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br/>⑨ 고구려의 절멸을 부른 혈족간의 알력
668년 고구려의 붕괴와 기원전 207년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서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두 사건 사이에는 9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양국 모두 호걸(豪傑)의 사망과 간신의 횡포, 죽고 죽이는 형제간 다툼이라는 악재가 단시간에 겹쳤다.
진나라의 최초 통치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이다.
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농사법과 실용기술에 관련된 책 외에는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독재자’로 이름이 높지만, 진시황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한마디로 단순하게 평가될 인물이 아니다.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백성과 수천 명의 관료를 거느리고 국가를 다스린 인물이라면 그에겐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할 터.
‘냉혹하고 독선적인 왕’이라는 건 진시황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그의 ‘빛’은 어떤 영역에서 환하게 반짝였을까. ‘위키백과’가 이에 답하고 있다.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또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을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는 진시황이 사망한 직후 바로 무너진다. 환관(宦官·내시) 조고(趙高)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나라의 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뒤를 이은 진나라의 2대 황제 호해(胡亥)는 아둔한 사람이었다.
조고와 호해는 순행(巡幸·왕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보는 일) 도중 숨진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황태자 부소와 몽염을 죽이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진나라의 절멸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이 되면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시황릉과 아방궁 등의 대규모 공사가 계속됐고, 변방의 수비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야 했다. 엄청난 노동의 강요와 무거운 세금, 엄격한 법률은 백성들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시황이 죽자 농민의 원성은 폭발했고, 마침내 진승, 오광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소식은 전국에 퍼져나갔고,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지만,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는 이를 계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조카 이간질 시킨 연개소문 동생 연정토
남부 12성 주민 3천543명 신라에 바쳐
2대 대막리지 오른 첫째아들 연남생은
동생들에 아들 헌충 잃고 당나라로 피신
항복한 대가로 벼슬 받아 고구려戰 선봉
정변으로 대막리지 자리 빼앗은 연남건
나당군에 패전, 고구려 ‘패망의 길’ 자초
◆진나라의 멸망 과정과 유사한 길을 걸었던 고구려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군사적 실권을 제 손 안에 틀어쥐고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진시황과 닮았다.
연개소문은 시종일관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백으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엔 실질적 왕의 역할까지 맡았다.
‘한국사 개념사전’은 연개소문의 집권 배경과 타협을 거부하는 거칠고 직선적인 대외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략하느라 국력이 약해진 수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고구려에 쳐들어오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는 중국과 맞닿은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이에 대비했다. 당시 고구려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 연개소문은 642년 당시 임금이었던 영류왕 대신 보장왕을 세우고, 대막리지(大莫離支·고구려 말기의 최고 관료)가 돼 정치를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강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나라에 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당나라의 요구도 거절했다.”
‘천리장성의 축조자’이자, ‘거대 제국 당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으로 고대 왕국 고구려를 쥐고 흔든 최고 권력자였지만, 연개소문 역시 ‘삶이 유한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도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다가선 죽음만은 이기지 못한다. 666년. 고구려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2년 전 숨을 거둔 연개소문. 이후 진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생겨난 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고구려에서도 일어난다.
◆진나라 조고=고구려 연정토, 진나라 호해=고구려 연남생
진시황이 죽은 뒤 간신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한 행위)로 진나라 2대 왕 호해를 조롱한다. ‘모든 관료들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나를 두려워하니, 사슴을 말이라고 해도 감히 반론하지 못할 것’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악행이었다.
고구려가 망해가던 무렵 조고처럼 영악한 행위로 나라를 망친 건 놀랍게도 연개소문의 동생이었다. 이름은 연정토(淵淨土).
그는 형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사이를 이간질해 셋을 형제가 아닌 원수로 만들어버렸다. 연정토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내용이다.
“형인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3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장남 연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적국인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인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천543명을 신라에 바치고 투항했다.”
고구려 멸망의 길에서 연정토가 진나라 조고와 비슷한 배역을 맡았다면,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은 진나라의 두 번째 왕 호해처럼 우매한 배역을 자처했다.
아버지 덕에 아홉 살 어린아이임에도 선인(先人)이란 관직에 올랐고, 부친 사후에는 2대 대막리지가 됐던 연남생은 동생들과의 피 튀기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자, 연개소문이 그토록 적대시하던 당나라로 도망친다.
‘내가 고구려의 지배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동생들 역시 망하게 할 것’이라는 이기적이고 단순무지한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음은 그의 행적에 관한 ‘위키백과’의 서술이다.
“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 넷이 권력 다툼을 크게 벌였다. 결국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남건·남산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결국 668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다.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또한 당나라 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 공적으로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무열왕이 만든 배경 아래서 고구려를 병합한 문무왕
아우는 적국(敵國)이라 불러야 할 신라 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고, 장남은 또 다른 적성국(敵性國) 당나라에 항복한 대가로 벼슬까지 받는다.
연개소문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분노와 서러움에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을까?
그랬다. 로마 제국이나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처럼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맞붙은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두산백과’의 짤막한 요약은 이렇다.
“평양성전투는 고구려 보장왕 때인 668년 도성인 평양성에서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고구려가 패해 함락됐다.”
이로써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660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뒤 고구려까지 절멸시키게 된다. 무열왕은 ‘왕위를 이어갈 아들’이란 자리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김유신의 조카’라는 타이틀까지 문무왕에게 선물한 셈이 됐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무열왕과 ‘일통’의 여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 고구려 병합으로 ‘통일’의 90% 이상을 완료한 문무왕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조선시기에도 무열왕·문무왕과 신라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武(무)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됐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