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br/>⑦ 김법민, 아버지에 이어 강위력한 왕으로 등장
‘삼국통일(삼한일통)’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이가 누구인지를 논쟁할 때면 언제나 뜨거운 갑론을박 속에 견해가 갈린다.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국력의 토대를 마련한 무열왕 김춘추다”라는 의견이 있고, “그렇지 않다. 실상은 왕보다 더 큰 국가 무력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김유신”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풍문이 아닌 ‘팩트(Fact)’로 기록된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함으로써 크건 작건 명실상부한 ‘고대 통일국가 신라’를 완성시킨 건 문무왕(文武王)이다.
세상이 그를 부르던 이름은 김법민(金法敏). 626년에 태어나 681년에 죽었으니, 지상에서 머문 시간은 55년. 신라의 서른 번째 왕으로 군림했던 건 백제가 멸망하고, 아버지 무열왕이 사망한 661년부터 681년까지니 20년이다.
무열왕 뜻 계승 백제 저항 무력화
고구려 함락시켜 삼한일통 완수
나당전쟁 승리 당나라 세력 축출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 탁월
진덕여왕 때는 당나라 사신으로
병부령 맡아 나라 기강 바로잡아
아버지 김춘추·김유신에 필적할
문무왕 김법민 통치 20년 마무리
동쪽 바다에 유골 안치 ‘문무왕릉’
“죽어서도 내 나라 지키는 용으로”
아들 신문왕 지척에 감은사 지어
용이 된 아버지 편안히 쉴 수 있게
◆아버지가 무열왕, 외숙부는 김유신...금수저 중 금수저
그렇다면 역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문헌을 총괄한 ‘두산백과’를 아래 요약한다.
“성은 김(金) 이름 법민(法敏), 시호는 문무(文武)다. ‘삼국유사’엔 문호왕(文虎王)이라고도 기록돼 있다. 무열왕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 ‘삼국유사’엔 왕비는 선품(善品)이라 기록돼 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진덕여왕 때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열왕 집권 후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 660년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공을 세웠다. 무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계승해 백제의 저항운동을 무력화시키고, 668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켜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완수했다. 676년 나당전쟁(羅唐戰爭·신라와 당나라의 싸움)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
문무왕은 ‘태생적’으로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21세기엔 돈이 풍족하고, 권력을 가진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금수저를 물고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2023년 오늘이라면 재벌과 최고위직 공무원의 아들, 딸쯤에 해당되겠다.
허나, 김법민이 태어나며 물고 나온 건 ‘금수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빼어난 능력과 수완으로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임에도 신라 왕에 최초로 오른 김춘추.
엄마의 오빠, 그러니까 외숙부는 신라와 백제, 고구려까지를 통틀어 최고의 무장(武將)이자 용장(勇將)이라 불리던 신라 권력의 핵심 김유신이었다.
허니, 문무왕 김법민은 금수저 따위는 우스운 ‘다이아몬드 수저를 갖추고 태어난 아이’였던 것.
조금은 속된 비유가 될 수 있으나, ‘에이스 카드 2장을 처음부터 쥐고 치는 포커 게임은 이기기보다 지는 게 더 어려운 법’.
부친 김춘추라는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에, 외삼촌 김유신이라는 ‘클로버 에이스 카드’까지 손에 들고 나머지 두 장의 에이스 카드를 모아 ‘삼국통일’이란 과업을 향해 질주했던 문무왕 김법민.
그러나, 문무왕은 타자가 부여한 태생적 행운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퇴폐적인 몇몇 재벌의 아들이나, ‘갑질’을 자신의 권리인 줄 착각하는 몇몇 고위직 공무원의 딸과 문무왕 김법민의 변별점이라 할 수 있다.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을 보면 문무왕이 삼한일통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이라 할 ‘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어떤 결의와 역할을 했는지가 서술되고 있다. 주요 대목을 옮긴다.
“667년에 문무왕은 당 고종의 공식적인 참전 요청이 없었음에도 대규모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이는 평양성 공격에 신라군이 배제되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고구려 영토에 대한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중략) 문무왕은 그동안 준비를 갖춘 대규모 원정군을 출정시켰다. 신라군의 참전으로 고구려군은 압록강 방어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평양성 전투에 승부를 걸었으며, 그 결과 당나라 군대의 압록강 전선 돌파가 가능해졌다…(후략)”
◆문무왕, 선친을 넘어서는 괄목할 업적을 남기다
시인 고운기는 그의 책 ‘인물한국사’를 통해 문무왕의 생애가 어떤 행운과 굴곡으로 이어졌는지를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벌써 아버지(무열왕 김춘추) 이상의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兵部令·신라 군사직의 으뜸 벼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 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문무왕 김법민)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더없이 운이 좋았던 출생 배경에만 안분지족(安分知足) 했다면, 김법민은 ‘그저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죽은 흔하디흔한 왕족 중 하나’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 터.
하지만, 김법민은 달랐다. 왕을 대신해 당나라를 오가며 신라의 국익 실현에 동분서주했고, 아버지 사후에는 백제를 부활시키려는 군대, 거친 기질이 몸에 밴 고구려의 군인들 앞에 목숨을 걸고 모습을 드러냈다.
뿐 아니다. 당시의 초강대국 당나라의 축출이란 고난도의 과제까지 완수한 것. 이로써 실질적 삼국통일(삼한일통)에 마침표를 찍었던 문무왕은 죽음과 마지막에 남긴 말까지 영화적이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는 681년 7월 초하루 세상을 떠난 문무왕의 유조(遺詔·왕의 유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해 영토를 안정시켰고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했다.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므로, 태자(신문왕)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엔 한 무더기의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내가 죽고 10일 뒤 화장(火葬)하면 족하다. 장례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자신의 뜻에 따라 신라의 바다를 지키는 용으로...
신문왕은 위와 같은 말에 더해 “죽으면 왜구로부터 내 나라 백성을 지켜주는 용이 되고 싶으니, 내 뼈를 동쪽 바다에 묻어라”고 한다.
이로써 삼국통일, 또는 삼한일통을 논할 때 무열왕 김춘추와 흥무대왕 김유신에 필적하는 역사적 위상을 가진 문무왕 김법민의 통치 20년은 마무리 된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그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곳은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해변 앞 커다란 바위 가운데다. 이른바 문무왕릉. 신라 왕의 유골이 봉안된 곳이라 해서 속칭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불린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두산백과’의 부연.
“대왕암은 육지에서 200여m 떨어진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해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왕암 주변은 큰 화강암이 둘러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돼 있다. 물길이 난 가운데 공간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됐다.”
그리고 여담 하나.
문무왕은 아버지와 외숙부 복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의 뒤를 이어 신라의 집권자로 등극한 이는 큰아들이었던 신문왕 김정명(金政明·재위 681~692).
신문왕은 아버지의 애국·애민 의지를 계승하겠다는 뜻에서 문무왕릉 지척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고, 용이 된 아버지가 밤이 되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절 아래 커다란 공간까지 만들었다.
아버지는 왕이었고, 외삼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다. 거기에 효자 아들까지 뒀으니 이쯤 되면 “문무왕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행복했던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