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상회-사람과 장사에 대한 예의를 지켜온 죽도시장의 산증인①
죽도시장이 어디 만만한 시장인가. 대한민국 10대 시장으로 손꼽히는 곳이자 시장의 의미를 뛰어넘는 광장이 아닌가.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모여드는 큰 시장이자 유통의 요충지다. 지금도 그 명성은 여전 하지만 다양한 유통구조의 발달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죽도시장에 대한 포항 사람들의 애정과 자부심은 차고 넘친다. 죽도시장 없는 포항은 상상하기 어렵다. 포스코가 힘줄이라면 죽도시장은 실핏줄이다.
김용문 대표의 선친인 김석이 창업자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 배워
귀국 후 죽도시장서 만물상으로 시작
“어려울 때 도움 되는 사람이 돼야 ”강조
한국전쟁 땐‘아모레’에 물건값 돌려줘
그 인연으로 1965년 대리점 제의 받아
사훈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변수 난무하는 장터서 평생 지키며 살아
생전 25년간 펼친 장학사업도 연장선
죽도시장은 면적이 14만 8760㎡이고, 점포 수는 2500여 개에 달한다. 좌판 몇 개로 시작한 초창기를 생각한다면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다. 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은 소비자가 된다. 단순히 일회용 소비자가 아니라 지속적인 구매자의 자격을 스스로 획득한다. 시장 상인들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깨끗해야 하며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장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신성상회 김용문(72) 대표는 말한다. 만물상으로 시작한 신성상회는 속옷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다. 77년의 역사가 고이 간직된 가게로 죽도시장의 역사와 오롯이 그 궤를 같이한다.
창업자 김석이, 일본에서 세탁소 견습생으로 출발
신성상회는 김용문 대표의 선친이 처음 시작했다. 선친의 존함은 김석이(1911∼1996)다. 그는 포항에서 태어나 대송국민학교를 졸었했으며, 일찍 뜻을 세워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를 배웠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앞날을 도모하려면 장사를 배우는 것이 최선의 방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부족한 언어 실력은 노력으로 때우면서 오기와 끈기 그리고 성실로 버텨냈다. 나가사키 우동을 꽤나 끓여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나가사키 우동은 구룡포의 모리국수와 같은 메뉴로 그날그날 얻은 남루한 재료를 몽땅 집어넣고 끓인 우동이다. 영양보다는 오로지 한 끼를 때우기 위한 최소한의 간편식이다. 그냥 잡탕국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선친이 일본에서 처음 접한 직업은 세탁소 견습생이었다. 보이지 않는 멸시와 견제, 열악한 생활환경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일에 전념했다. 고국을 등지고 이역만리를 선택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0년을 그렇게 일했다. 그 시절을 지켜본 일본인 세탁소 주인이 강력하게 추천해 본격적으로 세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경영을 시작한 것이다. 타고난 성실과 추진력으로 일에 매진한 결과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선친은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모나지 않게 어울려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선친은 몸소 보여주었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그때의 경험이 이어져 옷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고 선친은 회상하곤 했다. 그리고 겉옷을 완성하려면 속옷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고 한다. 기본을 익히고 멋과 예절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드러나는 인상은 그 모든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김 대표는 그렇게 미루어 짐작한다. 선친은 사진에서 보더라도 옷을 입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정갈함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움은 그 감각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좌판 몇 개가 내항(內港)의 늪지대인 뻘밭에 들어서면서 죽도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사람이 다니기 힘든 뻘밭이다 보니 규모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 부는 황량한 들판에서 시작된 1950년대를 지나 1969년에 죽도시장번영회가 설립되면서 죽도시장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선친은 죽도시장에서 좌판을 폈다. 좌판에는 비닐 포장지, 빚, 지압기, 옷, 바가지, ‘동동구루무’ 등이 널려 있었다. 이처럼 신성상회는 거래가 가능한 거의 모든 것을 취급하는 만물상으로 시작했다. 신성상회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아모레화장품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많은 물건 중에 화장품과 인연이 된 일이 있었다. 지금은 굴지의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이 ABC화장품이었다. 선친은 당시에 ABC화장품의 제품을 팔면서 아모레퍼시픽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다른 사람들은 피난 가기 바쁠 때 선친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큰 회사가 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라도 받은 물건값을 돌려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과 장사에 대한 예의다.”
그 길로 선친은 외상 잔금을 모두 챙겨 서울에 다녀왔다.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그 후 1965년쯤 아모레퍼시픽이의 경영이 정상화되면서 전국적으로 대리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런데 어느 날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회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한 직원이 선친을 찾아왔다. 그 직원의 말에 따르면, 서 회장이 포항에 가서 신성상회 김석이 대표를 만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 직원은 김석이 대표가 아모레화장품 대리점을 할 생각이 있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서 회장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아모레화장품 대리점을 지난 4월에 작고한 큰형님(김박문, 1938년생)이 맡아 경영했다고 한다. 큰형님은 그 대리점 외에 청하 조사리에서 친구와 식품업을 동업했는데 갑자기 부도나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고, 그 여파로 화장품 대리점을 접었다.
선친은 신성상회 안 정면에 이런 사훈을 걸어두었다.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보면 웃을 수 있는 고색창연한 사훈일 수 있겠지만 그 내용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변수가 난무하는 장터의 장사꾼으로서는 더더욱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선친은 그 사훈에서 벗어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다. 선친이 살아생전 25년 정도 이어간 장학사업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배수강 포항시장 재직(1967. 11. 15.∼1969. 8. 8.) 때 시장 건물을 불하받았다.
여담이지만, 당시 죽도시장에서 있었던 불하는 대검에서 ‘부정 불하’로 판단해 배수강 시장과 포항시 공무원, 은행 지점장 등 7명을 기소함으로써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죽도시장 부지 3909평을 감정가보다 낮게 시장번영회에 불하해 국고 손실을 끼친 혐의를 적용한 것이다.
여하튼 당시에 번듯한 가게 이름을 내걸고 제법 규모를 갖춘 매장을 내어 한자리에서 77년을 보낸 것이 신성상회의 역사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