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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김씨 아재’로 살아온 17년… 세상에 선한 영향력 주고 싶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란 이야기일 터. 여기 강산이 2번은 변할 시간에 가까운 17년 동안 꾸준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퇴근길 청취자들의 친구로 오랜 세월 함께 한 포항MBC ‘라디오 열린 세상’에서 ‘김씨 아재’ 코너를 맡아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어온 이정대 씨.2004년 처음 스튜디오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깨끗하게 손을 씻고 대본을 받아드는 그는 항상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잊지 않는 방송인으로 살고자 애써 왔다. 긴장과 진땀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 생방송과 함께 살아온 6천200여일. 형님과 친구의 장례 기간 중에도 스튜디오에 들어가야 했던 때를 이씨는 또렷이 기억한다. 입에 착착 감기는 구수한 영남 사투리로 정치·경제·사회 문제를 쉽게 풀어내 청취자들의 가슴에 때로는 기쁘고 때론 서글픈 기억을 남기는 ‘김씨 아재’ 이정대 씨를 지난 주말 만났다. 다음은 그날 오간 이야기들이다.-유년 시절부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관심이 있었나.△아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교회 고교생 신도 회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는 선배들을 위해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 오락회도 열었다. 기타 연주도 좋아했다. 내성적인 아이는 아니었고, 활달한 성격이었던 건 분명하다.-방송인들은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시절까지 반장을 했다. 하지만, 내가 특출난 리더십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시골 학교였으니 활동적인 아이에게 여러 가지를 시킨 것이라 보면 될 듯하다. 예를 들면 ‘우리 반에선 누가 웅변대회에 나갈래’라고 선생님이 물으면 모두가 우물쭈물 하는 게 보기 싫었다. 그래서 잘하건 못하건 먼저 손을 들고 나서는 편이었다. 너무 나서도 좋을 게 없는 게 인생인데.(웃음) 고등학생 땐 악대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다. 지금은 주목받는 성악가가 된 우주호 씨와 친구였는데, 포항 번화가에서 불우이웃돕기를 하며 우주호가 가곡을 부르고, 내가 품바타령을 하던 기억이 난다.-라디오 출연 이전엔 연극배우를 했다던데.△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단체가 진행하는 행사 등을 도우며 지냈다. 딱히 직장을 구해야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1989년 철강회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해고됐다. 이후 아는 선배들의 소개로 1994년 연극을 시작했다. 지금도 배우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니 벌써 배우 생활이 27년째다.-연극배우 시절의 에피소드는.△2008년 겪은 일종의 무용담 같은 것인데…. 포항의 ‘극단 은하’에서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이란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았다. 공연 기간이 한참 남았는데, 선배 생일파티에서 과하게 술을 마셔 머리를 다쳤다. 연출가가 나서서 공연의 일시 중단을 알렸던 작지 않은 부상이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다시 공연이 시작됐을 때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무대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도 심각했던 일화다.-포항MBC에 출연하기 시작한 때는.△2004년 11월 4일로 기억한다. 서른아홉 살 때다. 우리나라엔 각 지역마다 그 지방 사투리로 시사 문제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안녕하세요 형산댁’, ‘대구 달구벌 만평’, ‘부산 자갈치 아지매’ 등이 그것이다. 포항에도 ‘만물상 정 사장’이란 코너가 있었다. 거기 출연하던 후배가 그만두면서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갔다. 당시는 하루에 5분을 출연했는데, 사전에 3시간씩 연습을 했다. 포항MBC ‘라디오 열린 세상’과 인연을 맺은 것도 벌써 17년이다.-17년은 긴 시간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주 4회 출연이다. MBC 파업 외에는 방송을 빠진 날이 거의 없다. 생방송의 특성상 다치거나 목소리가 이상해지면 안 되니까 감기도 조심한다. 연극을 하다가 부상 입었던 때는 다행히 MBC 파업 기간이라 운 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 비속어나 일본식 어법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항상 머리에 넣어두고 있다. 짧지 않은 기간 ‘김씨 아재’로 살 수 있었던 건 청취자들이 보내준 격려와 응원 덕분이다. 이제는 나도 우리가 숨 쉬는 공간의 나쁜 공기를 바깥으로 빼내는 ‘환풍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김씨 아재’로 살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는지.△‘김씨 아재’는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 캐릭터다. 잘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보통 사람들 속에서 희망과 절망을 느끼는 방송인이 되고 싶었다. 아쉬운 건 내가 전했던 소식들 대부분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단 것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10년 전쯤 중학생과 할아버지가 버스 안에서 서로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장면을 지켜본 청취자가 이를 제보한 적이 있다. 작은 미담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많이 전했으면 좋겠다. 골치 아픈 정치나 답답한 경제 관련 소식보다는.-당신이 출연하고 있는 생방송만의 묘미가 있을 것 같다.△‘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엔 99%가 생방송이었다. 녹음을 해서 방송할 경우엔 틀리면 다시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생방송에선 그럴 수 없다. 항상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김씨 아재’ 코너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시작되면 한 10초쯤 묘한 긴장에 빠져든다. 이건 17년 전 처음 라디오 방송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오래 이 일을 한다 해도 그 감정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연극 무대도 마찬가지다. 내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선 언제나 긴장감 속에서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이는 베테랑 배우들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함께 작업한 PD와 작가가 적지 않을 텐데.△라디오 방송은 개편 때면 PD가 바뀐다. 함께 한 PD가 10명이 넘는다. 작가도 3~4번 바뀌었다. 지금 작가와는 10년쯤 호흡을 맞추고 있다. 나는 ‘김씨 아재’라는 내 역할이 자동차 부속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라디오 열린 세상’이란 프로그램의 전체 흐름과 조화를 먼저 감안해야지 나만 튀어서는 안 된다. 이는 연극도 똑같다. 한 명의 배우가 혼자서 튀는 연기를 한다면 극의 흐름이 무너지지 않겠는가.-TV나 인터넷방송엔 없는 라디오만의 매력은.△쌍방향으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라디오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게 아닐까. 그냥 생각 없이 쳐다보는 것이 아닌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것이 라디오의 매력으로 내게 다가왔다.-시사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해왔다.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현 정부는 공정을 자주 말한다. 공정의 가치가 실현된 후 궁극적으로 가닿을 곳은 평등한 세상이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 실현되기 위해선 말로만의 공정이 아닌 국민의 몸으로 체감되는 시스템화 된 공정이 필요하다고 본다.-지역 라디오 방송이 지향해야 할 지점은.△출연자의 한 사람에 불과하니 큰 이야기를 할 입장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소비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편한 것을 추구한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 아닌, 청취자의 입장에서 고민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방송인들 모두가 자신이 끼칠 사회적 영향력을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될 것 같다.-어떤 방송인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은가.△작으나마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50대 중반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이다. 소박하게 내 곁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3-31

“국악의 매력은 흥과 신명 나무와 꽃도 춤추게 한다”

한국은 문화·예술의 중심축이 서울로 설계된 국가라는 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현실이 이러하니 지방 도시의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힘겨울 게 불을 보듯 뻔하다.여기에 지난해 초부터 예기치 못한 복병처럼 문화예술계를 궁지로 몰아넣은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쳤으니, 포항 예술가들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할까?한국국악협회 포항지부장 이원만(58)씨는 20대 때부터 문화운동을 시작해 30년 넘는 세월 동안 의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기 드문 예술가다. 국악으로 시작했지만, 최근엔 대본 작가와 제작감독 등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2021년 봄. 포항의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실질적 어려움은 무엇인지,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이른바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떻게 준비하는 것인지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1980년대 후반부터 오늘까지 포항의 문화예술계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이원만 지부장이라면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를 걸어 만남을 청했다.아래는 샛노란 개나리가 수줍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지난주 포항시 남구 중앙로 ‘놀이마당 한터울’에서 이원만 지부장과 나눈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경주 출신으로 알고 있다. 포항에는 언제 왔는지.△1963년 경주 건천에서 태어났다. 중·고교를 거기서 나왔다. 고등학생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대학에선 국문학을 전공했다. 국악은 1988년 포항에 오면서 늦게 시작했다.-국악을 접하게 된 계기는.△문화운동을 하고 싶어 포항에 왔다. 대학 졸업 즈음에 ‘앞으로 내가 사회에 기여할 방법이 뭘까’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곳이 포항의 한터울이란 풍물단체다. 와서 보니 풍물도 하고, 노래도 하고, 탈춤도 하는 곳이었다. 당시엔 오가는 이들 대부분이 노동자였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선 국악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북채는 그렇게 잡게 됐다.-국악 외에도 연극 대본 작업, 문화행사 기획 등도 한다고 들었다.△현재 포항 예술가들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오디션이 없어서 오디션에 떨어질 기회조차 없다’고 자조적으로 말할 정도다. 국악협회 일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고 문화행사도 기획하는 건 포항이 가진 ‘이야기’를 보편적 메시지로 만들어 전국에 알리고 싶어서다. 그 과정에서의 성공 사례가 포항문화재단과 함께 작업한 ‘국악 가족뮤지컬 강치전(傳)’이다. 내가 제작감독을 맡았고, 가사와 대본도 썼다. 이 작품은 지역 예술가들이 오디션을 통해 참여한 작품이다. 또한, 경기도 오산과 강원도 원주 등에 초청돼 돈을 받고 무대에 올린 공연이기도 하다. 그런 과정이 내겐 상징적으로 다가왔다.-포항 예술가들이 처한 어려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이 지역에서 33년째 활동하고 있다. 근데 대부분의 시간을 국악 가르치는 학원 교사처럼 살았다. 대다수 포항의 예술가들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교육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에겐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열망이 있지 않은가? 내 경우엔 아름다움의 다양한 형식을 공연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그런 작품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반쪽 예술가의 삶이 아닌가. ‘강치전’ 작업을 시작한 것도 그런 열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였다.-‘강치전’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건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강치전’의 경우도 그렇다. 단순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면 너무 평범한 서사다. 독도에서 해양생물이 사라지는 건 일본 탓만이 아니고, 보편적 인간의 문제라는 걸 말하고자 했다. 작품을 쓸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새로운 인식의 생산과 그걸 표현할 정확한 방식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작품을 매개체로 포항의 예술가들이 즐겁게 협업하는 풍토를 만들고 싶었다.-‘코로나19 사태’가 포항 공연예술계에 미친 영향은.△공연이나 행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대가 없으면 예술가가 설 자리도 없다. 예년에 비해 공연이 90% 이상 줄어든 상황이니 그 어려움이 어떻겠나.-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고민과 노력을 하고 있는지.△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 중이다. 프랑스의 경우 작년엔 ‘내 곁에 베토벤’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연주자들이 음악애호가의 집을 직접 찾아 유료로 연주회를 열었다고 한다. 포항의 예술가들 역시 이 국면에서 활동할 방법을 찾고 있다. 지난해 장기읍성에서 열린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콘서트’ 등이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예술가들은 대중과 소통할 방법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지금까지 활동하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은.△포항에 온 초기에 경주의 한 골프장 건설 반대시위 현장에 갔다. 트럭에 타고 온 풍물패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딱 한 가락을 연주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300여 명의 사람들이 단숨에 하나가 돼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19세기 말 동학농민전쟁 당시 풍물이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음악이었다는 걸 몸으로 실감한 순간이었다. 사실 징 소리는 사람의 뼈까지 흔들리게 하는 힘이 있다.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경주의 조그만 마을로 공연을 하러 갔는데, 주름살 가득한 어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던지고 북을 빼앗아 신명나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분이 ‘자네들이 내 생애 마지막 춤을 반주해주러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데…. 마음이 찡했다.-국악 활성화를 위한 방안은.△포항이 문화의 불모지는 아니다. 내게 풍물을 배운 사람만 지금까지 3천 명이 넘는다. 지역의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해서는 북유럽처럼 일상생활 속에 축제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곳에선 전통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아이돌 수준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취미나 기술 교육 차원이 아닌 생활 속으로 국악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필요하다.-지방자치단체의 예술 지원은 어떤 방식이 돼야한다고 생각하나.△포항문화재단이 생긴 후 긍정적 변화가 느껴진다. 적지 않은 문화예술 기획자들이 거기서 활동하고 있다. 포항은 법정 문화도시이고, 경북의 문화거점도시이기도 하다. 여기에 걸맞게 다양한 문화정책 논의의 장이 펼쳐져야 한다. 포항시민과 지역 예술가들이 어떤 문화적 요구를 하는지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국악이 가진 매력은 뭔가.△‘흥(興·즐거움을 일으키는 감정)’이다. 사람만이 아닌 다른 동물, 나무와 꽃까지 함께 어울리게 하는 힘을 국악이 가졌다고 믿는다. 공동체가 더불어 즐기는 신명이 곧 국악이 아닐까? 지금은 빠른 것이 세상을 지배한 속도의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국악이 가진 길고 느린 호흡이 절실하다.-당신에게 국악과 공연예술이란.△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향후 계획은.△‘코로나19 사태’가 좀 누그러지면 국악과 서양 음악이 각각의 매력을 선보이는 작품을 만들어보려 준비 중이다. 포항의 토속민요를 수집하는 작업도 해보려 한다. 콘서트 대본과 판소리 대본 공부도 하고 있다. 대본 작가로서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서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동네에 조그만 책방을 하나 마련해 청년들, 아이들과 함께 책 읽으며 늙어가고 싶은 게 꿈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3-24

“평소 좋은 마음으로 선량하게 살다보면 1등 당첨의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8145060분의 1.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이다. 사람이 하루에 벼락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맞을 확률과 비슷하단다. 가능성이 제로(0)에 가깝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매주 적지 않은 이들이 로또복권을 구입한다.복권 구매자들은 말한다. “5천 원짜리 한 장 혹은, 1만 원짜리 한 장으로 사서 지갑에 넣어둔 로또로 인해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잊고 한 주를 웃으며 견딜 수 있다”고.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20~30억 원을 가볍게 뛰어넘는 한국. 부자들에겐 10~20억 원을 오가는 로또복권 당첨금이 크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이 돈은 ‘상상 바깥에 존재하는 거금’이다.2021년 한국의 최저임금은 182만원. 로또당첨금은 최저임금을 받은 이들의 50~100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금액.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포항 육거리엔 ‘로또 명당’으로 불리는 복권 판매점이 있다. 여기서 로또 1등 당첨의 행운을 선물 받은 사람은 7명. 2등은 무려 35명이다. ‘1등 당첨 7명·2등 당첨 33명’이란 현수막을 만들어 건 이후에도 2등 당첨자가 2명 더 나왔다고 한다.이 로또 판매점을 운영하는 사람은 이두성(68)씨. 조부 때부터 3대째 같은 장소에서 장사를 해왔다. 그는 로또 1등 당첨자의 기쁨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게다가 1등 당첨자가 선물한 소고기와 대게를 맛보기도 했다.로또복권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대체 어떤 사람들이 1등에 당첨되는 걸까?’ ‘로또 1등 당첨자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을 터. 기자 역시 그걸 알고 싶었다.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 11일 육거리 로또 판매점에서 이두성 씨를 만났다. 그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1등 당첨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이 가진 ‘복권 철학’까지 숨김없이 들려줬다.-육거리에서 가게를 한 건 언제부터인가.△고향이 포항이다. 내가 1953년생이다. 이 위치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가게를 운영했다. 내가 이어받아서 한 것도 40년에 가깝다.-로또 판매점을 시작한 시기는.△로또복권 판매가 시작된 게 2002년 12월이다. 기획재정부 산하 복권위원회가 로또복권 사업을 시작한지 20년에 가깝다. 1회가 시작될 즈음 판매점 모집을 대행하던 회사가 찾아와 판매점을 해보라고 권했다. 우리 가게 위치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이전에 스포츠토토복권 판매점 제의가 있었을 때는 구매자들이 어렵게 생각할 듯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또는 게임 방법이 간단하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제의에 응했다. 로또복권이 처음 시작됐을 때 포항엔 판매점이 대략 50개쯤이었다.-같은 자리에서 오래 가게를 운영했는데.△조부에 이어 아버지가 담배와 잡화 등을 판매하는 육거리상회를 운영했다. 내가 포항제철에 근무하다가 30대에 가게를 이어받았으니 3대째 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로또 판매점을 하기 전에는 앞서 말했듯 식료품, 과자, 술, 담배 등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이었다. 예전엔 근처에 큰 극장이 있었고, 거기서 예비군·민방위 교육, 공무원 관련 강연 등이 열려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지금처럼 24시간 편의점이 많이 생기기 전엔 장사가 꽤 잘됐다.-첫 번째 로또복권 1등 당첨자가 나온 날은 어떤 기분이었나.△119회 때다. 그때 나는 산악회 사람들과 등산 중이라 우리 가게에서 1등이 나왔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다만, 아내가 ‘어젯밤에 금반지가 내 눈앞에서 반짝이는 꿈을 꾸었어요’라고 하는 이야길 들었다. 복권 판매점을 시작한지 대략 2년쯤 지나서 첫 번째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온 것이다.-로또복권 추첨 초기에는 판매점에도 장려금을 줬다던데.△초창기 때는 그랬다. 내가 기억하기로 1등 당첨자가 나온 판매점에 장려금 5천만 원을 줬다. 그러다가 2천만 원으로 내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려금 제도는 사라졌다. 나는 장려금은 받은 적이 없다.-이 가게에서 로또 당첨자가 많이 나왔다. 주위에선 어떤 반응인가.△1·2등 당첨자가 포항에서는 가장 많이 나온 것으로 안다. 대구·경북 전체로 봐도 15번 정도 1등이 나온 대구의 한 판매점과 10여 차례 가까이 1등 당첨자를 낸 경주의 한 판매점 등과 더불어 우리 가게가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든다.몇 해 전 역학(易學)을 공부하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포항 육거리가 동빈대교와 서산터널의 가운데 위치해 좋은 기운이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지역이라고 했다. 거기에 바로 건너편에 오래전부터 금융기관이 자리해 있다. 그게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온 비결이라면 비결 아닐까싶다.(웃음) 선대(先代)로부터 좋은 땅의 가게를 물려받았으니 앞으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장사를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다.-가장 기억에 남는 1등 당첨자는 누구인지.△428회 추첨 때 나온 우리 가게 4번째 1등 당첨자다. 자동 선택으로 1등이 됐는데, 인터넷으로 당첨 결과를 확인해 본 후 한 번 더 재차 확인하기 위해 가게를 찾아왔다. 그때 ‘이 가게에서 큰 행운을 얻었으니 선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분이 당첨되고 1주일 후쯤 큼직한 택배 상자가 하나 도착했다. 거기엔 죽도시장에서 구입한 한우와 대게가 160만원어치나 들어있었다. 반갑고 고마웠다.나와 아내만 먹기가 그래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그 당첨자는 현재 60대인데 지금도 인연이 이어져 우리 가게에서 가끔 로또복권을 구입하곤 한다. 최근 939회 추첨의 1등 당첨자는 포항의 한 회사 직원인데, 찾아와서 인사를 전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인데,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고마움을 전하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에 나 역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로또 1등 당첨자들은 좋은 꿈을 꾼다고 들었다.△428회 1등 당첨자에게 아내가 ‘꿈이 좋았나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어두운 바다에 빠졌는데 거북이가 나타나 등에 태우고 물속에서 빠져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대답을 들려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꿈보다는 평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선량하게 살아왔으니 행운이 찾아온 게 아닐까?(웃음)-주로 어떤 사람들이 로또복권을 구입하는지.△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지고, 경제 상황이 좋지 않으면 복권 판매량이 늘어난다. 우울한 상황이 지속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복권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복권 구입에 모든 걸 걸면 곤란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1~2만원어치 구입하고, 지갑에 들어있는 복권 한 장으로 일주일을 웃으며 사는 게 좋을 듯하다. 결국 복권당첨금이란 불로소득 아닌가.-‘포항의 로또 명당’으로 소문이 나면서 판매량도 많을 것 같다.△다른 가게에 비해선 잘 팔린다. 웬만한 월급쟁이 수입보다는 우리 가게 복권 판매수익이 많을 듯하다.(웃음)-만약 당신이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재밌는 질문이다. 지금도 몇 가지 사회활동을 하며 적게나마 기부를 하고 있다. 복권에 당첨된다면 기부도 좀 많이 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보고 싶다. 우리 가게에서 행운을 선물 받아 로또 1등에 당첨되는 분들을 보면 질투가 난다거나, 부럽다는 생각보단 ‘참으로 잘됐다’는 마음이 먼저 생긴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생각이다.-복권 구매자들에게 한마디.△복권 판매금으로 진행되는 각종 복지사업은 유익하고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게 복권에만 몰두하면 사행심을 부추기는 역효과가 생긴다. 자신의 형편에 맞게끔 적당한 금액의 복권을 사고, 편안한 마음으로 행운을 기다려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3-17

“가슴 설레는 인생 꿈꾸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 있나요”

삶의 무대를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편안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에게 끌리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하지만 모든 인간이 똑같을 수는 없는 법. 어떤 사람은 정주(定住)가 아닌 떠돎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기도 한다.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범적인 영어강사로 살아온 이미하(57)씨는 늘상 보는 풍경과 매일 만나는 사람들 곁을 떠나 캄보디아라는 낯선 나라에서 새롭고 설레는 삶을 살아가는 꿈을 꾸고 있다.대부분의 동년배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안주하려는 나이에 20대 청춘처럼 불확실한 미래로 겁 없이 뛰어들고자 하는 이미하 씨에게 그간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해 출간된 이미하의 책 ‘오십, 질문을 시작하다’엔 이런 문장이 담겼다.“누군가 내게 캄보디아에서 답을 찾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을지 모른다. 내 삶은 캄보디아로 떠나기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주어진 여러 역할을 감당하며 바쁘게 살아간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으로 뛰어들며 오히려 더 질문이 많아졌다. 하지만 나이 오십 언저리에서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던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변했다. 캄보디아에서 보낸 시간이 내 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시간의 꽃’을 남겨주었다.”이 고백만으로는 앞서 언급한 궁금증 모두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만남을 청했다. 봄이 성큼 다가온 3월 초순 어느 날 이미하 씨를 만났다.캄보디아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매료된 이유, 향후 캄보디아 이주 계획까지를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래는 “죽는 날까지 가슴 설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녀의 이야기다.-포항이 고향인가.△그렇다. 1965년 포항에서 태어났고 쭉 자랐다. 대학(경북대 영문과) 다닐 때만 대구로 잠시 떠나 있었다. 현재는 동생과 함께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교를 마친 후 25년 이상 영어강사로 일했다. 회사도 다녀보고, 사회단체에서도 잠시 일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적성에 가장 잘 맞았다.-어린 시절엔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하다.△약간 조숙하고 우울한 학생이었다. 어릴 때 집안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옮겨 다녔다.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다. 책이 유일한 친구가 돼줬다. 초등학교 땐 안데르센 동화와 만났고, 중·고교생 때는 전혜린의 수필도 읽고,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소설도 읽었다.-영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가 있는지.△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을 좋아했다. 우리 학교 여학생들의 우상이던 총각 선생님이었다. 그분 덕택에 누구보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웃음) 그때 예습을 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후 영어 실력을 탄탄하게 쌓을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영어와 문학을 좋아했으니 영문학과 진학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대학 때는 동아리 활동도, 학생운동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친구 한두 명과 조용히 다니며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책읽기와 글쓰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젊은 시절엔 지식을 얻거나,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삶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 책이 친구처럼 느껴진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 말이다. 그래서 독서를 통해 위로를 얻는다. 책과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감정이 든다.글쓰기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괴발개발 쓴 글을 신문사에 보내기도 했고, 결혼한 후에도 한겨레신문 등에 독자 투고를 했다. 최근에 낸 ‘오십, 질문을 시작하다’는 나의 첫 책이다.-이제 캄보디아 이야기를 해보자. 2009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인지.△휴가로 떠난 다른 해외여행과는 출발부터가 달랐다. 첫아이를 낳은 이후 내게는 세 가지 목표가 생겼다. 신(神)을 떠나지 않겠다, 내 재능인 영어 교육을 통해 세상에 도움을 주고 싶다, 나와 가족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타인과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걸 실천하려고 청각 장애인을 위한 수화 통역봉사도 했다.2009년 교회 청년부 교사로 활동했는데, 캄보디아로 떠난 선교여행에서 가슴 뜨거운 경험을 했다. 동남아시아 현대사가 강제한 고통과 빈곤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야생의 생명력을 거기서 봤다. 그들의 가난이 마냥 불행한 것만은 아니란 걸 느꼈고, 순박한 눈망울을 가진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와 독서를 통해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졌다.-가장 기억에 남는 캄보디아의 도시는 어딘가.△첫 방문 이후 열 번 이상 찾아갔다. 지인들과 함께도 가고 혼자서도 갔다. 한 해에 두 번 간 적도 있다.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게 ‘코로나19 사태’ 직전인 지난해 2월이다.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도 찾아서 읽었다. 2016년엔 5주를 머물며 영어를 가르쳤다.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Phnom Penh)의 골목길을 걸으며 현지인들과 미소 가득한 인사를 하던 게 기억에 선명하다. 그때 생각했다. ‘이 사람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캄보디아와 캄보디아 사람들의 매력은.△20대 때 장 자크 아노(Jean Jacques Annaud)가 연출한 영화 ‘연인’을 봤다. 마지막 장면의 누런 강물이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그 메콩강을 캄보디아 낡은 목선 위에서 다시 만났다. 원시적 풍광이 너무나 매력적인 나라다. 하늘로 뻗은 열대의 나무들과 그 아래 조그만 집들,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 이 모든 게 낯설지 않고 정겨웠다. 음식도 입에 맞았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같은 동양인으로서 유대감이 있다. 게다가 친절하고 순정하다. 낯을 가리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용기가 생겼다.-캄보디아에서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영어 교육’을 봉사활동의 무기로 캄보디아에 간 게 쉰한 살 때다. 고등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처음엔 세 명의 개구쟁이들이 날 힘들게 했다. 수업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혼내지 않고 조용히 불러 야자나무 아래서 ‘외국에서 온 선생님은 아직 캄보디아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잘 모른단다. 너희들이 도와줄 수 없겠니?’라고 물었다. 내 말에 담긴 진실이 통했는지 그 아이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그곳 아이들에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앞으로 캄보디아와의 인연을 어떻게 이어갈 생각인가.△예순이 되는 3년 후엔 캄보디아로 이주해 살고 싶다. 그러려면 경제적 기반이 마련돼야 하기에 현지의 지인과 닭 농장 만드는 걸 진지하게 논의 중이다. 그때쯤이면 두 아들은 내 도움이 필요 없을 나이가 될 테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엄마의 꿈을 꺾지 않으리라 믿는다.(웃음) 남편에게도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경제적 문제는 닭 농장 운영을 통해 해결하고, 내가 가진 영어 교육과 독서 교육이란 재능을 아낌없이 나눔으로써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선물하고 싶다.-당신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삶은.△잘 살고 싶다. 이건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죽는 날까지 가슴이 뛰는, 아침에 일어나면 무덤덤하지 않고 새로운 일에 가슴 설레는 인생을 살고 싶다. 캄보디아로 가고 싶은 이유도 가슴 뛰고 설레는 삶을 위해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단 나쁜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신나는 것 아닐까? 모험심은 청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믿는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3-10

“체계적 커리큘럼·치밀한 계획… 모든 운동은 100% 과학입니다”

지난 시대 운동선수들에겐 “죽도록 열심히, 무조건 지도자가 시키는 방식대로”가 금과옥조(金科玉條)의 지침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됐다.최근엔 체육계 전반에 걸쳐 고질적 문제로 제기돼 온 지도자와 학생간, 선배와 후배간 ‘학교 폭력’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10대 때부터 체육계에 몸 담아온 트레이닝과학연구소 박성률(57) 대표는 이를 안타까워했다.“지도자의 역량이 모자랄 때 생기는 폐해다. 제대로 된 시스템과 프로그램으로 교육시킬 능력이 없으면 코치나 감독, 선배가 폭력이란 방식에 빠지기 쉽다.”포항 대동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조정 선수로 활동했고, 만 19세였던 1982년엔 조정을 시작한지 2년 만에 국가대표가 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참가했다.20대 땐 6년 동안 독일 체육대학(쾰른 체육대학·Sporthochschule K00F6ln)에서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운동 방법을 공부해 ‘트레이닝 방법론’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더 큰 배움에 목말랐기에, 2009년엔 만학도로 다시 독일을 찾아 콘스탄츠 대학(Universitat Konstanz)에서 사회과학 박사 학위도 얻어냈다.‘이성과 합리성의 나라’로 불리는 독일에서 스포츠과학을 공부한 박 대표는 딱 잘라 말한다.“운동은 백 퍼센트 과학이다.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많은 시간을 쏟아 붓는다고 그것에 비례하는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돼야 투자한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바로 운동이다.”박성률 대표가 공부한 독일 체육대학은 스포츠 지도자 양성을 위해 1947년 세워진 학교다. 현직 체육교사의 재교육도 담당하며, 다수의 스포츠 관련 의사, 스포츠 단체 지도자를 배출한 곳으로 철저한 입학·학사 관리로 독일만이 아닌 유럽에서도 이름이 높다.비단 운동뿐 아니라 생리학과 역사학, 심리학과 사회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는 학구적 분위기 속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박 대표는 ‘시스템의 힘’과 ‘합리의 힘’을 믿는 사람이 됐다.이 두 가지 힘을 바탕으로 대학 강단에 섰고, 스포츠 관련 정책을 제안했으며, 크고 작은 부상의 고통을 겪는 운동선수들의 재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그런 그가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와 2017년 트레이닝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국가대표 선수, 체육 지도자, 스포츠과학 관련 단체 연구원 등으로 30년 이상 활동하며 쌓아온 전문 지식과 다양한 현장 경험을 활용해 포항 시민들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봄비가 곱게 내리던 지난 주말. 본사 편집국을 찾은 박성률 대표와 자리를 옮겨가며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 결과물이 아래 요약된 박 대표의 지난 삶과 앞으로의 꿈이다.◇소년 국가대표에서 청년 독일 유학생으로‘소년 박성률’은 신체 조건이 좋았다. 게다가 성격도 적극적이었다. 가난과는 거리가 먼 윤택한 가정환경은 그를 성격 좋고, 활발한 아이로 자라게 해줬다.체육대회가 열리면 육상, 배구, 축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선수로 뛰었다. 그걸 지켜본 고등학교 은사가 조정 선수가 될 것을 권했다.조정에 입문한 초기엔 어려움도 겪었다. 보통 아이들 사이에선 ‘힘 좋은 친구’였지만,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조정 선수로는 아직 힘이 부족했다. 게다가 일찍 시작한 동료들에 비해 기술도 뒤떨어졌다. 그걸 이겨낸 방법이 새벽 운동과 야간 운동이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조정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다.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선 4위라는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곧이어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대학 조정선수권대회’에선 유럽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거기에 부상이라는 악재까지 겹쳤다. 올림픽에 나가겠다는 목표가 허무하게 무너졌다.하지만 ‘청년 박성률’은 좌절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운동이란 것의 본질이 대체 무엇이고, 어떤 방식을 통해 기대한 성과에 이를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은 오래전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독일에서 찾기로 한 것이다.“조정 선수 생활을 그만둘 무렵 반복적이고 과도한 훈련을 장기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운동선수는 부상의 예방과 회복을 위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선수로서 못다 이룬 꿈을 지도자가 돼 실현하고 싶었다. 독일로의 유학을 결심한 건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중요시하는 교육 과정을 통해 지도자를 양성하는 나라가 독일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운동선수도 자기 분야 공부해야 ‘능동의 삶’ 살 수 있어생소한 나라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강의를 들으려면 독일어 습득이 필수였다. 생소한 독일 말과 글을 공부하기 위해 눈썹을 밀고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고행(?)까지 자처했다. 그 정도 악바리였기에 빠른 시간 안에 독일어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6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학업에 열중했다. 스포츠 지도법과 트레이닝 방법론을 이론 전공으로 택했고, 독일체육회와 경기연맹 등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체육 지도자 양성과정이 실기 전공이었다.학위와 함께 조정·육상 전문체육지도자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 덕분에 석사장교로 군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제대 후에는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모든 걸 뒤로 미루고 운동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선생이 아니었다. 박성률은 달랐다. 이런 말로 학생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자기 분야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좋은 운동선수는 물론 완성된 인간도 될 수 없다. 책을 읽고 공부해라. 그래야 너희 모두가 수동적 삶이 아닌 능동의 인생을 살 수 있다.”◇포항시민과 운동을 통해 얻은 행복한 삶 만들어 갈 터박 대표는 포항시청 직장 운동경기부 총감독으로 일하던 시절을 행복하게 기억한다.독일에서 배운 선진적 훈련 프로그램과 선수관리 시스템을 현실에 적용해 눈에 띄는 성과도 올렸다. 포항시청 소속 선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성취감 또한 컸다.그간 운동 지도자들에게 ‘코치 전문능력 개발’ ‘스포츠 코칭 철학’ 등을 강의하고, 한국체육대학교 강단에선 ‘코치 역량개발과 멘토링’ ‘엘리트선수를 위한 운동 프로그램’을 가르쳤던 그는 이제 트레이닝과학연구소와 함께 보다 더 가까이 포항시민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트레이닝과학연구소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건강·체력 증진 방법을 찾아내고, 경기력 향상을 위한 스포츠 의학, 스포츠 교수법, 스포츠 사회학을 연구·지원·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앞으로 나아갈 길 10년을 이야기하는 박성률 대표의 다짐이 믿음직해 보인다.“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운동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운동의 종류와 방식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스포츠과학에 기반한 조언을 들려줄 계획이다. 합리적 운동 시스템으로 건강한 포항시민을 만들어내는 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는 게 고향에서 가지게 된 새로운 꿈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3-03

벽화 그리고, 쓰레기 치우고, 거리 청소하고…사랑하게 되면 봉사는 자연스런 실천이 됩니다

누가 아름다운 사람인가?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면 답변은 너무나도 다양할 터. 하지만 가장 간명한 대답은 “자신의 자리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영화 ‘어 퓨 굿맨(A Few Good Men)’에서 미국 미사일 기지를 지키는 해병 대령 제셉(잭 니콜슨 분)은 자신이 감옥에 갈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한다.“위국과 위민, 명예를 너희들은 농담할 때나 사용하지? 그러나 우린 달라. 그 단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왔지.”다소 파시스트적인 성향을 보이는 군인 제셉 대령의 위 대사에 관한 사람들의 평가는 호오(好惡)가 갈리지만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초등학교 교사로 27년, 이후엔 봉사활동을 전개하며 문화예술인과 주민들을 연결시키는데 힘쓰며 살아온 트리플A 송영화 회장 역시 ‘자신의 자리를 책임감 있게 지켜온 사람’ 중 한 명이다.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맑은 피부와 소녀 같은 미소는 송 회장을 마냥 ‘좋은 사람’으로만 보이게 하지만, 천만에다. 그녀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는 타협을 불허한다.교사 명예퇴직 후 짧지 않은 고민의 시간을 거쳐 결정한 꿈틀로 상가번영회장 자리와 봉사단체 트리플A 회장으로서의 송영화는 누구보다 추진력 빼어나고 매사에 철두철미한 ‘단단한 사람’이다.‘트리플A’는 Anthro(인간의 따스한 이야기가 숨쉬는), Angel(사회적 가치의 귀함을 아는), And(문화예술의 꿈이 살아 있는) 꿈틀로를 지향하며 만들어졌다. 3개의 A 속에는 이런 의미가 함축돼 담겼다.나눔과 봉사, 문화와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트리플A 송영화 회장을 성큼 다가온 봄이 따스한 햇살을 세상에 선물하던 지난주 수요일 만났다.그리고 그날. 아래와 같은 가슴 훈훈한 이야기를 들었다.-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63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이모가 계시던 포항에 온 건 스물세 살 때 교사로 발령 받고나서다. 20대 초반에 와서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살았으니 이젠 여기가 고향 같다. 27년을 교직에 있었고 만 오십 살에 명예퇴직 했다. 이후엔 뭘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남편은 약사다. 현재 꿈틀로 인근 두꺼비약국에서 일한다.-트리플A 결성 시기와 결성 계기는.△2019년 꿈틀로 상가번영회 회원들이 내게 회장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내가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남편 또한 여기서 생활하고 있으니까. 사실 그때까진 상가번영회 일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포항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로 활기찼던 꿈틀로 일대를 기억하고 있고, 지금도 그 시절처럼 이 공간을 에너지 넘치게 바꾸고 싶다는 꿈은 있었다. 꿈틀로 주민들과 입주 예술가들, 상인들을 하나로 묶어내자는 희망으로 번영회장을 맡았다. 그 꿈과 희망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트리플A다.-트리플A는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지난해 여름 결성됐다. 활동한지 8개월쯤이다. 처음엔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다. 일단 주민들에게 우리 단체가 가진 마음가짐을 알리고 싶었다. ‘서로 존중하고 평등을 지향하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자’는 트리플A의 정신을 보여주고자 했다. 동네 벽에 예쁜 벽화를 그리고, 쓰레기를 치우고, 거리를 청소했다. 트리플A 유니폼을 입고.봉사는 어려운 게 아니란 걸 실천을 통해 드러냈다. 포항문화재단과 함께 작은 공간을 만들어 주민들이 차 마시며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했다. 포스코와 포항시청, 우리가 힘을 합쳐 꿈틀로 정비도 이어갔다. 노출된 전선을 지하로 옮기고, 버려진 간판 등을 정비했다. 그러자 우리의 진심을 알아준 건물주들도 적극 협조하기 시작했다. 동네에 위치한 조그만 공간에서 소규모 노래 공연도 펼쳤다.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자세하게 보인다. 이처럼 꿈틀로를 향한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단체가 트리플A다.-트리플A 구성원은 얼마나 되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회원 대부분이 다른 일을 가지고 있다. 꿈틀로 주민, 화가·공예가 등 꿈틀로 입주 작가, 교사 등 직업의 프리즘은 다양하다. 전업주부도 있다. 현재 회원은 32명이다. 우리 지역만이 아닌 트리플A의 정신과 지향에 동의하는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가입의 기회를 열어놓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봉사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나.△초등학교 교사로 일할 때부터 아이들에게 배려, 평등, 존중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해왔다. 모든 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고도 가르쳤다. 그렇게 말했던 사람이 그걸 실천하지 않으면 되겠는가?(웃음) 앞으로의 내 삶도 앞서 말한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며 지속될 것이다.-지금까지 트리플A의 활동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발대식 직후 ‘참참참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서로에게 반가움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살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캠페인이었다. 주민들의 반응이 좋았다. 동네 장터를 열어 사람들에게 교류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무성영화 상영회를 통해서는 포항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혹시 아는가? 포항엔 반갑게 맞아야 할 이웃이 적지 않다. 바로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들이다. 그들도 트리플A의 뜻에 공감해 기꺼이 도움을 줬다. 무대에 선 새터민 가수의 노래는 많은 주민들의 박수를 받았다.-그간 활동하며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포항 토박이라면 누구나 아는 아카데미극장이 있다. 예전엔 유명한 극장이었다. 거기서 오랫동안 간판 그림을 그려온 분이 우리가 활동하는 걸 보고는 자기도 적극 나서 주민들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다. 화판 앞에서 행복해하던 그분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리어카에 낡은 음반과 인문학 관련 책을 싣고 와 판매하던 분도 “이런 동네 장터가 생겨 너무 기쁘다”는 뜻을 전해왔다. 포항엔 숨어있는 문화예술인이 적지 않다. 트리플A는 봉사활동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인과 주민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하고자 한다.꿈틀로를 ‘문화의 거리’로 만드는 건 많은 주민들의 소망이다. 이를 위해 트리플A 회원들은 지금도 포항시, 포항문화재단과 진지한 회의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이런 소통을 가짐으로써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 문화예술의 향기로 가득해지지 않겠는가.-교직생활을 오래 했다.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해 말한 것은.△“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그러니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라”고 말해왔다.-자녀들에겐 어떤 삶을 살라고 조언하는지.△“네 주변 사람들을 존중해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도 존중 받아라”고 늘 강조한다.-트리플A의 향후 계획과 비전은.△시작할 때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 문화예술인들과 효율적으로 연계해 꿈틀로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이곳이 ‘누구나 오고 싶은 거리’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깨끗한 환경 만들기에도 더욱 힘쓰겠다. 21세기 포항은 문화와 예술, 관광을 중심으로 재설계돼야 한다. 꿈틀로에서 동빈로까지 이어지는 ‘포항 문화예술의 거리’ 조성이 트리플A의 장기적 목표다.-‘인간 송영화’는 어떤 사람을 지향하는가.△70~80대가 됐을 때 받는 것보다는 주는 걸 더 좋아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나눔의 가치를 아는 사람 말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2-24

“의료봉사와 노래로 행복 나누는 삶 이어가고 싶어요”

기자의 개인적 경험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유능한 의사보다 더 만나기 힘든 게 ‘따스한 의사’다. 환자의 아픈 육체만이 아닌 두려운 마음까지 다독여 위로를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의사 말이다.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항 고창대유외과의원 고창대(52) 원장은 따스한 의사임이 분명해 보인다.2000년대 초반. 막 개원한 젊은 외과의였던 고창대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만난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하자는 가족들의 권유에도 그녀는 고 원장에게 수술 받기를 원했다. 이유는 하나.이전에 앓았던 병을 말한 후 “얼마나 힘드셨어요?”라는 위로의 말을 고 원장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의사에게는 때로 의술보다 심성이 더 중요한 순간이 있다. 고 원장은 그때 이 사실을 깨달았다.젊은 시절엔 군 복무를 대신해 의료 환경이 열악한 방글라데시에서 30개월 동안 의료봉사 활동을 펼쳤고, 첫아들도 그 나라에서 낳았다. 그때의 보람과 뿌듯함을 잊지 못해 이후에도 여름휴가를 포기하고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멀리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까지 의료봉사 활동을 다녔다.그는 말한다. “관광객으로 갔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그 나라의 속살을 살필 수 있었고, 고통에 처한 현지인들을 진료하면서 외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이해해준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맙다”고.몇 년 전부턴 또 하나 ‘나눔의 방식’도 찾아냈다. 바로 노래다. 고 원장은 아마추어 성악가이기도 하다. 의료봉사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세상과 나누는 첫 번째 수단이었다면, 노래는 누군가에게 감정적 행복감을 선물하는 그의 또 다른 재능기부 방식이다.이처럼 선량한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고창대 원장과의 만남은 시종 즐겁고 유쾌했다. 아래는 바람 차갑던 지난 수요일 오후, 그가 일하는 병원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다.-포항에서의 개원은 언제였나.△2002년이다. 유방, 갑상선 관련 암과 질병에 대한 수술과 진료를 주로 한다. 개원 당시엔 유방전문의원이 전국에 열 군데 정도였고 경북에선 내가 최초다. 생소한 과목이고 병원 운영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그러나 외과의사를 선택한 내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다. 개원 초기엔 ‘개방형병원’이란 제도를 이용해 환자를 종합병원에 입원시킨 후 직접 가서 유방암 수술을 집도했다. 전국에서 개원한 외과의가 이렇게 한 건 처음이었고, 이 사례를 유방암학회에서 발표도 했다.-의사의 꿈은 언제부터 가진 것인지.△초등학생 시절부터 장래희망이 의사였다. 다행히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에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의대를 지원했다.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다. 포항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사소한 일탈도 했다.(웃음) 당시엔 상위권 학생 중 신청자들이 학교에서 함께 자며 공부했다. 정식 기숙사가 아닌 임시 숙소였는데 거기서 3학년 학생들이 당직 교사의 눈을 피해 화투를 치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의대 재학 시절 에피소드는.△공부와 시험에 파묻혀 살았다. 시체 해부 실습도 여러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기에 큰 두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란 이름의 중창단에서 활동한 건 즐거운 추억이다. 의대엔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는 동아리는 있었는데, 노래 동아리가 없어 우리 동기들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첫 연주회 지휘를 내가 맡았던 것도 잊을 수 없는 학창시절의 기억이다. 현재 ‘에델바이스’는 의대 내에서 최고의 인기 동아리가 됐고, 해마다 발표회도 연다. 수련의 시절엔 너무나 엄했지만, 전문의가 된 이후엔 누구보다 우리들에게 자상했던 소아외과 교수님도 잊을 수 없다.-방글라데시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한 것으로 안다.△학생 때부터 인생의 일부분은 봉사활동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OECD국가에서 의무적으로 후진국에 ‘국제 협력 의사’를 파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지원했다. 매년 파견되는 나라와 전문 과목이 다른데 당시 방글라데시에서 외과의를 필요로 해 거기로 가게 됐다. ‘국제 협력 의사 4기’다. 꼭 가고 싶어 미리 방글라데시에 있는 선배들에게 연락도 하고, 영어 면접 준비도 열심히 했다. 당시 연애 중이던 지금의 아내도 내 뜻에 동의했고 신혼을 방글라데시에서 보냈다. 첫아들도 거기서 낳았다.-방글라데시에서 당신이 본 것과 느낀 것은.△방글라데시는 가난한 나라다. 하지만, 국민들은 궁핍함을 비관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들 대부분이 무슬림인데 시간에 맞춰 기도를 빼놓지 않으면 다음 생에는 보다 나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힘들 때도 있었다. 임신한 아내가 입덧으로 너무 고통스러워하기에 홀로 한국으로 보낸 적도 있고, 두 살배기 아들이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던 게 마음 아팠다. 한국이라면 걸리지 않았을 병 아닌가.하지만 보람이 더 컸다.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 내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현지인들과의 만남은 내게 많은 걸 가르쳤다. 한국에서라면 보지 못했을 넓은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는 안목도 키울 수 있었다. 더불어 외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을 새삼 다진 시간이었다. 의료봉사 현장에서 가장 적합한 과목이 외과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방글라데시 외에도 다양한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다닌 것으로 들었다.△귀국 후 처음엔 서울에 살았는데 외국인노동자 진료에 참여했다.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자기 나라 말을 쓰는 한국인 의사를 신기하게 보며 반갑게 다가오기도 했다. 방학 기간엔 팀을 만들어 몽골, 캄보디아, 베트남 등을 다녀왔고 몇 년 전엔 포항시장 등과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를 다녀왔다. 의료서비스를 받아 보기 힘든 현지인들을 진료하면서 의사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맛보았으니, 의료봉사 활동을 통해 내가 그들에게 더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의사로 살아오며 잊을 수 없는 환자는.△개원 초기다. 그때는 포항에서 유방암은 완전절제수술만 했는데, 지역 최초로 유방보존수술을 시작했다. 40대 여성 암환자가 있었다.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수술받자는 친지들의 권유에도 내게 수술을 신청했다. 이유를 물었다. 자신이 과거에 앓았던 자궁암에 관해 누구도 “힘들었지요?”라고 묻지 않았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사에겐 실력만이 아닌 환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다독여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의사 고창대’로서의 보람과 고민은.△외과의사가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유방 질환 전문가로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의 변화로 유방암 환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부분을 살펴줄 전문가가 필요하다. 다행히 다녀간 환자들이 인정해 주고 알려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 한다. 예약 대기 시간을 줄이면서도 환자 한 분, 한 분에게 충분한 설명을 드리려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아마추어 성악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2018년 의대 졸업 25주년 행사에서 중창단으로 무대에 섰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다. 2018년 이후엔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이후 포항에서 작은 연주회도 열고, 2019년엔 아마추어 성악 콩쿠르에서 입상도 했다. 또, 포은도서관이 주관한 재능기부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아름다운 노래로 환자들과 더욱 친근하게 소통하고 싶다.-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지난해엔 코로나19로 봉사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상황이 좋아지면 의료봉사는 물론, 노래를 통한 재능기부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바쁘게 살다 보니 벌써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흔히들 ‘100세 시대’라고 말한다. ‘내가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라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삶을 계속 추구하고자 한다. 내 도전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역시 행복하지 않겠는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2-17

“세상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음악의 한 길 걸어갈 겁니다”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벽과 바닥엔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두 청년이 입은 옷도 얼핏 보기에 비싼 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밝고 환하다. 꿈이 있기에 가질 수 있는 미소다. 월세가 15만 원이라는 포항 꿈틀로의 허름한 ‘뮤직 테라피(Music Therapy·음악을 통한 치유)’ 작업실. 하지만 거기선 15억 원, 아니 150억 원의 원대한 꿈이 움트고 있다.김명진(29)과 윤관(28)은 그럴듯한 학력도, 사회적·문화적 배경도 갖추지 못한 젊은 뮤지션이다. 그럼에도 자긍심과 자존심은 어지간한 유명 음악인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하고 높다.지금은 수조 원의 재산을 가진 세계 최고 부자이자 유명인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의 꿈이 시작된 곳도 버려진 낡은 창고였다.한때 전 세계 청춘들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했던 불세출의 영국 밴드 ‘비틀스’ 역시 그 출발은 항구도시 리버풀의 조그만 선술집 무대였다.미리부터 몸을 사리며 안전한 주식을 사서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는 건 예나 지금이나 청춘의 몫이 아니다.무릇 스스로를 젊은이라고 믿는다면 불안정한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친 바다로 위험한 항해를 떠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바로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왔다.음악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고, 그 힘으로 노래를 만들어 세상 사람들을 위무하고 싶은 청년 김명진과 윤관. 그들이 노래한다.지나칠 수 있는 거리지만알게 되면 내가 보일 거야거리의 노래가 들릴 거야…-뮤직 테라피의 ‘꿈틀로’ 중에서김명진과 윤관의 노래를 듣다보니 그들의 삶도 궁금해졌다. 그럴 때는 만나야 한다. 청춘을 만난다는 건 청춘의 에너지를 선물 받는 것이기도 하기에. 아래는 오래 지속될 ‘젊음의 힘’을 간직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먼저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둘 모두 포항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적이 없다. 대학도 다니지 않았다. 그랬기에 스승이 없다. 하지만, 무엇이건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독학도 가능하지 않은가?-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한 시기는.△10대 때다. 그때 이미 ‘나중에 우리가 크면 함께 음악을 하자’고 약속했다. 의기투합한 것이다. 하지만 생활인으로 살다보니 약속의 실현이 늦어졌다. 더 늦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난해 5월 꿈틀로에 조그만 작업실을 얻었다.-음악하면서 밥을 번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물론이다. 음악 활동만으로 좋은 자동차 사고, 좋은 집을 산다는 건 소수 뮤지션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우리도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막노동, 부동산 영업, 전단지 배포, 어린이 대상 관광가이드, 조선소 근무, 심지어 포항 도구에서 말똥 치우는 일도 했다. 농담처럼 그렇게 말한다. 도둑질 빼곤 다 해봤다고.(웃음)-꿈틀로에 정착한 과정을 간단히 설명한다면.△(윤관) 고등학교 때부터 영일대해수욕장에서 2년간 거리공연을 했다. 노래 연습을 위해 명진이와 1주일에 7번, 그러니까 매일 노래방에 가서 영업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제대로 된 연습실을 빌릴 처지가 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음악이 좋았다.△(김명진) 서울에서 영업 일을 하고 있을 때 CCM(기독교 정신을 담아낸 대중음악) 콘테스트에서 작곡 부문 2위를 했다. 잊었던 약속과 꿈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하던 일을 정리하고 포항으로 내려와 작업실을 계약했다. 이제 9개월이 됐다.-지방자치단체나 문화재단 차원에서 어떤 지원이 있었으면 하는가.△음악인들이 조금 나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녹음실을 갖춘 스튜디오를 만들어 저렴하게 대여해주면 좋겠다. 그런 시스템이 우리 같이 가난한 뮤지션들의 의욕을 북돋아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포항만 해도 학원 운영이나 막노동, 오토바이를 이용한 배달 일 등을 하며 음악과의 인연을 놓지 않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꿈틀로 일대 상인들의 삶을 노래에 담고 있다고 들었다.△발라드 등의 기존 장르를 답습하기보단 우리만의 음악을 해보자는 뜻이 강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그걸 노래로 만드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현재까지 10명 이상 사람들의 인생이 우리 손에서 음악으로 탄생했다. 이를 알게 된 포항문화재단이 ‘꿈틀로 상인들의 삶을 노래로 제작해보면 어떻겠냐’는 요청을 해왔고 이에 응했다.-노래로 만든 꿈틀로 상인의 인생 중 기억에 남는 것은.△‘더 신촌스 덮죽’ 주인 아주머니의 사연이다. 그 아주머니는 음식에 관해서라면 엄청난 연습벌레이자 공부벌레다. 자신이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손님인데, 그들을 위해 시간과 땀을 아끼지 않는 게 뭐 어려운가?’라는 생각을 가진 분이다. 그 성실함과 열정을 보면서 우리도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그래야하지 않겠나?-좋아하는 뮤지션은 누군가.△(김명진) 가수보다는 작곡가를 좋아한다. ‘테디’와 ‘블랙아이드 필승’은 현재 한국의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목하고 있다.△(윤관) 어릴 때부터 김광석을 좋아했다. 그의 담담하고도 슬픈 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김광석 노래 부르는 것도 즐긴다. 그의 전달력과 표현력은 정말이지 최고다.-당신들이 지향하는 음악은.△음악 그 자체가 우리 지향점이다. 트로트부터 클래식까지 가리지 않고 듣는다. 판소리와 창(唱)도 좋아한다. 오페라와 팝페라(오페라에 대중음악 형식을 결합한 장르)도 관심 영역이다. 수천만 원짜리 스피커와 앰프, 최고급 턴테이블에 집착하는 것도 나쁠 건 없다. 그것도 하나의 취미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우린 싸구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뮤직 러버’(음악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가 되고 싶다.-음악이 왜 좋은가.△인간을 상상 속으로 이끌어준다. 또한 일상을 사는 소시민들에게 ‘저 너머 세계’를 꿈꾸게 해준다. 또한 음악은 세상과 우리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해준다고 믿는다. 노래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그 열망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준다.-향후 당신들이 그려갈 미래는.△20년, 30년 꾸준히 하다보면 빌보드 차트(Billboard chart)에도 오를 수 있지 않겠나.(웃음) 대기업에 취직하지 않아도 좋고, 주식으로 큰돈을 벌지 않아도 좋다. 가난해도 좋다. 오십 살, 아니 육십 살이 될 때까지 음악을 하며 살 것이다. 왜냐고? 그게 어떤 일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니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2-03

“포항 숙박문화 새롭고 젊게 바꿔 볼래요“

서른셋.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나이도 아니다.청년의 도전의식을 가진 33세 여성이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영업해온 낡은 숙박시설을 깔끔하게 리모델링해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신세대 숙박업소를 만들었다.포항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인 죽도시장 안에 자리했던 대구여인숙을 ‘오다가다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시킨 이현진 대표가 바로 그 사람.21세기를 사는 20~30대 한국 청년들 중 해외여행 한 번 해보지 않은 이들을 이제 찾아보기 쉽지 않다.그들이 유럽 여행에서 주로 이용하는 숙박시설이 바로 게스트하우스.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을 지녔고, 또래 여행자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는 매력 가득한 공간이다. 유용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덤.2000년대 들어서며 한국에도 다양한 형태의 게스트하우스가 등장했다. 서울과 제주도는 물론, 그 외의 도시에서도 호텔이나 모텔, 여관과는 구별되는 독특함을 지닌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포항에도 ‘오다가다’를 포함한 몇 군데 게스트하우스가 있고, 이 숙소들은 전국 각지에서 포항으로 여행 온 청년들의 편안함 쉼터가 돼주고 있다.겨울비가 내리던 지난주. ‘오다가다’ 이현진 대표를 만났다. 아래 그날 오고간 이야기의 알맹이를 옮긴다.□ 젊은 여행자 이현진, 포항과 만나다이현진 대표는 대학 시절부터 혼자서 기차를 이용해 전국일주를 다니던 ‘용감한 여행자’였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동해는 물론 남해와 제주도까지 종횡무진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필리핀 등 아시아 여러 국가와 멀고먼 북유럽 덴마크까지 이 대표의 다녀온 여행지 리스트에 올랐다.그랬던 그녀가 2007년 포항과 만난다. 구룡포 바닷속 풍경이 단숨에 이 대표를 매료시켰다. 그 기억을 잊지 못해 2012년 포항에 직장을 잡았다. ‘해양 생태복원’과 관련된 회사였다.그게 포항 정착이었으니 벌써 9년째다. 회사를 그만두고도 포항에 머물고 싶었던 이현진 대표는 결국 게스트하우스 창업을 계획한다. 그녀가 말하는 포항의 매력을 들어보자.“바다가 너무 아름답다. 또한 바닷가 어디서라도 서울보다 훨씬 싼 비용으로 주거를 해결할 수 있다. 거기에다 인근 산들도 근사하다. 포항에서라면 출퇴근길도 여행처럼 느껴진다. ‘삶이 곧 여행’이란 말이 실감으로 다가오는 도시다.”□ 허물어져가는 여인숙, 매력적인 게스트하우스로 변신30대 초반의 이 대표에겐 많은 돈도, 건축과 관련된 전문 지식도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바칠 태도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죽도시장 내 대구여인숙을 오다가다 게스트하우스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그녀에겐 필리핀에서 다이빙 강사로 생활하며 게스트하우스를 관리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 대표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를 일, 휴식,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은 그 세가지와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죽도시장 오거리 뒷골목.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대구여인숙 앞에 섰다. 처음엔 낡고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재탄생시킨다는 기대감이 컸지만, 리모델링이 진행되면서 현실적인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다. 건물 안팎에서 물이 샜고, 전기가 차단되는 일까지.그러나 앞서 말한 젊음의 열정과 땀방울을 아끼지 않는다면 못해낼 일이 있었겠는가? 당연한 답변이지만 없었다.적지 않은 어려움과의 싸움 끝에 2019년 겨울에 오다가가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허물어져가는 여인숙을 감각적 인테리어로 꾸며진 게스트하우스로 변모시킨 이현진 대표는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이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여관이나 모텔과 달리 여행자들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거죠. 이전 세대의 숙소는 주로 잠을 자는데 사용됐지만, 오늘날 게스트하우스는 그 공간 안에 문화적인 요소를 결합할 수도 있고, 홀로 떠나온 여행에서 일행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여행에서의 낭만이 최대화될 수 있는 숙소 아닐까요?(웃음)”오다가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어간 손님들은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와 소품 칭찬에 입을 모은다. 전체적 분위기나 장식품 등의 아이디어는 이 대표의 여행 경험에서 나왔다. 덴마크에 살고 있는 동생의 아이디어와 아기자기한 소품 공수(空輸)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요즘도 청년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빈티지 스타일(Vintage style)의 소품을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계속 고민 중이다. 여기에 몇몇 공간은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혹시 모를 중년층 손님의 방문 시 추억까지 되살려준다는 게 이현진 대표의 복안.그래서일까? 오다가가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문 여행자들은 드라마 ‘호텔 델루나’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촬영장 같은 분위기가 난다며 좋아한다고. 커튼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 쓴 보람은 손님들의 이런 반응에서 빛을 발한다.□ ‘포항 사랑꾼’이 알려주는 알짜 포항여행 정보포항이 좋아 삶의 3분의1을 동해 곁에서 살아온 사람. 오다가다 게스트하우스의 젊은 주인 이현진은 누가 뭐래도 포항 사랑꾼이다.만약 젊은 연인이 낭만을 찾아 포항에 왔다면 ‘요트 투어’와 ‘운하 산책’을 추천하고 싶다고 이 대표는 말한다. 특히 석양 무렵의 요트 투어가 좋단다. 포항운하를 따라 걸어보는 것도 연인간의 정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어준다.길 따라 곳곳에 자리한 포토 존에서의 사진 촬영은 청춘남녀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형산강 둑길을 따라 철마다 피어나는 유채꽃과 핑크뮬리, 국화와 코스모스도 근사하다.포항이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가 될 수 있도록 관광 인프라를 개선하는 건 이현진 대표의 바람. 아직은 포항 여행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는 것은 이 대표가 전하는 아쉬움이다.현재 이현진 대표는 ‘코로나19 사태’ 종식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조그만 공연을 열고, 나이 지긋한 주변 상인들을 위한 이벤트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또한 오다가다 게스트하우스가 ‘문화 콘텐츠 개발자’가 되기를 꿈꾼다. 작지만 오래 기억될 여행 기념품 제작·판매도 그 연장선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아래와 같은 옹골찬 비전을 들려주는 그녀의 미래가 주목된다.“이제 겨우 1년 된 게스트하우스지만, 앞으로의 10년을 기대해주면 좋겠다. 지금처럼 우리 숙소를 찾는 여행자들이 행복해지고, 더불어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갈 것이다. 코로나19는 빨리 사라지고, 여행자들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1-27

“국민의 이익 대변하는 국민의 노조 만들고파”

국토교통부 노동조합 위원장 최병욱(49)씨의 고향 사랑은 유별나다. 그의 ‘카운터 파트너’라 할 전·현직 장관들은 한 명 빠짐없이 포항 호미곶의 일출을 찍은 사진을 취임 선물로 받았다. 최병욱 위원장의 고향은 포항이다.최 위원장은 직장이 있는 세종시에서 계속 살지는 않을 생각이다. 항상 일에 쫓기면서도 거의 매주 빼놓지 않고 포항행 KTX 열차에 오른다. 부모님과 자식 셋이 생활하는 고향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 아픈 문제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고 한다.만 19세에 군대에 갔고, 만 21세에 공무원이 됐다. 그로부터 28년 세월. 8년 전부터는 공무원노조 활동을 시작했다.마흔을 넘긴 나이에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사이버대학에서 법학 공부도 시작했다. 지금도 틈틈이 노동법 관련 책들을 읽는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다.그는 공무원노조 조직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의 노동조합으로 역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밥통을 끼고 앉아 무슨 노조냐”라고 힐난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부동산 관련 업무는 국토부가 하는 일의 10%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 탓에 장관 이하 모든 직원이 지탄의 대상이 된 현재 상황이 안타깝다”고도 했다.그가 낼 수 있는 시간은 짧았고, 기자가 듣고 싶은 말은 많았다. 이런 불협화음을 넘어설 수 있었던 건 최병욱 위원장의 간명하면서도 명확한 어법 때문이었다.아래는 지난주 본사 편집국을 찾은 최 위원장과 1시간가량 흉금을 터놓고 나눈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다.-유년을 보낸 포항에서의 기억은.△아버지가 공무원이었다. 평범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고등학교 가면서는 말썽도 부리고 가출도 하고 그랬다.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웃음) 3남매 중 장남인데, 다행히 동생들은 모범생이라 아버지를 기쁘게 해줬고.-공무원이 된 시기와 그 직업을 택한 이유는.△고교 졸업 후 바로 입대했다. 제대 후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후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공무원을 특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응시해 합격했다. 만 21세 때다.처음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건 부산지방국토관리청 포항국토관리사무소다. 포항, 울진 등에서 근무하다 국토교통부로 간 건 2014년이다.-공무원 노동조합 운동을 시작한 시기와 계기는.△2011~2012년경 특별사법경찰 업무를 하던 중 화물차 관련 업무를 맡게 됐다. 그즈음 화물차량에 불법이 있을 경우 형사처벌이 아닌 행정처분을 하는 것으로 시스템이 바뀌었다. 그런데, 화물차 운전사들이 억울한 경우를 많이 겪는 것 같았다. 직업의 특성상 등록 주소지와 실제 거주지가 다른 경우가 많은데 벌금고지서를 전달받지 못하기도 하고…. 그들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고 불합리한 제도를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하위직 공무원의 입장에선 한계가 너무 분명했다. 내 의견이 묵살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때 알게 됐다. 현장 공무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부처의 장관과 정책을 설계하는 실·국장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걸. 이것이 내가 공무원노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다.-공무원노조가 사기업노조와 다른 점은.△사회공공성 강화를 특징으로 한다. 정부에서 내려오는 정책의 현장 집행자는 공무원이다.그 정책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걸 국민들에게 알리는 게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공공성을 띤다는 게 사기업 노조와 다른 점이다.-2021년 현재 공무원노조의 현황과 당면 과제는.△대표적인 공무원노조는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조합원 18만 명), 전국공무원노동조합(조합원 10만~11만 명), 전국교직원노동조합(조합원 5만~6만 명)이다. 작은 단체는 100개가 넘는다. 노조 가입률은 대략 70~80%다. 200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즈음에 공무원노조법이 제정됐다. 그런데 이후 10년 넘게 개정이 안됐다. 시작부터 노동3권 중 핵심인 단체행동권이 없었다. 단결권도 6급 이하 공무원으로 제한했다. 회계, 감사, 인사 담당자들은 6급 이하도 단결권이 없었다. 지난해 마지막 정기국회 때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를 받아들여 부처의 장차관을 제외하곤 누구나 노조 가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공무원을 관리·감독하는 사람의 가입이 불가능해 실제 노조원은 5급 이하가 대부분이다.-가까이서 문재인 정부의 국토부장관 2명을 지켜봤는데.△김현미 장관은…. 국토부의 전체 업무를 놓고 보자면 부동산 관련 업무는 1할 정도다. 그런데, 그걸 잘못했다고 나머지 잘한 사업들도 싸잡아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 가끔은 자괴감이 든다. 국토부는 부동산 업무 외에도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항공, 철도, 도로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홍수 등의 재해 대비도 국토부의 몫이다. 물론 부동산 문제는 사람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것이니 국민들이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업무에서 우리가 흘린 땀까지 무시당하는 듯해 조금 아쉽다. 변창흠 장관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정확하게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만나본 느낌을 말한다면 노조와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는 가진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장관에게 현장의 상황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전달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공무원노조 활동을 하며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홍남기(현 경제부총리)씨가 박근혜 정부 때 국토부 2차관에 내정됐다. 교통 관련 정책의 책임자가 앉는 자리인데, 노조가 보기엔 전문성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정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해서 언론 인터뷰도 진행하며 반대했다. 다행히 홍 부총리가 당시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다. 결과적으론 잘 된 일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부총리가 됐으니.(웃음) 권도엽 장관도 잊을 수 없다. 내부 승진으로 장관이 된 경우인데 노조와 소통이 잘 됐다. 지금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올해 국토부 노동조합의 최우선 과제는.△노동운동의 꽃은 단체교섭이다. 단체교섭이 없다면 노동자들이 연대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국토부 노조는 지난 10년간 단체교섭을 요구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김현미 전임 장관의 재임 시절에서야 막혔던 교섭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습다. 이제 어느덧 교섭 체결이라는 고지가 눈 앞에 다가왔다.국토부 노조가 지향하는 노동운동은 투쟁만을 위한 활동이 아니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노사가 상생 발전하는 방향을 제안하고, 그 결실이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 조합원들은 실제 일선 현장에 근무하기에 국민의 목소리를 가장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면 정부 입장에서도 고품질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밑거름이 되리라 믿고 있다.-어떤 공무원, 어떤 공무원노조 간부로 기억되고 싶나.△공무원노조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익집단이라는 선입견을 씻어내고,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의 노동조합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진화하는 과정에 힘을 쏟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나는 노동운동 조직의 대리인이다. 노조원의 권익을 대변하고, 앞장서 투쟁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공무원 노동자라는 특수성이 있는 만큼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일도 염두에 두고 노동운동을 전개하려고 힘쓰고 있다. 내가 국토부 노조위원장을 맡은 이후 처음, 아니 10년 만에 단체교섭 체결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를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려고 한다.무엇보다 공무원 노동운동가로서 국민에게 우리 노조가 지탄의 대상이 아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국토교통 공공기관 노동조합 연대회의가 그것이다. 연대회의는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건설, 부동산을 비롯해 도로, 철도, 항공 등을 아우르는 공공기관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노조가 국민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균형과 견제 기능을 잘 발휘해 사회 구성원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동운동의 공공성 확보에 힘쓰겠다. 이런 변화의 물결이 내 고향 포항까지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1-20

“시각장애인이 춤과 꿈에 바친 열정 지켜봐주세요”

사실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세상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이 더 크고 넓다.인간이 살아가는 공간 곳곳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경우가 흔하다. 오죽하면 바로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눈을 ‘심미안(審美眼)’이라고 하겠는가.여기 시각장애인들의 심미안을 열어 눈뜬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더 환한 세계와 만날 수 있게 도와주는 안무가가 있다. ‘룩스-빛 무용단’ 김자형 단장이다.포항에서 유년과 소녀 시절을 보낸 김 단장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하지만, 그녀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이며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은연중에 가르쳐준 푸른 바다와 정겨운 사투리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룩스-빛 무용단’은 시각장애인들이 소속된 단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랄 것 없이 사람들이 놀라며 묻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춤을 추죠?”그럴 때면 김자형 단장은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이렇게 권한다. “우리 무용수들의 춤을 한 번 보실래요?”지난해 세밑. 김 단장과 함께 6개월 이상 힘겨운 연습 과정을 거친 시각장애인 무용수들이 언택트(Untact) 공연을 펼쳤다. 1시간 정도 진행된 공연을 지켜본 기자의 가슴을 친 건 놀라움이 아닌 감동이었다.얼마나 꼼꼼한 트레이닝과 고통스런 수련 기간을 거쳐야 저들처럼 눈뜬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어떤 면에선 더 뛰어난 몸짓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감동과 더불어 궁금증이 밀려왔다.이튿날 김자형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의 삶과, 당신의 춤과, 당신의 무용단과, 당신과 더불어 호흡했을 시각장애인 무용수들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아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손과 발을 맞춰 달려가고 있는 김자형 단장과 룩스-빛 무용단원들 이야기다.-‘춤’이 당신 곁에 온 것은 언제인지.△5살 때부터 무용학원에 다녔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증조부모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고, 어릴 적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대학에선 발레를 전공했다.-현재 단장으로 있는 ‘룩스-빛 무용단’ 창단 이전엔 어떤 일을 했나.△무용학원 강사 등을 직업으로 가졌고, 결혼 후 늦은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보통의 상식에선 시각장애인이 무용을 한다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2009년 대학 조교로 있을 때다. 시각장애인 복지관 팀장이 물었다. “시각장애인의 신체활동 프로그램으로 춤을 출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 주임교수가 어렵다고 했을 때, 논문 주제를 고민하고 있던 내가 한 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게 시각장애인 대상 무용 수업의 시작이었다.심한 장애로 분류되는 우리 무용수들은 빛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흰색 지팡이에 의지해야 이동이 가능한 그들이 손끝의 느낌으로 몸짓을 스캔하며 춤을 춘다. 10년 전 내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마치 어린아이의 첫걸음처럼 조심스레 춤추던 그들이 “걷기도 힘든 내가 춤을 추고 회전도 할 수 있다”고 좋아하며 눈물짓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이들도 춤출 수 있다. 이들을 춤추게 하자!’란 도전의식으로 2011년 룩스-빛 무용단을 만들었다.-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춤 교육법은 많이 다를 것 같은데.△시각장애인이 보다 쉽게 이해하고 따라할 수는 커리큘럼으로 수련한다.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과 회전량 조작법 등을 가르친다. 한 동작을 익히기 위해 손으로 발동작을 익히고, 제 손을 잡고 익힌 발동작을 이용해 이동해 보고, 제 몸을 손끝으로 스캔해 그 동작의 느낌을 이해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말로는 설명이 쉽지 않다. 우리 무용단원들의 춤을 동영상으로 한 번 봐주길 부탁한다.-장애인무용단의 운영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처음엔 10여 명의 회원들이 내게 차비라도 주겠다며 10만원씩을 모았다. 그게 월급이었다.(웃음) 그 돈을 어떻게 쓸 수 있겠나? 그건 무용단 통장을 만들어 저축했다. 그 저금이 힘이 돼 2013년 첫 정기공연을 열게 됐다. 우리 무용단은 임의단체다 보니 직원 없이 혼자서 교육하고, 공연 준비하고, 무용수들을 살펴야 한다. 변명 같지만 나의 부족함이 항상 아프게 다가온다. 사정을 아는 분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면 “지정단체가 되면 그때 도와주세요”라고 거절한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시각장애인 무용수 교육에 초점을 두고 무용단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좋은 무대에 올라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시절이 올 때까지의 준비 과정이라 생각한다. 신생 단체나 열악한 단체를 지원하는 정부 시스템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가족과 친구들은 당신의 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왜 힘든 일을 굳이 하느냐” 묻는다. 그럼 난 답한다. 비장애인 회원이나 전공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렵지만, 내가 손을 놓아 버리면 오늘날까지 함께 해온 순간들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아직은 놓을 수 없다고. 덧붙여 시작장애인 무용수들과의 연습 과정과 공연 무대가 주는 감동은 그 어떤 보상보다 큰 것이라고.-지난달 말 ‘룩스-빛 무용단’의 언택트 공연이 유튜브를 통해 관객들과 만났다.△지난해 정기공연을 열려고 계획했는데 코로나19가 찾아왔다. 복지관이나 서울시가 운영하는 공공기관 연습실이 폐쇄되면서 전반기엔 연습을 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2020년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사설기관을 빌려 단원들 중 적극적인 3명의 무용수가 철저한 개인방역 아래 연습을 했다. 더운 여름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여러분이 유튜브를 통해 본 것은 그 땀의 결과물이다.-장애인들과 함께 눈물과 땀을 흘리며 당신이 깨달은 것은.△사실 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서 욕심 많고 교만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장애가 있음에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를 가진 분들과 만나고, 함께 울고 웃으면서 많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줄 몰랐던 나를 돌아봤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지금도 느낀다. 장애인무용단 단장이 된 건 내가 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웃음)-시각장애인 무용수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주면 좋겠다.△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지난 10년을 돌아봤다. 연습 과정의 어려움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이고…. 같은 숙소 같은 방에서 밤늦게까지 나누었던 이야기들, 제주도 공연 후 바닷가에서 노을을 느끼며 백사장에 앉아 노래 부르던 일, 맛있는 음식 하나에 아이들처럼 행복해 하는 모습들…. 연습할 땐 안무가로서 단호한 단장일 수밖에 없지만, 연습이 끝나면 시각장애인 무용수들의 친구이자 활동도우미가 되고자 했다. 그들과 함께 한 순간 모두가 소중하다.-‘코로나19 사태’로 올해도 공연계가 어려울 것인데.△향후 언택트 공연시대를 준비하려면 투자와 지원 측면 모두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우리 무용단은 힘을 합쳐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이다.-룩스-빛 무용단이 꿈꾸고 있는 미래는.△올해 계획은 무용단을 비영리법인으로 재설립 해 지정기부단체로 등록하는 것이다. 무용단과 무용수들의 발전을 위해선 경제적 토대도 중요하다. 또한, 시니어 무용수와 실업·청년 무용수들을 합류시켜 월급을 줄 수 있는 인력지원사업을 준비할 생각이다. 더 멀리는 아동·청소년 시각장애인 무용단을 설립하는 게 장기적 목표다.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가 있듯 장애아동이 무용 교육을 통해 미래를 펼칠 수 있게 돕고 싶다. 우리가 춤에 바친 시간과 열정을 따스한 관심으로 지켜봐주시면 좋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1-13

“자식과 어머니를 이어주던 ‘음식’ 우리 지역만의 특색 지켜야 합니다”

세련된 옷차림에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 어떤 질문에 답하건 거침이 없고, 도시적 감수성이 곳곳에서 감지되는 사람.그럼에도 “나는 농민의 딸이에요. 실제로 여든이 넘으신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포항시 남구 연일읍에서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어요. 농어민들이 잘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겠죠”라고 말한다.요리연구가이자 ‘한국 전통음식 홍보 대사’라고 부르면 될 듯한 신나희 씨 이야기다.누구나 그렇듯 생에는 여러 사연이 있기 마련. 신나희씨 또한 몇몇 일을 하던 시기를 거쳐 2021년 현재는 삶을 3번째 방향전환해 전통요리를 만들고, 사라져선 안 될 한국 고유의 음식 재료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락거렸던 포항 동빈동 파시(波市·바다 근처에서 열리는 시장으로 주로 생선 등을 판매한다)의 기억을 ‘즐거운 유년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신나희 씨.그녀와의 인터뷰는 지난주 포항 육거리에 자리한 조그만 식당에서 진행됐다. 나물무침과 찌개가 맛있는 곳이다. 물론 신씨의 추천이었다.웃음도 많고 언변도 좋은 그녀와의 인터뷰는 시종 유쾌했다. 아래 그날 오고간 이야기를 정리해 옮긴다.-포항에서 보낸 유년은 어땠나.△동빈로와 남빈로에서 살았다. 바로 옆에 파시가 있었다. 대형마트가 없던 시절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가서 생선을 샀고, 그걸 반찬으로 밥을 해먹었다. 요즘 아이들은 시금치를 먹지만 그게 어떻게 자라는지 잘 모른다. 안타깝다.-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는지.△농산물이 어디서 길러지고 수산물이 어느 바다에서 잡히는지 궁금했다. 그게 날 요리와 음식의 길로 이끌었다. 음식 공부는 늦게 시작했다. 어릴 땐 무용을 했고, 그림을 그렸다. 20대 후반쯤에 함께 그림을 그리던 청도 운문사의 비구니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앞으론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라는. 당시엔 ‘겨우 먹는 게 왜 중요하지’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환경이 급변할 줄 몰랐다. 코로나19만 봐도 그렇다. 그 바이러스는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다. 면역력 강화는 음식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고 믿는다.-이른바 ‘약선요리’가 최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 땅에서 제철에 나는 재료 대부분은 사람들 몸에 이롭다. 가장 좋은 요리는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해 본연의 맛을 살려내는 것이다. 거기엔 많은 양념을 넣을 필요도 없다. 장수하는 노인이 많기로 유명한 일본 오키나와에선 채소를 낮은 온도로 오래 우려낸 ‘채수’를 요리에 사용한다. 그게 장수의 비밀 중 한 가지다. 그런 게 바로 약선요리다. 겨울철 동해에서 잡힌 싱싱한 생선으로 회를 떠먹는다면 그것도 약선요리가 될 수 있다.-더불어 약식동원(藥食同源)이란 말도 자주 듣게 된다.△모든 음식은 약이 될 수 있으나, 약은 음식이 아니다. 물도 어떤 물을 어떤 방법으로 먹느냐에 따라 약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독일 특정지역의 폐광에서 나오는 물은 광물성 미네랄이 다량 함유된 암반수다. 그 물로 암을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면서 여러 개의 리조트까지 생겼다. 암의 치료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물이 몸에 좋은 건 분명하다. 광물성 미네랄이 함유된 물은 세포로 침투하는 시간이 수돗물보다 훨씬 빠르다.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 어떤 물로 국을 끓일지를 오래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요리의 재료가 되는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다. 서양의 유산균은 동물성이다. 한국엔 그보다 좋은 식물성 유산균이 있다. 바로 매일 먹는 김치다. 법제(法製)를 통해 사람 몸에 독이 되는 걸 이로운 성질의 음식 재료로 만드는 걸 보면 서양 사람들은 놀란다. 동양의 식생활을 신비롭게 생각하는 것이다.-꽤 오랜 시간 요리 혹은, 음식 만들기를 하며 살아왔는데.△지금 우리들 밥상은 엄마가 아닌 대기업이 차린다. 밥도 전기밥솥이 한다. 예전엔 가마솥에서 밥을 뜸들이려면 20분쯤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 우리를 만든 게 아닐까? 아궁이 숯불로 고등어를 굽고, 된장찌개를 끓였던 할머니들은 음식을 하면서 가족들의 건강을 염원했다. 이젠 그런 게 사라졌다. 그런 ‘정성의 시간’이 없어지면서 현대병도 생겼다. 위장장애와 치주질환, 역류성 식도염, 관절염 등이다. 관절염은 먹는 음식과 관련이 깊다. 많은 한국인이 관절염을 앓게 된 시기를 거슬러 추적해보면 콩이나 포도씨에서 추출된 기름을 일상적으로 먹으면서부터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게 관절염을 부르는 하나의 원인이다. 시간을 들이지 않고 ‘빠르게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음식 재료가 사람 몸에 좋을 수 없다. 그런 흐름을 멈춰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영남과 호남을 오가며 대학에서 요리사를 꿈꾸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들에게 강조하는 것은.△딱 3가지다. ‘국적 없는 요리는 만들지 않아야 한다’ ‘조리의 원칙과 기본에 충실해라’ ‘요리를 할 때는 행복한 마음과 평상심을 가져라’는 것이다. 마음에 악(惡)이 생기면 음식에는 독(毒)이 깃든다는 게 내 평소 믿음이다.-당신에게도 스승이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영향은 받은 스승이 누군가.△내 어머니다. 나만이 아니다. 전라북도에서 ‘남자들만을 위한 요리교실’을 열었을 때 예상을 뛰어넘어 700여 명의 참석자가 몰렸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남성들이었다. 도지사까지 왔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여전히 좋아하는 음식은 학생 때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 반찬과 된장찌개, 시래깃국 등이었다. 앞으론 포항에서도 그런 요리교실을 열어보고 싶다. 21세기엔 피자와 치킨이 대표적인 ‘엄마의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자식과 어머니를 이어주던 ‘음식’이란 연결고리가 끊어진 듯해 아쉽다.-당신이 정의하는 한국 요리란.△외국 요리의 주인공이 ‘셰프’라면, 우리 음식의 주인공은 요리를 먹는 사람이다. 요리의 철학은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한국 요리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담긴다. 더운 여름엔 시원한 냉국을 올리고, 치아가 좋지 못한 노인에겐 부드러운 음식을 대접한다. 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겐 섬유질 풍부한 음식이 제격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좋은 요리사 아닐까?-겨울이다. 추위를 이기게 해줄 음식 하나 소개한다면.△이 계절엔 굴과 표고버섯으로 만든 요리가 좋다. 굴은 그 하나만으로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식재료 중 하나다. 굴무침, 굴전, 굴밥 다 맛있고 몸에도 이롭다. 표고버섯을 곁들이면 더 맛깔스러울 것이다.-현재 가장 정성을 쏟고 있는 일은 뭔가.△전라북도 고창은 좋은 인삼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다. 올해는 통곡물연구소장을 맡은 나와 고창군 농업기술센터 현행렬 소장 등이 힘을 합쳐 ‘메디푸드’라 할 수 있는 흑삼과 블랙소금의 연구·개발을 진행하게 된다. 상품화가 되면 외국으로의 수출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향후 그려나갈 당신의 미래 청사진은.△우리의 전통음식을 지켜가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채록해 그들의 노하우를 문서나 책으로 남기고 싶다. 한국의 부엌을 책임졌던 할머니들 대부분이 이젠 요양병원에 계신다.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해야 할 작업이다. 이런 일에 관심을 가져주는 지자체와 관련 기관이 없어 걱정스럽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1-06

“심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글을 쓰고, 길이 주어지면 그 길을 따라갈 뿐입니다”

‘한문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면 길게 기른 수염에 하얀색 모시 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노인이 떠오른다. 더불어 ‘서당’과 ‘훈장’이란 단어가 눈앞으로 스쳐 지나간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쩔 수 없는 선입견이다.그런데 ‘조금’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고려대 한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재욱(49) 강사는 글에서 보이는 감각과 말에서 느껴지는 센스가 재기발랄한 20대 청년 같다. 에너지가 넘치고 자유분방하며, 심지어 모던하다. 그에겐 대중의 선입견을 전복시키는 힘이 있다.바로 그 자유로운 에너지와 모던한 힘으로 김재욱 씨는 현재까지 적지 않은 책을 썼고, 페이스북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인터넷 세상을 종횡무진 중이다. 물론 본업이라 할 강의에도 소홀하지 않는다.몇 해 전엔 중국 고전 ‘삼국지’ 속 등장인물과 21세기 한국의 정치인·언론인·작가 등을 매치해 분석한 글을 페이스북에 연재해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는 ‘삼국지 인물전’ 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거침없는 태도와 명쾌한 논리, 여기에 위트가 담긴 김재욱 씨의 글과 말은 적지 않은 독자와 네티즌을 매료시킨다.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겸양하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출 줄 안다. 인터뷰 내내 이것이 ‘통념을 깨는 한문학자’ 김재욱의 매력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래는 그가 들려준 삶과 일, 기억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고향과 현재 하는 일은.△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서울로 이사했다. 부모님 고향은 봉화다.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강사고, 강의가 없을 땐 글을 쓰고, 인문학 강연을 다니고 있다.-어릴 때부터 한문에 관심이 있었던 건가.△네 살 때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운 기억이 있다. 아버지도 ‘명심보감’을 가르쳤다. 그러나 한문에 별 관심이 없었고, 한문학과 진학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대입 시험 점수를 맞추다보니 한문학과를 선택하게 됐다.(웃음)-유년과 청년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는지.△중고교 시절은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땐 성적이 바닥이었고,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다만 글을 잘 쓰고 싶어 문예부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대학에선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다. 학생자치기구와 학생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좀 바꿔보고 싶었다. 그런데 성격은 잘 안 바뀌더라.-당신이 생각하는 한문과 고전의 매력은 뭔지.△본격적으로 한문 공부를 시작한 건 스물다섯 살 때다. 한문학과를 나왔으니 최소한 ‘논어’ ‘맹자’는 알아야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개설한 ‘논어’와 ‘맹자’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그게 재미가 있었다. 그때 불이 붙어 이쪽으로 진로를 잡게 됐다. ‘한문’을 고리타분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측면에선 현대의 글과 비교해도 센스 면에서 더 나은 글도 많다. 한문 고전 안에서 삶의 지혜나 교훈을 찾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재미있고 감동을 주는 글이 넘쳐난다.-‘삼국지’ 등장인물과 현대 정치인을 비교·분석하는 글로 SNS에서 주목받았는데.△2013년 말 논문 두 편의 마감 시한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이 스트레스를 풀려고 페이스북에 삼국지 인물과 현대 인물을 매칭해 짧은 인물평을 썼다. 그런데 다음날 깨보니 페이스북이 난리가 났다. 친구 신청이 쇄도하고, 계속 연재해 달라는 댓글이 올라오고…. 그런 이유로 논문을 서둘러 마무리 한 후 ‘삼국지인물전’의 초고를 연재하기 시작했다.-페이스북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대중 소통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인다.△사람들이 내 글이나 방송을 좋게 봐준 것이다. 페이스북, 팟캐스트의 공통점 중 하나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만날 수 있다는 거라고 본다. 이는 이전 시대의 매체와 구별이 되는 것이고, 매력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자기 맘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면서 한계가 아닐까? 내 경우는 일방적으로 내 할 말만 하지만, 모자란 소통은 오프라인을 통해 메우고 있다.-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어떤 건가.△올해 출간 예정인 것까지 합하면 모두 10권이다. 학술서, 인문교양서, 소설 등인데, 2015년 나온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가 애착이 간다. 내 전공이 ‘한국 한시’다. 독자에게 한시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고, 한시를 통해 인생, 사회,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 영역에 속하는 거의 모든 걸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에선 사람의 삶과 세상의 일은 단순히 칼로 무 베듯 자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한자와 한문 공부 노하우를 알려준다면.△먼저 ‘한자’와 ‘한문’을 구별해야 할 것 같다. 한자는 말 그대로 ‘낱글자’고, 한국어의 단어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문’은 한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뜻한다. 공부의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 한자는 많이 보고 쓰고 입으로 말하면서 외우는 게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이다. 조금씩 공부하더라도 꾸준히 하는 게 좋다. 마음먹고 잘 하고 싶다면 하루에 10분이라도 투자해서 읽고 쓰면 의외로 얻는 게 많을 것이다. ‘한문’도 비슷한데, 다만 익히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모든 공부가 그렇겠지만 속성으로 익히기는 어렵다.-유년을 보낸 경북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은.△영주남부초등학교 운동장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 파란 하늘, 밝은 햇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속에 친구들과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있다. 정말 밝기 그지없는데 마음 한 구석엔 슬픈 마음이 일어나고, 조금씩 눈물도 나고 그렇다. 어릴 때 서울로 이사를 왔고, 이후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조금은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내서 그런 것 같다. 영주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영동선 철길에 핀 코스모스도 떠오른다. 고향에 가도 늘 고향이 그립다.-학생들에겐 어떤 스승이 되고 싶은가.△‘스승’은 지식 뿐 아니라 지혜를 전달해 학생들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난 스승이 될 자질은 부족하다. 학생들에게 스승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내가 맡고 있는 과목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강사’가 되려고 한다. 강의 준비 잘 하고, 강의실에서 먼저 학생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웃음)-학자로서, 인간으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미래의 꿈은.△‘백세 시대’라고 하지만, 그만큼 살기는 어렵다고 본다면 적어도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졌다. 학자로서든 인간으로서든 개인적인 미래를 생각할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꿈이나 목표를 두고 살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길이 주어지면 그 길을 따라서 살아왔다. 물론 그 길을 갈지 말지 선택은 내가 했지만, 인생을 계획적으로 살진 못했다.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꿈은 없다. 꿈이 있다고 해서 그 삶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심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 쓸 말이나 쓰는 데 필요한 지식이 바닥나면 그만둘 각오도 돼 있다. 무언가를 억지로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게 꿈이라면 꿈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17

“지진·코로나로 어려운 고향 함께 역경 헤쳐 나갈 겁니다”

포항 장기면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낸 소년에게 골프는 낯설고 생소한 스포츠였을 게 분명하다. 부모는 농사와 해녀 일로 자식들을 키웠다.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소년은 공장에서 작업 중 사고로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한창 피가 뜨겁던 20대 초반. 당연지사 절망과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그러나 소년은 목전에 닥친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았고, 노력을 불쏘시개 삼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발견해 주목받는 삶을 살고 있다. 프로골퍼 최호성(47) 씨 이야기다.최 선수는 지난 5월 포항시 홍보대사에 위촉됐다. “최호성이 보여준 삶의 진정성과 역경을 극복해낸 과정이 지진과 바이러스로 시련을 겪고 있는 포항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란 이유에서다.먹고 자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스물셋 청년이 우연히 골프를 접했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프로 선수가 됐으며, 크고 작은 골프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한 사람이 돼 포항으로 돌아왔다. 흥미로운 귀향이 아닐 수 없다.세상 모든 스포츠는 인간의 삶과 닮았다. 기쁨과 환희의 순간, 고통과 눈물의 시간을 함께 겪는 게 보편의 인생사(人生事)다. 누구도 크게 다를 바 없다.“포항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최호성 씨를 만나 굴곡 많았을 인생사에 관해 물었다.-고향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지.△너른 들판과 짙푸른 바다가 지척인 포항시 장기면에서 1973년 태어났다. 거기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고교도 포항 해양과학고등학교를 나왔다. 친구들과 뛰어놀던 유년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부모님은 아직 포항에 있다고 하던데.△맞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장기면에 계신다. 부친은 연로하셔서 건강이 썩 좋지는 못하다. 어머니는 다행히 아직도 밭일을 하시고, 때로는 바다에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로 살고 계신다. 자식의 마음이란 다 비슷하겠지만, 두 분 모두 고향에서 오래 살아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유년 시절에도 골프선수가 되고 싶었던 건가.△어릴 땐 골프가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 그저 또래들과 산과 바다를 헤매며 철부지로 살았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공장으로 실습을 나갔다. 그때 엄지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충격이 작지 않았고, 한 2년쯤 그로 인해 방황하던 시절을 보냈다. 골프 치는 사람을 처음 본 건 스물세 살 때다.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에서였다. ‘숙식 제공’이란 아르바이트 광고를 보고 경기도로 갔다. 내가 골프라는 스포츠와 처음으로 대면했던 게 거기다.-골프장에서 일을 한다고, 직원 모두가 골프를 치는 건 아니잖나.△처음에 가서는 손님들 가방 나르고, 시설 관리하고, 청소하는 등 허드렛일을 했다. 그런데, 그곳 골프장 대표가 독특한 마인드를 가진 분이었다. ‘골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골프에 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골프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더욱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업무시간이 끝나면 직원 누구라도 골프를 칠 수 있게 해줬다. 덕분에 골프채를 잡아볼 수 있었다. 그게 스물다섯 살 때다.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골프란 걸 해볼 수 있겠나’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당시 골프장 대표가 눈에 보이지 않는 동기 부여를 한 셈이다.-골프 입문 후 짧은 시간에 프로가 됐는데.△스물다섯 살 1월에 시작해 이듬해 봄에 먼저 세미프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때까진 내가 골프에 재능이 있다는 걸 스스로도 몰랐다. 그 해에 프로도 됐다. 지역 예선을 거쳐 선발된 사람들이 전국 대회를 위해 부산 가야 골프장에 모였다. 당시 여러 명이 같은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갔다. 바로 그곳 대회에서 프로골퍼가 된 것이다.그날 경기가 끝난 후 밤늦게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꿈같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발 밑에 놓인 커다란 골프가방이 걸리적거리는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공장 실습 때 다친 엄지손가락이 핸디캡이 되지는 않는지.△손톱 밑에 조그만 가시 하나가 들어가도 불편한 게 사람이다. 몸의 한 부분이 온전치 못하니 당연지사 힘들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하며 지내왔다.-낚시 타법, 혹은 ‘낚시꾼 스윙’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다.△내 경우 다른 선수들보다 늦게 골프를 시작했다. 유연성이 젊은 골퍼들보다 부족한 게 사실이다. 골프는 몸이 회전하는 힘을 이용해 공을 멀리 보낸다. 탄력이 강한 고무줄은 쭉 당겨지지만, 고무줄이 오래 되면 탄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람 또한 비슷하다. 회전력을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를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스윙폼이 변해갔다. 그걸 본 일본의 한 사진기자가 ‘하체의 무게중심이 좌우로 오가는 게 낚시하는 모습과 닮았다’며 낚시꾼 스윙이란 이름을 붙였다. 해보니 근육에 무리도 덜 주고, 부상도 방지돼 좋았다.-주로 활동하는 무대는 어디인가.△현재는 일본이다. 물론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도 자주 참석하려고 한다. 팬들의 응원과 성원 덕분에 미국에서 초청을 받아 경기를 하기도 했다. 프로선수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99년이니 벌써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경쟁하는 골퍼들의 나이가 대부분 20대, 혹은 30대 초반이다. 스스로 나이를 잊고, 체력을 관리해 매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프로골퍼로 살아오며 잊을 수 없는 경기는.△지난해 일본 프로리그 헤이와 PGM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때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40대 중반에 이룬 성과인지라 더 그랬다. 생애 처음으로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2008년 하나투어 챔피언십도 잊지 못한다. 그때 가족들 모두가 경기장에 나와 응원해줬던 기억이 선명하다.-얼마 전 포항시 홍보대사가 됐는데.△기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과연 내가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운 시기이기에 그간 삶의 역경을 헤쳐 온 내가 선택된 게 아닐까? 고향을 오래 떠나있어서 아직은 포항의 상황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고향을 알릴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고민하려고 한다. 홍보대사라는 의미 있는 직책을 맡겨준 포항시와 시민들께 감사드린다. 포항은 철강과 해병대의 도시다. 강한 이미지를 지녔다. 나 역시 포기하지 않는 강한 신념과 성실한 태도로 모든 경기에 임하려 한다.-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뭔가.△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골프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서 50~60대가 돼서도 프로 무대에 서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이 필요하다.(웃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골프를 포함한 각종 스포츠 경기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6-03

“우리가 만든 집은 ‘작품’ 끝까지 책임집니다”

10대 때부터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소년이 있었다. 집을 만든다는 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그 아이는 무작정 ‘집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꿈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키워간다면 꿈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귀 위에 연필을 꽂고 건물을 바삐 오르내리는 이들을 지켜보던 소년은 자라서 건축가가 됐다. 참샘건설 최광식(47) 대표 이야기다.건설 현장 청소 일부터 시작해 현재는 ‘작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믿음직한 건설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만드는 건축물 모두에 ‘좋은 스토리’를 담고 싶다는 그는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집 만들고, 관리하는 일에 30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 부었다. 어려운 시기에도 뜻을 함께 해준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참샘건설 직원들은 “우리가 만든 건물은 끝까지 우리가 책임진다”는 자세로 일한다. 건축물에 ‘애프터서비스’ 개념을 과감하게 도입한 것이다.자신을 성장하게 만들어준 포항을 위해 봉사활동에도 열심인 최광식 대표는 최근 부모님을 위한 두 번째 집을 완성했다.“스물셋에 첫 번째 집을 만들 땐 모든 것이 내 중심이었지만, 이번에 지은 집은 아버지·어머니의 요구와 편의를 중심에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며 환하게 웃는 최 대표. 이는 그가 늘 강조하는 ‘고객 중심주의’의 실천이기도 했다.최 대표를 만나 살아온 과정과 건설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겪은 일, 지향하는 건축의 방향과 참샘건설의 비전 등을 물었다. 아래 그의 답변을 요약한다.-포항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1973년 보경사 인근 송라면에서 출생했다. 초·중·고교도 포항에서 나왔다. 대학에선 토목을 전공했다. 아내와 쌍둥이 아들, 늦둥이 딸과 살고 있다. 아들 둘은 모두 미대에서 디자인을 공부 중이다.-어릴 때부터 건축에 관심이 있었는지.△무엇이건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림도 곧잘 그렸다. 하지만 시골이라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앞으로 건축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가졌다. 막연하게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귀 위에 연필을 꽂은 채 안전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다.-건축 일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대학 다닐 때도 아파트 공사 현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별다른 기술이 없으니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건축을 밑바닥부터 배우기 위해서였다. 스물여섯에 토목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많은 사람과 접촉하며 관계를 만들어가겠다는 내 꿈과는 멀어 보여 그만두고, 작더라도 내 업체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참샘건설을 시작한 시기는.△토목회사를 퇴사했던 2000년대 초반 즈음이다. 그 이전에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부모님의 집을 지었다. 시골에서 억대의 건축비가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아들을 믿고 좋은 집을 만들어보라며 큰돈을 기꺼이 내주신 부모님이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집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최근에 내가 새롭게 만든 집으로 이사했다.-참샘건설이 어떤 회사인지 소개한다면.△현재 정직원이 10여 명이다. 이루고자 하는 뜻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 회사가 꿈꾸는 건 설계부터 시작해 완공까지 하도급을 맡기지 않고 건축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내는 것이다. 다행히 구성원 모두가 이런 미래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다른 건설회사에 비해 이직이 많지 않다는 것도 참샘건설의 자랑이라면 자랑이다.-지방에서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영업과 수주가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긍정의 힘으로 회사를 키워가려 애쓰고 있다. 특히 건물이 만들어진 이후의 사후 관리와 애프터서비스에 노력한다.-건물을 애프터서비스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우리가 만든 집과 건축물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몇 해 전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땐 직원 모두가 2주 동안 우리가 만들었던 건물을 돌아다니며 안전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했다. 점검 비용도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 우리는 작업한 건물을 ‘작품’이라 부른다. 그 작품에 작은 하자라도 있으면 고객에게 실망을 주게 된다. 다행히 지진으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한 건물은 없었다. 그때 ‘참샘건설이 만들면 튼튼하다’는 인식이 생긴 듯하다. 지진이라는 재앙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건설회사임에도 해마다 책을 발간하고 있는데.△2016년부터 우리가 만든 건축물에 담긴 이야기를 담아 책을 출간하고 있다. 여타의 건설회사 팸플릿처럼 단순히 기술적인 면, 자재 소개 등이 아닌 작업한 집과 건물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해 책을 만든다. 건축주들에겐 선물이 될 수 있고, 회사가 커나가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유용한 영업 자료도 된다.-그간 만든 건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2007년쯤 건축에 대해 탁월한 철학과 감각을 가진 부부의 의뢰를 받아 포항 청하면에 만든 집이다. 분야별로 시공 팀이 3~4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고, 고생 또한 많았지만 ‘좋은 건축물이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건축주와 회사가 마음을 터놓고 소통한 결과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 건축주께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다.-직원들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는 어떤 것인지.△회사와 직원이 함께 성장하기를 바란다. 믿고 일을 맡기는 고객의 만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참샘건설로 커가지 않겠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에게 월급도 더 많이 주고, 복지도 개선해나가고 싶다.-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집, 좋은 건축물은 뭔가.△30년 가까이 일을 해오며 느낀 것인데 모든 건축물엔 ‘스토리’가 담겨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마음으로 집을 지으면서 이웃들과 다툼이 생긴다면 거기에 좋은 기운이 생길 수 없다. 우리 회사는 건축 과정에서 생기는 주변과의 불화와 각종 민원을 해결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결국 좋은 집은 ‘좋은 스토리’를 가진 집이 아니겠는가.-참샘건설이 어떤 회사로 기억됐으면 좋겠는지.△집 잘 짓고, 사후 관리(애프터서비스) 잘해주는 회사다. ‘참샘건설에 맡기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현재까지는 직원 모두가 회사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는 나부터 주위를 살피면서 내실을 더해가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27

“풀지못한 본질적 모순·차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소설을 쓴다는 건 허구의 문장을 수단으로 세계와 인간의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다.소설가가 꼭 똑똑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 소설가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 아닐까. 고민 없이 해결되는 문제는 없고, 진실은 고민의 시간을 통해 찾아지는 것이므로.소설가가 인간의 소프트웨어라 할 정신 영역을 심화·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의사는 하드웨어라 부를 수 있는 육체의 안정적 보존과 효과적인 치유를 담당하고 있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다.여기 내과 의사와 소설가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최근 첫 번째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을 펴낸 김강(48)씨.1990년대에 청춘 시절을 보낸 김씨는 그 시기를 함께 살았던 수많은 또래들처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나름의 깊은 고민을 했다. 방황의 시간도 길었다.그러나, 30여 년 전 품었던 문제의식은 중년에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고 싶었다. 그게 김강 씨가 바쁜 의사 생활 가운데서도 시간을 할애해 소설을 썼던 이유다. 열정은 물론, 뒤따르는 노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을 터.김씨는 남다른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20대 중반까지는 법학을 공부했고, 스물일곱에 의대 신입생이 됐으며, 마흔에 가까워서야 내과 전문의가 됐다. 그리고, 마흔여덟엔 ‘자신의 책을 낸 소설가’라는 이름표까지 얻었다. 독자들이 그의 삶에 궁금증을 가질만하다.“의사 일과 소설가로서의 역할 두 가지 모두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김강 씨를 초여름 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수요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그는 무엇을 꿈꾸며 어떻게 살아왔을까? 아래는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이다.-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72년 바다가 지척인 부산 대연동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대 법학과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경주 동국대 의대에 입학해 공부했다. 서른셋에 결혼했고,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둘 있다.-현재 의사이자 소설가다. 중고교 시절은 어떤 학생이었는지.△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한 아이는 아니었다.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글을 쓰는 건 좋아했다. 생각하는 걸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고, 그 방식을 찾았던 것 같다.부모님 기억 속에선 모범생인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게 뛰어난 성적도 아니었다. 공부를 썩 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분야에서 눈에 띌 만큼 뛰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중학교 때까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피아노 연주를 즐겼다. 고등학교 땐 시 비슷한 걸 쓰곤 했는데,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동인지를 한 권 냈던 기억이 난다.-고교 졸업 후 법대에 입학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아버지의 권유였다. 당시엔 말 잘 듣는 학생이었다.(웃음) 적지 않은 수험생들이 부모의 뜻에 따라 학과를 선택하곤 하던 시대였다. 입학은 했는데 사법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고민, 이를테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지향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1990년대 초반엔 나 말고도 그런 학생들이 많았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번민의 시간이 길었다. 무얼 알고 삶의 방식을 모색했다기보다는 정확한 지향이 없으니,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 듯도 하다. 그 시기를 미화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싶다. 그때 보낸 시간을 통해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었고, 또한 인간에게 전혀 의미 없는 시간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의대에 입학한 건 언제이고, 그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스물일곱 살 때다. 학력고사가 아닌 수학능력시험을 보고 입학했다. 학력고사와는 달리 논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정답을 찾는 게 비교적 수월한 시험이다. 의대에 간 이유는… 20대 초반에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쳤다. 자식으로서 한 번이라도 효도란 걸 해 보고 싶었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과는 적지 않게 나이 차이가 났는데, 그런 게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IMF 즈음이라 나 외에도 나이 먹은 의대 신입생들이 적지 않았다.-인턴과 레지던트 등 수련의 시절은 군대 같은 분위기라고 하던데.△나이대접도 조금은 받은 것 같고… 대부분 학년 단위로 움직이니 선배들과 크게 불화할 일은 없었다. 나이 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도 했다. 야구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거기서도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지 권위적으로 굴지 않았다. 내 느낌만일 수도 있으나 레지던트가 됐을 때 선배들이 나를 자기 후배로 뽑아가는 걸 싫어하지는 않은 것 같다.-전문의가 된 건 몇 살 때인가.△의대 6년 과정과 인턴, 레지던트까지 거치고 내과 전문의가 됐을 때 서른여덟이었다. 이후 동국대 경주병원에서 일하며 조교수로 생활했다. 거길 그만두고 마흔한 살에 포항으로 와서 몇몇 선배들과 병원을 했다. 2016년부터는 양덕동에서 한 선배와 동업으로 내과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이 13명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병원이다.-소설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의사 일이 바쁠 텐데 언제 습작을 했나.△3년 전부터다. 그 이전엔 소설을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내 경우 한 가지 일에 열정을 기울이면 거기에 몰두하는 편이다. 평일엔 의사로 일하고, 술도 마시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주말엔 자리 잡고 앉아 소설 쓰기에만 몰두했다. 처음 1년 동안은 한 달에 한 편 이상 습작을 했다. 마흔다섯 살에 습작을 시작했고, 그해 등단했으니 다른 작가들보다 운이 좋은 편이다. 주말 내내 책상에 앉아있는 날 이해해준 아내와 아이들이 고맙다.-2017년 심훈문학상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주위의 반응은.△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3개월 만에 상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내가 특히 좋아했다. 취미로 하는 글쓰기가 아니란 걸 인정받았다는 의미도 컸다. 동료 의사들은 ‘대단하다’ ‘언제 소설을 다 썼냐’라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을 보였다.(웃음) 아직은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썼던 습작이 1990년대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스토리를 소설이란 방식으로 풀어내고 나니 다음 작품들이 생각보다 쉽게 이어졌다. 짧은 습작 기간에 30편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싶다.-사숙하거나 영향 받은 작가가 있는지.△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걸 써야지 누구와 비슷하게 쓰고 싶지는 않다. 집 거실과 병원 진료실에 막심 고리키(러시아의 작가·1868~1936)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냉소적인 동시에 진중해 보이는 그의 눈빛을 보며 소설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포항문예아카데미와 포항도서관에서 진행된 글쓰기 프로그램은 문장을 만들어 다듬고, 소설의 얼개를 짜는 방법을 익히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얼마 전 첫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이 나왔다. 어떤 기분이 들었나.△출간 전에는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받아드니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아주 좋을 줄 알았는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부담감도 없지 않았다. 다만 ‘이제 나는 습작생이 아닌 작가다’라는 의식은 생겼다. 보잘것없는 내 습작들의 첫 번째 독자가 돼준 부모님과 아내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이번 책을 통해 다루고자 했던 주제는 뭔가.△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갖가지 감정, 우리가 아직까지 풀지 못한 세계의 본질적 모순들, 차별이나 폭력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다. 책에 수록된 소설 대부분이 가까운 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우리 곁에 엄존함에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 인간적 문제와 모순이 그때는 해결될 수 있을까’란 의문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다.-앞으론 어떤 의사, 어떤 소설가를 꿈꾸는지.△처음 의대에 갔을 땐 목적의식이 없었다. 내 경우엔 환자를 돌보게 되면서 차츰 소명의식이 생겼다. 마음과 귀를 열어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스한 의사가 되고 싶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소설가로선 일상에만 천착하지 않고, 조금은 큰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작품들을 심화시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독자들에게 던지며. 또한 잘 쓰지는 못해도 열심히, 꾸준히 쓰겠다는 약속은 할 수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20

노래하는 포항 홍보대사가 되고픈 ‘경찰 가수’ 권영삼

최근 높은 인기를 얻으며 방영된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을 안타까운 눈길로 지켜본 사람이 있다. ‘노래하는 경찰’로 이름이 알려진 권영삼(52) 경위다.‘46세 이하’라는 자격 요건에 걸려 도전을 포기해야 했던 권씨는 다른 가수가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서 열창하는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을 터.1992년 경찰이 됐고, 1997년 가수로 데뷔한 권영삼 씨는 세상 무엇보다 노래와 무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가졌던 아쉬움과 부러움이 충분히 이해된다.열 살도 되기 전 조용필의 노래와 몸짓을 따라하던 아이는 서른 살이 가까워서야 그토록 원하던 가수의 꿈을 이뤘다. 포항을 포함한 경북 지역 축제무대에 서며 원 없이 노래를 불렀다. 물론 본업인 경찰 직무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이젠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 한 가지 일을 제대로 잘 해내기도 어려운 게 사람이다. 그런데 경찰과 가수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왔으니 권씨의 삶은 누구보다 바쁘고 드라마틱했을 게 분명하다.웃는 모습이 소박하고 선량해 보이는 그를 지난 주말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아래는 “누군가에게 도움과 기쁨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경찰 가수’ 권영삼이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궤적이다.-태어난 곳은 어딘가. 간단하게 가족 소개도 부탁한다.△딸기와 감자로 유명한 경북 고령이다. 1968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고향을 떠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다. 아내와 대학생인 딸, 고등학교에서 축구를 하는 아들과 함께 산다.-노래에 관심을 가지고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시기는.△초등학교 다닐 때 누나가 듣던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노래를 들었다.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 ‘비련’ 등이 동요보다 좋았다. 최고의 가수를 흉내 내면서 따라 불렀다. 시골에선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으니 동네 어른들이 ‘귀엽다’며 사탕도 사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가수의 꿈을 가졌던 것 같다.-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그때도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1980년대 후반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대구의 라이브 무대에 서기도 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노래 하러 다니는 나를 걱정한 작은형에게 잡혀 학교로 돌아갔다. 고교 졸업장은 받아야 했으니까.(웃음) 졸업 이후엔 잠시 가수의 꿈을 접고 의무 경찰로 복무했다.-경찰이 된 건 언제인지.△1987년 고교 졸업 후 바로 입대했다. 제대한 게 1990년이다. 의경 시절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경찰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공무원인 아버지와 형의 권유로 경찰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그 기간이 살아오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때다. 1992년 어렵게 합격해 포항으로 발령을 받았다. 세월은 빨라 올해로 벌써 28년을 경찰로 살아왔다.-버리지 못했던 가수의 꿈을 이룬 건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가.△1996년에 포항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다. 아마추어 가수들에겐 큰 무대다. 묻어두었던 꿈이 생각나 거기에 도전했다. 포항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본선대회에서 상반기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경찰이라는 직업과 가수 생활을 병행해보자라고 마음먹었다.-당시 가족들과 주의의 반응은 어땠나.△아버지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경찰을 그만두고 가수로 산다고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아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니 좋기는 하지만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국노래자랑 수상 이듬해인 1997년 포항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선배에게 곡을 받아 첫 번째 앨범을 냈다. 그게 벌써 23년 전이다.-가수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제1회 ‘포항 국제 불빛축제’ 무대에 섰을 때다. 조금 과장하자면 수만 명의 관객이 영일대해수욕장 해변에서 울릉도행 배가 오가는 선착장까지 들어찼다. 그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듯하다.-가수와 경찰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게 쉬울 것 같지는 않다.△가수가 됐던 초기엔 경찰서에 권위적인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경찰이 무슨 노래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노래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고, 가수 활동을 통해 주민에게 편하게 다가가 좋은 관계도 형성할 수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격려의 목소리도 많아졌다. 날 이해해준 동료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경찰로선 주로 어떤 업무를 수행했는지.△포항남부경찰서 관내 파출소 근무를 20년 이상 했다. 이곳엔 13개의 파출소가 있다. 주로 주민들과 밀착된 경찰 관련 업무를 해왔다. 쉽게 이야기하면 시민들의 어려움을 바로 곁에서 해결해주고 도와주는 역할인데,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준다’는 가수 활동과도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다.-경찰로 일하며 느꼈던 가장 큰 보람은.△수도 없이 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며 살았다. 과거엔 벌금을 내지 못해 수배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소액의 벌금만 내면 해결되는 것인데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은 그게 쉽지 않았다. 그들 중 몇 명에게 벌금을 빌려줬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인데, 나중에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람을 보며 경찰로서의 기쁨을 맛봤다.-가수로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내왔으니 크게 아쉬운 건 없다. 하지만, 얼마 전 출전하려고 마음먹었던 ‘미스터 트롯’에 나이를 이유로 나가지 못한 건 참으로 안타까웠다. 스스로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46세 이하’라는 자격 요건 탓에 도전을 거부당했다. 앞으로 TV에서 이런 경연이 열린다면 나이 제한을 없앴으면 좋겠다. 꿈을 이루는데 나이가 걸림돌이 된다는 건 너무 서글픈 일 아닌가.-포항에서 많은 무대에 섰다고 들었다. 자선공연도 여러 차례 했다던데.△‘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요즘은 무대에 서기가 어렵다. 30대 때는 내가 가진 재능으로 좋은 일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자선공연을 자주 열었다. ‘경찰 가수’라는 타이틀이 있어 모금 실적도 나쁘지 않았다. 대형 마트에 마련된 무대에서 3년쯤 연말 자선공연을 진행했다. 거기서 모인 돈은 복지센터 등에 기부했다. 한국에서도 기부문화가 좀 더 활성화됐으면 한다.-다시 태어난다면 경찰과 가수 중 어떤 걸 선택하고 싶은지.△하나만 고르지는 못하겠다.(웃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경찰, 대중에게 행복감을 선물하는 가수 둘 다 하고 싶다. 이건 내 소박한 욕심이다.-지금까지 4장의 앨범을 냈다. 당신의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포항에서 경찰로 일하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젠 그들에게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다. ‘비바 포항’과 ‘과메기 추억’은 그런 이유에서 만들어진 곡이다. 타 지역에 포항을 알리고, 시민들에게 힘을 줬으면 한다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줬으면 좋겠다. 내 노래가 개사돼 노인들의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하는 작은 역할을 했다는 것도 잊을 수 없는 보람이었다.-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가수, 어떤 경찰로 남길 원하는가.△주민들과 잘 융화하는 경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경찰로 기억되고 싶다. 가수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다면 기부문화를 정착시킨 사람으로 살고 싶기도 하다.-40년 이상 노래와 더불어 살았다. 노래에는 어떤 매력이 있나.△‘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 열풍을 보면 알겠지만, 노래엔 사람살이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는 힘이 담겼다. 노래는 삶의 희로애락을 싣고 우리 곁을 달리는 버스 같은 게 아닐까. 특히나 지금처럼 우울한 시기엔 노래가 치료제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 본다.-가수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현실이 팍팍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꿈을 위한 도전을 계속하라고 격려해주고 싶다. 나도 그랬으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13

“특권층 전유물이 아닌 그림 보통 사람들도 감동 누려야”

51년 인생에서 40년 넘는 시간을 한 가지에 몰두하며 한 우물을 파왔다면 그 신념의 단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푸른 바다와 짙푸른 녹음, 붉은 일출과 어두운 달그림자가 공존하는 울릉도에서 태어난 소년은 철이 들기 전부터 그림이 좋았다. 물감과 붓만 있다면 어디서건 그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미술은 소년의 ‘운명’ 혹은 ‘삶 자체’가 됐다.흘러온 반세기 동안 울릉도, 포항, 대구, 다시 포항으로 사는 곳은 바뀌었지만 그림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화가 박승태 씨 이야기다.그림을 그리며, 그림이 가져다주는 매혹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는 박 화백은 지천명(知天命)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학원에서 미술 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수십 년간 꾸준히 내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꿈의 절반은 이미 이룬 것 아닌가”라며 환한 미소를 짓는 박승태 씨를 포항 중앙동 꿈틀로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만났다.자신의 젊음과 에너지 모두를 그림에 바치며 살아온 세월이 후회되지는 않는지, 앞으로는 어떤 그림으로 사람들과 만나고자 하는지, 지향하는 예술세계는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아래는 그 물음에 관한 박 화백의 솔직한 답변이다.-먼저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1969년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던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살다가 포항으로 나온 건 아홉 살 때다. 이후 중·고교는 포항에서 마쳤고,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그림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언제이고, 미술에 매료된 계기는.△오형제인데, 큰형과 셋째 형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 집안 분위기가 그랬으니 덩달아 나도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나보다 더 재능 있던 형들은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고, 결국 내가 화가가 됐다. 인생이 참 재밌다.(웃음)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대회에 나가 상을 받곤 했다. 알게 모르게 유년을 보낸 울릉도의 자연 경관이 미술에 대한 열망의 한 부분을 키워준 듯하다. 어릴 때부터 꿈이 미술교사였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림 그리며 살고 싶었다. 그 꿈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중·고교 시절 미술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지.△중학교와 고등학교 땐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시절 미술을 가르친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그때 정말이지 빼어난 실력과 재능을 갖춘 친구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내가 질투를 느낄 정도로 그림 실력이 탁월한 친구였다. 걔가 죽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친구 집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직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시기에 접한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오래 슬퍼했다. 당시엔 미술학원과 집만을 오갔는데, 그림 그리는 걸 반가워하지 않던 아버지가 그즈음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걸 허락했다. 지금도 가끔 그 친구의 모습과 작품이 떠오른다.-군대에서도 미술 전공한 것이 도움이 됐는가.△예비군을 관리하는 부대에 있었다. 인사·행정병이었는데, 부대 내 현수막 제작과 차트 작업 등을 도맡아 했다. 미술을 공부한 덕택에 군대 생활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었다.-대학을 마친 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모교인 계명대 인근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대학 졸업 직후엔 경제적으로 어려워 앞산에서 사람들 초상화도 그렸다. 용돈을 벌어 쓰기 위한 일종의 아르바이트였다. 학원 강사와 운영자로 일하던 시절엔 보람도 있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이른바 ‘명문 미술대학’에 많이 들어갔다. 개인 사정으로 학원을 정리하고 포항으로 돌아왔던 게 30대 초반 때다. 이후엔 쭉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다.-당신의 작업 스타일을 소개한다면.△풍경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좋아하고 즐겨 그린다. 나는 자연이 가진 매력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작품 중엔 풍경화가 많다. 지금은 물론 학생 때도 그림의 소재를 찾기 위해 배낭 메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산을 포함한 자연이 그 자체로 좋다. 그 안에 있으면 숨 쉬는 것부터가 편하다.-앞서 질문과 이어지는 것인데, 여행을 좋아한다고 들었다.△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이 스스로 만족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매일, 매시간 모습을 달리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꽃이 필 때와 질 때의 아름다움이 다르고, 해가 뜰 때와 저물 때의 색감이 다르다. 현장에 가지 않으면 그걸 느낄 방법이 없다. 경상도, 서울,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가리지 않고 여행을 다녔다. 가본 여행지 중 가장 멋진 곳을 꼽는다면 적막함과 오밀조밀함이 매력적인 겨울철 보경사 청아골과 가을 무렵의 청송 주왕산이다.-좋아했거나 영향을 받은 화가가 있는지.△폴 세잔느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그린 작품들이 매력적이다. 클로드 모네의 색채도 좋아한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는 요즘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됐다. 그들의 그림은 재론의 여지없이 감동적이다.-예술가로 살아가는 게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경제적, 심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텐데.△금전적인 압박도 있고…. 학원을 운영할 때는 시간이 없어서 힘들었다. 해외여행도 그래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도 그림의 소재가 될 좋은 경관의 여행지가 많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자연 속에서 내 그림을 완성시켜 나갈 생각이다. 전라도의 갯벌과 어릴 때 떠나와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울릉도의 풍광을 소재로 한 작품도 해보고 싶다.-포항 원도심 활성화와 문화예술인 창작 지원을 위해 조성된 ‘꿈틀로’에 작업실이 있다.△3년 전쯤 들어왔다. 30만 원 정도의 작업실 임대료를 지원받고 있으니 크건 작건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려면 예술가들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방식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꿈틀로’에서 활동하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은.△동네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내가 지원받는 임대료도 결국은 시민들의 세금이 아닌가. 그걸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2018년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는 시민들에게 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초상화를 그려 선물한 분들이 대략 백 명쯤 된다.-당신의 전시회를 찾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지금까지 개인전을 열 번 열었다. 지난번 전시 때는 지진 탓에 힘들었는데, 이번엔 코로나19가 말썽이다. 전시회 운이 없다. 올해 여는 전시의 핵심은 ‘봄, 여름, 가을, 겨울-반복의 시간’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그 흐름 속에서도 자연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 ‘변함’과 ‘변하지 않음’에 주목했으면 한다. 내 경우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림이 밝아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 ‘밝음’도 잘 살펴줬으면 좋겠다.(웃음)-그림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삶 자체다. 내게 자연은 사랑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재주로 사랑을 느끼는 대상을 화폭에 담는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거창한 의미 부여나 긴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화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할 게 있다면.△목적이나 수단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그림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궁핍과 외로움을 견디며 자기 자신과 오랜 시간 싸우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꾸준히 작업하는 성실함 역시 필요하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화가를 포함한 예술가와 일반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화가의 겉멋은 사람들을 그림에서 멀어지게 한다. 몇몇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쓰인 미술평론도 지양돼야 할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누리는 예술이 바람직할까? 그림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그림이 주는 감동을 누릴 자격이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5-06

“변화를 향한 희망은 현재진행형 입니다”

과장과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는 담백한 사람. 이번 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포항남·울릉 지역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석패한 허대만(52) 씨에게서 받은 첫 느낌이다. 구구하게 패배를 변명하지 않고, 경쟁했던 당선자를 향해 “앞으로 의정활동을 잘 해서 표를 준 분들에게 보답하시라”는 덕담을 전하는 사람.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허대만 씨는 지금까지 포항에서 8번의 선거를 치렀다. 성적은 시의원 1승을 제외하면 7패.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총선과 지자체장 선거에 나섰다. 포기를 모르는 출마의 이유가 궁금했다.미래가 기대되는 명문대 학생에서 시민운동가로,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에 노력한 시의원에서 국회의원과 지자체장 선거 출마자로 포항에서 살아온 30년 가까운 세월.4·15 총선이 막을 내린 지난 토요일 오후. 조용해진 선거사무소에서 허대만 씨를 만났다. 정치인으로서의 삶,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삶에 더해 그가 그리고 있는 포항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어볼 수 있었다. 아래 그날 오간 대화를 가감 없이 옮긴다.-아쉬움이 있겠지만, 21대 총선 결과를 자평한다면.△전국적으론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얻어 정권 후반기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돼 다행이라 본다. 하지만, 대구·경북의 경우엔 미래통합당이 거의 전 의석을 휩쓸었다. 선거 결과가 포항의 앞날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걱정된다. 기울어진 지역의 정치 지형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안타깝다.-포항에서 시의원, 시장, 국회의원 선거에 8번 출마했다. 시의원 당선 한 번을 제외하고는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출마를 지속했는데.△2008년 국회의원 선거엔 대구·경북 27개 선거구 중 민주당 출마자가 6명밖에 없었다. 2010년 지자체장 선거에선 23개 시·군 중 민주당 후보자가 겨우 나 하나였다. 경북에도 민주당 지지자가 분명 있는데,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당의 지역 책임자로서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출마를 지속했다. 선거를 통해 지역의 정치 구도를 바꾸겠다는 오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갈수록 지지를 보내는 시민들이 많아지고 있어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서울대 정치학과에서 공부했다. 서울이 아닌 포항에서 정치를 하려는 이유는.△포항은 내 고향이다. 대학 다닐 때부터 ‘고향에서 선출직 공직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대학원 재학 중에 포항으로 내려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대 중반 시절이다. 어릴 땐 형편이 너무 어려웠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선친을 대신해 날 도와준 포항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부채의식이 있다. 앞으로도 포항 사람으로 살아갈 생각이다.-이번 선거엔 출마하지 않으려했다고 들었다.△21대 총선에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좋은 후보를 찾고자 애썼고, 실제로 몇 분을 접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난색을 표했다. 그들의 심정도 이해된다. 민주당 깃발로 포항에서 선거에 나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후보를 내지 않고 지역구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민주당 경북도당 위원장의 책무를 다른 이들에게 미룰 수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출마를 결심했다.-경쟁자였던 미래통합당 후보가 ‘포항은 썩은 땅’ 등의 막말로 설화(舌禍)를 겪었는데.△SNS에 글을 쓰거나 발언 도중에 나온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선거기간 중엔 후보자의 뜻이 왜곡되거나 과장돼 비판받는 경우가 흔하다. 이미 선거는 끝났다. 앞으로 의정활동을 열심히 해 지역민의 신뢰를 얻었으면 좋겠다.-이번 선거 결과를 보면서 집권당과 대구·경북의 핫라인이 사라졌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지역 현안을 풀어가야 하는데 정부와의 협상 통로가 막혔다. 심각한 문제다. 그동안은 집권당이 취약한 지역을 배려해왔다. 김부겸, 홍의락, 김현권 의원 등이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대구·경북을 배려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향후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국책사업 등에서 우리 지역이 소외받거나, 사업 진행에 브레이크가 걸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 어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갈 것이다.-포항에서 정치를 하며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문재인 정부 초기에 행정안전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때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주무 부처의 정책보좌관으로 있었기에 임대주택 보급, 이재민 지원, 수능 연기 등의 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장관에게 ‘일정 기간 포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도 했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하기 위해 고심했다. 포항시민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지진 이후 포항은 지속적 경기 침체에 빠져있는데.△포항시의 성장잠재력은 여전하다. 이젠 지곡단지를 중심으로 첨단산업을 키워야하지 않을까.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초기 동력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다.-거듭 낙선의 고통을 준 포항시민들에게 서운하지 않나.△누구를 원망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겠구나’라는 상황에서 선거를 치러본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총대를 멘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매번 유권자 15% 이상의 지지는 받았다. 절망할 정도의 득표는 아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을 때도 선거비용은 보전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포항시민들이 나를 선택해주시겠지’라는 마음이 훨씬 컸다. 물론 이번 선거는 사전 여론조사 결과 등이 나쁘지 않아 기대를 했는데, 다소 아쉽다.-몇 해 전엔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다.△젊은 시절엔 건강을 과신했는데, 이른바 촛불정국 즈음에 위암 통보를 받았다. 수술과 항암 치료가 잘 돼 지금은 괜찮다. 아프고 나서도 선거를 두 번이나 치르지 않았나.(웃음) 현재는 6개월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고 있다.-다둥이 아빠다. 집안에선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인가.△애들이 네 명이다. 나와 아내 모두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능한 많이 낳자는 것에 동의했다. 장남이 스물셋, 막내딸이 열두 살인데 자식들을 볼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이번 선거 유세 현장에 아이들 모두가 나왔다. 자기들끼리 아빠를 응원하자고 의논을 했던 것 같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바빠서 애들을 챙겨줄 시간이 많이 없지만, 언제나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한다. 아내에겐 가정적인 남편이 되고 싶다.-앞으로도 포항에서 출마할 의향이 있는지.△즉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선거 과정에선 어쩔 수 없이 주변에 너무 많은 폐를 끼치게 된다. 도와준 분들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평생 안고 가야할 것이지만…. 포항을 발전시켜 포항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능력 있는 사람을 찾고 싶다는 정도로 대답하면 되지 않을까?-포항이 그려가야 할 청사진은.△단순화된 산업구조의 혁신이 필요하다. 철을 생산하는 도시인데도 자전거 만드는 기업 하나 없다. 철만 만들 게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관련 산업을 함께 키워가야 한다. 고용도 거기서 창출된다. 포항의 철강생태계를 미래형으로 바꾸는데 일조하고 싶다. 포스코와 포스텍이 있으니 인프라는 어느 지역보다 좋지 않은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 정책 실행 과정에서 민간의 협조를 이끌어낼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육성해야 할 것이다.-포항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포항에 애정을 가진 젊은 정치인이 나타났을 때 꿈과 희망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비단 정치 지망생만은 아니다. 청년이 떠나는 도시가 아닌, 어떤 분야에서건 청년이 미래를 설계하며 성장할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부탁드린다.포항은 단순화된 산업구조의 혁신이 필요하다. 철만 만들 게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관련 산업을 함께 키워가야 한다. 고용도 거기서 창출된다.포스코와 포스텍이 있으니 인프라는 어느 지역보다 좋지 않은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 정책 실행 과정에서 민간의 협조를 이끌어낼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육성해야 할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22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詩의 힘을 느껴보세요”

해사한 얼굴, 선량한 눈매, 소년의 웃음을 지닌 중앙대 이승하 교수. 얼핏 봐선 예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그늘이나 곡절 하나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상처 받기 쉬운 예민한 영혼을 가진 이승하의 소년기는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학교들은 군대 이상으로 폭력적이었고, 서울법대를 나와 판검사가 아닌 문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형님으로 인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학교와 가정 어디서도 편히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처럼 어두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고교생 이승하는 신경 쇠약을 앓으며 가출과 자살 시도를 거듭했다. 그 결과는 퇴학 처분.하지만, 그에게는 ‘성실함’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 있었다. 그것들이 파탄 직전에 이른 이승하의 청년기를 구해냈다. 회사원, 출판사 직원, 교수 등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건 성실한 삶의 태도를 버린 적이 없다.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20~30대를 보내고, 연구와 강의에 바친 40~50대를 지나 이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떠올린다는 이승하 교수. 애잔한 눈빛으로 고향 쪽을 바라보는 그를 만나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 들었다.-‘코로나19’로 한국 학교들이 전례 없던 상황을 맞았다. 대면 수업이 아닌 동영상 강의, 온라인 개강 등으로 어수선하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아주 우울하다. 교수란 직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데 학생들 얼굴도 못 보고 동영상 강의 녹화를 하고, 과제를 이메일로 받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인적 없는 교정에 봄꽃이 활짝 피어 있어 눈물이 다 났다.-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성장한 것으로 안다.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은.△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3년에 한 번 꼴로 전근을 다니셨기에 출생지와 성장지가 다르다. 김천에서 생활한 건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 2개월 정도다. 그 이후로도 간간이, 혹은 한동안 부모님이 계신 김천에 있기도 했지만 주로 세상을 떠돌았다. 장문의 유서를 써놓고 집을 나가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 구경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작정 상경은 아니었고 나중에 출세해 어머니를 모시러 오겠다고 했다.-김천고등학교를 다녔다. 현대문학 분야에서 다수의 작가를 배출한 학교인데.△두 달밖에 안 다녔기에 교풍을 느낄 시간은 거의 없었다. 내가 입학한 그해 대도시 고교는 평준화되었고 소도시는 시험 제도가 유지됐다. 그런 이유로 인근 도시에서 수재들이 몰려왔다. 교사들도 엄격했다. 첫 번째 월말고사부터 틀린 문제 숫자만큼 매를 맞은 기억이 난다. 경찰직을 그만둔 아버지는 사법고시 1차시험에 합격한 형이 2차시험을 보지 않고 문학을 하겠다고 하자 분기탱천 했었다. 집에서 맞고 학교에서 맞고…, 견딜 수 없어 서울로 줄행랑을 놓아 고교시절이 끝나버렸다. 그래서 김천 출신의 문태준, 김연수, 김종태, 김중혁 같은 문인들을 학교 후배라고 하기엔 좀 어색하다. 문단 행사 등에서 만나도 선배티를 안 내고 존댓말을 쓴다.-경북에서의 소년시절은 어땠나. 외향적인 아이였는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는지.△후자다.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교 3년 동안 김천문화원 도서관의 책을 마음껏 빌려보면서 보냈다. 학교 성적은 부모님을 낙담케 했지만, 학원사 세계명작이니 계림문고니 하는 청소년용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보냈다. 책만 끼고 살았으니 나름대로 행복했다.-대기업 사원으로도 일했다. 교수 외의 직업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1987년부터 1997년까지 11년 동안 샐러리맨이었다. 쌍용양회에서 7년을 근무했고, 문예출판사와 금강기획에서도 1년씩 근무했다. 회사생활 하면서 박사과정 입학시험 공부도 했었고 졸업까지 했다. 상사의 배려 덕분에 일주일에 하루 결근을 해도 결근 처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못한 일을 업무 외 시간에 하느라 고충이 많았다.1998년 인천 재능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있었고, 막 마흔이 된 1999년에 모교인 중앙대에 부임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20대와 30대가 힘들었다. 작년에 학교에서 20년 근속상을 받았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당신의 초창기 시들은 슬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회의, 시집 속에 사진이 들어간 형식적 파격 등으로 기억되는데.△내가 태어난 다음날 4·19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에 이상하게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근무했다면 분명 학생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무장공비 사건과 간첩단 일망타진 기사를 수시로 보던 시절이었다. 중동에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남미에선 걸핏하면 쿠데타가 발생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마침 시 등단작이 ‘고문 정국’과 ‘보트피플’을 다룬 것이어서 그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를 쓰게 됐다. 비극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사진을 시에 끌어들이게 됐다. 세상은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는 소돔이었고 무간지옥이었다. 순수서정시보다는 현실참여시가 내가 갈 길이라 생각하고는 뭉크의 그림 ‘절규’ 속 인물의 심정으로 시를 쓰던 시기였다.-올해 이순을 맞았다. 젊은 시절 시와 지금의 시가 달라졌는가.△시집 제목을 몇 개 들어보겠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엄살이 아니라 이런 시집을 누가 사볼 것인가? 다만 교과서에 3편이 실려 교사들과 학원 강사들이 내 시를 해설하고 문제로 내기도 한다. 며칠 전에 시집 ‘예수·폭력’을 냈는데 이제는 방향을 틀어 유쾌한 시, 밝은 내용의 시, 유머러스한 시를 쓰고 싶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시와 함께 소설과 평론도 쓰고 있다. 각각의 작업이 어떻게 다른지.△시를 쓸 때는 즐겁고, 신문 칼럼을 쓸 때는 펜이 춤을 춘다. 논문, 평론, 계간평, 심사평 등은 억지로 쓰는 탓에 등에 땀이 맺힌다. 소설은 품이 많이 들어 띄엄띄엄 발표한다. 그래도 최근 중편 하나와 단편 둘을 발표했다. 친일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어떤 중견작가가 내리 3번을 읽었다고 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제자들에게 강조하는 삶의 자세는.△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말해준다.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인간을 연민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종교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나니 너무 안타깝다.-당신의 기억 속 스승은. 그리고 아끼는 제자는.△권태을 선생님은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글쓰기를 지도해주셨다.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방황할 땐 용기를 줬다. 대학 때 스승 신상웅 교수님은 소설가의 길로 이끌어준 분이다. 대학원 스승 김주연 교수님은 줄기차게 쓰는 사람만이 작가임을 가르쳤다. 제자가 등단을 했다고 알려오거나, 취직을 했다는 전화가 오면 종일 기분이 좋아 웃고 다닌다.-한 매체에 ‘내 영혼을 움직인 시’를 오래 연재했다. 어떤 시가 영혼을 움직이나.△현대시는 난해하고, 너무 길고, 산문 형식이라 시를 읽지 않게 됐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쉽게 이해되지만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시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해 365일 동안 1편씩 설명하는 작업을 꼬박 1년간 했다. 해설을 쓰는 것보다 시를 고르는 게 훨씬 어려웠다. 시의 힘이 거기 있지 않을까?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시인은 어떤 사람인가.△언어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기쁘다고 환호성을 지를 수는 있다. 소리를 내는 자, 절규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출간을 포함한 향후 계획은.△공초 오상순 평전과 청소년용 시인 윤동주 전기, 시조만을 다룬 문학평론집을 4월 말에 함께 출간한다. 예전에 낸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도 재출간된다. 신들린 듯 쓰다 보니 책을 마구 내고 있다. 반성할 일이다.-삶을 돌아볼 나이다. 어떤 스승,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천재 시인이 아니라 성실한 시인으로, 엄한 스승이 아닌 따뜻한 스승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철없던 10대 땐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뛰쳐나가곤 했었다. 나이가 드니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 얼마 전엔 ‘김천신문’에 김천 일대를 소재로 한 연작시를 20여 편 연재했다. 수구초심이라는 말의 뜻을 실감하는 요즘이다.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말해준다.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인간을 연민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종교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나니 너무 안타깝다.언어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기쁘다고 환호성을 지를 수는 있다. 소리를 내는 자, 절규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