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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국통일 과정의 최대 비극은 ‘황산벌전투’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3-07-25 18:07 게재일 2023-07-2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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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br/>⑥ 백제, 장엄하고 비극적인 영화처럼 사라지다
석양 무렵에 보는 계백 동상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조성된 ‘계백 장군 유적지’는 야트막한 수락산에 감싸 안긴 모습이다. 아래쪽으론 제법 큰 탑정호수가 푸른 물빛을 빛내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

인간의 상상력이 가닿기조차 힘든 까마득한 옛날인 660년 7월 9일과 10일. 고대국가 신라와 백제는 생사결단의 싸움을 그곳에서 벌였다. 최소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산벌전투’의 현장.

지지난 주. 귀하디 귀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촌음(寸陰) 사이에 결정되던 비극의 장소인 그곳을 2시간 가까이 천천히 돌아봤다. 황산벌전투에서 가장 장엄하고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계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산벌에 도착하기 전. 계백은 아내와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 “與其生辱 不如死快”라고 했다. “살아있다면 적군에게 너희들이 당할 치욕과 고통을 알기에 내가 죽일 수밖에 없다”는 뜻.

거센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로워진 나라의 사령관. 자신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벌어질 일을 이미 예상했을 게 분명하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직후 왕족과 귀족들이 겪은 일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프랑스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다수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거나 혁명군의 총에 맞았고, 왕과 귀족의 아내와 딸들은 육체적 모욕을 당해야 했다. 혁명이나 전쟁이나 ‘그 이후’는 동서고금이 유사했다. ‘천하의 계백’이 그걸 몰랐을 까닭이 없다.

 

가장 장엄하고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이야기 만든 계백

가족 죽인 뒤 5천 군사로 5만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나라 잃은 심한 충격에 삶 마쳐

김유신은 조카 반굴을 죽음으로 내몰아 신라군 사기 올려

황산벌전투 이듬해 김춘추 죽고, 13년 뒤엔 김유신도 별세

계백 장군의 위패가 봉안된 충남 논산의 충장사.
계백 장군의 위패가 봉안된 충남 논산의 충장사.

◆계백의 유택(幽宅) 앞에서 떠올린 슬픈 시 한 편

황산벌전투는 승자인 신라 무열왕 김춘추에겐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출발점이 됐고, 김유신에겐 드높은 전과(戰果) 중 하나로 기록됐다.

그러나, 맞서 싸운 상대편의 수장 계백은 거기서 모든 걸 다 잃었다. 수천 명의 부하와 일생을 함께해 온 식구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논산 변두리 외진 곳. 계백의 유택으로 추정되는 무덤 주변엔 웃자란 풀들이 미지근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경주의 김유신 묘소처럼 화려하지도 않았고, 승자의 기운이 깃들지도 못한 쓸쓸한 풍경이었다. 거기 서있자니 그 역시 서러운 인생을 살아온 시인 이산하(63)의 시(詩) ‘복사꽃’이 떠올랐다.

 

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꽃

복사밭 건너

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6세기에도 복숭아는 있었다. ‘그해는 복사꽃의 개화가 늦었다’는 문장이 등장하는 걸로 미루어 볼 때.

그랬다.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계백 역시 유유자적 복사꽃이나 바라보며, 그 복사꽃이 만들어낸 달콤한 복숭아를 맛보며 말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계백이 복사꽃을 본 건 660년이 마지막이었다.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백제 병사 대부분이 661년 열매 맺은 복숭아를 먹어볼 수 없었다. 죽은 자에겐 저작(咀嚼)할 입이 없으므로.

‘황산벌전투’는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백제라는 개별 국가가 겪은 가장 큰 비극이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을 종합하면 이런 답이 나온다.

 

“642년(의자왕 2년)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羅唐·신라와 당나라)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 신라 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게 했다.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백마강)으로 진격했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삼국시대 백제가 방어용 목책을 구축했던 전략상 주요한 고개)으로 출정했다.”

 

◆백제의 절멸은 신라가 더 큰 꿈 펼칠 디딤돌로…

의자왕은 모욕당하고, 계백은 처참하게 전사하고, 항복함으로써 굴욕 속에 살아남은 충상과 상영 등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신라의 하급 관료가 돼야 했던 660년 황산벌전투.

신라의 정치·군사·사회적 실권을 거의 독점했던 무열왕과 김유신에게 이 전투는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시킬 수 있는 단단한 지렛대가 됐다.

그랬기에 김유신은 피붙이인 어린 조카 반굴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알다시피 반굴은 관창과 함께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희생양으로 선택된 화랑 중 하나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십 번 이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재현된 황산벌전투. 그러니, 그 결과를 재삼 거론하는 건 무용해 보인다.

그저 다음처럼 간략하게 요약하면 될 듯하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이상훈 교수의 논문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 인용이다.

 

“660년 여름. 당군 13만 명이 덕물도에 도착했고, 신라군 5만 명이 경기도 이천으로 북상했다. 신라군과 당군은 합군하지 않고, 각각 행군하여 백제의 수도로 향했다. 당군은 수로로 이동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이동했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 명과 백제 결사대 5천 명이 격돌했다.…(중략) 660년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신라 백성이 아니고, 백제의 백성도 아니며,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인 기자는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중 어느 한 편이 돼 황산벌전투의 승리와 패배에 관해 기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 입장에 서는 게 가능하다.

그럼에도 계백의 무덤 앞에서 1천363년 전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같은 핏줄을 가졌고, 유사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서로를 원수처럼 죽고 죽이는 행위가 70년째 없다는 건 분명히 ‘행운’일 터. 더불어 그 행운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까지 간절했다.

어쨌건 황산벌전투를 끝으로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몇 건의 저항 이후 백제라는 고대국가의 이름은 사라진다.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세운 나라가 678년 만에 절멸된 것이다.

황산벌전투의 백제군을 상상해 재현한 부조.
황산벌전투의 백제군을 상상해 재현한 부조.

◆백제 멸망 1년 후 무열왕 김춘추도 세상 떠나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백제 멸망의 원인을 ‘국내적 요인과 국외적 요인의 복합적 작용’에서 찾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의자왕은 ‘왕권 강화’라는 슬로건 아래 지방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통제하려 했고, 이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포기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지방 귀족계급의 반발을 불렀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고, ‘야심가’ 김춘추와 김유신이 존재했던 동쪽 신라의 침탈이 나라를 흔들어댔던 시기.

의자왕 역시 계백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했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몇몇 고문헌에 언급된 의자왕의 죽음은 아래와 같다.

 

“660년 9월 3일 왕후인 은고부인, 자식들, 신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그해 11월 1일 당나라 고종 앞에서 모욕적인 항복 선언을 했다. 나라를 잃고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다가 며칠 만에 먼 이역 땅에서 생을 마쳤다.”

 

황산벌전투의 패자인 계백과 의자왕은 660년 죽었다. 그렇다면, 승자인 신라 권력의 핵심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어땠을까.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명제를 증명하듯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이듬해 김춘추가 죽었고, 13년 뒤엔 김유신도 지상에서의 삶을 끝낸다.

백제 병합에 이어 ‘고구려 병합’이란 삼국통일의 제2막을 열어젖힌 건 김춘추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카였던 김법민(金法敏). 문무왕(文武王)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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