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에세이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10_1> 황성공원 (상)
경주를 적신 형산강물이 남쪽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강을 따라 이어진 둔치 산책로를 걷다 보면 수크령과 무성한 갈대숲에 넋을 잃기도 한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물 위를 유영하는 철새나 풀숲에 몸을 숨긴 들짐승과 뜻밖에 마주치기도 한다.
초여름 열기 속 경주를 거닐고 있다. 아스팔트는 뜨겁게 달궈지고, 햇살은 이글거리며 목덜미를 찌른다. 걷지 않고 숨만 쉬어도 땀으로 옷이 젖는다. 후덥한 공기 속을 걷다 ‘황성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보게 된다. 더위 때문인지 반갑다. 왜 하필 ‘황성’일까. 새삼스럽게 이름을 곱씹으며, 이름을 따라 걷는다.
황성공원은 형산강과 북천이 만나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닿는다.
화랑들은 활쏘기와 기마술을 수련하고
귀족의 사냥터로 쓰인 군사와 사교 공간
현재 규모는 약 102만 4천㎡에 이르러
소나무와 맥문동이 초록을 틔우는 봄
여름엔 나무와 꽃, 아이들의 웃음 가득
가을이 되면 나무 잎마다 단풍이 들고
10월에는 역사와 축제의 무대로 변신
숲이 가장 깊어지는 가파른 언덕 위엔
침묵의 기둥처럼 서 있는 김유신 동상이
장군의 생애와 전쟁, 고뇌까지 엿보여
■황성(皇城)이라는 이름
지쳐갈 무렵 숲이 열렸다. 황성공원의 나무들이 한껏 무성해진 채 그늘을 드리운다. 발을 들이는 순간 공기의 질감이 달라진다. 촉촉한 흙내와 시원한 녹음이 가득하다. 언뜻 보아도 오래된 나무들이 한결같은 자세로서 있다. 누구를 위한 그늘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누구나’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니까.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 때, 비로소 그늘의 깊이를 느낀다. ‘쉼’이라는 것을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인 듯싶다.
경주의 옛 도읍, 서라벌은 반월성을 중심으로 산과 물이 교차하는 땅이다. 서쪽에는 선도산이, 동쪽에는 토함산이, 남쪽에는 남산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산들은 경계를 이루고, 물은 그 안에서 감돌았다. 남천과 서천이 서라벌의 심장을 적시고, 북천은 그 위를 감싸 흐르며 도읍의 숨결을 식혔다.
다만 북쪽은 상대적으로 허했다. 천년 고도는 그런 공백을 오래 두지 않았다. 통일신라 시대, 북천 건너 고성숲이 조성되었다. 허한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언덕을 쌓고 나무를 심어 산과 숲을 만든 것이다. 단지 풍수의 보완이 아니라 도시의 균형을 맞추는 일종의 사유(思惟)였다. 신라는 인공 조성된 숲을 북방의 벽으로 삼았다. 바로 지금의 ‘황성공원’이다.
‘황성(皇城)’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황제의 성’ 또는 ‘황제의 도읍’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경주의 ‘황성’은 단순한 나라의 수도 개념과는 다르다. 이 명칭은 조선 후기부터 근대기 사이에 경주의 고성숲 일대를 부르며 정착된 것으로, 본래 이곳이 신라 왕경의 북방 경계에 해당하며 궁성과 왕릉군, 화랑의 훈련장 등 중심 공간을 둘러싸는 방어적·상징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를 ‘황성동’ 또는 ‘고성동’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이후 근대적 행정구역 정비와 함께 ‘황성’이라는 이름이 공원과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황성’은 단순한 지명 그 이상으로, 한때 왕도의 북편을 지키던 나무와 토성, 그리고 기억의 층위가 겹겹이 쌓인 의미 깊은 이름이다.
■황성공원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
원래 분지였던 땅을 풍수지리에 의해 인공적으로 산과 숲을 조성한 것이 고성숲(古城叢) 이다. 현재 규모 약 102만 4천㎡에 이른다.
이 숲은 신라 화랑들의 심신 수련 터이자, 귀족들의 사냥터로도 쓰였다. ‘화랑세기’ 등 역사서에도 화랑들이 고성숲에서 무예 훈련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숲이 단순한 녹지 공원이 아니라 신라 청년들의 기상을 기르는 장(場)이었음을 보여준다. 삼릉이나 남산 못지않게 멋스러운 소나무 숲 아래에서 화랑들은 활쏘기와 기마술을 익혔고, 귀족들은 사냥을 통해 교양을 다졌다. 이는 곧 경주가 단순한 왕도뿐 아니라 전통적 군사와 사교의 공간으로서 기능했음을 말한다.
당시 숲은 성장과 훈련, 의식이 공존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한편 귀족들의 사냥터로 기능하며, 왕실과 고위층의 사교 공간으로도 역할을 했다. 사냥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의례였으며, 숲에서의 사냥터는 권력과 위상을 드러내는 또 다른 무대이기도 했다.
■ 경주 가장자리 숲
경주의 북쪽, 도심의 한 마디를 이루는 자리. 경주시립도서관과 실내체육관을 지나면 울창한 나무숲이 문을 열어젖힌다. 도시 가장자리에 놓인 숲이다.
공원 내부에는 경주예술의전당과 시민도서관이 있다. 아이들이 들락이는 물놀이장이 여름마다 열리고, 공설운동장과 씨름장, 국궁장도 들어서 있다. 체육과 예술, 문학과 교육이 모두 이 숲 안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숲이 도시의 외곽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방식이다.
숲의 진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러난다. 봄이면 소나무숲 사이로 맥문동이 초록색을 틔우고, 여름이면 보랏빛 맥문동꽃 천지가 된다. 나무 그늘 속, 푹푹 찌는 무더위도 숲에서만은 잠시 비껴간다. 바람 한 줄에 잎사귀가 흔들리고, 아이들의 웃음은 숲의 빈틈을 메운다. 나무와 꽃과 흙과 웃음이 한데 뒤섞여 여름날의 숲을 이룬다.
가을이 되면 숲은 조용히 몸을 물들인다.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잎마다 단풍이 들고, 숲길은 발소리마저 부드럽게 받는다. 숲은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누군가의 이름도 묻지 않는다. 그저 한 철을 충실히 살아내며 단풍을 떨궈 자신의 한 생(生)을 덮는다.
10월 초순, 숲은 역사와 축제의 무대가 된다. 경주의 축제 신라문화제가 황성공원 일대에서 열린다. 격년으로 이어지는 축제는 도심 숲을 다시 신라의 시간으로 되돌려놓는다. 문화유적 답사에 지친 이들이, 여행자들이 한나절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가 된다.
■김유신의 기마상을 보았소
황성공원의 숲이 가장 깊어지는 지점,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는 가파른 언덕 위에 하나의 형상이 솟아 있다. 말의 앞다리가 치켜 들렸고, 기수는 단단한 눈매로 북쪽을 응시한다.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다. 황성공원 내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에 놓인 이 동상은, 단지 영웅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넘어선다. 거대한 기단 위, 그 무게는 물리적인 쇠붙이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장군의 생애와 전쟁, 신라의 통일과 그 이면의 고뇌까지 얹혀 있다. 높이도 높이지만, 시선의 방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기마상은 남쪽을 향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1975년, 대통령의 지시에 방향이 바뀌었다. 나라의 기운은 북에서 시작된다는 해석 아래, 북향으로 조형을 틀어 다시 세우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2년 뒤인 1977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북쪽은 승리를 향한 방향이었고, 침입을 막는 결의였다. 북천 너머 도심을 바라보는 김유신 장군의 형상은, 단순히 조형적 수정을 넘어 시대가 요구한 상징의 방향이었다.
왜 하필 이 자리에, 김유신의 기마상을 세웠을까. 숲을 걸으며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김유신은 실존한 무장이었다. 신라의 통일을 이끈 장수였고, 화랑의 귀감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높은 봉우리에 우뚝 세운 것은 단지 전쟁의 영광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 필요했던 건, 천년을 지나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상징이었다.
자연과 도시의 경계 위, 숲과 하늘 사이, 침묵의 기둥처럼 서 있는 김유신의 동상은 지금도 말없이 묻는다. 진짜 높은 것은 어디에 있는가. 힘인가, 믿음인가, 아니면 그 둘을 꿰뚫는 의지인가. 기마상의 눈빛은 오늘도 북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다.
*황성공원 내에 세워진 비(碑)에 대한 이야기는 (하)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