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br/>⑫ 문무왕에겐 ‘아버지·외숙부 콤플렉스’가 없었을까?
출중한 능력에 빼어난 외모, 거기에 정치적 혜안까지 갖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말이 나왔으니 연이어 질문 하나 더.
그렇게 잘난 아버지는 물론, 나라 전체의 군사통솔권을 쥐고 수백 명 고위관료 위에 우뚝 군림한 외숙부까지 가졌다면 어떨까? 이 또한 조카에게 행복의 조건으로만 작용할까?
한적한 평일 오후. 푸른 파도 일렁이는 경주 봉길리 해변에서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다.
661부터 681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문무왕 김법민. 그는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조카다.
재론의 여지없이 좋은 ‘외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신라는 물론 660년 무너진 백제의 땅과 백성들까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선 외숙부의 조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건 각종 서적과 여러 고문헌을 통해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기자를 포한한 몇몇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궁금증을 가지기도 한다. ‘문무왕에게는 열등감이 촉발한 내적 콤플렉스와 갈등이 전혀 없었을까’ 하는 것.
문무왕은 1천342년 전 사망했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 직접 물어볼 방법은 없으니, 그의 내면 풍경은 그저 주관적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비교적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도출해내기 위해 일단 시간을 되돌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연애를 시작했던 시절로 가보자. 아직 문무왕이 태어나 전이다.
김유신은 몰락한 금관가야 출신으로
열등감 극복 위해 ‘혼맥(婚脈)프로젝트’
동생 문희와 김춘추 혼인 면밀히 주도
멸망한 나라 망명객서 왕의 손위 처남
신라 30대 왕 김법민 외숙부로 격상
그 후 김유신·김춘추는 서로에 ‘날개’
당나라와의 협정·백제 병합 도모하며
삼한일통 역사 주춧돌 함께 세워나가
◆김유신, 김춘추라는 우량주(優良株)에 투자하다
‘화랑세기’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맺어지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야기 형태로 실려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잠 속에서 산에 올라 바라보니 서라벌에 홍수가 났다. 불길한 꿈이라 생각한 보희는 그 꿈을 동생 문희에게 비단을 받고 팔아버린다. 열흘 후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蹴鞠·남성들의 공놀이)을 하다가 실수로 김춘추의 옷을 찢어버리게 된다. 김유신의 부탁에 의해 바느질로 김춘추의 옷을 꿰맨 게 문희였다. 이후 김춘추와 문희는 사랑에 빠진다…(후략)”
김유신은 신라가 아닌 몰락한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감의 극복을 위해선 신라 정통 귀족과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는 게 중요했다. ‘혼맥(婚脈) 형성’이 그 방법으로 선택된 듯하다.
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탁월한 외교 협상력과 빼어난 문장을 인정받던 김춘추는 김유신이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찢어진 옷을 수선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춘추와 동생 문희를 만나게 한 건 철저하게 준비된 김유신의 계획이었을 터. ‘화랑세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1년쯤의 시간이 흐른 후 문희가 임신을 했다. 그때 김춘추에겐 이미 부인과 딸이 있던 상황. 문희를 받아들일 수도,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김춘추는 갈등했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건 김유신이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기를 가져 집안을 망신시킨 문희를 태워 죽이겠다며 장작에 불을 붙인 것. 선덕여왕과 산책을 즐기던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김유신의 집으로 뛰어갔고, 문희를 구한 뒤 자신의 집에 들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춘추와 먼저 혼인한 부인이 죽었고, 문 희는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이 된다”는 스토리.
그게 신라시대건 현대건 인간의 통념상 동생을, 그것도 뱃속에 아기를 가진 누이동생을 불에 태우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는 오빠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니, 장작에 불을 붙이고 문희를 겁박한 김유신의 행위는 요즘 말로 하자면 ‘할리우드 액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이, 김춘추. 이래도 내 동생 문희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는 협박성 제스처 말이다.
◆‘삼국사기’가 평가한 문무왕의 외숙부 김유신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봉준호가 연출한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1천400년 전 김유신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은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이 성사됨으로써 절반 이상 성공된 듯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29대 왕이 된다. 김유신은 멸망한 나라의 망명객에서 왕의 손위 처남으로 신분이 격상됐다.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된 동생 문희는 신라의 30대 왕에 오를 태자 김법민(문무왕)을 낳았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오랜 세월 서로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 역할을 했다. 당나라와 협정을 맺고, 백제를 병합하고, 신라 내부의 권력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둘은 부정할 수 없는 동업자 관계로 살았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주춧돌이 그 시절에 놓였다.
생애를 걸고 베팅(Betting)한 김춘추라는 우량주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위치로 폭등했고, 아끼던 여동생은 다음 번 신라 왕 자리를 차지할 젖먹이를 출산한다. 바로 그 ‘젖먹이’ 어린 김법민을 바라보던 김유신은 얼마나 흐뭇했을까?
김유신이 설계한 ‘혼맥 형성 프로젝트’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수익을 가져왔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명성 또한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능력과 행운이 합쳐진 결과였다.
김유신 사후(死後)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장군 김유신’의 높은 위상이 확인된다.
그와 관련된 단국대학교 사학과 전덕재 교수의 논문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을 아래 인용한다.
“김유신열전은 ‘삼국사기’의 열전 10권 가운데 무려 3권이나 차지할 정도로 분량이 많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삼국사기’ 찬자(撰者·책을 쓴 사람)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을 매우 숭앙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김유신열정 말미에 기술한 사론(史論)에서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 그런데 유신과 같은 이는 사람들이 칭송함이 고려시대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사대부가 알아주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조차도 능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김유신을 역사를 빛낸 위대한 위인으로 칭송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인데…(후략)”
◆문무왕의 업적 또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지만…
‘삼국사기’ 속 ‘열전’의 3할을 차지할 만큼 주요한 역사 인물인 김유신에게는 밀리지만, 문무왕 역시 허술하거나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외숙부 김유신과 아버지 무열왕이 닦은 토대 위에서 문무왕 김법민은 빛나는 행보를 보여줬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요약하고 있는 문무왕의 업적은 여타의 신라 왕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 왕조의 어떤 통치자와 비교해도 부끄러울 게 없어 보인다. 이런 설명이다.
“왕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 활동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세력을 제압했고, 666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병합시켰다. 이후 삼국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으려는 당나라의 노골적인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5소경제와 군사조직인 9서당의 단초를 마련해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이처럼 괄목할 만한 삶을 살았음에도, 문무왕에게 드리워진 외숙부 김유신과 부친 김춘추의 그늘은 너무 크고 짙었다. 때론 그 그늘이 안온함이 아닌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다음번 기사에선 김유신과 함께 문무왕에게 콤플렉스를 안겼을 수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무열왕의 삶’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