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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의 공급구역 제한이 풀리면서 날개를 달아

등록일 2025-10-01 18:09 게재일 2025-10-02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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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노포 기행] 동해명주 - 세계인의 술잔을 채울 막걸리②
발효실 내부.

동해명주의 역사는 1955년 도구양조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양조장은 읍면동 단위로 대개 하나씩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 양조장 대단위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역 단위로 양조장이 통합되었다. 포항의 경우 12개 동이 합쳐져 합동 양조장이 탄생했다. 이 시기 양조장 주인은 지역에서 대표적인 부자로 통했다.

1970년대만 해도 포항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막걸리 소비 도시였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전국 1인당 막걸리 소비량이 38리터였는데, 포항은 105ℓ나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 비하면 10배 가까이 되었다. 아래 『매일경제』 기사를 보자.

1970년대 손꼽히는 막걸리 소비도시로
전국 1인당 소비량 38ℓ, 포항은 105ℓ나
70년 역사 이어온 ‘동해양주’가 산 증인

 

1992년 지역 최초 100% 쌀막걸리 출시
2000년 들어 ‘포항의 제1 양조장’ 급성장
양수길 대표 전국 최초 합동 양조장 제쳐

 

포항TP•포스텍 공동 개발 ‘영일만 친구’

과메기와 함께 포항시 공동브랜드 등극
포항 쌀 최다 사용, 업계 1위 기업에 올라

 

2011년 양조공장 현대화… 새 도약 전기
발효탱크 술 온도 관리 자동화시스템 전환
양조 품질•생산 효율성 동시에 향상 계기

국세청에 의하면 1970년 한 해 동안 막걸리의 국내 총소비량은 122만 6800㎘로, 맥주 소비량보다 13배 이상을 앞지르고 있다. 막걸리의 1인당 평균 소비량은 38.6ℓ로, 서울은 이보다 훨씬 적은 11.5ℓ로 나타났다.

막걸리의 소비량은 지역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인다. 각 도별로 보면 경북이 52.9ℓ로 가장 높고 제주도가 7.3ℓ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지역별로 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신 지역은 경북 김천시로 1인당 106ℓ를 마셨고, 다음이 경북 포항으로 105ℓ를 마셨다. 가장 적게 마신 경북 안동은 3.2ℓ를 마셨다.

- 「막걸리 소비 여전히 수위 맥주보다 13배 많은 22만 ㎘」, 『매일경제』 1971년 5월 3일자.

양민호 대표는 70년 역사의 동해명주 자체가 산증인이 아니겠냐고 자부했다.

“포항은 복합적인 도시잖아요. 농업과 어업 그리고 공업까지 고루 갖춰진 데가 많지 않은데, 거기에 해병대도 있고요. 전국적으로 양조장이 존속되는 지역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70년 역사의 동해양주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포항은 양조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술 탱크에서 익어가는 막걸리.

1992년 포항 최초로 100% 쌀막걸리 출시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동해명주의 역사는 바로 지역 양조사가 된다. 동해명주에서 가장 오래된 막걸리는 밀막걸리다.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자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쌀막걸리가 우세한 지금은 밀막걸리를 포기한 양조장이 많지만, 동해명주는 꾸준히 전통을 지켜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밀 누룩이 아닌 쌀누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이야 쌀이든 밀이든 원하는 대로 고르면 되지만, 선호하는 막걸리를 고를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막걸리의 재료 선택은 정부의 방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66년 막걸리 제조에 쌀이 금지된 뒤, 1977년 대풍이 들어 일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가격이 비싸고 맛이 싱거워 반응이 좋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서민층에 각광을 받으며 되살아난 막걸리의 인기가 갈수록 떨어진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포항세무서가 집계한 주세 징수 실적에서 나타난 쌀막걸리 출고량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쌀막걸리가 처음 선을 보였던 1977년 12월엔 210만 리터가 출고돼 이에 부과된 주세가 1228만 원이었던 것이 지난 1월엔 162만 ℓ에 주세가 1009만 원으로 크게 줄었고, 지난달에는 117만 ℓ에 주세가 731만 원밖에 안 돼, 두 달 만에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쌀막걸리에 대한 외면은 소비성향이 높은 도시보다 농촌이 더욱 심하다. 포항주조협회에 따르면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로 술을 빚었을 때는, 농민들이 쌀 한 되를 가지고 막걸리 3~4되를 바꾸어 마실 수 있었으나 요즘은 맛도 떨어진 데다 2~3되밖에 바꿀 수 없어 거의 소주를 즐겨 마신다는 것이다.

- 「전국실태-포항」, 『동아일보』 1978년 3월 25일자.

1979년 다시 쌀이 부족해지면서 쌀막걸리 제조가 중단되었고,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허용되었다. 당시 동해양조장은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했다. 1991년에 낡은 목조 양조장을 철거하고 시멘트 건물로 공장을 신축했다. 이듬해 포항 최초로 100% 쌀막걸리를 출시하며 쌀막걸리 시장에 신속하게 진입했다. 연구와 개발을 이어온 덕분에 규제가 풀리자마자 출시했고,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내연산 보경사 앞 식당 거리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청와대 만찬주로 쓰인 영일만친구 막걸리(2012). / 동해명주 제공

합동 양조장을 이긴 전국 최초의 개인 양조장

2대 양수길 대표는 양조장을 ‘도구’에서 ‘동해’로 이름을 바꾸고 면 단위를 대표하는 양조장으로 키웠다. 그랬던 양조장이 2000년 들어 포항 제1의 양조장으로 급성장한다. 정부의 ‘막걸리 공급구역 제한 해제’ 덕분이다. 막걸리의 공급구역을 제한하던 시기에는 다른 양조장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낙후된 주류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막걸리의 공급구역 제한제도가 폐지되었다. 양조장의 선택에 따라 전국 어디든 막걸리를 유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전국의 양조장이 경쟁하게 되는 상황이 되자 많은 양조장이 문을 닫았지만, 동해명주는 오히려 이 시기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양민호 대표는 “구역제에 막혀 판로가 답답하던 시장이 뚫리기 시작하니 날개를 단 셈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양조장 구역제 시절에 포항에서 5위 남짓한 양조장이 자율화되자 2위에 오르더니 합동 양조장을 제치기에 이르렀다. 양 대표는 “합동 양조장을 이긴 전국 최초의 개인 양조장”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동해명주의 성장은 도전과 연구의 결과였다. 포항테크노파크와 포항공대의 공동 연구로 개발한 ‘영일만 친구’가 그것이다. 가수 최백호가 부른 노래를 막걸리 이름으로 붙인 것으로, 막걸리와 우뭇가사리의 조합이 눈길을 끌었다. 포항 과메기가 전국 브랜드가 되고 겨울 술안주로 각광받으며 포항시 공동 브랜드가 되었다.

100퍼센트 포항 쌀로 만들었다는 점도 주목을 끌었다. 이로써 동해명주는 전국에서 포항 쌀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업으로 등극했고, 포항 시장에서 업계 1위로 올랐다. ‘영일만 친구’는 여전히 동해명주의 효자 품목으로 “전국의 민관 협업으로 만들어진 막걸리 중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 지속된 막걸리”로 평가받는다.

발효실과 숙성실을 원격으로 관리

‘영일만 친구’의 선전은 그즈음 불어닥친 막걸리 열풍과도 맞아떨어졌다. 2008년부터 막걸리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금융 위기로 저렴한 술이 소비되는 풍조, 웰빙 열풍, 문화 전반의 복고풍 영향, 일본에서의 막걸리 인기 등 복합 요인이 작용했다. 동해명주는 2011년에 또 한 번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양조 공장의 확장과 현대화를 목적으로 2층 규모의 공장 건물을 신축했다. 2층에는 원료 처리실과 발효실이 있고, 1층은 제성실과 병입실, 창고가 자리한다.

이때 발효 탱크의 술 온도 관리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발효조의 온도 센서 패널을 디지털로 바꾸고, 원격 시스템을 연동해 온도를 제어했다. 막걸리 양조 작업이 고되어 일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고안한 방안이다. 외부에서도 휴대전화로 발효실과 숙성실을 원격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작업 관리의 부담을 줄인 것은 물론, 양조 품질과 생산 효율성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글 : 배은정(소설가) / 사 진 : 김 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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