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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트럼프, 치즈버거, 그리고 경주 돼지찌개

지난 10월 말. 경상북도 경주가 시끌벅적했다. 21세기 ‘지구 위 최강 2개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최고 권력자 도널드 트럼프와 시진핑(習近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라의 옛 도읍인 서라벌을 찾았다. 그들의 전용기가 착륙한 김해공항에서부터의 비까번쩍한 의전과 그들이 머문 경주 보문단지 숙소 주변 경호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유명인사가 왔다 가면 무성한 뒷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남는다.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경주를 찾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특별하게 수억 원대의 금을 사용해 제작된 신라 금관 모형과 무궁화대훈장을 선물 받고 입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난달 APEC 정상회의 참석 트럼프 ‘k-푸드’와 한국 스타일 별미 지천인데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 요청 안강엔 엄지척 돼지고기찌개 맛집 2곳 진미 맛볼 기회 영영 놓친 듯 안타까워 대부분이 짐작하듯 트럼프는 세계 어느 국가의 통치자보다 ‘이익’을 국제관계의 주요 잣대로 판단하는 인간. 어쨌건 이런 딱딱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경주 APEC 회의에선 트럼프의 ‘욕심 없고 저렴한’ 음식 취향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국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그는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단다. “채소는 따로, 베이컨은 빼고, 토마토케첩 많이”라는 구체적 요구까지 비서실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문이다. 한국에선 판매되지 않기에 곁들일 콜라는 미국에서부터 공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햄버거에 콜라…. 가진 재산을 헤아리기도 힘든 사람의 음식 취향치고는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시간이 흘러 트럼프가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때, 그는 한국 경주와 거기서 열렸던 APEC을 늘상 즐기던 ‘치즈버거’를 재차 먹었던 도시로 기억할까? 만약 그렇다면 딱하기 그지없다. 경주는 이른바 ‘k-푸드’와 한국 스타일의 별미가 지천인 도시인데. 생각해보자. 제 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총리도 결국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이 사는 공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그게 전용기를 사용한 국빈 방문이건, 좁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한 가난한 사람의 해외여행이건-을 떠나는 건 도착한 여행지의 낯선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느 곳이라 특정할 것 없다. 신문사의 사진기자는 이른바 ‘맛집’을 많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을 1년 365일 떠돌아다니며 혼자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사진기자는 북쪽으론 영주와 안동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경주와 포항, 때로는 푸른 물결 출렁이는 먼 섬 울릉도까지를 오간다. 직업이 그러니 어떤 곳을 지목해 “거긴 가기 싫다”고 말할 방법도 없다. 30년 가까이 경상북도 일대 사진을 찍으러 다닌 사진기자 한 명을 알고 있다. 그가 경주를 수백 번 오갔을 건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일 터. 그가 소개한 ‘숨겨진 경주 맛집’이 몇 곳 있다. 쫄면을 파는 저렴한 분식집에서부터 석쇠에 일등급 한우를 구워주는 제법 비싼 식당까지 프리즘이 넓었다. 가격을 불문하고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곳은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돼지고기는 닭고기와 더불어 동서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육류의 수위(首位)를 다툰다. 닭고기와 달리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돼지고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각종 요리 재료로 사용된 식용 고기일 터. 17세기 초반에 출간된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돼지고기가 ‘신장의 음을 보하고 위액을 충족시키며 간장의 음혈을 보하는 작용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보편의 상식과 달리 적당한 양을 먹는다면 몸에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소고기에 비해 가격도 헐하다.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이 즐기는 이유가 있다. 지척이라 불러도 좋을 거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경주 안강의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군데. 한 곳은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넣은 붉은빛으로 매운 맛을 좋아하는 이들의 혀를 유혹하고, 나머지 한 곳 식당은 얼핏 보기엔 맹물 같은 육수를 넣어 맑은 색깔의 독특함을 유지한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돼지고기와 채소 몇 가지를 넣은 찌개가 ‘놀라운 맛’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 돈 10달러 안팎의 싼 가격으로 맛보는 경주 안강읍의 돼지고기찌개는 각별하다. 낮과 밤 언제 먹어도 소주를 부르는 별미다. 만약 이걸 트럼프가 맛봤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좋아했던 형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다가 죽었고, 그런 이유로 트럼프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들과 손자에게도 금주를 금과옥조처럼 강조한단다. 반주 없는 돼지찌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만에 하나 다시 경주를 오더라도 트럼프의 선택은 돼지고기찌개가 아닌 치즈버거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경주의 애주가들은 이렇게 말할 듯하다. “안타깝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외국인들은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뜨거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삼겹살. 다수의 한국인들이 군침을 흘리게 되는 장면이다. 노릇노릇 잘 익은 삼겹살에 고추와 마늘, 쌈장을 넣어 상추에 싸먹는 방식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매혹시켰다. 당연지사 ‘삼겹살 쌈’은 손꼽히는 K-푸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시인 하재봉은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 잔하며 직장 상사 욕하는 재미에 회사 다닌다’는 내용을 담은 시까지 섰다. 이처럼 삼겹살 구이는 서민들의 가장 만만한 술안주이기도 하다. 삼겹살만이 아니다. 한국엔 돼지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요리가 많다. 돼지 다리를 각종 약재를 넣어 삶아낸 쫄깃한 족발, 구이보다 기름기가 적어 담백한 수육, 내장을 매운 양념에 볶아먹는 곱창구이 등등. 그렇다면 외국에선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독일 사람들은 돼지 다리를 오븐에 오랜 시간 익혀 먹는 ‘슈바인스학세’를 즐긴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이 맥주에 잘 어울리기에 독일을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맛보게 된다고. 이탈리아에서는 향신료와 소금을 바른 돼지고기를 일정한 온도와 습도에서 숙성시킨 ‘카포콜로’를 피자 위에 토핑으로 올리기도 한다. 독특한 향과 식감 탓에 호오는 갈리는 편이다. 돼지고기 어깨살을 결대로 찢은 ‘풀드 포크’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로 먹는다. 고기만 먹기도 하지만, 빵 사이에 넣어 먹는 방식이 보편적이다. 중국 또한 찌고, 굽고, 삶고, 튀기는 등 돼지고기 요리의 방식이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영양엔 고기보다 맛있는 ‘그것’이 있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에서 필체 좋기로 으뜸을 다툰 이가 있다. 한호(韓濩·한석봉)다.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풍류묵객 다수가 그러했듯 술을 어지간히도 좋아했던 모양. 한호는 종장(終章)이 근사한 시조 한 수를 남겼는데, 1980년대엔 그게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그 시절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기자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런 노래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16세기 말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조를 21세기 방식으로 다시 써보면 재밌을 듯하다. 대리석 바닥 깔린 근사한 살롱이 아니라도 좋다. 휘황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없으면 또 어떠랴. 보시게, 여기 산나물 한 접시에 탁주 한 병 가져오게나. 경상북도 영양군은 시인 조지훈과 소설가 이문열을 낳은 문향(文鄕)이다. 산이 깊고 골짜기마다 철따라 화사한 꽃이 피는 곳. 사람들에겐 알싸하고 달달한 고추의 산지로 유명한 영양엔 그럴듯한 산나물 식당이 몇 곳 있다. 군(郡)의 이름을 걸고 산나물축제가 열릴 만큼 이런저런 나물이 흔한 영양군에 처음 간 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이다. 동행한 둘은 당시 모두 예순을 넘긴 사람들. 서울에서 출발해 먼 길을 가느라 점심을 시원찮게 먹은 기자는 저녁엔 소고기 구워 선배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고급 양주를 마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선배들이 문을 밀고 들어간 식당은 산채(山菜)를 파는 곳이었다. 연이어 기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주문을 했다. “여기 산채정식 3인분에 막걸리 하나 주시오.” 식탁 위엔 열 가지는 분명 넘고, 아니 스무 가지도 넘는 온갖 나물에 된장찌개와 밥이 놓였다. 그 많은 나물 중 기자가 이름을 아는 건 겨우 고사리와 도라지 정도. ‘풀 반찬’을 싫어하는 얼굴은 찡그려졌지만, 그와 별개로 놀라움이 성큼 다가왔다. 세상에 사람이 먹는 나물이 그처럼 많다는 걸 그날 알게됐으니. 한국인, 그 가운데서도 나이 지긋한 이들의 ‘나물 사랑’은 대단하다. 유명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늘그막의 미당 서정주(시인)는 두릅을 먹기 위해 봄을 기다렸고, 노년의 정치인 김영삼의 아침상엔 언제나 시래깃국과 나물 한두 가지가 반찬으로 올랐다고 한다.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의 동물적 감각과 축적된 경험에서 오는 선별법은 기가 막힌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린 수백, 수천 가지의 풀 가운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 뜯어서 즉시 먹는 것과 데쳐서 말려 먹는 것, 약이 되는 식물과 독초를 신묘하게 가려낸다. 살아생전 기자의 외조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고 모친에게 들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등의 고문헌엔 약용 나물과 독초의 구별법, 철 따라 나오는 산채의 종류 따위가 기록돼 있다. 그러니, 우리가 나물을 상식(常食)한 건 아주 오래고 오래된 옛날부터가 아닐지. 시계를 2년 전 봄으로 돌린다. 두 번째로 영양군을 찾았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영양이 고향인 한 살 많은 선배가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이끌었다. 1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산채가 맛있다는 밥집 가운데 하나였다. 세월이 흘러서였을까? 나이를 더 먹어서였을까? 그날 맛본 곰취와 방풍나물, 씀바귀와 당귀는 향이 좋았고 식감 또한 독특했다.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 점심을 달게 먹고 이런 혼잣말을 했다. ‘육식주의자를 자처한 내가 지천명을 넘어 이순에 가까워지니 산채를 안주로 박주 마시는 즐거움을 알게 됐구나. 역시 사람의 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따끈한 밥에 향긋한 나물, 한국인의 소울푸드

한국인의 밥상에서 나물을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 팥소 없는 찐빵, 신랑과 신부 없는 결혼식이 돼버리지 않을까? 김 오르는 따끈한 밥에 고소한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무친 각종 나물을 함께 먹는 건 수백 년 이어져온 우리네 섭식 형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새’라고도 부르는 나물은 콩나물 등의 채소나 산마늘 등의 산채, 또는 야생초를 삶아 만든 것을 조미료와 기름에 버무린 것을 지칭한다. 채취하여 데치고, 양념에 뒤섞는 나물 조리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철마다 찾아낼 수 있는 재료가 원체 다양하기에 한국엔 수백 종의 나물이 존재한다. 채소의 재배와 채집이 힘든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나물을 삶아 말리는 방식도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를 ‘묵나물’이라 부른다. 채소만이 아니라 야생초, 나뭇잎, 식물 뿌리 중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양념한 것도 일종의 나물로 분류된다. 쌀의 수확량이 적었던 시기. 봄이 되면 산이나 들에서 채취한 산나물로 밥을 대신했던 춘궁기도 있었다. 이를 기억하는 70~80대 어르신들은 모든 것이 풍족해진 요즘도 그때 먹던 나물 맛을 잊지 못하며 추억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나물은 한반도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식을 금하는 불교의 본격적 유입 이후 나물이 중요한 반찬으로 정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나물은 건강에도 이롭다. 한국임업진흥원의 설명을 아래 옮긴다. “현대인은 육식, 술, 담배 등을 즐기면서 체질이 산성화되고 있다. 산성체질은 여러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산나물은 알칼리성으로 이를 섭취하면 산성인 체질이 알칼리성이 되도록 도와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대게와 함께 털게와 왕게도 별미

바람이 차갑고 바다도 차가워지는 겨울은 각종 ‘게’가 맛있어지는 계절이다. 곧 다가올 겨울. 얼어붙은 어시장 거리에서 게를 찌는 찜통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김 앞을 지날 때면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돈다. 겨울철 귀한 별미 중 으뜸은 대게라 하겠지만, 털게와 킹크랩으로 불리는 왕게도 여러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만드는 각별한 맛을 지녔다. 한국에선 게의 다리 살은 물론 몸통 살도 꼼꼼하게 발라먹고, 내장까지 볶음밥에 넣어 먹는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선 다리만 잘라내고 몸통은 버린다. 게 내장의 녹진한 맛을 즐기는 이들이 본다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듯하다. 영덕, 울진, 포항 등에서 주로 유통되는 대게는 높은 인기 탓에 금어기 때는 러시아 등지에서 수입해 판매한다.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등 북태평양에서 서식하는 털게는 진흙이나 모래 바닥에서 활동한다. 한국의 경우엔 고성 부근 동해 북측에서 주로 잡힌다. 털게 역시 달달하고 구수한 맛으로 유명하다. 살이 많고 향이 좋은데다가 내장 맛이 일품이지만, 어획량이 적어 가격이 만만찮다. 계절에 따라서는 비싼 박달대게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2000년대 초반 금강산을 여행하며 맛본 털게 맛을 기자는 아직 잊지 못했다. 통상 킹크랩이라 불리는 왕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계절의 별미다. 알루샨 열도, 알래스카, 극동 러시아, 일본 북부에서 서식하기에 우리가 먹는 왕게의 거의 전부는 수입산이라 생각하면 된다. ‘왕게’라는 이름값을 하듯 평균 무게가 3kg을 넘나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성큼’ 동해안 대게가 살찌는 겨울이 다가온다

동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경북 바다 ‘최고의 별미’인 대게의 계절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리를 쭉 펴면 가로 길이가 60~70cm를 넘나드는 대게. 경상북도 울진과 영덕, 포항 구룡포는 물론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서까지 ‘비싸지만 귀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로 대접받는 대게는 다른 갑각류에 비해 몸피가 크다. 그래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게’는 커다란 크기 탓에 대게라고 불린다고 착각한다. 한자인 대(大)가 ‘게’자(字) 앞에 쓰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건 틀렸다. 먼저 이것부터 수정하고 가자. 대게는 길쭉한 다리가 대나무의 마디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대게 앞에 붙는 ‘대’자는 ‘클 대’자가 아닌 ‘대나무 죽(竹)자’다. 허니, 대게를 ‘죽게’라 불러도 “그건 틀렸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도 대게와 유사한 것들이 잡힌다. 푸른 눈동자와 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쪽 어부들은 대게를 ‘스노우 크랩(Snow crab)’이라 칭한다. 눈보라 치는 차가운 바다에서 잡히는 게라는 뜻일 터. 알다시피 한국의 동쪽 바다도 물이 차갑다. 대나무 마디 닮은 다리에서 비롯된 명칭 박달대게·털게·왕게 등 통통한 속살 가득 회·찜·굽기 등 다양하게 조리…맛 일품 상인들 “대게는 찜이 최고∼” 한목소리 21세기 한국엔 부자가 적지 않다. 아직은 다수가 아니겠지만 “그게 맛만 있다면 나는 먹는데 돈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 호언하는 자칭 미식가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간다. 대게로 만든 요리 중 값싼 건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 ‘혀에 감기는 비싼 별미’가 대게니까. 움직임이 활발하고 살이 단단해 ‘박달대게’라 불리는 건 다리에 원산지 표시를 매달아 한 마리에 20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서민이 자주 맛볼 수 있는 가격은 아니다. 어쨌건 경북 동해안 일대엔 대게를 회치거나, 찌거나, 굽거나, 이런저런 채소를 더해 끓인 요리를 파는 식당이 흔하다.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가게 앞엔 겨울철 주말마다 관광객이 만들어내는 긴 줄이 생겨나기도 한다. 도로변에 서서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어서 우리 가게로 오세요”라며 손을 흔드는 호객 행위도 만만찮다. 맛있는 걸 감각하는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걸까? 대게는 고려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도 감탄하며 먹었다고 전해진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의 스승이기도 했던 점잖은 대학자가 겨울날 거친 물결치는 바다에서 아랫것들이 잡아온 대게의 다리를 들고 ‘쪽쪽~’ 고소한 속살을 빨아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이색은 대게를 소재로 시(詩)까지 썼다. 그의 작품 ‘잔생(殘生)’은 ‘서쪽 바다 등 푸른 생선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나, 동해의 대게는 어지간해선 맛보기 어렵구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맞다. 동서고금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게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주자학의 대가(大家)라 할지라도. 이색의 경우엔 ‘대가’가 ‘대게’를 먹었으니 책할 이들도 없을 듯하다. 700여 년 전 고려 시대에 잡힌 대게는 21세기 대게와 맛이 달랐을까? 기자도 궁금하고, 우리 모두 궁금하다. 여러 방식으로 조리가 가능한 대게지만, 수십 년 이상 대게 요리를 손님들에게 대접해온 경북 동해안 식당 주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대게 찜이 최고”라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더 맛있게 찔 수 있을까? 아래 30년째 대게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에게 얻어낸 답을 살짝 공개한다. 집에서 찜통 위에 대게를 올릴 때 참고하시기를. “일단 솥에 담을 때 대게가 물에 닿지 않게 하세요. 끓는 물과 대게가 직접 닿으면 물기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내장이 흘러버리니까요. 고구마를 찔 때처럼 대게를 올린 채반과 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쪄야 보다 맛있게 됩니다. 1kg짜리 대게를 찌는 시간은 20~25분이 적당해요. 배가 위로 향하게 해서 쪄야 하는 걸 절대 잊지 마시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8

외국에선 어떤 닭 요리를 먹을까

한국은 닭을 맛있게 요리하는 나라다. 몇 해 전부턴 세칭 ‘K-푸드’의 하나로 조각내 튀긴 닭에 매콤달콤한 양념을 바른 게 지목됐고,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서울과 부산, 경주와 제주에서 그걸 맛보며 만족해하는 모습이 TV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 몇 개 도시엔 최근 들어 한국식 양념통닭을 판매하는 식당이 생겨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닭은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 어느 곳에서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다. 그렇기에 동서양을 불문하고 다양한 닭 요리는 수백 년 전부터 있어 왔다. 일본의 닭튀김인 ‘가라아게’는 한국에도 안주로 판매하는 주점이 적지 않고, 중국 남부에서는 오래전부터 닭고기에 팔각, 육두구, 생강 등의 향신료를 더해 ‘자지가이(炸子雞)’를 만들어 먹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이 많은 인도네시아도 닭을 통째 튀겨 ‘아얌 고렝’이라 부르며 맛있게 먹는다. 당연하게도 대다수의 이슬람 국가는 닭고기의 주요 소비국이다. 닭 날개를 매운 후추 소스에 발라 튀긴 ‘버펄로 윙’은 미국에서 시작된 요리로 알려졌고, 인도는 각종 향신료와 버터를 넣어 오랜 시간 끓인 닭 스튜를 즐긴다. 붉고 선명한 토마토의 주요 생산지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에선 ‘토마토 닭조림’을 만들고, 이건 유럽인들에게 익숙한 음식이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코코뱅, 필리핀의 아도보(Adobo) 역시 닭을 재료로 만들어지는 요리. 앞으로는 또 어떤 새로운 닭 요리가 만들어져 사람들의 미각을 유혹할지 궁금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1

청도 별미 ‘옹치기’를 아시나요?

몇 해 전이다. 고색창연한 운문사 풍광이 좋고, 끈적끈적 달콤한 반시가 혀를 녹이는 경북 청도에 갔다. 군청 직원을 만나 물어볼 게 있었다. 일 때문에 갔고, 급히 돌아와야 했으나 점심을 굶을 수는 없는 노릇.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행위가 다 먹고살자고 버둥대는 짓인데. 옹그리고 있는 닭에서 비롯된 ‘옹치기’ 맹물에 삶은 닭을 간장 양념으로 조려 찜닭과 비슷하지만 당면은 넣지 않아 청도 방문땐 ‘옹치기 조림닭’ 맛보길 청도군청 직원에게 물었다. “점심때가 좀 지나긴 했는데, 어디 괜찮은 식당 없나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옆 자리 동료를 힐끗 보며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옹치기가 좋겠지?” 처음에는 옥호(屋號)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란다. 음식 이름이라고 했다. 50년 넘게 살아오며 먹어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음식이다. 궁금증이 일었으니 당연지사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옹치기? 그게 뭔데요?” 흔한 재료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어의 지느러미나 거위의 간, 이탈리아 특정 지역에서 채취한 송로버섯 등은 이미 재료의 희귀성과 이름값만으로도 만들어질 요리에 관한 기대치를 높인다. 그리고, 솔직히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면 비단 일류 셰프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듯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정성 들여 잘 기른 한우나 일본 와규가 숯불에 구워도 맛있고, 가스불에 구워도 근사한 맛을 내는 것처럼. 이야기가 멀리 갔다. 다시 청도군청으로 돌아가자. 옹치기가 뭔지 묻는 우리 일행에게 돌아온 대답은 “안동찜닭하고 비슷한데,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다”였다. 주인장에게 요리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가 뭔지 물어보려면 가볼 수밖에 없었다. 군청 공무원과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다행히 ‘옹치기’를 파는 식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닭은 지구 위에서 가장 흔해빠진 식재료 중 하나다. 어느 정도냐? 최근 조사에 의하면 1년 동안 도축돼 사람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닭은 약 600억 마리. 한국에서만 1억2천만 마리가 넘는다. 길러서 잡아먹기까지 걸리는 기간도 짧아서 1~2개월이면 충분하다. 종교적 금기 탓에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힌두교도는 소고기를 안 먹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 닭고기는 사양하지 않는다. 육식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 아닌가. 2005년 초여름엔 인도를 한 달쯤 돌아다녔고, 2011년 5월엔 이란을 17일간 여행했다. 알다시피 인도는 힌두교도가, 이란은 시아파 무슬림이 국민의 절대다수다. 그랬기에 인도에선 소고기구이 식당을 보지 못했고, 이란 사람들은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즐긴다”는 기자의 말에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지사 이란엔 삼겹살집이 없다. 그래서였다. 누구보다 육식을 좋아하는 기자는 ‘꿩 대신 닭’ 아니, ‘소·돼지 대신 닭’이란 심정으로 인도에서도 이란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닭고기를 먹었다. 한국과 비슷하게 두 나라 모두 닭 요리법이 다양했다. 기름에 튀기고, 큰 솥에 삶고, 탄두르(tandoor)라는 화덕에 굽고, 걸쭉한 양념을 더해 졸이고…. 맛은 어땠냐고? 예상대로 한국 닭 요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옹치기’라는 이름이 왜 생겼는지 말해줄 때가 됐다. 예상과는 달리 특별하고 유별난 사연을 가진 호칭은 아니었다. 식당 주인이 어느 날 털이 벗겨진 채 ‘옹그리고 있는’ 닭을 봤고, 그게 식당 메인 메뉴의 이름인 ‘옹치기’로 바뀌었다고 했다. 맹물에 한 번 삶아낸 닭고기에 간장을 베이스로 만든 양념과 육수를 넣고 바특하게 조려낸 옹치기. 기억에 남을 대단한 맛은 아니었으나, 다시 청도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더 들르고 싶을 정도의 맛이라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중세 사파비 왕조의 고도(古都) 이스파한을 잇는 고속도로엔 몇 개의 휴게소가 있다. 그 휴게소 가운데 한 곳에서 페르시아 스타일로 요리한 ‘닭다리 조림’을 먹은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청도의 별미 ‘옹치기’와 너무나 비슷한 맛이었다. 맞다. 닭고기라는 같은 재료로 ‘사람이 만들어 사람이 먹는 음식’이 달라봐야 뭐가 얼마나 다르겠는가. 아주 먼 옛날에도 신라 사람들은 페르시아까지 걸어서 가곤 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21

마늘, 장구한 역사의 식재료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있었다. 열망을 이루기 위해 신(神) 앞에서 읍소했다. “100일간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고 마늘과 쑥만 먹는다고 약속해라.” 신의 주문이었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동굴을 나갔고, 곰은 약속한 기간을 지켜 사람이 됐다. 그 사람이 된 곰이 낳은 것이 단군이다. 위는 한국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단군신화’의 줄거리. 여기에 ‘마늘’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 민족이 까마득한 옛날부터 마늘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닐지. 한국만이 아니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마늘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의 주요한 먹을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던 고대 이집트에선 육체적으로 힘겨운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마늘과 양파를 먹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먼 옛날 그리스에선 마늘을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마늘. 한국에선 2가지 종류의 마늘이 재배되는데 중국에서 유입된 한지형과 스페인에서 온 난지형이 그것들이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김치, 각종 국과 찌개, 무침 등을 만들 때 마늘을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제주도 사람들은 마늘의 여린 잎을 간장에 담근 ‘마농지’도 즐겨 먹는다. 마늘은 스태미나 증강에도 사용됐다. 고대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에겐 빼놓지 않고 마늘을 먹였다. 항암과 고혈압,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전해진다. 마늘의 최대 생산지는 중국이다. 지구 위에서 생산되는 마늘의 78%를 중국이 재배한다. 한국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 마늘을 좋아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재배지가 줄어들고 있다. 값싼 중국산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탓이 아닐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14

의성 맛집들의 비결은 바로 ‘이것’

2019년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인 9월이었다. 지금은 여러 구설수와 논란에 휩싸여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처지가 됐지만, 그때는 백종원의 위상이 ‘요식업계 황제’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보통의 시청자가 보기엔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TV 출연이 잦았고, 그가 언급하거나 찾아간 식당은 당장 매출액에 0이 몇 개 더 붙을 정도로 손님들이 밀려들었으니. 마늘닭, 기름에 튀긴 특유의 느끼함 없이 미묘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마늘의 풍미 입과 더불어 코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줘 석쇠에 구운 소고기 옆에는 마늘 한 접시 누구랄 것도 없이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소고기 한 점에 마늘 한 쪽을 더해 ‘꿀꺽’ 의성은 한국서 손꼽는 ‘맛있는 마늘’ 산지 경상북도 의성. 튀긴 닭에 양념을 해서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백종원이 다녀간 곳이었다. 시골의 여느 식당과 다르지 않은 입구와 실내. 문은 열려있는데 주인장이 없었다. 가게 안 구석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기에 통화를 했다. “곧 갈 테니 10분만 기다려요”란다. 긴 시간이 아니니 “네 천천히 오세요”라고 답했고. 잠시 후 나타난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뚝딱뚝딱 자른 닭을 기름솥에 튀겨 꺼낸 후 불그스레한 양념을 꺼내왔다. ‘훅~’하고 풍겨오는 알싸한 마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념에 들어간 마늘의 엄청난 양이 짐작되는 순간이었다. 옥호(屋號)가 ‘양념통닭’이 아닌 ‘마늘닭’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짐짓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백종원이 이 마늘양념에 반했나봐요?” 기대와 달리 자랑이 아닌 심상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 양반? 뭘 엄청나게 아는 척 하던데, 자기가 닭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어.” 오랜 세월 닭을 고르고 만지고 튀겨내고, 거기에 어떤 양념이 어울리는지 수십 년 골똘하게 고민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프라이드였을까? ‘의성 마늘닭집’ 주인의 말에선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런 자긍이라면 까짓 백종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사 고든 램지(Gordon Ramsay)도 우습게 보일 듯했다. “닭튀김이라면 내가 너보다 훨씬 잘 알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유명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날 맛본 마늘닭은 기름에 튀긴 음식 특유의 느끼함이 없었고, 자극적이지만 미묘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마늘의 풍미가 입과 더불어 코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영어로는 갈릭(Garlic)이라 부르고, 중국인들은 산(蒜)이라 쓰는 마늘의 역사는 유구하다. 드라마틱한 소설처럼 재밌는 역사책 ‘삼국유사’에서도 곰과 마늘에 얽힌 토픽이 확인된다. 이 책은 자그마치 800여 년 전인 고려왕조 말기에 승려 일연(1206~1289)이 쓴 것이다. 더 멀리 가보자.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파라오(Pharaoh)가 지배하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도 ‘건강하려면 마늘을 먹어야 한다’는 문장이 등장할 정도. 점심으로 ‘마늘닭’을 먹은 그날. 저녁은 의성군에서 유명하다고 이름난 소고기구이집에 갔다. 채식주의자라면 치를 떨 일이겠으나, 기자는 ‘육식주의자’에 가깝고, 다행히 일행 중에도 베지테리언이 없었으니. 듣기로 의성에서 식용으로 키우는 소에겐 마늘을 먹인다고 했다. ‘얼마나 지천이면 사람 먹는 마늘을 소에게까지 먹일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헌데, 그런 생각은 의성군 재래시장마다 주렁주렁 널려있는 수천 접 마늘을 보며 사라졌다. 의성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맛있는 마늘’ 산지가 아닌가. 그걸 증명하듯 석쇠에 구운 소고기 옆에는 의성마늘이 한 접시 가득 놓였다. 굽지도 않은 생마늘이. 누구랄 것도 없었다.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소고기 한 점에 마늘 한 쪽을 더해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소고기구이집 주인에게 물었다. “왜 모두에게 마늘을 주는 거죠? 마늘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대답이 금방 돌아왔다. 반문이었다. “네? 마늘 싫어하는 한국 사람이 있나요?” 맞다. 한국 사람인 기자도 마늘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그러니까 그게 2011년이다. 한 달쯤 남부 유럽 북마케도니아의 호숫가 마을 오흐리드(Ohrid)에 머문 적이 있다. 그 기간 숙소였던 조그만 게스트하우스에선 가끔 유럽 각국에서 온 청년들의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라제 파마코스키, 알렉산더 몰코스키란 이름을 가진 동네 청년들은 그 파티에서 구운 고기보다 생마늘을 더 많이 먹는 기자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자의 별명이 ‘미스터 갈릭맨’이 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늘은 맛있다. 의성마늘은 특별히 더 맛있다. 그렇지 않은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0-14

‘탕’ ‘찜’으로도 먹어봐요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고,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다. 하지만, 개복치를 한 번 맛본 사람들은 거듭해서 찾게 된다. 여타의 생선들이 구이, 조림, 찜, 어탕 등으로 만들어지듯 개복치 역시 그렇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복치 묵’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커다란 냄비가 필요하다. 여기에 물을 붓고 껍질을 벗긴 개복치를 삶아낸 후 차가운 물에 넣어 식힌다. 그러면 도토리묵이나 창포묵처럼 부들부들하고 쫄깃한 식감으로 굳어진다. 거의 무미(無味)에 가까운 개복치 묵엔 새콤달콤한 초장을 찍어 먹는 게 어울린다. 낯설고 독특한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개복치의 머리나 뼈를 찜으로 만들어 먹는 걸 권한다. 의외로 연하고 부드러운 식감에 매료될 것이 분명하다. 지역에 따라선 드물게 ‘개복치 맑은탕’을 판매하는 식당도 있다. 복어 맑은탕이나 아귀 맑은탕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파와 마늘, 멸치와 후추, 다시마 등으로 국물을 내고, 여기에 개복치를 넣어 끓여낸다. 무, 콩나물, 미나리를 넣어 깔끔한 맛을 더한다면 전날 과음한 모주꾼의 속풀이에도 그저 그만이다. 개복치 껍질은 질기다. 그러나, 그 질긴 식감을 좋아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개복치 껍질무침’은 그래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개복치 요리다. 양념장과 여러 채소를 더해 무쳐 먹으면 좋다. 때로는 ‘개복치 회’를 찾는 미식가들이 있는데, 이건 단단한 개복치의 살을 오징어 숙회처럼 익혀서 먹는 게 일반적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30

이게 ‘물고기 내장’을 구운 거라고?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물어댔으면 저런 궁여지책을 찾아냈을까? ‘이 물고기의 이름은 개복치입니다’. 경상북도 포항 죽도시장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붉은 글씨의 푯말이다. 1톤 트럭에 겨우 1~2마리만을 실을 수 있는 거대한 회색빛 물고기가 모로 누운 것도 장관이지만, 막부시대 사무라이가 사용한 일본도보다 더 큰 칼로 개복치를 해체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흥미로운 구경거리다. 장터를 찾은 관광객들이 궁금해 하고,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한국·일본·대만 등지서만 식용 가능 껍질 삶아 굳혀 만든 ‘묵’ 형태가 일반적 대창구이·수육으로도 색다르게 즐겨 원조 포항에서도 귀한 음식으로 대접 자, 그럼 개복치는 어떤 물고기일까? 기자는 생물학자가 아니기에 백과사전의 설명을 짤막하게 요약한다. 다음과 같다. ‘학명은 몰라몰라(Mola mola). 길이는 2~4m, 무게가 평균 1톤에 이르는 물고기다. 최대 2000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다. 몸은 타원형으로 옆으로 납작하다. 눈, 입, 아가미구멍이 작다. 움직임이 거의 없으며, 피부는 두껍고 무두질한 가죽 형태다. 온대성 어류로 바다 중층에서 활동하지만, 맑고 파도가 없는 날엔 수면 위로 등지느러미를 보이며 헤엄치기도 한다. 무리를 짓지 않는 것도 특성이다. 주된 먹이는 해파리 따위. 몸길이가 60cm 이상이 되면 수컷은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암컷은 수직형이 된다. 수명은 약 20년. 살은 희고 연하며 맛은 담백하다’. 우선 ‘몰라몰라’란 학명이 재밌다. 라틴어로는 맷돌을 의미한단다. 매일매일 “저 물고기 이름이 뭐예요?” “우와 크다. 저건 무슨 생선인가요?”라고 묻는 구경꾼들에게 시달리는 개복치 해체 전문가가 들려주고 싶은 대답도 실상은 “몰라몰라~ 나도 몰라~”가 아닐지. 같은 말을 하루에 10번, 100번 반복한다는 건 고역이 분명하니까. 지구 위에서 개복치를 먹는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정도가 거의 전부다. 유럽은 아예 ‘식용금지’ 딱지를 붙였다. 먹기 위해 사고파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개복치는 여러 가지 요리로 만들어질 수 있는 식재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껍질을 삶아 흐물흐물해진 걸 굳혀 만든 ‘묵’ 형태의 개복치 요리만을 먹어봤을 터. 그걸 맛본 이들 중 열에 아홉은 입을 모아 말한다. “도토리묵처럼 씁쓸하지만 깊은 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메밀묵처럼 혀에 감기는 감칠맛도 없네. 쇠 젓가락으로 잘 잡히지도 않는, 아무 맛도 안 나는 이걸 왜 먹지?” 기자 역시 그랬다. 1990년대 후반 청년시절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개복치 묵’을 처음 먹었을 땐 “이게 뭐지? 보드카도 아닌 게 무향무취군.” 이런 혼잣말을 한 후 초장을 듬뿍 묻혀 소주와 함께 어거지로 삼켰던 기억이 있다. 맛이 없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반전이 찾아왔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2015년 서울에서 포항으로 집을 옮겼다. 포항은 다양한 형태로 개복치를 조리하는 도시다. ‘개복치 묵’은 상갓집과 결혼 피로연장에 곧잘 등장하는 인기 메뉴. 자꾸 먹다보니 밋밋한 그것이 혀끝으로 미세하게 전달하는 ‘독특한 맛’을 시나브로 알게 됐다. 그리고 하나 더. 우거(寓居) 지척에 늙은 어머니와 50대 아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하나 있다. 거기선 ‘개복치 대창구이’와 ‘개복치 수육’을 판다. 개복치를 상식(常食)하다시피 하는 포항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음식점이다. 기자는 음식 먹는 것에 터부가 거의 없다. 그래서다. 소, 돼지, 양, 닭은 물론 개의 내장도 먹어봤다. 그럼에도 ‘개복치 내장’의 식감과 향은 필설로는 형용하기 힘든 ‘특별함’이 담겨있다. 요즘 애들이 하는 말로 “안 먹어봤으면 말을 하지마세요”다. 그게 살인지, 껍질 아래 피하지방인지, 내장의 일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개복치 수육’ 또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신묘한’ 맛이다. 이렇게 쓰고 나면 “그걸 파는 식당이 어디죠?”라고 묻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사진은 보여줄 수 있으나 포항 개복치 요리점 옥호를 알려주진 않겠다. 왜냐? 앞으로도 혼자만 다니고 싶으니까. 북적거리는 식당 앞에서 줄을 서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으니. 아,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답하면 되겠다. “몰라~몰라.” 앞서도 말했지만, 몰라몰라는 개복치의 학명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30

1800년 전부터 한국인과 더불어 살았던 소

부지런함과 우직함은 소가 가진 주요한 특성이다. 예부터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에게 “에이, 소만도 못한 놈”이라 손가락질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농경사회이던 시절. 소는 일꾼 열 몫의 농사일을 해냈다. 그러고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 묵묵함과 순종적인 성격 때문에 적지 않은 농민들이 소를 그저 그런 짐승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식구로 여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는 언제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가게 됐을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엔 ‘신라 눌지왕 22년에 백성에게 소를 이용해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눌지왕 22년은 서기 438년이다. 신라,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구려. 그 나라 벽화에서도 바퀴 달린 수레를 끄는 소 그림이 발견됐다. 그보다 이전 시대엔 다수의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소를 제물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러한 고문헌의 기록으로 볼 때 소는 최소 1800여 년 전부터 한국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고락(苦樂)을 함께 해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인간의 오랜 친구’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이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한우를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 고유의 역용종으로, 수천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품종”이라 설명하며, “성질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면서도 영리하다”고 부연하고 있다. 소와 인간의 정서적 교감이 가능하다는 건 경북 봉화군 산골에 사는 늙은 부부와 그들이 키웠던 소 ‘누렁이’의 일상을 관찰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를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23

이 ‘착한 짐승’의 죄 없는 생애

경상북도 포항. 푸른 파도가 지척에서 출렁이는 죽도시장 들머리엔 소머리국밥과 소머리수육 딱 2가지 메뉴만 파는 두 음식점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리해 있다. J식당과 P식당이다. 바람 쌀쌀하던 10년 전 겨울. 처음으로 J식당을 찾았을 때다. 정겹다고 해야 할까, 옛 정취 가득하다고 말해야 할까…. 어쨌건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됐다. 70~80대 노인들이 소주 한 병 가운데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오래 고아낸 소머리 국물을 천천히 드시고 있었다.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독특한 비주얼의 머릿고기는 보드라우면서도 쫀득한 식감으로 술꾼들의 아픈 속을 달래줬다. 수육에 곁들여 먹는 데친 부추는 향긋하고, 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와 간장에 절인 양파도 깔끔한 맛. 가마솥에 오래 고아낸 ‘소머리 국물’ 보드랍고 쫀득한 식감 ‘소머리 수육’ 부추·깍두기·양파 곁들이면 맛 일품 2030 입맛까지 사로잡은 전통 음식 같은 메뉴를 파는 P식당도 분위기와 맛이 대동소이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P식당은 국밥이 담긴 오지그릇에 날계란 하나를 깨 넣어주는 정도다. 그런데, 한참 동안 두 식당의 분위기가 달라진 적이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곳 모두 이른바 ‘TV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됐고, 방송을 탄 이후 거의 1년 이상 식당 앞 좁은 골목길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이 지긋한 소머리국밥집 20~30년 단골들은 일종의 공황에 빠졌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점심시간이 외지에서 찾아온 젊은이들로 시끌벅적한 도떼기시장이 됐으니. 분위기만이 아니라 “맛이 달라졌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더해지기도 했다. 방송의 힘이 어마무시하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이 기간엔 기자도 J식당과 P식당을 찾지 않았다. 두 식당이 예전 분위기로 돌아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음식점 주인은 계속 구름처럼 몰려드는 손님을 받고 싶었을 테니 섭섭했겠으나, 오랜 단골들에겐 다행스런 일이었을 터. 식당 앞 골목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권력도, 방송의 힘도 어쩔 수 없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영원히 지속되는 건 세상에 없으니. J식당엔 앞서 말한 1년가량의 ‘혼란기’를 제외하곤 1~2주에 한 번쯤 갔으니 주인, 종업원과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다. 비싼 우설(牛舌) 한두 점을 슬쩍 기자의 국그릇에 넣어주기도 할 정도다. 가끔 소머리를 삶는 가마솥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을 때면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는 커다란 검은 솥을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그러면, 유년 시절 외갓집이 떠오른다. 아니, 반세기 전 코흘리개일 때 외숙부가 키우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착했던 누렁이가 떠오른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은 모친이 태어난 곳이다. 1970년대 후반이 돼서야 전기가 들어간 깡촌 중 깡촌. 낡고 덜컹거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외가에 가면 가장 먼저 누렁이에게 볏짚을 먹이곤 했다. 열 살 안팎의 기자와 동생은 그 소를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로 여겼다. 까마득한 옛날인 구석기시대에도 소는 존재했다. 여러 마리가 소가 그려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그걸 증명한다. 그러나, 소와 인간은 친구가 되기 어려운 관계다. 알타미라 벽화가 그려진 1만8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 왜냐? 상호소통 없이 한쪽이 한쪽을 위해 일방적으로 무한희생만 하는 탓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살아서는 불평 한마디 없이 힘든 농사일을 거들고, 아이들의 친구가 돼줬다. 죽은 후에도 자신을 살과 뼈, 심지어 내장과 머리까지 인간에게 먹인 게 소였다. 허니, 소의 도저한 희생은 신(神)의 영역을 위협할 정도 아닌가? 외갓집 누렁이는 송아지에서 듬직한 수소로 커가던 과정에서 죽었다. 삼킨 복숭아씨가 목구멍을 막은 게 원인이었다. 죽은 소를 살리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이다. 그래서다. 외숙부와 이웃들이 누렁이를 나눠 먹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날. 소죽을 끓이던 가마솥과 텅 빈 외양간을 망연히 쳐다보다가 소리 내 울었다. 그랬던 기자가 누렁이와 동족인 또 다른 소의 머릿고기를 무시로 쩝쩝거리며 먹고 있으니,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23

은어, 잡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대만 정도의 지역에만 분포하는 은어는 최대 30cm 정도까지 자라는 물고기다. 맑은 물이 아니면 살지 못하기에 조선의 선비들은 시문(詩文)을 통해 은어의 깨끗하고 정갈한 습성을 자신들의 청빈에 비유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만주 지방의 은어는 압록강에서는 사는데, 송화강엔 서식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아마도 물의 맑고 탁함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낚시 고수는 생물학자 이상으로 은어의 이동 경로를 잘 파악하고 있다. 강태공들에게 최고의 손맛을 선사하는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매년 4~5월은 바다에서 월동한 은어가 하천으로 올라오는 시기다. 9월이면 산란을 하고, 알을 낳은 은어는 한 마리 빠짐없이 죽는다. 생사(生死)의 덧없음을 미물도 보여주는 것. 은어를 잡는 독특한 낚시 방법은 여러 번 들어도 들을 때마다 흥미롭다. 하천 여울진 곳에 영역을 형성해 일정 구역에서만 활동하는 은어는 동족이지만 다른 은어가 자기 구역에 드나드는 걸 반기지 않는다. 이를 이용해 은어 잡는 법은 아래와 같다. 일단 은어 한 마리를 잡아 그걸 낚싯줄에 묶는다. 그 줄에 여러 개의 낚시 바늘을 주렁주렁 매단다. 아직 죽지 않은 은어를 포획한 곳과 다른 구역에 던져 놓으면 그 은어를 쫓아내기 위해 다른 은어들이 몰려들고, 당연한 수순처럼 낚시 바늘에 여러 마리의 은어가 걸린다. 은어를 미끼로 은어를 잡는 것이다. 이 기상천외한 은어 낚시 방법을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라 불러도 좋을까? 만약에 조선 선비들이 아직 살아있다면 “어째서 청류귀공자를 오랑캐에 비유하는가”라며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16

왕피천에 사는 ‘귀공자’를 만난 적 있나요?

‘은어(銀魚)’라... 세상이 붙인 이름에서부터 귀족티가 줄줄 흐른다. 은처럼 빛나는 물고기란 뜻인가, 그게 아니면 은처럼 값져서 귀한 사람의 밥상에 오르는 생선이란 의미인가? 식자(識者)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시대불문 출간되는 소설을 꾸준히 따라 읽어간 한국문학 애호가들에게 ‘은어’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이 두 명 있다. 울진 왕피천·영덕 오십천 물 맑고 깨끗 ‘청류귀공자’ 별칭 지닌 은어 살기 적합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차례 기록 등장 높은 품계의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 입맛 까다롭던 연산군 은어구이 즐겨 1990년대 중반. 당시 주목받는 신진 소설가로 이름을 높여가던 윤대녕이 ‘은어낚시통신’이란 제목의 단편집을 출간한다. 그 책의 표제작은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독자까지 적지 않은 이들이 아껴가며 읽은 20세기 막바지 빼어난 소설 가운데 하나다.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나를 보태자면, 서울의 유명한 대형서점 가운데 한 곳에선 책의 제목만 보고 ‘은어낚시통신’을 소설 판매대가 아닌 ‘취미 서적’으로 분류해 진열했었다고. 오래전 일이니 지금 와서 그게 사실인지 풍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여기에 편견 없이 한국 소설을 읽고 거침없이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한다’는 거장 문학평론가 김윤식(2018년 별세)이 ‘은어’와 ‘윤대녕’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앞서 언급된 작품을 “존재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문장”이라 상찬한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김윤식은 죽었고, 윤대녕도 갑년을 훌쩍 넘긴 문단 중견이 됐다. 책이 나왔을 때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이던 기자는 뜬금없게도 소설에 담긴 은유와 함의가 아닌 ‘은어 맛’이 궁금해졌다. 그때까진 은어를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경상북도 울진 왕피천과 영덕의 오십천은 물이 맑고 깨끗하다. ‘청류 귀공자’란 별칭을 지닌 은어가 살기에 딱 좋은 환경. 20세기 낚시꾼들은 은어가 바다에서 민물로 이동하는 계절이면 단단히 채비를 하고 은어잡이에 나섰다. 낚은 은어는 자신도 먹고, 이웃에게도 나눴다고. 은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때로는 조림도 해먹는다. 지난 7월. 울진으로 취재여행을 갔다. 동해선 울진역에서 왕피천으로 가는 길.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요즘도 왕피천에서 은어가 잡히나요?” 그에게서 건조하고 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에 비하면 거의 안 잡힌다고 봐야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기사는 프로 수준의 은어낚시 솜씨를 가진 죽마고우가 있고, 그 덕분에 몇 해 전까진 은어회를 먹었다고 했다. 기자가 은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본 건 7년 전 경북 봉화군의 한 식당에서다. 구이와 조림이 상에 차려졌는데, 잔가시가 너무 많아 발라내기가 거추장스러웠다. 책에서 읽기엔 ‘은어의 살에선 싱싱한 수박향이 난다’고 했는데, 글쎄…. 비릿한 풀향을 느낀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내 입엔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자연산이 아닌 양식이라서 그랬나? ‘조선왕조실록’엔 은어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400~500년 전엔 수조와 냉장 시설이 장착된 트럭이 없었으니, 살아있는 상태론 왕에게 은어를 보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은어를 맛있게 잘 말리는 기술자를 나라에서 가려 뽑았고 그의 품계가 꽤 높았다는 기록, 성격만이 아니라 입맛까지 까다롭던 연산군이 은어구이를 좋아했다는 이야기 따위가 전한다. 먹는 ‘은어’가 아닌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에 얽힌 후일담도 있다. 소설가 윤대녕은 기자 초년병이던 2004년 제주도에서 만나 새벽까지 통음한 적이 있다. 소설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 전지현에 관해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보다 3년 전인 2001년 9월엔 평론가 김윤식의 퇴임 강연을 취재하러 서울대에 갔었다. 당시 연합뉴스 문학담당 기자였던 이성섭과 동행했는데, 교수 한 명의 퇴임 강연에 그토록 많은 기자가 몰린 것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지 못했다. “과연 김윤식”이란 말이 나올 법했다.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존재의 시원’을 말했던 김윤식. 시원이 있다면 종국(終局) 또한 있을 텐데, “존재의 종국은 뭘까요?” 묻고 싶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쓰고 나니 아주 조금 서글퍼지는 감정을 감추기 어렵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16

명품 서열다툼 치열한 ‘한우’ 조선 시대서도 귀했던 ‘문어’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토종 육쪽마늘 먹여 키웠다는 의성 한우 새콤달콤 오미자 사료로 섞는 문경 한우 좋은 육질 ‘최고 기후’서 자란 안동 한우 자투리 고기까지 혀를 녹일 맛 경주 한우 ▲경북에서 ‘가장 맛있는 한우’는 어디 있을까?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르던 시절 이야기다.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 여덟 살 동네 꼬마들끼리 ‘자랑 배틀’이 붙었다. 기사 딸린 자가용을 가진 집에 사는 친구 하나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지난주 내 생일날 아빠, 엄마랑 해운대 갈빗집에 가서 소고기를 엄청 많이 구워 먹었어. 진짜로 맛있더라.” 모여 앉아 있던 나머지 꼬마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50년 전은 ‘소고기를 구워 먹은 것’이 자랑이 되던 시대였다. 그날 그 자리, 소고기를 구워 먹어본 적이 없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째서 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돼지갈비도 한 번 사주기 힘든 가난한 노동자일까, 왜 나의 엄마는 땅투기로 남편 월급의 10배를 벌어들인다는 복부인이 되지 못했을까’라며 신세 한탄을 했다면 거짓말이고. 그저 구워 먹는 소고기의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물론 우리 집에서도 가끔 소고기를 먹긴 했다. 그러나, 한 근도 아닌 국거리용 소고기 반 근을 사와 무와 콩나물을 잔뜩 넣고 큰 솥에 끓여 식구 네 명이 한 그릇씩 나눠 먹는 방식이었다. 구운 소고기를 먹기 어려웠던 건 동네 친구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당시는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겨우 넘긴 시점. 너나없이 살림살이가 한빈했던 게 정한 이치였으니. 시간이 흘렀다. 국민소득 30000달러를 넘어선 게 벌써 오래전. 이제 소고기 구이는 샐러리맨들의 ‘그저 그런 회식 메뉴’ 정도로 인기가 하락했다. 동네마다 숯불에 철판 올리고 구워먹는 소고기 갈빗집이 흔전만전이다. 경상북도엔 한우 사육 농가가 적지 않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랑을 부른다. 당연한 수순처럼 “다른 곳과 비교하지 마세요. 우리 지역에서 기르는 소의 맛이 최고에요”라는 마케팅이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다. 최근 10년 가까운 시간을 경북에 자리 잡고 밥을 벌어먹었다. 여행을 좋아하니 멀지 않은 영남 각처를 돌아다니며 구운 소고기를 맛봤다는 건 구구절절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토종 육쪽마늘을 먹여 키웠다는 의성 한우, 새콤달콤 오미자를 사료에 섞는다는 문경 한우, 기후 자체가 육질 좋은 소를 만들기 최적이라 말하는 안동 한우, 손질하고 남은 자투리 고기까지 혀를 녹일 맛이라는 경주 한우…. 그것들 중 ‘최고의 소고기’는 뭐였냐고?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니, 답을 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시계를 뒤로 돌려 조선 시대로 가보자. 500~600년 전엔 소가 농경 사회를 지탱시키는 가장 중요한 아이템 중 하나였다. 사람이 하는 농사일의 열 몫 이상을 소가 해냈다. 그러니, ‘상일꾼 중 상일꾼’인 소를 도살해 먹는다는 건 용서 못할 죄였다. 이른바 우금(牛禁·소 잡는 행위를 금지함)이 생겨난 이유가 있었다. 이를 어기면 식솔 전체를 삭풍 휘몰아치는 함경도나 평안도로 쫓아내는 벌을 내렸으니 그게 전가사변(全家徙邊)이다. 소고기 한 번 구워 먹고 멸문(滅門) 당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당연히 없을 터. 조선의 ‘우금’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됐다. 자, 그렇다면 과연 조선 왕조를 통과하는 동안 소를 잡아먹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 이는 유치한 질문이다. 당연히 있었다. 어떤 냉혹한 금기도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꺾을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 ‘소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조선의 금기에 개의치 않았던 건 왕과 종친(宗親), 정승과 판서, 참판 등 최고위 권력자들이었다. 일례로 김옥균과 홍영식은 으리으리한 아흔아홉 칸 기와집 사랑방에서 화로에 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갑신정변을 모의했다. 젊은 참판 두 사람은 그걸 난로회(暖爐會)라 불렀다. 그들에겐 ‘우금’ 역시 깨뜨려야 할 조선의 적폐 가운데 하나였을까? 이제 경북의 소고기 이야기로 돌아와 앞서 물음에 답하자. 어느 고장의 한우가 가장 맛있었냐고? 의성 한우, 문경 한우, 안동 한우, 경주 한우 모두가 나름 일미였다. 기대한 답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누가 있어 감히 구운 소고기 맛의 우열을 명확히 가려낼 것인가? 동해 ‘피문어’ 큰 몸집에 ‘대문어’라 불리기도 유럽·인도 등지선 무서워하며 터부시하지만 연산군의 수라상에도 올려진 ‘별미 중 별미’ 잘 삶은 문어, 소고기나 양고기 부럽지 않아 ▲“42kg짜리 문어를 본 적이 있는데...” 한강 아래에선 가장 큰 수산물 집산지로 지목되는 경상북도 포항 죽도시장엔 문어를 사고팔며 잔뼈가 굵은 50대 중반의 사내 권순찬 씨가 산다. 그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 “문어가 커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심드렁하게 내가 물었다. “살아있는 걸 본 문어 중 가장 큰 게 42kg 아입니까. 단순히 무게만 들으니 실감이 안 나지예? 그 놈이 8개 다리를 쫙 펴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으면 6인용 텐트를 펼친 것만 합니더. 내가 겁이 없는 사람인데, 아주 가끔 그런 거물(巨物)이 그물에 걸려 당겨질 때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아마 심장 약한 분들은 무서워서 비명을 지를낍니다.” 대한민국. 동해에는 살 색깔이 붉은 피문어가 살고, 남해엔 바닷가 돌 틈에 돌문어가 서식한다. 돌문어가 많이 잡히기에 그것만 먹어본 남쪽 바다 사람들은 동해안 피문어의 크기를 쉽게 짐작하지 못한다. 피문어를 달리 부르는 명칭은 ‘대문어’. 말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큰 문어라 그렇다. 앞에 언급한 베테랑 문어장수 권씨는 30kg이 넘어가는 거대한 문어를 드물지 않게 보고 살았다. 어지간한 초등학생 몸무게에 육박하는. 한국에선 문어가 싼값에 자주 맛보는 먹을거리가 아니다. 꽃처럼 예쁜 모양으로 정성스레 삶은 문어가 차례상에 올라가는 명절이 다가오면 가격이 금값은 아니지만, 은값에 육박할 정도로 치솟는다. 시간을 맞춰 잘 삶은 문어는 구수한 향기에 쫄깃한 식감이 소고기나 양고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식혀서 얇게 썰어낸 차가운 문어수육은 미식가들의 고급 술안주로도 손색이 없다. 맞다. 우리나라에선 비싸서 그렇지 없어서 못 먹는 게 문어다. 그런데 재밌다. 문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나라도 없지 않다. 이건 내가 직접 겪은 체험이라 거짓말이라고 타박 받을 이유가 없다. 인도와 캄보디아가 그런 나라들 중 하나다. 2005년 인도의 바르칼라 해변과 2011년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바닷가. 던져놓은 어부의 그물에 문어가 걸려 올라오면 징그럽다는 듯 재빨리 떼어내 다시 바다로 던져버렸다. 그 광경이 이상스럽고 놀라웠던 내가 물었다. “왜 버려요? 저 맛있는 걸.” 별 해괴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눈망울로 인도와 캄보디아 어부가 답했다. “야, 너는 크라켄 몰라?” 아... 크라켄. 결국은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차이’였구나. 비단 문어를 먹는 행위만이 그런 게 아니다.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게알을 티스푼으로 맛있게 떠먹는 날 보며 ‘대체 저런 괴이한 걸 왜 먹지’라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으니. 크라켄은 고대 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끈적이는 8개의 거대한 다리로 범선(帆船)을 휘감아 깊은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곳 바다에도 인간의 상상력을 위협하는 커다란 문어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선 몸의 길이가 10m를 넘나드는 문어나 오징어의 사체를 본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다 유럽에선 오래 전부터 문어 같은 두족류를 혐오하고 무서워하는 경향이 강했다. 인도와 캄보디아도 북유럽처럼 바다에 인접한 국가다. 그러니, 누구도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캄캄한 심해, 거기 사는 거대한 문어를 터부시했던 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공포는 상상력에서 잉태된다. 뭐 그건 어째도 좋다. 한국은 북유럽, 인도, 캄보디아와 달리 문어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그러니, 잘 삶아 큼직한 접시 위에 올린 말랑말랑 쫄깃쫄깃한 문어의 몸통과 머리, 다리를 거부할 이유 또한 없다. 문어는 500년 전 조선시대 때도 고관대작이 즐기던 별미였다. 모친 상실의 콤플렉스를 피와 살점이 튀는 끔찍한 살육으로 되갚음 했던 연산군 이융(李㦕·1476~1506)은 취식 스타일이 독특했는데, 그가 금덩어리처럼 여겼던 게 문어와 사슴 요리였다. 기이하게도 사슴의 혀와 꼬리, 갓 삶아내 당장 꿈틀거릴 듯한 문어를 연산군의 수라상(水剌床) 올렸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남아있다. 그렇다. 한국에선 문어의 맛이 왕도 매혹했던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6-24

‘두부와 송이버섯’ 혀와 코를 매료시킨 영남의 별미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 /편집자 주 ▲산초기름에 구운 두부 드셔보셨나요? “먹고살 만한 시대가 오면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난다”는 이야기가 떠돈 게 20세기 후반, 혹은 21세기가 시작되던 즈음이다. 내가 20대 말과 30대 초반을 살던 시절. 실제로 그랬다. 공중파 방송이 앞다퉈 전국의 맛집은 물론, 세계 각국의 별나고 특별한 요리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재료를 사용해 기이한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별미가 세상엔 많고도 많았다. 헌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때 본 수백 가지 요리 중 기억에 또렷하게 남은 건 가격부터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곰 발바닥으로 만든 요리나, 염장한 북해산 철갑상어알이 아닌 우리가 익숙하게, 자주 먹어왔던 평범한 음식을 소개한 프로그램이다. 대략 20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MBC였던지, KBS였던지 흐릿하다. 늦은 밤 TV 속에 등장한 70대 노파가 카메라를 마주 보고 한숨을 쉬며 이런 말을 했다.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던 커다란 가마솥 앞에서였다. “아이고,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아 이번 생에서 두부를 만든다 아입니까.” 무슨 말일까? 흔해빠진 두부 가게를 운영하면서 ‘전생(前生)’까지 언급할 이유가 있을까? 그땐 나도 어렸으니 생각이 단순했고, 세상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단편적일 때다. 말 그대로 동네 반찬가게에서부터 마트 식품코너까지 지천에 널린 게 두부지만, ‘제대로 된 두부’를 만들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일견 단순하게 보이는 ‘두부 만들기’는 시작부터가 쉽지 않다. 두부 맛을 좌우하는 콩의 선택이 첫 번째 과제. 공기 맑은 산간 지역에서 기른 해콩을 찾기 위해 경상북도와 강원도 산간 농가를 뒤지는 일은 피곤하고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작업. 그럼에도 ‘두부 맛집’ 주인장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자, 이제부터 또 여러 난제가 등장한다. 선택된 콩을 얼마나 오랫동안 물에 불릴 것인지, 불린 콩을 삶는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간수(습기 찬 소금에서 녹아 흐르는 짠 물)로는 어떤 걸 선택할지, 부드러운 두부가 엉기고 응고될 때까지는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려면 밤을 꼬박 새우는 게 일상사라고 한다. 이쯤 되니 앞서 말한 그 할머니가 ‘전생의 죄’를 이야기하며 짙은 회한을 털어놓은 것일 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잘 만든 두부 한 모는 세계에서도 이름이 높은 와규(和牛) 맛에 뒤지지 않는다. 콩의 단백질이 고가의 소고기 단백질을 압도하는 것. 그 맛의 비결을 투여된 시간과 지극한 정성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서너 해 전. 경북 상주의 유명 관광지를 취재하러 갔다. 밥때가 돼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을 서성거렸고, 동네 사람이 추천해준 고풍스런 옥호(屋號)의 식당 문을 열었다. 주방에서 비릿함을 누르는 잘 익은 콩의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식물성 단백질에서 건강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들기름에 구운 손두부는 영남은 물론 호남과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음식이 됐다. 그런데, 그 집은 두부를 ‘산초기름’에 굽는다고 했다. 두부와 산초라…. 생경한 조합이다. 음식에 관해 모험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맛은 어땠냐고? ‘천하일미’라고 하면 호들갑을 떤다고 욕을 먹을 터. 하지만, 산초기름 두부구이의 감칠맛은 아마 최소 10년은 혀와 코가 기억할 것 같았다. 딸려 나온 된장찌개와 더불어. 된장 역시 재료가 되는 건 콩이다. 허니, 그날 점심은 ‘콩의 향연’ 또는, ‘콩의 심포니’라 칭해도 무방했다. 협연자는 산초기름. 그 식당은 창업주가 40년, 물려받은 딸이 20년, 그러니 같은 자리에서 60년째 운영 중이다. ‘전생에 죄가 많은’ 두 여자의 고생이 만들어낸 ‘두부’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저 진미(珍味)라는 흔하디흔한 표현만으로 모자랄 것 같다. ▲송이버섯, 이 향기를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아우라(aura)’는 무시무시한 단어다. 무슨 뜻이냐고? 백과사전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이러니, 아우라란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카리스마(charisma)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경지를 지칭하는 것일 터. 올해 여든다섯이 된 영화배우 알 파치노. 그의 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휘는 ‘아우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하다. 시시껄렁한 싸구려 건달로 분했을 때, 뉴욕으로 옮겨간 이탈리아 마피아의 우두머리를 연기할 때, 20세기 말 세상을 절멸시키려는 악마로 등장했을 때…. 그는 배역에 따라 눈빛과 몸짓을 능수능란 바꾼다. 때론 젊은 깡패 같고, 어느 땐 조직폭력배 두목 같고, 드물게는 진짜 악마 같다. “배우로서의 그는 돌올하고 탁월하다”는 영화평론가의 말에 감히 누가 반기를 들겠는가. 2004년이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전인권 콘서트가 열렸다. 당시 내 나이 서른셋, 전인권은 공자가 말한 바 지천명(知天命). 쉰이었다. 대상포진으로 입술 아래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최악의 컨디션임에도 전인권은 ‘당장 죽어도 좋다’는 듯 절규했다. 그날, 전인권의 노래를 들으며 어떤 짐승을 떠올린 건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포효를 멈추면 숨이 끊기는 운명을 지닌 아마존 정글의 전설 속 맹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선글라스 속에선 내내 아우라가 번득였다. 전인권이 아니면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음식 이야기’를 한다면서 잡설이 길었다. 폐일언. 경상북도 영덕과 봉화, 울진 등지에서 귀물(貴物)로 대접받는 ‘어떤 버섯’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서설이 과했다.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은 ‘송이(松耳)’ 스토리다. 혀와 눈이 아닌 코로 먼저 맛보는 버섯. 서양엔 훈련된 돼지가 냄새를 맡게 해 채취하는 버섯이 있다. 참나무 뿌리에 붙어사는 트러플(truffle·송로버섯)이다. 이 버섯 역시 향이 좋기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송이버섯’의 향기에 비할 수 있을까? 울울창창 짙푸른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송이는 경북 북부와 강원도, 북한과 중국 등이 주산지인 귀한 식재료다. 버섯이지만 기이하게도 생선처럼 비늘이 있고, 옅은 갈색의 몸통은 사방 백리로 오묘한 냄새를 뿜어댄다. 탱탱하고 쫄깃한 식감이야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송이의 가장 큰 미덕은 ‘아우라가 깃들어있다’ 말해도 좋을 향기. 이게 먹는 버섯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이유다. 한국엔 음식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작가가 몇 있다. 소설가 성석제도 그중 하나다. ‘숨겨진 맛집’을 찾아다닌 그의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끼니때가 한참 멀었음에도 배가 고파온다. 바로 그 성석제가 쓴 산문 가운데 하나엔 서울 신촌의 일식집에서 ‘엄지손톱만 한’ 송이버섯 조각이 발산하는 향에 놀랐다는 경험이 담겼다. 그것에 비하면 내가 겪은 ‘송이 섭식’ 체험은 스케일이 폭력적(?)일 정도로 크다. 대략 20년 전.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에 신당을 차린 늙은 무녀(巫女)를 만났다. “당신 사주를 봐주겠다” 하길래 “난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했더니, 눈가에 주름을 만들어 웃으며 “그럼 송이에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 했다. 달콤한 제의를 왜 거부하겠는가? 무녀가 가마솥만한 커다란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콸콸’ 붓고 어마어마한 양의 송이버섯을 가져다 넣었다. 일행 셋이서 kg당 80만 원이 넘는 송이를 족히 2kg은 먹었던 듯하다. 괴발개발 기사나 쓰는 한빈한 월급쟁이가 평생 맛볼 송이버섯을 하루에 다 먹은 셈이었다. 그 송이는 ‘놀라운 향’이 없었겠는가? 그럴 리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난봄 경북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산불 탓에 올해는 물론, 향후 30년 가까이 영덕, 봉화, 울진의 송이버섯을 맛보기 힘들다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비단 미식가만이 아니다. 3등품 송이의 향기라도 맡고 싶은 이들의 실망감이 클 것 같다. 이 상황은 ‘아우라가 깃든 버섯의 비극적 절멸’인가? 조금 슬프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6-17

이야기와 함께하면 더 깊은 맛 나는 ‘영남 음식’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해 엮은 것이다. 홍 기자는 한국기자협회 미디어 리터러시 위원장이다...편집자 주 포항의 별미 ‘물회’… 고추장 본연의 맛으로 양념, 맹물·과일즙 부어 먹으면 일품 뱃일로 고된 시절 갓 잡은 생선에 찬물 붓고 훌훌 말아 넘긴 한끼, 삶이 담긴 음식 영남 북부 양반들이 귀하게 먹던 음식 ‘안동국수’… 고급 생선 ‘은어’로 끓인 한 그릇 투명하고 깔끔한 국물·매끄러운 면발… 별다른 고명 넣지 않아도 시원한 맛 자랑 ▲어부의 고단한 살과 일상이 만들어낸 별미 ‘물회’ ‘물’과 ‘회(膾)’는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인가? 최소한 내겐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진. 제법 열정적인 연애가 지속되던 날들이었다. 30대 초반인 사내와 20대 중반인 여자가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경북 안동까지,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짙푸른 파도 일렁이는 동해안 영덕 바다로 여행을 갔다. 대게가 맛있는 철이었다. 비싼 갑각류를 잔뜩 먹고 두주불사로 마신 다음 날. 해장 음식을 찾아 영덕 강구항 조그만 식당으로 갔다. 거기서 난생처음 ‘물회’란 걸 만났다. 크고 붉은 모조 보석이 박힌 금반지를 낀 호호백발 할머니가 잘게 썬 가자미 위에 양배추와 파, 고추장인지 초장인지 모를 시뻘건 양념을 듬뿍 올린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을 가져왔다. “시원하게 찬물을 부어 먹어봐. 속이 확 풀릴 거야.”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유년과 소년기를 보냈기에 회는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백부를 따라다니며 자갈치와 마산 어시장에서 수십, 수백 차례 먹어본 익숙한 것이니까. 그런데, 멀쩡한 횟감에다 뜬금없이 물을 붓는다?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게 맛이 나쁘지 않았다. 방금 손질한 날생선 특유의 쫄깃한 식감을 지닌 회가 아닌 물컹이며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회라니... 색다르고 생경한 요리 체험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도, 여자 친구도 달게 한 그릇씩 비웠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독특한 맛이었다. 그리고, 덧없이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40대 중반에 삶의 터전을 경북 포항으로 옮겼다. ‘물회’로 유명한 도시다. 바닷가는 물론, 시내에도 물회를 주된 메뉴로 파는 식당이 흔전만전이다. 당연지사 거기서 살게 된다면 누구나 자주 물회를 먹게 된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포항의 물회 음식점들. 각각의 식당마다 조금씩 다른 레시피를 가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양념장을 만들 때 고추장, 식초, 설탕을 섞는 비율과 철마다 달라지는 생선의 종류, 횟감에 붓는 물을 만드는 방식 등. 10년쯤 살다보니 다수의 관광객들은 자극적인 ‘단맛’이 강한 물회를 선호하고, 나이 지긋한 바닷가 어르신들은 과일즙이나 청량음료를 섞지 않은 전통 방식 고추장으로 양념해 맹물을 부은 물회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두어 해 전이다. 구룡포에서 반세기 이상 뱃일을 해온 건장한 노인을 만났다. 취재를 핑계 삼아 지척에서 물결 일렁이는 포구 목로에 술병을 놓고 마주 앉았다. 그날 안주가 우연찮게도 물회였다. 서너 잔 낮술에 취한 늙은 어부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흑백 테레비를 보던 시절부터 배를 탄 사람 아입니꺼. 지금이야 이렇게 멀끔한 식당에서 물회를 먹지만 옛날에야 그랬겠습니까. 뱃일이 생각보다 무지하게 힘들어예. 새벽부터 바다 나가서 그물 내리고, 올리고를 반복하다 보믄 제대로 밥 챙겨 묵을 시간이 없지예. 그저 잡아 올린 가자미, 볼락, 청어 같은 걸 손에 잡히는 대로 뼈째 칼로 썰어서 물 붓고, 찬밥 한 숟가락 말아 훌훌 마시듯 1~2분 만에 한 끼 때웠다 아입니꺼. 힘든 시절이었지예. 그때 생각하믄 세상 참 좋아졌다 아입니까.” 말을 마친 어르신이 젊은 시절 추억에 잠긴 듯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서야 제대로 알았다. 물회는 지난날 바닷가 뱃사람들의 고단한 노동과 힘겨운 일상이 만들어낸 음식이란 걸. 물회에 얽힌 ‘20세기 뱃사람들의 역사’를 말해준 그를 만난 이후부터다. 포항 죽도시장 식당 테이블에 오른 양념장 얹힌 가자미회나 청어회를 보면 물을 붓기 전 먼저 마음속으로 고마움과 바람부터 전한다. “세상의 모든 생선을 우리의 식탁에 올려주는 어부들의 고된 삶에도 행복과 웃음이 깃들기를. 그들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안동국수’냐? ‘안동국시’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확히 기억한다. 2019년 여름이다. 지금은 어울리지 않게 이름 앞에 ‘고(故)’자를 붙인 음식평론가 황광해(1957~2024) 선생과 안동역 인근 허름한 국숫집에 들었다. 점심은 먹었고, 저녁 먹기엔 이른 어중간한 시간. 뭘 모르는 내가 괜한 폼을 잡았다. “요즘은 어딜 가나 제대로 된 국수 맛을 보기 힘들어요. 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서요. 그렇지 않나요?” 마주 앉았던 황 선생이 가소로운 듯 씨익 웃더니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밀가루로 만들었는데 밀가루 냄새가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냐?” 그날 우리가 먹은 걸 ‘안동국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지역색을 드러내며 고풍스럽게 ‘안동국시’라 불러야 될까. 무어라 칭하든 그날 내가 맛본 건 ‘생애 최고의 국수’라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영남 북부는 이른바 ‘반가(班家)’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 곳이다. 종택(宗宅)이라 불리는 멋들어진 기와집이 적지 않고, 거기엔 아직도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섬기는 종손과 종부가 살고 있다. 안동 김씨, 의성 김씨. 진성 이씨, 풍산 류씨…. 16~18세기 이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집안의 후손들이 각자 가문의 자긍심을 지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가문들의 종택을 찾아가 나이 지긋한 종손, 범절 깍듯한 종부와 만나는 기회를 몇 번 가질 수 있었다. 취재를 업으로 하는 기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먼지 한 톨 없이 걸레질 된 반질반질한 대청마루에 앉아 그해 여든셋이 됐다는 종부가 가져다준 안동식혜를 받아들었다. 식혜에 고춧가루가 보이다니…. 영남 남부에선 보지 못한 스타일이다. 그러면 또 어때. 한 모금 마시니 땡볕에 달아오른 이마부터 시원하게 식는다. “손님이 오셨는데 아무 것도 드릴 게 없어 송구하다”는 단아하게 나이 든 종부의 겸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쪽진 머리의 팔순 넘긴 할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비취색 고운 비녀가 햇살에 반짝였다. “처음 시집와선 힘들었니뎌. 열여덟에 아무 것도 모르고 남편 하나 보고 여기로 왔으니까예. 사내들이 은어 잡아오믄 끓여서 국물 만들고, 밀가루에 콩가루 쪼매이 섞어 국수 반죽 밀어 철마다, 때마다 오시는 수십 명 손님상을 차려내야 했다아입니껴. 아마 젊은 양반은 모를낍니더. 우리 동네에선 제사 때도 국수를 쓴다 아입니껴.” 시간을 투자해 ‘안동국수’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찾아본 건 그 종부 할머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도 뒤졌다. 실제로 ‘안동국수’라 불리는 음식은 과거 영남 북부의 양반들이 먹던 별식이었다. 은어로 국물을 냈다는 것도 고문헌에 남아 있는 사실이다. 은어는 ‘수중군자(水中君子)’로 불리는 물고기. 조선 시대엔 왕에게 진상하던 생선이었다. 한양으로 은어를 특급배송(?)하는 하위직 벼슬아치가 있었을 정도. 은어 배송이 실패하면 치도곤을 맞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 귀한 물고기를 사용해 국물을 내고, 옛날엔 지금처럼 흔치 않았던 밀가루로 면을 만들었으니 수백 년 전 국수는 지금과는 그 위상 자체가 판이했을 터. 그해 여름. 취재를 함께 간 황광해 선생을 채근해 ‘제대로 된 안동국수’를 만드는 식당에 찾아갔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전처럼 은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국물은 투명하며 깔끔했고, 면발은 더없이 매끄러웠다. 별다른 고명을 얹지 않았음에도 특별하지 않은 국수가 내는 ‘특별한 맛’에 매료됐다고 해야 할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다. ‘국수’라고 이름 한 걸 만나는 끼니때면 언제나 여든셋 키 작은 안동 종부와 수중군자 은어를 먼저 떠올리는 건.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