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경북 영주 병산리 천연기념물 갈참나무 노거수
늘 경험하는 일이지만, 노거수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 펼쳐지는 농촌의 정겨운 풍경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도 있다. 내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감정선이 떨리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릴 때 일들이 가물가물 잊을 만도 한데 실상은 더욱 또렷하게 가슴 한 곳에 저장되어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피어오른다.
물오른 나무처럼, 젊은 시절의 패기로 인한 후회와 미련은 이제 물처럼, 바람처럼 떠나보내고, 마음은 평정심으로 노년의 삶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 무심한 세월을 탓할 만도 아닌가 싶다. 삼라만상의 천태만상을 보면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움으로 관조할 수 있는 생각의 근육도 생겨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한 숨겨진 그 무엇도 보였다. 자신의 감정과 입장에서 아니라 상대의 위치에서 보고 느끼는 현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세종 때 낙향 선비 황전 ‘첨모당’ 짓고
도토리 열리는 구황 나무 마을에 식재
갈참나무 중 천연기념물 지정은 유일
장사 ‘허 장군’ 관련된 수호석과 함께
경배의 대상으로 별도로 동제 지내와
나즐로 노거수를 찾아 나서는 일 또한 그러하다. 나무의 웅장한 자태와 그 오래됨의 역사 앞에 서면 마을의 재미나는 전설과도 만나게 된다. 전설의 실타래를 풀어보면 지난 삶의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언중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오늘만도 그렇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산 338번지 마을 동산에 우뚝 높이 선 천연기념물 제285호 갈참나무 노거수이다. 외형상으로 나이 600살, 키 15m, 가슴둘레 4m나 되는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이다. 그러나 마을 주민과 함께한 600년이라는 장대한 세월의 삶을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며,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까지 살아오고 있다.
천연기념물 갈참나무 노거수 앞에 서면 또 하나의 전설이 기다리고 있다. 나무는 묘하게도 마을 중심에 있는 꽤 높은 동산의 넓은 정상에 살아가고 있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마을 주민은 갈참나무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나무 앞에 큰 돌을 기단석 위에 세워놓고 그 앞에는 제단석을 만들어 놓았다. 돌에는 금줄을 쳐 놓은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였다. 그 돌이 마을 수호석(守護石)으로 허 장군석이다.
그 유래를 보면 이렇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이 마을에 아주 힘이 센 젊은 허장사(許壯士)가 살았다고 한다. 하루는 젊은 장정들이 마을 뒤에서 제일 높은 시루봉에 올라 돌 던지기 시합을 했는데, 허장사가 던진 돌이 10여 리를 날아 이곳 병산리 마을 앞 논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허장사를 ‘허 장군’이라 불렀다. 허 장군이 던진 돌을 신성시하다가 어느 날 이곳으로 모셔 마을 수호석(守護石)으로 삼았다고 한다. 해마다 정월 초에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등 제관을 정하고 제사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여 정월보름날 자시에 수호목인 갈참나무와 함께 서낭제를 올리고 풍년 농사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올린다고 한다.”
이 전설은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을 들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1m도 던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면 왜 마을 수호석으로 믿고 또 허 장군돌이라 이름 붙이고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할까. 수석처럼 특별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값나갈 것도 아니 보였다. 병산리 마을은 창원황씨 집성촌인데 황 씨가 아니고 허 씨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그 끝이 없다. 그 답은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설 속에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이 고스란히 숨어 있지 않을까 싶다. 도도처처불심(到到處處佛心)이라고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부처의 마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민중 사이에 전해오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어귀나 뒷산, 주변 어느 공간에 나무 두 그루를 심어 음양오행설에 따라 남자를 상징하는 전나무와 여자를 상징하는 느티나무를 한 세트로 심었다. 그 변천 과정에 수종도 바뀌어 여성을 상징하는 나무와 남성을 상징하는 나무 대신 돌이나 돌탑으로 바뀐 마을을 흔히 볼 수 있다. 보통 마을에서는 수호목과 돌이 한 세트로 제단도 하나인데, 병산리 마을은 별도의 제단을 두고 제사도 별도로 지낸다는 것이 좀 특이할 뿐이다.
갈참나무는 창원황씨 봉례공(奉禮公)의 황전(黃纏 1391~1458)이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마을에는 황전이 세워 지방 유생을 가르쳤다는 첨모당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갈참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수호목으로 정한 것도 이 나무가 유일하다. 왜 황전은 갈참나무를 식목하였을까? 그 이유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이유가 전해 내려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부터 흉년이 들면 도토리가 많이 열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흉년에 대비해 구황(救荒)의 의미로 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뭇가지가 구불구불하면서도 우산살처럼 퍼져있는 자유로운 모습의 아름다움은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갈참나무는 참나무로 불리는 나무 중에 한 종이다.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 여섯 종이 있다. 나무껍질과 잎, 열매로 구분하나 일반사람이 구분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다. 나무껍질은 회색으로 그물처럼 얇게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며 타원형 또는 도란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뚜렷한 톱니가 있다. 열매는 도토리이며, 꽃이 핀 그해 9~10월에 익는다. 도토리는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이며, 과거에는 가루를 내어 떡이나 도토리묵 또는 죽으로 이용했다. 나무의 결이 곱고, 내구성이 뛰어나 건축재, 선박재, 가구재, 바닥재 등으로 쓰였다.
병산리 마을 동산 위에 우뚝 서 있는 갈참나무는 가지가 위로 솟기보다 손이 닿을 정도로 아래로 쳐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나뭇잎 아래에 웬 장수풍뎅이 한 마리가 조용히 졸고 있다.
첨모당(瞻慕堂)은…
황전(黃纏, 1391〜1459)이 세종 11년(1429)에 학문을 연마하고 지방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첨모당은 선조들의 학덕과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황전은 1458년에 사직하고 병산에 내려와 은거했다. 1535년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되고 그 3년 후인 1538년에 고택을 중수하여 첨모당 현판을 걸었다. 첨모당 앞에 회화나무가 있고 그 옆에 신위를 모신 숭보사가 있다.
황전에 대한 일화가 있다. “1456년 순흥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던 금성대군이 사람을 보내 쌀 포대 속에 은괴(銀塊)를 몰래 가지고 와서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공은 병이 들어 갈 수 없다며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일찍이 서로 교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지위도 다르니 물건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돌려 보냈다. 이듬해 단종 복위 운동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금성대군은 물론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공은 그로 인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조회와 의식을 담당하던 통례원봉례(通禮郞奉禮)의 직을 역임, 병산 마을은 창원황씨(昌原黃氏) 황량중(黃亮仲) 7대손이 고려 공민왕 1357년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황승후(黃承厚)가 개척한 창원황씨(昌原黃氏) 집성촌 마을이다. 아들 황처중(黃處中)은 조선 초에 영일 감무(監務)를 지냈으며, 황전은 그의 아들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