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삼국통일 판을 짠 명군 - 외세에 영토 넘긴 군주

홍성식 기자 · 이용선 기자
등록일 2023-07-11 18:02 게재일 2023-07-12 16면
스크랩버튼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br/>④ 평가 엇갈리는 신라의 실력자, 백제에게 딸 잃은 아픔도
김춘추가 묻힌 무열왕릉.

‘신라 왕조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탓에 실제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후진적 상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성립 이후 그와 같은 지리적 불리함에서 비롯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꾸준히 기울인 결과 선진의 고구려와 백제를 따라잡고 마침내 삼국 통합의 주역으로 부상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후략)’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1’에선 위와 같은 문장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지리적 여건 등으로 인해 후진적 상태에서 출발한 신라가 먼저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발전하던 백제와 고구려를 누르고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구체적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효율적인 국민통합에 힘을 보탠 ‘불교’라는 이념, 엘리트 청년들의 애국심을 이끌어낸 ‘화랑’이라는 조직, 그리고 탁월한 두 인물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603~661).

이 3가지를 ‘7세기 신라의 핵심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별다른 이론(異論)이 없을 것 같다.

거론된 두 인물 중 김춘추에 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무위키’를 인용한다.

“무열왕은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임기응변을 통해 고립무원이었던 신라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삼국통일의 판을 짠 명군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당나라와의 동맹으로 말미암아 대동강 이북의 땅을 외세에 넘긴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뉘는 것.”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정무감각은 후대에까지 호평

‘7세기 동아시아 실력자’ 김유신과 혼맥으로 결속

당나라 등 여러나라 오가며 외교협상력 ‘십분발휘’

백제 장군 윤충에 사위와 딸 도륙당한 고통 겪기도

◆혼인으로 맺어진 김춘추의 ‘지략’과 김유신의 ‘무력’

하지만,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김춘추 즉, 무열왕에게 야박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김춘추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긍정과 부정의) 평가와는 별개로 김춘추는 신라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 그 능력이 출중한 편에 속한 명군이며, 탁월한 외교와 정무 감각을 바탕으로 신라를 양면전선의 늪에서 구해냈다. 전통사회에서는 김춘추를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위인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에 대한 호평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존재했다…(후략)”

고구려와 당나라, 거기에 일본까지 오가며 탁월한 말솜씨와 친화력으로 칼과 창을 동원한 전투 없이도 전투 이상의 성과를 내며 국가적 이익을 얻어온 김춘추. 그는 결혼으로 맺어진 김유신과의 ‘특이한 관계’로도 유명하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김춘추의 아내는 문명왕후(문희). 문희는 김유신의 동생이다.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관계는 나중에 더 확장된다. 김춘추와 문명왕후의 딸인 지소공주가 김유신의 아내가 되는 것.

그러니,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제부 관계인 동시에 장인-사위 관계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동생인 동시에 장모가 된 것.

지금의 윤리의식으로 보자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며 놀라겠지만, 실제로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근친혼(近親婚·가까운 혈족끼리의 결혼)을 하는 왕족과 귀족은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적지 않았다.

의학계는 동유럽의 최고 권력자 가문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병인 ‘주걱턱’이 바로 이 근친혼이 낳은 비극이라고 말한다.

어쨌건, 김춘추는 신라의 무력을 ‘거의 독점한’ 김유신과 끊기 힘든 거미줄 같은 혼맥으로 결속되면서 자신의 지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확장시켰음이 분명해 보인다.

김춘추는 탁월한 외교협상가였다. 신하들과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무열왕 김춘추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김춘추는 탁월한 외교협상가였다. 신하들과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무열왕 김춘추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당나라와 일본 오가며 탁월한 외교력 인정받은 김춘추

‘초한지’의 항우가 오추마를 얻은 듯, ‘삼국지’의 관우가 적토마를 얻은 듯, ‘7세기 동아시아의 실력자’ 김유신을 등에 업은 김춘추는 여러 나라를 오가며 자신의 정치력과 외교협상력을 발휘한다. 이른바 추후에 왕이 될 재목으로서 ‘존재 증명’에 성공한 것이다.

아래 ‘삼국사기’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의 고문헌에 기록된 김춘추의 외교 관련 에피소드를 간략하게 요약한다.

 

“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일본)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돼 있다.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됐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됐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해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듬해인 648년 12월 김춘추는 당나라에 들어갔고, 당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했다. 당 태종은 높은 벼슬을 내렸고, 김춘추는 백제를 공격할 군대의 파병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귀국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성대한 송별연까지 열어줬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다가서던 김춘추는 654년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의 스물아홉 번째 왕이 된다. ‘무열왕(武烈王)’이다.

무열왕 김춘추의 집권 이후에도 백제·고구려와의 크고 작은 전투는 계속됐다. 백제의 멸망이 6년,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되기까지는 14년이 남아있던 때였으니.

그렇게 군사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임에도 무열왕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삼국유사’엔 김춘추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膳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이란 것인데, 이를 풀어 쓰면 “왕은 하루에 쌀 3말과 장끼 9마리를 먹었다. 백제를 멸한 후엔 점심을 거르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하루 식사는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가 된다.

인간이 ‘육식 코끼리’가 아닌 이상 24시간 동안 이처럼 많은 음식을 먹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 문장은 상징이나 은유로 읽어야 이해가 가능할 터.

왕의 밥상은 왕 하나만 먹기 위해 차려지지 않는다. 왕이 끼니를 챙겨 먹고 남은 음식을 그를 수발하는 수많은 이들이 나눠 먹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그러니, ‘삼국유사’의 과장된 서술은 매일 같이 왕의 밥상에 넉넉한 음식을 올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무열왕 통치 시절 신라엔 물산(物産)이 풍족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국민의 배를 곯지 않게 만드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가장 주요한 책무 중 하나니까.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의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의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딸과 사위가 같은 날 사망한 가슴 아픈 사건도 겪어

젊은 시절엔 총명함을 국가가 공인한 외교협상가였고,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 출신으론 처음으로 신라의 왕위에 올랐으며, 김유신이란 든든한 후원자를 곁에 두고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을 굶기지 않았던 무열왕 김춘추.

하지만, 그의 삶 역시 내내 빛나는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생의 우여곡절이란 역사에 뚜렷하게 이름이 기록된 사람에게도 필시 있기 마련. 김춘추의 삶에 드리운 가장 서러운 음영(陰影)은 자신보다 앞선 딸과 사위의 죽음이다.

642년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은 김춘추의 ‘금쪽같은 내 새끼’와 그녀의 남편까지 도륙한다. ‘삼국사기’에 그 사건이 언급되고 있다. 다음과 같다.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古陁炤) 공주의 남편 김품석은 대야성 군주(大耶城 軍主)였다.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엔 김품석에게 불만을 가진 검일(黔日)이 있었고, 그는 백제군과 내통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김품석이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했고, 숨어 있던 백제의 복병(伏兵)이 신라군을 전멸시킨다. 윤충은 항복한 김품석과 고타소 공주를 죽인 후 목을 베어 사비성(四沘城·당시 백제의 왕이 있던 곳)으로 보낸다…(후략)”

고타소 공주는 김춘추의 딸이며 김유신의 조카였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 최고위 실력자 2명의 ‘사적인 원수’까지 된다.

그로부터 18년 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로 진격한다. 왕이 된 김춘추와 상대등(上大等·신라의 으뜸 벼슬) 김유신이 선두에 섰다. 660년 신라의 백제 침공 배경엔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함께 ‘딸을 죽인 원수를 갚겠다’는 김춘추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또한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경주의 재발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