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노포 기행] 권창화양복점-맞춤 양복, 인생을 바친 예술작품③
“양복업자들은 대개 인물도 몸매도 좋았어요.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근무하니 다들 멋있다고 했죠. 그런데 속은 다 문드러져 있었어요. 선배들 중에 70대에 세상 떠나신 분이 많아요. 양복지(洋服地)에 워낙 먼지가 많으니까요.”
1980년대 이후 기성복 선호 경향이 뚜렷해졌다. 88올림픽 이후 국내 양복의 역사가 맞춤식에서 기성복 시대로 바뀌면서 맞춤 양복점은 쇠퇴기로 들어섰다. 한창때에는 150여 곳에 달했던 포항의 맞춤 양복점은 지금 죽도시장, 중앙동 등에 서너 곳만 남았다. 그 많던 양복 기술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권창화 재단사에 따르면, 포항 시내 양복점 절반 정도는 세탁업으로 전환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양복사는 수선을 병행하는 세탁소로 성공하기도 했고, 일부는 프랜차이즈 양복점으로 업종을 바꿨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업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맞춤 양복업 호황 대기업 뛰어들며 급변
멋진 배우 기성 양복 광고… 고객들 이탈
결정타는 IMF 사태… 업종 사라질 위기
“내 몸에 딱 맞는 옷 어디서도 찾기 어려워”
맞춤 양복을 경험한 이들 그 매력 푹 빠져
기성복과 달리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이기에
재단사로 일한 지 올해로 48년째인 권씨
첫 직장이자 지금까지 이어온 그의 인생
“값을 매길 수 없는 정성, 인정받는 날 오길”
맞춤 양복, IMF 때 결정타 맞아
권 재단사는 맞춤 양복업의 호황이 계속될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젊을 땐 술을 좀 했습니다. 해만 빠지면 친구 예닐곱이 가게 앞에서 기다렸어요. 권창화한테 가면 술 얻어먹는단 소문이 돌았거든요.”
당시 그의 가게 앞 풍경은 호황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권 재단사는 “88올림픽 이후 이삼 년은 그래도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LG패션, 반도패션 등 대기업들이 양복업계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텔레비전 광고에 멋진 배우들이 나와 기성 양복을 광고하면서 맞춤 양복 고객이 대거 빠져나갔다.
초기에는 이른바 메이커 양복이 비쌌지만, 시간이 지나자 가격이 역전되고 격차도 벌어졌다. 결정타는 1997년 IMF 사태였다. 맞춤 양복 종사자 수가 급감하면서 업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매년 발간되는 『한국직업사전』에는 1950년대부터 맞춤 양복 관련 직종이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 『한국직업사전』에는 맞춤 양복공, 의복가봉공, 맞춤 양복 견습생이 수록되어 있지만, 2000년대에는 양복 관련 직업으로 ‘양복제조원’만 수록되어 있다. 세분화한 양복 관련 직종을 모두 합쳐 부르는 말이다. 2010년에는 ‘양복사’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재단사와 봉재사가 모두 합쳐진 직종이다. 견습생 직종이 사라진 것에서 맞춤 양복의 흥망과 직업 선호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 정붓샘, 「노포의 탄생」, 『100년의 테일러, 종로양복점』, 국립민속박물관, 2014, 130쪽.
1990년대에 기성 양복이 전체 양복 소비의 80퍼센트를 차지하면서, 맞춤 양복업계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양복점 1500여 곳이 폐업하고, 업계 종사자 약 18만 명이 이탈했다. 권창화양복점도 예외가 아니어서 IMF 이후 다섯 차례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IMF 이후 구 포항역전으로 이전했다가, 2000년에는 건물주가 건물을 매각하면서 구 역전파출소 앞으로 옮겼다. 이후 중앙상가 확장으로 2002년 신흥동으로 내쫓겼다가, 2007년 구 포항전화국 앞 현 위치에 정착했다. 가게를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상패를 모두 내버렸다. 현실이 팍팍하니 한때의 영광이 부질없어 보였다.
“노포가 인정받는 시절이 올 줄 알았으면 남겨둘 걸 그랬어요.”
권 재단사는 지난 20년 동안 양복업을 접을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다. 돈이 되는 업종으로 전환해보려고 가족이 나서 신시가지 유동 인구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내에게 큰 병이 찾아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기성복과의 가격경쟁 위해 ‘반맞춤’ 방식 도입
현 위치에 정착한 뒤에야 비로소 숨을 고른 권 재단사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먼저 꺼낸 카드는 고급화 전략이다. 그는 과감하게 이탈리아 명품 원단을 들여오고, 실력 있는 기술자에게 공임을 더 얹어주며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역에서 300만 원에 이르는 맞춤 양복을 구매할 만한 고객층이 두텁지 않았던 것이다. 원단 공급업체는 최소 열 벌 이상을 구입해야만 견본 책자를 제공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부담은 늘어갔다. 끝내 판매하지 못한 원단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다.
한편으로 기성복과의 가격경쟁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도 도입했다. 재단된 옷감을 전문 재봉회사에 위탁해 제작하는 MTM(Made to Measure) 방식, 즉 반맞춤 방식이다. 이지오더(easy order)라고도 불리는 방식으로 미리 정해진 디자인과 원단으로 체형별 표준 치수에 맞춰 옷을 생산한다. 가봉 과정이 생략되니 신속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권 재단사는 한국기능올림픽과 일본기능올림픽 수상 경력의 재봉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품질 좋은 양복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국산 원단 기준 120만∼150만 원대 맞춤 양복을 절반 비용에 제공할 수 있어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도 베테랑 재단사의 눈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표준 체형은 무리가 없었지만 특수 체형은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단사의 손이 일일이 닿지 않는 시스템으로는 고객이 100퍼센트 만족하는 양복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맞춤옷이란 좋은 자리를 빛내기 위해 큰맘 먹고 해 입는 옷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허투루 작업할 수 없죠. 고객이 좋은 자리에서 귀한 대접을 받도록 하는 일이니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포항의 최고령 현역 재단사
누군가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은 수없이 해온 작업이지만 여전히 신경이 곤두서는 순간의 연속이다. 미세한 주름 하나를 다듬고 고쳐 세우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원단을 재고, 자르고, 꿰매고, 다시 뜯기를 거듭하는 동안 손가락은 늘 얼얼하고 시렸다. 그렇게 50년을 매달려왔지만, 지금도 한 벌 한 벌에 온 힘을 쏟아붓는 긴장감은 변함없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찾아주는 고객들이 있어 힘들고 고된 시간을 잊게 된다. 얼마 전에는 포항 해병대 청룡회관에서 근무했던 고객이 15년 만에 연락을 했다. “이리저리 유명한 곳을 다녀봐도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찾기 어렵다”며 다시 주문을 의뢰한 것이다.
이처럼 한번 맞춤 양복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몇 가지 패턴으로 만들어지는 기성복과 달리 단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랜 단골손님들을 마주하면 그들에게도 여지없이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발견한다. 처음 발길을 했던 청년이 중년으로 접어들고 이제는 장성한 아들을 데려와서 양복을 맞춰주는 모습을 본다. 대를 이어 맞춤 양복의 품격을 입혀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더 정성을 들인다.
재단사로 일한 지 올해로 48년인 권 재단사에게 맞춤 양복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군 제대 후 첫 직업이었고 모든 걸 바쳤어요. 지금까지 먹고살아온 것도 양복 덕분이죠. 그래서 정리해야 할 나이인데도 붙잡고 있어요.”
권 재단사에게 양복은 인생 그 자체다. 양복점이 첫 직장이었고 가족을 먹여 살렸고 지금까지도 놓지 못하니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이다. 권 재단사는 포항의 현직 재단사 가운데 최고령자다. 그는 돈으로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정성이라는 가치가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권창화양복점을 지킨다. 〈끝〉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