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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대를 이어 양복점을 열다

등록일 2025-10-15 19:07 게재일 2025-10-1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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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노포 기행] 권창화양복점-맞춤 양복, 인생을 바친 예술작품①
1982년 양복점 확장을 기념해 친척들과 함께.

1980년대 권창화양복점은 포항의 사회 초년생이 꼭 들르는 곳이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 양복은 필수품이었으니 양복점은 통과의례 같은 곳이었다. 양복점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옷 선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흔했다. 연배가 있는 이들은 권창화양복점보다 10여 년 먼저 문을 연 대일라사를 선호했다. 아버지가 전통적인 스타일을 고집하면 아들은 세련된 ‘핏’을 내세운 권창화양복점을 찾았다. 포항 신사들의 옷맵시를 책임진 양복은 권창화(73) 재단사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반세기 동안 양복을 지어온 그는 일흔을 넘는 지금도 멋스러운 감각을 유지했다.

1977년의 전통 잇는 포항 ‘권창화양복점’
고교시절 의복 기술 배운 권창화 재단사
과거 타자기로 찍은 상표에 자부심 담아

 

부친 권학주씨, 일본인에 의복 기술 배워
광복 후 오천 미군부대서 군복 세탁·수선
1956년 포항 중앙상가 ‘중앙양복점’ 오픈

 

군 제대 후 부친의 건강 악화로 가업 이어
중앙상가서 시작 5년만에1982년 전성기
직원 20여명과 월 250~300벌 주문 소화
세련된 맞춤 핏으로 승부… 손님들 발길

포항 북구 신흥동에 위치한 권창화양복점은 전성기에 비해 규모는 줄었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작업대 한쪽에는 ‘TAILOR’S KWON CHANG HWA, SINCE 1977’을 찍던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다. 옷감 위에 직접 글자를 인쇄하는 방식인데, 지금은 잉크를 구할 수 없어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게 인쇄된 상표는 바지와 상의에 하나씩 꿰매 붙였다. 오랜 역사를 품은 상표는 재단사에게도 고객에게도 자부심이 되었다.

옷본이 그려진 재단 종이를 지그시 누르는 둥근 누름쇠는 제철소에 다니는 한 고객이 선물한 것이다. 그 누름쇠는 단추 구멍을 뚫을 때도 사용하는 것인데, 낡은 걸 보더니 회사에서 직접 만들어 가져왔다. 손때 묻은 무쇠 다리미, 무쇠로 만든 소매 다리미판, 날이 다 닳은 묵직한 가위, 누렇게 바랜 고객 명단이며 미수금 장부까지 저마다 세월의 흔적이 배었다.

권 재단사의 빈틈없는 솜씨는 부친 권학주 씨로부터 이어졌다. 경북 군위 출신으로 1920년생인 권학주 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양복사한테 양복 기술을 배웠다. 재단과 양복(서양식 남성 정장), 양장(서양식 여성 정장), 두루마기를 두루 섭렵한 의복 장인이었다. 한복과 양복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지 않은지 물으니, 1990년대까지 한복을 맞출 때 두루마기만은 양복지(洋服地)로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양복이 우리나라 복식에 적용된 예가 두루마기라는 것이다. 양복지 두루마기는 한복이 아닌 양복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양복점에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옷감 위에 글자를 찍던 타자기.

군 제대 후 가업을 이어받아

권학주 씨는 광복 후에 오천 미군 부대에서 군복 세탁과 수선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1956년 포항 중앙상가 무궁화백화점 자리에 ‘중앙양복점’을 열었다. 뛰어난 기술 덕분에 주문이 몰렸다. 포항 도구리 동해면사무소 앞에 400평 저택을 지을 정도로 부를 쌓았다. 친척들에게 하숙방을 제공할 만큼 늘 북적거리는 저택에서 권 재단사는 태어났다.

부친은 솜씨만큼이나 인물이 출중했다. 주위에서 “네가 아버지만큼 생기면 영화배우도 했을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선친은 지역 유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부를 누렸으나 재산 관리를 잘 못 하여 가세가 기울고 말았다. 권 재단사는 고등학생 시절 부친 곁에서 재단 기술을 배웠지만 평생의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고령의 부친이 더 이상 가위를 잡을 수 없게 되면서 양복점의 대가 끊어질 처지가 된 것이다. 가업을 잇느냐 끊느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양복사의 길을 선택했다.

1977년 7월 7일, 권 재단사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권창화양복점’을 개업했다. 당시만 해도 주인의 이름을 내세운 양복점은 드물었다. 군 제대 후 무일푼이던 그는 형수에게 빌린 100만 원으로 중앙상가에 작은 가게를 마련했다. 선풍기 부품을 조립해서 판매하는 ‘한일정’ 옆자리였다.

권 재단사의 뛰어난 솜씨 덕에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루자 한산하던 골목은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그러자 한 골목에 양복점만 열 곳 넘게 새로 문을 열었다. 권 재단사 덕분에 상권이 살아났다며 상인회에서 감사패를 전했을 정도다. 한적한 골목에 4평짜리 점포로 시작했는데 불과 5년 만에 옆 가게와 뒤쪽 주택을 매입해 확장했다. 1982년 가게 확장을 기념해 친척들과 촬영한 흑백 사진 한 장이 현재도 가게 입구에 걸려 있다. 이 시기가 권창화양복점의 최전성기였다.

포항 북구 신흥동에 위치한 권창화양복점.

양복점 전성기 때 직원 20여 명을 고용해

한국 남성 맞춤복의 전성기는 1960년대부터 80년 중반까지로 본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양복 문화가 보편화되고 토착화한 시기다. 양복 수요가 급증하면서 권창화양복점도 성황을 이루었다. 결혼을 앞둔 손님은 예복으로 일곱 벌에서 열 벌까지 맞췄다. 신랑 양복만 계절별 정장에 코트까지 최소 네 벌이 기본이었다.

“한 달에 250벌에서 300벌씩 주문을 받았습니다. 문만 열면 주문이 밀려왔으니까요.”

한창때에는 2층 건물에 직원이 20여 명이었다. 주문과 경리, 재단 보조, 상의 담당, 바지 담당, 수선 등 분업 체계가 철저했다. 맞춤 양복은 분야별 전문 기술자들이 숙련된 솜씨를 발휘해 완성되었다. 한 벌을 제작하는 데에는 재단사, 상의 재봉사, 바지 재봉사, 마무리 전문 담당 등 최소 네 명이 협업했고, 다림질 담당과 가봉사 등의 분야가 추가되었다.

맞춤복 산업은 어린 견습생이 밑바닥부터 기술을 익히는 전형적인 도제 시스템이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꼬마’는 심부름부터 시작해 가봉, 수선, 바지, 상의 담당으로 단계를 밟았다. 수선 전문가를 ‘수리공’이라 불렀는데 유일하게 월급을 받는 자리였다. 월급이 25만 원으로 당시 공무원 월급의 다섯 배였다. 기술이 쌓이면 상의나 바지 한 장당 돈을 받는 기술자가 되었다. ‘바지공’을 거쳐 ‘조끼공’, ‘상의공(上衣工)’을 지나야 전체 공정을 지휘하는 재단사가 되었다.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수리공보다 기술자를 선호한 이유는 수입 차이였다. 실력이 뛰어나면 일한 만큼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매달려야 상의 한 벌을 완성할 정도로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그러나 다른 업종에 비해 소득이 높다 보니 씀씀이도 컸다. 음주와 노름으로 봉급을 미리 당겨 쓰고, 생활비를 겨우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소공동 양복 거리에서 최신 유행 익혀

재단사의 위상은 남달랐다. ‘재단사 손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재단사가 양복점을 옮기면 단골들이 따라나섰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이나 경제인, 방송인 등 단골도 제법 있었다. 권 재단사의 솜씨를 믿고 지인들을 데리고 오는 손님도 많았다. 권 재단사의 양복점이 사랑받은 비결은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감각’이었다. 그는 해마다 서울 소공동 양복 거리를 찾아 선배 재단사들과 교류하며 최신 유행을 익혔다. 덕분에 중후한 멋과 세련된 옷 핏, 편안함을 두루 갖춘 옷으로 신뢰를 얻었다.

당시 권 재단사가 도입한 디자인은 몸의 곡선을 유연하게 드러내는 ‘콘티넨탈 룩(Continental Look)’이었다. 허리를 조이고 바지 끝을 가늘게 처리해 슬림해 보이면서도 여유 있는 품으로 편안함을 살리는 유럽형 디자인이었다. 상의에는 ‘심(interlining)’을 넣어 모양을 잡았다. ‘심’은 동물의 머리카락이나 순모를 섞어 만든 소재로 옷의 골격을 단단히 지탱해주었다.

포항 지역에는 이 기법을 구현하는 기술자가 없어 서울과 부산에서 스카우트해야 했다. 그런데 웃돈 주고 스카우트한 기술자들이 점심시간에 몰래 작업하며 기술을 숨겼다. 권 재단사가 설득해 기술 전수를 하려니, 이번엔 직원들이 자존심을 내세워 반발했다. 기술자들 사이에 자존심 경쟁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맞춤 양복은 단순한 옷이라기보다 기술자들이 한 땀 한 땀 자부심으로 공들인 결과물이다. 사람을 단정하고 당당하게 세워주는 도구이자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권 재단사가 옷을 결코 허투루 만들 수 없는 이유다.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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