강하려면 마늘을 먹어야 한다’는 문장이 등장할 정도. 점심으로 ‘마늘닭’을 먹은 그날. 저녁은 의성군에서 유명하다고 이름난 소고기구이집에 갔다. 채식주의자라면 치를 떨 일이겠으나, 기자는 ‘육식주의자’에 가깝고, 다행히 일행 중에도 베지테리언이 없었으니. 듣기로 의성에서 식용으로 키우는 소에겐 마늘을 먹인다고 했다. ‘얼마나 지천이면 사람 먹는 마늘을 소에게까지 먹일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헌데, 그런 생각은 의성군 재래시장마다 주렁주렁 널려있는 수천 접 마늘을 보며 사라졌다. 의성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맛있는 마늘’ 산지가 아닌가. 그걸 증명하듯 석쇠에 구운 소고기 옆에는 의성마늘이 한 접시 가득 놓였다. 굽지도 않은 생마늘이. 누구랄 것도 없었다.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소고기 한 점에 마늘 한 쪽을 더해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소고기구이집 주인에게 물었다. “왜 모두에게 마늘을 주는 거죠? 마늘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대답이 금방 돌아왔다. 반문이었다. “네? 마늘 싫어하는 한국 사람이 있나요?” 맞다. 한국 사람인 기자도 마늘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그러니까 그게 2011년이다. 한 달쯤 남부 유럽 북마케도니아의 호숫가 마을 오흐리드(Ohrid)에 머문 적이 있다. 그 기간 숙소였던 조그만 게스트하우스에선 가끔 유럽 각국에서 온 청년들의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라제 파마코스키, 알렉산더 몰코스키란 이름을 가진 동네 청년들은 그 파티에서 구운 고기보다 생마늘을 더 많이 먹는 기자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자의 별명이 ‘미스터 갈릭맨’이 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늘은 맛있다. 의성마늘은 특별히 더 맛있다. 그렇지 않은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14

‘탕’ ‘찜’으로도 먹어봐요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고,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다. 하지만, 개복치를 한 번 맛본 사람들은 거듭해서 찾게 된다. 여타의 생선들이 구이, 조림, 찜, 어탕 등으로 만들어지듯 개복치 역시 그렇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복치 묵’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커다란 냄비가 필요하다. 여기에 물을 붓고 껍질을 벗긴 개복치를 삶아낸 후 차가운 물에 넣어 식힌다. 그러면 도토리묵이나 창포묵처럼 부들부들하고 쫄깃한 식감으로 굳어진다. 거의 무미(無味)에 가까운 개복치 묵엔 새콤달콤한 초장을 찍어 먹는 게 어울린다. 낯설고 독특한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개복치의 머리나 뼈를 찜으로 만들어 먹는 걸 권한다. 의외로 연하고 부드러운 식감에 매료될 것이 분명하다. 지역에 따라선 드물게 ‘개복치 맑은탕’을 판매하는 식당도 있다. 복어 맑은탕이나 아귀 맑은탕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파와 마늘, 멸치와 후추, 다시마 등으로 국물을 내고, 여기에 개복치를 넣어 끓여낸다. 무, 콩나물, 미나리를 넣어 깔끔한 맛을 더한다면 전날 과음한 모주꾼의 속풀이에도 그저 그만이다. 개복치 껍질은 질기다. 그러나, 그 질긴 식감을 좋아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개복치 껍질무침’은 그래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개복치 요리다. 양념장과 여러 채소를 더해 무쳐 먹으면 좋다. 때로는 ‘개복치 회’를 찾는 미식가들이 있는데, 이건 단단한 개복치의 살을 오징어 숙회처럼 익혀서 먹는 게 일반적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30

이게 ‘물고기 내장’을 구운 거라고?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물어댔으면 저런 궁여지책을 찾아냈을까? ‘이 물고기의 이름은 개복치입니다’. 경상북도 포항 죽도시장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붉은 글씨의 푯말이다. 1톤 트럭에 겨우 1~2마리만을 실을 수 있는 거대한 회색빛 물고기가 모로 누운 것도 장관이지만, 막부시대 사무라이가 사용한 일본도보다 더 큰 칼로 개복치를 해체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흥미로운 구경거리다. 장터를 찾은 관광객들이 궁금해 하고,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한국·일본·대만 등지서만 식용 가능 껍질 삶아 굳혀 만든 ‘묵’ 형태가 일반적 대창구이·수육으로도 색다르게 즐겨 원조 포항에서도 귀한 음식으로 대접 자, 그럼 개복치는 어떤 물고기일까? 기자는 생물학자가 아니기에 백과사전의 설명을 짤막하게 요약한다. 다음과 같다. ‘학명은 몰라몰라(Mola mola). 길이는 2~4m, 무게가 평균 1톤에 이르는 물고기다. 최대 2000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다. 몸은 타원형으로 옆으로 납작하다. 눈, 입, 아가미구멍이 작다. 움직임이 거의 없으며, 피부는 두껍고 무두질한 가죽 형태다. 온대성 어류로 바다 중층에서 활동하지만, 맑고 파도가 없는 날엔 수면 위로 등지느러미를 보이며 헤엄치기도 한다. 무리를 짓지 않는 것도 특성이다. 주된 먹이는 해파리 따위. 몸길이가 60cm 이상이 되면 수컷은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암컷은 수직형이 된다. 수명은 약 20년. 살은 희고 연하며 맛은 담백하다’. 우선 ‘몰라몰라’란 학명이 재밌다. 라틴어로는 맷돌을 의미한단다. 매일매일 “저 물고기 이름이 뭐예요?” “우와 크다. 저건 무슨 생선인가요?”라고 묻는 구경꾼들에게 시달리는 개복치 해체 전문가가 들려주고 싶은 대답도 실상은 “몰라몰라~ 나도 몰라~”가 아닐지. 같은 말을 하루에 10번, 100번 반복한다는 건 고역이 분명하니까. 지구 위에서 개복치를 먹는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정도가 거의 전부다. 유럽은 아예 ‘식용금지’ 딱지를 붙였다. 먹기 위해 사고파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개복치는 여러 가지 요리로 만들어질 수 있는 식재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껍질을 삶아 흐물흐물해진 걸 굳혀 만든 ‘묵’ 형태의 개복치 요리만을 먹어봤을 터. 그걸 맛본 이들 중 열에 아홉은 입을 모아 말한다. “도토리묵처럼 씁쓸하지만 깊은 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메밀묵처럼 혀에 감기는 감칠맛도 없네. 쇠 젓가락으로 잘 잡히지도 않는, 아무 맛도 안 나는 이걸 왜 먹지?” 기자 역시 그랬다. 1990년대 후반 청년시절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개복치 묵’을 처음 먹었을 땐 “이게 뭐지? 보드카도 아닌 게 무향무취군.” 이런 혼잣말을 한 후 초장을 듬뿍 묻혀 소주와 함께 어거지로 삼켰던 기억이 있다. 맛이 없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반전이 찾아왔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2015년 서울에서 포항으로 집을 옮겼다. 포항은 다양한 형태로 개복치를 조리하는 도시다. ‘개복치 묵’은 상갓집과 결혼 피로연장에 곧잘 등장하는 인기 메뉴. 자꾸 먹다보니 밋밋한 그것이 혀끝으로 미세하게 전달하는 ‘독특한 맛’을 시나브로 알게 됐다. 그리고 하나 더. 우거(寓居) 지척에 늙은 어머니와 50대 아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하나 있다. 거기선 ‘개복치 대창구이’와 ‘개복치 수육’을 판다. 개복치를 상식(常食)하다시피 하는 포항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음식점이다. 기자는 음식 먹는 것에 터부가 거의 없다. 그래서다. 소, 돼지, 양, 닭은 물론 개의 내장도 먹어봤다. 그럼에도 ‘개복치 내장’의 식감과 향은 필설로는 형용하기 힘든 ‘특별함’이 담겨있다. 요즘 애들이 하는 말로 “안 먹어봤으면 말을 하지마세요”다. 그게 살인지, 껍질 아래 피하지방인지, 내장의 일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개복치 수육’ 또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신묘한’ 맛이다. 이렇게 쓰고 나면 “그걸 파는 식당이 어디죠?”라고 묻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사진은 보여줄 수 있으나 포항 개복치 요리점 옥호를 알려주진 않겠다. 왜냐? 앞으로도 혼자만 다니고 싶으니까. 북적거리는 식당 앞에서 줄을 서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으니. 아,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답하면 되겠다. “몰라~몰라.” 앞서도 말했지만, 몰라몰라는 개복치의 학명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