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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평화로운 땅에 우뚝 선 깔끔하고 단아한 무열왕릉

묘호(廟號·왕이 죽은 후 살아생전의 공덕을 기려 붙인 명칭) 태종.시호(諡號·이전 왕이 사망한 후 다음 왕이 선대 군주에게 붙인 이름) 무열대왕.휘(諱·선조의 생전 이름)는 김춘추.비단 신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중고교 시절 졸면서 역사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이름 무열왕 김춘추(603~661).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아들 문무왕(김법민)이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게 초석을 깔아준 사람이다.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삼척동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무열왕 김춘추의 능(陵)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선도산 입구에 자리해 있다. 고문헌은 아주 짤막하게 그의 유택이 위치한 지역을 지목했다. 이런 문장이다.“661년 음력 6월. 59세로 무열왕이 죽었다. 그는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묻혔다.”추정하면 7세기 중반 신라엔 영경사라는 이름의 규모가 큰 절이 있었고, 그 절 북쪽이 여러모로 길한 땅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터. 왕의 장지(葬地)를 아무 곳에나 쓰는 경우는 없는 법이니까.법흥왕 때 불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던 신라는 선도산 일대를 서방정토(西方淨土)라 부르며 ‘부처가 다스리는 평화로운 땅’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서방정토 들머리에 존경 받는 왕의 시신을 매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 ‘서방정토’에 잠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선도산 초입엔 공원 형태로 커다랗게 조성된 무열왕릉(사적 20호) 묘역이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 꼭대기에서 서라벌의 서악(西岳)을 내려다보는 형상이라면, 무열왕릉은 서악 입구를 지키며 우뚝 선 모습이다.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 신라가 성스럽게 여겨온 땅에서 영원한 잠에 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의문에 간명하게 답하는 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래와 같은 설명이다.“태종무열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이름은 김춘추로 진덕여왕 사후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을 열었다. 즉위 전부터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를 직접 오가며 탁월한 외교역량을 보여주었고, 김유신과 연합해 신귀족세력을 형성하여 보다 강화된 왕권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토대를 마련한 후 재위한 지 8년 만에 사망했다.”여러 가지 취재를 위해 지난 몇 년 사이 경주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무열왕릉을 네댓 번 찾았다. 그때마다 ‘참으로 깔끔하고 단아한 고분이구나’란 생각을 했다.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위 풍광도 좋았다. 다른 왕릉 주변에선 볼 수 없었던 귀부(龜趺·거북이 형상의 비석 받침돌)도 이채로웠다.무열왕은 신라 992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왕 중의 왕’이라 불러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역사학자가 별로 없을 정도의 행적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학식과 외교 협상력은 탁월했고, 잘생긴 외모까지 돌올했다.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룬 7세기 중후반을 다룬 각종 학술논문에서도 무열왕 김춘추의 ‘튀는 행적’은 여러 차례 발견된다.“668년에 문무왕은 고구려를 평정하고 선조묘 종묘에 개선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태종(무열왕)에게 ‘일통삼한(삼국통일)’의 공덕을 올렸다 일통삼한은 삼한이라는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의미로 신라의 왕이 삼한의 천자(天子·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라는 것을 뜻한다.”위의 서술은 경북대 사학과 안주홍의 논문 ‘신라 태종(太宗) 묘호(廟號)와 일통삼한 의식’ 중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문무왕은 무열왕의 아들. 하지만,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터무니없는 업적을 억지로 부풀려 아버지 앞에 바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 백성들의 비웃음을 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므로. ◆ 고문헌과 학술논문에서 보여지는 무열왕은…무열왕은 신라 내부에서만이 아닌 당시로선 군사·경제·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 당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조금은 우스운 비유가 될 수 있겠으나, 지금의 보이 밴드가 일으킨 ‘한류 열풍’ 같은 인기였다.동국대 사학과 김상현의 논문 ‘일연(一然)의 일통삼한(一統三韓) 인식(認識)’에서도 무열왕에 대한 국내외적 호평은 간명하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형태다.“당나라의 황제는 김춘추의 풍채를 보고 ‘신성지인(神聖之人·고결하고 거룩한 사람)’이라 칭찬했다. 무열왕이 통치하던 시대를 백성들은 ‘성대(聖代·어질고 현명한 왕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불렀다. 이는 태종무열왕에 대한 서술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후략)”이처럼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탁월한 정치·외교적 성과와 영토 확장이라는 통치자로서의 업적을 보여준 사람이 묻힌 곳이라면, 그 시절 선도산과 서라벌 서악이 가졌던 위상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지난 7월 하순. 무열왕릉을 찾았을 땐 무시무시한 폭염이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어지럽게 매미가 울고,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괜한 짜증과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무열왕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풀밭 그늘에 다리를 뻗고 앉아 1400여 년 전 드라마나 영화 같았던 신라의 역사를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을 듯한 더위도 ‘한순간 지나가는 짧은 고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 무열왕 외에도 4명의 신라 왕이 묻힌 선도산무열왕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도산 입구 묘역엔 적지 않은 여행자와 경주시민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드나든다. 남녀노소 불문이다. 그들을 위해 무열왕릉의 간략한 개요를 ‘위키백과’를 인용해 소개한다.“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4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사적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능으로 보여지고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이다.”세상 인간 대부분이 그렇듯 무열왕 김춘추도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몸 안에 지니고 살았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여타의 인물들처럼 호오(好惡)가 엇갈린다.“김춘추가 외교관일 때 일본과 중국은 그를 ‘잘생긴 외모에 빼어난 화술을 구사하는 사내’로 기록한다. 동맹을 맺었던 중국만이 아닌 적대국가였던 일본도 김춘추를 좋게 평가한 것”이라는 호평과 함께 “삼국통일 과정에서 대동강 이북을 포기한다는 협약을 당나라와 체결했고,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민족주의 성향 사학자들의 비난도 받고 있는 것.어쨌건 세간을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무열왕은 자그마치 136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선도산 자락에 누워 웃지도, 울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다. 그 잠은 편안했을까?선도산엔 무열왕릉 외에도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다. 당연지사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거기도 가봐야 할 터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27

솔개가 멈춘 산에 자리잡고 나라를 도와 神異한 일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이 책엔 기이한 설화와 신묘한 전설이 곧잘 등장한다. 그래서, 대중들에겐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쉽고 재밌게 읽힌다.‘삼국유사’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불리는 ‘선도산 성모’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것이다.“(선도산 성모는)옛날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신선처럼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그녀는 해동(지금의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딸을 걱정하던 황제가 편지를 써서 솔개의 발에 달아 보냈다. ’이 솔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고 살라‘는 내용이었다. 사소는 아버지의 말대로 솔개를 날렸고, 솔개가 멈춘 산에 머물면서 신선이 됐다. 그 산의 이름은 서술산(지금의 선도산)이었고, 신모(사소)는 오랫동안 거기 살면서 나라를 도와 신이(神異)한 일을 많이 일으켰다.”선도산 성모, 또는 선도산 신모로 불리는 설화 속 여성은 절벽에 세운 마애여래삼존불, 무열왕릉을 비롯한 여러 개의 거대 고분과 함께 선도산의 수수께끼를 푸는 주요한 3개의 열쇠 중 하나다.베일 속에 싸인 비밀스런 이 여성이 신라 당대에 가졌던 위상과 서라벌 귀족들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건 흥미롭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몇몇 고문헌에 서술되는 내용만으론 구체적 실체가 선뜻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 ◆곤륜산 서왕모와 선도산 성모의 연결고리는...신라사 연구자들은 그간 각종 연구 논문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선도산 성모’에 접근하려 애썼다.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김태식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김태식은 그의 논문 ‘고대 동아시아 서왕모(西王母) 신앙 속의 신라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에서 중국 고대사와 연관시켜 선도산 성모를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신라 건국신화에 의하면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선도산 성모가 낳은 아들이다. 선도산은 경주의 서악이었다. 나아가 선도(仙桃)라는 이름 자체는 중국의 곤륜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즉, 중국 곤륜산 신화에서 서왕모가 지배하는 곤륜산에는 불로장생을 보장하는 선도(仙桃·먹으면 죽지 않는 복숭아)가 자란다고 했거니와, 이 런 모티브를 신라 왕도에 적용한 산악이 바로 선도산이었다. 선도산 성모는 신라 건국시조의 어머니인 까닭에 성모(聖母)로 추앙되었다. 성모란 신라라는 지상왕국을 낳은 최고 여신격이란 의미다. 이런 점에서 선도산 성모가 바로 신라판 서왕모였음은 명백하다.”인접한 나라의 고대 설화 속 여신과 신라의 ‘성스러운 어머니’를 연결고리로 묶어낸 김태식. 그렇다면 논문에서 언급되는 ‘서왕모’는 어떤 인물일까?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서왕모는 선도산 성모처럼 숭배 받는 여성이었다. 곤륜산에 살면서 신선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요지금모(瑤池金母), 왕모낭랑(王母娘娘) 등으로도 불린 서왕모를 과거 우리나라에선 통상 ‘왕모님’이라 칭했다.재밌는 건 크고 사나운 파랑새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교활한 여우를 수족처럼 부렸고, 어린 아이의 정기를 빨아들여 항상 부드러운 살결과 젊음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다.선도산 성모에 얽힌 전설 또한 근엄하고 진지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재밌고 가벼운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삼국유사’를 다시 펴보자.“신라 54대 경명왕이 선도산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사냥매를 잃었다. 성모에게 사냥매를 찾아주면 작위를 주겠다고 빌었더니, 사라졌던 사냥매가 왕의 책상 위로 날아와 앉았다. 이후 경명왕은 선도산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했다.”◆세상을 쥐락펴락한 제주도 여신 이야기오래전 쓰인 몇몇 책에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희미한 존재의 실체를 찾아다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학자들의 고난이자 즐거움일 터. 선도산을 오르는 기자의 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수백 번을 거듭 오르내려도 선도산 성모가 “나 여기 있소”라고 모습을 드러낼 턱이 없음에도 그냥 무작정 그녀의 신위가 있다는 성모사(聖母祠)를 향했다.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그 와중에 몇 해 전 한라산을 등반했던 때가 떠올랐다.역사가 5000년쯤 되는 국가면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매혹적인 설화나 신비한 전설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한라산이 있는 제주 역시 ‘거대한 여신’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긴 시간 떠돌았다.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 ‘설문대할망’. 다소 과장된 이 여신의 스토리를 ‘한국민속문학사전’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태초에 탐라(제주도)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워 자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아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불꽃이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부지런히 한라산을 만들었다. 치마폭의 흙으로 한라산을 이루고 치맛자락 터진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들이 모여 오름이 생겼다. 할머니는 몸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풍요로웠다. 탐라 백성들은 할머니의 부드러운 살 위에 밭을 갈았다. 할머니의 털은 풀과 나무가 되고, 할머니의 오줌 줄기에서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했다. 그때부터 물질하는 해녀가 생겨났다.”신라의 선도산 성모, 중국의 곤륜산 서왕모, 제주의 한라산 설문대할망. 이들이 능히 해내지 못할 일이란 없었다.도망친 매를 왕의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복숭아를 키우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70km가 넘는 섬을 혼자서 만들고….고대 한국과 중국엔 ‘불능’을 모르는 절대적 힘을 가진 여성들이 있었다. 물론 설화 속에서지만. ◆‘만물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은 서양에도 존재신라의 첫 번째 왕을 탄생시키고(선도산 성모), 신선들의 머리 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곤륜산 서왕모), 수천수만 사람들 삶의 토대가 될 섬을 만들어낸(설문대할망) 동양의 여신들.그렇다면 서양엔 이에 필적할 여신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동서양 불문 인간들이란 무엇이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걸 옮기는 걸 즐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앞서 언급된 동양 세 여신 수준에 이르는 서양 여신으로는 ‘가이아(Gaia)’를 내세울 수 있겠다. ‘만물의 어머니’이자 ‘신들의 어머니’로 지칭되는 여성이다.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는 가이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의인화된 여신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또 다른 명칭으로 ‘게(Ge)’가 있다. 이 명칭의 어원적 의미는 ‘땅’ ‘대지’, 또는 ‘지구’다. 이름의 어원적 의미에서 추측할 수 있듯, 가이아는 모든 생명체의 모태인 대지를 상징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가이아는 ‘카오스’와 더불어 혈연관계 없이 태초부터 존재한 신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작가 히기누스의 ‘이야기’ 서문에 의하면, 가이아는 혈연관계에 의해 태어난 존재로 빛의 의인화된 신 아이테르와 낮의 의인화된 신 헤메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생불멸 신들의 계보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모신(母神·어머니 신)으로….”어느 시대, 어느 장소건 삶이 유한한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를 동경해왔다. 선도산 성모와 가이아는 그런 부러움의 마음이 탄생시킨 고대 설화 속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계속)/홍성식기자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20

신라 첫 번째 왕 박혁거세의 母神이자, 신령한 산의 女山神

고대의 왕 혹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국가의 통치자는 다소간 과장되게 기록되거나 묘사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가 가졌던 권력의 크기와 보통 사람과는 구별되는 신성(神性)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조금 먼 나라 이야기지만 16세기 프랑스의 사례를 잠시 살펴보자.수도자에서 의사로 직업을 바꾸고, 거기에 소설가로까지 활동한 프랑수아 라블레(1483~1553)란 작가가 있다.그가 쓴 작품 중 하나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다. 한국에선 그다지 높은 인기를 누린 소설이 아니지만, 프랑스인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작품”으로 추켜세우는 5부작 풍자소설.이 소설은 비교적 간단한 스토리로 이뤄져 있다. 왕인 가르강튀아의 기이한 출생과 해괴한 행적을 좇아가는 형식이다. 이는 그 당시 풍자소설의 기본적인 골격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무엇이건 범인(凡人)과는 달랐던 왕을 낳은 어머니는...소설에서 가르강튀아는 ‘어머니의 왼쪽 귀’에서 태어난 것으로 서술된다. 인간이 ‘자궁’이 아닌 ‘귀’에서 생겨난 것부터가 엄청난 상징과 은유를 담은 과장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의 먹성을 묘사하는 대목에 이르면 놀라움은 더 커진다. 이런 것이다.“소 16마리, 송아지 32마리, 염소 63마리, 양 95마리, 돼지 300마리, 메추리 220마리, 도요새 700마리, 수탉 400마리, 암탉 600마리, 토끼 1400마리, 산돼지 11마리, 사슴 18마리, 꿩 140마리, 오리, 왜가리, 황새, 칠면조….”어떤 인간도 위에 열거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다. 이는 15~16세기 부패한 귀족들의 퇴폐와 전횡을 꼬집어 풍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해학이 아니었을까 싶다.이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많이 먹는 왕’의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서도 나타난다. 아래는 ‘삼국유사’의 인용이다.“무열왕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庚申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출생에서부터 먹는 양까지 평범한 사람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왕들. 그렇다면, 그런 왕을 넣은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선도산 성모(성스러운 어머니) 또는, 선도산 신모(신의 지위를 가진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의 모신(母神)이자, 신령한 산의 여산신(女山神)으로 회자돼 왔다.1000년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의 출현과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니, 선도산 성모(신모)의 존재는 출발부터가 기세등등했을 터. ◆건국 영웅 낳고 도움을 주며, 죽은 후엔 제의(祭儀)의 대상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 강사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는 신라를 포함한 고대 왕국의 건국신화 속 여성이 가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건국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 건국신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들이 있어 왔다. 이중 신모(神母)는 건국 영웅을 낳고 그들을 기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 내지는 건설하기 위해 떠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시조의 조력자로 나온다. 이와 같은 신모로는 고조선의 웅녀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가 있다. 그리고 이들 신모는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기도 하였다.”지금도 사당을 세워 성스러운 존재로 대접하는 선도산 성모에 관해서는 ‘나무위키’ 역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건국 전의 인물이자 신라의 여신. 고대 한국 문화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신으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됐다. 사후 경주 선도산의 산신으로 숭배됐다.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신라시대에 숭배 받은 여성 산신”이라 정의하고 있다.취재를 위해 두 번째로 경주 선도산을 찾았을 때다. 무열왕릉 뒤편에 자리한 진지왕릉 앞에서 한참 동안 굳은 각오(?)를 다졌다. 땡볕 내리쬐는 한여름에 산길을 꽤 오랜 시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선도산 성모사(聖母祠)까지 가기 위해선 그런 다짐이 필요했기 때문.마침내 성모사에 이르렀을 땐 섭씨 35도가 넘는 날씨임에도 어떤 서늘한 기운에 잠시잠깐 몸이 떨렸음을 고백한다. 이는 문학적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다.어쨌건 다음 연재에서는 성도산 성모, 또는 선도산 신모로 불리는 존재의 보다 내밀한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 곁 ‘신라 보물’ 서악동 삼층석탑무열왕릉 입구에서 차를 꺾어 3분쯤 오르막길을 오르면 한국 작은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조용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오가는 사람이 드물고, 땡볕 아래 산새 울음소리만이 청명한 곳. 정확한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705-1번지.바로 거기 신라인의 예술적 품격을 가감 없이 확인할 수 있는 ‘고대 보물’ 하나가 우뚝 서있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慶州 西岳洞 三層石塔)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됐을 것으로 예측되니 만들어진 게 벌써 1400여 년 전.몹시 귀한 것임에도 너무 쉽게 만날 수 있어서였을까? 석탑이 가진 가치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이럴 땐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기자를 포함해 신라 역사를 잘 알지 못하면서, 호기심은 많은 이들을 위해 ‘두산백과’가 이 탑에 얽힌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준다. 이런 내용이다.“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됐다. 전체 높이 5.07m, 기단의 너비는 2.34m다. 무열왕릉 북동쪽 경사지에 있는 탑으로, 모전탑(模塼塔) 계열에 속한다. 지면에는 두꺼운 장대석(長臺石) 4장을 동서로 깔아서 지대석(址臺石)을 삼았고, 그 위에 8개 돌덩이를 2단으로 쌓아 직육면체의 이형기단(異形基壇)을 구성했다. 경주 남산동 동삼층석탑과 비슷한 형태. 기단 상면에 탑신을 받기 위한 1장의 판석(板石)이 끼어 있는 것은 남산동 석탑에 있는 3단의 층급(層級)에 비해 생략된 형식으로 보인다. 그 위 3층 탑신은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초층 옥신은 정육면체로 우주(隅柱)의 표시가 없으며, 정면 중앙에는 얕은 감형(龕形)으로 호형(戶形)을 만들고 그 중앙에 4개의 못자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금속제의 수환(獸環)을 달았던 자리로 짐작된다…(하략)”삼층석탑 부근은 계절 따라 피는 작약과 구절초로도 유명하다.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은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 지역의 문화유적을 보호하고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이 단체가 조성한 작약과 구철초 꽃밭은 역사 공부와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의 여유를 원하는 여행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꽃이 만발하는 철이면 축제도 연다. 물론 이때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게다가 서악동 삼층석탑에서 불과 수십m 거리엔 왕릉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고분이 4기나 존재한다. 신라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이 바로 거기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서악동, 혹은 서악마을 불리는 곳은 이처럼 ‘경주의 보석’ 역할을 하고 있다. 신라시대 땐 ‘부처가 다스리는 평화롭고 근심 없는 땅(西方淨土)’이라 불렸던 곳이 1천 년 넘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그 역할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다.바로 그 가운데 모든 걸 지켜보고 기억하며 세파를 견뎌 온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다. 그 탑을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이유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13

아미타신앙 뿌리 둔 ‘무열왕대 先代의 극락왕생’ 발원

튀르키예가 터키로 불리던 13년 전 여름. 1개월쯤 그곳을 여행했다. 서쪽은 유럽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 도시로 변화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터키 최대 도시’로 불리던 이스탄불이 그랬다.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이슬람문화의 색채가 짙었고, 주민들 또한 보다 완고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종교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 여행이 끝나갈 무렵. 터키와 이란 접경에 자리한 아라라트산(Ararat Mt.)을 찾았다. 무언가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듯한 눈 덮인 산봉우리를 보며 무신론자인 기자도 잠시잠깐 외경(畏敬)을 느꼈다.실제로 아라라트산은 간단찮은 역사와 장대한 설화를 동시에 간직한 공간이다. ‘종교학대사전’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터키의 동쪽 끝, 이란의 국경 근처에 솟아있는 화산이다. 터키 최고봉이며 터키어로는 알 다아(Agn Dagl)라고 부른다. 아라라트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나뉘는데, 대(大)아라라트산은 5165m다. 만년설로 덮여 있다. 소(小)아라라트산은 3925m. 1829년 독일인 F. 파로트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전설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가 그 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산 인근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에게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민의 단결과 통일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대접받는다. 아라라트는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8세기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왕국의 명칭으로서도 사용됐다.”아라라트산 기슭엔 흙으로 만들어진 매력적인 성(城)도 있다. 그 성 아래 조그만 마을 숙소에서 이틀을 머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경북에도 전설과 더불어 역사를 품은 성스러운 산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일까?” ◆아라라트산 이상의 감흥을 선물한 경주 선도산귀한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선 수고와 고생이 필요하다. 때는 폭염이 시작되던 시기. 무열왕릉이 자리한 선도산 입구에서 ‘마애여래삼존불’이 우뚝 선 정상 부근까지는 꽤 오랜 시간 산길을 올라야 했다.기자는 물론 동행한 사진기자까지 포악한 흰줄숲모기로 추정되는 것들에게 수없이 목덜미와 팔을 뜯기고, 가져간 수건을 땀으로 온통 적시고서야 마침내 바위에 새긴 거대한 석불(石佛) 앞에 설 수 있었다.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본 첫 느낌은 ‘아, 이곳은 튀르키예 아라라트산 못지않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성산(聖山)이겠구나’라는 것.세월이 마모시킨 불상의 모습은 온전치 않았으나,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aura·예술품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와 격조)는 1400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했다. 힘겹게 만난 불상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는 사이 등으로 흘러내린 땀이 서늘하게 식었다.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으로도 불린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현재 보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도산 불상은 신라 불상 중에서 단석산 마애불상군을 제외하면 조성 규모가 가장 크고 신라 불상의 고유한 특징과 함께 중국 북제-수대(北齊-隋代)의 다양한 불상 양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불상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西岳)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선도산의 성스러운 어머니)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서악리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처럼 조성되어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이로써 기자가 당시 받았던 느낌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과장된 감정이 아니란 게 증명됐다.신라 불상 중 조성 규모가 두 번째로 크고, 서라벌 사람들이 숭배하던 여신(女神)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야기되며,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이름 높은 무열왕의 유택(幽宅)을 내려다보는 곳에 만들어졌으니. ◆중국 화산(華山)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앞서 ‘튀르키예의 명산’으로 불리는 아라라트산을 살펴봤으니, 가까운 나라 중국이 내세워 자랑하는 산 가운데 하나도 잠시 돌아보자. 화산(華山)은 ‘중국의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선도산이 신라의 서악이라면, 화산은 거대 대륙 중국의 서악인 것.중고교 시절 무협소설을 읽으며 지냈던 지금의 중년이라면 화산을 어떤 방식으로건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래 상상출판에서 펴낸 ‘중국 시안 여행’ 중 이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한다.“중국 무협에 관심 있다면 화산은 가장 궁금한 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김용의 ‘소오강호’에서 영호충이 화산 검종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장면, ‘신조협려’에서 북개 홍칠공과 서독 구양봉이 서로 내공을 겨루는 장면이 묘사되는 곳은 바로 화산과 화산 일대. 화산은 친링(秦嶺)산맥 동단에 최고 2437m까지 솟아 있고, 옆으로는 위수(渭水)가 흘러 웅장하게 느껴진다. 화산은 중국 도교의 성지이자, 무협의 근본이기도 한 오악(五岳) 가운데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오악 중 가장 높고, 전체가 바위산의 분위기라 험준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화산의 등산로는 외줄기로 등산객들 사이에서 난코스로 유명하다.”사실 무협소설은 과장된 상상력과 허풍을 재료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재미가 있다.우리가 통상 ‘설화’ ‘전설’ ‘민담’이라 부르는 것들도 마찬가지. 거기선 현실에서의 존재 가능성과 실현 가능성이 거의 제로(0)에 가까운 인물과 사건이 나오고 전개된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게 아닐까? 인간에게서 상상력을 거세한다면 삶이 얼마나 무료해질 것인가를 생각해보자.그러니,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실재했다고 강변하는 종교인들과 축지법과 공중 부양이 무시로 등장하는 중국 무협소설을 마냥 “비현실적이라 한심하다”고 힐난하는 건 합리를 가장한 독선일 수도 있다. 어쨌건. ◆마애여래삼존불의 불사(佛事)는 누가 주도했을까?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어인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로 돌아가자.고대 신라인들이 부처가 다스리는 이상향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 그 공간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굽어보던 마애여래삼존불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들었을까?아주 기초적인 의문이다. 이 질문에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가 친절하게 답해준다.“조성시기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7세기 중엽으로 막연히 인식했으나 양식적 특징을 살펴본 결과 650~67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하여 조성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죽은 사람 넋의 괴로움을 덜고 명복을 축원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선한 행위로 쌓은 덕)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 하겠다.”여기까지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이러한 대규모의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이로써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조성 불사’ 주도자는 둘로 좁혀졌다. 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 서라벌 역사의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06

산자락 마다 왕릉·유택, 신라인들에게 ‘서방정토’로 불려

개개의 가문도 수백 년을 이어왔다면 크건 작건 갖가지 설화와 이야깃거리가 그 안에서 생겨난다. 고래로부터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옮기기 좋아하는 동물이었다. 누가 있어 그걸 부정할 수 있을까.신라는 1000년에서 8년 빠지는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조다. 중간중간 부침(浮沈)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지구 위 어디에도 이처럼 장구한 세월을 이어간 제국은 드물다. 이는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그러니, ‘천년 왕국 신라’에 설화와 오랜 시간 인구에 회자될 이야기의 소재가 없을 까닭이 없다.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 가능한 일이다.본지는 2024년 하반기 주요 기획연재 중 하나로 까마득한 옛날 신라 사람들 사이에서 신성시된 것은 물론, 현대에 이른 오늘까지 그 지역이 가진 사적(史的) 중요성에 많은 역사가들이 주목하는 선도산(仙桃山)을 취재·탐구할 계획을 세웠다. ‘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이란 타이틀 아래에서다. ◆2024년 현실에서의 선도산은 어떤 모습일까6월과 7월 두 차례 걸쳐 선도산 일대를 사진기자와 동행해 돌아봤다. 적지 않은 수의 왕릉과 경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인 울울창창한 소나무숲, 거기에 신령함이 깃들었다고 믿어온 거대한 석불(石佛)까지.답사 후 처음 든 느낌은 ‘과연 수십, 수백 가지의 전설과 민담, 수수께끼가 숨어있을 만한 비밀스럽고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신라 역사의 보물창고(寶庫)”라 칭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신라 사람들이 비밀스럽고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한 선도산과 그 일대를 오늘날 여행자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두산백과’가 이 의문에 담백하고 모던하게 답해준다.“선도산의 높이는 390m다. 경주시 형산강 서쪽 효현동에 위치하며 신라시대부터 지목도가 높았던 산이다. 신라 사람들은 이곳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경주의 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서악’이라고도 불렀다. 그 때문에 선도산 주변엔 유적지가 많다. 경주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과 태종무열왕릉, 법흥왕릉, 서악리 고분군 등이 선도산 자락에 있다. 정상 가까이에는 서악동 마애여래삼존불상(보물 제62호)이 서있다. 그 외에도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구멍 유적이 있다. 북쪽 자락에는 서라벌대학교, 신라고등학교, 경주정보고등학교, 월성중학교가 있고, 등산로도 잘 정비돼 있다.”실제로 그랬다. 선도산 초입에 자리한 태종무열왕릉 뒤편으론 진흥왕과 진지왕의 유택(幽宅)이 자리해 있었다.지금과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근대까지도 권력자들은 세칭 ‘명당(明堂)’에 터를 잡고 거기에 묻히기를 원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묫자리가 후손들의 발복(發福)과도 연관된다는 믿음 때문. 그게 비과학적이라 할지라도.앞서 말했듯 신라는 이미 1000년 전에 존재했던 왕국. 과학과 합리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지식의 상향평균화가 이뤄지기 훨씬 이전 시대였던 것이다.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제하고 관할하는 신령한 존재를 믿는 이들이 많았고, 무덤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행이 갈린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신라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고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다.이런 상황이었으니 왕이, 그것도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되는 태종무열왕이 묻힌 곳이니 선도산이 당대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이 어느 정도였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 ◆왕들이 잠든 공간인 동시에 ‘성스러운 어머니’ 설화까지고대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선도산은 오랜 기간 주요한 탐구 대상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학계의 논문을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에 ‘선도산’이란 키워드를 넣어보면 적지 않은 자료가 검색된다.한국사상사를 연구해온 동국대학교 사학과 최연식 교수의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은 선도산이 왕릉이 집중된 공간만이 아닌 신라 역사의 여러 비밀을 함께 간직한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경주 서쪽의 선도산은 경주평야 입구의 중요한 지역으로 신라시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경주의 서악(西岳)으로 크게 중시되었다. 이곳에는 법흥왕과 진흥왕, 진지왕, 무열왕(태종무열왕)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왕릉들을 비롯해 다수의 상층 귀족들의 고분이 만들어졌고, 산 정상 근처에는 대형 아미타 삼존불상이 왕릉을 바라보고 서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시조를 낳은 존재이자 유력한 산신이라고 하는 선도산 성모에 관한 전승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 전승 등은 선도산이 신라시대 이래 경주의 주요한 신앙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동쪽 입구의 토함산과 함께 경주를 수호하는 양대 신성(神聖·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으로 중요하게 제사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후략)”최 교수의 지적처럼 여러 기의 왕릉과 더불어 선도산에서 주목해야 할 건 ‘신라의 시조를 낳은 존재이자 유력한 산신이라고 하는 선도산 성모’와 ‘아미타 삼존불상’이다.성모(聖母)가 뭔가? 속세의 것이 아닌 성스러움을 지녔기에 숭앙받은 존재를 말하는 것일 터. 그것도 1000년 역사의 왕국 첫 지도자를 낳았다면 ‘선도산 성모’의 위상 역시 드높았을 수밖에 없다.한국이 포함된 동양(아시아)만이 아니다. 미국처럼 역사가 일천한 국가는 아니겠지만, 수천 년 세월을 사람들이 살아온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현명한 통치자를 낳은 신성한 어머니의 설화’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그렇다면 신라의 시조로 알려진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숭배 받아온 ‘선도산 성모’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한국민속문학사전’은 비밀의 베일에 싸인 선도산 성모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선도산 성모는 신라의 시조모(母)로 알려졌으므로 신라 건국 시기에 출현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접한 성모 숭봉(崇奉)의 일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한 것이 최초의 자료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녀는 선도산의 여산신(女山神)으로 신라 삼사(三祀·3가지 중요한 제사)의 대상이었으며 신사(神祠·신령을 모신 사당)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사람들이 성모의 일을 익히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제왕운기(帝王韻紀)’ 기록도 있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도 서라벌이 만들어낸 보물보편적 신라인 대부분이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던 선도산 성모는 국가가 올리는 큰 제사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고, 사당을 세워 장수와 행복을 빌며 영험을 얻고자 했던 숭배의 주체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아래 인용하는 건 이와 관련된 ‘한국민속문학사전’의 부연이다.“선도산 성모는 여산신이자 시조모라는 특징을 지닌 점에서 가야산 정견모주, 지리산 성모와 유사하다. 동신성모 유화는 시조모이지만 산신으로 좌정하지 않은 차이가 있다. 여산신 신앙이 국조신화와 연계되는 것은 대체로 남방계 신화의 특징이다. ‘부계(父系)’의 탐색과 계승을 강조하는 다른 국조신화들과도 대조적이다.”흥미로운 설명이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선도산 성모가 알을 낳았다는 것인지? 그리고, 부계신화가 아닌 모계신화가 돌출한 건 신라가 모계중심 사회였다는 것인지? 강고한 유교적 가르침이 통치철학으로 작동했던 조선시대엔 ‘선도산 성모’가 어떻게 평가됐는지?의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를 차근차근 짚어가며 관련 학설과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는 과정이 있어야 할 듯하다. 이는 ‘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 연재를 이어가며 해결하고자 한다.다수의 왕릉, 선도산 성모 설화와 함께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바로 그것.선도산 성모처럼 실체는 없고 떠도는 전설과 이야기만 남은 게 아닌, 눈앞에서 존재하는 실물이기에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진 지위는 날것인양 싱싱하다.튀르키예 사람들이 성산(聖山)이라 부르는 아라라트산, “백만 가지 설화를 간직했다”고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화산에 필적하는 신비한 이야기를 담은 선도산의 역사 유적 ‘마애여래삼존불’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이어가고자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7-30

‘삼한일통’ 최선두서 이끈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서기 676년.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한 후, ‘7세기 아시아 초강대국’으로 불렸던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정치와 군사적인 면, 종교·문화적인 측면 등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묶어 통일왕국을 만들어간 과정은 드라마틱하면서 지난했다.탁월한 외교협상력을 발휘했던 무열왕 김춘추,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의 면모를 두루 갖춘 김유신,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과 당나라 격퇴의 선두에 섰던 문무왕 김법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라를 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한 젊은 화랑들…. 이들 모두는 삼한일통의 주역이었다. ◆신라, 백제·고구려·당나라를 차례대로 무릎 꿇리다660년. 의자왕이 가장 신뢰했던 백제의 명장 계백이 5천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 일대)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백제의 붕괴가 현실로 닥친 것이다.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명분과 함께 신라 무열왕에겐 사적인 원한도 있었다.‘황산벌전투’를 ‘딸과 사위를 죽인 의자왕을 향한 무열왕 김춘추의 복수극’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건 아래와 같은 이유다.전북대학교 박노석 교수의 논문 ‘백제 황산벌전투와 멸망 과정의 재조명’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삼국사기-신라본기’ 등의 기록을 검토해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영특한 군주였다. 재위 2년(642년)에는 직접 신라를 공격해 미후(737C7334) 등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品釋·아내는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이었는데, 윤충은 품석 부부가 항복을 하자 이들을 죽여 머리를 도성으로 보냈다. 이때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고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1년 후 세상을 뜨자, 연이어 고구려 병합의 길에 나선 건 아들 문무왕 김법민이었다.고구려는 멸망 2년 전인 666년부터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다. 카리스마 넘쳤던 ‘탁월한 고구려의 전략가’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과 세 아들 사이에서 정권을 제 앞으로 가져다놓기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졌다.서울교육대학교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은 고구려 붕괴의 전조(前兆)와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 상황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666년 6월 남생(연개소문의 아들 중 한 명)이 당으로 투항하면서 시작된 고구려에 대한 당(唐)의 공세는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2년 여에 걸쳐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667년부터 당군은 신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고, 신라가 고구려 남부 전선을 압박하면서 결국 668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신라는 당과 함께 승전국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 멸망 후 당은 신라의 공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백제 멸망 이후 당과 신라 사이에 내재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 공격을 목표로 연합군을 구성했던 당과 신라는 백제 멸망 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냈고, 고구려에 대한 공세 과정에서도 이러한 양국의 입장은 잠재되어 있었다.”평양성전투에서 거칠기로 이름 높은 고구려 군대는 굴복시켰으나,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또 하나 신라의 적’ 당나라의 야심은 깊고도 은밀했으며 동시에 컸다.통일된 삼한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시시때때로 드러낸 당나라. 신라에겐 백제와 고구려보다 더 강하고 위험한 적을 몰아내야 할 숙제가 남았다.백제·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일등공신으로 역할 했던 김유신은 당시 일흔을 넘긴 노장(老將)이었음에도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조카인 문무왕 김법민을 조력하며 당나라 축출에 앞장선다.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길고 길었던 싸움 끝에 676년 당나라 군대가 신라 땅에서 철수한다.‘나무위키’는 ‘나당 전쟁(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의 시각과 끝을 아래처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서기 670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연합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7년간 진행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 여기서 신라가 승리해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확보했던 옛 백제, 고구려 영토를 잃어버리고 신라가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 ‘삼한일통’의 두 주역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모두 20회로 연재된 2023년 연중기획의 타이틀은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다. 이는 ‘삼국통일’과 두 인물이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일 터. 실제로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한일통을 최선두에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김유신의 경우 보통의 사람들은 빼어난 군사적 역량을 가진 장수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군사전략에만 밝은 무장(武將)이 아니었다. 충남대학교 김수태 교수의 논문 ‘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 한 대목을 읽어보자.“7세기 후반 백제의 멸망 이후 전개된 신라-당나라 관계에서 김유신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문무왕이 고구려의 멸망 직후 신하들에게 김유신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돼 그 공적이 많았다’고 언급했듯이 그가 재상으로서나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잘 수행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 모두를 서로 연결시키면서 활동한 인물이었던 것이다.”이처럼 문무(文武)가 동시에 밝았던 김유신을 손위 처남으로 둔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는 물론, 백제·고구려·당나라를 통틀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협상력과 외교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둘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로 역할하며 삼국통일을 견인해낸다. 이는 이후 왕조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벤치마킹(Bench-marking)된다.이와 관련해 명지대학교 남재철 교수의 논문 ‘한문학을 통해 되돌아보는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역사2’를 인용한다.“조선조 지식인들은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이 김유신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군신 간에 화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한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보았다.”◆ 화려한 불교예술 꽃 피운 문화왕국 통일신라7세기 말에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는 ‘빛나는 불교예술 왕국’으로 성장한다. 전쟁과 전투에 사용됐던 국력을 문화·예술에 투자함으로써 동서양 어떤 고대 국가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왕국’을 만들어갔던 것.그 생생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동궁과 월지’, 그리고 ‘감은사’다. 현대에 들어서며 그곳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불리게 했고, ‘불교예술의 절정 속에 서있던 왕조’로 인식되게 했다. 다음은 ‘위키백과’의 설명이다.“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에 조성됐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다.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다. 5년 후인 679년에는 별궁인 동궁을 건축한다.”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짓기 시작해 그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이 즉위 직후에 완공한 사찰이다. ‘쌍둥이 석탑’으로 유명한 이곳에서도 여러 점의 진귀하고 화려한 신라 불교예술품이 발견돼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했다.지금으로부터 1천347년 전 이뤄진 삼국통일. 그 과정과 통일 이후 신라의 변화·발전 과정을 공부해보는 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21세기 경주를 보다 밀도 높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31

나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쟁에 뛰어든 젊은이들

화랑(花郞).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꽃 같은 사내’라는 뜻이다. 신라는 전략적으로 외모와 품성 모두가 빼어난 소년(청년)을 뽑아 나라의 지도자로 키웠다.삼한일통(삼국통일)에 이르기 위한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쟁과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던 7세기. 신라 화랑들은 그 명칭처럼 ‘꽃’이 아닌 매서운 ‘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두 사람, 즉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역시 젊은 시절엔 주목받는 화랑의 우두머리였다.660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제와 맞붙었던 ‘황산벌전투’에서 1천4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인상적인 일화를 남긴 신라 청년 반굴과 관창 또한 화랑.그렇다면 화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이었을까? ‘나무위키’는 “고대 신라에 있었던 소년들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단체다. 주된 목적이 심신 수련이지만 사실 창설 초기부터 관리와 군인 양성의 제도로 역할했다. 소년뿐 아니라 젊은 청년들도 많았다. 실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으므로, 사실상 국가가 운영하며 주도한 소년병 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화랑들끼리 주도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위키백과’는 화랑의 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민간 청소년단체로서의 화랑도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576년 이후 신라의 국방 정책과 관련해 이를 신라의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조직이 체계화됐으며, 이들 화랑의 총지도자인 국선(國仙)을 두고 화랑의 예하도 수개 문호(門戶)로 구성하게 했다. 화랑의 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화랑 낭도는 수백에서 수천 명을 헤아렸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춘추와 김유신은 ‘국선’ 출신이다. 김유신이 이끌던 화랑의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는데, 리더인 김유신은 물론 따르는 낭도들까지 용맹과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군사정권은 ‘화랑정신’ 교묘하게 이용하기도…10대와 20대 초반 청년들은 피가 뜨겁다.‘나라를 위해 내 한 목숨 바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만 있다면 싸움에 나서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당연지사 당나라,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화랑들 중에는 요절(夭折)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10대 소년 화랑 관창이 대표적이다.신라의 통치자 입장에서는 거룩한 순국(殉國)이었다.이런 화랑의 전통은 현대로 들어서면서 군사독재정권 시절엔 교묘하게 악용(?)되기도 했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최광식의 논문 ‘新羅의 花郞徒와 風流道(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의 관련 대목을 아래 인용한다.“화랑도는 군사단, 가무집단, 종교 제사집단, 인재 양성과 선발을 위한 수련집단의 성격 등 여러 가지 복합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戰士團(전사단)과 군사적 집회의 성격이 강조돼 왔는데, 이는 일제 시기 식민사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답습한데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군사정권 시기에 군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조국 통일의 역군으로서 신라 화랑도의 후예임을 강조해 통일의 역군으로 삼고자한 데도 그 요인이 있다고 하겠다.”이처럼 일부분에 있어선 비판적 태도를 취했지만 최광식 명예교수 역시 “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던 풍류도(風流道)는 신라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로 화랑과 그들이 품었던 지향을 높이 평가한다. ◆화랑 김유신은 무(武)로, 화랑 김춘추는 문(文)으로 이름 떨쳐화랑도를 포함한 세상 어떤 ‘조직’도 다를 바 없다. 조직을 기반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직의 규율과 강제 속에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들도 많다.‘화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최고의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고, 1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이름을 경향각처에 화인(火印)처럼 새긴 대표적 인물이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다.한 사람은 신라의 지존(至尊)인 왕(무열왕 김춘추)이 됐고, 나머지 한 사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정무수석(태대각간 김유신)이 됐다. 그중 김유신은 화랑 역사에 대표적 무인(武人)으로 길이 남았다. 영남대학교 객원교수 이영찬의 논문 ‘김유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연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김유신(595∼673)은 신라의 무신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세가 되던 해 화랑으로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다가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최초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이후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우는 등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그는 군사를 지휘하며 지도자적 임무를 수행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를 물리쳐 명실상부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했다.”긴 부연이 필요 없다. 학자가 한 사람을 향해 이같은 최상급의 칭찬을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실상 김유신은 샤머니즘 차원에선 중국 초나라의 항우(項羽·기원전 232~202)처럼 무신(武臣·무관인 신하)이 아닌, 무신(武神·신의 반열에 오른 무관)으로까지 추앙받기도 한다.그렇다면, 신라 화랑 중 ‘문(文)’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이는 누굴까? 맞다. 모두가 예상했듯 후에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다. 빼어난 문장에 더해 김춘추는 해사한 외모로도 주목받았다.21세기 한국의 몇몇 영화배우와 보이 밴드 멤버는 이웃나라에서까지 인기를 누린다. 잘생긴 얼굴로. 1천400여 년 전 김춘추도 그랬다. 현재의 중국을 통치했던 당나라의 고위 관료와 귀족 부인들은 멀리 신라에서 온 김춘추가 지닌 헌헌장부(軒軒丈夫)의 풍모에 매료당했다.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청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누린 인기가 어떠했는지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김춘추가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 당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게 해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김춘추는 이를 사양하고 신라로 돌아왔다.”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당시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일본에서조차 ‘꽃 같은 사내’ 화랑 김춘추의 매력을 “신라가 상신 대아찬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내왔다.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고 쓴다. 647년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반굴과 관창같이 안타깝게 허리가 꺾인 화랑도 적지 않아김춘추와 김유신처럼 젊은 시절엔 화랑의 리더로 주목받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권좌에 앉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10대 혹은, 20대 어린 나이에 전장(戰場)에서 숨진 화랑도 적지 않다.역사학자들은 신라시대 전체를 통틀어 화랑의 숫자를 200~300명으로 추정한다. 그중 절반 이상이 하늘이 내린 자신의 명(命)대로 살지 못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반굴과 관창도 그들 중 하나다.‘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희생된 둘 중 관창은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16세. 요즘의 중학교 3학년 또래 소년이었다.반굴 또한 갓 아들을 낳은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김유신의 조카이기도 했던 반굴을 향해 그의 아버지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은 “오늘 나라를 위해 죽어, 영원토록 이름을 남기라”고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다.황산벌전투를 소재로 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선 이 모습이 희화화 돼 그려진다.기자는 이 장면이 너무나 슬펐다.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와 명분 앞이라도 ‘인간’ 반굴과 관창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겠는가? 그들이 화랑이 아닌 화랑의 할아버지였더라도.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24

사후 162년 흐른 뒤 ‘흥무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7세기 신라엔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끈 스타급 인물’이 여러 명 출현한다. 백제를 멸망시켜 딸 고타소(古陁炤)과 사위 김품석의 원수를 갚은 동시에 통일의 초석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 강력한 군사대국 고구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던 당나라를 나라 바깥으로 내쫓은 문무왕 김법민, 통일왕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뤄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신문왕 김정명 등.3명의 왕 모두가 삼국통일의 험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한일통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면 아마도 대다수가 “김유신”이라 답할 게 분명하다.김유신은 673년 여름에 죽는다. 당시 그의 나이 79세. 외과 수술과 항암 치료제가 없던 시절. 남성의 평균수명이 마흔 살이 되지 않던 고대였음을 감안하면 150세쯤 산 것과 다름없다.김유신의 장례식은 성대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조카이기도 한 문무왕은 ‘김유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냈다. 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의 명령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守墓人)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사후(死後) 1천350년째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라의 ‘영웅 전설’김유신이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은 사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망한 지 162년의 시간이 흐른 835년. 김유신은 마침내 그 지위가 왕으로 격상된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김유신은 835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된다.”비단 통일신라 시대만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이후 또 다른 왕조인 고려와 조선에까지 문헌과 구전(口傳)을 통해 전해졌다.까마득한 옛날인 1천35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신라인의 이야기가 ‘영웅 전설’처럼 21세기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국회도서관 자료조사관인 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은 신라에선 김유신이 거의 ‘신격화’ 됐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김춘추)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됐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우주의 중심)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됐다.” ◆고려는 ‘신령스런 장수’로, 조선은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한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 이전 왕국의 영웅은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김유신에 관한 평가는 고려와 조선에서도 결코 낮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심지어 고려는 김유신을 신(神)의 자리에까지 가져다 놓는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역시 김유신을 지목해 만고충신(萬古忠臣)이라 추켜세웠다.앞서 언급한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고려 때 김유신은 신라에 이어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무열왕·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 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이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보았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됐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고려와 조선왕조의 평가만이 아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김유신의 청소년 시절 일화를 읽어보면, ‘이건 일반 인간에 대한 기록이 아닌 영웅 탄생 설화에 가깝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성대학교 한국고대사연구소 학술연구원 박승범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그 가계(家系)와 활동을 중심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서술된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김유신이 태어난 이후 청년기까지의 활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서는 15세에 화랑이 돼 그를 따르는 이른바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렸다는 것과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 등 외적을 평정해 삼국을 아우를 뜻을 품고 수도하다가 신선으로 여겨지는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비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듬해인 612년 거듭된 적의 침입에 웅대한 뜻을 갖고 있던 중 보검이 영험을 얻었다는 것 등의 일을 전하고 있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18세가 되던 해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정벌할 뜻을 갖고 있던 중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위기에 처했으나 신라 국가제사 중 대사에 해당되는 제장인 삼산(三山)의 신령들이 도움을 주어 위기를 벗어났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비판하는 역사학자도 있으나, 빼어나고 돌올한 인물인 것은 분명해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위업을 이룬 ‘신화적 존재’로 부각돼온 김유신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우호적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사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한국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이자 거두라 할 수 있는 인물. 단재와 그의 견해를 따르는 역사학자들은 김유신을 매섭게 질타한다. 단재의 저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김유신을 지목해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한다. 이에 수긍하는 후학들도 적지 않다.김유신에 관한 비판적 견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가 갸우뚱한다. 앞서 인용한 박승범의 논문은 기자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김유신 가문은 금관가야 왕족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될 영화를 잃어버리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신라 사회에 편입되었다…(중략) 김유신 가문은 왕족으로서 누려야만 했던 지위와 영화를 신라의 유력한 가문이 되면서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유신 가문은 정당한 전략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열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김유신의 모습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평생의 공적을 전장에서 세운 사람이 아니라,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큼 부정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김유신과 그 가문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었다.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 정복당한 다른 고대국가들은 최상의 경우 그 국명만 남겼을 뿐 구성원들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김유신이 보여준 생존전략을 단순히 협잡, 또는 음험함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길고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 주말. 경주시 충효동을 찾았다. 봄에 이어 김유신의 묘를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였다.기나긴 세월 동안 숭배와 비난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있지만, 걸출하고 돌올한 신라의 명장(名將)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유신.화려하게 조성된 ‘삼국통일 주역’의 봉분은 높고 거대했고,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왕릉(開國公 純忠壯烈 興武王陵)이라 적힌 비석은 후손들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궁금하다. 김유신은 자신의 이름이 1천3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것을 스스로도 예견했을지.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17

고대 근친혼은 性적인 문제 아닌 권력 독점과 유지 수단

신라는 국가를 향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회였다. 신하가 왕에게 지켜야 할 신의(信義)도 화랑을 포함한 신라 귀족청년들이 교육받은 주요 덕목이다. 그건 통일 이전과 이후가 동일했다.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性)문화는 매우 자유로웠다고 추정된다. 오히려 1천여 년 전 신라 사람들이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성적 자유를 누렸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결론 부분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신라시대는 모든 면에서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단계였다. 남녀의 애정 윤리와 성 풍속도 남녀 동등하게 자유와 개방 정신 그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처용가(處容歌)’였다. 성적 욕구의 표현과 행위는 남녀가 서로 존중하는 풍조였다.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세종전군, 사촌 오빠 사다함,진홍왕,진흥왕의 아들 동륜과 금륜,설원랑,자기 동생 미생 등과 혼인 및 사통하며 난음 행각을 펼치지만 그것이 윤리·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죄악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신라 성 풍속 해석하면 곤란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토대를 거의 완성한 7세기 중반 이후에도 위와 같은 성 풍속은 이어졌다.‘삼한일통의 양대 거두(巨頭)’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김춘추는 친자매 둘 모두를 아내로 삼았고, 김유신은 여동생의 딸, 즉 조카를 두 번째 아내로 맞는다. 그것도 회갑을 넘긴 나이에.앞서 언급된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에서도 이를 아래처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김유신의 동생인) 문희는 언니 보희로부터 상서로운 꿈을 사고 김춘추와 혼인해 딸 지소를 얻게 되고, 지소는 당시 외삼촌인 김유신과 혼인했다. 또한, 언니인 보희도 뒤에 김춘추의 후궁이 된다. 자매가 한 남자의 부인이 된 것이다. 삼촌과 조카딸, 고모와 친정 조카,외삼촌과 생질녀 등 친족관계 속에 중복된 혼인 관계로 짜여진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그럴 사람이야 없겠지만, 1천 년 전 이런 풍속만을 보고 “신라는 성적으로 몹시 문란한 나라”였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 단순한 해석이다.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 사회의 근친혼은 성적인 문제가 아닌 ‘권력의 독점과 지속적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역할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그러니, 삼국통일이라는 당대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의 희생과 피땀을 ‘성적인 문제’ 하나만으로 폄하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그래서였을 것이다.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또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신라의 남녀는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강제적인 성폭력이나 강간 등의 성범죄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왕실이나 상류사회에서는 권력과 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인 혼인의 형태였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의 결혼제도나 가족의 형태, 성 풍속이 도덕적이냐 또는 야만적이냐, 문명적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되는 가운데 각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적 에너지가 발산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의 기계적이고, 상업적이고, 신경쇠약적인 병든 성 문화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건전하고 건강한 성 문화의 형성은 현대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크나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뜻을 받드는데 최선을 다한 신라의 통치자들대부분의 고대 역사는 통치자와 세칭 ‘영웅’ 중심으로 기술된다. 그러니, 신라의 보통 사람들이 효(孝)에 관해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다만, 구전되는 설화나 전설을 들어보면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들 역시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사람을 칭송했다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왕들은 대부분이 효자였다. 결국은 왕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자식이니까 효를 인간 행위의 근본이라 믿었던 것이다. ‘논어’ 학이편(學而篇)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부재(父在)에 관기지(觀其志)하고, 부몰(父沒)에 관기행(觀其行)하라. 삼년(三年)을 무개어부지도(無改於不之道)라야 가위효의(可謂孝矣)니라.이를 현대식으로 풀어 쓰면 대략 이런 뜻이 될 터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그의 뜻을 따르고, 돌아가신 후에는 그의 행적을 살펴라. 그런 행위가 최소 3년은 지속돼야 그게 효의 시작이다.’이젠 앞서 이야기한 신라의 자유로운 성문화와는 다른 이야기다. 통일신라의 기틀이 닦이던 7세기 중후반 나라를 다스렸던 신라 왕들은 선왕(先王)인 아버지에게 효를 다했다.문무왕 김법민은 딸과 사위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으면서도 삼한일통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받들어 고구려 병합과 당나라 축출이라는 삼국통일의 마지막 숙제를 해결했다.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은 “사후(死後)에도 용이 돼 일본 해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문무왕을 바다에 장사 지냈다.또한, 조부 무열왕과 부친 문무왕이 이뤄놓은 삼국통일의 기반 위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것도 신문왕이다.이 같은 문무왕과 신문왕의 행위를 ‘관기지(觀其志)와 관기행(觀其行)’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떤 걸 그리 칭할 수 있을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통일신라 시기 2-불교문화’엔 핏줄로 이어진 바로 이 3명의 왕, 무열왕·문무왕·신문왕의 주요 행적이 짤막하게 요약돼 있다. 아래 그대로 옮긴다.“대왕암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에 있는데,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물리쳐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리고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었으므로, 아들인 신문왕이 재위 2년(682년)에 사원을 완성해 감은사라 했다. 문무왕은 평소에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해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바로 대왕암이었다. 감은사 금당 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데, 실제 발굴조사에서 그 흔적을 발견했다.” ◆조부와 부친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신문왕이지만...신라는 물론,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를 통틀어도 빼어나고 돌올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평가받는 게 신문왕의 할아버지(무열왕)와 아버지(문무왕)다. 그런 이유에선지 학계에서도 신문왕에 대한 평가는 조부와 부친에 비해 인색하다. 하지만, 통일신라 초기 신문왕이 진행했던 굵직굵직한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권력의 중앙 집중을 위한 노력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 분명 아니었다.고대사 연구자 김용만의 ‘인물한국사’는 신문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681년 7월 1일 삼국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됐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그 시대 신문왕이 맡아야 했던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고문헌에 의하면 그는 삼국통일 직후 통치 기반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도 과감하게 회수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왕이 가져야 할 권위를 강화하고, 행정구역도 정비했다고 한다.이 정도면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3대를 지목해 “잘난 할아버지에 더 잘난 아버지, 그리고 만만찮은 손자”라고 표현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2023-10-03

한국문화 속 조명되는 김유신의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

무능한 조선의 왕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1545~1598).오늘날로 말하자면 해군 작전사령관격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활약하며 보여준 이순신의 지략과 기개는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23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그리고, ‘장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또 한 인물이 있다. 이순신보다 1천 년쯤 앞 시대를 살다간 김유신(595~673)이다. 이 두 ‘장군’은 한국에서라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이름을 알고, 대략의 업적을 이해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시간을 뛰어넘은 ‘빅 스타들’이다.김유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노력으로 인격과 품성을 만들어간 것인지는 대구한의대 천인석 교수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사상’의 서두에 잘 설명돼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김유신의 탄생은 가야 왕족 출신 진골 귀족과 신라 왕족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출생설화부터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그는 어려서부터 지식과 교양을 갖춘 부모로부터 훌륭한 교육 기회가 주어졌고, 성장하면서 문자 교육을 비롯한 경전 교육,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학술과 무예를 배웠다. 15세에 화랑이 되고, 18세에 국선(國仙·화랑들의 우두머리)이 돼 당대 최고의 화랑으로 교육받았다. 그의 가계에서 전수된 충효의 윤리와 합리적 사고, 화랑으로서 ‘세속오계’로 표현되는 신념, 그리고 가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양과 노력, 왕도정치의 지향이 그의 사상 형성의 기본이 됐다.”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로서의 김유신인간의 내부엔 선과 악,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이 공존한다. 누구라도 그렇다. 이 명제에선 김유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고문헌에선 ‘충성스럽고 용맹한 신하이자 빼어난 장수’로 김유신을 표현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분명 존재한다.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근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단재 신채호(1880~1936)는 김유신을 지목해 “민족의 배신자”로 냉혹하게 평가 절하했다.이와 관련된 논문을 읽어보자. 대구가톨릭대 임선애의 ‘한국문화와 김유신의 재현양상’ 중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역사학자 신채호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고구려와 백제)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중략) 역사 기록물에 의하면 김유신은 영웅과 모략가라는 배치되는 단어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 연원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과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신채호의 저서)’의 주장이 대조를 이루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기록에서 보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후자의 주장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김유신에 대한 양극화 현상은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화 속에 조명되는 김유신의 재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후략)”위와 같은 역사학계의 평가만이 아니다. 김유신과 그 가족들의 ‘혼인 관계도’를 그려보면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가 불가능한 걸 넘어 외마디 비명이 나올 정도다.잘 알려져 있듯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김춘추(무열왕)와 결혼해 후에 왕비(문명왕후)가 된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또 다른 여동생 보희도 무열왕의 아내였다고 한다.고대 제국의 왕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건 특별히 손가락질 받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같은 친자매를 동시에 데리고 산다는 건 유례가 드문 경우. 이 혼맥 형성의 배후엔 김유신의 권력욕이 있었다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김유신 장군이 여동생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여기서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김유신은 예순 살이 되던 해 두 번째 아내를 맞는다. 그런데 그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바로 자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의 딸이다. 회갑 노인이 어린 조카와 결혼한 것이다.‘삼국사기’ 등에 지소부인(智炤夫人)이라 기록된 이 여성은 평소 “외숙부”라 불렀던 사람의 아내로 살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기자의 후배 하나는 “사람 족보가 왜 그래요?”라며 정색했다.이는 1천~2천 년 전 신라였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근친간의 혼인은 그 사례가 김유신 가문만이 아닌 신라 왕족들 사이에서도 흔했다고 한다. 왜였을까?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위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읽힌다.“신라는 족내혼(族內婚·같은 씨족, 종족, 계급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혼인)을 철저히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치권력과 부귀영화를 자기 성씨(姓氏)로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였다. 한 번 왕이 되면 가능한 한 자기 집안 사람과 결혼하게 했다. 신라 초기에 박씨가 지배하는 동안 여덟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그 중 여섯 왕이 박씨 왕비를 맞이했으며,왕권이 석씨(昔氏)에게 돌아가자 석씨 또한 자기 씨족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4세기에 김씨가 왕위에 오른 후 초기에는 과거의 왕족이었던 박 씨나 석씨를 왕비로 맞기도 했으나 왕권이 강화될수록 김씨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왕족 김씨는 상류사회 계층을 형성해 김씨 사이에서 출생한 자손을 성골(聖骨·골품제도의 최상위 계급)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이 혈통 내에서 혼인을 하도록 권장했다. 신라의 혼인은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계외 모계,적서(嫡庶·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분명했지만, 여성의 지위나 인권은 남자와 거의 대등하지 않았다 한다.”◆자신의 아들을 처형하라고 문무왕에게 요구한 냉혹한 측면도2023년 현대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어려운 혼인을 진행시키고, 스스로도 행한 김유신에게선 덕장(德將)이나 지혜로운 관료의 모습이 아닌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확인된다.원술(元述)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20세기 한국의 일부 권력자들은 전쟁이 없는 시대임에도 자신의 돈과 힘으로 아들을 병역의무로부터 해방시켜주곤 했다.신라의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자 합동참모의장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했던 김유신은 이들과는 달랐다. 자식인 원술을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서 싸우게 했다.거기까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성)라고 볼 수 있다. 비판받을 일이 전혀 아니다. 근현대 영국의 왕자들과 귀족청년들 또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에 앞장서기도 했으니까.헌데, 문제는 원술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서 돌아왔을 때 발생한다.김유신은 아들 원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랑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저버린 것이라 판단해서였다.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김유신은 자신의 조카이자 당시 신라의 통치자였던 문무왕에게 “못난 아들 원술이 왕과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목을 베어 죽임이 마땅하다”고 권유한다.대의명분(大義名分) 앞에서는 혈족과의 인연도 주저 없이 단숨에 끊어버리는 냉혈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하지만, 문무왕은 그럴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숙부. 그러니, 원술은 문무왕의 사촌인 것이다. 일부러 패한 것도 아니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안타깝게 진 장수를, 그것도 친척을 죽이는 건 왕으로서도 못할 짓이었기에.이 이야기는 서울예술대학 설립자 유치진(1905~1974)의 희곡 ‘원술랑’에 구체적으로 담겼다. ‘나무위키’는 관련 내용을 아래와 같이 부연하고 있다.“‘원술랑’ 2막의 내용은 신라군이 당나라군의 계책에 속아 궤멸 수준으로 참패한 뒤 원술이 아버지 김유신 앞에 나타났고, 김유신은 ‘전우들이 죽어가는데 어찌 비겁하게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며 꾸짖자 원술은 부끄러운 마음에 자결하려 하다가 사신이 ‘계급을 강등시켜 나라 밖으로 내쫓으라’는 왕의 명령서를 들고 오자 물러가는 것으로 끝난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26

삼한일통 이룬 신라 ‘문화와 예술의 부흥’을 이룩하다

전쟁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건 옛날과 지금이 다를 바 없다.신라는 백제와의 격전, 고구려와의 전투,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싸움을 오랜 시간 벌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7세기 중반과 후반 모두가 ‘전쟁의 시기’였다. 나라가 불길에 휩싸이는 경우가 흔했고, 많은 신라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긴 시간의 전쟁이 야기한 처참한 상황이 끝나고,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안정화의 길을 걷게 된 건 문무왕(김법민) 때에 와서다.아버지 무열왕(김춘추)과 외숙부인 태대각간 김유신의 조력을 등에 업은 김법민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스타 주군(主君)’이 돼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7세기 후반 일이다.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절이 도래한 신라가 문무왕의 주도 아래 계획한 차기 프로젝트는 뭐였을까? 즉답하자면 ‘문화와 예술의 부흥’이었다. ◆건축물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번성한 국가의 힘을 보여주다비단 신라만이 아니다. 전 세계 여러 고대·중세 왕조는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고, 강성한 국력을 내외에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경쟁적으로 만들었다.2023년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여행지 중 하나인 베트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베트남의 마지막 군주 국가 ‘응우옌(Nguyen)’은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을 모방한 화려한 궁전을 축조한다. 이른바 후에 왕궁(Hue Imperial Citadel)이다.베트남 중남부의 매력적인 여행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응우옌 왕조가 빛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는 후에 왕궁에 관한 ‘베트남 셀프 트래블’의 부연.“후에를 수도로 한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의 궁터로, 해자와 10km에 달하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시타델(Citadel·성채)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세계열강과의 전쟁을 거치며 많은 문화유산들이 소실됐으나, 종전 후 베트남 정부와 유네스코의 관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건물들이 복원되고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다.”베트남과 이웃한 캄보디아에도 과거 번성했던 크메르 왕조의 흔적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건축물이 존재한다. 앙코르 와트(Angkor Wat)다.한 해 수십 만 명의 한국인이 찾는 핵심 관광지이며,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스웨덴에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온 유럽인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완벽한 조형미의 사원.기자 역시 이곳을 4번 찾았고, 갈 때마다 이름난 이탈리아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 빼어난 미적 완성도에 감탄하곤 했다. ‘위키백과’는 앙코르 와트를 이렇게 설명한다.“캄보디아 시엠레아프 주의 앙코르에 위치한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크메르 제국의 사원으로서 창건됐다.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돼 있으며, 축조된 이래 크메르 제국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神)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고,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였다.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동궁과 월지, 통일 완성한 신라의 화려한 문화예술 부흥신라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와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에 한참 앞서 신성함이 담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냄으로써 통일을 이룬 나라의 무너질 수 없는 권위와 뻗어나가던 국가의 힘을 보여준다.예전에는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던 월지(月池) 일대에 신라의 탁월한 건축기술과 예술적 세련미가 담긴 다수의 건물들을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 그렇다. 바로 ‘동궁과 월지’다.동궁과 월지의 건설은 삼한일통을 이룬 문무왕의 ‘문화예술 프로젝트 제1호’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1978년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나라의 자랑 중 하나인 동궁과 월지를 지목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동궁과 월지는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해 있는 통일신라시대 궁원지로,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또한, 문무왕 19년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중수하고 동궁을 지었다’(重修宮闕 頗極壯麗… 創造東宮)고 쓰여 있다. 그리고,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월지 인근의 ‘임해전에서 연회를 개최하였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은 문헌 기록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연못과 건물지군, 그리고 ‘의봉4년(儀鳳四年)’ ‘조로2년(調露二年)’이라 새겨진 와전(기와와 벽돌)과 다수의 목간(木簡) 등으로 그 신빙성이 입증된 바 있다.”인공 호수를 파고, 왕자를 교육시킬 동궁을 짓고, 임해전 등의 미려한 건물을 만든 문무왕은 거기에 희귀한 꽃을 심고, 보기 드문 짐승들까지 풀어 신라 왕실의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어렵게 이룬 삼국통일이란 크나큰 성취를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살아가는 내내 아버지 무열왕과 외숙부 김유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 문무왕 김법민은 내심 “선친과 외삼촌은 전쟁에서의 용맹만을 보여줬지만, 나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각도 더불어 갖춘 성군(聖君)”이란 걸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는 기자의 추측일 뿐이지만.어쨌건 현대에 들어와 동궁과 월지에선 발굴과 복원이 지속됐고, 그건 21세기인 지금도 진행형이다.복원된 1천400여 년 전 신라의 문화 유적이 2023년 오늘 경주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와 함께 문화적 자긍심까지 선물하고 있으니, 문무왕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진 통치자였던 듯하다. ◆신문왕, 대를 이어 문화예술 ‘주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동궁과 월지는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했다. 그러니, 경주를 찾는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어렵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첨성대와 대릉원(大陵苑), 거기에 최근에 ‘경주의 핫 스폿’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황리단길이 모두 동궁과 월지 지척에 자리했다. 말 그대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청춘들의 즐거움이 어우러지는 공간인 셈.그 정도의 감각적 만족으로는 무언가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가용이나 택시, 혹은 버스를 타고 30분쯤을 달려 감은사(感恩寺)가 자리했던 터를 찾는다.동궁과 월지가 문무왕 김법민이 완성시킨 통일신라의 ‘랜드마크(Landmark)’라면 감은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김정명)이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통일신라 불교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사찰의 이름인 ‘감은(感恩)’은 말 그대로 ‘은혜를 고맙게 여기다’라는 뜻. 누가 누구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것일까? 일연의 ‘삼국유사’에 이에 대한 해답이 담겼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년)에 완공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巖)에 안장했으며, 신문왕이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감은사라 했다.”문무왕에게는 콤플렉스와 함께 큰 유산(遺産)을 물려준 두 사람이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열왕과 김유신이 바로 그들.신문왕 역시 누구도 쉽게 물려줄 수 없는 커다란 물질적·정신적 자산을 선사한 사람이 분명 있을 터. 그는 다름 아닌 아버지 김법민, 즉 문무왕이었다.통일된 국가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떠난 아버지 문무왕은 신문왕에게 ‘마음 속 스타’였을 터.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비극 위에서 만들어진 통일신라. 그 시작점인 7세기 후반. 세계 어느 나라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예술의 집적체(集積體)’ 감은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계속)/사진 이용선기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19

거대한 고목 같은 아버지를 뛰어 넘으려 했던 문무왕

현대와 고대가 크게 다를 바 없다. ‘외교’는 국가 발전을 추동한다.이웃한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어낼 건 얻어내고,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성을 줄이고, 경제 발전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건 7세기에도 중요한 일이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그래서다. 통치자에겐 ‘탁월한 외교 전략가’ 하나를 가지는 게 용맹한 장수 열을 가지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그런 차원에서 청년 시절의 김춘추(무열왕·603~661)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듬직한 신하였던 것.문무왕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가 왕이 되기 전 어떤 외교적 성과를 보였고, 당시 초강대국 당나라에서 어떤 활약을 했으며, 그를 응접한 당나라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삼국사기’에 잘 기록돼 있다. 아래 인용한다.“648년 12월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唐)에 입조하였고,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 태종의 호출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백제 침공을 위한 지원군을 요청해 허락받았다…(중략) 김춘추가 신라로 돌아갈 때 당 태종은 3품 이상의 관인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귀한 책과 글씨를 선물했으며, 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까지 나가 직접 전송했다.” ◆당나라 왕과 관료들 매료시킨 김춘추의 외교 전략위의 문장을 지금의 형식으로 풀어 쓰면 ‘마흔다섯 살 신라인 김춘추는 중국 당나라를 방문해 국립대학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와 학자들의 강의를 참관해 주목받았고,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 이와 더불어 백제를 공격할 병사들을 지원하겠다는 당나라 왕의 약속을 받아낸 후 성대한 환송연 끝에 귀한 선물을 잔뜩 가지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다’ 정도가 될 터.2023년 오늘날 이 정도의 외교 성과라면 차관은 장관으로, 장관은 총리로 승진했을 게 분명하다.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신(武臣)으로서 최고 능력을 발휘한 건 단연 김유신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빼어난 신라의 7세기 문신(文臣)은 누굴까? 답은 이미 나왔다. 김춘추다.김춘추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외모에 반한 당나라 귀족부인들이 추파를 던졌다는 야담(野談)까지 전한다. 그는 안팎이 모두 매력적인 사내였던 것이다.역사학자 박현숙 교수의 논문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 춘추공조의 내용 구성과 의미’에서도 김춘추라는 이름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박 교수는 그에 관한 학계의 엇갈리는 평가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천년의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들라고 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조명을 받아왔다…(중략) 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외교를 잘 구사해서 실리를 도모한 군주’라는 평가와 ‘외세 의존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음모가’라는 평가가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삼국통일에 있어서 김춘추의 정치·외교적 역량을 파악하고, 그를 매개로 당시의 대내외적인 상황을 복원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김법민의 강박 관념돌올하고도 빼어났다. 김춘추는 그런 인물이다. 지나치게 잘난 부친을 둔 아들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기 십상이다.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콤플렉스가 되기도 하다.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의 아들. 아버지가 잘 닦아놓은 고속도로 위를 달려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몰아냄으로써 삼한일통(삼국통일)의 구체적 그림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문무왕이다.하지만, 나무가 크면 그늘도 짙은 법. 문무왕은 평생 거대한 고목(古木)처럼 자신 앞에 버티고 선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을 듯하다.캐나다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52)는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 정치인이다.세계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가 모이는 G8 또는, G20 정상회담에서 그는 여타의 지도자들을 압도한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영화배우 같은 얼굴. 거기에 더해 탁월한 친화력과 외교적 수완까지. 그런 트뤼도 총리 역시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현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의 아버지는 피에르 트뤼도(1919~2000) 전 총리. 나무위키는 피에르 트뤼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캐나다 자유주의 진영의 신화와 같은 존재. 근현대 캐나다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사적 비중을 지닌 정치인이다. 오늘날 캐나다 국민들이 자부심으로 삼는 무상의료와 자유주의의 토대를 세웠다. 아들과 달리 보수진영에서도 호평 받는다. 현대 캐나다의 기조를 만든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이쯤 되면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트뤼도 총리가 가졌을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미루어 짐작된다. 잘해봐야 “아버지를 닮았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버지는 훌륭한데 아들은 왜 저따위야”라는 비난을 받을 게 뻔하니까.아마 1천400년 전 문무왕 김법민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 같다. 일생 부친 무열왕 김춘추와 비교되면서 살았을 터이니. ◆문무왕릉과 감은사를 돌아보고 쓴 졸시 한 편‘온전한 삼국통일을 이룬 영웅’이 아닌, 사는 내내 아버지와 외숙부 김유신을 뛰어넘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던 김법민의 감춰진 또 다른 모습이 분명 있을 것 같다.문무왕의 바다 위 유택(幽宅)과 용이 된 문무왕이 밤이면 찾아가 잠을 청했다는 감은사 터를 여러 차례 돌아봤다. 졸시 ‘문무왕의 잠’은 그때 기자의 머릿속을 떠돌던 복잡한 감정이 만들어준 것이다.신문왕이 울었다감은사 금당 아래를 들여다보며며칠째 아버지가 처소에 들지 않는다참꽃 매화 만개하고죽순도 무릎 높이로 자랐건만무엇이 하늘에 가닿지 못했나할아비 유택을 찾아 울어나 볼까아비는 문희 할미의 오줌에서 왔으니멀리 재 너머 바다는 푸르고쌍둥이 석탑 뒤로 해 떨어지는데잠을 잃은 용이 된 문무왕아들이 마련한 잠자리는 삼도천보다 멀고천자의 수중릉 희롱하는 흰 파도우울한 햇살 아래 일찍 온 제비 두 마리찬바람은 아직 그칠 기미가 없다.잘 알려져 있듯 문무왕의 유언은 “죽어서도 백성을 지키는 용이 될 것이니, 나를 산에 묻지 말고 일본 해적이 출몰하는 바다에 장사 지내라”는 것이었다.이는 끝끝내 아버지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했던 문무왕 김법민의 마지막 ‘콤플렉스 극복 시도’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12

김춘추는 김유신이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

출중한 능력에 빼어난 외모, 거기에 정치적 혜안까지 갖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말이 나왔으니 연이어 질문 하나 더.그렇게 잘난 아버지는 물론, 나라 전체의 군사통솔권을 쥐고 수백 명 고위관료 위에 우뚝 군림한 외숙부까지 가졌다면 어떨까? 이 또한 조카에게 행복의 조건으로만 작용할까?한적한 평일 오후. 푸른 파도 일렁이는 경주 봉길리 해변에서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다.661부터 681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문무왕 김법민. 그는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조카다.재론의 여지없이 좋은 ‘외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신라는 물론 660년 무너진 백제의 땅과 백성들까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선 외숙부의 조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이건 각종 서적과 여러 고문헌을 통해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그런데, 기자를 포한한 몇몇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궁금증을 가지기도 한다. ‘문무왕에게는 열등감이 촉발한 내적 콤플렉스와 갈등이 전혀 없었을까’ 하는 것.문무왕은 1천342년 전 사망했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 직접 물어볼 방법은 없으니, 그의 내면 풍경은 그저 주관적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비교적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도출해내기 위해 일단 시간을 되돌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연애를 시작했던 시절로 가보자. 아직 문무왕이 태어나 전이다. ◆김유신, 김춘추라는 우량주(優良株)에 투자하다‘화랑세기’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맺어지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야기 형태로 실려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잠 속에서 산에 올라 바라보니 서라벌에 홍수가 났다. 불길한 꿈이라 생각한 보희는 그 꿈을 동생 문희에게 비단을 받고 팔아버린다. 열흘 후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蹴鞠·남성들의 공놀이)을 하다가 실수로 김춘추의 옷을 찢어버리게 된다. 김유신의 부탁에 의해 바느질로 김춘추의 옷을 꿰맨 게 문희였다. 이후 김춘추와 문희는 사랑에 빠진다…(후략)”김유신은 신라가 아닌 몰락한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감의 극복을 위해선 신라 정통 귀족과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는 게 중요했다. ‘혼맥(婚脈) 형성’이 그 방법으로 선택된 듯하다.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탁월한 외교 협상력과 빼어난 문장을 인정받던 김춘추는 김유신이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러니, 찢어진 옷을 수선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춘추와 동생 문희를 만나게 한 건 철저하게 준비된 김유신의 계획이었을 터. ‘화랑세기’는 이렇게 이어진다.“1년쯤의 시간이 흐른 후 문희가 임신을 했다. 그때 김춘추에겐 이미 부인과 딸이 있던 상황. 문희를 받아들일 수도,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김춘추는 갈등했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건 김유신이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기를 가져 집안을 망신시킨 문희를 태워 죽이겠다며 장작에 불을 붙인 것. 선덕여왕과 산책을 즐기던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김유신의 집으로 뛰어갔고, 문희를 구한 뒤 자신의 집에 들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춘추와 먼저 혼인한 부인이 죽었고, 문 희는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이 된다”는 스토리.그게 신라시대건 현대건 인간의 통념상 동생을, 그것도 뱃속에 아기를 가진 누이동생을 불에 태우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는 오빠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그러니, 장작에 불을 붙이고 문희를 겁박한 김유신의 행위는 요즘 말로 하자면 ‘할리우드 액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어이, 김춘추. 이래도 내 동생 문희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는 협박성 제스처 말이다.◆‘삼국사기’가 평가한 문무왕의 외숙부 김유신“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봉준호가 연출한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1천400년 전 김유신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은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이 성사됨으로써 절반 이상 성공된 듯하다.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29대 왕이 된다. 김유신은 멸망한 나라의 망명객에서 왕의 손위 처남으로 신분이 격상됐다.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된 동생 문희는 신라의 30대 왕에 오를 태자 김법민(문무왕)을 낳았다.김유신과 김춘추는 오랜 세월 서로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 역할을 했다. 당나라와 협정을 맺고, 백제를 병합하고, 신라 내부의 권력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둘은 부정할 수 없는 동업자 관계로 살았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주춧돌이 그 시절에 놓였다.생애를 걸고 베팅(Betting)한 김춘추라는 우량주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위치로 폭등했고, 아끼던 여동생은 다음 번 신라 왕 자리를 차지할 젖먹이를 출산한다. 바로 그 ‘젖먹이’ 어린 김법민을 바라보던 김유신은 얼마나 흐뭇했을까?김유신이 설계한 ‘혼맥 형성 프로젝트’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수익을 가져왔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명성 또한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능력과 행운이 합쳐진 결과였다.김유신 사후(死後)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장군 김유신’의 높은 위상이 확인된다.그와 관련된 단국대학교 사학과 전덕재 교수의 논문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을 아래 인용한다.“김유신열전은 ‘삼국사기’의 열전 10권 가운데 무려 3권이나 차지할 정도로 분량이 많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삼국사기’ 찬자(撰者·책을 쓴 사람)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을 매우 숭앙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김유신열정 말미에 기술한 사론(史論)에서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 그런데 유신과 같은 이는 사람들이 칭송함이 고려시대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사대부가 알아주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조차도 능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김유신을 역사를 빛낸 위대한 위인으로 칭송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인데…(후략)” ◆문무왕의 업적 또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지만…‘삼국사기’ 속 ‘열전’의 3할을 차지할 만큼 주요한 역사 인물인 김유신에게는 밀리지만, 문무왕 역시 허술하거나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외숙부 김유신과 아버지 무열왕이 닦은 토대 위에서 문무왕 김법민은 빛나는 행보를 보여줬다.‘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요약하고 있는 문무왕의 업적은 여타의 신라 왕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 왕조의 어떤 통치자와 비교해도 부끄러울 게 없어 보인다. 이런 설명이다.“왕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 활동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세력을 제압했고, 666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병합시켰다. 이후 삼국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으려는 당나라의 노골적인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5소경제와 군사조직인 9서당의 단초를 마련해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이처럼 괄목할 만한 삶을 살았음에도, 문무왕에게 드리워진 외숙부 김유신과 부친 김춘추의 그늘은 너무 크고 짙었다. 때론 그 그늘이 안온함이 아닌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다음번 기사에선 김유신과 함께 문무왕에게 콤플렉스를 안겼을 수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무열왕의 삶’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05

그렇게 왕 지렁이가 되었다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는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축출한 문무왕 김법민은 죽어서 용이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바로 그 설화에서 소재를 얻은 김강 씨가 짤막한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본지로 보내왔다. 딱딱한 연재기사를 잠시 쉬어간다는 차원에서 이를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 수상자인 김강 씨는 작품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 등을 출간한 소설가다. 편집자 주#1구릉과 계곡의 휘어진 길을 벗어나자 시야가 탁 트였다. 맑은 날이면 수평선이 보인다 했는데. 흐린 하늘이 이어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저기쯤이겠지. 무채색 건물들의 낮은 지붕 너머 흐린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건물과 버스 사이 중간 즈음 짙은 회색 구름 덩어리가 보였다. 저 아래는 비가 오고 있으려나.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으로 빗방울이 부딪혔다. 한동안 차창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던 빗물이 아래로 방향을 틀었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막 베어낸 보리 짚단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밭을 옆으로 두고 섰다.“비가 오네.”용대가 우산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우산 챙겨 나오라고 했잖아. 내가.”용대는 한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손으로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우산대를 잡아끄는 용대를 따라 걸었다.“비가 안 올 줄 알았지. 그리고 준비성 좋은 네가 있잖아.”용대는 씩 웃었다.“하긴 비가 온 건 아니지. 우리가 들어간 거지.”“뭐라고?”“아니다. 저기다. 가자.”#2분명 용이었다.취침 옵션, 세 시간으로 해두고 잠이 들었는데 에어컨이 꺼지자 땀이 흘렀고 몸이 찌뿌둥해진 탓에 나는 일어나 앉았다. 베개 위에 덮어두었던 수건을 들어 이마와 목덜미를 닦았다. 에어컨을 다시 켜야겠다, 마음먹은 나는 더듬어 리모컨을 쥐었지만 어두운 탓에 버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켤까? 생각했지만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아내는 중간에 잠이 깨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할 수 없이 핸드폰의 배경 화면 빛으로 어찌 해보려던 그때, 큰길 쪽으로 난 커튼으로 그림자가 비쳤다.굵고 긴, 나선으로 꿈틀거리는 무엇. 창의 너비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곧, 침대 머리맡 커튼에도 그림자가 나타났다. 명확하게 뿔인지는 알 수 없으나-그림자였으니까-, 크고 뾰족한, 위로 솟구친 두 개의 무엇과 그것들 앞으로 길게 내민 주둥이-그림자였지만 직감적으로 무언가의 주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가 커튼 밖에서 아래위로,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과 리모컨을 양 손에 쥔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두 개의 그림자를 볼 뿐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이마를 거쳐 뺨으로 흘러내리던 땀방울도 제자리에 멈춘 듯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땀방울도 놀라 멈췄는데 오직 심장만이 거칠게 뛰었다. 멍했다. 눈썹위에 멈췄던 땀방울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아래로 내려왔다. 땀이 눈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휴, 어설프게 숨을 내쉰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바깥을 살피려 커튼을 잡으려던 순간, 그것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그리고 우아하게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다시 멈칫 했고 그것은 큰길로 난 창에서 침대 머리맡의 창을 거쳐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 커튼 틈으로 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환했고 하늘은 검었다. 여전히 깊은 밤이었다.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상상하다, 아내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다, 다시 잠을 자야할지 어떨지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고 한동안 창 밖에 머물다 움직였고 사라졌다. 그러기를 두 번, 그것은 세 번 우리 집을 휘돌고 갔다. 세 번째 돌아나갔을 때 나는 그것이 용이라 확신했다.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에어컨을 다시 켠 것 같기도 하고 베개의 수건을 갈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출근 준비 할 시간 아니냐며 아내가 몸을 흔들었을 때 나는 놀란 듯 허억,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하려했다. 지난밤 우리 집에 용이 왔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있잖아. 어젯밤에, 새벽에 말이야. 그러니까…….정리를 해서 깔끔하게 이야기해야겠다, 잠시 뜸을 들이던 중이었다.새벽에 뭐? 새벽에 일어나서 핸드폰 좀 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잠을 설치는 거잖아. 아휴. 애나 어른이나. 나 바빠. 애들 밥 차려야해.아내는 방을 나갔고 나는 열린 방문을 바라보기만 했다.#3마주보고 선 탑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천 년을 마주보았을 그들이었다. 백 년마다 한 마디씩 나누었을까? 아니면 천 년 동안 서로 바라보기만 했을까? 이상한 상상을 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으려다 바지가 젖을 듯해 그냥 서서 대종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짙은 회색 구름은 물길을 따라 바다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쳤다.“용이 돌아가는 모양이네.”용대가 무슨 말이냐며 물었고 나는 지난밤 용에 대해 말해주었다.“그러니까 꿈에 용이 나온 것하고 여기하고 무슨 관곈데?”지난밤의 일을 용대에게 말한 직후였다. 용대는 주저하지 않고 꿈이라 했다.“꿈이 아니라니까.”“꿈이 아니면? 그 말을 믿으라고? 그리고 나는 왜 데려 온 거냐? 내 이름이 용대라서?”“저기 저 쪽 바닷가에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잖아. 동해를 지키기 위해 용이 되었다고 하잖아. 그 용이 이곳 감은사 아래까지 왔다 갔다 했다지, 아마. 지금 보이는 저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왔다 돌아가고는 했다네. 간밤에 용이 우리 집을 세 번 돌고 사라지는데 이상하게 문무대왕이 생각나더라고.”용꿈을 꾸었는데 로또를 사야지, 수중릉을 찾아오는 것이 정상이냐, 로또를 사고 당첨이 되어서 친구에게 크게 한 몫 떼어주는 게 정상인 것 아니냐며 용대는 비아냥거리다 투덜대다를 반복했다.“정상이 아니지. 그런데 와보고 싶더라니까. 로또야 돌아가는 길에 사면 되는 거고. 근데 웃기지 않냐? 그 시절 사람들은 용, 하면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비를 내리고 또 뭐냐 나쁜 놈들을 벌주고,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우리는 용, 하면 로또부터 생각하지. 재밌네, 재밌다니까. 암튼 이제 내려가자. 여긴 다 보았으니. 대왕님 뵈러 가야지. 어젯밤에 왜 우리 집에 왜 오셨는지 물어도 보고.”수중릉으로 가는 동안 용대는 자기 이름이 용대라서 같이 가자 한 것이냐 다시 물었고 나는 그런 점이 조금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대답했다.#4바다에 다다른 회색 구름은 이내 흩어졌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사장(沙場)에서 바다로 뻗어나간 수중릉 돌무더기위로 갈매기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온 김에 사진 한 장 찍어주겠다며 용대는 나를 세워두고 몇 걸음 물러났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던 용대가 갑자기 웃었다.“왜?”“이게, 화면으로 보니까, 꼭 주먹감자 같단 말이지. 저쪽 건너편 섬나라를 보며 내민 주먹감자.”“그러네, 맞네. 딱 주먹감자네.”#5우리는 오래 있지 못했다. 근무시간 내 사무실로 복귀해야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며 사무실에서 나왔고 거래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왔었다. 나는 거래처로 가는 내내 주먹감자를 내밀고 있는 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픽픽 웃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 했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담당자를 만나 이미 합의했던 사항과 지나간 업무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담당자는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소소한 안부를 묻고 날씨 이야기를 하다 돌아왔다.직장으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용대가 물었다.“그래서 수중릉에 가니 용이 무슨 계시를 주더나?” 소설가 김강. 나는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간밤의 흥분, 수중릉까지 찾아가며 가졌던 기대는 어느새 사라지고 지난밤의 용이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설픈 잠 속의 꿈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모르겠다. 그게 용이었는지, 이무기였는지, 왕 지렁이였는지.”“네가 너무 거창한 생각을 하니 그렇지. 자, 받아라, 오백 원. 여기 둘게. 그리고 저기 저 앞에 편의점에 좀 세워라. 살게 있다.”용대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컵홀더에 넣으며 말했다.“이게 뭔데?”“일단 세우라니까.”나는 차를 세웠고 용대는 급하게 문을 연 뒤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그 꿈 내가 샀다. 복권 사러 간다. 당첨되면 좀 줄게.”

2023-08-29

고구려 정복 후 드러낸 한반도 지배야욕… 동맹국서 적으로

무열왕 김춘추, 흥무왕 김유신, 문무왕 김법민. 인척(姻戚) 관계로 맺어진 이 세 사람은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트로이카’라 불러도 무방하다.무열왕과 김유신은 660년 의자왕과 계백을 제압하며 백제를 병합했고, 무열왕 사후(死後)인 668년엔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외숙부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연개소문 자식들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고구려까지 절멸시킨다.하지만, 온전한 삼국통일을 위해선 한 가지의 문제를 더 해결해야 했다. 바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동맹세력으로 활동했던 당나라를 내몰아야 한다는 것. 외부세력의 축출 없는 삼한일통은 반쪽짜리에 불과했을 터이니.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7세기 지구 위 초강대국. 고구려 멸망 이후 ‘승전동맹국’이라 할 신라와 당나라는 전후(戰後) 처리를 놓고 갈등을 지속했다.당시의 정치 지형과 역사적 상황을 경북대학교 대학원 전경효의 논문 ‘7세기 후반 나당(羅唐·신라와 당나라)관계와 김유신’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7세기는 한국사에서 변동의 시기였다. 특정 국가 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가 대외관계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대외관계가 국내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특히 당의 등장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또한 전쟁의 양상은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총력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7세기는 여러 국가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인 시기였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후략)”한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손을 잡고 어떤 일을 도모했으나, 이후에 서로가 가진 입장 차이와 일 처리 과정의 불협화음 탓에 파국을 맞는 경우는 개인은 물론 국가 사이에서도 흔했다.◆ 세계 제2차대전 종전 후처럼 신라와 당나라도 갈등 겪어신라, 백제, 고구려, 당나라가 때로는 갈등하고, 어떤 부분에선 협력하며 경쟁하던 7세기만이 아니었다.전쟁이 끝난 후 각자가 많은 몫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다툼을 벌이는 현상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됐다.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돼 1945년에 끝이 난 세계 제2차대전은 수천만 명의 사람이 죽거나 다친 인류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이 전쟁이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제 몫 챙기기’로 인한 불화가 7세기 신라와 당나라의 갈등처럼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세계 제2차대전 종전 후의 역사를 기록한 각종 문헌이 정리된 ‘위키백과’는 “연합국은 점령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영토에 점령 지역 행정부를 세웠고 처음에는 각각 서방 연합국이 서쪽을, 소련이 동쪽을 통제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통제했다. 하지만 두 연합국은 서로 갈라졌다…”는 서술로 유럽에서의 승전국 간 갈등을 보여준다.반목과 갈등은 ‘원자폭탄 투하’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군국주의 일본을 항복시킨 아시아 지역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위키백과’의 설명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미국이 일본 본토와 일본이 통치했던 구 서태평양 도서 지역을 점령했고, 소련은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일제강점기 치하에 있던 한국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면서 분단됐다. 1945년에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에 각각 자신이 한반도 전체의 합법적인 정부라고 주장하는 별도의 공화국이 수립됐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중략) 전후 세계도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NATO)와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두 편으로 갈라졌다. 두 세력 사이의 오랜 정치적 긴장과 군사 경쟁인 냉전이 시작됐고, 냉전 기간 동안 전례 없는 군비 경쟁과 전 세계의 수많은 대리전이 이어졌다.” ◆ 신라와 당나라, 얻어낸 땅을 누가 차지하느냐로 다투다위에 언급된 세계 제2차대전 종결 후 일어난 갖가지 사건처럼, 668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병합 이후에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선 쉽사리 타협과 협상이 불가능한 문제가 여럿 발생한다.그중에서도 문제의 핵심은 전쟁으로 얻은 고구려 영토의 점유와 관련된 것이었다. 신라도, 당나라도 큰 희생을 치르며 얻어낸 땅을 한 평이라도 더 가지고 싶었을 터. 그와 관련해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출간한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을 간략하게 인용한다.“무열왕 김춘추와 당 태종 이세민은 나당동맹을 체결하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대동강 북쪽에 있었다. 때문에 당은 고구려 수도를 차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은 신라와 공동 군사작전을 펼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직할영토로 하려 했고, 신라는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맺어진 전후 처리 합의대로 대동강 이남을 영토로 하려고 했다.”국가와 국가 사이에 체결된 약속이 깨질 경우 통상은 두 나라 가운데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가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동서양의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 봐도 대부분이 그러했다.하지만, 신라는 달랐다. 당나라가 애초에 맺은 협정을 부정하며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신라의 영토까지 ‘식민지화’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이를 거칠게 거부한다.입으로는 동맹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삼한(신라·백제·고구려)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려 했던 당나라의 야망은 이미 백제가 절멸된 660년 직후부터 시작됐다. 이 사실은 다음에 인용되는 ‘나무위키’의 서술을 읽어보면 이해가 가능하다.“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아직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비롯한 당나라와의 여러 이익들이 상충되기 시작하면서, 신라의 불만은 점점 축적돼 갔다. 당에게 주권의 일부까지 바치다시피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지만, 실익은커녕 위협까지 생긴 격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런 불만 속에서 663년에 당 조정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물론 실제로는 신라가 멀쩡히 존재했으니, 구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와 달리 당나라의 계림대도독부로 기능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징적으로 당나라에 편입시킨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행위였다.”문무왕과 김유신을 비롯한 7세기 후반 신라의 집권층은 마구잡이로 뻗어가는 당나라의 정치·사회적 욕망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그럴 경우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기 위해 사용된 국력의 손실을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었기 때문.그래서다. 신라는 부득불 당나라와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황산벌전투와 평양성전투에 이어 다시 한 번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 676년, 마침내 당나라를 축출하고 이룬 온전한 삼한일통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일이나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이 아닌 최종 결과다. 그렇다면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이에 관한 결과부터 먼저 이야기하자. 많은 이들이 역사책을 읽어 잘 알고 있듯 이 전쟁에선 신라가 이긴다. 다시 한 번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의 한 대목을 옮긴다.“(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던 신라는) 당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했다. 이리하여 나당전쟁이 벌어졌다. 7년간 행해진 이 전쟁 가운데 매소성전투와 기벌포해전의 승리로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참으로 길고 긴 싸움이었다. 660년 백제가 무너지고, 8년 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굴복한 뒤로부터도 8년의 시간이 더 흘러서야 신라는 완성된 형태의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제대로 맛본다. 676년. 마침내 당나라가 신라에게 백기를 들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것.“신라는 자력으로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저지하고 쫒아냈다. 신라가 승전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쉬우나, 나당전쟁은 오늘날로 치면 중견국이 어떤 나라의 지원군이나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초강대국과 1대1로 싸워 물리친 것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국력 차이를 지혜롭게 극복한 위대한 승리였다.”위의 문장은 ‘나무위키’가 나당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22

아우는 ‘신라’로, 장남은 ‘당’으로… 연개소문家의 자중지란

668년 고구려의 붕괴와 기원전 207년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서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두 사건 사이에는 9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양국 모두 호걸(豪傑)의 사망과 간신의 횡포, 죽고 죽이는 형제간 다툼이라는 악재가 단시간에 겹쳤다.진나라의 최초 통치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이다.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농사법과 실용기술에 관련된 책 외에는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독재자’로 이름이 높지만, 진시황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한마디로 단순하게 평가될 인물이 아니다.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백성과 수천 명의 관료를 거느리고 국가를 다스린 인물이라면 그에겐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할 터.‘냉혹하고 독선적인 왕’이라는 건 진시황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그의 ‘빛’은 어떤 영역에서 환하게 반짝였을까. ‘위키백과’가 이에 답하고 있다.“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또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을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는 진시황이 사망한 직후 바로 무너진다. 환관(宦官·내시) 조고(趙高)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나라의 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뒤를 이은 진나라의 2대 황제 호해(胡亥)는 아둔한 사람이었다.조고와 호해는 순행(巡幸·왕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보는 일) 도중 숨진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황태자 부소와 몽염을 죽이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진나라의 절멸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이 되면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시황릉과 아방궁 등의 대규모 공사가 계속됐고, 변방의 수비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야 했다. 엄청난 노동의 강요와 무거운 세금, 엄격한 법률은 백성들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시황이 죽자 농민의 원성은 폭발했고, 마침내 진승, 오광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소식은 전국에 퍼져나갔고,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지만,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는 이를 계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진나라의 멸망 과정과 유사한 길을 걸었던 고구려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군사적 실권을 제 손 안에 틀어쥐고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진시황과 닮았다.연개소문은 시종일관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백으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엔 실질적 왕의 역할까지 맡았다.‘한국사 개념사전’은 연개소문의 집권 배경과 타협을 거부하는 거칠고 직선적인 대외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구려를 무리하게 침략하느라 국력이 약해진 수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고구려에 쳐들어오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는 중국과 맞닿은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이에 대비했다. 당시 고구려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 연개소문은 642년 당시 임금이었던 영류왕 대신 보장왕을 세우고, 대막리지(大莫離支·고구려 말기의 최고 관료)가 돼 정치를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강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나라에 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당나라의 요구도 거절했다.”‘천리장성의 축조자’이자, ‘거대 제국 당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으로 고대 왕국 고구려를 쥐고 흔든 최고 권력자였지만, 연개소문 역시 ‘삶이 유한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도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다가선 죽음만은 이기지 못한다. 666년. 고구려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2년 전 숨을 거둔 연개소문. 이후 진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생겨난 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고구려에서도 일어난다. ◆진나라 조고=고구려 연정토, 진나라 호해=고구려 연남생진시황이 죽은 뒤 간신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한 행위)로 진나라 2대 왕 호해를 조롱한다. ‘모든 관료들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나를 두려워하니, 사슴을 말이라고 해도 감히 반론하지 못할 것’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악행이었다.고구려가 망해가던 무렵 조고처럼 영악한 행위로 나라를 망친 건 놀랍게도 연개소문의 동생이었다. 이름은 연정토(淵淨土).그는 형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사이를 이간질해 셋을 형제가 아닌 원수로 만들어버렸다. 연정토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내용이다.“형인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3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장남 연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적국인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인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천543명을 신라에 바치고 투항했다.”고구려 멸망의 길에서 연정토가 진나라 조고와 비슷한 배역을 맡았다면,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은 진나라의 두 번째 왕 호해처럼 우매한 배역을 자처했다.아버지 덕에 아홉 살 어린아이임에도 선인(先人)이란 관직에 올랐고, 부친 사후에는 2대 대막리지가 됐던 연남생은 동생들과의 피 튀기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자, 연개소문이 그토록 적대시하던 당나라로 도망친다.‘내가 고구려의 지배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동생들 역시 망하게 할 것’이라는 이기적이고 단순무지한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음은 그의 행적에 관한 ‘위키백과’의 서술이다.“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 넷이 권력 다툼을 크게 벌였다. 결국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남건·남산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결국 668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다.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또한 당나라 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 공적으로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무열왕이 만든 배경 아래서 고구려를 병합한 문무왕아우는 적국(敵國)이라 불러야 할 신라 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고, 장남은 또 다른 적성국(敵性國) 당나라에 항복한 대가로 벼슬까지 받는다.연개소문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분노와 서러움에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을까?그랬다. 로마 제국이나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처럼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맞붙은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두산백과’의 짤막한 요약은 이렇다.“평양성전투는 고구려 보장왕 때인 668년 도성인 평양성에서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고구려가 패해 함락됐다.”이로써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660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뒤 고구려까지 절멸시키게 된다. 무열왕은 ‘왕위를 이어갈 아들’이란 자리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김유신의 조카’라는 타이틀까지 문무왕에게 선물한 셈이 됐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무열왕과 ‘일통’의 여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 고구려 병합으로 ‘통일’의 90% 이상을 완료한 문무왕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조선시기에도 무열왕·문무왕과 신라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武(무)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됐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15

연개소문 아들들의 ‘골육상쟁’이 부른 망국의 길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저 ‘제국(帝國)’이 멸망하는 이유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도, 바깥에서 오는 충격파 탓도 아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게 가장 큰 몰락의 시그널이다.고구려는 1천5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우리 땅 고대 3왕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인근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 군사 대국이었다.그럼에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세운지 705년 만에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허망하고 슬픈 마지막이었다.신라는 고구려의 절멸로 인해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발 더 성큼 다가선다. 당시 신라의 최고 권력자 문무왕 김법민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은 고구려의 최후 항전 ‘평양성전투’에서도 승리를 맛본다.지금도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멸망의 신호탄이 어디서 쏘아 올려진 것인지를 논쟁한다. 그 논쟁과는 별개로 고구려 말기의 흥망과 성쇠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2016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중앙과 지방’의 인용이다. “고구려는 오랜 기간 진행된 수나라·당나라와의 국운을 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한동안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올렸다. 특히 642년 정변을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이 군사력을 강화화고, 그를 기반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성공함으로써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뒤이어진 당나라의 공격도 차례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외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내부의 국력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대외적 위기 속에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자 그동안 누적돼온 모순이 즉각 겉으로 표출됐다. 연개소문이 죽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세 아들 사이의 정쟁이 그것이다. 장남 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지만 지방을 순행하는 사이에 동생 남건과 남산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남생은 평소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국내성 세력을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예상 밖으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태대각간’ 김유신에 필적했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위에서도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되는 연개소문(594~666)은 김유신, 계백과 함께 삼국시대를 이야기할 때 신라, 고구려, 백제의 그 어떤 왕보다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보편적 대중들은 김유신을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초특급 스타로, 계백은 풍전등화(風前燈火) 형국이었던 조국 백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만고충신(萬古忠臣)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은 어떤가.김유신의 벼슬 ‘태대각간’은 현대의 개념으로 보자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근데, ‘대막리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행정안전부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것.그러니, 고구려의 마지막 통치자 보장왕(재위 642~668)은 ‘연개소문이 내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삼국통일 과정을 다루면서 연개소문의 삶과 죽음을 빼놓는다면 그건 ‘단팥이 빠진 찐빵’의 맛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고구려 말기 그의 위상과 영향력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당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신라 김유신의 위상부터 살펴보자.육군사관학교 정재민 교수는 그의 논문 ‘영웅형 무장의 원형 김유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을 꼽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강감찬, 최영, 김종서, 이순신, 권율, 곽재우, 임경업 등 많은 장수들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 모두는 누란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해낸 명장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김유신은 다른 장수들에 비해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는 7세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해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며, 사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또한, 軍威(군위·군대의 위신)에서는 將軍神(장군신)으로, 江陵(강릉)에서는 大嶺山神(대령산신)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신격으로 숭배되고 있다.”살아있는 내내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追尊)됐으며, 강원도 강릉을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인간을 넘어 신(神)으로까지 추앙받는 게 김유신이다.이는 고대 왕국의 역사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그 기록이 영웅전설을 낳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당나라까지 위협한 맹장(猛將)이었으나 그의 자식들은…헌데, 연개소문은 삼국통일 전쟁 과정의 승자가 아닌 패자임에도 가진 권력의 크기와 전장에서 떨친 용맹이 김유신을 위협하는 형국이다.여러 고문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앞뒤는 물론 좌우에서도 감히 바라보기가 두려운 거구의 맹장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면 엎드린 호위병들의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고구려의 어떤 귀족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영류왕을 죽이고 무력을 독점한 ‘쿠데타의 수장’ 연개소문은 뭇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재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당시 중국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당나라의 왕들 또한 연개소문을 무서워했다.게다가 그는 고대 왕국의 틀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권력의 중앙집중화’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길고 드라마틱했던 연개소문의 생애를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다.“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다. 동부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나라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당나라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은 나이 지긋한 중국인들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경극(京劇·노래와 춤과 연극이 혼합된 전통극)에까지 등장한다.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당나라 태종 이세민(598~649)을 겁박하는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1천400여 년 전 그가 가졌던 ‘대체 불가의 카리스마’를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연개소문의 시대는 마냥 지속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남기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건 고구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666년.그가 죽은 후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 벼슬을 이어받는다. 사태가 어그러진 건 차남 연남건이 ‘이제 고구려의 권력은 내가 가져야겠다’는 야심을 품으면서부터였다.형 연남생이 궁궐을 비운 틈을 타 연남건은 동생인 연남산과 모의해 “이제는 형이 아닌 내가 대막리지”라고 선언한다.연남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형 연남생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연헌충의 목숨까지 끊어버린다. 이는 ‘고구려판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끌어내려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이라 불릴 만한 중차대한 사건이었다.연남생은 동생에게 당한 배신과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아 당나라에 투항해버린다. 이로써 연개소문의 아들 셋은 따스한 정을 나누는 혈육이 아닌 철천지원수가 됐다.◆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내부에서부터 붕괴의 조짐을 보였던 멸망 직전의 고구려.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신라의 고구려 침공은 이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전개됐다.신라는 문무왕과 김유신, 김인문(629~694·진골 왕족으로 무열왕의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이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나라는 고종(당나라 3대 왕·재위 649~683)의 명령에 따르는 수많은 정예군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하고 1개월 이상 공격을 지속했다.지금으로부터 1천355년 전인 668년 늦여름. 한때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넘어 서부 아시아까지 호령하던 로마 제국이 퇴폐와 방탕이라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무너진 것처럼 고구려의 운명도 저녁 하늘처럼 어둡게 저물고 있었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08

명실상부한 ‘고대 통일국가 신라’ 완성시킨 문무왕

‘삼국통일(삼한일통)’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이가 누구인지를 논쟁할 때면 언제나 뜨거운 갑론을박 속에 견해가 갈린다.“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국력의 토대를 마련한 무열왕 김춘추다”라는 의견이 있고, “그렇지 않다. 실상은 왕보다 더 큰 국가 무력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김유신”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그러나, 결국 역사는 풍문이 아닌 ‘팩트(Fact)’로 기록된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함으로써 크건 작건 명실상부한 ‘고대 통일국가 신라’를 완성시킨 건 문무왕(文武王)이다.세상이 그를 부르던 이름은 김법민(金法敏). 626년에 태어나 681년에 죽었으니, 지상에서 머문 시간은 55년. 신라의 서른 번째 왕으로 군림했던 건 백제가 멸망하고, 아버지 무열왕이 사망한 661년부터 681년까지니 20년이다. ◆아버지가 무열왕, 외숙부는 김유신...금수저 중 금수저그렇다면 역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문헌을 총괄한 ‘두산백과’를 아래 요약한다.“성은 김(金) 이름 법민(法敏), 시호는 문무(文武)다. ‘삼국유사’엔 문호왕(文虎王)이라고도 기록돼 있다. 무열왕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 ‘삼국유사’엔 왕비는 선품(善品)이라 기록돼 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진덕여왕 때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열왕 집권 후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 660년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공을 세웠다. 무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계승해 백제의 저항운동을 무력화시키고, 668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켜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완수했다. 676년 나당전쟁(羅唐戰爭·신라와 당나라의 싸움)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문무왕은 ‘태생적’으로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21세기엔 돈이 풍족하고, 권력을 가진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금수저를 물고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2023년 오늘이라면 재벌과 최고위직 공무원의 아들, 딸쯤에 해당되겠다.허나, 김법민이 태어나며 물고 나온 건 ‘금수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빼어난 능력과 수완으로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임에도 신라 왕에 최초로 오른 김춘추.엄마의 오빠, 그러니까 외숙부는 신라와 백제, 고구려까지를 통틀어 최고의 무장(武將)이자 용장(勇將)이라 불리던 신라 권력의 핵심 김유신이었다.허니, 문무왕 김법민은 금수저 따위는 우스운 ‘다이아몬드 수저를 갖추고 태어난 아이’였던 것.조금은 속된 비유가 될 수 있으나, ‘에이스 카드 2장을 처음부터 쥐고 치는 포커 게임은 이기기보다 지는 게 더 어려운 법’.부친 김춘추라는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에, 외삼촌 김유신이라는 ‘클로버 에이스 카드’까지 손에 들고 나머지 두 장의 에이스 카드를 모아 ‘삼국통일’이란 과업을 향해 질주했던 문무왕 김법민.그러나, 문무왕은 타자가 부여한 태생적 행운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바로 이것이 오늘날 퇴폐적인 몇몇 재벌의 아들이나, ‘갑질’을 자신의 권리인 줄 착각하는 몇몇 고위직 공무원의 딸과 문무왕 김법민의 변별점이라 할 수 있다.서울교대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을 보면 문무왕이 삼한일통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이라 할 ‘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어떤 결의와 역할을 했는지가 서술되고 있다. 주요 대목을 옮긴다.“667년에 문무왕은 당 고종의 공식적인 참전 요청이 없었음에도 대규모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이는 평양성 공격에 신라군이 배제되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고구려 영토에 대한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중략) 문무왕은 그동안 준비를 갖춘 대규모 원정군을 출정시켰다. 신라군의 참전으로 고구려군은 압록강 방어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평양성 전투에 승부를 걸었으며, 그 결과 당나라 군대의 압록강 전선 돌파가 가능해졌다…(후략)” ◆문무왕, 선친을 넘어서는 괄목할 업적을 남기다시인 고운기는 그의 책 ‘인물한국사’를 통해 문무왕의 생애가 어떤 행운과 굴곡으로 이어졌는지를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벌써 아버지(무열왕 김춘추) 이상의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兵部令·신라 군사직의 으뜸 벼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 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문무왕 김법민)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더없이 운이 좋았던 출생 배경에만 안분지족(安分知足) 했다면, 김법민은 ‘그저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죽은 흔하디흔한 왕족 중 하나’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 터.하지만, 김법민은 달랐다. 왕을 대신해 당나라를 오가며 신라의 국익 실현에 동분서주했고, 아버지 사후에는 백제를 부활시키려는 군대, 거친 기질이 몸에 밴 고구려의 군인들 앞에 목숨을 걸고 모습을 드러냈다.뿐 아니다. 당시의 초강대국 당나라의 축출이란 고난도의 과제까지 완수한 것. 이로써 실질적 삼국통일(삼한일통)에 마침표를 찍었던 문무왕은 죽음과 마지막에 남긴 말까지 영화적이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는 681년 7월 초하루 세상을 떠난 문무왕의 유조(遺詔·왕의 유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나는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해 영토를 안정시켰고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했다.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므로, 태자(신문왕)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엔 한 무더기의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내가 죽고 10일 뒤 화장(火葬)하면 족하다. 장례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자신의 뜻에 따라 신라의 바다를 지키는 용으로...신문왕은 위와 같은 말에 더해 “죽으면 왜구로부터 내 나라 백성을 지켜주는 용이 되고 싶으니, 내 뼈를 동쪽 바다에 묻어라”고 한다.이로써 삼국통일, 또는 삼한일통을 논할 때 무열왕 김춘추와 흥무대왕 김유신에 필적하는 역사적 위상을 가진 문무왕 김법민의 통치 20년은 마무리 된다.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그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곳은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해변 앞 커다란 바위 가운데다. 이른바 문무왕릉. 신라 왕의 유골이 봉안된 곳이라 해서 속칭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불린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두산백과’의 부연.“대왕암은 육지에서 200여m 떨어진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해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왕암 주변은 큰 화강암이 둘러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돼 있다. 물길이 난 가운데 공간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됐다.”그리고 여담 하나.문무왕은 아버지와 외숙부 복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의 뒤를 이어 신라의 집권자로 등극한 이는 큰아들이었던 신문왕 김정명(金政明·재위 681~692).신문왕은 아버지의 애국·애민 의지를 계승하겠다는 뜻에서 문무왕릉 지척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고, 용이 된 아버지가 밤이 되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절 아래 커다란 공간까지 만들었다.아버지는 왕이었고, 외삼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다. 거기에 효자 아들까지 뒀으니 이쯤 되면 “문무왕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행복했던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01

신라 삼국통일 과정의 최대 비극은 ‘황산벌전투’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조성된 ‘계백 장군 유적지’는 야트막한 수락산에 감싸 안긴 모습이다. 아래쪽으론 제법 큰 탑정호수가 푸른 물빛을 빛내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인간의 상상력이 가닿기조차 힘든 까마득한 옛날인 660년 7월 9일과 10일. 고대국가 신라와 백제는 생사결단의 싸움을 그곳에서 벌였다. 최소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산벌전투’의 현장.지지난 주. 귀하디 귀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촌음(寸陰) 사이에 결정되던 비극의 장소인 그곳을 2시간 가까이 천천히 돌아봤다. 황산벌전투에서 가장 장엄하고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계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죽음을 각오한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산벌에 도착하기 전. 계백은 아내와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 “與其生辱 不如死快”라고 했다. “살아있다면 적군에게 너희들이 당할 치욕과 고통을 알기에 내가 죽일 수밖에 없다”는 뜻.거센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로워진 나라의 사령관. 자신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벌어질 일을 이미 예상했을 게 분명하다.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직후 왕족과 귀족들이 겪은 일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프랑스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다수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거나 혁명군의 총에 맞았고, 왕과 귀족의 아내와 딸들은 육체적 모욕을 당해야 했다. 혁명이나 전쟁이나 ‘그 이후’는 동서고금이 유사했다. ‘천하의 계백’이 그걸 몰랐을 까닭이 없다. ◆계백의 유택(幽宅) 앞에서 떠올린 슬픈 시 한 편황산벌전투는 승자인 신라 무열왕 김춘추에겐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출발점이 됐고, 김유신에겐 드높은 전과(戰果) 중 하나로 기록됐다.그러나, 맞서 싸운 상대편의 수장 계백은 거기서 모든 걸 다 잃었다. 수천 명의 부하와 일생을 함께해 온 식구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논산 변두리 외진 곳. 계백의 유택으로 추정되는 무덤 주변엔 웃자란 풀들이 미지근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경주의 김유신 묘소처럼 화려하지도 않았고, 승자의 기운이 깃들지도 못한 쓸쓸한 풍경이었다. 거기 서있자니 그 역시 서러운 인생을 살아온 시인 이산하(63)의 시(詩) ‘복사꽃’이 떠올랐다.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마지막으로물끄러미 바라보는 꽃복사밭 건너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6세기에도 복숭아는 있었다. ‘그해는 복사꽃의 개화가 늦었다’는 문장이 등장하는 걸로 미루어 볼 때.그랬다.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계백 역시 유유자적 복사꽃이나 바라보며, 그 복사꽃이 만들어낸 달콤한 복숭아를 맛보며 말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계백이 복사꽃을 본 건 660년이 마지막이었다.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백제 병사 대부분이 661년 열매 맺은 복숭아를 먹어볼 수 없었다. 죽은 자에겐 저작(咀嚼)할 입이 없으므로.‘황산벌전투’는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백제라는 개별 국가가 겪은 가장 큰 비극이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을 종합하면 이런 답이 나온다.“642년(의자왕 2년)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羅唐·신라와 당나라)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 신라 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게 했다.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백마강)으로 진격했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삼국시대 백제가 방어용 목책을 구축했던 전략상 주요한 고개)으로 출정했다.”◆백제의 절멸은 신라가 더 큰 꿈 펼칠 디딤돌로…의자왕은 모욕당하고, 계백은 처참하게 전사하고, 항복함으로써 굴욕 속에 살아남은 충상과 상영 등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신라의 하급 관료가 돼야 했던 660년 황산벌전투.신라의 정치·군사·사회적 실권을 거의 독점했던 무열왕과 김유신에게 이 전투는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시킬 수 있는 단단한 지렛대가 됐다.그랬기에 김유신은 피붙이인 어린 조카 반굴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알다시피 반굴은 관창과 함께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희생양으로 선택된 화랑 중 하나다.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십 번 이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재현된 황산벌전투. 그러니, 그 결과를 재삼 거론하는 건 무용해 보인다.그저 다음처럼 간략하게 요약하면 될 듯하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이상훈 교수의 논문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 인용이다.“660년 여름. 당군 13만 명이 덕물도에 도착했고, 신라군 5만 명이 경기도 이천으로 북상했다. 신라군과 당군은 합군하지 않고, 각각 행군하여 백제의 수도로 향했다. 당군은 수로로 이동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이동했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 명과 백제 결사대 5천 명이 격돌했다.…(중략) 660년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신라 백성이 아니고, 백제의 백성도 아니며,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인 기자는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중 어느 한 편이 돼 황산벌전투의 승리와 패배에 관해 기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 입장에 서는 게 가능하다.그럼에도 계백의 무덤 앞에서 1천363년 전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같은 핏줄을 가졌고, 유사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서로를 원수처럼 죽고 죽이는 행위가 70년째 없다는 건 분명히 ‘행운’일 터. 더불어 그 행운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까지 간절했다.어쨌건 황산벌전투를 끝으로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몇 건의 저항 이후 백제라는 고대국가의 이름은 사라진다.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세운 나라가 678년 만에 절멸된 것이다. ◆백제 멸망 1년 후 무열왕 김춘추도 세상 떠나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백제 멸망의 원인을 ‘국내적 요인과 국외적 요인의 복합적 작용’에서 찾고 있다.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의자왕은 ‘왕권 강화’라는 슬로건 아래 지방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통제하려 했고, 이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포기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지방 귀족계급의 반발을 불렀다.북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고, ‘야심가’ 김춘추와 김유신이 존재했던 동쪽 신라의 침탈이 나라를 흔들어댔던 시기.의자왕 역시 계백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했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몇몇 고문헌에 언급된 의자왕의 죽음은 아래와 같다.“660년 9월 3일 왕후인 은고부인, 자식들, 신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그해 11월 1일 당나라 고종 앞에서 모욕적인 항복 선언을 했다. 나라를 잃고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다가 며칠 만에 먼 이역 땅에서 생을 마쳤다.”황산벌전투의 패자인 계백과 의자왕은 660년 죽었다. 그렇다면, 승자인 신라 권력의 핵심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어땠을까.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명제를 증명하듯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이듬해 김춘추가 죽었고, 13년 뒤엔 김유신도 지상에서의 삶을 끝낸다.백제 병합에 이어 ‘고구려 병합’이란 삼국통일의 제2막을 열어젖힌 건 김춘추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카였던 김법민(金法敏). 문무왕(文武王)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7-25

삼국통일 판을 짠 명군 - 외세에 영토 넘긴 군주

‘신라 왕조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탓에 실제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후진적 상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성립 이후 그와 같은 지리적 불리함에서 비롯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꾸준히 기울인 결과 선진의 고구려와 백제를 따라잡고 마침내 삼국 통합의 주역으로 부상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후략)’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1’에선 위와 같은 문장이 발견된다.그렇다면, 지리적 여건 등으로 인해 후진적 상태에서 출발한 신라가 먼저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발전하던 백제와 고구려를 누르고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구체적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효율적인 국민통합에 힘을 보탠 ‘불교’라는 이념, 엘리트 청년들의 애국심을 이끌어낸 ‘화랑’이라는 조직, 그리고 탁월한 두 인물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603~661).이 3가지를 ‘7세기 신라의 핵심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별다른 이론(異論)이 없을 것 같다.거론된 두 인물 중 김춘추에 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무위키’를 인용한다.“무열왕은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임기응변을 통해 고립무원이었던 신라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삼국통일의 판을 짠 명군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당나라와의 동맹으로 말미암아 대동강 이북의 땅을 외세에 넘긴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뉘는 것.” ◆혼인으로 맺어진 김춘추의 ‘지략’과 김유신의 ‘무력’하지만,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김춘추 즉, 무열왕에게 야박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김춘추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긍정과 부정의) 평가와는 별개로 김춘추는 신라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 그 능력이 출중한 편에 속한 명군이며, 탁월한 외교와 정무 감각을 바탕으로 신라를 양면전선의 늪에서 구해냈다. 전통사회에서는 김춘추를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위인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에 대한 호평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존재했다…(후략)”고구려와 당나라, 거기에 일본까지 오가며 탁월한 말솜씨와 친화력으로 칼과 창을 동원한 전투 없이도 전투 이상의 성과를 내며 국가적 이익을 얻어온 김춘추. 그는 결혼으로 맺어진 김유신과의 ‘특이한 관계’로도 유명하다.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김춘추의 아내는 문명왕후(문희). 문희는 김유신의 동생이다.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관계는 나중에 더 확장된다. 김춘추와 문명왕후의 딸인 지소공주가 김유신의 아내가 되는 것.그러니,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제부 관계인 동시에 장인-사위 관계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동생인 동시에 장모가 된 것.지금의 윤리의식으로 보자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며 놀라겠지만, 실제로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근친혼(近親婚·가까운 혈족끼리의 결혼)을 하는 왕족과 귀족은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적지 않았다.의학계는 동유럽의 최고 권력자 가문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병인 ‘주걱턱’이 바로 이 근친혼이 낳은 비극이라고 말한다.어쨌건, 김춘추는 신라의 무력을 ‘거의 독점한’ 김유신과 끊기 힘든 거미줄 같은 혼맥으로 결속되면서 자신의 지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확장시켰음이 분명해 보인다. ◆당나라와 일본 오가며 탁월한 외교력 인정받은 김춘추‘초한지’의 항우가 오추마를 얻은 듯, ‘삼국지’의 관우가 적토마를 얻은 듯, ‘7세기 동아시아의 실력자’ 김유신을 등에 업은 김춘추는 여러 나라를 오가며 자신의 정치력과 외교협상력을 발휘한다. 이른바 추후에 왕이 될 재목으로서 ‘존재 증명’에 성공한 것이다.아래 ‘삼국사기’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의 고문헌에 기록된 김춘추의 외교 관련 에피소드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일본)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돼 있다.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됐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됐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해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듬해인 648년 12월 김춘추는 당나라에 들어갔고, 당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했다. 당 태종은 높은 벼슬을 내렸고, 김춘추는 백제를 공격할 군대의 파병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귀국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성대한 송별연까지 열어줬다.”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다가서던 김춘추는 654년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의 스물아홉 번째 왕이 된다. ‘무열왕(武烈王)’이다.무열왕 김춘추의 집권 이후에도 백제·고구려와의 크고 작은 전투는 계속됐다. 백제의 멸망이 6년,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되기까지는 14년이 남아있던 때였으니.그렇게 군사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임에도 무열왕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삼국유사’엔 김춘추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膳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이란 것인데, 이를 풀어 쓰면 “왕은 하루에 쌀 3말과 장끼 9마리를 먹었다. 백제를 멸한 후엔 점심을 거르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하루 식사는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가 된다.인간이 ‘육식 코끼리’가 아닌 이상 24시간 동안 이처럼 많은 음식을 먹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 문장은 상징이나 은유로 읽어야 이해가 가능할 터.왕의 밥상은 왕 하나만 먹기 위해 차려지지 않는다. 왕이 끼니를 챙겨 먹고 남은 음식을 그를 수발하는 수많은 이들이 나눠 먹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그러니, ‘삼국유사’의 과장된 서술은 매일 같이 왕의 밥상에 넉넉한 음식을 올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무열왕 통치 시절 신라엔 물산(物産)이 풍족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국민의 배를 곯지 않게 만드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가장 주요한 책무 중 하나니까. ◆딸과 사위가 같은 날 사망한 가슴 아픈 사건도 겪어젊은 시절엔 총명함을 국가가 공인한 외교협상가였고,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 출신으론 처음으로 신라의 왕위에 올랐으며, 김유신이란 든든한 후원자를 곁에 두고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을 굶기지 않았던 무열왕 김춘추.하지만, 그의 삶 역시 내내 빛나는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생의 우여곡절이란 역사에 뚜렷하게 이름이 기록된 사람에게도 필시 있기 마련. 김춘추의 삶에 드리운 가장 서러운 음영(陰影)은 자신보다 앞선 딸과 사위의 죽음이다.642년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은 김춘추의 ‘금쪽같은 내 새끼’와 그녀의 남편까지 도륙한다. ‘삼국사기’에 그 사건이 언급되고 있다. 다음과 같다.“김춘추의 딸인 고타소(古陁炤) 공주의 남편 김품석은 대야성 군주(大耶城 軍主)였다.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엔 김품석에게 불만을 가진 검일(黔日)이 있었고, 그는 백제군과 내통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김품석이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했고, 숨어 있던 백제의 복병(伏兵)이 신라군을 전멸시킨다. 윤충은 항복한 김품석과 고타소 공주를 죽인 후 목을 베어 사비성(四沘城·당시 백제의 왕이 있던 곳)으로 보낸다…(후략)”고타소 공주는 김춘추의 딸이며 김유신의 조카였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 최고위 실력자 2명의 ‘사적인 원수’까지 된다.그로부터 18년 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로 진격한다. 왕이 된 김춘추와 상대등(上大等·신라의 으뜸 벼슬) 김유신이 선두에 섰다. 660년 신라의 백제 침공 배경엔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함께 ‘딸을 죽인 원수를 갚겠다’는 김춘추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또한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