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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왕을 살린 편지와 마을을 살린 물길

■소란을 품은 정적의 연못 한여름이 깊숙이 내려앉은 연못이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그러나 고요함 아래, 물풀은 사방으로 뻗고 연잎은 서로의 몸을 밀치며 자리를 넓힌다. 나무는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바람은 유영하듯 잘도 지난다. 아무도 없으니 고요하고, 아무도 없기에 많은 생명은 제 뜻대로 자란다. 고요하다는 건 멈춤이 아니라, 소리 없는 확장이 된다. 연못 둑을 따라 뿌리내린 나무는 제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운 채 기세를 세운다. 한쪽으로 기운 듯하지만 단단하고, 굽은 등줄기엔 시간이 층층이 내려앉아 물기 어린 흙을 힘껏 끌어당긴다. 매미는 고요를 뚫고 터지듯 운다. 서출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울음을 받아낸다. 숨이 막힐 지경인 한낮의 열기 속에, 연못은 한치 흔들림 없이 가라앉아 있다. 수면은 팽팽한 긴장을 머금었다 풀어지며 하늘을 담는다. 연못 물은 고인 듯 살아 있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고요가 오히려 연못을 더 넓게 보이게 한다. 소란한 매미도, 바람의 숨결도 물속에 스며들 뿐, 연못은 가만가만 모든 것을 품는다. 나보다 먼저 바람이 다녀간 흔적이 연잎 위에 남는다. 잎들은 가볍게 흔들리며 그늘과 빛 사이를 나누고, 틈마다 빛은 제 몸을 풀어 번진다. 연못 가장자리에 물풀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수면 아래에 몸을 숨긴 물고기들이 미세한 흔적을 남긴다. 개구리 한 마리가 놀란 듯 움찔하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럴 때마다 연못은 가볍게 숨을 쉰다. 부레옥잠과 연꽃은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저들만의 질서를 잘 이루어 사는 듯하다. 신라 소지왕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동남산 자락 완만한 기슭의 서출지 낮은 터에 남산 계곡서 흘러든 물 고여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알려져 배롱나무•소나무 등이 주변을 감싸고 안쪽에는 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 동쪽에 자리잡은 정자 이요당과 함께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 ■글이 나온 연못 서출지 서출지(書出池)다. 경주 남산동, 동남산 자락의 완만한 기슭에 자리 잡은 연못이다. 동서로 누운 자그마한 연못은 주변에 비해 터가 낮아 물이 모이기 좋은 위치다. 남산 계곡에서 흘러든 물이 고이는 곳이니, 예로부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알려졌다. 배롱나무와 소나무, 잡목들이 조밀하게 연못을 감싸고, 아래로는 수로가 이어져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다. 연못 안쪽에는 붓꽃, 부레옥잠과 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며, 둑을 따라 연못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동쪽에는 이요당이 있어 연못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이 가만가만한 공간은 남산 품 안에서 사계절 내내 다른 표정을 띠며 숨을 쉬는 공간이 된다. 8월 한낮의 햇살이 살갗을 파고든다. 연잎은 땡볕을 받아내며 얇은 그림자를 품는다. 물풀은 제각각의 자리에 번져 있고, 그 사이로 연꽃 한 송이가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수면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물결 위엔 오래된 전설이 한 겹 얹힌 듯 연꽃이 나를 부른다. 서출지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담고 태어난 연못이다. ‘書出池(서출지)’, 한자를 풀어 보면 ‘편지가 나온 연못’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 제2, 소지왕조(炤知王條)에는 서출지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월 보름, 소지왕(신라 제21대 왕)이 행차를 나섰다. 남산 자락, 양피촌 들녘을 지나던 왕의 수레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뒤를 따라 쥐 한 마리도 나타났다. 놀랍게도 쥐가 말을 했다. “저 까마귀를 따라가십시오.” 기이한 기운을 느낀 왕은 장수를 보내 까마귀를 쫓게 했다. 까마귀는 남산 남쪽, 못 가로 장수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만 까마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장수가 아쉬움에 못 가장자리에 멈춰 선 그때, 물 한가운데서 거칠고 푸른 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이 글을 반드시 왕께 전하시오.” 장수에게 봉투를 건네고 노인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장수는 왕에게 봉투를 전했다. 왕은 봉투를 펼쳤다. “이 봉투를 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왕이 무슨 뜻인지 몰라 하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말했다. “두 사람은 백성이옵고, 한 사람은 왕이시옵니다. 부디 열어보소서.” 왕이 봉투를 열자 단 세 글자가 쓰인 편지가 있었다. “射琴匣(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라.” 왕은 대궐로 돌아와 왕비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엔 작은 거문고 상자가 있었다. 왕이 활을 들어 상자를 향해 시위를 당기자 왕비가 말렸다. ‘뚝’, 활에 맞은 나무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났다. 상자 안에 승려가 죽어 있었다. 왕비와 함께 반역을 꾀했던 승려였다. 왕은 죽음을 면했고, 왕비는 곧 처형되었다. 글이 물에서 나왔다 하여 이 연못은 ‘書出池(서출지)’라 불리게 되었다. 정월 대보름날 소지왕을 살려준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이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경주 지역에서도 정월 대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 찰밥을 묻어두는 ‘까마귀 밥주자’라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불교 공인 이전, 토착신앙과 새로운 사상의 충돌의 암시가 이 연못에 서린 까닭일까. 까마귀와 쥐는 전통 신앙의 화신처럼 등장했고, 풀 옷 입은 노인은 미래를 예언하는 매개자였을 것이다. 노인의 기이함 속에서 생명은 구원되고 왕권은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신라사의 균열을 보여주는 듯하다. 연못 가장자리 둑을 천천히 걷는다. 발밑엔 잔돌이 깔려 있고, 풀잎은 바람 따라 낮게 고개를 젖힌다. 한낮의 햇살이 연잎 위로 내려앉고, 수면은 고요하다 못해 멈춘 듯하다. 그 물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검은 그림자가 연못을 가로지른다. 문득, 풀 옷을 입은 노인이 봉투를 내밀고,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가 누구였는지, 왜 하필 왕에게 글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연못엔 여전히 노인의 신비스러운 기척이 남아 있는 듯하다. 잔잔한 수면 아래, 전설은 마치 오래된 유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배롱나무 꽃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물 위로 떨어진다. 그 붉은 조각이 천천히 돌며 퍼져나간다. 까마귀와 쥐는 신이 보낸 전령이었을까. 왕비와 승려의 음모를 막은 글귀는 정말 이 물속에서 떠올랐던 걸까. 산책 끝에 다시 연못을 바라본다. 뜨거운 여름빛 아래, 서출지는 여전히 고요하다. 오래된 이야기처럼 아무도 없는 연못엔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이적의 선행이 깃든 물 위의 정자 이요당 이요당은 연못 끝자락 물 위에 있다. 물과 나무 사이, 빛과 바람이 스쳐 가는 자리에 마루를 얹고 기와를 이고 앉아 있다. 유연한 지붕, 아름다운 곡선에 얹힌 시간을 가늠해 본다는 건 무의미한 일일 테다. 모든 곡선이 부드럽고, 모든 직선이 오래되어 고풍스럽다. 낮은 마루, 묵은 기둥, 모든 것이 서출지에 반영되어 한껏 품격 있는 아름다움을 더한다. 건물은 물 위에 올려져 있고, 처마는 연못을 향해 열려 있다. 수면 위를 따라 흐르는 바람이 마루를 통과하고, 연잎의 흔들림은 건물 그림자와 맞닿는다. 이요당은 물과 함께 숨 쉬는 살아있는 집이다. 이요당(二樂堂)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조선 현종 5년(1664년)에 임적(任適, 1612~1672)이 지은 정자다. 서출지 연못가에 돌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당초에는 3칸 규모였으나 이후 다섯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ㄱ자 모양을 띠게 되었다. 남산 능선을 등진 정자는 서출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어 연못을 훤히 내다보는 구조다. 이요당이라는 이름은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비롯되었다.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긴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 자연 속에서 벗처럼 지내는 선비의 삶을 담아낸다. 정자는 격식을 갖추되 화려하지 않다. 기둥은 차분히 아래로 향하고, 처마 선은 남쪽으로 부드럽게 그어진다. 마루 아래로는 연못의 기운이 스며들고, 그 기운은 다시 처마로 오른다. 임적은 남산 아래 양피촌에 살던 선비였다. 가뭄이 극심할 때, 땅속 깊은 물줄기를 찾아내어 자신의 마을은 물론, 이웃 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살폈다. 임적은 평소에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의복과 식량을 나누었다 전한다. 그의 덕망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이요당은 그가 자연을 벗 삼아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던 자리다. 이요당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서출지의 전설을 내려다보는 자리이자, 삶의 물줄기를 함께 나누던 인물의 정신이 머문 공간이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면, 연못의 수면에 배롱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계절마다 연꽃이 피고 진다. 기와지붕 아래 남긴 선인의 삶은 가만가만하지만 분명한 울림으로 남는다. 이요당 건너편, 남쪽 언덕에 그의 아우 임극(任極)이 지은 산수당(山水堂)이 자리하고 있다고는 하나 오늘은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두 형제가 나란히 남산 자락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삶은 오늘날까지 연못을 거닐며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정자는 시간이 흘러도 기울지 않고, 정자에 깃든 선행과 겸허함은 여전히 바람결에 실려 전해진다. 가만가만 걷기 좋은 연못이다. 서출지와 이요당은 숨겨둔 마음을 꺼내보기에 좋은 자리다. 나무 그림자에 들고, 물풀 사이를 스치고 오는 바람에 젖다 보면, 어느새 잊고 지낸 누군가의 얼굴과 그리움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물풀 옷을 입은 선인이 전하듯, 마음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연서 한 장이 나를 향해 조용히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2025-08-27

석굴암, 제국의 착각을 딛고 뻗어가는 우리 문화유산

■ ‘신라로 돌아왔다’는 그들의 착각 일제는 유독 신라 문화유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석굴암, 불국사, 금관총 등은 집착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에게 신라의 유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정복의 증거였고, 제국의 조선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과시할 수단이었다. 신라를 조선과 분리하여 특별한 문명으로 포장했다. 조선은 무능한 나라였고, 신라는 자신들의 옛 속국이라 믿으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가 바로 그들이 내세운 허상의 출발이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고구려와 백제까지 복속시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일본 고대사 속 가장 중요한 정복 신화였다. 메이지 정부는 신공황후 삼한정벌설을 국가 역사로 편입했고, 교과서와 지폐, 그림과 엽서에 반복해 새겼다. 신공황후의 후예라 자부하던 일본은 조선을 ‘잃었던 고토(古土)’라 칭하며 환호했다. 그들의 신화는 허구였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에도 신공황후는 등장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설과 마찬가지로 날조된 정복담이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이 신화를 철석같이 믿었다. 역사를 도구 삼아 침략을 합리화하며, 식민교육에 깊이 새겨 넣었다. 그들에게 경주는 허위의 신화를 구현할 무대였다. 대한제국 말, 통일신라의 왕경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초라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폐허를 보며 감격했다.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는 경주를 보고 외쳤다. “경주여, 경주여! 나는 우리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신라를 일본의 옛 땅으로 착각했고, 제국의 기원으로 떠받들었다. 신라는 그들에게 과거의 속국이었고, 조선 병합은 과거의 회복이라 믿었다. 환상은 그렇게 확신으로, 확신은 침략으로 이어졌다. 허구의 신화 믿고 역사 왜곡한 일제 신라를 식민 지배, 정당화 수단으로 불국사·석굴암 등 문화유산에 집착 1915년 전후 경주의 새 명소로 각광 일제가 덧씌운 콘크리트 제거 작업 전통 목조 전각 건립 등 석굴암 복원 ■석굴암, 경성으로 이송하라 석굴암은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불국사 인근 사람들은 석굴암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석굴은 인근 사람들에게 이미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마치 자신들이 찾아낸 것처럼 ‘발견’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907년 무렵, ‘토함산 동쪽 사면에 커다란 석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우체부 김 씨가 우편을 배달하던 중 범곡 근처에서 무너진 천장을 목격하고 전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우체국장에게 석굴 안에 흙이 가득 차 있고, 돌부처들이 가득 묻혀 있다는 말을 전했다.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 등 일본인 관리와 사진사, 문화재 협잡꾼들이 뒤늦게 현장을 답사한 뒤 확산된 것뿐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존속하던 불전은, 그렇게 입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1909년,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제2대 조선통감)가 경주를 방문했다. 그는 경주의 고적을 둘러본 뒤 석굴암으로 향했다. 당시 의병 활동으로 나라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경성 최고 권력이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다. 석굴암은 그들에게 그만큼 중요했다. 소네는 석굴암을 경성으로 옮기고자 했다. 경상도 관찰사에게 해체와 이송에 필요한 예산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석굴암은 그에게 탐욕의 대상이자 대단한 전리품이었다. 그는 땅속에 묻혀 있던 대리석 소탑을 가져갔다. 뒤이어 문화재 전문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경주로 파견되었다. 그는 석굴암을 둘러보고 ‘동양에서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라 평했다. 그의 평가는 제국의 확신을 더했다. 기무라 시즈오는 석굴불을 경성으로 옮기라는 소네 통감의 명령을 받고 고민했다. 그는 이송비 계산서를 끝내 올리지 않았다. 경술국치가 다가오고 정세는 복잡했다. 경성 이송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현지 일본인 관리들의 소극적 태도도 작용했다. 조선을 병합한 후에는 서두를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석굴암은 토함산에 남게 되었다. 석굴암의 존재는 제국에도 알려졌다. 일제는 석굴암을 조선에서 발견한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여겼다. 수백 개의 석재를 조립해 만든 인공 석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석굴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경주로 온 사람들 1912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석굴암 방문 이후, 석굴은 더 이상 조용한 산속의 불전이 아니었다. 수리를 거친 뒤 점차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1차 수리 공사가 마무리된 1915년을 기점으로 경주는 새로운 여행지로 떠올랐다. 서울과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온 뒤, 자동차로 갈아타고 경주로 향했다. 불국사까지는 차로 이동했지만, 석굴암은 여전히 토함산의 산길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불편함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1920년대 들어 수학여행단의 발길도 이어졌다. 울산의 불교소년단, 경주의 계남학교, 서울의 보성고보까지 다양한 곳에서 학생들이 경주를 찾았다. 이들은 하루 동안 불국사와 석굴암을 참관하고, 절에서 숙박하거나 고물진열관을 둘러보며 일정을 마쳤다. 석굴암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배움의 현장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일제의 관광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국은 석굴암을 조선 병합의 상징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석굴은 사진엽서에 담아 문화정책의 선전물로 기능했다. 그러나 경주로 온 조선인의 걸음에는 조용한 저항이 담겨 있었다. 조선 선각자들은 그 흐름을 이용해 학생들에게 조선의 정신을 전하고자 했다. 석굴암은 우리 조상이 남긴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나라를 잃은 시대에도 조국의 자취가 뚜렷한 곳에 학생들을 데려가 깨우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선조의 숨결을 직접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언의 교육이었고, 말 없는 위로였다. 비록 외세의 감시 아래 이루어진 여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깊고 분명했다. 경주는 우리에게는 민족의 뿌리가 살아 있는 성지였다.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신과 예술을 새기려는 선각자들의 마음이 석굴암을 지켜냈다. ■우리 손으로 되살려낸 문화유산 1960년대, 석굴암 복원은 우리 손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일제가 훼손한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백 년의 상처를 지우는 일은 고되고 지난했다. 일제가 덧씌운 콘크리트를 걷고, 내부의 숨결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신중했다. 본존불 머리 위에 그들이 새겨 놓은 ‘일본(日本)’을 지웠다. 훼손이 심했던 만큼 복구는 더뎠다. 곰팡이와 석태는 본존불의 어깨를 타고 자랐고, 구조는 뒤섞인 채 회복이 어려웠다. 첫 번째 복원은 전실 공간에 전통 목조전각을 짓는 일이었다. 법당의 격이 다시 세워지고, 조각상들은 비와 눈, 바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다. 침묵 속의 불사는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았다. 두 번째는 콘크리트 돔 문제였다. 조각상과 얽힌 구조물은 쉽게 뜯을 수 없었다. 대신 그 위에 또 하나의 돔을 씌웠다. 시멘트 독성의 침투를 막기 위한,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선택이었다. 세 번째는 진입로 양쪽의 시멘트 옹벽 철거였다. 흉물 같은 콘크리트 제방이 사라지고, 석굴암은 비로소 법당의 모습을 되찾았다. 기이했던 전경은 사라지고, 신라의 숨결이 되살아났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팔부신중의 완성이다. 일제는 여섯 상만을 세웠고, 나머지 둘은 진입로 옹벽에 비틀려 놓았다. 아수라와 금시조는 오랜 세월 동떨어져 고립되어 있었다. 이 둘은 우리의 기술로 제자리를 되찾았다. 일렬로 늘어선 신중의 행렬에 합류했고, 전실 공간의 구성은 균형을 회복했다. 조화와 위엄,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야차 상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공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존재였다. 장마와 폭설, 폭염과 한파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상처 위에 복원의 손길이 닿았다. 신중상의 재배치와 전각의 건립은 단순한 보수가 아니었다. 문화유산을 바로 세우고 민족의 정신을 되찾는 일이었다. 우리는 침탈된 문화유산을 되살려, 박제된 전리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전으로 되돌렸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존엄과 자긍심의 선언이었다. 비가 그쳤다. 전각을 빠져나오니, 100년을 훌쩍 돌아 나온 듯 눈앞이 사뭇 낯설다. 어디를 떠돌다 온 것인가. 전각 위 빗방울에 씻긴 잔디가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난다. 둥근 형상은 마치 위대한 것을 꼭꼭 품고 있는 왕릉 같다. 음지를 덮은 이끼처럼 고요한 산기슭, 물기 어린 공기 속을 가만가만 걷는다. 우리 조상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 그 안에 새겨진 사유가 불쑥 솟아 마음 한구석을 울린다. 오랜 굴곡과 상처를 딛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켜낸 시간이 위대하게 다가온다. 함께 걷는 외국인 소녀가 조용히 돔을 올려다본다. 이국의 낯선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눈빛 가득 경외가 스며 있는 듯하다. 한 인류의 유산을 마주한 이방인의 떨림과 놀라움은 어떤 것일까. 젖은 숲길에 접어들 무렵, 그녀의 감탄이 가만가만 미소로 번진다. “Oh my gosh. Korean cultural heritage, Seokguram, so magnificent and great!” (맙소사, 한국의 문화유산 석굴암, 정말 장엄하고 위대해!) 그녀의 눈빛 속에서, 나는 우리의 것을 다시 본다. 내가 가진 것이 곧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임을, 이국 소녀의 눈빛에서 비로소 실감한다.

2025-08-20

석굴암, 제국은 어떻게 전리품으로 삼았나

■ 성전을 향하여 석굴암통일대종 전각은 물먹은 나무처럼 묵직하게 젖었다. 사방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운무가 피어 산등선을 기어오른다. 불국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짙은 안개가 혼령처럼 밀려와 몸을 묶고 시야를 가린다. 눅눅한 공기 사이로 사람과 건물이 사라졌다 보이곤 했다. 계단을 오르고 길을 따라 걷는다. 돌계단을 오르던 중 앞서 걷는 소녀를 보았다. 각자 혼자인 우리는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 낯설었지만 낯섦이 마냥 불편하지는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금세 길동무가 된다. 토함산 기슭, 나무 아래 석조유물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정제되지 못한 채 흙바닥에 놓인 석물은 장맛비에 젖어 눅눅한 기운을 한껏 머금었다. 감실벽석, 감실천정석, 받침석, 석상받침대,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들까지, 빗방울은 가만히 표면을 적신다. 푸른 이끼가 낀 단면엔 연꽃무늬 조각과 아치형 구조, 미완의 기둥, 얕게 새겨진 음각의 곡선이 드러나 있다. 표지판엔 쓰인 ‘용도불명’의 글자 앞에 서자 시간의 결이 혼란스러워지는 듯하다. 소녀는 조심스레 석물 사이로 들어가 돌 하나하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를 따라 석조의 결을 오래 들여다본다. 산은 잠잠했다. 소녀도 나도 말이 없었다. 미처 맞물리지 못한 돌들의 옛날을 떠올리는 것처럼. 토함산 기슭 운무에 잠긴 통일대종 석굴암 산길 따라 놓인 석조유물들 유리벽 너머 정좌한 석불의 웅장함 돌기둥의 미세한 문양·솟은 천개석 염불하는 스님 등 성스럽고 아늑해 1915년 일제의 석굴암 보존 공사 후 원형 등 훼손… 파괴에 가까운 ‘보수’ 조선의 문화유산, 정복의 상징으로 ■유리벽 안의 석불 우리는 묵묵히 발끝을 세우며 젖은 돌계단을 밟는다. 계단 위, 금속판에 새겨진 석굴도 앞에서 둘 다 한참을 들여다본다. 평면도와 종단면에 나누어 새겨진 선은 복잡하면서도 질서가 있다. 석실, 전실, 통로, 본존불, 감실, 궁륭의 구조까지 세밀하게 표시해 놓았다. 소녀는 금속판을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구조의 정밀함에 마음을 뺏긴 듯하다. 석굴암 전각 입구 관람 안내문은 정중하게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유리벽 너머로만 보라’는 당부다. 보존을 위한 거리의 간격, 허락된 틈으로 우리는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른 숨소리도 죽인 채 우리는, 서로 다른 눈으로 하나의 풍경을 응시한다. 누군가의 손으로 다듬어진 석불은 조명 아래 환하게 빛난다. 정좌한 석불은 숨이 막힐 듯 웅장하다. 그 앞에 앉아 염불을 외는 스님은 정중하다. 웅장한 석불과 염불 속에 어떤 경외가 인다. 숙연한 마음이 저절로 따라왔다. 석불의 눈매는 고요하다. 묵언을 수행하듯 입가엔 미묘한 미소가 번지는 듯하다. 눈꺼풀은 반쯤 감긴 듯하고, 시선은 바닥을 향해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잔잔하게 부풀어 있으며, 손끝은 법계를 상징하듯 가지런히 모아졌다. 옷자락은 어떠한가. 바람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매끄러운 주름을 이루었다. 돌의 결을 따라 흘러내린 유연한 곡선과 은은한 품격은, 바라보는 이의 숨을 조용히 멎게 한다. 홀린 것인가. 소녀는 말없이 서 있고, 이국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따라 마음도 흐르는 듯했다. 석실 내부는 낮은 숨결들이 모여 점점 근엄해지고 있다. 본존불을 둘러싼 감실에는 보살상들이 석불을 향해 각자의 위치에서 경배하고 있다. 돔을 따라 새겨진 십일면관음과 사천왕상은 조명이 스칠 때마다 부드럽거나 때로는 거친 입체로 떠오른다. 돌기둥 위의 문양은 살아 있는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결을 드러낸다. 성큼성큼 걸어와 나의 죄를 낱낱이 물을 것 같이. 천장은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솟아오른 천개석이 받치고 있다. 밀폐된 느낌보다 아늑함이 먼저 인다. 석굴암은 지금도 종교와 과학, 조형과 정신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머문다. 침묵이 감싼 석실 안에는 수백, 수천 번의 예경(禮敬)과 무언의 기도가 쌓였을 테다. ■‘보수·복원’이라는 이름 1912년 겨울,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조선총독) 총독이 토함산에 올랐다. 눈 덮인 봉우리 끝에서 마주한 석굴암은 폐허에 가까웠다. 돔을 덮은 봉토는 무너져 내렸고, 감실과 주실 사이에는 균열이 깊게 퍼져 있었다. 처참했다. 조선 병탄을 정당화하려 했던 제국에게, 동양 최고의 석굴사원이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의 훼손이자 상징의 실추였을 것이다. 석굴암은 그해 총독의 명령 아래 ‘보수’라는 명분으로 완전히 해체되기 시작되었다. 1913년 여름, 설계 조사를 마친 총독부는 공사에 착수했다. 본격적인 해체가 시작되자 석굴암의 모든 부재가 완전히 분해되었다. 봉토는 벗겨졌고, 석실의 석재는 순서대로 땅 위에 내려졌다. 원형 그대로 남겨진 본존불과 천장을 꾸민 천개석 둘레를 비계와 작업 인부들이 둘러쌌다. 벽면을 가득 채운 감실의 보살상들은 모조리 떼어 땅으로 내려졌고, 판석들은 길게 늘어서 노출되었다. 해체된 석재 중 파손된 것들은 새로 다듬었다. 마모된 면은 치석했고, 균열 난 것은 덧붙였다. 그러나 떼어낸 감실의 석조들은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전실 조각 배치는 흐트러지고, 원래의 유기적 질서는 재조립 과정에서 무너졌다. 아수라상은 옹벽 안에 갇혀 있었다. 일제의 보수는 파괴에 가까웠다. 전실과 진입 공간엔 시멘트와 자갈을 섞어 옹벽을 쌓았다. 돔 전체에는 1미터가 넘는 두께의 콘크리트가 입혀졌다. 그리고 흙으로 덮고 잔디를 심었다. 1915년 9월 15일, 석굴암 보존 공사 낙성식이 열렸다. 총독부 고위 관리들과 지방 관료, 기자들이 토함산 꼭대기에 모여 성대한 개안 법회를 거행했다.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저들끼리 자축하며. 석굴암 표면은 말끔해지고, 잔디 위에 심은 나무들은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비가 스며들어,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흘렀다. 습기는 균열 사이 사이로 스며들어 곰팡이가 슬고 석태와 청태가 끼었다. 내부가 병들기 시작한 것이다. ■야욕과 훼손 1910년대 석굴암 1차 보수공사 기간 중, 총독부는 본존불 상부 천정석에 ‘日本’ 두 글자를 음각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공사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만행이 아닌가 싶다. 조선총독부의 명시적 지시나 묵인 아래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단지 나라 이름을 새긴 일이 아니었다. 제국 일본이 조선의 문화정신과 종교성 위에 자국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름을 올린 만행이었다. 조선의 역사 유물을 제 것이라 여긴 자들의 야만은 침탈의 증거였고, 정신적 훼손의 절정이었다. 일제는 다 무너져 가는 석굴암을 구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새로 단장된 석굴은 완전 해체와 재조립을 하며 제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틈과 틈을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사용해 메웠다. 어쩌면 그들에게 보수는 위장이었을 것이다. 본질은 탈취된 채, 일본의 제국성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만들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데라우치 총독은 경주 방문 시 ‘不二法門(불이법문)’ 2척 크기의 네 글자를 써주고 석굴 벽에 새기도록 명령했다. 자신의 글씨를 명작이라 칭하며 본토에서 석공까지 불러 새기도록 했다. 한나라의 성스러운 불전 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제국의 수장은, 문화유산을 하나의 낙서판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단순한 오만이 아니라,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몰지각한 행동이었다. 데라우치의 만행은 일본인의 눈에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오쿠다 고운은 석굴암 입구 바위에 새긴 데라우치의 글씨를 두고, ‘문화재를 훼손하는 몰지각한 낙서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또한 ‘天下無雙(천하무쌍)의 名山靈地(명산영지)를 장식하려는 명필’이라는 백작의 의도는 헛되었고, 글씨는 정교하지도 않았으며, 감탄은커녕 조롱을 불렀다. (김진호역, 오쿠다 고운, ‘신라구도 경주지’, 1920, 217쪽.)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불전 위에서조차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치졸한 흔적으로 남았다. 신성한 바위 위에 새긴 네 글자는 제국의 오만을 드러낸 휘호였고, 일본인조차 얼굴을 돌릴 만한 부끄러운 흔적이었다. 어디 데라우치뿐이었을까. 석굴암 관광이 시작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가 앞다투어 석굴암에 이름을 새기려 안달했다. 안상석 위에, 감실 곁에, 신중상 밑에 자신의 이름과 염원을 남겼다. 그들이 남긴 낙서는 신성의 자리에 남긴 치욕이었다. 일제는 석굴암을 다양하게 촬영했다. 그리고 공사 전과 후의 사진을 나란히 붙였다. 무너진 조선의 유산과 단장된 일본의 석굴암을 대놓고 대비시켰다. 사진 속 단장된 석굴암은 식민의 무대였고, 조선은 무능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제국의 위대함을 기념하듯 황족과 장군, 관리들은 석굴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석굴암은 곧 선전물로 가공되었다. 엽서로 만들어 관광객을 상대로 팔았다. 석굴암은 순례지가 아닌 볼거리로 전락했다. 성소가 아니라 전리품이 되었다. 조선의 불전은 상품이 되었고, 침탈의 증거로 진열되었다. 일본제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함부로 의미와 가치가 바뀌고 있었다. *일제가 신라 문화유산에 집착한 이야기와 석굴암을 경성으로 이송하려 했던 이야기는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2025-08-13

철길 개설이 이끈 천년 고도 경주의 근대화 이면엔…

■근대의 길, 신작로 경주의 근대는 길 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작로(新作路), 말 그대로 새로 만든 길이다. 1909년, 대구에서 경주를 잇는 길이 처음 놓였다.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서악과 서천교, 봉황대로를 지나 도심으로 닿는, 지금의 태종로다. 1912년엔, 경주읍성이 철거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경주를 방문한 총독 데라우치의 차량이 남문을 통과하기 어렵다 하여, 남문인 징례문(徵禮門)과 함께 성벽을 함께 철거했다 한다. 조선의 체면이 단지 통행 불편의 이유로 허물어진 것이다. 같은 해 불국사까지 신작로가 새로 깔렸다.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해 경주로 들어왔다. 경부선 기차가 대구역에 도착하면, 관광객은 오츠카 자동차회사의 버스를 탔다. 1920년대부터는 경주역 앞에서 오카모토 자동차회사의 차량이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향하는 수학여행이 가능해진 건 신작로 덕분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앞서 확충된 교통망 위로 경주의 근대가 달리고 있었다. 1918년 11월 경주~불국사 협궤구간 개통 현재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역 들어서 1936년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교차점 인성동동 이전, 영남동해안 거점역할 맡아 일제의 통제·침탈 도구된 철도·신작로 신라고분·마을들 가로지르고 유적 훼손 첨성대는 증기기관차 진동·매연에 노출 2021년 12월 역사속으로 사라진 경주역 문화공간 ‘경주 문화관 1918’로 재탄생 ■쇳길, 조선을 누르다 1918년, 동해남부선과 경동선의 선로가 경주를 가로질렀다. 철로는 대구에서 경주를 지나 불국사까지 닿았다. 마을이 둘로 갈라졌다. 신라의 고분과 유적 사이를 굽어 돌긴 했지만, 유적지를 완전히 비켜 가지는 못했다. 선로가 놓였다는 건, 누군가의 땅이 잘려 나갔고, 누군가의 삶이 쫓겨났고, 누군가의 노동이 있었다는 뜻이다. 철로 개설엔 땅과 노동력, 자갈과 흙 등 많은 자원이 필요했다. 일본은 먼저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1898년 체결된 ‘경부철도합동조약’에는 기가 막힌 조항이 들어 있었다. 선로와 창고, 공작물에 필요한 토지를 조선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빌린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차관(借款)’을 제공했고, 조선은 그 빚을 등에 진 채 스스로 백성의 땅을 빼앗아 넘겨주어야 했다. 겉은 조선의 이름이었으나, 속은 일본의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강탈이었다. 평양에선 한성판윤 박의병이 토지를 평당 7전으로 일괄 매입하라 명령했다. 백성들은 반발했다. 일본 헌병이 진압에 나섰고, 지방 관리들은 기회라 여긴 듯 사기와 횡령을 일삼았다. 거간꾼들이 백성의 눈앞에 흙먼지를 흩뿌렸다. 경의선은 조선 최초로 민간의 항거가 집단적으로 터진 철도였다. 교하군에서는 수천 명의 주민이 몰려들어 강제노동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병력을 동원해 포위했다.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무임금, 저임금은 물론 중노동에 시달렸다. 욕설과 곤봉, 발길질은 허다하고, 보란 듯이 총부리를 겨눴다. 철로는 계속 계속 놓였다. 조선의 땅에 조선의 노동력으로. ■쇳길의 기억 1918년 11월 1일, 경주~불국사 간 협궤철도 구간이 개통되며 경주는 관광도시로서 첫 선로를 갖추었다. 철도는 대구에서 시작해 영천을 거쳐 경주 시내를 가로질러 불국사까지 이어졌다. 당시 경주역은 지금의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 선로는 현재의 태종로를 따라 팔우정을 지나 불국사 방향으로 이어졌다.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철길은 일제의 경주 관광개발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도시의 거리 위를 협궤열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고, 철로 위엔 관광객의 시선과 일본 제국의 의도가 함께 달렸다. 1935년부터 공사가 진행되면서 선로는 개량되었다. 이듬해인 1936년 경주역은 시내 서편의 성동동 일대로 이전했다. 새로 이전한 경주역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현 동해선)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경부선에서 대구로 진입한 관광객은 중앙선을 타고 경주에 닿았고, 이후 포항이나 울산·부산으로 연결되는 철도망을 이용했다. 경주역은 한때 영남 동해안권 철도교통의 중간 거점이자 환승역으로 기능했다. 이 시기를 거쳐 경주는 철도의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경주를 가로지른 쇳길 경동선 부설에 대한 경주의 명확한 기록은 거의 없다. 하지만 경주 사람들이 평화롭게 동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의 고분을 지나 마을과 논밭을 가르며 들어온 철도는 지형을 틀고, 일상의 동선을 뒤엎었을 것이다. 유적의 파괴, 삶의 단절, 사라진 집들과 옮겨진 무덤 등, 그 자리에선 경주 사람들의 절망이 울렸을 것이다. 철로는 산업의 길이 아니었다. 근대화의 선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철도는 일제의 통제와 침탈의 도구였고, 조선을 수탈하는 병참의 길이었다. 조선은 철도망을 통해 일본 본토로 연결되었고, 조선의 곡식과 광물 등 많은 자원이 실려 나갔다. 경주의 철길은 유적의 숨결마저 갈라놓았다. 1918년, 동해남부선(현 동해선)과 경동선(폐지)이 경주를 통과하며 불국사역까지 뻗었다. 신라 고분군과 마을 사이를 무자비하게 가로질렀다. 사천왕사 터 일대는 철도공사로 일부 훼손되었다. 동궁과 월지도 본래 궁궐 후원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철도와 도로망의 개설로 배후 공간과 단절되면서 고립된 형태로 남게 되었다. 1910년대 개설된 초창기 신작로는 첨성대와 불과 5미터 남짓한 거리까지 근접해 있었다. 그로 인해 첨성대는 증기기관차의 진동과 매연에 노출되었다. 문화유산 보존의 관점에서는 큰 위협이었다. 1926년 서봉총 발굴이 이루어졌다.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諸岡秀生)는 서봉총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건설업자를 끌어들였다. 발굴 과정에서 퍼낸 흙과 자갈은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를 매립하는데 쓰였다. 이는 ‘유적 보호’라는 명분이 ‘현대화’라는 실익에 밀려났던 당시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21년, 경주 읍성 남문인 징례문과 남쪽 성벽이 헐린 일이었다. 읍성의 석재는 경주 시내 곳곳의 도로·관공서 건축에 사용되었다. 경주 읍성 중심의 행정 체제도 이때 완전히 해체되었다. 1902년 경주 우편국, 1908년 경찰서와 법원이 차례로 들어서며, 조선시대의 동헌(府衙)과 객사(東京館) 건물은 반복적인 개축과 철거, 행정기능의 변화 속에 원형을 잃었다. 1937년, 김유신묘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철도 선로 부설 계획이 있자, 김유신의 49대 후손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국보급 유적의 정기를 훼손할 뿐 아니라, 김해 김씨 삼백만 후손의 명예를 짓밟는 행위라는 항변이었다. 최소 364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선로를 조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총독부는 “현지 지형상 선로 변경은 불가하며, 문화의 진전에 순응해달라”라고 답변했다. 이 ‘순응’이라는 단어 속에는 일방적 결정 통보만 있을 뿐, 협의와 고려는 없었다. 경주 사람들에게 신작로와 철로는 단지 근대화, 산업화의 의미만 존재했던 게 아니었다. 어른들은 조상의 머리 위로 쇳덩이가 달리니 조상이 누울 자리가 없다고 한탄했다. ■다시 경주 폐역이 된 경주역 담장 밖에 섰다. 더 이상 기차는 오지 않고, 사람의 기척도 닿지 않는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지켜온 역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플랫폼에 울려 퍼지던 휘슬 소리는 멈췄지만, 역사의 잔향은 아직 바람에 머무는 듯하다. 오랜 시간 이별과 만남, 희망과 절망이 켜켜이 스며든 불국사역은 조용히 폐허의 기억을 더듬는다. 경주는 일제가 박아 넣은 철로를 과감히 걷어냈다. 침탈의 선로 위에 놓였던 근대의 궤적은 철거되고, 잃었던 도시의 형상을 되살리려 노력 중이다. 철길은 외곽으로 옮겨졌고, 도심은 본래의 숨결을 되찾는 중이다. 발굴과 복원을 거듭하며, 경주는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폐역이 된 불국사역은 낡은 역명판 아래 풀만 그림자를 무성히 드리웠다. 도심 속 경주역도 2021년 12월 28일, 역사의 기능을 멈추었다. 구 경주역은 현재 ‘경주문화관 1918’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낡은 역사의 자리에 새로운 문화가 깃들고 있다.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 한 여성 서예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닫힌 창구 대신 펼쳐진 화선지 위로 흐르던 필획은, 멈춘 시간 위에 얹힌 또 하나의 기록이었다. 구 경주역은 이제 기차 대신 사람과 예술을 싣고, 조용한 문화의 열차가 이 도시의 기억 속을 유영하고 있다. 경주의 철도는 멈춤이 아니라 이제 속도의 상징이 되었다. 2010년 개통된 KTX 경부고속철도의 중간 정차역인 신경주역은 중앙선 복선전철, 동해선 전철, 경부고속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과거 경주의 중심을 가르던 기차는 이제 외동읍 건천리 들판을 가로질러 더 멀리, 더 빠르게 질주한다. 도심에서 멀어진 열차는 더 이상 풍경을 가르지 않는다. 그러나 멈춘 자리엔 여전히 사람들이 서 있다. 닫힌 승강장 아래, 수많은 작별과 재회의 순간이 겹쳐 흐른다. 경주의 철길은 멈추지 않았다. 내일을 향해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손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2025-08-06

100년의 시간이 더께더께 쌓여있는 철길을 거닐다

불국사역은 한옥 지붕을 인 채 웅크리고 있다. 오래된 절집처럼 인기척 끊긴 역사(驛舍) 곳곳엔 적요만 가득하다. 역사 마당에 들어서니 나무 아래, 목줄을 맨 개가 낮잠에 깊이 빠져 있다. 인기척을 느꼈을까. 이따금 꼬리만 흔들 뿐 눈을 뜨거나 짖지는 않는다. 역사 곳곳에 ‘출입금지’ 문구가 색이 바랜 채 붙어 있다. 역사 문은 굳게 닫혔고, 자물쇠는 ‘폐역’답게 오래된 ‘정지’를 각인시킨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나는 밖에 발목이 잡힌 채 너머를 생각한다. 역사 뒤 플랫폼으로 향하는 곳에도 철문이 가로막는다. 단절을 알려주듯 풀만 무성히 자란다. 선로를 덮은 잡초는 저들 세상인 양 빼곡히 자라 어깨를 맞대고 있다. 바람이 불면 사라진 열차의 기척에 응답이라도 하듯 한 방향으로 몸을 흔든다. 플랫폼을 따라 줄지어 선 가이즈까 향나무가 먼저 눈에 든다. 불국사역 영업 개시를 기념해 5~10년 된 나무를 심었다는 명찰을 매달아 두었다. 백 년 넘은 나무들은 폐역을 그대로 지키고 섰다. 한때 역에 울려 퍼지던 기적 소리와 사람들의 북적이던 모습을 회상하며, 나무는 여름을 견고하게 버티며 늙어가는 듯하다. 불국사역은 1918년 영업을 시작해, 1936년 지금의 역사로 단장되었다. 오랜 세월 경주 남쪽을 오가는 통로였던 불국사역은 2021년 12월 28일, 중앙선 이설과 함께 마지막 열차를 보내며 문을 닫았다. 한 세기를 넘긴 시간이었다. 언젠가 나는 뜯겨 나가는 경주 철길 위를 따라 걸었던 적이 있다. 도시를 가르고 숲을 가르며 달려 나간 철로 위에 100년의 시간이 더께더께 쌓여있었다. 경주를 지나는 선로는 단순히 기차가 지나던 길이 아니었다. 유적을 딛고 놓인 철로의 시작은 처음부터 강제였고, 위협이었다. 중앙선 이설과 함께 한 세기 넘긴 시간을 마무리한 불국사역, 이젠 적막함만 대한제국의 의지서 시작된 한반도 철도… 일제 침략으로 수탈 역사로 점철 선로는 수탈 수단에 그치지 않고 유적 훼손 … 식민 권력 상징적 행위 분석도 ■한반도 철도 시작은 대한제국 한반도의 철도는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경인선(1899), 경부선(1905), 경의선(1906) 모두 대한제국 시기(1897~1910)에 개통되었다. 초기 부설권은 미국과 프랑스 자본에 맡겨졌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고종을 찾아 미국 공사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가 경복궁으로 들어섰다. 그해 봄, 모스는 두 개의 권리를 손에 쥐었다. 하나는 한양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길, 하나는 평안 북녘의 금맥이었다. 조선이 외국에 내준 첫 특허였다. 고종은 서양 열강과의 협상을 통해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일본은 외교력과 군사적 압박으로 부설권을 강탈해 갔다. 대한제국은 1904년 ‘서북철도국’을 설립해 독자적 철도망 구축에 나섰으나, 러일전쟁을 틈탄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자체 철도계획과 건설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더라도 근대화의 길은 이어졌을 것이다. 철도는 침략의 선물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그려낸 근대의 선로였다. 조선 땅 곳곳에 낯선 쇳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철로는 시작부터 조선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 철로를 깔기 전부터, 일제는 먼저 조선을 위협하여 침묵하게 만들었다. 1904년 제정된 ‘대한시설강령’은 철도와 통신망의 장악을 식민 지배의 핵심으로 규정했다. 거기엔 ‘철도 사업은 한국을 경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어 발표된 ‘군용 전선 및 군용 철도 보호에 관한 군령’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군용철도에 손해를 끼치면 사형, 가해자를 숨겨도 사형, 대신 고발하면 20원을 포상한다’는 조항이었다. ‘사형’, 누구도 선로에 대해 거스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법령 아래에, 철길 공사는 선포였고, 명령이었다. 일제는 1909년 지금의 단둥인 안동과 봉천(선양) 등 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1911년 압록강 철교를 완성한 뒤, 이를 경의선과 연결해 압록강을 건너 대륙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 흐름의 중간에 경주의 선로가 놓였다. 한반도 남쪽인 부산에서 북쪽 신의주까지 곧장 치고 갈 수 있는 철길이 완성된 것이다. ‘경동선’, 침략의 쇠줄이 한반도 땅 위로 뻗어갈 때 경주도 그 길 위에 얹힌 셈이었다. ■경주의 철길 경주 철길은 1918년, 동해남부선의 일부로 개통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동해안 지역에 매장된 철, 구리, 석탄 등 지하자원을 효율적으로 반출하기 위해 동해남부선을 기획했다. 경주~포항 구간은 자원 수송의 핵심 통로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직할의 철도국을 통해 경주 중심부를 관통하는 철도를 설계했다. 일본인 기술자의 설계와 일본 군 감독하에 조선인 강제 동원된 노동자의 손으로 철길을 밀어붙였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노동자들은 저임금 혹은 무임금에 가까운 조건으로 강제로 끌려왔다. 철도는 경주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월성동·사정동·노서동 일대를 절단했다. 문제는 선로가 단지 수탈을 위한 운송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학계에서는 동해남부선의 경주 구간이 의도적으로 사천왕사 터 중심부를 관통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라는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민족의 정기를 훼손하고 정신적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식민 권력의 상징적 행위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사천왕사 터를 비롯해 능지탑 터, 옥산사 터, 대릉원 주변 고분군 등 신라 유적이 선로 공사로 훼손되었다. 당시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굴착과 침목 설치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과 절터가 파괴되었다. 더욱이 철로는 경주의 고대 도심을 두 개로 나누며, 도시 공간을 단절시키는 물리적 경계가 되었다. 철길 서편은 대부분 주거지와 농촌지역으로 남았고, 동편은 문화유산 중심의 관광지로 재편되었다. 교량이 없던 시기에는 철도를 건너는 것조차 쉽지 않아 일상의 이동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어디 이뿐이랴. 일제는 철로를 통해 불국사·석굴암 등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포항항을 거쳐 일본 본토로 반출했다. 불경, 불상, 금속공예품, 건축 부재 등이 포함되었으며, 대부분은 공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채 밀반출되었다. 일본의 박물관이나 사찰에 지금도 남아 있는 몇몇 유물들이 증명하고 있다. ■경주역, 불국사역 개통, ‘기차’를 처음 본 경주 사람들 1918년 11월 1일, 쇠붙이가 땅을 울렸다. 경주 사람들은 들녘을 지나 역 앞으로 몰려들었다. 포항과 불국사로 이어지는 경동선 개통일이었다. 기차는 짐승도, 마차도 아닌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화통에서 연기를 뿜어내자, 바퀴는 쇠를 긁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굴렀고, 증기엔진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지를 울렸다.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는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고된 노역으로 쌓인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자신들이 깔았던 선로 위로 저토록 위압적인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정에 젖었다. 처음 보는 문물 앞에 신기함과 놀람과 두려움이 뒤엉켰을 것이다. 기차 위에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감격과 경외가 아닌, 어딘지 모를 위협과 복종의 기운이 먼저 주눅 들게 했을 것이다. 쇳소리는 경주의 너른 고요를 깨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말 없는 정적 속에서 기차가 뿌리고 간 연기 냄새를 맡으며 처음으로, 자신들의 마을이 외부의 어떤 거대한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철길은 단순한 교통의 선이 아닌, 도시의 심장부를 가르는 긴 흉터처럼 긋고 지나갔다. ■철로 개설과 문화유산 경주에 철길을 내는 건, 유적 파손을 전제하는 일이었다. 경주는 천년 신라의 도읍이었고, 땅속 깊이 무수한 유구가 잠들어 있었다. 도로를 내고 건물을 세울 때도, 굴착의 깊이가 역사에 닿는 일이 빈번했다. 철도처럼 직선화와 효율을 중시하는 인프라가 도입되었을 때, 지하에 숨겨진 문화유산이 손상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 경주는 그런 피해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도시였다. 동궁과 월지 동북쪽, 발굴지는 한때 철도가 지나던 곳이었다. 동해남부선이기도 했던 이 구간에서, 신라시대 수세식 화장실 구조가 확인된 바 있다. 이 유구는 2000년대 이후 확인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 당시 이미 훼손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주의 철로는 유독 기이하게 굽이치며 놓였다. 일제는 철길을 동궁과 월지의 ‘앞’이 아닌 ‘뒤’로 굽혀 놓으며 시각적 유적 훼손을 피하려 했겠지만, 잠든 유구까지 고려하지는 못했다. 경주는 철도가 어느 쪽으로 지나가든, 흔들리고 깎이고 파였다. 직선을 생명처럼 여기는 기찻길이 경주에서만큼은 예외를 드러낸다. 동궁과 월지 앞에서 급격히 휘어진 선로는 불국사역으로 향하며 두 번 더 꺾인다. 한 번은 사천왕사 터와 신문왕릉 사이에서, 다시 한번은 성덕왕릉 부근에서다. 이 꺾임은 단순한 기술적 곡선으로 보기 어렵다. 아마도 국도와 나란히 지나며, 최소한의 물리적 파괴를 피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본다. 일제는 철도 부설 과정에서 때로 유적을 피했고, 때로는 관통했다. 사천왕사 터 중심을 가로지른 선로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선택도 있었고, 동궁과 월지처럼 두 번이나 급격한 방향 전환을 감수하며 피해 간 구간도 있었다. 일제가 유산을 전적으로 아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전면적으로 파괴하려 했다고도 단정할 수 없는 대목이다. *‘천년 고도(故都) 경주의 근대화와 철길’ 이야기는 (하) 편에 이어집니다.

2025-07-30

형산강 절벽, 금장낙안의 아름다움에 젖다

가파른 비탈을 따라 땀 훔치며 오르니 형산강 품은 거대한 누각 전신 드러내 시내 전체 훤히 보이는 지형적인 이점 임진왜란 땐 조선군 군사 지휘본부로 절벽 아래 북천·형산강 만나는 ‘예기소’ 얽힌 이야기 김동리의 ‘무녀도’ 모티브 강물 굽이치는 절벽에 앉은 기러기 떼 금장낙안 전설은 ‘팔괴’ 중 하나로 꼽혀 ■산책하기 좋은 금장대습지공원 막 해가 솟았다. 강 표면을 가늘게 감싸던 물안개가 서서히 흩어진다. 안개 너머로 나무의 실루엣이 드러나고, 그림자는 물속으로 가 겹겹이 번진다. 물속에서 흔들리며 다시 태어나는 나무, 그렇게 나무는 제 모습을 가만히 관조한다. 잎사귀 하나가 파르르 물결에서 흐려지고, 이내 찰랑대며 떠내려간다. 바람이 스치면 그림자는 부서졌다가도 다시 이어져, 강은 나무의 또 다른 형상이 된다. 공기는 눅눅하고 맑으며, 습지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하다. 습지의 고요를 깨우는 건 숲 어디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다. 풀숲이 갈라지고, 한 마리 뱀이 몸을 낮춘 채 지나간다.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나쁘지 않은 생물이다. 나 역시 해할 의도는 없다. 이따금 철새가 날아든다. 갈대숲 깊은 곳,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어디에 둥지를 짓고 알을 품는다. 물 내음과 바람 사이로 새의 숨결이 이어지고, 물 위로 부는 바람이 둥지를 스치며, 새벽 습지를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강 한가운데, 깊지 않은 수면에 갑작스러운 파문이 인다. 물 위로 튀어 오른 거대한 생물, 잉어다. 상상조차 하지 못할 크기다. 물결이 퍼지며 길에 선 나그네의 사유를 흔든다. 놀란 눈동자가 잉어가 사라진 물가에 꽂힌다. 강은 이내 다시 고요해진다. 방금의 소란도 습지의 익숙한 장면처럼 안개 속에 잠긴다. ■금장사터에 지은 누각, 금장대 낮은 산자락에 난 길로 발을 들인다. 금장대는 생각보다 높지 않은 언덕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금장대로 오르는 길은 묘한 사색을 부른다. 오래된 소나무 사이로 난 흙길을 따라 산책하듯 천천히 걸으면, 이따금 강물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온다. 오래된 시간을 통과하듯 짧지 않은 20여 분의 길. 이 길 위에서는 말수가 줄고 마음속 기억들이 하나둘 걸음을 맞춘다. 가파른 비탈을 따라 땀을 훔치며 오르니, 마침내 나무 사이로 금장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붕 선 하나, 이내 용마루가, 다시 다섯 칸 정면과 네 칸 측면의 거대한 누각이 전신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놀랍다. 눈앞에 펼쳐진 누각은 상상보다도 크고 묵직하다. 커다란 누각이 마치 형산강 물줄기를 다 품겠다는 듯 버티고 서 있다. 사방을 휘감은 나무와 강마저 누각의 위용에 움츠러든 듯하다. 금장대는 형산강 물줄기를 굽어보며 그 흐름을 한껏 껴안는 형국이다. 고개를 들고도 시야는 지붕 끝까지 단번에 닿지 못한다. 서너 걸음 물러서야 비로소 전체의 윤곽이 잡힌다. 단순히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시간을 이고 선 하나의 산세 같다. 금장대는 1996년 복원된 것이다. 신라시대 금장사 터였던 이곳은, 발굴을 통해 석축 기단이 확인되었다. 안압지 건축양식을 반영해 단청을 더했다. 처마 선마다 새겨진 문양은 하늘 아래에서도 빛바래지 않고, 기둥은 세월을 견뎌내는 등뼈처럼 굳건하다. 신라의 숨결이 다시 누각으로 세워진 셈이다. ■조선군 군사지휘본부 마루에 올라서면 사방이 활짝 열린다. 북쪽으로는 알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형산강 본류가 둥글게 휘돌아 들어온다. 두 물줄기는 마주 부딪히며 깊은 소(沼)를 만들고, 강물은 마침내 한데 섞여 동쪽 영일만으로 흘러간다. 물이 바위벽을 치고 맴도는 곳, 예기소에서 물이 뒤섞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형산강은 스스로 길을 꺾고 휘돌며 곡선의 강변을 빚어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곡선은 물길을 따라 유연하게 이어진다. 마치 붓끝이 비단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동양화의 선 같다. 선은 물안개와 들풀 사이를 은근히 적신다. 누각 마루에 서니 경주 시내가 한눈에 담긴다. 크고 작은 지붕들이 어깨를 맞대고, 사이사이 불국사와 대릉원, 황룡사지, 황성공원 같은 옛 터가 점처럼 흩어져 있다. 금장대 위에 서면 시간이 달라진다. 사람의 시간은 낮게 흘러가고, 땅의 시간은 깊게 내려앉는다. 그 둘이 겹치는 순간, 금장대는 더 이상 누각이 아니라 기억의 언덕이 된다. 어떤 시간은 바람처럼 가볍고 얕게 흐르는데, 땅의 시간은 나무뿌리처럼 천천히, 그러나 지워지지 않게 스며든다. 저 아래 강은 쉼 없이 움직이지만, 그 곁의 들판과 고분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발아래 펼쳐진 풍경은 마치 오래된 경전의 한쪽처럼 조용히 말을 건다. 문득 깨닫는다. 금장대는 단지 풍류의 자리가 아니라, 사라진 것들과 남은 것들이 함께 머무는 기억의 언덕임을. 이 누각은 단지 경관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함락된 경주읍성을 되찾기 위해 조선군이 금장대를 군사지휘본부로 삼았다. 시내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형적 이점을 살려 방어선과 공략로를 살피기에 유리했다. 그때 이 누각은 병사들의 발걸음과 명령, 수군의 함성이 뒤섞인 요충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의 탄식도, 북소리도 사라지고, 강물만이 그 기억을 밀고 흘려보낸다. ■김동리의 ‘무녀도’와 신라 기생 을화 절벽 아래엔 북천과 형산강이 만나는 깊은 소(沼)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자비왕(신라 제20대 왕) 시절, 기생 을화가 왕과 연회를 즐기다 이 절벽에서 실족하여 빠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 자리가 ‘예기소’라 불리는 곳이다. 이 이야기는 훗날 김동리의 ‘무녀도’의 모티브가 되었다. 예기소(예기청소, 藝技淸沼)는 한번 빠지면 깊이와 소용돌이로 인해 헤어나 올 수 없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 가리지 않고 삼켜버린다고 해서, 경주 사람들은 ‘애기도, 청년도, 소도 빠져 죽는다’ 하여 ‘애기청소’라 부르기도 했다. 무녀와 목사, 딸과 어머니의 갈등이 이 깊은 물 아래 깃들어 있는 듯, 소설의 무대는 그렇게 강물처럼 삶과 죽음, 믿음과 슬픔을 흘려보냈다. 조선시대 시인과 묵객들은 이 누각에 올라 ‘금장낙안(金藏落雁)’이라 불리는 풍광을 노래했다. 기러기가 앉는 들녘과 강이 어우러지는 이 장엄한 조망 앞에서, 인간 삶의 덧없음을 읊고 또 읊었다. 물의 유속이 바위에 부딪혀 일으키는 포말은 그 시절 한 사람의 울음처럼 짧고, 바람은 세월을 넘겨 오늘의 시간까지 닿는다. 풍경은 달라졌다. 사람도 길도 옛 모습은 아니지만, 고요히 스며드는 정취만큼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눈앞의 세상이 달라져도 마음에 닿는 울림은 여전히 오래된 그때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신라 삼기팔괴(三奇八怪) 중 하나 경주에는 예로부터 신령한 기이함이 풀리지 않는 물건과 괴이함을 간직한 땅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삼기팔괴(三奇八怪)’라 불렀다. 하늘에서 내린 금척과 바다에서 얻은 만파식적, 불을 피운 수정구슬은 신라 왕가에 전해진 세 가지 기이함이자 신권과 왕권의 상징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통한 힘이 왕에게 깃들었고, 그 힘은 병을 고치고 나라를 지켰으며, 혼란을 잠재웠다. 그러나 기이한 것이 하늘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땅에는 땅의 신비가 스며 있었다. 여덟 가지 괴이한 풍경은 경주 곳곳에 흩어져 있고, 그중 하나가 바로 금장대다. 형산강이 굽이치는 절벽 위, 기러기 떼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떼 지어 내려앉았다는 금장낙안의 전설은 이곳을 경주의 8괴 중 하나로 세웠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높이에 기러기들이 무리 지어 내리는 모습은, 자연의 이치 너머에 있는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금장대는 단순한 누각이 아니다. 금장대에 서면 하늘의 기이함과 땅의 괴이함이 하나의 시선에 포개진다. 그 순간 금장대는 시간이 쌓인 누각이자, 하늘과 땅의 신비가 깃든 자리로 다시 태어난다. ■청동기 시대 새겨진 석장동 암각화 금장대를 내려와 바위 앞에 섰다. 청동기 암각화를 보겠노라 여러 차례 왔지만, 매번 바위는 침묵했다. 풍화가 깊었다. 형체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바위만 있을 뿐, 시간은 모든 흔적을 지운 듯 보였다. 그러던 오늘, 바위가 불쑥 말을 걸어온 게다. 눈에 익지 않은 무언가가 음영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흐릿한 곡선에서 어떤 발자국이 이어진다. 동물 발자국이다. 도토리와 칼, 꽃 같은 형상이 모두 99점이라는데 아직 그들은 침묵 중이다. 모든 그림이 정교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하나하나가 삶을 향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청동기 사람들은 이 바위에 풍요와 다산을 빌었다. 기도였고, 염원이었고, 흔적이었다. 그림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그들은 바위가 시간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무수한 세월이 그림을 마모시켰지만,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관심에 의해 ‘툭’ 살아날 것만 같다. 들리지 않던 이야기들이 바위에서 피어오르는 듯, 마음이 먼저 선을 따라 움직인다. 다시 내려간다. 내리막길은 오르막보다 짧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길어진다. 금장대를 내려서는 동안 형산강의 굽이진 물줄기와 도시의 옛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아득히 따라온다. 강은 지금도 흐르고,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진다. 금장대는 단지 높은 누각이 아니라, 수천 년의 시간을 굽어보는 눈이다. 그리고 그 눈길 아래, 잠시 멈춰 선다. 현재로 되돌아가는 길목에서, 오래된 시간이 한 번 더 등을 어루만진다.

2025-07-23

왕실 숲, 천 년의 그늘에서 놀다

■발걸음을 유혹하는 그늘 지금 경주는, 초여름이지만 불볕더위가 기승이다. 땡볕은 대지를 데우고, 숨통마저 조인다. 대지가 토해내는 열기는 걷는 이들을 더욱 지치게 한다. 해는 구름을 허락하지 않고, 마른하늘은 비 한 줄 허락하지 않는다. 점점 느려지는 걸음과 기진맥진한 육신을 가까스로 이끌며 지쳐가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나뭇잎이 흔들린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한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누구도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태양이 스러지는 경계, 나뭇잎이 엮어내는 짙은 그늘이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조용히 불러들이는 듯했다. 나도 이끌리듯 숲으로 몸을 들인다.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 기다리고 있던 곳에 도착한 것처럼. 바람보다 먼저 다가온 건 그늘이다. 숲은 아무 말 없이 나를 감싼다. 신선한 초록은 눈이 아니라 마음을 먼저 식힌다. 순간, 나는 무언가 오래된 주문에 이끌려 이상한 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탈해 이사금 9년 3월의 봄밤 ‘시림숲’ 황금빛 궤짝 속서 걸어나온 사내아이 김씨 왕통 시조 ‘김알지’의 신화 간직 아름드리로 서 그늘 내리는 숲 어귀엔 신화의 기록 증명하는 표지석이 반겨 숲 끝자락서 이어지는 신라 궁전 월성 첨성대·대릉원 봉분들 한눈에 보이는 성터 능선서 옛도심 정취 가슴에 담아 ■신화의 문턱이 된 계림 대지의 열기 위에 오직 숲만 살아 있는 듯하다. 숲은 천 년의 신화가 여전히 꿈틀대는 듯, 싱그럽다. 나무들은 말없이 나를 받아들이고, 나는 비로소 숲에 섞여 든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숲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계림숲, 나무들은 모두 아름드리로 서서 그늘을 내리고, 한 줄 빛이 스치면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사람들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숲 사이로 한복을 차려입은 한 무리 앳된 청춘들이 지나가고, 신라 복장을 한 외국인들도 숲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각자의 모습을 담는다. 여러 나라 언어가 자유롭게 스쳐 가는 숲 사이로,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바람은 오래된 나뭇가지부터 흔든다. 숲 어귀에 다다르니, 가장자리 나무 아래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다. ‘계림(鷄林)’이라 또렷이 새겨진 표지석이다. 무심히 서 있는 듯한 돌은 이 숲이 언제, 어떤 전설로부터 시작된 이름임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계림’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신화와 기록‘이 포개진 이름이다. ■계림에서 시작된 김 씨 왕통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제1 탈해 이사금 조나 ‘삼국유사’ 권 1 기이편 제2 김알지(金閼智) 설화 조에는 ‘김알지 신화’가 기록되어 전해진다. 두 기록을 간추려 이야기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탈해 이사금 9년(65년) 봄 3월, 밤이었다. 서라벌 들판은 바람조차 멈춘 듯 고요했고,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숲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날 밤, 왕은 어떤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창 너머 어딘가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새벽을 울리는 닭 울음이 아니었다. 울음은 금성의 중심에서 서쪽 숲 끝자락까지 뻗어 나갔고, 왕의 가슴을 두드리며 파고들었다. 왕은 흘려듣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궁중 신하 호공에게 명을 내려 시림을 살피도록 했다. 호공은 시림으로 들어갔다. 칠흑 같은 새벽, 나무들이 웅크린 채 잠든 시림의 깊은 곳으로부터 짙은 어둠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꽂히고, 빛 안에 황금빛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요상하게 울고 있었다. 빛은 궤에서 쏟아졌고, 숲은 그 빛을 기꺼이 받아내고 있었다. 호공은 숨죽여 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마치 신의 계시 같았다. 소식을 들은 왕은 직접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빛 궤짝을 조심스레 내려 열었다. 그 안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곱게 누워 있었다. 왕을 보자 아이는 놀랍게도 몸을 일으켜 궤 밖으로 나왔다. 얼굴은 단정했고, 기이하리만치 용모가 빼어났다. 왕은 숨죽인 채 아이를 바라보았다. 곁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왕은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내린 아들이 아니겠는가.” 아이는 곧 궁으로 들어와 왕의 손에서 자랐다. 자랄수록 총명하고 영특한 아이였다. 왕은 ‘어린아이’를 뜻하는 ‘알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또한 금빛 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이라 삼았다.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은 이후 흰 닭이 울던 숲이라 하여 ‘계림(鷄林)’으로 불리게 되었다. 탈해 이사금은 하늘이 내려준 아이라 여긴 알지를 태자로 삼았지만, 그는 끝내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김알지로부터 여섯 대를 내려가, 마침내 김미추가 신라 제13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김 씨 왕통이 실현되었다. 계림숲 안에 자리한 봉분은 신라 17대 왕 내물마립간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김 씨로서 두 번째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때부터 신라 왕권은 김씨 세습의 형태로 이어졌고, 계림은 기원이 숨 쉬는 상징의 숲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신화의 뿌리에서 궁성으로 계림숲의 끝자락에서 그늘을 빠져나오면 천 년 전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의 흙 능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낮은 언덕을 따라 성터의 능선은 부드럽게 펼쳐진다. 파사왕 22년에 쌓은 이곳은 한 왕조의 정치와 제사의 중심이었다. 지금은 땅속 깊이 잠든 유적 발굴이 한창이다. 탐방로 초입에는 신라의 얼음을 품었던 석빙고가 숨어 있고, 그 주변엔 수백 년을 산 듯한 소나무들이 바람결에 몸을 맡긴다. 월성 능선에 오르면 숲과 도시가 함께 눈에 들어온다. 첨성대의 단아한 모습과 대릉원의 봉분들이 서라벌 가운데 불쑥 솟아오르고, 그 아래로 경주의 옛 도심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이 풍경은 임금이 거닐며 나라를 생각했을 풍경이고, 지금은 여행자가 발걸음을 늦추며 숨을 고르는 자리다. 바람은 언덕을 타고 흐르며 계림에서의 전설을 이 언덕에도 조용히 건넨다. 계림이 신화가 시작된 곳이라면, 월성은 신화가 몸을 이루고 살았던 자리다. 나무 아래서 깨어난 알지가 궁궐을 품은 이 언덕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전설이 삶이 되고, 숲이 성이 되는 흐름 속에서, 이 두 곳은 결코 나뉠 수 없는 곳이다. 지금도 숲은 왕의 숨을 기억하고, 성터는 나무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을 것이다. 계림과 월성은 서로의 시간 속을 비추며, 신라의 심장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천 년의 그늘에 잠시 계림숲은 겸허하다. 위대한 전설이 태어난 자리였다 해도 무엇 하나 화려하거나 거추장스럽지 않다. 그저 나무들이 사람을 맞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늘을 내어주는 공간일 뿐이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높이 날아오르고, 청솔모가 나뭇등걸을 타고 사라진다. 바람이 이파리를 뒤집을 때마다 숲은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한 그루 나무 아래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신비한 느낌이 감도는 나무다. 수령이 무척 오래된 듯한 나무는 속을 훤히 비우는 중이고, 곧 소멸하려는 자세로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문득 김알지의 궤가 걸려 있던 나무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알지의 탄생 빛을 가장 먼저 목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무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날 어린 사내아이를 기억하느냐고. 황금 궤가 걸려 있던 장면이 스친다. 흰 닭이 울었다는데 멀지 않은 어디선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나무 곁으로 조금 더 다가선다.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힘든 기색이 역력한 나무에 손을 올려 본다. 파르르 떨며 그날의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다. 누군가는 이 숲을 지나가며 자신의 기원을 되새겼을 것이다. 알지 역시 그렇게, 땅 위에 남겨졌을 것이다. 숲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시야가 훤히 열린다. 나무 그늘은 물러서고 너른 벌판 위 첨성대가 보인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월성 언덕 능선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계림은 전설의 첫 장이었고, 월성은 그 이야기가 머문 궁성이었다. 숲을 벗어나 성 능선에 올라선다. 성안의 바람은 숲보다 더 깊고, 침묵은 더 낡은 결을 품고 사람들을 맞는다. 언덕 위에 서니 경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모든 시작이, 방금 지나온 계림의 그늘 속에 있었다.

2025-07-16

신라 왕도 북방을 지키던 숲에서 민중의 삶 품는 공원으로

박목월노래비와 목양 오세재선생 문학비 황성공원의 숲길을 걷다 보면, 나무와 나무 사이 조용히 서 있는 비석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가 새겨진 노래비다. 시인은 이곳 경주 출신이다. 낙엽이 지는 숲길을 따라 떠도는 마음을 노래한 시는, 낯선 도시의 공원에 놓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나고 자란 고장, 경주의 흙과 바람 속에 놓여 있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구절이 돌판 위에서 바람과 함께 울리고 있다. 떠남과 고독의 정조가, 고향 땅의 숲속에서 다시 유순해진다. 시를 따라 걷는 이에게 이 비(碑)는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닌, 한 시대와 개인의 생을 가로지르는 공명의 지점이 된다. 노래비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는 목양 오세재 선생의 문학비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였던 오세재는 경주의 산수와 심성을 읊은 시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글은 당대의 문풍 속에서도 수수한 경관과 겸허한 마음을 담아내려 했고, 그 정신은 지금도 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풍월은 산에 들고 / 마음은 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목양의 문장은 산책자가 걷는 걸음보다 한 걸음 앞서 흘러간다. 유려한 글과 고요한 마음이, 오늘의 나무숲에서조차 숨결을 남긴다. 두 문인의 문학비는 단지 글을 새긴 돌덩이가 아니다. 황성공원의 나무들 사이에 숨겨진 정신의 표식이다. 자연을 노래한 시와 마음을 기른 문장이 한곳에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은, 이 공원이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사유와 성찰의 공간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걸음을 멈춘 이에게 문장은 다가오고, 마음은 비로소 조용히 가라앉는다. 한 사람의 시선과 언어가 숲에 새겨질 때, 그것은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황성공원의 문학비들은 이렇게, 계절과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침묵의 목소리로 남는다. 도시의 소음 벗어나 시민의 활력이 되고 아이들 웃음·노년의 산책 이어지는 숲 박목월 시비·최시형 동상·충혼탑 등엔 문학과 종교·역사와 사색 새겨져 있어 ■충혼탑과 임란 의사 추모공원 숲을 따라 좀 더 깊숙이 들어선다. 나무들 사이로 비석 몇 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공원 중앙에 우뚝 솟은 충혼탑이 보인다. 비바람에 오래 닳은 듯한 표면은 그 자체로 세월을 증언한다. 이 탑은 이름 없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무명의 병사, 알려지지 않은 희생, 묵묵히 스러져간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자리다. 도시의 한복판에 세워진 탑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무엇이 이 땅을 지켜왔는지. 숲의 끝자락, 바람이 멈추는 방향에 이르면 임란 의사 추모공원이 있다. 아늑한 언덕 아래, 지극히 조용한 자리다. 박무의공비, 창의거병기념비, 충모탑은 안압지 길가에서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사람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지만, 묵직한 비문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다. 단지 글이 아니라, 검과 불, 흙과 땀으로 쓰인 생의 기록이다. 꽃 한 송이 없어도, 담백하게 서 있는 비(碑)들은 오히려 더 많은 말을 전한다. 거기엔 체념이 없고, 다만 끝까지 버틴 사람들의 혼이 남아 있다. 추모공원은 황성공원이 단지 녹음의 공간만이 아니라 역사의 한 페이지가 숲의 구석에 남아 있고, 우리는 그 기억의 그늘 아래를 지나고 있음을 각인시켜 주는 셈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 황성공원 서편, 실내체육관과 씨름장 사이 나무 그늘 속, 해월 최시형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1979년, 천도교 경주교구와 용담교구, 그리고 동학을 사랑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정성으로 세워졌다. 경주가 동학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현실 속에, 이 동상은 민중 속 동학의 뿌리를 되살리고자 하는 시대적 응답이었다. 최근에는 시민들과 종교단체의 노력으로 동상 옆에 해월 선생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안내문에는 도올 김용옥이 쓴 ‘해월 최시형에 관한 글’과 ‘동학과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다. 무심히 지나치던 동상의 의미가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황성공원에 세워진 해월의 동상은 단순한 기념 조형물이 아니다. 이는 동학이 추구했던 인간 존엄과 민중 주체의 사상을, 경주라는 고도 한가운데 다시 불러내는 정신의 상징이다. 천년 왕도의 북쪽 가장자리에 조용히 놓인 해월의 동상은, 존재만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고 있는가.” 박목월과 오세재의 시비가 자연과 언어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편, 해월 최시형의 동상은 인간과 삶의 무게를 품는다. 황성공원은 그렇게 문학과 종교, 역사와 사색이 교차하는 경주의 살아 있는 정신 지도 위에 서 있다. ■신라의 터에서 경주 시민의 공원으로 숲을 빠져나오며, 오래된 나무 한그루를 돌아본다. 바람 한 줄기 잎을 흔들고, 그 흔들림은 문득 마음속 어떤 결을 건드린다. 황성공원은 단지 그렇고 그런 도시공원이 아니다. 신라 귀족의 사냥터였고, 화랑들의 훈련장이었으며, 이제는 시민들의 일상이 스며든 공공의 숲으로 거듭났다. 계급과 시대, 목적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은 목적과 형상을 바꿔왔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늘과 바람, 그리고 숲에 깃든 쉼의 본질이었다. 통일신라의 북방 균형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인공의 숲은, 천 년 뒤 경주 시민들의 활력이 되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이 놀이기구 사이를 누비고, 맥문동 꽃밭 사이엔 어머니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또 노년의 고요한 산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숲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숲을 가꾼다. 도시의 소음 속으로 걸어 나오며 자꾸 마음이 거기 남는다. 숲의 그림자가 멀리까지 따라 나와 어깨 위로 길게 드리운다. 황성공원은 나무를 심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묻고 되새기는 장소다. 왕도의 북방을 지키던 인공의 숲에서, 민중의 삶을 품는 공공의 공원으로 이어져 온 길 위에서, 나는 작은 물음을 품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무심히 스쳐 가며, 다만 이름만 기억한 채 그 자리에 깃든 삶들을 외면하고 있는가. 오늘 한 이름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황성이라는 말 아래 겹겹이 쌓인 생의 결들을. 그 결이 가만히 내게 말을 건넨 하루다. 조용히, 그러나 오래 남는 말. 황성공원은 그렇게, 오늘도 하나의 시(詩)가 되어 경주 시민의 마음을 두드린다.

2025-07-09

소백산 산길 따라 절경·계곡·폭포··· 굽이마다 천년고찰

유·불 문화의 고장 영주시는 가는 곳곳마다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고 골골이 전해오는 이야기가 풍성하다. 영주시는 역사 유적, 관광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품 등 다양한 자원과 함께 소백산이란 우수한 자연 자원도 품에 안고 있다. 영주시의 많은 볼거리 중 소백산을 중심으로 이색적이며 풍부한 감성과 자연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둘러본다. 2km 구간에 펼쳐진 죽계구곡 ‘절경’ 새로 복원된 죽령 옛길 탐방객 ‘러시’ 28m 희방폭포 웅장한 물줄기 ‘매료’ 부석사·희방사 등 천년고찰 ‘명승’ □ 소백산국립공원 하늘 아래 야생화의 천국 소백산 국립공원. 빼어난 절경과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소백산은 국내 12대 명산중의 하나다.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소백산은 한반도의 남단을 북동과 서남을 양분하며 비로봉을 비롯해 국망봉, 연화봉, 제2연화봉을 거느린 소백산맥의 모산이다. 소백산은 계곡, 능선, 탐방로 등 각각의 풍광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철쭉군락과 주목군락, 야생화 군락이 대표적 비경으로 꼽힌다. 소백산 정상부는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초본 식물의 분포가 높음에 따라 4계절 중 겨울을 제외하고는 야생 초본 식물로 뒤덮여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 죽계구곡과 희방폭포 퇴계 이황이 빼어난 절경에 빠져 이름 지었다는 죽계구곡. 죽계구곡은 소백산 동쪽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에 위치하고 초암사 앞 제1곡을 시작으로 삼괴정 근처의 제9곡까지 약 2km 구간에 걸쳐 흐르는 계곡이다. 죽계구곡은 각 곡마다 이름이 명명되어 있다. 제1곡은 금당반석(金堂盤石)으로 금당은 석가모니불을 모셔두는 건물이나 크고 화려한 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제2곡 청운대(靑雲臺)로 주세붕은 소백산 흰 구름이 비추는 곳이라 해 백운대라 했고, 이황은 소수서원 백운동과 구별할 수 있도록 청운대로 바꾸었다 전해진다. 제3곡 척수대(滌愁臺)의 척수는 이백의 `우인회숙`이란 작품에서 인용된 것으로 세속적 근심을 말끔히 씻어낸다는 뜻이다. 제4곡 용추비폭(龍湫飛瀑)는 용이 구름비를 뿜는 듯하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제5곡 청련동애(靑蓮東崖)는 청련암 동쪽에 위치했다 해 붙여졌고, 제6곡 목욕담(沐浴潭)은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을 듯한 바위와 숲에 가려진 웅덩이에서 유래했다. 제7곡 탁영담(濯纓潭)은 초나라 굴원이 지은 `어보사`에서 인용한 글로 마음의 때를 맑은 물에 씻어낸다는 뜻이다. 제8곡 관란대(觀瀾臺)는 물의 여울목을 보면 그 근원을 안다는 뜻으로 근본에 대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제9곡 이화동(梨花洞)은 주변에 배꽃이 많았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또, 희방폭포는 높이 28m로 수량이 많아 그 소리가 웅장하고 청량함과 상쾌함, 무게감을 줘 탐방객들의 발길을 묶어두기도 한다. □ 죽령 옛길 많고도 많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는 명승 제30호 죽령옛길. 조선시대 부산에서 한양을 향하는 가장 중심이 되었던 옛길이다. 영남대로 중간에 위치하고 또 가장 넘기 힘든 구간이였다. 장원급제해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했을 선비들과 사람 많은 한양에 물건을 팔러 떠나는 장사치 등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영주시는 죽령 옛길이 복원되자 탐방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복원된 죽령 옛길은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거리가 짧아 남녀노소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희방사역에서 소백산을 오르는 등반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죽령 옛길은 신라 8대 임금 아달라이사금이 영토 확장을 위해 소백산맥 넘어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죽죽에게 명령해 만들어진 길이다. 죽령 옛길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도로, 철도 등이 건설되면서 사실상 통행로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잊혀졌었다. □ 소백산 내 유명한 사찰 부석사(浮石寺)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왕명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찰로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며 이 절을 창건한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창건 설화를 간직했다. 중요 문화재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국보제18호)과 조사당(국보 19호),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45호), 조사당벽화(국보 46호), 석등(국보 17호), 3층 석탑(보물 249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220호) 등이 있다. 비로사(毘盧寺) 680년(문무왕 2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로 비로사 입구 좌측 위에는 높이 4.8m의 신라시대에 조성된 영주삼가등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비로사 경내에는 거북받침 위에 비신을 세운 진공대사 보법탑비가 있다. 이 밖에도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영풍 비로사 석아미타 및 석비로자나불좌상과 석아미타불이 있다. 희방사(喜方寺) 643년(선덕여왕 12) 두운이 창건하고 호랑이에 얽힌 창건 설화가 전하고 있다. 1850년(철종 1) 화재로 소실돼 강월(江月)이 중창했다. 한국전쟁 때 4동 20여 칸의 당우와 사찰에 보관돼오던 월인석보 권1과 권2의 판본(版本)도 함께 소실됐으나 주존불(主尊佛)만은 무사해 두운이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봉안하였다가 1953년에 주지 안대근(安大根)이 중건한 뒤 대웅전에 봉안했다. 문화재로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26호인 동종(銅鍾)과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높이 1.5m와 1.3m의 부도 2기가 있다. 성혈사(聖穴寺) 국망봉(國望峯) 중턱에 있는 성혈사는 원래 작은 암자였으나 계곡 일부를 다진 뒤 승방(僧房)과 나한전을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해 사역(寺域)을 넓혔다. 보물 제832호인 나한전은 1984년 보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553년(명종 8)에 처음 지어졌고 1634년(인조 12)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유석사(留石寺) 유석사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의상조사가 이 절 앞에 있던 느티나무 아래 반석에서 묵고 간 일이 있다고 해 유석사라 불리는 것과 인근에 있는 희방사를 희사한 경주의 호장(戶長) 유석(兪碩)이 두운조사와의 인연을 길이 기념하고자 세운 절이라는 뜻으로 유석사라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역사의 아픔인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 사사된 금성대군 신단,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천천히 걸으면 걸을수록 좋은 육지 속 섬마을 무섬마을과 외나무 다리, 소수서원 옆 선비촌과 선비세상은 빠쁜 일상속에서 쉬어가는 공간이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5-07-09

인공적으로 산과 숲을 조성한 고성숲, 화랑과 귀족의 옛 터

경주를 적신 형산강물이 남쪽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강을 따라 이어진 둔치 산책로를 걷다 보면 수크령과 무성한 갈대숲에 넋을 잃기도 한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물 위를 유영하는 철새나 풀숲에 몸을 숨긴 들짐승과 뜻밖에 마주치기도 한다. 초여름 열기 속 경주를 거닐고 있다. 아스팔트는 뜨겁게 달궈지고, 햇살은 이글거리며 목덜미를 찌른다. 걷지 않고 숨만 쉬어도 땀으로 옷이 젖는다. 후덥한 공기 속을 걷다 ‘황성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보게 된다. 더위 때문인지 반갑다. 왜 하필 ‘황성’일까. 새삼스럽게 이름을 곱씹으며, 이름을 따라 걷는다. 황성공원은 형산강과 북천이 만나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닿는다. 화랑들은 활쏘기와 기마술을 수련하고 귀족의 사냥터로 쓰인 군사와 사교 공간 현재 규모는 약 102만 4천㎡에 이르러 소나무와 맥문동이 초록을 틔우는 봄 여름엔 나무와 꽃, 아이들의 웃음 가득 가을이 되면 나무 잎마다 단풍이 들고 10월에는 역사와 축제의 무대로 변신 숲이 가장 깊어지는 가파른 언덕 위엔 침묵의 기둥처럼 서 있는 김유신 동상이 장군의 생애와 전쟁, 고뇌까지 엿보여 ■황성(皇城)이라는 이름 지쳐갈 무렵 숲이 열렸다. 황성공원의 나무들이 한껏 무성해진 채 그늘을 드리운다. 발을 들이는 순간 공기의 질감이 달라진다. 촉촉한 흙내와 시원한 녹음이 가득하다. 언뜻 보아도 오래된 나무들이 한결같은 자세로서 있다. 누구를 위한 그늘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누구나’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니까.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 때, 비로소 그늘의 깊이를 느낀다. ‘쉼’이라는 것을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인 듯싶다. 경주의 옛 도읍, 서라벌은 반월성을 중심으로 산과 물이 교차하는 땅이다. 서쪽에는 선도산이, 동쪽에는 토함산이, 남쪽에는 남산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산들은 경계를 이루고, 물은 그 안에서 감돌았다. 남천과 서천이 서라벌의 심장을 적시고, 북천은 그 위를 감싸 흐르며 도읍의 숨결을 식혔다. 다만 북쪽은 상대적으로 허했다. 천년 고도는 그런 공백을 오래 두지 않았다. 통일신라 시대, 북천 건너 고성숲이 조성되었다. 허한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언덕을 쌓고 나무를 심어 산과 숲을 만든 것이다. 단지 풍수의 보완이 아니라 도시의 균형을 맞추는 일종의 사유(思惟)였다. 신라는 인공 조성된 숲을 북방의 벽으로 삼았다. 바로 지금의 ‘황성공원’이다. ‘황성(皇城)’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황제의 성’ 또는 ‘황제의 도읍’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경주의 ‘황성’은 단순한 나라의 수도 개념과는 다르다. 이 명칭은 조선 후기부터 근대기 사이에 경주의 고성숲 일대를 부르며 정착된 것으로, 본래 이곳이 신라 왕경의 북방 경계에 해당하며 궁성과 왕릉군, 화랑의 훈련장 등 중심 공간을 둘러싸는 방어적·상징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를 ‘황성동’ 또는 ‘고성동’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이후 근대적 행정구역 정비와 함께 ‘황성’이라는 이름이 공원과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 ‘황성’은 단순한 지명 그 이상으로, 한때 왕도의 북편을 지키던 나무와 토성, 그리고 기억의 층위가 겹겹이 쌓인 의미 깊은 이름이다. ■황성공원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 원래 분지였던 땅을 풍수지리에 의해 인공적으로 산과 숲을 조성한 것이 고성숲(古城叢) 이다. 현재 규모 약 102만 4천㎡에 이른다. 이 숲은 신라 화랑들의 심신 수련 터이자, 귀족들의 사냥터로도 쓰였다. ‘화랑세기’ 등 역사서에도 화랑들이 고성숲에서 무예 훈련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숲이 단순한 녹지 공원이 아니라 신라 청년들의 기상을 기르는 장(場)이었음을 보여준다. 삼릉이나 남산 못지않게 멋스러운 소나무 숲 아래에서 화랑들은 활쏘기와 기마술을 익혔고, 귀족들은 사냥을 통해 교양을 다졌다. 이는 곧 경주가 단순한 왕도뿐 아니라 전통적 군사와 사교의 공간으로서 기능했음을 말한다. 당시 숲은 성장과 훈련, 의식이 공존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한편 귀족들의 사냥터로 기능하며, 왕실과 고위층의 사교 공간으로도 역할을 했다. 사냥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의례였으며, 숲에서의 사냥터는 권력과 위상을 드러내는 또 다른 무대이기도 했다. ■ 경주 가장자리 숲 경주의 북쪽, 도심의 한 마디를 이루는 자리. 경주시립도서관과 실내체육관을 지나면 울창한 나무숲이 문을 열어젖힌다. 도시 가장자리에 놓인 숲이다. 공원 내부에는 경주예술의전당과 시민도서관이 있다. 아이들이 들락이는 물놀이장이 여름마다 열리고, 공설운동장과 씨름장, 국궁장도 들어서 있다. 체육과 예술, 문학과 교육이 모두 이 숲 안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숲이 도시의 외곽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방식이다. 숲의 진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러난다. 봄이면 소나무숲 사이로 맥문동이 초록색을 틔우고, 여름이면 보랏빛 맥문동꽃 천지가 된다. 나무 그늘 속, 푹푹 찌는 무더위도 숲에서만은 잠시 비껴간다. 바람 한 줄에 잎사귀가 흔들리고, 아이들의 웃음은 숲의 빈틈을 메운다. 나무와 꽃과 흙과 웃음이 한데 뒤섞여 여름날의 숲을 이룬다. 가을이 되면 숲은 조용히 몸을 물들인다.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잎마다 단풍이 들고, 숲길은 발소리마저 부드럽게 받는다. 숲은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누군가의 이름도 묻지 않는다. 그저 한 철을 충실히 살아내며 단풍을 떨궈 자신의 한 생(生)을 덮는다. 10월 초순, 숲은 역사와 축제의 무대가 된다. 경주의 축제 신라문화제가 황성공원 일대에서 열린다. 격년으로 이어지는 축제는 도심 숲을 다시 신라의 시간으로 되돌려놓는다. 문화유적 답사에 지친 이들이, 여행자들이 한나절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가 된다. ■김유신의 기마상을 보았소 황성공원의 숲이 가장 깊어지는 지점,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는 가파른 언덕 위에 하나의 형상이 솟아 있다. 말의 앞다리가 치켜 들렸고, 기수는 단단한 눈매로 북쪽을 응시한다.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다. 황성공원 내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에 놓인 이 동상은, 단지 영웅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넘어선다. 거대한 기단 위, 그 무게는 물리적인 쇠붙이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장군의 생애와 전쟁, 신라의 통일과 그 이면의 고뇌까지 얹혀 있다. 높이도 높이지만, 시선의 방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기마상은 남쪽을 향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1975년, 대통령의 지시에 방향이 바뀌었다. 나라의 기운은 북에서 시작된다는 해석 아래, 북향으로 조형을 틀어 다시 세우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2년 뒤인 1977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북쪽은 승리를 향한 방향이었고, 침입을 막는 결의였다. 북천 너머 도심을 바라보는 김유신 장군의 형상은, 단순히 조형적 수정을 넘어 시대가 요구한 상징의 방향이었다. 왜 하필 이 자리에, 김유신의 기마상을 세웠을까. 숲을 걸으며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김유신은 실존한 무장이었다. 신라의 통일을 이끈 장수였고, 화랑의 귀감이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높은 봉우리에 우뚝 세운 것은 단지 전쟁의 영광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 필요했던 건, 천년을 지나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상징이었다. 자연과 도시의 경계 위, 숲과 하늘 사이, 침묵의 기둥처럼 서 있는 김유신의 동상은 지금도 말없이 묻는다. 진짜 높은 것은 어디에 있는가. 힘인가, 믿음인가, 아니면 그 둘을 꿰뚫는 의지인가. 기마상의 눈빛은 오늘도 북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다. *황성공원 내에 세워진 비(碑)에 대한 이야기는 (하) 편에 이어집니다.

2025-07-02

신라의 그림자 위에 펼쳐진 시간의 겹 황리단길

■경주의 또 다른 매력 황리단길 경주라는 오래된 고도(古都) 속에서, 황리단길의 출현은 뜻밖이었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이질적인 시각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황리단길(皇理團길, Hwangridan-gil)은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과 황남동에 걸쳐 있는 좁은 도로이다. 내남사거리에서 시작해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로, 원래 ‘황남동의 경리단길’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된 이름이다. 이 거리에는 1960~70년대의 옛 주택을 개조한 상점과 한옥 구조의 카페, 식당, 사진관, 펜션, 게스트하우스가 다수 들어서 있다. 특별한 건물 양식 없이 모양을 달리한 구조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골목마다 색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매력이다. 황남동과 사정동 일대를 잇는 포석로 구간, 한때는 주민들의 통학길이자 생활 도로였던 좁은 골목이,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발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것도 외국인과 젊은이들의 발길이었다. 그렇다고 오래된 저층 주택과 상가, 한옥의 낡은 기와지붕을 허물 지도 않았다. 마을이 간직한 시간을 존중한 채, 새로운 감각이 덧씌워진 것이다. ■불과 십 년 만에 번화가로 황남동과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의 이름을 따 ‘황리단길’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약 십여 년 전이다. 경리단길처럼 개성 있는 카페와 공방, 소규모 상점이 들어서며 황리단길 골목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고 키워왔다. 옛 동네의 골격 위에 덧입힌 젊은 감각은 도시재생이 아니라 ‘시간의 공존’이었다. 황리단길을 찾는 사람들은 단지 관광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신라 고도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장면과 여행의 멋을 찾으려는 것이다. 한복을 입고 대릉원 돌담 앞에 선 청춘의 얼굴, 경성풍 복장을 하고 셀프 사진관을 찾는 외국인 여행자의 눈빛. 이곳에서의 ‘인생샷’은 단지 기념사진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표정을 한 컷에 담아내는 또 다른 여행 방식이다. 사진은 단지 흔적이 아니라 해석이 되고, 그 해석은 또 다른 미래를 향해 가는 여정이다. 누군가는 상점에서 파는 물건을 고르고, 또 누구는 오래된 기와와 담장의 이끼를 보며 시간의 결을 더듬는다. ■골목을 살아가는 사람 골목을 살려낸 이들은 마을 주민과 또는 외지에서 들어온 현재의 골목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황리단길을 이끌어가는 상점의 주인들은 단순히 가게를 운영하는 장사치가 아니다. 오래된 상가를 자신이 추구하는 개성에 맞게 고쳐 나갔다. 구조는 살리고 내벽을 수리하여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카페, 신라 유물을 모티프로 디자인한 굿즈를 파는 소품점, 여행자들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조용한 공간을 내어주는 책방. 그들은 지역의 고유한 감성과 외지인의 시선을 균형 있게 조율하는 숨은 디자이너를 자처했다. 누군가는 경주 토박이로, 누군가는 다른 도시에서 이주한 예술가로 거리와 골목을 살아내며 또 다른 경주의 얼굴을 만든다. 황리단길은 신라와 단절된 거리가 아니다. 첨성대에서 대릉원으로, 다시 황리단길로 이어지는 도보 여정은 하나의 선이자 하나의 공간이자 연결된 시간이다. 대릉원 고분의 봉분은 여전히 침묵하지만, 주변을 걷는 이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신라의 시간은 신라에만 정체되어 있지 않고 흐르고 흘러 지금의 황리단길에 이른다. 골목마다 세워진 안내판, 상점 이름 속 ‘황남’, ‘월성’, ‘화랑’, ‘신라’ 같은 단어는 고대가 흘러온 현재의 시간임을 증명해 준다, 굿즈 속에 재해석된 천마총의 문양은 이 골목에 세워진 신라의 기억을 복원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리는 법을 알고 있을 뿐이다. 황리단길을 단순히 유행의 거리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황리단길은 유행의 장소가 아니라 감각이 축적된 공간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한때를 대표하는 유행의 흐름이 아니라, 쌓이고 엉기고 머물며 완성돼 나가는 곳이다. 한때의 유행이 골목 돌담과 건물 외벽을 스치고 지나가더라도, 매일 차를 준비하고, 빵을 굽고, 요리를 하는 손길은 변함없을 것이다. ■황리단길의 표정 낡은 기와지붕 아래 담긴 계절의 빛이 묵묵하다. 이 골목의 매력은 화려함보다 차분함에 있고, 유행의 선단에 서기보다 오래된 감각을 가만히 껴안는 데에 있다. 걸을수록 느껴지는 거리의 표정은 일회성이 아니다. 한 계절의 풍경이 다음 계절을 향해 준비하고 또 다음 해를 준비하는 것으로 일상은 시작된다. 이렇게 감각은 층층이 쌓여 거리를 만든다. 황리단길은 계절마다 표정이 달라지고, 시간마다 향기가 다르다. 봄엔 산수유와 벚꽃과 장미, 여름엔 푸를 숲 아래 땀이 밴 채 대릉원 담장과 커피잔의 얼음 소리, 가을엔 핑크뮬리와 낙엽과 어깨에 내려앉는 바람, 겨울엔 고요한 기와지붕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은 첫눈까지. 이 거리의 아름다움은 장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풍경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풍경이며, 다시 걷고 싶은 장면이다. 신라의 수도가 지금의 젊음을 품어 안고 있다는 것, 그것이 경주 황리단길의 가장 깊은 정서다. 계절마다 표정이 달라지고, 시간마다 향기가 달라지는 건 황리단길 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걷는다는 건 골목을 읽는 것 대릉원 서쪽 담장을 따라 걷는다. 낮은 돌담 너머 봉분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위로 흰 구름이 무심히 흘러간다. 초록빛 잔디밭 사이로 잔잔한 바람이 지난다. 발끝에 닿는 흙길의 부드러움, 담장 아래 핀 들꽃의 향기,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걷는다는 것은 도시의 시간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골목은 더 이상 지도의 한 줄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로 변해간다. 좁은 길 안쪽으로 접어든다. 햇살이 벽돌 담장에 부딪히고,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찻잔의 시원한 냉기가 맴돈다. 붉은 벽화와 고요한 조명, 작은 의자와 나무 선반, 그 위에 놓인 손바닥 크기의 엽서. 천마총의 문양을 새긴 엽서 한 장을 집어 든다. 신라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이 작은 종이 위에서 겹쳐진다. 마음이 먼저 머무는 풍경이다. 흙, 종이, 시간, 모든 것이 가볍게 쌓인다. ■불편한 것도 새로움이 되는 거리 구름이 밀려오고 바람이 강해진다. 사람들이 서둘러 골목 안으로 몸을 들이고, 한옥 처마 밑으로 모인다. 기와가 빗방울을 받기 시작하고, 붉은 벽돌마다 동그란 물방울이 맺힌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갇혔어도 사람들은 그저 행복해한다. 기와가 빗방울을 받기 시작하고, 붉은 벽돌 바닥에 동그란 물방울이 떨어져 터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웃으며 비를 피하고 또는 비를 기꺼이 맞는다. 이마저도 여행의 또 다른 경험이 되니까. 어느 도시에 서든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 땅의 질감과 정서를 온몸으로 겪는 경험은 단지 날씨에 대한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젖은 길과 흐려진 유리창, 축축하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도시의 감정은 천천히 드러난다. 이 순간이 도시를 걷는 추억이 되고 기억으로 남는다. 황리단길을 걷는 이들은 이런 평범하지 않는 이변의 순간을 통해 거리의 본모습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오래된 벽과 젊은 간판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시간을 잇는 선이 되고, 느릿하게 걷는 걸음은 현재와 과거의 결을 동시에 더듬는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장소는 잊히지 않는다. 황리단길은 그렇게 지금의 계절과 오래전의 시간 사이를 잇는다. ■경주를 걷는 외국인 오늘은 유독 외국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긴 머리카락, 선글라스,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걷는 이들은 낯선 나라의 골목이 신기한 듯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때로는 외국인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한쿡 사람이에요?” 하고 물어오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그들은 아주 해맑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자국의 언어 대신 조심스레 내뱉는 서툰 한국어 몇 마디 속에, 이들이 얼마나 대한민국, 경주라는 도시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엿보게 된다. 이들은 단순한 관광의 한국이 아니라, 낯선 나라의 거리와 마음을 먼저 존중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 조심스러운 태도는 마치 오래전 신라의 문을 두드렸던 사신의 발걸음처럼, 낯섦 속의 예의를 담고 있다. 이방인조차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도시, 이것이 오늘 황리단길의 모습이다. 경주의 골목들을 오래 걸어왔고, 시장의 깊은 안쪽까지 둘러보았지만, 황리단길처럼 젊은 얼굴이 가득한 곳은 보기 드물다. 평일 오전인데도 카페마다 자리가 없고, 셀프사진관 앞에는 줄이 길다. 한복을 차려입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걷고, 혼자 여행 온 듯한 이는 가방을 어깨에 맨 채 유물 엽서를 홀로 만지작거린다. 각자의 여행이 각자의 모습으로 교차하고 있다. 경주는 여전히 유서 깊고 고요한 도시지만, 황리단길 거리만큼은 다르게 숨 쉬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행의 한 장면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단지 예쁜 가게가 아니라, 이 골목을 진심으로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수제도장 가게 안에서 열심히 인장을 새기는 손, 천마총을 닮은 디자인을 진열하는 상점 주인의 시선, 사진관에서 필름을 감는 청년의 몸짓. 이 거리의 젊음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고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다.

2025-06-25

형상을 넘어, 마음을 빚다 경주, 고려 청자를 부르다

경주박물관, 신라의 도시 경주에서 8월 24일까지 고려청자 특별전시회 유리관 너머 상감청자·상형청자 통일신라 시대 형상토기가 기원 이야기 품은 신비로운 푸른 자기 고려시대 유물 실제로 볼 수 있어 ■경외의 비색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실 앞, 사람들의 발걸음이 잠시 머뭇거린다.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청자 특별전을 마주하기 위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이다. 제목이 먼저 시처럼 다가온다. 전시실 문턱을 넘는 순간, 모든 소리가 묻힌다. 사방으로 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걸음이 조심스러워지고, 말소리는 낮아진다. 전시실 내부는 고요하지만, 고요는 비워진 것이 아니라 꽉 채워진 무게를 품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비색의 기물 앞에서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조용히 머뭇거린다. 침묵이 아니라 경외다. ■1부 그릇에 형상을 더하다 경주박물관은 언제나 새롭다. 그러나 이번은 새롭다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고대 신라의 숨결이 배어 있는 박물관에서, 뜻밖의 고려 형상과 마주하고 있다. 도록 속 사진으로만 접했던 귀하디귀한 상감청자와 상형청자를 처음 만난다. 유리관 안에 놓인 푸른 도기들은 하나같이 신비롭다. 어떤 이야기를 품은 듯 시선을 강하게 끈다. 흙과 불, 빛깔의 언어로 건네오는 말들 속에 사람과 동물, 식물과 신령한 존재들이 고요히 말을 걸어온다. 전시의 서두는 고려청자의 뿌리를 통일신라의 형상토기에서 찾고 있다. 월지에서, 구황동 원지에서, 딱딱하게 굳은 흙이 되어 누워 있던 사자와 오리, 새와 말의 형상들이 청자의 몸으로 되살아난다. 이런 형상들은 단지 고대의 유산이 아니라, 고려인의 사유 속에서 다시 태어난 기억이다. 지금, 나는 고대의 어떤 시간의 곁을 지나고 있다. 옛사람들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상상력이 실용을 넘어 조형미로, 조형미를 넘어 삶의 감각으로 번져가는 순간을 생생히 체감하고 있다. ■2부 제작에서 향유까지 시선은 역사의 흐름처럼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다. 그릇이 아니라 존재다. 조롱박의 부푼 곡선, 복숭아의 매끈한 살결, 석류의 탱탱한 껍질, 오리의 부리와 깃털까지도 지금 눈앞에서 생명처럼 숨을 쉰다. 고려의 상형청자들은 단지 자연을 본뜨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실재하는 그릇의 형상으로 상상을 정교하게 붙잡는다. 귀룡은 비늘마다 왕의 권위를 두르고, 어룡은 물결을 가르듯 유려하게 휘어진다. 기린의 발굽 아래엔 구름이 감기고, 연꽃은 천상의 질서를 따라 피어난다. 신화의 동물들이 흙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광경 앞에서, 상상은 실재를 능가한다. 고려인의 조형 세계는 가히 경이롭다. 이처럼 눈앞에 놓인 도자기는 장식도, 단순한 생활 도구도 아니다. 그 안에는 상징과 실용, 욕망과 절제가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무늬는 정교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곡선은 아름답지만 흘러내리지 않는다. 화려함 속에 침묵이 깃들고, 과장이 아닌 균형이 선다. 청자의 선은 고려인의 마음의 질서를 말한다. 삶과 죽음, 신과 속, 세계와 자아가 그 안에서 교차한다. 나는 지금 이 푸른 그릇들 앞에 서서, 고려인의 정신이 빚어낸 또 하나의 우주를 마주한다. ■3부 생명력 넘치는 형상들 고려 사람들은 물가에 사는 오리나 물고기, 흙에서 자라는 복숭아나 조롱박 같은 자연의 형상들을 청자 위에 올려두었다. 형상은 향로가 되었고, 연적이 되었고, 술잔과 주전자가 되었다. 고려 장인들은 형상을 조각하는 동시에 삶을 담아냈다. 상형청자에 등장하는 용, 어룡, 귀룡, 기린, 사자와 같은 상상 속의 동물들은 예로부터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지며, 왕실과 귀족의 권위, 복과 수호를 상징한다. 이러한 청자는 단지 장식품이 아니라, 왕실의 의례에 사용되거나 귀족들의 삶에서 특별한 물건으로 기능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을 형상화하고, 그 형상이 다시 실용의 몸을 입을 때, 고려 청자는 상상과 실용이 만나는 신비로운 그릇이 된다. 아름다우면서도 절제된 곡선 속에 고려인의 마음의 질서가 함께 깃들어 있다. 곡선은 장인의 손끝을 넘어서, 고려인들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자 마음의 형식이다. 그 형식은 지금 우리의 시선 아래에서도 여전히 반짝인다. ■4부 신앙으로 확장된 세상 푸른 빛을 따라 전시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자, 형체 너머의 세계가 더욱 깊게 펼쳐진다. 불상과 향로, 도교적 상징이 새겨진 기물들이 유약의 광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릇이라 부르기에는 무언가 다르다. 푸른 형상들은 금속도 아니고, 목재도 아닌, 연약하지만 강한 흙과 불로 빚어진 신의 언어다. 신앙이란 무엇일까. 신에게 이르는 길이자,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깊고 넓게 확장해나가는 여정 아닐까. 보이지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손을 모으고, 마음을 다듬는다. 청자 위에 새겨진 곡선 하나, 그리움과 기도 사이에서 태어난 침묵의 문장이다. 신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기물 하나하나의 조용한 형상 속에, 피어오르는 향의 바람 속에 숨어 있다. 신은 없음과 있음의 경계를 나누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모호함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더욱 자신의 내면을 일깨운다. 고려인은 흙 위에 신을 모시고,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상상과 믿음을 쏟아부었다. 이 믿음이야말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맑고 투명한 청자의 빛을 탄생시켰다. 청자는 신에게 이르는 문이며, 동시에 인간의 가장 내밀한 기도가 스며든 그릇이다. 이 맑은 청빛은 단지 ‘아름답다’는 감탄이 아니다. 인간이 도달한 정신의 가장 높은 경지에서 피어난 하나의 형상이자 빛이다. 현실과 신비, 감각과 초월이 서로 뒤섞인 채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기물이다. 그 푸른 빛 앞에서 우리는 문득, 인간의 본성이 가진 가장 정제된 형태의 사유와 감정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존재를 초월한 빛이며, 언어를 초월한 고요다. 눈으로 목도한 청빛 속에, 나는 경계를 허물고 내 안의 신을 만나고 있다. ■손으로 느끼는 고려청자 전시의 끝자락, 완성된 상감청자 세 점이 놓여 있다. 손을 올리니 비색의 유약이 매끄럽게 감도는 표면을 따라 손끝이 미끄러진다. 유약의 결은 촉감으로도 반짝인다. 조각된 형상과 무늬의 결마다 고려인의 숨결이 가만히 우러난다. 흙의 기억, 불의 흔적, 시간의 결이 지금 내 손 안에서 살아나는 듯하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도기를 만지며, 나는 어느새 그 시절로 스며든다. 도공이 되어 흙을 빚고 말리고 유약을 발라 가마 앞에 선 듯, 무늬 하나를 새기기 위한 호흡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청자의 표면을 따라 흐르는 정제된 빛은 그저 유물의 표면이 아니라, 내가 잠시 빌려 쥔 과거의 감각이다. 그 빛 안에, 나는 청자를 빚는 손을 상상하고, 그 안에 깃든 마음을 만지고 있다. 비색의 곡선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곡선은 시간을 감싸고 나를 바라본다. 고려의 상형청자는 단지 도자기가 아니라, 감각과 세계관, 그리고 고요한 사유의 그릇이었다. 이번 전시는 그 아름다움 속에서 묻혀 있던 정신의 깊이를 우리에게 비추어준다. 나는 한 줄 청빛을 품는다.

2025-06-18

경주박물관 100년, 제국의 전리품에서 민족의 자존으로

■총독도 놀라게 한 경주, 민심 경주 사람들의 저항에 총독부는 당혹했다. 문화정치를 내세우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조차 민심의 폭발 앞에 흔들렸다. 경북지사는 “경주 주민이 유물이 경주고적보존회에 보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문장을 보고서에 실어 총독부에 올렸다. ‘지방민의 의향을 고려해 보관을 결정하겠다’는 모호한 회신이 도착했다. 경주 사람들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진정위원이 경성으로 올라가 총독과 정무총감을 직접 면회했다. 결국 총독부는 금관의 경주 보존을 약속했다. 경주의 저항은 단순한 금관의 보존이 아니라, 역사적 정체성과 자존의 수호였다. 경주 시민의 피땀어린 모금으로 지은 ‘금관고’ 마침내 경성으로 갔던 금관 다시 돌아와 안치 금관 존치 운동 민족의 뿌리 확인시키는 계기 광복 이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우리 품으로 1975년 7월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 시대 열어 명칭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변경 올 10월말~11월초‘2025 APEC 정상회의’ 열려 국립경주박물관 또 한 번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시민의 모금으로 지은 금관고 ‘금관은 경주에 있어야 한다’는 경주 사람들의 외침에, 일제는 ‘보관할 곳이 없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경주 사람들은 곧장 대답했다. ‘우리가 돈을 내겠다.’ 금관고 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금관고는 경주 시민이 피와 땀으로 지은 기념비였다. 일본이 설계하고 자재를 공급했을지언정, 경주 사람들의 뜻으로 세워진 저항의 건축이었다. 1923년, 마침내 금관고가 세워졌다. 조사와 기록을 위해 경성으로 갔던 금관이 다시 경주로 돌아와 안치되었다. 금관고는 침탈의 시대에 솟아오른 민중의 반격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왕조의 후예다’라는 의식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얻은 순간이었다. 금관 존치 운동은 경주 사람들의 의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후 동아일보가 나섰다. 금관의 발굴과 의미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영화사들은 신라의 유물과 예술을 주제로 영사대를 조직했고, 사진과 설명이 담긴 강연이 전국을 돌았다. ‘조선의 문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의 학교들이 움직였다. 수학여행 1순위로 경주를 정했다. 학생들의 끊임없는 발길이 석굴암과 불국사, 금관과 마주했고, 민족의 뿌리를 확인 시켰다. 경주는 ‘우리는 누구인가’를 물어온 눈부신 질문이자, 위대한 민족의 후예들이라는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1923년 5월까지 금관고를 찾은 관람객은 약 2만3천여 명이었다. 금관고가 주요 관광지로 자리를 잡자, 일제는 확장에 나섰다. 1926년 6월 30일, 진열관 처마 밑엔 일장기가 펄럭였고, 검은 글씨로 음각된 새 현판이 정문 위에 걸렸다.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명칭만 바뀌었을 뿐, 야욕은 그대로였다. 진열관의 유리는 윤이 나도록 닦였고, 전시장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모습으로 손님을 기다렸다. 제복의 순사들이 절도 있게 어깨를 펴고 서 있었고, 마당엔 초대 인사들의 자리가 미리 정돈되어 있었다. 총독부 고관들, 경북의 관료들, 고적보존회의 인물들이 삼삼오오 천막 아래 모였다. 그날 경주의 하늘 아래, 신라의 기억은 일장기 그림자 속에 숨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 자리의 주인이 되었다.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제록앙웅).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초대 분장 대리가 되었다. 그의 발밑에는 조용한 약탈의 자국이 겹겹이 밟혀 있었다. 그는 1908년 조선으로 건너와 1910년부터 경주에서 사실상 도굴을 통해 유물을 수집했다. 필자가 쓴 ‘『경주의 재발견』 2편 「신라 금관(상)」’ 편에서도 언급했듯, 1921년 금관총 발굴에 직접 관여했으며, 도굴한 유물을 팔거나 고관들에게 선물하며 경주의 문화 권력자가 되었다. 결국 만행이 드러나 1933년 5월, 유물을 도굴·판매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물관’ 개관과 함께 고적지 정비와 경주역 확장도 이어졌다. 경주의 문명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 대릉원 일대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어느새 경주는 ‘조선 최고의 고적 관광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는 문화유산의 힘이자, 기억이 머무는 장소가 가진 흡입력이었다. ■두 얼굴의 도시, 생계와 상처가 교차한 박물관 경주 사람들은 박물관 앞에서 복잡한 감정에 싸였다. 금빛 관이 유리 진열장 안에서 찬란히 빛날 때, 어떤 이는 조상의 영광이 되살아나는 듯 감격했고, 또 어떤 이는 무덤을 파헤쳐 세운 전시장이 야만처럼 느껴졌다. 손에 돈을 쥐고 조상의 유물을 바라보는 일은 낯설고 서글펐다. 그 유물은 원래 대가 없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들이었으니까. 진열장 앞에서 사진을 찍는 웃는 모습은 경외와 이질감이 동시에 일으켰다. 경주의 삶은 확연히 달라졌다. 진열장 주변에 골동품 가게가 생기고, 여관과 식당이 문을 열었다. 조상의 흔적이 남긴 길 위에서 삶을 도모해야 했다. 신라의 유산은 경제가 되었고, 민족의 자긍심은 상품 속에 녹아들었다. 박물관은 제국이 만든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제는 신라 유적, 조상의 유물을 제국의 전리품처럼 전시하며, 찬란함을 조선 지배의 정당성으로 포장했다.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표면 아래에는 조선을 문명화시켰다는 왜곡된 역사 의식을 퍼뜨리려는 제국의 속셈과 야욕이 숨겨져 있었다. 경주가 ‘민족 관광도시’로 불린 건 바로 이런 두 얼굴 때문이었다. 한 손에는 생계, 다른 한 손에는 상처와 긍지가 들려 있었다. ■광복 이후, 경주박물관의 재탄생 광복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던 1945년 10월 7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문을 열었다. 최순봉 관장과 직원들은 일본인들에게서 박물관 건물과 유물을 인수했다. 그해 겨울, 미군정의 협조 아래 부산과 대구에서 문화유산 회수 작업이 이뤄졌다. 사라졌던 유물들이 하나둘 경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듬해부터 경주박물관은 국립박물관 체계의 일원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에 참여하며 고고학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발굴의 역할은 단지 유물을 찾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과거를 되찾는 행위였고, 우리 손으로 역사를 쓰는 첫 줄이었다. 그러나 박물관은 위태로웠다. 경주문화원 자리에 세워졌던 옛 건물들은 대부분 한옥을 개조한 것이어서 화재에 취약했다. 유물은 늘어나고, 전시 공간은 턱없이 좁았다. 1950년대 중반, 연간 5만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유물을 보호하고 새로운 유물을 선보이기 위한 변화가 절실해졌다. 1961년, 온고각 뒤편에 2층 규모의 신관이 세워졌다. 경주박물관의 첫 확장이자, 자생적 발전의 신호탄이었다. 신관은 점점 복잡해지는 유물 보존과 전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금방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1960년대 중반, 도시 개발과 도로 확장이 이어지면서 경주 각지에서 유적 발굴과 함께 유물이 쏟아졌다. 유물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동부동의 박물관은 모든 것을 수용하기엔 너무 협소했다. 박물관은 더 넓고 안전한 공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66년, 박일훈 관장은 박물관 신축 계획을 세웠다. 여러 부처에 청원서를 보냈다. 1967년 4월, 대통령 지시각서 11호로 경주박물관 신축이 공식 결정되었다. 그해 가을, 새로운 터전을 위한 부지 조사도 시작되었다. 수많은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월성 남쪽 인왕동 들판이 새 부지로 정해졌다. 1968년 10월 4일, 첫 삽이 인왕동 땅을 갈랐다. 단지 건축의 시작이 아니었다.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새로이 담을 그릇을 만드는 일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 시대를 열다 인왕동 들녘에 신라의 심장을 다시 세우는 박물관을 지어야 했다. 단지 유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신라의 정신을 품은 공간이어야 했다. 건축가 이희태는 고뇌 끝에 설계도를 그렸다. 이희태는 해답을 탑에서 찾았다. 불국사의 불탑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지붕은 신라의 기와를 본떴고, 근정전 초석의 곡선이 바닥에 깔렸다. 뒤뜰에는 모조된 석가탑과 다보탑이 상징처럼 섰다. 원본에 쓰인 돌을 찾아 경주 외동의 화강암과 울주의 응회암을 가져왔다.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당대를 대표하는 석공 김부관이었다. 공사는 6년 넘게 이어졌다. 마침내 1975년 7월 2일, 국립경주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한 달 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인왕동 시대의 문이 활짝 열리며, 경주는 세계의 중심임을 알렸다. 1982년 7월 19일, 제2 별관인 월지관이 문을 열었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의 삶과 예술이 들어섰다. 2년에 걸친 발굴은 3만 점이 넘는 유물을 쏟아냈고, 그 유물을 품는 새로운 집이 월지관이 된 셈이었다. 2002년 5월엔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신라의 불교미술, 그 정갈하고 깊은 흐름을 담은 공간이 지금의 ‘신라미술관’이다. 돌과 흙에서 피어난 신라의 미학이 이곳에서 다시 숨 쉬기 시작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더는 과거의 창고가 아니다. 역사가 현재와 마주하는 살아 있는 무대가 되고 있다. 2025년 10월 말에서 11월 초, 국립경주박물관은 또 한 번 세계의 중심이 된다. 2005년 부산 회담 이후 2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국가 정상급 인사들이 모이는 역사적 회담의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경주박물관은 뜨거운 공사가 진행되는 중이다. <<하> 편에는 경주박물관 고려상감청자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2025-06-11

‘제국의 진열장에서 민중의 저항으로’ 경주박물관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경주고적보존회 금관총 유물진열관_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은 신라의 빛이 제국의 손에 들려 타오르던 공간이었다. 경주의 유산은 일제의 유리장 안에서 빛났고, 그만큼 어둠도 짙게 드리워졌다. ■햇무리 진 박물관 뜰 햇살이 뜨겁게 떨어진다. 박물관 정문은 숨조차 땡볕에 잠긴다. 사람들은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친다. 박물관 뜰 오른편엔 성덕대왕신종이 우람하게 서 있다. 청동빛은 햇살 아래서 더욱 단단해진다. 종은 더 이상 울리지 않지만, 보는 이의 가슴 한가운데를 두드린다. 경주엔 오늘 햇무리가 생겼다. 태양을 감싸고 도는 무지갯빛 고리가 신비스럽다. 사람들은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고 천체의 이변을 구경한다. 예로부터 하늘은 인간 세상을 관장하는 신의 영역이라 여겨졌다. 하늘 위에 펼쳐진 모든 천문 현상은 신들의 말이었고, 해는 그중에서도 왕의 징표이며, 하늘에 생겨난 빛의 환(環)은 하늘이 보내는 신호로 여겨졌다. 경주 하늘에 떠오른 햇무리를 보며 신라인의 믿음이 잠시 되살아난다. 인간이 작아지고, 신라가 다시 머리를 드는 순간이다. 박물관 뜰은 폐허를 딛고 온 절터 같다. 누가 따로 배치하지 않은 듯, 탑과 석불과 석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덕엔 탑이, 뜰엔 유물이 서로 제빛을 낸다. 귀부는 등을 돌린 채 말이 없고, 봉로대 위 연꽃 문양은 향로를 기다리는 듯 허공을 응시한다. 어쩌면 태초에 돌덩이였던 것들이 천 년을 품은 살아있는 영혼 같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오히려 스스로의 침묵이 깊어진다. 바람조차 걸림 없이 자연스레 스쳐 가는 걸 보면, 이 풍경이 깨나 오래 여기 있었던 것만 같다. 1913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 의해 수탈 공간 경주고적보존회 시작 경주부 관아 ‘내아’ 건물에 진열관 이차돈 순교비·석조 반가사유상 사찰 문화 유산·고미술품 등 전시 1921년엔 황금빛 ‘금관’ 처음 발견 “유물이 사라진다” 소문 떠돌더니 도쿄국립박물관 컬렉션의 목록에 분노한 경주 시민 “천고의 귀중품 천년의 땅에 있어야” 저항의 함성 서라벌전역 뒤흔들어 관람객들은 각자의 시선대로 문화유산을 바라본다. 누구는 돌 앞에 손을 모으고, 누구는 눈을 감는다. 아이는 종각 주변을 뛰어다니고, 노부부는 석불이나 석등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이국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외국인들조차 뭣하나 대충 보지 않는다. 언어는 흩어지지만 시선은 신라에 머무른다. 그러고 보면 시선은 고요한 서사를 껴안는 마음이다. 신라역사관은 자체로 하나의 서사다. 끝없이 푸른 하늘 아래, 지붕은 좌우로 길게 뻗어 유연한 곡선을 자랑한다. 바람이 불듯 자연스럽고 유려하다. 마치 이 땅의 능선이 박물관 지붕 위로 이어진 듯하다. 처마는 그늘을 드리우고, 햇빛은 천천히 지붕 위로 떨어진다. 나무와 돌, 유리와 그림자가 함부로 다투지 않는다. 모든 건축과 문화유산이 오래된 미감으로 제자리를 찾아 서 있는 것만 같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거대한 박물관은 찬란한 유물들로 가득하지만, 어느 한때, 역사의 어두운 그늘이 함께 놓여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긴 침묵의 시간을 살던 땅을 들추고 식민 권력의 박물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오늘의 박물관은 어두운 시간을 딛고 다시 세워진 우리의 거룩한 표상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보존’이라는 이름의 그늘, 일제강점기 경주의 침묵과 시선 1913년의 봄, 경주의 골목엔 바람결마저 낯설었다. 흙먼지가 이는 길을 따라 총독의 전용차가 석굴암을 향해 굽은 길을 올랐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 조선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인물이 경주에 닿은 것이다. 그는 석탑과 불상의 균형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고, 일본 관리는 수첩을 펴놓고 수시로 눈을 맞추며 그의 언어를 읽고 기록했다. 세밀한 시선이 고적을 더듬었다. 신라 천 년의 숨결 위에 새로 깃드는 통치의 질서가 그려지고 있었다. 경주고적보존회는 그렇게 태어났다. 신라의 역사가 살아 숨 쉬던 터에 일본은 ‘보존’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속내는 과거를 지키려는 의지보다 과거를 해석하려는 야망이 더 컸다. 경주에 터를 잡은 일본인들과 행정 관리들은 ‘보존’을 이야기하며 권리를 확보해 나갔고, 경주는 점차 하나의 ‘박물관’으로 변해갔다. ■경주고적보존회, 빛을 가둔 진열관 경주고적보존회는 조선 왕조 행정의 흔적인 경주부 관아 내아(內衙) 건물을 택해 진열관을 열었다. 현재 동부동에 있는 경주문화원 자리다. 1915년에는 조선시대 부사청과 양무당을 이축해 전시 공간을 넓혔다. 조선 총독 데라우치의 휘호 ‘온고각(溫古閣)’ 현판도 내걸었다. 논어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서 따온 ‘옛것을 익혀 새로움을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제의 새로움은 일본 제국의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단순한 유물 전시관이 아니라 과거의 권위를 대놓고 수탈하려는 공간이었다. 그들의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를 수집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식민 권력으로 역사마저 노골적으로 소유하려는 시도였다. 경주는 더 이상 우리들만의 도시가 아니라, 침묵하는 과거와 웅변하는 제국이 동시에 일어서는 도시가 되어 갔다.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은 역설의 공간이었다. 신라의 빛이 제국의 손에 들려 타오르던 공간이었다. 민족의 정수가 낯선 말로 해설되던 시절, 진열장은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미래를 빼앗는 창이었다. 경주의 유산은 일제의 유리장 안에서 빛났고, 그만큼 어둠도 짙게 드리워졌다. 낡은 기와 아래에 전시된 것은 단지 토기나 금관이 아니었다. 해체된 조선의 얼과 넋, 그리고 그들대로 함부로 해석된 조선의 정체성이었다. 유물은 일본말로 쓰인 설명문 아래 유리장 너머에 놓였고, 관람의 시선은 권력과 맞닿았다. 경주의 사찰과 능지에서 가져온 문화유산과 개인이 기증한 고미술품들이 전시되었다. 백률사에서 옮겨온 이차돈 순교비와 송화산에서 출토된 석조 반가사유상 등이 대표적이었다. 경주의 혼이 깃든 유물들은 유리 진열장 안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사람들은 감탄했지만, 감탄 너머에는 약탈된 자산의 통증이 도사리고 있던 셈이었다. 1916년, 경주 읍성 남문 밖 봉황대 옆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이 종각과 함께 진열관으로 옮겨졌다. 종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종은 신라의 아침을 울리던 음색을 잃고, 관람객을 맞는 하나의 구경거리로만 시간을 견뎌야 했다. ■신라의 빛, 금관의 출현 1921년, 하나의 관(冠)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금관총에서 찬란한 황금빛 유물과 함께 금관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경주고적보존회는 새로운 전시관, ‘금관고(金冠庫)’를 지었다. 경주 시민들의 기부로 세워진 금관고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찬탈된 유산을 간직한 보루가 되었다. 그러나 금관고는 일본의 문화 침탈을 은폐하는 가면이기도 했다. 금관고는 경주의 명소가 되었다. 반짝이는 황금 유물들이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 퍼졌다. 많은 관람객이 경주를 찾았다. 금관은 권력의 상징이었고, 권력은 제국주의의 빛으로 조명되어 갔다. 진열장의 조명이 밝아질수록 민족의 기억은 그림자 속에 묻혔다. ■문화유산을 향한 경주 사람들의 분노와 사수 1921년 9월, 금관이 처음으로 발굴된 이후 10월 14일과 15일, 일반인에게 임시 공개되었다. 4천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유물보다 사람들의 눈빛이 더 뜨거웠다. 이후 경주 골목마다 소문이 흘렀다. 유물 일부가 사라졌다는 것과 신라의 왕관을 경성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경주 민심은 흔들렸고, 거리엔 융숭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떻게 사라졌는가. 누가 가져갔는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것들은 도쿄국립박물관 오쿠라 컬렉션의 목록에 실렸다. 분노는 커졌다. 유물의 실종은 기폭제가 되었고, 금관을 경성으로 가져간다는 소문은 불씨가 되었다. 경주의 민심이 불붙기 시작했다.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 시대와 민족을 지키려는 저항이었다. 경주 사람들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두고 볼 수 없었다. ‘왕의 무덤을 왜 파헤치냐’, ‘우리 조상의 금관을 왜 가져가느냐’는 항의가 이어졌다. 장터에서, 학당에서, 사찰 마당에서도 말들이 이어졌다. 시민대회가 열렸다. 장정과 노인, 유생과 상인들이 하나로 모였다. ‘천고의 귀중품은 천년의 땅에 있어야 한다’는 구호가 종처럼 울렸다.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군중의 함성은 서라벌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는 단지 유물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체성의 사수였다. 경주 사람들은 단호했다. 전보를 쳤고, 진정서를 보냈다. 청원서를 손에 들고 대표자 열 명이 경성으로 향했다. 그들의 행렬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침묵으로 꾹 눌러 담은 조상의 분노와 무너진 자존의 무게가 함께 실려 있었다. * 시민 모금으로 만들어진 ‘금관고’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국립박물관’에서 ‘국립경주박물관’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다음 주 경주박물관 <중> 편에 펼쳐집니다.

2025-06-04

스승의 정신을 세운 옥산서원

조선학자 회재 이언적 서거 스무해 뒤 경주부윤 이재민이 유림 뜻 모아 창건 2년 뒤 1574년 선조로부터 사액 받아 영남 유학의 정수 고수란히 간직한 채 흥선대원군 사원 철폐령에도 남겨져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회화나무 그늘 길 옥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마치 나무들이 지켜주는 오랜 골목 같다. 회화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굴참나무, 이팝나무···. 이름만 불러도 그늘이 젖어든다. 가지는 하늘을 덮고, 뿌리는 땅을 움켜쥐었다. 특히 회화나무는 하나같이 백 년을 훌쩍 넘긴 듯 기품을 지녔다. 회화나무는 중국에서는 출세의 상징이고, 서양에서는 학자의 나무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길상목, 행운목으로 불린다. 예로부터 양반가에서만 심을 수 있던 귀한 나무였다. 집안에 학자가 나고 부자가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궁궐이나 고택, 서원의 뜰에 이 나무가 자리를 잡았고, 나무는 집의 품격이 되었다. 또한 회화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이기도 했다. 잡귀를 막고 복을 부르기 위해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로 심었다. 옥산서원의 회화나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지 길을 걷는 일이 아니다. 학문의 기운과 삶의 지혜를 함께 지나가는 일이다. 오래전 이 길을 따라 걷던 유생들, 글을 배우러 모였던 발걸음들이 아직 나무 아래에 남아 있는 듯하다. ■정신의 집 옥산서원 옥산서원에 이르렀을 때, 역락문(亦樂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른 아침, 닫힌 문 너머로 속세와 단절된 듯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자계천 세심당에서 한참 놀고, 독락당을 사색한 후 다시 왔을 때,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햇살이 문 위 편액을 부드럽게 비췄다. 독락당과 양동마을은 2010년(한국의 역사마을)에, 옥산서원은 2019년(한국의 서원)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옥산서원은 조선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기리는 정신의 집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스무 해, 선비들이 뜻을 모아 기둥을 세웠다.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유림과 뜻을 모아 창건한 옥산서원은 단지 제향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평생 닦은 학문의 격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고, 그를 스승으로 섬기려는 이들의 간절함이었다. 사액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 년 뒤였다. 선조 임금이 옥산서원에 이름을 내려줌으로써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 후학들이 스스로 터를 닦고 예를 세워 스승을 모셨다. 회재는 사후에 그런 존경의 이름이 되었다. 부드러운 학문이 아니라 엄격한 수양, 권력의 의지가 아니라 물러남의 품격으로 자신이 걷던 길 위에 후학들을 불렀다.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도 옥산서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남은 예로부터 글이 법이 되고, 예가 삶의 뼈가 되는 땅이었다. 들판마다 선비가 있었고, 골짜기마다 책 읽는 소리가 울렸다. 학문은 벼슬을 위한 계단이 아니라, 인간 됨의 바탕이었다. 서원은 한 시대 정신의 화석이었고, 스승과 제자의 약속이었으며,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작은 세계였다. 조선의 육백여 개 서원 가운데 무려 이백여 개가 넘는 서원이 경상도 땅에 있었다. 조선시대 서원철폐령으로 폐쇄한 뒤에도 전국 오십여 서원 중 열네 곳이 영남 지역에 남았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한 지역의 기개와 정신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증거다. 그만큼 유학은 생존을 넘어 저항이었고 실천이었으며, 정신 그 자체였다. 옥산서원은 그런 영남 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서린 곳이다. ■역락문과 무변루 역락문을 들어서자마자, 곧장 무변루(無邊樓)의 뒤태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무변루는 유생들의 휴식 공간이었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편액은 조선 최고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 붉은 기둥과 녹청색의 문살, 그리고 닫힌 문들 사이로 스며드는 어둠이 조용히 말을 건다. 마치 발걸음을 멈추라는 듯,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마음에 제동을 건다. 숨이 턱 막힌다. 닫힌 문이 하도 웅장하여 위압감마저 든다. 무언가를 단호히 막아선 듯한 정면의 구성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여기에 모신 이의 정신, 그 절도를 다시 한번 가다듬고 오라는 무언의 가르침이다. 허투루 들어올 수 없다는 듯, 위엄과 침묵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래서일까. 몸보다 마음이 먼저 엎드리게 된다. ■강학 공간 구인당과 암수재, 민구재 무변루를 지나면 강학 공간이다. 강의와 토론이 오가던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정면에 구인당이 단정히 서 있다. 구인당은 회재 이언적이 쓴 글귀 ‘구인(求仁)’에서 이름을 따왔다. 구인당 좌우의 양진재(兩進齋)와 혜림재(蕙林齋)는 교수와 유사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교무실이나 연구실에 해당한다. 구인당은 1836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다시 지어졌다. 햇살이 마당을 넓게 비추고, 구인당 현판 아래가 유독 환하다. 검은 기와지붕 아래 걸린 ‘옥산서원(玉山書院)’ 현판 네 글자는 상당한 무게로 읽힌다. 앞에 서면 어느새 자세가 조심스러워진다. 단정한 기운, 절제된 구조다. 공간이 먼저 예를 요구하는 자리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머물던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암수재(巖守齋)와 민구재(敏求齋)가 서로 마주 본다. 수백 년 세월을 견딘 목재들이 몸을 낮춘 채, 정면의 구인당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이가 많은 유생은 동재에, 어린 유생은 서재에 기거했다. 유생들은 나이에 따라 위계가 있었다. 마치 학문 앞에 엎드린 제자 같고, 정신의 중심을 받드는 두 팔 같다. 좌우의 건물이 높지 않은 이유, 곧고 단정하게 뻗은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이곳이 스승을 모신 자리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옥산서원의 깊숙한 한켠, 전적들을 보관하는 경각이 조용히 문을 닫고 있다. 이곳에는 회재 이언적의 저술과 관련 기록, 유생들의 학문 흔적이 고요히 보존되어 있다. 누가 읽고 누가 필사했는지 모를 붓 자국들이 책 속에 남아, 긴 세월을 지나 지금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굳게 닫힌 제향의 공간, 사당 서원 안쪽으로 더 들어서면, 굳게 닫힌 문이 나온다.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제향의 공간이다. 이곳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리지 않는다. 사람의 말보다 침묵이 무거운 공간, 제사의 손길과 정갈한 마음으로만 닿을 수 있는 자리다. 경외감은 그 자체로 경계선이 되어, 이 공간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만든다. 사당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정신이 깃든 자리다. 담장은 높고 길게 둘러쳐져 있다. 위엄을 막연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다. 담장 안쪽은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스승을 모신 제향 공간은 그 자체가 법이었고, 침입할 수 없는 신성의 영역이었다. 담장 너머의 고요는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라, 수백 년을 지켜온 절제의 목소리다. 고요는 서원의 다른 공간들에도 번져 있다. 강당이며 재실이며 마당까지, 모두가 그 사당의 중심을 향해 기운을 모으고 있다. 바람결 하나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고, 발걸음마저 조심스럽다. 사람들은 말없이 담장 바깥에서 손을 모은다. 숨소리조차 가볍게 뱉고, 눈빛조차 가라앉는다. 신을 모시는 공간이기에 앞서, 스승을 모시는 곳이기에 그 앞에서 사람들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회재 이언적 신도비 서원의 끝자락, 신도비가 있다. 회재 이언적의 생애와 사상을 새긴 돌이다. 옥산서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묵언의 무게가 한결 선명해지는 비석이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서원은 조용히 말하고 있다. 겸손하라, 조심하라, 무릇 배운다는 것의 시작은 스스로를 낮추는 데서 비롯된다고. 옥산서원은 그 가르침을 담은 거대한 침묵의 서책이다. 서원을 나서려 돌아 나오는데, 무변루 좌우에 우뚝 선 향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백 년 세월을 품은 듯 굵고 묵직하다. 향나무는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무변루를 사이에 두고, 마치 경계라도 하듯 서 있는 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스승과 제자의 자리, 학문과 침묵의 자리를 누가 감히 어지럽힐 수 있을까. 아까부터 알 수 없는 기척이 자꾸만 목덜미를 건드리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 발끝을 낮췄고, 숨도 조심스레 내쉬었다. 그 기척의 정체가 향나무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높고 무성한 가지 사이로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다행이다. 무례한 말도, 요란한 소리도 내지 않았으니. 안도의 숨을 쉬어낸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때조차 괜스레 허리를 굽히게 된다.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다. 향나무는 다시 고요해지고, 나는 나무를 뒤로한 채, 천천히 서원을 떠난다. 회화나무 그늘이 처음보다 한층 더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2025-05-28

홀로 사색의 뿌리를 내린 집 독락당

■자계천을 따라 흐르는 정신 햇살이 아침을 채운다. 기와가 반짝이고, 소슬한 바람이 담장을 넘는다. 자계천을 감싼 산그늘이 물러가고, 이른 아침 찬란한 빛이 골짜기마다 스며든다. 옥산서원 기개 높은 역락문과 담장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서원의 위엄은 잠시 미뤄두고 곧장 계곡으로 내려선다. 바위가 넓게 펼쳐지고 물은 돌에 부딪히며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너른 바위 전체를 ‘세심대(洗心臺)’라 부른다. 바위는 수천 번의 물결을 맞아낸 듯 반들거리지만, 여전히 층층을 이루며 기개를 자랑한다. 물은 흘러내리며 작은 폭포를 만들고, 그 아래엔 둥그런 용소가 된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세속의 소음을 밀어낸 듯 일정한 소리가 시끄럽지 않다. 백색소음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회재 이언적은 벼슬을 내려놓고 자계골로 들어와 일대를 다니며 뜻을 품은 장소마다 이름을 붙였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한 선비의 생각이 머문 자리이기도 하다. 흐르는 물에 마음을 헹구듯 이언적은 바위 앞에서, 흐르는 물 앞에서 생각을 다듬고 뜻을 새겼을 것이다. 세상의 시끄러움을 지우고, 내면의 고요 속에서 독락(獨樂) 하였을 것이다. ■홀로 즐기는 독락(獨樂)의 길 이른 시각,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발을 얹는다. 나무 그림자는 아직 길지 않다. 고요한 숲길에 몸을 들이며 독락당을 향한다. 계곡을 이웃하여 크고 작은 밭이 펼쳐지고, 밭을 일구는 촌로들이 하나둘 나와 흙을 뒤집는다. 손끝으로 흙을 문지르고 씨앗을 뿌리고, 괭이질이 한창이다. 이른 봄의 기척이 땅 위로 번진다. 군데군데 마른 잎이 깔린 길, 수런거림은 없고 혼자 걷는 객의 발소리만 또렷하다. 길은 계곡을 따라 가늘게 이어진다. 홀로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그만이다. ■계곡 너머 자연에 은거한 집 옥산서원에서 자계천을 따라 약 1km 오르면, 물길 너머 기와를 인 집이 보인다. 자연에 조용히 스민 집이다. 계곡을 향해 공간을 틔워 놓은 집, 바람과 물소리가 지천으로 드나드는 풍경은 굳이 붓을 들지 않아도 이미 수묵의 정취를 머금는다. 자계천을 가운데 두고 바라만 보아도 독락에 이른 듯하다. 경주 동쪽, 옥산서원의 안쪽 자옥산 아래 독락당이 있다. 물 흐르고 숲이 드리운 자계골 한켠에 앉힌 집은, 조선 중기 대학자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한 공간이다. 1530년, 중종 치세 혼란 속에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세속의 소란을 뒤로하고 이곳에서 삶을 다듬었다. 그리고 7년 뒤, 다시 조정에 불려 나가기까지 골짜기에서 고요한 시간을 쌓았다. 회재의 낙향은 도피가 아니었다. 유교적 이상을 품은 그에게 현실 정치는 번번이 좌절을 안겼다. 무너지는 정의, 흔들리는 조정 속에서 끝내 마음 둘 자리를 잃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묵향을 피우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사유를 다졌다. 독락당은 그렇게 한 사람의 상처와 성찰, 그리고 사상의 근거지가 되었다. 침묵을 선택한 삶이었지만, 그 침묵은 조선 성리학의 깊은 물줄기로 이어졌다. 자계천을 건너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행랑채가 먼저 마당을 막아선다.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처럼 조심스러워진다. 외부를 환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대로 돌아 나갈까 싶다가도 다시 조심스레 발을 들인다. 두 번째 좁은 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내부로 들어설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더 좁아지지만 사색은 더 깊어진다. 마치 문을 통과하며 스스로 마음을 비워야만 본심을 만날 수 있는 집 같다. 독락당은 땅 위에 낮게 눕듯 지어져 있다. 기단은 낮고 처마는 겸손하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듯, 겹겹이, 첩첩이 모여있다. 맞배와 팔작이 뒤엉키듯 얹힌 지붕이며, 권위와 격식을 따르기보다는 사람의 삶에 맞추려 한 집의 형식은, 집을 지은 이의 마음이 모인 구조인 듯하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의 학문과 철학이 집약된 공간이자, 인간적 고뇌와 성찰이 담긴 곳이다. 그러니 선생의 삶이자 숨결인 공간인 셈이다. 집 구조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이 집이 자연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리되었다고는 하나 닫히지 않았고, 닫히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다. 독락당은 외부를 밀어내고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호흡으로 세상과 숨을 맞춘다. ■계정과 양진암 사랑채 안마당 건너 작은 정자가 있다. ‘계정(溪亭)’은 이 집의 진심이 머무는 곳이다. 정자인 듯 방인 듯, 속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계곡을 한껏 들어 앉힌 작은 세계다. 퇴계 이황이 써준 ‘양진암(養眞庵)’은 인근 정혜사 주지 스님이 절집처럼 묵었다는 사랑채다. 한석봉 썼다는 ‘계정’ 현판은 바람이 드나드는 마루의 이름이 되었다. 마루 끝에 서서 내다보는 바위와 물, 허공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은 나를 잠시 인간이 아닌 바람 한 줄로 허공 위에 띄워놓는다. 개울 건너에서 바라보면, 독락당은 계곡 위에 잠시 걸터앉은 풍경 같다. 세속에서 물러나 삶을 가다듬고자 했던 한 선비의 정신이, 지금도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고 있음이다. 풍경에 젖어 넋을 놓을 무렵, 단정한 음성이 들린다. “이른 시각인데, 혼자 오셨습니까.” 돌아보니 한 어른이 미소를 지으며 서 계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른은 잠시 눈빛을 맞추고는 “이렇게 이른 시각에 오는 분은 드뭅니다. 독락당을 보여주기엔 참 귀하고 고마운 걸음이네요.” 하신다. 어른은 회재 이언적의 이야기며, 이 골짜기로 들어와 세속의 시끄러움을 등지고 살았던 이야기, 그가 물소리와 바람결에서 사유를 키웠다는 말을 차분히 건넨다. 마루에 앉아 개울을 바라보면 회재가 왜 이곳을 택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며, 스스로를 낮추는 사랑채의 품격과 계정에 얹힌 퇴계의 마음도 전한다. 마치 먼 길을 돌아와 스승의 집을 찾은 제자에게 건네는 깊은 마음의 인사 같다. 계정은 집의 끝, 마루의 끝, 사유의 끝에 놓여 있다. 바위와 물, 나무와 기둥이 어우러진 작은 공간은 거창한 의미를 걸치지 않아도 온전히 완성된 세계다.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사계절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집은 스스로를 열어두었다. 바람이 찾아와 벽을 쓰다듬고, 물소리가 문턱을 넘는다. 혼자 있어도 외로움이 아닌 고독으로, 기다림이 아닌 반김으로 충만해진다. 계정은 방이면서도 정자이고, 몸을 누이는 안락의 처소이면서도 마음을 바로 세우고 다잡는 교육의 자리다. 외부에서 보면 언뜻 허공에 뜬 듯, 바위 위에 잠시 얹힌 허허로운 마음 같으나 직접 집에 들어보면 생각은 곧 달라진다. ■어서각과 사당 집 안 깊숙한 곳엔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임금이 내린 어필을 보관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권위가 아니라 경외의 상징이며, 회재의 학문이 시대를 건넜다는 증표다. 어서각 옆으로는 사당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제향의 공간은 제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격식을 따르되, 자랑하지 않는 선비의 태도 그대로다. 마당 한켠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긴 세월 동안 이 집을 지켜온 살아 있는 문장처럼, 줄기마다 고요한 기품이 서려 있다. 자줏빛 목단도 우아하게 피어 있다. 절정을 막 넘어선 꽃은 한껏 넓게 퍼진 꽃잎을 바람에 내리는 중이다. 깊고 짙은 빛은 처마 끝의 부드러운 곡선과 맞닿으며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뭣하나 한순간도 경박하지 않고, 지나치지도 않다. 북쪽 담장 아래엔 좁은 쪽문이 있다. 이 문은 오직 정혜사 주지 스님만이 오갔다. 스님과 회재는 오랜 시간 사상적 동반자였다. 유학과 불교, 학문과 수행, 글과 깨달음이 두 사람 사이에서 교차했다. 회재는 때로 정혜사에 기거하며 글을 썼고, 스님은 이 집에 들어 고요히 차를 마셨다. 계정의 마루도, 어서각의 문살도, 주엽나무의 그림자도 회재의 마음과 말씀과 걸음을 기억한다. 이 집은 그저 오래된 고택이 아니다. 정신의 집이다. 사상의 길잡이였던 한 인간이 자기 삶을 오롯이 내려놓은 자리다. 그래서 독락당은 여전히 말이 없고, 그래서 더 많은 말을 건넨다. ‘군자가 홀로 즐긴다 함은 속세의 즐거움을 좇지 않고, 학문과 도를 닦으며 그 자체로 기쁨을 얻는 것이다.’ 회재의 말씀이 스친다. 그는 진정한 즐거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완성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깨우친 어른이었다.

2025-05-21

용장골에서 시작된 판타지 신화

■ 자연을 품은 탑, 침묵을 품은 시간 숨을 고르며 숲의 끝자락을 막 빠져나오려는 찰나, 시야를 가르며 새하얀 탑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이다. 진달래의 분홍빛과 나무숲의 초록빛에 취해갈 무렵, 능선 끝에 우뚝 선 탑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다. 석탑은 용장골에서 가장 높은 벼랑 끝, 아찔한 암반을 기단 삼아 곧게 서 있다. 바람과 구름이 먼저 다녀가는 곳. 탑은 누군가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일부인 듯 하다. 기단을 따로 놓지 않고 자연 암반 위에 그대로 올렸으니, 산이 탑이고 탑이 산을 이루는 셈이다. 어쩌면 이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경전이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탑의 몸체에는 어떤 문자나 장식도 없다. 밋밋한 여백, 그 자체로 완결된 탑이다. 기단도, 몸체도, 옥개석도 어디 하나 군더더기 없다. 비록 도굴과 파손은 겪었으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때 복원되었지만, 탑은 사람의 손이 아닌 바람과 햇살이 다듬은 듯 자연스럽다. 석탑의 뒤편으로는 고위산과 용장골, 은적골의 능선이 물결치듯 흘러간다. 앞으로는 경주의 드넓은 들판과 형산강이 펼쳐진다. 탁 트인 시야 속에서 모든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곳에 서면,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듯하다. 탑은 천 년 전의 바람과 오늘의 햇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을 다 품는다. 탑은 오랫동안 보아 왔을 것이다. 들판이 농지로, 마을로, 도시로 변해가는 과정을. 전쟁과 평화, 황폐와 풍요를 말하지 않지만, 탑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 와 절을 하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간다. 탑 앞에 선다는 것은 단지 돌 앞에 서는 일이 아니다. 무언의 정신과 믿음, 역사의 침묵,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의 흔적 앞에 서는 일이다.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벌판·형산강 바라보이는 벼랑 끝 문자·장식 하나 없이 그 자체가 완결판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삼단 좌대 위에 앉은 머리 없는 부처상 보는 이의 마음으로 부처의 얼굴 완성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병풍처럼 펼쳐진 화강암에 새긴 불상 1924년 조선총독부 복원 기록 남겨져 ■석조여래좌상의 불두는 어디에 조금 내려오니 공중에 떠 있는 부처의 등이 보인다.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다. 3단 좌대 위에 웅장하게 앉아 있는 부처는 머리가 없다. 그러나 불두의 부재는 공허함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서쪽을 향한 부처는 가슴으로 바람을 안는다. 가볍게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은 조각의 정밀함을 넘어 바람의 결을 담아낸다. 옷고름은 마치 방금 묶은 듯 단정하며, 매무새가 살아 있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이라도 풀어질 듯 가볍다. 그러나 그 가벼움 속에는 수백 년의 무게가 깃들어 있다. ‘삼국유사’는 이 부처에 관한 전설을 전한다. 경덕왕 시절, 용장사의 주지였던 대현이 매일 탑을 돌며 염불하자, 석불의 얼굴도 함께 따라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여래좌상을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석불의 목덜미에는 내리친 듯한 흔적이 있다. 불두의 상실이 우연이 아님을 말해준다. 어떤 이는 일제강점기의 만행으로, 또 어떤 이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여파로 보기도 한다. 시대는 늘 신을 두려워했고, 동시에 제거하려 했다. 머리가 없다는 것은 곧 표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은 단지 눈, 코, 입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보는 이의 마음이 부처의 얼굴을 완성한다. 내가 슬플 때 부처도 슬퍼 보이고, 내가 웃을 때 부처도 웃는다. 어쩌면 얼굴은 잃었지만 더 많은 얼굴을 품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부처는 누구보다 많은 사람과 마주해온 존재일 것이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마애불 손으로 그린 불심 석불 뒤, 병풍처럼 펼쳐진 암벽에는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여래의 형상은 암벽에서 살짝 도드라져 ‘앉아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느슨한 경계 속에서도 풍겨 나오는 기운은 오히려 단단하고 고고하다. 옷자락엔 잔잔한 주름이 물결치고, 가사의 선은 여울처럼 흘러내린다. 화강암의 자연스러운 무늬와 가사의 결이 겹치며, 언뜻 호랑이 무늬처럼 보인다. 금방 잠에서 깬 듯한 두 뺨과 통통한 입술, 긴 귀와 오뚝한 코는 아이 얼굴처럼 해맑다. 마애여래좌상의 손은 마주 보는 나의 손 높이에 있다. 어쩌면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닐까. 나도 모르게 부처의 손에 내 손을 올려본다. 따뜻하다. 부처의 손은 이미 수많은 손을 받아들였고, 그 온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이름 모를 기도자들, 이 길을 지나며 눈물 흘리는 누군가의 마음이 손 위에 얹혔을 것이다. 마애여래불이 새겨진 바위 한켠에는 명문이 남아 있다. ‘三層石塔 大正 十一年(삼층석탑 대정 11년), 三層佛塔 大正 十二年(삼층불탑 대정 12년), 小石毾 殘部 大正 十三年 春 再建(소석탑잔부 대정 13년 춘 재건)’. 삼층석탑은 대정 11년(1922), 삼층불탑은 대정 12년(1923) 도굴로 무너진 상태였지만, 부재를 모아 대정 13년(1924) 봄에 다시 쌓았다는 내용이다. 식민의 그늘 아래 조선총독부가 남긴 복원 기록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약탈과 파괴의 시대, 그들의 손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는 것 자체가 역설로 읽힌다. ■바람으로 기억되는 용장사터 용장사터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람이 고요하게 골짜기를 훑고 지나간다. 사찰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기도하는 땅’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다. 깊은 골짜기에 법등을 밝히던 용장사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까마득한 빈터만 남아 객을 부르고 있을까. 눈을 감으면 법당의 기둥이 우뚝 서고, 그 앞에 부처가 놓여 있던 풍경이 되살아난다. 석불좌상과 마애여래, 그리고 삼층석탑은 능선을 따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용장사는 더 이상 절이 아니라, 기억이고 기원이다. 석불과 석탑은 신라의 믿음을 보여주는 유물이자, 오늘날 나의 믿음이 머무는 상징이다. 사람은 떠났지만 부처는 남았고, 지금도 바람을 타고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신앙이든 사유든, 이 땅은 여전히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것은 말 없는 위로이며, 손대지 않은 정의다. 문득 새가 되고 싶다. 날개를 퍼덕여 금오봉과 고위봉을 훨훨 날아다니고, 능선을 따라 부처들의 얼굴을 한 번씩 어루만지고 싶다. 머리 없는 석불의 목에 잠시 앉아 사라진 얼굴이 되어보고, 마애여래좌상의 손바닥에 앉아 한 송이 꽃이 되어보고 싶다. 삼층석탑의 지붕 위에 내려앉아 천 년을 바라보다, 끝내는 탑이 되어 세월을 지키고 싶다. 다 사라지지 않아도 좋다. 다 남지 않아도 괜찮다. 없는 것은 가고, 남은 것은 그저 남는 대로 머물렀으면 한다. 꾸밈없이, 스스로의 자리에서. ■금오신화, 숨어서 쓴 이야기 용장사, ‘갑술삼월일용장사(甲戌三月日 茸長寺)’라 새겨진 기와 한 조각이 발굴되며, 오래도록 잊혔던 절의 이름이 다시 불렸다. 깊은 골짜기에 불을 밝히고 마음을 모으던 사찰이다. 신라의 유가종 종조 대현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라 전하나,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홀로 남은 석축과 탑의 부재들이, 사람 없는 절의 시간을 묵묵히 감싸고 있다. 조선 초, 세상이 무너졌을 때 김시습은 책을 불살랐다.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성통곡하며 벼슬길을 끊고 속세와 등졌다. 유유자적 떠돌던 시습은 마침내 이 골짜기에 이르러 은둔한다. 용장골, 시습은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현실과 전설, 인간과 신령이 겹쳐 흐르는 이야기다. 문장은 골짜기 바위처럼 무심했고, 계곡물처럼 끊임없었다. 세조가 그를 데려가려 했으나, 그는 몸을 감췄다. 김시습은 골짜기마다 미친 척 희희낙락하다가, 결국엔 산기슭 꽃 한 송이, 바람 한 점에도 슬퍼하며 북향화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서성였을 벼랑에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그를 대신한다. 상상해 본다. 바위 벼랑 아래 작은 암자 하나, 그 속에 몸을 누인 김시습. 바람이 문을 두드리면 “뉘시오? 그저 시나 한 수 읊고 가시오” 하고 웃을 것 같은 키 작은 탁발승. 용장사는 무너졌지만, 김시습의 발자취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요요하고 적적한 풍경 속에 남은 것은 오히려 더 깊다. 사라진 절보다도, 살았던 이의 숨결이 더 생생하다. 진짜 절은 바위와 물과 바람 사이가 아니었을까. ■시(詩)가 흐르는 용장계곡 용장계곡에는 물소리와 함께 과거가 흐른다. 설잠교를 건너 바위에 걸터 앉는다. 햇볕은 사위어가고, 저무는 빛이 계곡물에 부서진다. 흐르는 물소리 위로 매월당의 시가 흐른다. 시간은 이 골짜기에서만큼은 직선이 아니다. 굽이치며 지난 것을 끌어안고, 다가오는 것을 품는다. 용장골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 마음속에 깃들고, 나는 그 속에서 또 한 줄의 시를 읊는다.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감회 김시습 용장산 골짜기가 아주 고요해서 사람의 왕래를 볼 수 없구나 가랑비가 시냇가 대나무를 일깨우고 저녁 바람이 들판의 매화를 감싸는구나 집안의 작은 창도 잠에 빠져 있고 마른 가래나무도 여전히 회색을 띠고 있네 초가 처마 쪽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마당 꽃밭에 꽃이 지고 또, 피는구나 설잠교를 건너니 길이 순하고 연하다. 물소리, 바람 소리 벗하며 한가로이 걷기에 더없이 좋다. 물가에도 진달래가 한창이다. 정신이 어질하다. 과거의 그림자를 따라 걷던 나의 발걸음이, 드디어 현재라는 빛 속으로 스며든다.

2025-05-14

신라 왕조 영산 ‘남산’, 발끝마다 오랜 사유가 몸을 적신다

■영산, 응축된 세계 경주 남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신라인들이 품었던 한 시대의 삶이 응축된 무대다. 신라의 궁궐 월성 남녘에 우뚝 솟은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축과도 같다. 두 봉우리 사이에는 깊게 패인 마흔 개의 골짜기가 흐른다. 신라인들은 산 곳곳에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함께 새겨 넣었다. 그래서인지 남산을 걷다 보면 발끝마다 스미는 오래된 사유가 몸을 적시고, 산 위를 흐르는 바람조차 천 년 전 숨결처럼 스며든다. 남산은 곧 신라 왕조의 영산이자, 불교적 우주의 상징이었다. 곳곳에 신라인의 손길로 빚어진 석불과 석탑들이 무심한 듯 고요히 서 있다. 불상과 탑의 얼굴과 몸짓에서 당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과 종교적 열망이 읽힌다. 신라인들은 돌 위에 신의 세계를 새겨 넣었고, 그 돌들은 다시금 영원을 갈망한 신라인의 마음을 오늘의 우리에게 전한다. 남산은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전 인류가 공통으로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수해야 할 세계적 가치를 지닌 까닭이다. 자연과 인간의 정신이 서로 겹치고 어우러진, 보편적 가치를 담은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남산은 어느 골짜기로 오르든 신라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골짜기는 용장골이다. 길이만도 3㎞에 이른다. 신라시대 용장사(茸長寺)가 있었기 때문에 ‘용장골’이라 불리고, 아직도 탑이 있어 ‘탑상골’로도 불린다. 발길 닿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다. 이 골짜기만 해도 용장사 외에 스무 곳이 넘는 절터가 산재해 있다. 불교가 융성하던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서라벌을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이라 표현했다. 절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일렬로 늘어서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불교가 국가의 정신을 이루던 시대였다. ■삼릉, 진달래 아래 깨어나는 왕들의 능 사월 초순, 그간 다른 골짜기로 금오봉에 올랐으나 오늘은 삼릉솔숲 길로 들어선다. 이른 아침, 솔향과 꽃 향이 객을 맞는다. 굽이진 산자락마다 무리 지어 핀 진달래가 소박한 인사를 건넨다. 하늘 높이 곧게 뻗은 소나무는 연분홍 진달래와 조화를 이루며,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균형을 보여준다. 솔숲 사이로 봄볕이 쏟아져 내린다. 빛은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솔잎과 진달래 꽃잎 위에 내려앉아 더욱 눈부신 환영을 그려낸다. 빛의 무늬에는 천 년 전 신라인들의 이상과 꿈이 얼비친다. 솔숲 길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풍경은 세 왕의 무덤이 자아내는 능선의 유연한 곡선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과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능이다. 봉우리처럼 완만하게 흘러내린 곡선은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완전함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삼릉은 신라의 오래된 흔적이면서도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잃지 않는다. 능의 곡선은 살아 있는 자의 눈길을 머물게 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린다. 바람이 불면 마치 왕들의 혼백이 잠시 깨어나 솔숲을 거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삼릉은 죽음의 장소이기보다는 삶을 노래하는 찬가처럼 천 년을 이어왔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한참 머물다 왕들의 혼백을 만나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고 싶지만 갈 길이 높고 멀다. 왕들의 능을 뒤로하고, 남산 더 깊숙이 몸을 들인다. ■중생을 기다리는 부처 불두 없는 석조여래좌상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커다란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바위의 윗부분을 쪼아내어 조각한 보살상은 남산 유적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정적을 품고 있다. 가슴에 손을 모으고 정병을 든 관음은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헉헉대며 오르는 중생들을 향해 머금은 미소는 위로도 계시도 아닌, 존재 자체로 전하는 평온이다. 그 앞에 서면 문득 깨닫는다. 이곳은 신라의 산이지만,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산이라는 것을. 세상은 누구에게나 위태롭다. 그러나 그 위태로움을 견디며 한 발 한 발 오르는 일이 곧 삶이라는걸, 바위 위의 부처는 아무 말 없이 가르치고 있다. 침묵 속에서 전하는 가르침은 요란하지 않아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길을 오른다. 길은 가파르고 숨은 거칠다. 땅만 보며 걷는다. 위를 올려다볼 겨를조차 없다. 등에는 땀이 배고, 다리는 뻐근하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남산의 길은, 그 자체로 수행이다. ■침묵의 기도, 선각육존불 앞에서 얼마쯤 더 올랐을까. 바위가 겹겹이 둘린 산기슭 아래, 기도하는 두 여승이 보인다. 바위 면에 새겨진 불상 앞에 합장한 여승은 미동조차 없다. 햇살마저 숨을 죽인 듯한 이 장면은, 봄날 남산에서 마주한 가장 신성한 풍경이다. 나도 흉내 내듯 손을 모은다. 순간, 시간은 멈추고 공간은 열린다. 거룩함 속에서 나 또한 작아지고 맑아진다. 두 바위 면에 새겨진 선각육존불과 마주한다. 불상들은 통일신라 시대의 숨결이 남은 선각 마애불로, 음각의 얇은 선으로만 조각되었다. 조각이라기보다 그림에 가깝다. 거친 바위 위에 그어낸 선들이 부처의 얼굴과 손, 그리고 자비를 품은 보살의 형상을 이룬다. 칼끝으로 긋듯 새긴 선 하나하나가 천 년의 사유처럼 느껴진다. 육존불은 좌우의 바위 면에 나뉘어 있다. 한쪽에는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이 앉아 있고, 다른 한쪽에도 마찬가지로 삼존상이 자리한다. 모두 부드러운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정갈한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배치는 절도의 미학을 보여준다. 수천 번 비바람을 맞았을 암벽 위에 아직도 선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바람에 깎이고 빛에 씻겨도 사라지지 않은 선 하나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것. 그것은 단지 조형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기도와 사유가 돌 속에 새겨진 증거다. ■석조여래좌상, 시간을 견딘 자태 여승들이 앞서 걷는다. 단정하고 고요한 발길이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길을 따라 조용히 돌계단을 밟고 오르는 모습이 마치 오래된 의식처럼 느껴진다. 급함이 없다. 조용하고 단단한 걸음이 시간의 결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나도 말없이 뒤를 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드니 누군가 내려다본다. 남산삼릉계석조여래좌상이다. 삼릉길에서 마주했던 부처들과는 다르다. 몸의 윤곽이 온전하고, 둥근 광배와 단단한 대좌까지 완전한 형상을 갖추고 있다. 긴 세월을 버텨낸 돌의 표면에는 조금의 균열도 없이 고요한 품격이 스며 있다. 견딘 시간만큼 더욱 단단해진 부처의 자태 앞에, 나도 모르게 손을 모은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부처가 왜 놓였는지 알 것 같다. 탑도 절도 사라졌지만, 석불은 홀로 남아 바람과 계절과 사람을 품는다. 상처 없이 남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견뎌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의 미소는 더욱 단단하고 따뜻하다. ““어디서 오셨어요? 보살님” 대구에서 왔다고 하자, 이른 시간인데 부지런도 하다며 웃는다. 말씨는 단정하고 온화하고, 목소리는 바람처럼 부드럽다. 인사는 바람처럼 시작되어 바람처럼 스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설처럼, 우리는 억겁의 전생을 돌아 이렇게 스치고 흩어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승들은 여기서 내려간다고 했고, 나는 용장사터까지 간다고 하니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길을 달리했다. 짧은 인사에 모든 작별의 정중함이 담겨 있었다. ■금오봉, 신화의 경계에 서다 상선암을 지나며, 돌마다 스며든 부처의 흔적을 하나씩 지나쳐 왔다. 바위에 기대어 선 불상은 바람을 맞고, 앉은 보살은 진달래 꽃잎을 품은 채 산허리를 내려다본다. 부처들을 만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금오봉이다. 바람이 분다. 맑고 높다. 서라벌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오래전 왕들이 다스렸던 땅. 그 역사의 기운이 바람에 묻어온다. 햇살은 찬란하고, 꽃잎은 빛난다. 진달래는 금오봉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언 땅을 뚫고 피어난 꽃은 연약한 듯하지만 불굴의 생을 품고 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은 삶의 순간들이고, 그 길을 걷는 나 또한 어느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길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다. 한 시대의 정신을 따라 걷는 일이며, 꽃잎처럼 흩어진 기억과 만나는 여정이다. 여기서부터는 능선을 걸어 조금씩 하행에 이른다. 곧 용장사터에 이를 것이다. 발밑에 깔린 진달래 꽃길을 밟으며 문득 김시습이 떠오른다. 시습은 금오산실에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세속과 이상,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썼다. 지금 이 길 또한 현실과 전설이 겹쳐 흐른다. 나는 어느 봄의 산길 위에서, 신라의 혼백들과 눈을 맞추며 오래된 신화 속을 걷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산과 꽃과 이야기가 뒤섞인 이 길 위에서, 나는 걷는 이가 아닌 ‘살아 있는 한편의 서사’가 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 작가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과 용장사 이야기는 <하> 편에 이어집니다.

2025-05-07

호기심 많고 기품과 절도 넘치는 동경이… 본능은 사냥개

■살갑지만 본능은 사냥개의 후예 동경이를 마주한 순간이 선명하다. 녀석들과 처음 만난 곳은 경주개 동경이보존협회 개방형 마당 한가운데다. 공격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혹여 달려들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짧은 꼬리·선한 눈망울·예민한 후각 순하지만 단단한 내면의 전통 사냥개 잘 짖지않고 차분해 ‘바보 개’라 불려 ‘천연기념물’ 경주시 대표 토종개로 신라시대 역사 함께한 충직한 성품 현재 약 530마리 지역 곳곳서 보호 희고 까만 털이 햇살에 반짝인다. 나를 보자 녀석들이 일제히 달려온다. 낯을 가릴 거라는 말,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댈 거라는 상상은 무의미하다. 녀석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알아보듯 주저 없이 달려왔고, ‘물지 않을 거야’라는 무언의 눈빛을 건넨다. 믿음이 생긴 걸까. 나도 모르게 몸을 낮추어 손을 먼저 내민다. 그런데 동경이는 내게 코를 먼저 들이민다. 씰룩씰룩 냄새를 맡더니 잔뜩 긴장한 내게 혀를 쑤욱 내민다. 순식간에 내 얼굴을 핥은 거다. 미끄덩하고 축축한 녀석의 침이 얼굴에 묻었다. ‘앗!’ 그러나 따뜻하다. 살아있는 날것의 따뜻함이다. 녀석은 사진을 찍으려는 나를 방해할 만큼 격한 반가움을 표현한다. 짧디짧은 꼬리를 힘껏 흔들며 말이다. 꼬리가 까딱까딱 움직일 때마다 환한 감정 하나가 함께 전해지는 듯하다. 동경이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잘 짖지도 않는다. 과거에는 이런 성격 때문에 ‘바보 개’라 불리기도 했다. 낯선 사람에게 경계하다가도 금세 마음을 여니, 순하다는 이유로 얕잡아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동경이만의 품성이자 장점이다. 무던하고 착한 성정은 수천 년 이어진 특별한 유산이다. 하지만 동경이의 태생은 어디까지나 사냥개다. 순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내는 제법 단단하다. 짧은 꼬리와 선한 눈망울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뛰어난 후각과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사냥개의 피가 흐른다. 사냥감으로 인식되면 순한 태도는 단박에 돌변한다. 새끼 때는 겁 없이 성견에게 덤비다 다치기도 한다. 개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배를 뒤집는 항복의 제스처’를 잘 하지 않는다. 우열을 가리는 싸움은 치열하지만, 반면 서열이 정해지면 더는 다투지 않는 깔끔한 성격이기도 하다. 동경이는 단지 ‘순한 개’, ‘희귀한 개’만이 아니다. 유순함과 야성, 귀여움과 기품을 함께 품은 매력적인 개다. 내가 만난 동경이는 온순함 그 자체다. 손을 내밀자 머리를 비비고, 엉덩이를 들이밀며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이윽고 나의 무릎에 턱을 얹고는 조용히 눈을 감기도 하고, 때론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라도 듣겠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주인을 따라 죽은 동경이 조선 성종 때 의로운 동경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신 이승소(李承召)의 문집 ‘삼탄집(三灘集)’에는 ‘의구(義狗)’ 동경이에 관한 전설이 실려 있다. 지금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험한 고갯마루 길가에는 쌍분(雙墳)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주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곁을 지키다 생을 다한 개의 무덤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경주, 곧 동경의 한 아전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개와 함께 한양으로 길을 나섰다. 고개를 넘고 산을 지나는 고된 여정 끝에, 주인은 연풍 고개에서 병을 얻어 숨졌다. 곁을 따르던 개는 주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홀로 경주 집으로 달려갔다. 개다 밤낮으로 짖자 이상함을 느낀 아들이 개를 따라나섰고, 연풍 고개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도 주인 곁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경주로 모시지 못하고, 개와 함께 고갯마루에 나란히 묻었다. 그 두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의구총(義狗塚)’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경주의 신화전설집성’에는 “동경견(東京犬)은 꼬리가 없는 개로, 됭경견, 됭견, 댕견이라 불리는 경주 토종개다. 이 개는 충직하고 용맹하며 영리하기로 유명하다.”라고 기록했다. 누군가는 개의 ‘충성’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학습과 훈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에서 생긴 교감과 본능 말이다. ■기품 있는 개, 절도 있는 애교 기품 있는 개다. 꼬리가 거의 없는 녀석들이지만, 그 짧은 꼬리뼈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한없이 사랑스럽다. 경주 개 동경이는 2012년 11월 6일,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의 시견(市犬)이기도 하다. 현재 경주시 전역에서 약 530마리 정도가 혈통을 유지하며 관리되고 있다. 생후 60일이 지나면 절차에 따라 일반인에게도 분양이 가능하다. 저들끼리만 있을 때는 뛰고 구르며 그야말로 천진난만 자체다. 마치 통제성을 잃어버린 천방지축 어린아이들 같다. 운동장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가도, 이따금 가만히 멈춰 서로의 냄새를 맡거나 서로를 탐닉한다. 그러다가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저들만의 세계를 뒤로하고 와르르 달려온다. 이럴 땐 속이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경이는 본디 그런 개다. 사양관리팀의 정하원 팀장과 이영솔 주임은 말하자면 이 개들의 가족이자 벗이다. 정 팀장과 이주임이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난만하게 놀던 동경이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나 좀 봐줘요’하며 몸을 낮추며 꼬리를 흔든다. 혹은 날뛰면, 혹은 얼굴을 들이대며 갖은 애교를 부린다. 자신을 보듬어주는 사람에게 한껏 잘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이 다 보인다. 하지만 녀석들의 애교가 마냥 무질서하고 방정맞은 건 아니다. “이리와.” “악수” “앉아.” 기다려.” “엎드려.” “안돼!” 이영솔 주임의 짧은 명령에 놀랍도록 절도 있는 자세를 취한다. 몸은 꼿꼿이 하고, 행동은 절제하며, 사람과 눈빛을 맞추는 모습에서 묘한 질서와 위엄마저 느껴진다. 행정팀 이정원 팀장과 정승락 주임, 이혜인 주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관리인을 넘어 동경이들을 위한 세심한 벗이자 부모인 셈이다. ■짧은 꼬리 너머, 살아 있는 신라의 혼 누군가는 개에게서 ‘품격’을 논한다는 걸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경이는 다르다. 귀한 대접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 개체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기품과 절도가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조심스럽게 한다. 스스로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한 몸짓, 그런 개를 아끼며 길들이는 동경이보존회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더욱 품격을 더한다. 한때 동경이에게 행해진 시대의 상처는 크다. 그러나 동경이의 등줄기에는 천 년을 넘어서는 시간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동경이는 살아남은 신라의 영혼이며, 수많은 생명이 감내해 낸 민족의 고통과 희망이 깃든 존재의 살아있음이다. 신라를 살고 경주로 건너온 개, 왕가의 삶과 민가의 생을 본능으로 기억하는 개, 죽어서도 토우가 되어 주인을 따라간 충직한 벗. 동경이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문화다. 이 땅의 숨결과 그 땅을 거닐며 살아온 민족의 이야기를 천진난만한 눈빛 속에서 마주한다. 녀석들의 눈빛에는 수백 년의 지혜와 고통이, 그리고 민족의 부활을 향한 끊임없는 의지가 담겨 있다. 어떤 개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주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다, 동경이는. *취재에 협조해 주신 경주개 동경이보존협회 직원들께 감사드린다.

2025-04-30

천년기념물 경주개 동경이를 아시나요?

요란한 짖음이 일제히 터져 나온다. 차에서 내리기도 전인데, 수백 마리 개들이 낯선 방문을 먼저 감지했다. 성난 파도처럼 일대가 술렁인다. 벨을 누르자 약속된 방문을 기다린 듯,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린다. ‘천연기념물 보존’이라는 말에 걸맞게 경비가 철저하다. 하지만 문이 열렸다고 해서 함부로 걸어갈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사방에 깔려 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제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현실이다. 수백 개의 눈, 그리고 날 선 경계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갇혀 있다고는 하나 이 날뛰는 짖음 앞에 감히 어떤 용기가 작동할까. 조선후기 문헌에 ‘장자구’ ‘녹미구’ 언급 현종 ‘동경잡기’에 ‘東京狗’ 명칭 첫 등장 단순한 애완견 넘어 문화적 아이콘으로 신라 토우에도 동물 중 가장 많이 등장 이름 ‘동경이’엔 경주의 역사 흔적 뚜렷 “일본 신사 수호신 고마이누와 닮았다” 일제 강점기 도살로 개체수 급격히 감소 온갖 고난 딛고 신라 1000년 전통 계승 여간한 담력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앞발을 일으켜 세워 두 발로 서서 철망을 박차듯 밀어대는 녀석, 목줄이 팽팽해질 만큼 허공을 향해 몸을 튕기는 녀석,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송곳니까지 내보이는 녀석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짖음, 극대화된 공포는 결국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그러다 한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살아 있는 눈빛이 반들거린다. 녀석의 검은 눈동자 속에 잔뜩 겁에 질린 내가 서 있다. 이 모진 위협 속에서도 나는 진심을 전하느라 최선을 다한다. 녀석이 먼저 내 눈빛을 읽은 걸까. 으르렁대면서도 짜리몽땅한 꼬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짖음은 경계가 아니라, 요란한 반김으로 읽힌다. 마음을 읽는 데 내가 녀석보다 한발 늦은 걸까. 드디어 녀석의 선한 기운이 읽힌다. 경계하고 짖고, 낯선 이를 의심하는 성질은 녀석들의 본능이다. 마치 “누구십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보존회 전체가 개들의 마을 같다. 보존회 건물 안은 녀석들만의 치열한 공동체로 느껴진다. 낯선 인기척과 얼굴, 냄새와 음성, 신고식도 없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나를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 짖고, 두드리고, 날뛰며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내게 확실히 각인시킨 셈이다. ■역사에 기록된 토종개 ‘동경이(東京狗)’의 존재는 고문헌 곳곳에 드러난다.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의자왕 20년)이다. “사비성 서쪽에서 들사슴처럼 생긴 개가 사비강 둑 위에서 궁궐을 향해 짖자, 궁 안의 개들도 따라 짖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백제가 멸망했다.” 여기서 ‘들사슴 모양의 개’는 짧은 꼬리와 민첩한 체형을 가진 신라의 토종개를 지칭한 것이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동경이에 관한 묘사가 있다. 그는 “경주의 개는 꼬리가 없으며, 노루 새끼를 닮아 장자구(獐子狗)라 하고, 사슴 꼬리를 닮아 녹미구(鹿尾狗)라고 한다” 고 기록했다. 동경이의 생김새를 언급한 것이다. ‘동경구(東京狗)’, 즉 ‘경주의 개’라는 명칭이 명확히 등장하는 기록은 1669년, 조선 현종 10년에 경주 부윤 민주면이 편찬한 『동경잡기(東京雜記)』다. 그는 경주 여인들이 북쪽 기운이 허한 것을 보완하고자 머리를 뒤로 틀어 올렸다는 ‘북계(北髻)’ 풍습을 기록하며, 짧은 꼬리를 가진 개 역시 “북방의 기운이 허한 탓에 생긴 것이라 하여 동경구(東京狗)라 불렸다”고 전한다. 개의 특징을 단순히 외양으로 설명하지 않고, 지역의 자연환경과 풍속, 음양오행 사상까지 연관 지어 놓았다. 실학자 이익 또한 1760년 무렵에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짧은 꼬리를 가진 개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1778년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이학규의 『물명유해(物名類解)』, 그리고 근대기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도 ‘노루꼬리 개’, ‘무미견(無尾犬)’, ‘동경 개’ 등의 기록을 남겼다. 짧은 꼬리를 지닌 동경이는, 단순한 지역의 애완견을 넘어 신라와 조선의 사상과 환경, 인간의 감성에까지 기록되어 살아남은 문화적 존재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신라 무덤 속 꼬리 짧은 토우 5~6세기 사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陶偶)들 중 꼬리 짧은 개가 있다. 흙으로 빚은 개는 생생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짧은 꼬리를 치켜들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려는 찰나의 몸짓이다. 얼굴의 선과 눈매, 귀의 방향과 자세까지도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토우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은 개다. 그중 꼬리가 없거나 몹시 짧은 개는 멧돼지와 맞서 싸우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경이가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닌, 맹수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짐승을 대적해 사람을 지키는 용맹스런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동경이는 신라인의 삶 깊숙이 존재하던 ‘생활견’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는 종종 무덤에 함께 묻히거나, 토우로 만들어져 묻혔다. 죽음의 문턱 너머까지 사람과 함께하던 삶의 동반자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려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 개는 이미 사람과 한집에서 숨을 쉬고, 고단한 노동과 험한 길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무덤 속에서조차 그들과 헤어지지 않았다. ■이름에 깃든 역사, 댕견 한국에는 여섯 종류의 토종개가 있다. 삽살개, 진돗개, 풍산개, 불개, 제주개, 그리고 댕견이다. 댕견은 꼬리가 짧은 경주 토종개 ‘동경이(東京狗)’다. 동경이는 ‘경주에서 왔다’는 단순한 지리적 표기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고려 이후의 역사와, 경주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의 정서가 함께 담겨 있다. ‘동경(東京)’이란 명칭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새 수도 개경의 동쪽에 자리한 경주를 행정적으로 부르던 표현이다. ‘동쪽의 도읍’. 그래서 경주에서 태어난 이 짧은 꼬리의 개는 ‘동경의 개’, 곧 ‘동경이’, 또는 ‘동경견’이라 불렸다. 그러나 문헌보다 더 오래된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남아 있다. 지역 어르신들은 이 개를 ‘동경이’보다는 ‘댕견’, ‘댕갱이’, 혹은 ‘땡갱이’라고 부른다. 툭툭 뱉어지는 이 구수한 방언은 경주의 골목과 마을에서 오랫동안 불린 소리다. 지금이야 ‘경주개’로 통칭되지만, 댕견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경주 어른들의 입에 붙어 있다. 댕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짧은 꼬리다. 보통 개의 꼬리뼈는 여러 마디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개는 아예 꼬리뼈 자체가 없거나, 많아야 두어 마디 남짓이다. 그래서인지 꼬리 대신 다리와 목, 후각이 유난히 발달했다. 짧고 단단한 몸에 유연한 근육이 붙어 민첩하다. 특히 후각이 매우 예민해 멧돼지 같은 야생 짐승을 추격하거나 유인하는 사냥개로서 탁월했다. 흥미로운 건 성격이다. 다른 토종견들이 낯선 이를 경계하고 잘 짖는 데 비해, 댕견은 조용하고 살갑다. 경계보다 관찰이 먼저고, 공격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주인을 향해서는 절대적인 복종심을 보이면서도, 타인에게는 똘망한 눈빛으로 먼저 마음을 건넨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짧은 꼬리를 흔들며. ■일제강점기, 씨가 마른 댕견 동경이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 언제 봤다고 해맑게 달려든다. 낯선 이에게도 주저 없이 다가가 애정을 구하는 녀석과 마주하면, 누구라도 경계를 허물게 된다. 그렇게 한 생명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랑스러운 개도 수난의 시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민중들이 뿌리째 흔들리던 그때, 사람의 언어와 문화, 심지어 마당을 지키던 개 한 마리조차 제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동경이에게도 피로 쓰인 절멸의 시간이었다. 일본은 전시 동원령 아래 사람을 마구잡이로 징집했으며, 가축뿐만 아니라 개도 도살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경이 역시 급격히 사라졌다. 동경이가 일본 신사의 수호신인 ‘고마이누(高麗犬, こまいぬ)’와 닮았다는 이유로 도살되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고마이누는 일본 신사의 입구를 지키며 악귀를 막는 신수(神獸)다. 꼬리가 거의 없고, 눈빛이 단단하며, 용맹한 동경이의 모습이 고마이누와 흡사하다는 것이 일본인의 불쾌감을 샀고, 결국 동경이를 없애려는 시도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역설적이게도 ‘신성함’이라는 이유가 학살의 명분이 되었다니 큰 모순이다.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이 식민 지배하고 있는 하찮은 조선 땅을 돌아다니는 흔한 짐승이라는 것에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이 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일제강점기 동경이는 실제로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꼬리가 없다는 이유로 ‘병신개’, ‘재수 없는 개’라며 천대받았다. 어느 날부터 울타리 안에서 개가 사라졌고, 짖던 소리도 줄었다. ‘씨가 말랐다.’ 그건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니었다. 경주의 역사와 신라의 감성, 사람의 삶을 묵묵히 지켜온 동반자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동경이의 절멸은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경주와 신라의 감성, 그 땅의 문화까지 지우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 종(種)을 지우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동경이는 일부 민가의 마당에서, 산기슭의 움막에서 조용히 새끼를 낳고 생명을 이어갔다. 주인의 손에서 숨어 지내고, 아이들과 뒹굴며 그 억센 세월을 버텨냈다. 그렇게 기적처럼 이어진 생명은 지금도 경주의 마을 어귀를 거닐고, 신라의 시간을 품은 채 단단하게 살아가고 있다. <下> 편에는 주인을 따라 죽은 경주개 동경이 전설이 이어집니다.

202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