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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항복한 이는 죽이지 않아…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의 장군’

21세기처럼 가까운 약국에만 가도 위장병과 두통, 소화불량을 치료하는 각종 약과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또한, ‘내과 수술’이란 단어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신라(기원전57~935)를 통틀어서 그러했다.그럼에도 우리식 셈법으로 여든을 목전에 둔 79세까지 살았다. 그뿐 아니다. 열다섯에 수백수천의 낭도를 이끄는 화랑이 된 그는 사다함, 관창과 더불어 ‘신라 화랑의 트로이카’로 불린다.벼슬? 고대왕국 신라에 존재했던 벼슬 중 그가 해보지 못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왕 아래 세 번째로 높았던 소판(蘇判)과 두 번째 관등 이찬(伊飡),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린 대각간(大角干·오늘날 국무총리), 거기에 클 태(太)자를 하나 더 붙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은 오로지 그만을 위한 만든 벼슬이었다. 이른바 위인설관(爲人設官·특정인을 위해 만든 자리)의 직위.그가 죽었을 때 왕을 포함한 정부의 고위관료와 친인척, 지인들이 슬픔을 전하며 보내온 부조(扶助)는 현대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500억 원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마지막은 더 흥미롭다. 그는 신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왕으로 추존(追尊)된 사람이다. 그를 달리 부르는 명칭은 ‘순충장렬 흥무대왕(純忠壯烈 興武大王)’. 사후 1천350년이 흐른 지금도 경주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길을 ‘흥무대왕로’라고 부른다. ◆ ‘불멸하는 이름’으로 남은 신라의 장군오래 전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을 설명하는데 위와 같은 긴 문장이 사용됐다. 아니, 겨우 685자의 글로는 그의 굴곡 많고, 영화 같았던 삶과 죽음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갓 젖먹이에서 벗어난 아이들까지도 ‘한국의 장군’이라 하면 임진왜란 때의 명장으로 “내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고 일갈한 이순신(1545~1598)과 더불어 가장 먼저 입에 오르는 김유신(595~673).육체는 이미 흙이 돼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길고 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를 ‘불멸(不滅)’ 혹은, ‘사라지지 않은 정신’ 외에 어떤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 역시 김유신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높은 자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80여 명의 인물을 다룬 ‘삼국사기’ 열전 10권 가운데 3권을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다.…(중략)”이 책은 김유신이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성공시킨 ‘삼국통일’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 관해서도 약술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신라는 백제, 고구려를 멸한 데 이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려던 당군마저 물리치고 676년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비록 불완전한 통일이지만 한반도에 처음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는 것은 민족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신라인들은 이를 ‘일통삼한’으로 인식하였고, 신라의 국가적 위상도 고양되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문헌에 의하면 김유신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신라의 정통 귀족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정설. 그는 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신라가 가야를 병합할 때 항복한 왕족 중 하나가 그의 조상이었다.신라의 성골(聖骨) 바로 아래 계급인 진골(眞骨)로 편입됐지만, 왕의 혈족들과 결혼할 수 있는 진성(眞成) 귀족은 되지 못한 것.그가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임신한 문희를 “통정한 사내가 누구냐?”라고 매섭게 추궁하며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설화다. 여기에서 숨겨진 김유신의 ‘정치적 야심’을 읽을 수 있다.이 사건(?)은 누이와 ‘통정한 사내’가 김춘추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벌인 김유신의 드라마틱한 자작극에 가깝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결과적으로 김춘추는 후에 왕위(태종무열왕)에 올랐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제부와 처남 사이가 된다. 왕의 손위 처남이 된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이 한 단계 더 높아졌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미래를 내다보며 마음속으로 신라 사회의 ‘블루칩’으로 지목한 사내 김춘추를 자신의 여동생과 혼인관계로 맺어준 주도면밀한 연출자의 모습에서 김유신의 내적 명민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명민한 정치적 판단력과 함께 ‘일당백 무장’의 모습도김유신은 위와 같은 빠른 정세 판단과 내면적 깊이에 더해 외적인 용맹성도 갖춘 사람이었다.일당백(一當百) 무장(武將)으로서의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위한 각종 전투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고, 어떤 공을 세웠으며, 그 공적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는 영남대학교 군사학과 이영찬 객원교수의 논문 ‘김유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연구’에 잘 드러나 있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김유신은 신라의 무신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가 되던 해 화랑으로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다가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최초로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우는 등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그는 군사를 지휘하며 지도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사망한 이후 신라는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를 물리쳐 명실상부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지략가가 아닌 무정단호(無情斷乎)한 무인(武人)으로서 김유신이 보여줬던 결기는 선덕여왕 때 발생한 ‘비담과 염종의 반란’에서도 드러난다.반란이 일어나자 1만여 명의 군사를 가진 김유신에게 그 곱절인 2만 명의 병력으로 무장한 비담은 “패배할 게 분명한 싸움에 나서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고 조롱했다.이에 발끈한 김유신은 “너희 반란군 중 항복하는 자는 용서하겠으나, 내 군대에 저항하는 이들은 구족(九族·고조, 증조, 조부, 부, 자기,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의 동종 친족을 아우르는 단어. 즉, 피붙이 전부)을 멸하겠다”고 응수했다.실제로 김유신은 반란이 진압된 후 항복을 거부한 반란 수뇌부의 구족을 모조리 죽였다. 반란 가문의 목을 베는데 어른과 아이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반면 항복한 이들은 약속대로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중국 역사 속에도 유사한 전례가 있다.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불리는 항우(項羽 ·기원전232~기원전202)는 진나라와 전투를 치를 때 상대편 군사 20만 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는다.맞서 싸우던 적군이 항복을 했음에도 지금의 경주 인구보다 조금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모조리 생매장한 것이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Holocaust)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이를 보면 김유신은 항장불살(降將不殺·항복한 장군은 죽이지 않는다)을 넘어 항졸불살(항복한 졸병도 죽이지 않는다)까지 실천한 덕장(德將·덕을 갖춘 무장)이었던 모양.◆ 신라의 지배자였던 김유신은 행복하기만 했을까?비단 ‘비담과 염종의 반란’에서만이 아니다. 김유신은 온전한 삼국통일의 방해세력이었던 당나라 군대를 몰아낼 때도 가장 앞자리에 섰다. 앞서 언급한 이영찬 교수의 논문을 다시 인용한다.“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또한,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 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중략) 672년 석문(石門·황해도 서흥) 벌판 전투에서 신라의 군대가 당에 밀리고 있을 때는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김유신 죽은 뒤인 676년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이처럼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나라로부터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으며, 장수(長壽)의 복까지 누린 김유신.그런데, 과연 그의 삶에는 환한 빛만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어질 기사에선 그를 어둡게 뒤덮었던 ‘그림자’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6-27

지략 갖춘 무장·베테랑 외교관, 생사에 깃든 빛과 그림자

서기 660년 백제에 이어 668년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된다. 이로써 이른바 삼국통일(三國統一), 혹은 삼한일통(三韓一通)이 완성된 것이라 역사학자들은 말한다.7세기 중반에서 후반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들 사이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다양한 방식의 외교 전략이 구사됐던 시기다. 오늘날까지도 구전되는 당시의 인물과 사건들이 숱하다.7세기 우리 땅은 어느 시대보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드라마틱한 공간이었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하면서도 때로는 필요에 따라 협력관계를 이어가며 각자의 국력을 키우는데 전력했다.앞서 말했듯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과 전투, 외교 협상과 비밀스런 사건이 발생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인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신라가 어떤 방식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켰으며, 압도적 우위의 국력이 없었음에도 삼국통일에 성공한 고대국가로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보는 건 역사를 통해 현대를 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유의미한 행위이자 과정일 터. ◆ 영화처럼 흥미로운 7세기 신라를 찾아가는 여행본지는 2023년 ‘경주의 재발견’이란 타이틀 아래 연중기획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과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당시 인물들의 행적을 세밀하게 추적하고자 한다.이는 7세기 신라는 물론, 21세기 현재의 경주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호의적 관심을 유발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미래’를 설계하는 가장 주요한 재료는 ‘과거’다. 지난날은 다가올 날의 거울이 된다. 바로 그 지난날, 즉 과거의 총합이 역사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다소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과 통일이 가지는 의의.이것들을 다시 한 번 면밀하게 반추함으로써 7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환기시키고, 경주시민과 경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 역시 본지의 연중기획 목적 중 하나다.김유신, 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황산벌전투,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역학관계, 화랑, 백제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겪은 수모와 치욕….이 모든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는 7세기 한반도.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그 시절을 향후 경주 현장취재와 관련 논문 검토, 가상 역사소설과 당시를 다룬 문학작품의 해석 등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고자 한다. ◆ 김유신, 신라의 대표적 화랑으로 ‘仁(인)’을 실천하다지난주 목요일. 삼국통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의 유택(幽宅)을 돌아보기 위해 경주로 갔다. 초여름 날씨는 생각보다 더웠고, 조금만 걸어도 흐른 땀이 셔츠를 적셨다.다행히 김유신의 묘와 무열왕릉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았다. 먼저 찾은 곳은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 墓)’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태대각간’은 지금의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합친 특별한 관직이다. 김유신이 이 벼슬에 오른 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68년 고구려를 병합하는데 세운 공을 인정받은 것.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이상훈 연구교수는 그의 논문 ‘삼국통일기 화랑정신과 김유신의 리더십’에서 7세기 ‘대표 화랑’ 김유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하고 있다.“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단일국가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특히 삼국통일과정에서 전쟁에 참여한 화랑집단의 활약은 돋보였다. 이들은 세속오계를 화랑정신의 근본으로 삼고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했다. 화랑정신은 충효사상과 직결되었고, 신라의 장수들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솔선수범함으로써 부하들을 이끌었다. 이러한 변혁기에 화랑정신을 몸소 구현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다.”당시 김유신이 가졌던 권력과 권한의 크기는 조성된 묘역만 봐도 어렵지 않게 추정이 가능하다.직경 15.8m 높이 5.6m의 거대한 봉분에 38개의 탄탄한 난간석을 둘렀고, 묘를 호위하는 십이지신(十二支神)까지 탱석에 새긴 것. 이는 여타 신라 왕릉의 규모와 화려함을 압도하는 것이다.사실 김유신은 사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되기도 했다.앞서 언급한 이상훈 교수의 논문은 김유신의 당대 활약상과 그가 귀하게 여겼던 정신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런 대목이다.“김유신은 629년 낭비성 전투에 참가해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렸으며, 642년 압량주 군주로 임명돼 지방의 군사력을 새롭게 확충했다. 이후 660년 백제의 멸망과 668년 고구려의 멸망에 직간접적으로 활약하였으며, 나당전쟁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유신은 삼국이 통일되는 시기에 태어나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주역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仁(인)’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이처럼 살아서는 그 나라 최고위직 관료가 됐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됐으며, 1천4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무시로 오르내리는 이가 바로 김유신이다.그러나, 인간의 생애엔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김유신 역시 마냥 행복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관해서 차차 알아보기로 한다. ◆ 서악동에 남은 ‘신라 최고 외교관’ 김춘추의 흔적들신라의 스물아홉 번째 통치자 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 그 역시 김유신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유명세로 따지자면 신라시대 인물 중 으뜸과 버금을 다툰다.김유신이 지략을 갖춘 단호한 무장(武將)이었다면, 동시대를 살았던 김춘추는 당대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능숙하게 파악하고, 이를 전략과 전술에 능란하게 적용시킬 줄 알았던 ‘베테랑 외교관’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그가 묻힌 무열왕릉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김유신 묘를 살핀 후 가볍게 점심을 먹고 무열왕 김춘추의 유택을 향했다. 두 무덤 간의 거리는 멀지 않다. 택시로 10분 안팎이면 도착이 가능하다.역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라 적힌 묘비가 제일 먼저 기자를 반겼다. 661년 세상을 떠난 무열왕의 탁월한 외교력에 관해선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에 간략한 서술이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전략) 뛰어난 외교가 김춘추는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 왜(일본), 당(중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는 결국 통일전쟁이 단순히 삼국 간의 싸움에만 한정되지 않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참전하는 국제전(國際戰)의 성격을 띠게 만들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성공적 외교에 있었다.…(후략)”무열왕 김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당(唐·당나라)이라는 외세를 통일전쟁에 끌어들인 사대주의자”라는 사학계의 비판적 견해는 몇몇 상업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하지만, 7세기 신라의 입장에서 ‘외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고운기의 ‘인물한국사’는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다.“김춘추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특히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데 대해 그렇다. 그러나, 냉정히 따졌을 때 당대 세계문명의 중심인 당과의 외교에 한발 앞선 신라의 노력을 평가절하 할 수는 없으며, 백제건 고구려건 신라로서는 당과 마찬가지로 외국이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앞으로 전개될 연재기사에선 김유신과 마찬가지로 무열왕 김춘추의 생사에 깃든 빛과 그림자에 관해서도 탐구해 볼 예정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