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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왕 지렁이가 되었다

등록일 2023-08-29 18:29 게재일 2023-08-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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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재발견 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br/>⑪  엽편소설
엽편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경주 봉길해수욕장의 문무왕릉 위로 용 한 마리가 날아가는 장면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는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축출한 문무왕 김법민은 죽어서 용이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바로 그 설화에서 소재를 얻은 김강 씨가 짤막한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본지로 보내왔다. 딱딱한 연재기사를 잠시 쉬어간다는 차원에서 이를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 수상자인 김강 씨는 작품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 등을 출간한 소설가다. <편집자 주>

 

#1

구릉과 계곡의 휘어진 길을 벗어나자 시야가 탁 트였다. 맑은 날이면 수평선이 보인다 했는데. 흐린 하늘이 이어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저기쯤이겠지. 무채색 건물들의 낮은 지붕 너머 흐린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건물과 버스 사이 중간 즈음 짙은 회색 구름 덩어리가 보였다. 저 아래는 비가 오고 있으려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으로 빗방울이 부딪혔다. 한동안 차창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던 빗물이 아래로 방향을 틀었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막 베어낸 보리 짚단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밭을 옆으로 두고 섰다.

“비가 오네.”

용대가 우산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우산 챙겨 나오라고 했잖아. 내가.”

용대는 한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손으로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우산대를 잡아끄는 용대를 따라 걸었다.

“비가 안 올 줄 알았지. 그리고 준비성 좋은 네가 있잖아.”

용대는 씩 웃었다.

“하긴 비가 온 건 아니지. 우리가 들어간 거지.”

“뭐라고?”

“아니다. 저기다. 가자.”

 

#2

분명 용이었다.

취침 옵션, 세 시간으로 해두고 잠이 들었는데 에어컨이 꺼지자 땀이 흘렀고 몸이 찌뿌둥해진 탓에 나는 일어나 앉았다. 베개 위에 덮어두었던 수건을 들어 이마와 목덜미를 닦았다. 에어컨을 다시 켜야겠다, 마음먹은 나는 더듬어 리모컨을 쥐었지만 어두운 탓에 버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켤까? 생각했지만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아내는 중간에 잠이 깨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할 수 없이 핸드폰의 배경 화면 빛으로 어찌 해보려던 그때, 큰길 쪽으로 난 커튼으로 그림자가 비쳤다.

굵고 긴, 나선으로 꿈틀거리는 무엇. 창의 너비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곧, 침대 머리맡 커튼에도 그림자가 나타났다. 명확하게 뿔인지는 알 수 없으나-그림자였으니까-, 크고 뾰족한, 위로 솟구친 두 개의 무엇과 그것들 앞으로 길게 내민 주둥이-그림자였지만 직감적으로 무언가의 주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가 커튼 밖에서 아래위로,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과 리모컨을 양 손에 쥔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두 개의 그림자를 볼 뿐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이마를 거쳐 뺨으로 흘러내리던 땀방울도 제자리에 멈춘 듯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땀방울도 놀라 멈췄는데 오직 심장만이 거칠게 뛰었다. 멍했다. 눈썹위에 멈췄던 땀방울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아래로 내려왔다. 땀이 눈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휴, 어설프게 숨을 내쉰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을 살피려 커튼을 잡으려던 순간, 그것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그리고 우아하게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다시 멈칫 했고 그것은 큰길로 난 창에서 침대 머리맡의 창을 거쳐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 커튼 틈으로 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환했고 하늘은 검었다. 여전히 깊은 밤이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상상하다, 아내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다, 다시 잠을 자야할지 어떨지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고 한동안 창 밖에 머물다 움직였고 사라졌다. 그러기를 두 번, 그것은 세 번 우리 집을 휘돌고 갔다. 세 번째 돌아나갔을 때 나는 그것이 용이라 확신했다.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에어컨을 다시 켠 것 같기도 하고 베개의 수건을 갈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출근 준비 할 시간 아니냐며 아내가 몸을 흔들었을 때 나는 놀란 듯 허억,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하려했다. 지난밤 우리 집에 용이 왔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 어젯밤에, 새벽에 말이야. 그러니까…….

정리를 해서 깔끔하게 이야기해야겠다, 잠시 뜸을 들이던 중이었다.

새벽에 뭐? 새벽에 일어나서 핸드폰 좀 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잠을 설치는 거잖아. 아휴. 애나 어른이나. 나 바빠. 애들 밥 차려야해.

아내는 방을 나갔고 나는 열린 방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3

마주보고 선 탑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천 년을 마주보았을 그들이었다. 백 년마다 한 마디씩 나누었을까? 아니면 천 년 동안 서로 바라보기만 했을까? 이상한 상상을 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으려다 바지가 젖을 듯해 그냥 서서 대종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짙은 회색 구름은 물길을 따라 바다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쳤다.

“용이 돌아가는 모양이네.”

용대가 무슨 말이냐며 물었고 나는 지난밤 용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꿈에 용이 나온 것하고 여기하고 무슨 관곈데?”

지난밤의 일을 용대에게 말한 직후였다. 용대는 주저하지 않고 꿈이라 했다.

“꿈이 아니라니까.”

“꿈이 아니면? 그 말을 믿으라고? 그리고 나는 왜 데려 온 거냐? 내 이름이 용대라서?”

“저기 저 쪽 바닷가에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잖아. 동해를 지키기 위해 용이 되었다고 하잖아. 그 용이 이곳 감은사 아래까지 왔다 갔다 했다지, 아마. 지금 보이는 저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왔다 돌아가고는 했다네. 간밤에 용이 우리 집을 세 번 돌고 사라지는데 이상하게 문무대왕이 생각나더라고.”

용꿈을 꾸었는데 로또를 사야지, 수중릉을 찾아오는 것이 정상이냐, 로또를 사고 당첨이 되어서 친구에게 크게 한 몫 떼어주는 게 정상인 것 아니냐며 용대는 비아냥거리다 투덜대다를 반복했다.

“정상이 아니지. 그런데 와보고 싶더라니까. 로또야 돌아가는 길에 사면 되는 거고. 근데 웃기지 않냐? 그 시절 사람들은 용, 하면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비를 내리고 또 뭐냐 나쁜 놈들을 벌주고,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우리는 용, 하면 로또부터 생각하지. 재밌네, 재밌다니까. 암튼 이제 내려가자. 여긴 다 보았으니. 대왕님 뵈러 가야지. 어젯밤에 왜 우리 집에 왜 오셨는지 물어도 보고.”

수중릉으로 가는 동안 용대는 자기 이름이 용대라서 같이 가자 한 것이냐 다시 물었고 나는 그런 점이 조금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대답했다.

 

#4

바다에 다다른 회색 구름은 이내 흩어졌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사장(沙場)에서 바다로 뻗어나간 수중릉 돌무더기위로 갈매기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온 김에 사진 한 장 찍어주겠다며 용대는 나를 세워두고 몇 걸음 물러났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던 용대가 갑자기 웃었다.

“왜?”

“이게, 화면으로 보니까, 꼭 주먹감자 같단 말이지. 저쪽 건너편 섬나라를 보며 내민 주먹감자.”

“그러네, 맞네. 딱 주먹감자네.”

 

#5

우리는 오래 있지 못했다. 근무시간 내 사무실로 복귀해야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며 사무실에서 나왔고 거래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왔었다. 나는 거래처로 가는 내내 주먹감자를 내밀고 있는 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픽픽 웃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 했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담당자를 만나 이미 합의했던 사항과 지나간 업무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담당자는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소소한 안부를 묻고 날씨 이야기를 하다 돌아왔다.

직장으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용대가 물었다.

“그래서 수중릉에 가니 용이 무슨 계시를 주더나?”

소설가 김강.
소설가 김강.

나는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간밤의 흥분, 수중릉까지 찾아가며 가졌던 기대는 어느새 사라지고 지난밤의 용이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설픈 잠 속의 꿈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르겠다. 그게 용이었는지, 이무기였는지, 왕 지렁이였는지.”

“네가 너무 거창한 생각을 하니 그렇지. 자, 받아라, 오백 원. 여기 둘게. 그리고 저기 저 앞에 편의점에 좀 세워라. 살게 있다.”

용대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컵홀더에 넣으며 말했다.

“이게 뭔데?”

“일단 세우라니까.”

나는 차를 세웠고 용대는 급하게 문을 연 뒤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 꿈 내가 샀다. 복권 사러 간다. 당첨되면 좀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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