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명주-세계인의 술잔을 채울 막걸리③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천상병의 시 「막걸리」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막걸리가 “술이 아니고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했다. 또한 막걸리 한 병을 작은 잔으로 나누어 하루 종일 마신다고 했다. 이처럼 적당히 마시는 막걸리는 즐거움이 되고, 피로를 잊게 하는 노동주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끼니가 된다는 사실을 양민호 대표는 한 단골손님에게 배웠다.
어느 날 매번 양조장에 직접 와서 막걸리를 사 가던 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손님의 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음식을 삼키지 못했는데, 유독 양 대표네 막걸리는 잘 드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손님의 인사가 양 대표의 심금을 울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막걸리를 허투루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양 대표는 술인 동시에 영양이 풍부한 발효식품인 막걸리를 좀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연구와 개선을 거듭하여 2017년에 경상도 지역 양조장으로는 최초로 HACCP(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 인증을 획득했다. 동해명주 3대 대표가 된 지 불과 1년 만의 성과였다. HACCP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가장 높은 수준 인증제로, 식품 원재료 생산부터 소비자가 섭취하기 전까지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적 위해 요소가 혼입되거나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위생 관리 시스템이다. 체계적인 공정과 위생 관리로 안전한 막걸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막걸리가 끼니가 된다”는 손님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쓴맛·단맛·감칠맛·톡 쏘는 맛·새콤함 五味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 외국 술에선 찾아보기 힘든 고유한 맛
전통 잇는 젊은 양조인들의 현재 화두는 ‘프리미엄’
최근 포항의 회와 어울리는 맑은 약주 개발에 몰두
양민호 대표, 2017년 경상도 최초 HACCP인증 획득
동해명주 3대 대표 맡은지 불과 1년 만에 이룬 성과
아일랜드 국가브랜드 ‘기넥스 맥주 양조장’ 최종 모델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로 만들어 관광명소화” 포부
막걸리는 ‘오미(五味)의 예술’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술은 백약의 장(長)이고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이고 과음도 마찬가지다. 술도가에서 태어나 술을 생활처럼 접하며 살아온 양 대표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양조장에서 부모님을 도우며 막걸리를 배워서인지 술에 대한 기억도 남다르다.
“옛날 주입기는 자동으로 멈추지 않아 병에서 술이 흘러넘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우유 같아서 바가지로 받아 맛을 보곤 했습니다.”
양 대표에게 막걸리는 목이 마르면 떠 마시는 발효음료와 비슷했다. 조기교육 덕에 음주를 호기심이나 모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수학여행지 숙소에서 선생님 몰래 술을 마시는 일탈을 해본 적도 없다. ‘술은 편한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즐기며 마시는 것’이라는 철학을 일찍부터 세웠기 때문이다.
술을 즐기는 또 하나의 비결은 ‘페어링(pairing)’이다. 그날의 기분과 상대방 그리고 음식과의 조화가 중요하다. 양 대표는 “술은 음식과 함께할 때 비로소 제맛을 낸다”고 강조한다. 술과 음식의 조화는 술 자체뿐 아니라 음식의 풍미까지 좌우한다. ‘적게 마셔도 제대로 즐기자’는 요즘 술 문화 흐름과도 상통한다.
양민호 대표는 상황에 따라 술을 달리한다. 깊은 대화에는 소주, 더운 날에는 맥주, 가벼운 분위기에는 와인 그리고 출출하거나 마음이 허할 때는 막걸리를 찾는다. 막걸리는 종류에 따라 음식도 달라진다. 구수한 밀막걸리는 매운 음식에, 알코올 풍미를 강한 동동주는 기름진 전과 잘 맞는다. 당도를 낮춘 가벼운 쌀막걸리는 해산물과 어울린다.
막걸리는 ‘오미(五味)의 예술’이라 불린다. 알코올의 쓴맛, 당분의 단맛, 발효에서 비롯한 감칠맛, 탄산의 톡 쏘는 맛, 유산균이 남기는 새콤함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를 낸다. 외국 술에서는 찾기 힘든, 한국만의 고유한 맛이다. 양 대표는 “첫 잔이 맛있는 술보다 음식과 오래 잘 어울리는 술이 좋은 술”이라고 말한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마셔도 쉽게 취하지는 않지만, “25도 소주 7병도 거뜬했다”는 부친의 주량에는 미치지 못한다며 웃었다.
포항의 신선한 회와 어울리는 약주 개발에 몰두
물론 술 앞에서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 번은 과음으로 관능검사(미각,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을 이용해 식품의 특성을 평가하는 방법)를 놓쳐서 원료 하나를 빠트린 채 5000병을 용기에 넣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결국 직원 일곱 명이 달라붙어 병을 다시 따야 했고, “5초면 될 일을 하루 종일 다시 하며 뼈저리게 후회했다”고 말했다.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도 배울 것은 늘 있는 법이다.
현재 막걸리 시장의 화두는 ‘프리미엄’이다. 젊은 양조인들이 전통 제조법을 익혀 새로운 맛을 내고, 도시 소비자들이 이를 즐긴다. 이제 막걸리는 ‘막 걸러 만든 술’이 아니라 ‘신선하게 걸러낸 술’로 인식되는 시대다. 신선하게 걸러낸 막걸리는 양조장에서 떠난 뒤에도 쉼 없이 살아 움직인다. 출시 직후에는 달콤함이 강하지만, 보름이 지나면 산미가 돌고 한 달이 되면 입맛을 돋우는 시큼한 맛이 완성된다. 양 대표가 즐겨 찾는 시점은 출시 후 20일 무렵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계절마다 달라지는 옛 막걸리 맛이 오히려 그리울 때가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누룩 냄새가 강하고 과발효로 맛이 일정치 않았지만, 계절마다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균일한 맛이 보장되지만, 특별한 맛을 우연히 만나는 멋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러한 아쉬움은 ‘옛 막걸리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자전거에 말통을 싣고 배달하던 시절의 맛을 복원해 출시하기에 이른다. 양 대표는 전국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양조장이니 바닷바람이 술맛의 깊이를 더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포항의 신선한 회와 어울리는 맑은 약주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양 대표의 이름을 건 제품이다. 6개월의 숙성 과정을 거치지만, 만족스럽지 않으면 과감히 버린다. 지금까지 버린 술만 10여 톤에 이른다. 무언가에 이름을 걸었다는 건 막중한 책임감을 의미한다. 하기야 막걸리에 인생을 걸기로 작정한 사람이니 이름을 거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양조장을 관광명소로 키우고 싶어
양민호 대표가 막걸리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한 건 해병대 복무 시절이었다. 우연히 참석한 장성들의 술자리에서 “포항에서 제일 좋은 막걸리”라는 찬사를 들었고, 그 순간 습관처럼 빚던 술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허물없는 시간을 만든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양 대표는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해서도 장거리를 통학하며 양조장 일을 도왔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막걸리에 인생을 건 한길을 걷고 있다.
양 대표가 그리는 최종 모델은 아일랜드의 기넥스 맥주 양조장이다. 아일랜드를 맥주의 나라로 만든 곳으로, 여행자들의 필수코스다. 기넥스 맥주 양조장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국가 브랜드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양 대표는 포항시민의 자부심이 되는 막걸리를 만들고 싶다. 포항시문화관광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양조장을 관광명소로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난 8월에는 도구해수욕장에서 막걸리 축제를 열었고,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담은 프리미엄 막걸리도 준비하고 있다.
양 대표는 “막걸리는 한민족의 애환이 담긴 술”이라며, “전통을 계승하는 사명은 있지만, 옛 방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밝힌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막걸리 연구가 필요하며, 이는 전통주 계승자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지역에서 내공을 다지면 반드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양 대표는 관광과 문화,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접목해 포항의 막걸리를 새로운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나아가 세계 시장에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포항에서 빚은 막걸리가 머지않아 세계인의 술잔을 채울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끝〉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