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공고 김명훈 동창회장
‘에너지와 신명이 넘치는 사람’.
포항제철공고 김명훈(58·사진) 동창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든 생각이다. 덩치는 크지 않지만 김 회장의 목소리와 행동에서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온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일 터.
중학교 때까지는 고향인 충청북도 제천에서, 고교 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절은 경상북도 포항에서, 20대 중반부터는 전라남도 광양에서, 50대를 넘어서면서는 광양과 포항을 무시로 오가며 살고 있는 김명훈 회장.
그는 잘라 말한다. “어디서건 지역감정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없다.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서 최선을 다해 생활한다면 그런 걸 느낄 시간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김 회장은 젊었던 시절은 물론 요즘도 이런저런 모임이 있거나, 운동을 할 때면 포항제철공고 교가를 큰 소리로 부르곤 한다.
1982년 고교 진학하며 포항과 첫 인연
기계 관련 업체 ‘광양주식회사’ 입사 후
총무업무서 계약·납품·운전까지 1인4역
‘연매출 290억 달성’ 대표이사까지 맡아
작년 ‘포철공고 행복나눔 봉사단’ 창단
광양·포항 오가며 지역교류 활성화 기여
충청도 사람이, 경상도 고등학교 교가를, 전라도에서 부르는 보기 드문 풍경을 연출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사람이 바로 김명훈 회장이다. 그만큼 자신이 졸업한 학교와 동문수학한 동창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깊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급 간부를 맡으며 형성된 책임감과 리더십은 30대 초반 광양주식회사에 들어가면서 제대로 발휘된다.
1998년. 그가 다니기 시작한 광양주식회사의 기계 부문 매출액은 겨우 500만 원. 2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같은 회사의 매출액이 290억 원으로 상승했다. 대리에서 과장과 부장, 상무를 거쳐 지금은 대표이사가 된 김명훈 회장.
그는 더불어 고생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직원들에게 “잘 되건 못 되건 남에게 기대거나 책임을 미루지 말고, 자기 몫의 희망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김 회장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왔기에 가능한 조언이 아닐까?
넉넉하지 않았던 경제적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는 나눔과 봉사에도 관심을 가지지 시작했다.
지난해 ‘포철공고 행복나눔 봉사단’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은 김명훈 회장은 이전에도 태인장학회와 모교인 포철공고에 장학금을 흔쾌히 내놓고, ‘희망의 집짓기’와 포스코 공급사·협력사의 ‘기업시민프렌즈 봉사단’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왔다.
포철공고에 입학한 후에야 바다를 처음 봤고, 바닷가 마을에 사는 고교 동창의 집에서 먹었던 문어의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는 김 회장과 지난 21일 만났다. 그의 삶과 생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1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는 김 회장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인해 더없이 유쾌했다.
아래 그날 오간 이야기를 정리해 옮긴다.
-고향은 어디이고 포항에는 언제 왔나.
△1966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1982년 고교에 진학하면서 포항에 왔다. 당시는 전국 각 지역에서 포철공고로 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기숙사에는 나처럼 꿈을 품고 서울과 강원도, 전라도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다.
-포철공고에서의 추억은.
△충청북도엔 바다가 없다. 포항에 와서 처음 바다를 봤다. 동창 중 한 명이 포항 송라 출신인데, 그 친구 동네로 놀러가서 맛본 문어가 기가 막혔다.
-학창 시절은 어땠고, 졸업 후에는 어디 취직했는지.
△고등학교 땐 학생회 간부도 하며 즐겁게 지냈다. 졸업 후엔 포항제철에 입사했다. 1985년 한 해는 포항에서 보냈고, 이후엔 광양제철소로 옮겼다. 광양에 제철소가 만들어질 무렵이었는데, 거기로 갈 사람을 뽑는다기에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어 지원했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살아봤으니 전라도에서 생활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광양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1986년부터 9년 정도 광양제철소에서 근무했다. 낯선 곳이지만 재밌게 지냈다.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볼링 동호회와 모터사이클 동호회 등을 만들어 그곳 사람들과 어울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교성은 좋았다.(웃음)
-큰 회사를 그만두고 비교적 작은 회사인 광양주식회사에 들어간 이유는.
△역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다. 광양제철소를 그만두고는 잠깐 지역 정보신문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금 등이 쉽지 않았다. 그때 퇴직금을 다 까먹었다. 하지만, 귀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광양주식회사에 들어간 건 30대 중반이었다.
-입사 후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포항제철에 다닐 때부터 격의 없이 교류하는 친구와 선후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직장생활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공부한 기계 관련 업체인 광양주식회사에서 미래를 설계하려 했다. 입사하면서 기계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총무 업무부터 계약, 납품, 트럭 운전까지 1인4역을 맡았다. 첫해엔 매출액이 500만 원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몸담은 일터를 키워나가는 보람이 더 컸으니까. 지금은 매출액이 290억 원 정도 된다. 그런 도전과 성취의 과정에서 과장과 부장, 상무 등을 거쳐 대표이사가 됐다. 현재 회사의 상시 근무 인원은 70명쯤 된다.
-일하면서 항상 마음에 담아두는 원칙은.
△신뢰와 품질이다. 1만 원짜리 물건을 팔 때도 그렇고, 1억 원짜리 물품을 거래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드는 제품이 바로 내 얼굴이다.
-어려운 시절의 기억도 있을 텐데.
△서른 살 땐 아내가 내 생일에 미역국 끓여줄 돈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 했다. 자기 몫의 희망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오랜 기간 봉사활동을 이어온 것으로 안다.
△젊을 땐 돈이 없어 하고 싶어도 봉사활동을 할 수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광양 포철공고 동문회를 주축으로 봉사단을 만들었다. 그게 2007년쯤이다. 봉사활동을 하게 되면서 세상엔 나보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이 많다는 걸 실감으로 깨달았다.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게 봉사라고 생각한다. 그게 동창들이나 친구들에게 ‘야, 우린 그래도 밥은 먹고사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라고 말하는 이유다.
-봉사활동을 해오며 기억에 남는 사람은.
△2014년쯤에 광양에 사는 ‘국악 3남매’를 후원했다. 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 동창회 행사 등에 매번 초대하고, 독도에 가서 진행한 수궁가 완창공연도 지켜봤다. 그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한 걸 보면 보람을 느낀다.
충청도 산골 아이가 포항에 와서 처음 바다를 봤습니다. 친구 동네서 맛본 문어 맛은 기가 막혔죠. 1985년 졸업 후 포항제철에 입사해 그 이듬해 광양제철소로 옮겼어요.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살아봤으니 전라도 생활도 흥미진진하겠더군요. 제철소를 그만둔 뒤 지역 정보신문을 운영하다 광양주식회사에 들어간 건 30대 중반이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광양 포철공고 동문회를 주축으로 봉사단을 만들었는데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제2의 고향 포항을 오가며 작은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후배님들께 감히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감동과 울림이 있는 삶을 지향했으면 좋겠습니다.
-포철공고 동창회장으로서의 향후 계획은.
△작년에 ‘포철공고 행복나눔 봉사단’을 만들었다. 장학회가 동문 가족과 후배들을 위한 것이라면 봉사단은 나눔의 영역을 지역사회 전체로 확장한 것이니 의미가 작지 않다고 본다. 이익의 사회적 환원을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광양과 포항의 동창들이 서로가 거주하는 지역을 오가며 교차 봉사활동을 하게 된 것도 즐거움이 될 것이다. 지난해엔 ‘코로나19 사태’로 진행하지 못했던 동창 체육대회도 다시 크게 열었다. 포철공고를 포함한 포항 지역 고등학교 동창회 사이의 교류 활성화에도 노력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인생은 짧다. 그러니, 감동과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나. 이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후배는 물론, 친구들도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감동과 울림이 있는 삶을 지향했으면 한다. 더 큰 가치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 인간만의 특권이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