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백제에 이어 668년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된다. 이로써 이른바 삼국통일(三國統一), 혹은 삼한일통(三韓一通)이 완성된 것이라 역사학자들은 말한다.7세기 중반에서 후반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들 사이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다양한 방식의 외교 전략이 구사됐던 시기다. 오늘날까지도 구전되는 당시의 인물과 사건들이 숱하다.7세기 우리 땅은 어느 시대보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드라마틱한 공간이었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하면서도 때로는 필요에 따라 협력관계를 이어가며 각자의 국력을 키우는데 전력했다.앞서 말했듯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과 전투, 외교 협상과 비밀스런 사건이 발생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인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신라가 어떤 방식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켰으며, 압도적 우위의 국력이 없었음에도 삼국통일에 성공한 고대국가로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보는 건 역사를 통해 현대를 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유의미한 행위이자 과정일 터. ◆ 영화처럼 흥미로운 7세기 신라를 찾아가는 여행본지는 2023년 ‘경주의 재발견’이란 타이틀 아래 연중기획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과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당시 인물들의 행적을 세밀하게 추적하고자 한다.이는 7세기 신라는 물론, 21세기 현재의 경주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호의적 관심을 유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미래’를 설계하는 가장 주요한 재료는 ‘과거’다. 지난날은 다가올 날의 거울이 된다. 바로 그 지난날, 즉 과거의 총합이 역사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다소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과 통일이 가지는 의의.이것들을 다시 한 번 면밀하게 반추함으로써 7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환기시키고, 경주시민과 경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 역시 본지의 연중기획 목적 중 하나다.김유신, 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황산벌전투,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역학관계, 화랑, 백제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겪은 수모와 치욕….이 모든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는 7세기 한반도.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그 시절을 향후 경주 현장취재와 관련 논문 검토, 가상 역사소설과 당시를 다룬 문학작품의 해석 등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고자 한다. ◆ 김유신, 신라의 대표적 화랑으로 ‘仁(인)’을 실천하다지난주 목요일. 삼국통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의 유택(幽宅)을 돌아보기 위해 경주로 갔다. 초여름 날씨는 생각보다 더웠고, 조금만 걸어도 흐른 땀이 셔츠를 적셨다.다행히 김유신의 묘와 무열왕릉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았다. 먼저 찾은 곳은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 墓)’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태대각간’은 지금의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합친 특별한 관직이다. 김유신이 이 벼슬에 오른 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68년 고구려를 병합하는데 세운 공을 인정받은 것.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이상훈 연구교수는 그의 논문 ‘삼국통일기 화랑정신과 김유신의 리더십’에서 7세기 ‘대표 화랑’ 김유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하고 있다.“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단일국가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특히 삼국통일과정에서 전쟁에 참여한 화랑집단의 활약은 돋보였다. 이들은 세속오계를 화랑정신의 근본으로 삼고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했다. 화랑정신은 충효사상과 직결되었고, 신라의 장수들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솔선수범함으로써 부하들을 이끌었다. 이러한 변혁기에 화랑정신을 몸소 구현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다.”당시 김유신이 가졌던 권력과 권한의 크기는 조성된 묘역만 봐도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직경 15.8m 높이 5.6m의 거대한 봉분에 38개의 탄탄한 난간석을 둘렀고, 묘를 호위하는 십이지신(十二支神)까지 탱석에 새긴 것. 이는 여타 신라 왕릉의 규모와 화려함을 압도하는 것이다.사실 김유신은 사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되기도 했다.앞서 언급한 이상훈 교수의 논문은 김유신의 당대 활약상과 그가 귀하게 여겼던 정신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런 대목이다.“김유신은 629년 낭비성 전투에 참가해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렸으며, 642년 압량주 군주로 임명돼 지방의 군사력을 새롭게 확충했다. 이후 660년 백제의 멸망과 668년 고구려의 멸망에 직간접적으로 활약하였으며, 나당전쟁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유신은 삼국이 통일되는 시기에 태어나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仁(인)’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이처럼 살아서는 그 나라 최고위직 관료가 됐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됐으며, 1천4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무시로 오르내리는 이가 바로 김유신이다.그러나, 인간의 생애엔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김유신 역시 마냥 행복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관해서 차차 알아보기로 한다. ◆ 서악동에 남은 ‘신라 최고 외교관’ 김춘추의 흔적들신라의 스물아홉 번째 통치자 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 그 역시 김유신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유명세로 따지자면 신라시대 인물 중 으뜸과 버금을 다툰다.김유신이 지략을 갖춘 단호한 무장(武將)이었다면, 동시대를 살았던 김춘추는 당대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능숙하게 파악하고, 이를 전략과 전술에 능란하게 적용시킬 줄 알았던 ‘베테랑 외교관’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그가 묻힌 무열왕릉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김유신 묘를 살핀 후 가볍게 점심을 먹고 무열왕 김춘추의 유택을 향했다. 두 무덤 간의 거리는 멀지 않다. 택시로 10분 안팎이면 도착이 가능하다.역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라 적힌 묘비가 제일 먼저 기자를 반겼다. 661년 세상을 떠난 무열왕의 탁월한 외교력에 관해선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에 간략한 서술이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전략) 뛰어난 외교가 김춘추는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 왜(일본), 당(중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는 결국 통일전쟁이 단순히 삼국 간의 싸움에만 한정되지 않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참전하는 국제전(國際戰)의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성공적 외교에 있었다.…(후략)”무열왕 김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당(唐·당나라)이라는 외세를 통일전쟁에 끌어들인 사대주의자”라는 사학계의 비판적 견해는 몇몇 상업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하지만, 7세기 신라의 입장에서 ‘외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고운기의 ‘인물한국사’는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다.“김춘추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특히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데 대해 그렇다. 그러나, 냉정히 따졌을 때 당대 세계문명의 중심인 당과의 외교에 한발 앞선 신라의 노력을 평가절하 할 수는 없으며, 백제건 고구려건 신라로서는 당과 마찬가지로 외국이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앞으로 전개될 연재기사에선 김유신과 마찬가지로 무열왕 김춘추의 생사에 깃든 빛과 그림자에 관해서도 탐구해 볼 예정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