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br/>⑧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고구려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저 ‘제국(帝國)’이 멸망하는 이유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도, 바깥에서 오는 충격파 탓도 아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게 가장 큰 몰락의 시그널이다.
고구려는 1천5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우리 땅 고대 3왕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인근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 군사 대국이었다.
그럼에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세운지 705년 만에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허망하고 슬픈 마지막이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절멸로 인해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발 더 성큼 다가선다. 당시 신라의 최고 권력자 문무왕 김법민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은 고구려의 최후 항전 ‘평양성전투’에서도 승리를 맛본다.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멸망의 신호탄이 어디서 쏘아 올려진 것인지를 논쟁한다. 그 논쟁과는 별개로 고구려 말기의 흥망과 성쇠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
2016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중앙과 지방’의 인용이다.
김유신과 ‘당대의 라이벌’ 연개소문
쿠데타로 보장왕 내세워 ‘실권 장악’
강경한 대외정책으로 당나라와 대척
사후, 후계자 권력 다툼에 사분오열
장남 연남생이 唐에 투항하며 ‘붕괴’
668년 최후의 항전 ‘평양성 전투’서
나당 연합군에 대참패 ‘역사 속으로’
“고구려는 오랜 기간 진행된 수나라·당나라와의 국운을 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한동안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올렸다. 특히 642년 정변을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이 군사력을 강화화고, 그를 기반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성공함으로써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뒤이어진 당나라의 공격도 차례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외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내부의 국력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대외적 위기 속에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자 그동안 누적돼온 모순이 즉각 겉으로 표출됐다. 연개소문이 죽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세 아들 사이의 정쟁이 그것이다. 장남 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지만 지방을 순행하는 사이에 동생 남건과 남산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남생은 평소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국내성 세력을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예상 밖으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
◆‘태대각간’ 김유신에 필적했던 ‘대막리지’ 연개소문
위에서도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되는 연개소문(594~666)은 김유신, 계백과 함께 삼국시대를 이야기할 때 신라, 고구려, 백제의 그 어떤 왕보다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보편적 대중들은 김유신을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초특급 스타로, 계백은 풍전등화(風前燈火) 형국이었던 조국 백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만고충신(萬古忠臣)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은 어떤가.
김유신의 벼슬 ‘태대각간’은 현대의 개념으로 보자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근데, ‘대막리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행정안전부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것.
그러니, 고구려의 마지막 통치자 보장왕(재위 642~668)은 ‘연개소문이 내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삼국통일 과정을 다루면서 연개소문의 삶과 죽음을 빼놓는다면 그건 ‘단팥이 빠진 찐빵’의 맛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구려 말기 그의 위상과 영향력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당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신라 김유신의 위상부터 살펴보자.
육군사관학교 정재민 교수는 그의 논문 ‘영웅형 무장의 원형 김유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을 꼽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강감찬, 최영, 김종서, 이순신, 권율, 곽재우, 임경업 등 많은 장수들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 모두는 누란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해낸 명장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김유신은 다른 장수들에 비해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는 7세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해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며, 사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또한, 軍威(군위·군대의 위신)에서는 將軍神(장군신)으로, 江陵(강릉)에서는 大嶺山神(대령산신)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신격으로 숭배되고 있다.”
살아있는 내내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追尊)됐으며, 강원도 강릉을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인간을 넘어 신(神)으로까지 추앙받는 게 김유신이다.
이는 고대 왕국의 역사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그 기록이 영웅전설을 낳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
◆당나라까지 위협한 맹장(猛將)이었으나 그의 자식들은…
헌데, 연개소문은 삼국통일 전쟁 과정의 승자가 아닌 패자임에도 가진 권력의 크기와 전장에서 떨친 용맹이 김유신을 위협하는 형국이다.
여러 고문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앞뒤는 물론 좌우에서도 감히 바라보기가 두려운 거구의 맹장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면 엎드린 호위병들의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고구려의 어떤 귀족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영류왕을 죽이고 무력을 독점한 ‘쿠데타의 수장’ 연개소문은 뭇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재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당시 중국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당나라의 왕들 또한 연개소문을 무서워했다.
게다가 그는 고대 왕국의 틀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권력의 중앙집중화’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길고 드라마틱했던 연개소문의 생애를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다. 동부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나라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당나라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은 나이 지긋한 중국인들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경극(京劇·노래와 춤과 연극이 혼합된 전통극)에까지 등장한다.
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당나라 태종 이세민(598~649)을 겁박하는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1천400여 년 전 그가 가졌던 ‘대체 불가의 카리스마’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시대는 마냥 지속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남기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건 고구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666년.
그가 죽은 후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 벼슬을 이어받는다. 사태가 어그러진 건 차남 연남건이 ‘이제 고구려의 권력은 내가 가져야겠다’는 야심을 품으면서부터였다.
형 연남생이 궁궐을 비운 틈을 타 연남건은 동생인 연남산과 모의해 “이제는 형이 아닌 내가 대막리지”라고 선언한다.
연남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형 연남생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연헌충의 목숨까지 끊어버린다. 이는 ‘고구려판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끌어내려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이라 불릴 만한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연남생은 동생에게 당한 배신과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아 당나라에 투항해버린다. 이로써 연개소문의 아들 셋은 따스한 정을 나누는 혈육이 아닌 철천지원수가 됐다.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내부에서부터 붕괴의 조짐을 보였던 멸망 직전의 고구려.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신라의 고구려 침공은 이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전개됐다.
신라는 문무왕과 김유신, 김인문(629~694·진골 왕족으로 무열왕의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이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나라는 고종(당나라 3대 왕·재위 649~683)의 명령에 따르는 수많은 정예군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하고 1개월 이상 공격을 지속했다.
지금으로부터 1천355년 전인 668년 늦여름. 한때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넘어 서부 아시아까지 호령하던 로마 제국이 퇴폐와 방탕이라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무너진 것처럼 고구려의 운명도 저녁 하늘처럼 어둡게 저물고 있었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