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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했던 시대, 구룡포의 자연에 사람의 정성을 더한 국수

정철화 기자
등록일 2025-11-05 18:22 게재일 2025-11-0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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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노포 기행] 제일국수공장-구룡포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굽은 손가락 ①
건조 중인 해풍국수. /경북매일DB

나는 몰랐다.

무지한 편견으로 살았다. 국수가 다 그런 줄 알았다. 멸치국물에다 데친 나물 몇 점, 그것은 미나리이거나 부추무침이거나 호박나물이거나 달걀지단 등등 재료들의 향긋함과 고소함. 마늘과 쪽파를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고명이면 최고인 줄 알았다. 정작 주인공인 국수의 존재는 무시했다. 무지도 이런 무지가 없었다. 앙꼬 없는 진빵을 먹고 고무줄 빠진 팬티를 입고 돌아다닌 꼴이었다.

1969년 문을 연 구룡포 제일국수공장의 창업자인 이순화(86) 여사의 가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작정 철규분식으로 향했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만 사용하는 가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쉬는 날이었다. 그 옆에 있는 삼광상회로 발을 돌려 국수를 시켰다. 자그만 양은냄비에 담긴 적당한 양의 국수가 앙증스럽다. 최소한의 부추와 양념이 올라앉아 있다. 먼저 국물을 들이킨다. 적당하게 차가운 향이 그윽하다.

 스물아홉 구룡포로 시집 온 이순화 여사
생업 위해 국수공장 한 켠서 일하며 창업
전문가 2명 모셔 직접 배우며 경력 쌓아
‘해풍국수’ 이름 건 이순화 표 국수 탄생


밀가루•소금•물로서만 만드는 수제국수
기술이 아닌 몸으로 익힌 ‘경험의 산물’
소금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 보며  
감각 키우고 새벽마다 바람부터 헤아려


 기계 반죽•열풍기 건조땐 7~8시간 충분
온전한 수제 생산은 빨라도 이틀 넘겨야
날씨•바람 따라 사나흘까지 험난한 과정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면에 도전한다. 편견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혓바닥을 휘어 감는 면발의 부드러운 몸부림이 목젖까지 공격해온다. 너무 매끄러워 그냥 삼켜도 무난할 듯싶다. 쫄깃하다느니 탱탱하다는 진부한 표현은 그만두어야 한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는 그 둘을 합하고도 그윽함과 넉넉함이 넘친다는 표현을 포함해야 한다. 맑은 육수 외에는 별다른 간을 하지 않는다는 삼광상회 주인장의 말을 빌리면, 참으로 적당하게 국수에 소금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한판의 능란한 블루스를 본다. 필자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멸치국수」다. 대략 옮긴다.

웨이브가 농염하네/장작의 부추김이 은근하네/짓이겨 뭉개져도 이마에 남는 마늘 향기/희생과 흔적은 이런 것이라 일러주네/팔팔 끓는 뙤약볕 밀밭의 추억//너무 정직하게 참 착한 햇살과/결 고운 바람 차분한 뒤뜰의 풍경마저 담겨 있네//바다의 뒤통수가 보이네//마치 첫 입맞춤의 그 비릿함의 멸치국수.

이순화 여사는 스물아홉에 감포에서 구룡포로 시집왔다. 공군으로 근무하다 막 제대한 남편은 철부지였다. 식구도 많았다. 남편은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더 열심이었다. 당연히 가정사에는 소홀했다. 문득 남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친정에서는 곱게 자란 여식이었지만 시집온 이상, 뼈를 묻어야 할 가정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여사는 시장에 자리를 빌려 옹기 장사를 했다. 그때 많은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제일국수공장의 창업자인 이순화 여사.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

시장은 사람의 공간이다. 그때 구룡포시장에는 국수공장이 일곱 군데나 있었다. 옹기 장사로는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돈을 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수공장의 끄트머리에서 국수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국수를 만드는 방법도 몰랐다. 의욕은 앞섰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본이 부족했다. 그러나 사업 전망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질보다 양이라고, 고픈 배를 불리는 데 국수만 한 음식이 없었다. 구룡포답게 상품성이 없는 생선이나 지천으로 깔린 푸성귀를 넣고 끓이면 훌륭한 한 끼 저녁식사가 해결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배부르면 장땡이었다.

어부들도 먼 바다로 나가면 식사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국수였다. 밤샘 작업을 하고 새벽에 돌아온 어부들의 빈속을 채워주는 뜨끈한 식사이자 해장국으로 칼칼한 어탕만 한 것이 없었다. 맑은 소주와 붉은 어탕으로 내일을 구축하는 머나먼 삶의 설계에, 미약하나마 국수는 삶을 위한 음식이었다. 그것을 ‘모리국수’라 했다. 멸치국수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렇게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았다.

자타공인 전문가 두 분을 모시고 제품을 생산하면서 일을 배웠다. 2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국수를 생산했다. 이순화 표 국수는 밀가루와 소금과 물이 전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바람을 관찰한다.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이다.

해풍국수만 사용하는 철규분식.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 걸려

감각은 경험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감각을 계발하고 유지하며 일상적으로 적용하려면 섬세해야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우며 눈여겨본 노동에 성실이 더해지면서 이순화 표 국수는 ‘해풍국수’라는 이름으로 거듭 탄생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냥 국수라고 취급하면 그 차이를 모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든 국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비슷하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국수나 손으로 직접 생산하는 국수는 외형적으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의 혼이 깃든 제품은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효용성을 아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삶의 질을 고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감하는 능력은 사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기대 이상의 실용적이며 정신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문화의 힘은 누리는 것에 있다. 실용성만 따지면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다. 장삼이사의 수준에서 그냥 단순한 실용성에 머물며 만족하고 만다. 그렇게 살아도 크게 문제가 될 것도, 불편할 것도 없으며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옹호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게 되고 자리가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이순화 여사는 염도계의 존재를 모른다. 처음 일을 배울 때부터 전문가들에게 소금의 양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조금씩 물에 소금을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감각을 키웠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면서 익힌 경험의 산물로 굳어졌다. 날씨에 따라 소금의 양이 달라진다. 추운 날씨에는 평소보다 조금 많게, 여름에는 적게 넣는다. 흐린 날씨에는 적게, 바람이 약하면 많이 넣는다. 자연건조를 고집하는 탓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기계로 반죽하고 열풍기로 건조하고 최신 기계로 절단하면 일고여덟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온전하게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이 걸린다.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 사나흘도 걸린다. 지금이야 기계로 반죽하지만 처음에는 여물통 같은 됫박에다 손수 밀가루를 치대야 했다. 그 험난한 과정을 비틀리고 굽은 손가락이 증명하고 있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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