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아우는 ‘신라’로, 장남은 ‘당’으로… 연개소문家의 자중지란

668년 고구려의 붕괴와 기원전 207년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서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두 사건 사이에는 9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양국 모두 호걸(豪傑)의 사망과 간신의 횡포, 죽고 죽이는 형제간 다툼이라는 악재가 단시간에 겹쳤다.진나라의 최초 통치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이다.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농사법과 실용기술에 관련된 책 외에는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독재자’로 이름이 높지만, 진시황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한마디로 단순하게 평가될 인물이 아니다.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백성과 수천 명의 관료를 거느리고 국가를 다스린 인물이라면 그에겐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할 터.‘냉혹하고 독선적인 왕’이라는 건 진시황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그의 ‘빛’은 어떤 영역에서 환하게 반짝였을까. ‘위키백과’가 이에 답하고 있다.“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또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을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는 진시황이 사망한 직후 바로 무너진다. 환관(宦官·내시) 조고(趙高)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나라의 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뒤를 이은 진나라의 2대 황제 호해(胡亥)는 아둔한 사람이었다.조고와 호해는 순행(巡幸·왕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보는 일) 도중 숨진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황태자 부소와 몽염을 죽이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진나라의 절멸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이 되면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시황릉과 아방궁 등의 대규모 공사가 계속됐고, 변방의 수비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야 했다. 엄청난 노동의 강요와 무거운 세금, 엄격한 법률은 백성들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시황이 죽자 농민의 원성은 폭발했고, 마침내 진승, 오광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소식은 전국에 퍼져나갔고,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지만,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는 이를 계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진나라의 멸망 과정과 유사한 길을 걸었던 고구려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군사적 실권을 제 손 안에 틀어쥐고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진시황과 닮았다.연개소문은 시종일관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백으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엔 실질적 왕의 역할까지 맡았다.‘한국사 개념사전’은 연개소문의 집권 배경과 타협을 거부하는 거칠고 직선적인 대외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구려를 무리하게 침략하느라 국력이 약해진 수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고구려에 쳐들어오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는 중국과 맞닿은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이에 대비했다. 당시 고구려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 연개소문은 642년 당시 임금이었던 영류왕 대신 보장왕을 세우고, 대막리지(大莫離支·고구려 말기의 최고 관료)가 돼 정치를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강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나라에 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당나라의 요구도 거절했다.”‘천리장성의 축조자’이자, ‘거대 제국 당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으로 고대 왕국 고구려를 쥐고 흔든 최고 권력자였지만, 연개소문 역시 ‘삶이 유한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도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다가선 죽음만은 이기지 못한다. 666년. 고구려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2년 전 숨을 거둔 연개소문. 이후 진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생겨난 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고구려에서도 일어난다. ◆진나라 조고=고구려 연정토, 진나라 호해=고구려 연남생진시황이 죽은 뒤 간신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한 행위)로 진나라 2대 왕 호해를 조롱한다. ‘모든 관료들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나를 두려워하니, 사슴을 말이라고 해도 감히 반론하지 못할 것’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악행이었다.고구려가 망해가던 무렵 조고처럼 영악한 행위로 나라를 망친 건 놀랍게도 연개소문의 동생이었다. 이름은 연정토(淵淨土).그는 형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사이를 이간질해 셋을 형제가 아닌 원수로 만들어버렸다. 연정토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내용이다.“형인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3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장남 연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적국인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인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천543명을 신라에 바치고 투항했다.”고구려 멸망의 길에서 연정토가 진나라 조고와 비슷한 배역을 맡았다면,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은 진나라의 두 번째 왕 호해처럼 우매한 배역을 자처했다.아버지 덕에 아홉 살 어린아이임에도 선인(先人)이란 관직에 올랐고, 부친 사후에는 2대 대막리지가 됐던 연남생은 동생들과의 피 튀기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자, 연개소문이 그토록 적대시하던 당나라로 도망친다.‘내가 고구려의 지배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동생들 역시 망하게 할 것’이라는 이기적이고 단순무지한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음은 그의 행적에 관한 ‘위키백과’의 서술이다.“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 넷이 권력 다툼을 크게 벌였다. 결국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남건·남산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결국 668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다.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또한 당나라 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 공적으로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무열왕이 만든 배경 아래서 고구려를 병합한 문무왕아우는 적국(敵國)이라 불러야 할 신라 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고, 장남은 또 다른 적성국(敵性國) 당나라에 항복한 대가로 벼슬까지 받는다.연개소문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분노와 서러움에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을까?그랬다. 로마 제국이나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처럼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맞붙은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두산백과’의 짤막한 요약은 이렇다.“평양성전투는 고구려 보장왕 때인 668년 도성인 평양성에서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고구려가 패해 함락됐다.”이로써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660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뒤 고구려까지 절멸시키게 된다. 무열왕은 ‘왕위를 이어갈 아들’이란 자리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김유신의 조카’라는 타이틀까지 문무왕에게 선물한 셈이 됐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무열왕과 ‘일통’의 여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 고구려 병합으로 ‘통일’의 90% 이상을 완료한 문무왕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조선시기에도 무열왕·문무왕과 신라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武(무)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됐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15

연개소문 아들들의 ‘골육상쟁’이 부른 망국의 길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저 ‘제국(帝國)’이 멸망하는 이유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도, 바깥에서 오는 충격파 탓도 아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게 가장 큰 몰락의 시그널이다.고구려는 1천5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우리 땅 고대 3왕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인근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 군사 대국이었다.그럼에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세운지 705년 만에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허망하고 슬픈 마지막이었다.신라는 고구려의 절멸로 인해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발 더 성큼 다가선다. 당시 신라의 최고 권력자 문무왕 김법민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은 고구려의 최후 항전 ‘평양성전투’에서도 승리를 맛본다.지금도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멸망의 신호탄이 어디서 쏘아 올려진 것인지를 논쟁한다. 그 논쟁과는 별개로 고구려 말기의 흥망과 성쇠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2016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중앙과 지방’의 인용이다. “고구려는 오랜 기간 진행된 수나라·당나라와의 국운을 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한동안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올렸다. 특히 642년 정변을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이 군사력을 강화화고, 그를 기반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성공함으로써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뒤이어진 당나라의 공격도 차례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외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내부의 국력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대외적 위기 속에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자 그동안 누적돼온 모순이 즉각 겉으로 표출됐다. 연개소문이 죽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세 아들 사이의 정쟁이 그것이다. 장남 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지만 지방을 순행하는 사이에 동생 남건과 남산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남생은 평소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국내성 세력을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예상 밖으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태대각간’ 김유신에 필적했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위에서도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되는 연개소문(594~666)은 김유신, 계백과 함께 삼국시대를 이야기할 때 신라, 고구려, 백제의 그 어떤 왕보다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보편적 대중들은 김유신을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초특급 스타로, 계백은 풍전등화(風前燈火) 형국이었던 조국 백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만고충신(萬古忠臣)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은 어떤가.김유신의 벼슬 ‘태대각간’은 현대의 개념으로 보자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근데, ‘대막리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행정안전부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것.그러니, 고구려의 마지막 통치자 보장왕(재위 642~668)은 ‘연개소문이 내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삼국통일 과정을 다루면서 연개소문의 삶과 죽음을 빼놓는다면 그건 ‘단팥이 빠진 찐빵’의 맛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고구려 말기 그의 위상과 영향력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당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신라 김유신의 위상부터 살펴보자.육군사관학교 정재민 교수는 그의 논문 ‘영웅형 무장의 원형 김유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을 꼽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강감찬, 최영, 김종서, 이순신, 권율, 곽재우, 임경업 등 많은 장수들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 모두는 누란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해낸 명장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김유신은 다른 장수들에 비해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는 7세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해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며, 사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또한, 軍威(군위·군대의 위신)에서는 將軍神(장군신)으로, 江陵(강릉)에서는 大嶺山神(대령산신)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신격으로 숭배되고 있다.”살아있는 내내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追尊)됐으며, 강원도 강릉을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인간을 넘어 신(神)으로까지 추앙받는 게 김유신이다.이는 고대 왕국의 역사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그 기록이 영웅전설을 낳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당나라까지 위협한 맹장(猛將)이었으나 그의 자식들은…헌데, 연개소문은 삼국통일 전쟁 과정의 승자가 아닌 패자임에도 가진 권력의 크기와 전장에서 떨친 용맹이 김유신을 위협하는 형국이다.여러 고문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앞뒤는 물론 좌우에서도 감히 바라보기가 두려운 거구의 맹장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면 엎드린 호위병들의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고구려의 어떤 귀족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영류왕을 죽이고 무력을 독점한 ‘쿠데타의 수장’ 연개소문은 뭇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재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당시 중국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당나라의 왕들 또한 연개소문을 무서워했다.게다가 그는 고대 왕국의 틀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권력의 중앙집중화’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길고 드라마틱했던 연개소문의 생애를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다.“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다. 동부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나라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당나라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은 나이 지긋한 중국인들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경극(京劇·노래와 춤과 연극이 혼합된 전통극)에까지 등장한다.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당나라 태종 이세민(598~649)을 겁박하는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1천400여 년 전 그가 가졌던 ‘대체 불가의 카리스마’를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연개소문의 시대는 마냥 지속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남기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건 고구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666년.그가 죽은 후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 벼슬을 이어받는다. 사태가 어그러진 건 차남 연남건이 ‘이제 고구려의 권력은 내가 가져야겠다’는 야심을 품으면서부터였다.형 연남생이 궁궐을 비운 틈을 타 연남건은 동생인 연남산과 모의해 “이제는 형이 아닌 내가 대막리지”라고 선언한다.연남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형 연남생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연헌충의 목숨까지 끊어버린다. 이는 ‘고구려판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끌어내려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이라 불릴 만한 중차대한 사건이었다.연남생은 동생에게 당한 배신과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아 당나라에 투항해버린다. 이로써 연개소문의 아들 셋은 따스한 정을 나누는 혈육이 아닌 철천지원수가 됐다.◆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내부에서부터 붕괴의 조짐을 보였던 멸망 직전의 고구려.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신라의 고구려 침공은 이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전개됐다.신라는 문무왕과 김유신, 김인문(629~694·진골 왕족으로 무열왕의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이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나라는 고종(당나라 3대 왕·재위 649~683)의 명령에 따르는 수많은 정예군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하고 1개월 이상 공격을 지속했다.지금으로부터 1천355년 전인 668년 늦여름. 한때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넘어 서부 아시아까지 호령하던 로마 제국이 퇴폐와 방탕이라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무너진 것처럼 고구려의 운명도 저녁 하늘처럼 어둡게 저물고 있었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08

명실상부한 ‘고대 통일국가 신라’ 완성시킨 문무왕

‘삼국통일(삼한일통)’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이가 누구인지를 논쟁할 때면 언제나 뜨거운 갑론을박 속에 견해가 갈린다.“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국력의 토대를 마련한 무열왕 김춘추다”라는 의견이 있고, “그렇지 않다. 실상은 왕보다 더 큰 국가 무력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김유신”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그러나, 결국 역사는 풍문이 아닌 ‘팩트(Fact)’로 기록된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함으로써 크건 작건 명실상부한 ‘고대 통일국가 신라’를 완성시킨 건 문무왕(文武王)이다.세상이 그를 부르던 이름은 김법민(金法敏). 626년에 태어나 681년에 죽었으니, 지상에서 머문 시간은 55년. 신라의 서른 번째 왕으로 군림했던 건 백제가 멸망하고, 아버지 무열왕이 사망한 661년부터 681년까지니 20년이다. ◆아버지가 무열왕, 외숙부는 김유신...금수저 중 금수저그렇다면 역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문헌을 총괄한 ‘두산백과’를 아래 요약한다.“성은 김(金) 이름 법민(法敏), 시호는 문무(文武)다. ‘삼국유사’엔 문호왕(文虎王)이라고도 기록돼 있다. 무열왕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 ‘삼국유사’엔 왕비는 선품(善品)이라 기록돼 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진덕여왕 때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열왕 집권 후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 660년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공을 세웠다. 무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계승해 백제의 저항운동을 무력화시키고, 668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켜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완수했다. 676년 나당전쟁(羅唐戰爭·신라와 당나라의 싸움)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문무왕은 ‘태생적’으로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21세기엔 돈이 풍족하고, 권력을 가진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금수저를 물고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2023년 오늘이라면 재벌과 최고위직 공무원의 아들, 딸쯤에 해당되겠다.허나, 김법민이 태어나며 물고 나온 건 ‘금수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빼어난 능력과 수완으로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임에도 신라 왕에 최초로 오른 김춘추.엄마의 오빠, 그러니까 외숙부는 신라와 백제, 고구려까지를 통틀어 최고의 무장(武將)이자 용장(勇將)이라 불리던 신라 권력의 핵심 김유신이었다.허니, 문무왕 김법민은 금수저 따위는 우스운 ‘다이아몬드 수저를 갖추고 태어난 아이’였던 것.조금은 속된 비유가 될 수 있으나, ‘에이스 카드 2장을 처음부터 쥐고 치는 포커 게임은 이기기보다 지는 게 더 어려운 법’.부친 김춘추라는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에, 외삼촌 김유신이라는 ‘클로버 에이스 카드’까지 손에 들고 나머지 두 장의 에이스 카드를 모아 ‘삼국통일’이란 과업을 향해 질주했던 문무왕 김법민.그러나, 문무왕은 타자가 부여한 태생적 행운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바로 이것이 오늘날 퇴폐적인 몇몇 재벌의 아들이나, ‘갑질’을 자신의 권리인 줄 착각하는 몇몇 고위직 공무원의 딸과 문무왕 김법민의 변별점이라 할 수 있다.서울교대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을 보면 문무왕이 삼한일통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이라 할 ‘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어떤 결의와 역할을 했는지가 서술되고 있다. 주요 대목을 옮긴다.“667년에 문무왕은 당 고종의 공식적인 참전 요청이 없었음에도 대규모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이는 평양성 공격에 신라군이 배제되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고구려 영토에 대한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중략) 문무왕은 그동안 준비를 갖춘 대규모 원정군을 출정시켰다. 신라군의 참전으로 고구려군은 압록강 방어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평양성 전투에 승부를 걸었으며, 그 결과 당나라 군대의 압록강 전선 돌파가 가능해졌다…(후략)” ◆문무왕, 선친을 넘어서는 괄목할 업적을 남기다시인 고운기는 그의 책 ‘인물한국사’를 통해 문무왕의 생애가 어떤 행운과 굴곡으로 이어졌는지를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벌써 아버지(무열왕 김춘추) 이상의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兵部令·신라 군사직의 으뜸 벼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 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문무왕 김법민)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더없이 운이 좋았던 출생 배경에만 안분지족(安分知足) 했다면, 김법민은 ‘그저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죽은 흔하디흔한 왕족 중 하나’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 터.하지만, 김법민은 달랐다. 왕을 대신해 당나라를 오가며 신라의 국익 실현에 동분서주했고, 아버지 사후에는 백제를 부활시키려는 군대, 거친 기질이 몸에 밴 고구려의 군인들 앞에 목숨을 걸고 모습을 드러냈다.뿐 아니다. 당시의 초강대국 당나라의 축출이란 고난도의 과제까지 완수한 것. 이로써 실질적 삼국통일(삼한일통)에 마침표를 찍었던 문무왕은 죽음과 마지막에 남긴 말까지 영화적이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는 681년 7월 초하루 세상을 떠난 문무왕의 유조(遺詔·왕의 유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나는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해 영토를 안정시켰고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했다.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므로, 태자(신문왕)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엔 한 무더기의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내가 죽고 10일 뒤 화장(火葬)하면 족하다. 장례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자신의 뜻에 따라 신라의 바다를 지키는 용으로...신문왕은 위와 같은 말에 더해 “죽으면 왜구로부터 내 나라 백성을 지켜주는 용이 되고 싶으니, 내 뼈를 동쪽 바다에 묻어라”고 한다.이로써 삼국통일, 또는 삼한일통을 논할 때 무열왕 김춘추와 흥무대왕 김유신에 필적하는 역사적 위상을 가진 문무왕 김법민의 통치 20년은 마무리 된다.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그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곳은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해변 앞 커다란 바위 가운데다. 이른바 문무왕릉. 신라 왕의 유골이 봉안된 곳이라 해서 속칭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불린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두산백과’의 부연.“대왕암은 육지에서 200여m 떨어진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해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왕암 주변은 큰 화강암이 둘러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돼 있다. 물길이 난 가운데 공간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됐다.”그리고 여담 하나.문무왕은 아버지와 외숙부 복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의 뒤를 이어 신라의 집권자로 등극한 이는 큰아들이었던 신문왕 김정명(金政明·재위 681~692).신문왕은 아버지의 애국·애민 의지를 계승하겠다는 뜻에서 문무왕릉 지척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고, 용이 된 아버지가 밤이 되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절 아래 커다란 공간까지 만들었다.아버지는 왕이었고, 외삼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다. 거기에 효자 아들까지 뒀으니 이쯤 되면 “문무왕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행복했던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01

신라 삼국통일 과정의 최대 비극은 ‘황산벌전투’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조성된 ‘계백 장군 유적지’는 야트막한 수락산에 감싸 안긴 모습이다. 아래쪽으론 제법 큰 탑정호수가 푸른 물빛을 빛내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인간의 상상력이 가닿기조차 힘든 까마득한 옛날인 660년 7월 9일과 10일. 고대국가 신라와 백제는 생사결단의 싸움을 그곳에서 벌였다. 최소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산벌전투’의 현장.지지난 주. 귀하디 귀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촌음(寸陰) 사이에 결정되던 비극의 장소인 그곳을 2시간 가까이 천천히 돌아봤다. 황산벌전투에서 가장 장엄하고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계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죽음을 각오한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산벌에 도착하기 전. 계백은 아내와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 “與其生辱 不如死快”라고 했다. “살아있다면 적군에게 너희들이 당할 치욕과 고통을 알기에 내가 죽일 수밖에 없다”는 뜻.거센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로워진 나라의 사령관. 자신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벌어질 일을 이미 예상했을 게 분명하다.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직후 왕족과 귀족들이 겪은 일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프랑스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다수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거나 혁명군의 총에 맞았고, 왕과 귀족의 아내와 딸들은 육체적 모욕을 당해야 했다. 혁명이나 전쟁이나 ‘그 이후’는 동서고금이 유사했다. ‘천하의 계백’이 그걸 몰랐을 까닭이 없다. ◆계백의 유택(幽宅) 앞에서 떠올린 슬픈 시 한 편황산벌전투는 승자인 신라 무열왕 김춘추에겐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출발점이 됐고, 김유신에겐 드높은 전과(戰果) 중 하나로 기록됐다.그러나, 맞서 싸운 상대편의 수장 계백은 거기서 모든 걸 다 잃었다. 수천 명의 부하와 일생을 함께해 온 식구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논산 변두리 외진 곳. 계백의 유택으로 추정되는 무덤 주변엔 웃자란 풀들이 미지근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경주의 김유신 묘소처럼 화려하지도 않았고, 승자의 기운이 깃들지도 못한 쓸쓸한 풍경이었다. 거기 서있자니 그 역시 서러운 인생을 살아온 시인 이산하(63)의 시(詩) ‘복사꽃’이 떠올랐다.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마지막으로물끄러미 바라보는 꽃복사밭 건너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6세기에도 복숭아는 있었다. ‘그해는 복사꽃의 개화가 늦었다’는 문장이 등장하는 걸로 미루어 볼 때.그랬다.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계백 역시 유유자적 복사꽃이나 바라보며, 그 복사꽃이 만들어낸 달콤한 복숭아를 맛보며 말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계백이 복사꽃을 본 건 660년이 마지막이었다.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백제 병사 대부분이 661년 열매 맺은 복숭아를 먹어볼 수 없었다. 죽은 자에겐 저작(咀嚼)할 입이 없으므로.‘황산벌전투’는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백제라는 개별 국가가 겪은 가장 큰 비극이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을 종합하면 이런 답이 나온다.“642년(의자왕 2년)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羅唐·신라와 당나라)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 신라 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게 했다.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백마강)으로 진격했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삼국시대 백제가 방어용 목책을 구축했던 전략상 주요한 고개)으로 출정했다.”◆백제의 절멸은 신라가 더 큰 꿈 펼칠 디딤돌로…의자왕은 모욕당하고, 계백은 처참하게 전사하고, 항복함으로써 굴욕 속에 살아남은 충상과 상영 등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신라의 하급 관료가 돼야 했던 660년 황산벌전투.신라의 정치·군사·사회적 실권을 거의 독점했던 무열왕과 김유신에게 이 전투는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시킬 수 있는 단단한 지렛대가 됐다.그랬기에 김유신은 피붙이인 어린 조카 반굴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알다시피 반굴은 관창과 함께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희생양으로 선택된 화랑 중 하나다.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십 번 이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재현된 황산벌전투. 그러니, 그 결과를 재삼 거론하는 건 무용해 보인다.그저 다음처럼 간략하게 요약하면 될 듯하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이상훈 교수의 논문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 인용이다.“660년 여름. 당군 13만 명이 덕물도에 도착했고, 신라군 5만 명이 경기도 이천으로 북상했다. 신라군과 당군은 합군하지 않고, 각각 행군하여 백제의 수도로 향했다. 당군은 수로로 이동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이동했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 명과 백제 결사대 5천 명이 격돌했다.…(중략) 660년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신라 백성이 아니고, 백제의 백성도 아니며,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인 기자는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중 어느 한 편이 돼 황산벌전투의 승리와 패배에 관해 기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 입장에 서는 게 가능하다.그럼에도 계백의 무덤 앞에서 1천363년 전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같은 핏줄을 가졌고, 유사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서로를 원수처럼 죽고 죽이는 행위가 70년째 없다는 건 분명히 ‘행운’일 터. 더불어 그 행운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까지 간절했다.어쨌건 황산벌전투를 끝으로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몇 건의 저항 이후 백제라는 고대국가의 이름은 사라진다.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세운 나라가 678년 만에 절멸된 것이다. ◆백제 멸망 1년 후 무열왕 김춘추도 세상 떠나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백제 멸망의 원인을 ‘국내적 요인과 국외적 요인의 복합적 작용’에서 찾고 있다.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의자왕은 ‘왕권 강화’라는 슬로건 아래 지방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통제하려 했고, 이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포기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지방 귀족계급의 반발을 불렀다.북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고, ‘야심가’ 김춘추와 김유신이 존재했던 동쪽 신라의 침탈이 나라를 흔들어댔던 시기.의자왕 역시 계백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했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몇몇 고문헌에 언급된 의자왕의 죽음은 아래와 같다.“660년 9월 3일 왕후인 은고부인, 자식들, 신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그해 11월 1일 당나라 고종 앞에서 모욕적인 항복 선언을 했다. 나라를 잃고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다가 며칠 만에 먼 이역 땅에서 생을 마쳤다.”황산벌전투의 패자인 계백과 의자왕은 660년 죽었다. 그렇다면, 승자인 신라 권력의 핵심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어땠을까.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명제를 증명하듯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이듬해 김춘추가 죽었고, 13년 뒤엔 김유신도 지상에서의 삶을 끝낸다.백제 병합에 이어 ‘고구려 병합’이란 삼국통일의 제2막을 열어젖힌 건 김춘추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카였던 김법민(金法敏). 문무왕(文武王)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7-25

삼국통일 판을 짠 명군 - 외세에 영토 넘긴 군주

‘신라 왕조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탓에 실제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후진적 상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성립 이후 그와 같은 지리적 불리함에서 비롯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꾸준히 기울인 결과 선진의 고구려와 백제를 따라잡고 마침내 삼국 통합의 주역으로 부상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후략)’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1’에선 위와 같은 문장이 발견된다.그렇다면, 지리적 여건 등으로 인해 후진적 상태에서 출발한 신라가 먼저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발전하던 백제와 고구려를 누르고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구체적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효율적인 국민통합에 힘을 보탠 ‘불교’라는 이념, 엘리트 청년들의 애국심을 이끌어낸 ‘화랑’이라는 조직, 그리고 탁월한 두 인물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603~661).이 3가지를 ‘7세기 신라의 핵심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별다른 이론(異論)이 없을 것 같다.거론된 두 인물 중 김춘추에 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무위키’를 인용한다.“무열왕은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임기응변을 통해 고립무원이었던 신라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삼국통일의 판을 짠 명군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당나라와의 동맹으로 말미암아 대동강 이북의 땅을 외세에 넘긴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뉘는 것.” ◆혼인으로 맺어진 김춘추의 ‘지략’과 김유신의 ‘무력’하지만,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김춘추 즉, 무열왕에게 야박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김춘추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긍정과 부정의) 평가와는 별개로 김춘추는 신라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 그 능력이 출중한 편에 속한 명군이며, 탁월한 외교와 정무 감각을 바탕으로 신라를 양면전선의 늪에서 구해냈다. 전통사회에서는 김춘추를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위인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에 대한 호평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존재했다…(후략)”고구려와 당나라, 거기에 일본까지 오가며 탁월한 말솜씨와 친화력으로 칼과 창을 동원한 전투 없이도 전투 이상의 성과를 내며 국가적 이익을 얻어온 김춘추. 그는 결혼으로 맺어진 김유신과의 ‘특이한 관계’로도 유명하다.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김춘추의 아내는 문명왕후(문희). 문희는 김유신의 동생이다.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관계는 나중에 더 확장된다. 김춘추와 문명왕후의 딸인 지소공주가 김유신의 아내가 되는 것.그러니,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제부 관계인 동시에 장인-사위 관계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동생인 동시에 장모가 된 것.지금의 윤리의식으로 보자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며 놀라겠지만, 실제로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근친혼(近親婚·가까운 혈족끼리의 결혼)을 하는 왕족과 귀족은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적지 않았다.의학계는 동유럽의 최고 권력자 가문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병인 ‘주걱턱’이 바로 이 근친혼이 낳은 비극이라고 말한다.어쨌건, 김춘추는 신라의 무력을 ‘거의 독점한’ 김유신과 끊기 힘든 거미줄 같은 혼맥으로 결속되면서 자신의 지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확장시켰음이 분명해 보인다. ◆당나라와 일본 오가며 탁월한 외교력 인정받은 김춘추‘초한지’의 항우가 오추마를 얻은 듯, ‘삼국지’의 관우가 적토마를 얻은 듯, ‘7세기 동아시아의 실력자’ 김유신을 등에 업은 김춘추는 여러 나라를 오가며 자신의 정치력과 외교협상력을 발휘한다. 이른바 추후에 왕이 될 재목으로서 ‘존재 증명’에 성공한 것이다.아래 ‘삼국사기’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의 고문헌에 기록된 김춘추의 외교 관련 에피소드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일본)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돼 있다.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됐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됐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해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듬해인 648년 12월 김춘추는 당나라에 들어갔고, 당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했다. 당 태종은 높은 벼슬을 내렸고, 김춘추는 백제를 공격할 군대의 파병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귀국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성대한 송별연까지 열어줬다.”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다가서던 김춘추는 654년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의 스물아홉 번째 왕이 된다. ‘무열왕(武烈王)’이다.무열왕 김춘추의 집권 이후에도 백제·고구려와의 크고 작은 전투는 계속됐다. 백제의 멸망이 6년,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되기까지는 14년이 남아있던 때였으니.그렇게 군사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임에도 무열왕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삼국유사’엔 김춘추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膳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이란 것인데, 이를 풀어 쓰면 “왕은 하루에 쌀 3말과 장끼 9마리를 먹었다. 백제를 멸한 후엔 점심을 거르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하루 식사는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가 된다.인간이 ‘육식 코끼리’가 아닌 이상 24시간 동안 이처럼 많은 음식을 먹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 문장은 상징이나 은유로 읽어야 이해가 가능할 터.왕의 밥상은 왕 하나만 먹기 위해 차려지지 않는다. 왕이 끼니를 챙겨 먹고 남은 음식을 그를 수발하는 수많은 이들이 나눠 먹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그러니, ‘삼국유사’의 과장된 서술은 매일 같이 왕의 밥상에 넉넉한 음식을 올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무열왕 통치 시절 신라엔 물산(物産)이 풍족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국민의 배를 곯지 않게 만드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가장 주요한 책무 중 하나니까. ◆딸과 사위가 같은 날 사망한 가슴 아픈 사건도 겪어젊은 시절엔 총명함을 국가가 공인한 외교협상가였고,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 출신으론 처음으로 신라의 왕위에 올랐으며, 김유신이란 든든한 후원자를 곁에 두고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을 굶기지 않았던 무열왕 김춘추.하지만, 그의 삶 역시 내내 빛나는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생의 우여곡절이란 역사에 뚜렷하게 이름이 기록된 사람에게도 필시 있기 마련. 김춘추의 삶에 드리운 가장 서러운 음영(陰影)은 자신보다 앞선 딸과 사위의 죽음이다.642년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은 김춘추의 ‘금쪽같은 내 새끼’와 그녀의 남편까지 도륙한다. ‘삼국사기’에 그 사건이 언급되고 있다. 다음과 같다.“김춘추의 딸인 고타소(古陁炤) 공주의 남편 김품석은 대야성 군주(大耶城 軍主)였다.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엔 김품석에게 불만을 가진 검일(黔日)이 있었고, 그는 백제군과 내통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김품석이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했고, 숨어 있던 백제의 복병(伏兵)이 신라군을 전멸시킨다. 윤충은 항복한 김품석과 고타소 공주를 죽인 후 목을 베어 사비성(四沘城·당시 백제의 왕이 있던 곳)으로 보낸다…(후략)”고타소 공주는 김춘추의 딸이며 김유신의 조카였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 최고위 실력자 2명의 ‘사적인 원수’까지 된다.그로부터 18년 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로 진격한다. 왕이 된 김춘추와 상대등(上大等·신라의 으뜸 벼슬) 김유신이 선두에 섰다. 660년 신라의 백제 침공 배경엔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함께 ‘딸을 죽인 원수를 갚겠다’는 김춘추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또한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7-11

항복한 이는 죽이지 않아…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의 장군’

21세기처럼 가까운 약국에만 가도 위장병과 두통, 소화불량을 치료하는 각종 약과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또한, ‘내과 수술’이란 단어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신라(기원전57~935)를 통틀어서 그러했다.그럼에도 우리식 셈법으로 여든을 목전에 둔 79세까지 살았다. 그뿐 아니다. 열다섯에 수백수천의 낭도를 이끄는 화랑이 된 그는 사다함, 관창과 더불어 ‘신라 화랑의 트로이카’로 불린다.벼슬? 고대왕국 신라에 존재했던 벼슬 중 그가 해보지 못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왕 아래 세 번째로 높았던 소판(蘇判)과 두 번째 관등 이찬(伊飡),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린 대각간(大角干·오늘날 국무총리), 거기에 클 태(太)자를 하나 더 붙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은 오로지 그만을 위한 만든 벼슬이었다. 이른바 위인설관(爲人設官·특정인을 위해 만든 자리)의 직위.그가 죽었을 때 왕을 포함한 정부의 고위관료와 친인척, 지인들이 슬픔을 전하며 보내온 부조(扶助)는 현대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500억 원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마지막은 더 흥미롭다. 그는 신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왕으로 추존(追尊)된 사람이다. 그를 달리 부르는 명칭은 ‘순충장렬 흥무대왕(純忠壯烈 興武大王)’. 사후 1천350년이 흐른 지금도 경주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길을 ‘흥무대왕로’라고 부른다. ◆ ‘불멸하는 이름’으로 남은 신라의 장군오래 전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을 설명하는데 위와 같은 긴 문장이 사용됐다. 아니, 겨우 685자의 글로는 그의 굴곡 많고, 영화 같았던 삶과 죽음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갓 젖먹이에서 벗어난 아이들까지도 ‘한국의 장군’이라 하면 임진왜란 때의 명장으로 “내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고 일갈한 이순신(1545~1598)과 더불어 가장 먼저 입에 오르는 김유신(595~673).육체는 이미 흙이 돼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길고 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를 ‘불멸(不滅)’ 혹은, ‘사라지지 않은 정신’ 외에 어떤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 역시 김유신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높은 자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80여 명의 인물을 다룬 ‘삼국사기’ 열전 10권 가운데 3권을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다.…(중략)”이 책은 김유신이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성공시킨 ‘삼국통일’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 관해서도 약술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신라는 백제, 고구려를 멸한 데 이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려던 당군마저 물리치고 676년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비록 불완전한 통일이지만 한반도에 처음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는 것은 민족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신라인들은 이를 ‘일통삼한’으로 인식하였고, 신라의 국가적 위상도 고양되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문헌에 의하면 김유신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신라의 정통 귀족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정설. 그는 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신라가 가야를 병합할 때 항복한 왕족 중 하나가 그의 조상이었다.신라의 성골(聖骨) 바로 아래 계급인 진골(眞骨)로 편입됐지만, 왕의 혈족들과 결혼할 수 있는 진성(眞成) 귀족은 되지 못한 것.그가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임신한 문희를 “통정한 사내가 누구냐?”라고 매섭게 추궁하며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설화다. 여기에서 숨겨진 김유신의 ‘정치적 야심’을 읽을 수 있다.이 사건(?)은 누이와 ‘통정한 사내’가 김춘추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벌인 김유신의 드라마틱한 자작극에 가깝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결과적으로 김춘추는 후에 왕위(태종무열왕)에 올랐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제부와 처남 사이가 된다. 왕의 손위 처남이 된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이 한 단계 더 높아졌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미래를 내다보며 마음속으로 신라 사회의 ‘블루칩’으로 지목한 사내 김춘추를 자신의 여동생과 혼인관계로 맺어준 주도면밀한 연출자의 모습에서 김유신의 내적 명민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명민한 정치적 판단력과 함께 ‘일당백 무장’의 모습도김유신은 위와 같은 빠른 정세 판단과 내면적 깊이에 더해 외적인 용맹성도 갖춘 사람이었다.일당백(一當百) 무장(武將)으로서의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위한 각종 전투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고, 어떤 공을 세웠으며, 그 공적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는 영남대학교 군사학과 이영찬 객원교수의 논문 ‘김유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연구’에 잘 드러나 있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김유신은 신라의 무신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가 되던 해 화랑으로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다가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최초로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우는 등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그는 군사를 지휘하며 지도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사망한 이후 신라는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를 물리쳐 명실상부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지략가가 아닌 무정단호(無情斷乎)한 무인(武人)으로서 김유신이 보여줬던 결기는 선덕여왕 때 발생한 ‘비담과 염종의 반란’에서도 드러난다.반란이 일어나자 1만여 명의 군사를 가진 김유신에게 그 곱절인 2만 명의 병력으로 무장한 비담은 “패배할 게 분명한 싸움에 나서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고 조롱했다.이에 발끈한 김유신은 “너희 반란군 중 항복하는 자는 용서하겠으나, 내 군대에 저항하는 이들은 구족(九族·고조, 증조, 조부, 부, 자기,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의 동종 친족을 아우르는 단어. 즉, 피붙이 전부)을 멸하겠다”고 응수했다.실제로 김유신은 반란이 진압된 후 항복을 거부한 반란 수뇌부의 구족을 모조리 죽였다. 반란 가문의 목을 베는데 어른과 아이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반면 항복한 이들은 약속대로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중국 역사 속에도 유사한 전례가 있다.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불리는 항우(項羽 ·기원전232~기원전202)는 진나라와 전투를 치를 때 상대편 군사 20만 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는다.맞서 싸우던 적군이 항복을 했음에도 지금의 경주 인구보다 조금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모조리 생매장한 것이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Holocaust)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이를 보면 김유신은 항장불살(降將不殺·항복한 장군은 죽이지 않는다)을 넘어 항졸불살(항복한 졸병도 죽이지 않는다)까지 실천한 덕장(德將·덕을 갖춘 무장)이었던 모양.◆ 신라의 지배자였던 김유신은 행복하기만 했을까?비단 ‘비담과 염종의 반란’에서만이 아니다. 김유신은 온전한 삼국통일의 방해세력이었던 당나라 군대를 몰아낼 때도 가장 앞자리에 섰다. 앞서 언급한 이영찬 교수의 논문을 다시 인용한다.“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또한,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 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중략) 672년 석문(石門·황해도 서흥) 벌판 전투에서 신라의 군대가 당에 밀리고 있을 때는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김유신 죽은 뒤인 676년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이처럼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나라로부터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으며, 장수(長壽)의 복까지 누린 김유신.그런데, 과연 그의 삶에는 환한 빛만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어질 기사에선 그를 어둡게 뒤덮었던 ‘그림자’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6-27

지략 갖춘 무장·베테랑 외교관, 생사에 깃든 빛과 그림자

서기 660년 백제에 이어 668년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된다. 이로써 이른바 삼국통일(三國統一), 혹은 삼한일통(三韓一通)이 완성된 것이라 역사학자들은 말한다.7세기 중반에서 후반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들 사이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다양한 방식의 외교 전략이 구사됐던 시기다. 오늘날까지도 구전되는 당시의 인물과 사건들이 숱하다.7세기 우리 땅은 어느 시대보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드라마틱한 공간이었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하면서도 때로는 필요에 따라 협력관계를 이어가며 각자의 국력을 키우는데 전력했다.앞서 말했듯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과 전투, 외교 협상과 비밀스런 사건이 발생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인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신라가 어떤 방식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켰으며, 압도적 우위의 국력이 없었음에도 삼국통일에 성공한 고대국가로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보는 건 역사를 통해 현대를 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유의미한 행위이자 과정일 터. ◆ 영화처럼 흥미로운 7세기 신라를 찾아가는 여행본지는 2023년 ‘경주의 재발견’이란 타이틀 아래 연중기획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과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당시 인물들의 행적을 세밀하게 추적하고자 한다.이는 7세기 신라는 물론, 21세기 현재의 경주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호의적 관심을 유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미래’를 설계하는 가장 주요한 재료는 ‘과거’다. 지난날은 다가올 날의 거울이 된다. 바로 그 지난날, 즉 과거의 총합이 역사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다소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과 통일이 가지는 의의.이것들을 다시 한 번 면밀하게 반추함으로써 7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환기시키고, 경주시민과 경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 역시 본지의 연중기획 목적 중 하나다.김유신, 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황산벌전투,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역학관계, 화랑, 백제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겪은 수모와 치욕….이 모든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는 7세기 한반도.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그 시절을 향후 경주 현장취재와 관련 논문 검토, 가상 역사소설과 당시를 다룬 문학작품의 해석 등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고자 한다. ◆ 김유신, 신라의 대표적 화랑으로 ‘仁(인)’을 실천하다지난주 목요일. 삼국통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의 유택(幽宅)을 돌아보기 위해 경주로 갔다. 초여름 날씨는 생각보다 더웠고, 조금만 걸어도 흐른 땀이 셔츠를 적셨다.다행히 김유신의 묘와 무열왕릉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았다. 먼저 찾은 곳은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 墓)’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태대각간’은 지금의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합친 특별한 관직이다. 김유신이 이 벼슬에 오른 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68년 고구려를 병합하는데 세운 공을 인정받은 것.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이상훈 연구교수는 그의 논문 ‘삼국통일기 화랑정신과 김유신의 리더십’에서 7세기 ‘대표 화랑’ 김유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하고 있다.“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단일국가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특히 삼국통일과정에서 전쟁에 참여한 화랑집단의 활약은 돋보였다. 이들은 세속오계를 화랑정신의 근본으로 삼고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했다. 화랑정신은 충효사상과 직결되었고, 신라의 장수들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솔선수범함으로써 부하들을 이끌었다. 이러한 변혁기에 화랑정신을 몸소 구현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다.”당시 김유신이 가졌던 권력과 권한의 크기는 조성된 묘역만 봐도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직경 15.8m 높이 5.6m의 거대한 봉분에 38개의 탄탄한 난간석을 둘렀고, 묘를 호위하는 십이지신(十二支神)까지 탱석에 새긴 것. 이는 여타 신라 왕릉의 규모와 화려함을 압도하는 것이다.사실 김유신은 사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되기도 했다.앞서 언급한 이상훈 교수의 논문은 김유신의 당대 활약상과 그가 귀하게 여겼던 정신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런 대목이다.“김유신은 629년 낭비성 전투에 참가해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렸으며, 642년 압량주 군주로 임명돼 지방의 군사력을 새롭게 확충했다. 이후 660년 백제의 멸망과 668년 고구려의 멸망에 직간접적으로 활약하였으며, 나당전쟁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유신은 삼국이 통일되는 시기에 태어나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仁(인)’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이처럼 살아서는 그 나라 최고위직 관료가 됐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됐으며, 1천4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무시로 오르내리는 이가 바로 김유신이다.그러나, 인간의 생애엔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김유신 역시 마냥 행복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관해서 차차 알아보기로 한다. ◆ 서악동에 남은 ‘신라 최고 외교관’ 김춘추의 흔적들신라의 스물아홉 번째 통치자 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 그 역시 김유신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유명세로 따지자면 신라시대 인물 중 으뜸과 버금을 다툰다.김유신이 지략을 갖춘 단호한 무장(武將)이었다면, 동시대를 살았던 김춘추는 당대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능숙하게 파악하고, 이를 전략과 전술에 능란하게 적용시킬 줄 알았던 ‘베테랑 외교관’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그가 묻힌 무열왕릉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김유신 묘를 살핀 후 가볍게 점심을 먹고 무열왕 김춘추의 유택을 향했다. 두 무덤 간의 거리는 멀지 않다. 택시로 10분 안팎이면 도착이 가능하다.역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라 적힌 묘비가 제일 먼저 기자를 반겼다. 661년 세상을 떠난 무열왕의 탁월한 외교력에 관해선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에 간략한 서술이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전략) 뛰어난 외교가 김춘추는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 왜(일본), 당(중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는 결국 통일전쟁이 단순히 삼국 간의 싸움에만 한정되지 않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참전하는 국제전(國際戰)의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성공적 외교에 있었다.…(후략)”무열왕 김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당(唐·당나라)이라는 외세를 통일전쟁에 끌어들인 사대주의자”라는 사학계의 비판적 견해는 몇몇 상업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하지만, 7세기 신라의 입장에서 ‘외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고운기의 ‘인물한국사’는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다.“김춘추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특히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데 대해 그렇다. 그러나, 냉정히 따졌을 때 당대 세계문명의 중심인 당과의 외교에 한발 앞선 신라의 노력을 평가절하 할 수는 없으며, 백제건 고구려건 신라로서는 당과 마찬가지로 외국이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앞으로 전개될 연재기사에선 김유신과 마찬가지로 무열왕 김춘추의 생사에 깃든 빛과 그림자에 관해서도 탐구해 볼 예정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