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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어”

동해안별신굿에서 지화는 굿상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조상신이나 골메기신(골막이)을 모셔와 굿을 하려고 곱게 단장하는 것이다. 음식을 차리고 잔을 올려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굿의 기본이며, 맨바닥에서 잠들고 굿을 받는 것보다 꽃밭에서 굿을 받고 인간세계와 소통하라는 의미다. 김홍제(이하 제) : 어릴 때 굿판에 가보면 구경꾼이 참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자중(이하 김) : 1박 2일이나 2박 3일 동안 굿판이 벌어지면 근처 50리 반경에 사는 주민들이 소문을 듣고 구경을 많이 왔어요. 요즘의 큰 축제나 마찬가지였지요. 할머니들은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하얀 버선에 고무신을 정성껏 닦아 신고 왔답니다. 신에게 정성을 바친다는 정갈한 마음가짐이었지요. 굿을 하는 어촌에서는 사돈에 팔촌까지 연이 닿는 사람은 재우고 먹이면서 함께 밤을 새워가며 굿 구경을 했어요. 가난했지만 인심이 넉넉하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구경꾼이 많으면 우리도 신나게 굿을 했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굿판이 열리면 엿장수와 깨배기(쌀 강정의 경상도 사투리) 장수도 왁자지껄했지요. 제 : 굿이 거의 사라지면서 선생님이 좀 쓸쓸할 것 같습니다. 김 : 어쩌겠습니까,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촌이나 농촌의 풍어제와 동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IMF가 사람들 생각을 많이 바꿔놓은 것 같아요. 이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후원해주지 않으면 어촌에도 굿이 잘 열리지 않아요. 그리고 무속 일을 하던 사람들이 늘 일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흥청망청 살았던 것도 사실이지요. 굿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무속 하는 사람들이 노름을 많이 했답니다. 굿판이 열리면 많은 현금이 들어오는지라 노름꾼들이 달려들었어요. 나도 한 시절 노름으로 돈을 꽤 날렸지요. 쉽게 들어 온 돈이 쉽게 나가는 법이잖아요. 아무래도 어부들이 농부들에 비하면 돈을 쉽게 만지게 되지요. 고깃배가 만선으로 돌아오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어요. 술판이 질펀하게 벌어지고 계집질과 노름이 이어졌지요. 그 바람에 이 집 저 집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제 : 별신굿 하던 이름 있는 분들은 거의 작고하셨지요? 김 : 그렇지요. 김석출의 딸 김영희도 나와 나이가 비슷하니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굿판이나 무대에 오를 수 있겠어요? 제 : 어떻게든 별신굿의 전통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김 : 포항에서도 흥해나 청하가 별신굿을 참 잘했지요. 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포항 여남 출신인 김석출이 있었고, 그의 딸인 김영희·김동연·김동언이 부산과 울산 등에서 활동했으니까요. 이 자매들이 아버지를 이어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되기도 했고요. 포항에서 한터울을 운영하는 정연락 같은 이가 별신굿의 명맥을 이어주는 게 참 고맙지요. 국악을 전공한 젊은이들도 여기에 동참한다고 들었어요. 행정기관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해줬으면 좋겠군요. 제 : 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이 포항에 있다고 하셨는데, 근거가 무엇인가요? 김 : 동해안 세습무는 혈연과 혼인 관계로 이어져 있어요. 양중으로 활동한 부산의 김동영은 김석출의 딸 김동언과 결혼했지요. 강릉에서 활동한 신석남은 김석출의 사촌 김용출과 혼인해 세습무가 되었고, 신석남의 동생 신동해와 그의 부인 사화선, 신석남의 아들 김명익도 대를 이어 강릉에서 활동했어요. 내 사촌 김미향은 울진의 송동숙과 결혼해 세습무가 되었는데, 나중에 조카인 김장질이 후포 삼율에서 활동했어요. 그렇게 서로 인연이 이어지는 관계인데, 자세히 보면 그 뿌리는 포항에 있지요. 김석출 집안과 혈연과 혼인 관계로 얽히고설켜 세습무가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제 : 지화는 어떤 식으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까? 김 : 굿이 있는 곳에 지화는 늘 있었어요. 지화가 없거나 적은 굿판은 왠지 허전하지요. 지화를 본 사람들은 미술작품 같다고 말하곤 해요. 앞으로 지화가 미술작품으로 인정받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 : 무속 일을 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요? 김 : 이 일을 하면서 후회는 별로 안 했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지요.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무당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인물도 좋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무당과 인연이 되었지요. 호흡이 잘 맞아 여기저기 몇 년을 같이 다녔어요. 그때 7번 국도가 확장돼 포항으로 가는 직통 시외버스를 타고, 지금 청하 사거리에서 버스를 세워달라고 해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곤 했지요. 그날도 일을 마치고 밤늦게 청하 사거리에 도착했어요. 무당과 같이 내리자마자 나는 어둑한 논둑 가에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섰는데 여자가 안 보이는 겁니다. 한참을 찾았지만 끝내 못 찾고 용두리로 왔는데 청하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무당이 청하 사거리에서 월포리 방향으로 가지 않고, 포항 시내 쪽 7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 무당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속 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한동안 술로 슬픔을 달랬지요. 제 : 선생님은 청하 용두리에서 70여 년 사셨는데, 용두리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김 : 청하 용두리는 월포리에 인접한 어촌입니다. 월포 해수욕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요. 동해중부선 월포역이 생겼고,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우리 집 앞에 북포항 IC가 생긴다고 공사가 한창입니다. 그만큼 동네가 많이 바뀌었어요. 외지인이 상가나 건물을 지어 많이 살고 있고 토박이는 노인들밖에 없다고 보면 됩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핵폐기물 설치 반대 운동 때문에 정말 시끄러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마침 내가 용두리 이장을 할 때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답니다. 정부가 핵폐기물 처리 장소로 청하를 지정해 밀어붙였지요. 온 면민이 나서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7번 국도를 막고 장기간 데모를 했으니까요. 제 : 그전에는 고기가 많이 잡혔지요? 김 : 그럼요. 댕구리배(저인망 어선)나 목선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지요. 어종도 다양했고요. 사고가 잦아 위령제를 자주 했어요. 월포리와 용두리는 전통적으로 후릿그물(어선 두 척이 저인망 그물을 끌고 나가서 그물을 끌고 들어오면 해안에서 동네 주민이 모여 그물을 당겼는데, 이를 후리라고 부름)로 멸치를 많이 잡았어요. 아귀 같은 게 그물에 걸려들면 가시가 있고 못생겼다며 바다에 버렸는데 요새는 없어서 못 먹는 고기가 되었지요. 요즘 남해안에서 잡힌 멸치가 인기가 좋다더군요. 그런데 그 맛이 우리가 후릿그물로 당겨 잡아 바로 삶아서 말려 먹던 멸치 맛에 비하겠습니까? 이젠 그 맛을 볼 수 없게 되어 좀 씁쓸하지요. 언제부턴가 후리가 불법으로 금지되었어요. 지금은 여름철에 해수욕장 관광객을 위해 한 번씩 후리를 하게 해주는데, 인기가 좋다고 들었어요. 후릿그물에 든 싱싱한 횟감을 관광객들에게 나눠 주는 행사도 있다고 하더군요. 후릿그물에 멸치와 싱싱한 횟감이 많이 잡히면 관광객들이야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런데 월포가 유명한 해수욕장이 되면서 동네 인심은 예전만 못해요. 여름철이면 차량이 많이 밀려서 불편하기도 하지요. 가난하지만 함께 나눠 먹던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18

“올 추석엔 가족과 함께 ‘야경 맛집’ 찾아 떠나자”

추석을 맞아 가족과 함께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가을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명소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전국의 달맞이 명소 4곳을 소개한다. ◇ 수원 대표 야경 명소, 서장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서장대는 보름달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수원 화성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1794년(정조 18년)에 군사시설로 세워졌으며, 군사 훈련과 외부 감시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서장대에서의 낮과 밤은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낮에는 수원 화성의 전경이 탁 트인 시야에 아름답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밤에는 현대적인 도시 야경과 전통 건축물이 조화를 이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저녁에는 고즈넉한 달빛 아래 화성과 수원의 야경이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서장대를 찾아 그 매력적인 야경을 즐기곤 한다. 서장대 바로 아래에는 효원의 종이 설치돼 있다. 이 종은 1991년 수원시가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방문객들은 직접 종을 치면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할 수 있다. ◇ 바다와 도시 야경이 한눈에 구봉산 전망대 전라남도 광양시 구봉산에는 광양만과 여수, 순천, 남해를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 서면 포스코(POSCO) 광양제철소, 이순신대교, 광양항 등의 산업 시설에서 나오는 조명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환상적인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추석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더욱 낭만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구봉산 정상에는 메탈 아트로 만든 독특한 봉수대가 눈에 띈다. 이는 전통 봉수대의 기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조형물로 광양의 상징인 빛과 철, 꽃을 활용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해맞이 행사, 야외 공연, 결혼식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장소로도 활용돼 많은 방문객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 월출 명소로 손꼽히는 산책하기 좋은 공원, 부산 달맞이 동산 달맞이 동산은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대표적인 월출 명소다. 이곳은 해운대 해변에서 가까워 바다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착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함께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정월대보름이나 추석 보름달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달맞이 동산은 과거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자주 찾던 장소로, 여기서 바라보는 월출은 해운대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달맞이 동산을 지나가는 달맞이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달맞이 동산 정상에는 1997년에 세워진 해월정이 있으며, 이곳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면 한층 더 운치 있는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야외 음악당, 조각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돼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추천한다. ◇ 달빛 아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의 바위, 제주 용두암 제주 용두암은 제주시 용담해안도로 인근에 있는 높이 약 10m의 바위다. 용이 승천하려다 실패해 바위가 됐다는 전설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바위의 모양이 용의 머리와 닮았다고 하여 용두암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파도와 바람에 깎인 독특한 형태로 오랜 세월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전설에 따르면, 한라산 신령의 옥구슬을 훔쳐 달아나던 용이 신령의 화살을 맞아 바다에 떨어져 바위가 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는 달빛 아래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어지며, 이러한 신비로운 전설 덕분에 용두암은 특히 밤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용두암에서 도두항까지 이어지는 6km의 해안도로는 제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카페와 맛집이 있어 눈과 입이 즐거운 여정을 즐길 수 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사진자료 제공 - 한국관광공사

2024-09-12

이야기 보따리 다시 풀어내는 명작 만나보세요

긴긴 뜨거운 여름을 지나왔다. 아직 가을이라 하기엔 미흡하지만,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추석이 코앞이라고 말해준다. 추석 연휴가 5일이다. 조상님들 산소를 돌보고, 친척들과 만나 가져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을 나누는 기쁜 명절이다. 하늘 저쪽에서 구름 공장이 열심히 뭉게구름을 만들어 보내온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 나들이하기에 좋은 날씨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도 즐기고, 오래전 함께 즐겼던 영화도 곱씹어보는 추석 명절이 되길 바라며, 영화 네 편을 골라 보았다. 모든 위조품 속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베스트 오퍼’ 시네마 천국 감독 작품이다. 36년 전 개봉한 ‘시네마 천국’은 지금도 사람들의 최애 작품을 꼽을 때마다 등장한다. ‘베스트 오퍼’는 아날로그 필름 작품만 고집하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첫 번째 디지털 영화이다. 영화 제목 ‘베스트 오퍼’는 경매가 최고액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미술품을 보는 남다른 안목으로 당대 최고의 경매사다. 하지만 심각한 결벽증으로 사람들과 소통이 힘들다. 60이 넘도록 사랑하는 이 하나 없이 경매를 도와주는 친구 한 명뿐이다. 그와 함께 부당한 방법으로 여인들의 초상화를 낮은 값에 경매받아 혼자만의 비밀의 방에 모아두고 감상한다. 그 앞에 광장공포증을 가진 여자가 나타난다. 그때부터 주인공 올드만의 인생은 달라진다. 처음 사랑에 빠진다. 영화음악은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작품이다. 모든 위조품 속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라는 대사가 주인공의 첫사랑이 진짜 사랑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을 대변한다. 그의 비밀의 방에 가득한 여인들의 초상화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진정한 친구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올드만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속고 다시 속이는, 거짓말 게임의 끝은 진실?빌 콘돈 감독의 ‘굿 라이어’ 명품 연기의 주연, 연기경력 50년이 넘는 여주인공의 주체적인 캐릭터. 부유한 미망인 ‘베티(헬렌 미렌)’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로이(이안 맥켈런)’를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사실 로이는 베티의 돈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 이를 모르는 베티는 로이가 제안한대로 공동 계좌를 만들어 본인의 재산과 로이의 재산을 합하는 데 동의하고, 두 사람은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베티는 로이의 정체를 알게 된다. 미녀와 야수와 위대한 쇼맨을 만든 빌 콘돈 감독이 만들었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그는 인간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이 영화는 반전의 반전이 재밌다. 이야기의 처음 시작은 2차 세계 대전 독일이다. 거짓말이 제일 쉬워 거짓말로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로이, 마지막 장면에서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신의 돈이 사라지니 그제야 진실을 말한다. 스릴러 장르라지만 남녀 연기자의 내면 연기를 보는 맛으로 영화를 즐기면 더 재밌을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삶의 철학을 묻다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납작하게 구운 반죽 사이에 팥소를 넣어 만드는 전통 단팥빵 ‘도라야키’를 파는 작은 가게.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가게 주인 ‘센타로’에게 ‘도쿠에’라는 할머니가 찾아온다. ‘마음을 담아’ 만든다는 할머니의 단팥 덕에 ‘도라야키’는 날로 인기를 얻고 가게 주인 ‘센타로’의 얼굴도 밝아진다. 하지만 단골 소녀의 실수로 할머니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예상치 못한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는데…. “당신에게는,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아 있습니까” 제목이 팥 이야기인 만큼 도라야키 안에 들어갈 팥소를 만드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준다. 팥에서 상태가 안좋은 것을 골라내야하고, 전날 미리 물에 불려놓는다. 팥에서 색이 우러나온 것도 살핀다. 팥을 삶고 솥에 귀를 가져가 소리를 듣고는 시간이 됐다는 듯 건져 차가운 물로 헹궈낸다. 제대로 헹구지 않으면 떫은맛이 남는다. 냄비에 다시 넣어 물을 넉넉히 부어 삶는다. 서서히 끓기를 기다리다 김의 냄새가 달라졌다며 팥 상태를 살피고 뚜껑을 닫아 뜸을 들인다. 복잡하네요 하는 남자 주인공 말에 극진히 모셔야 한다고 할머니가 말한다. 손님을 모신다는 말이냐 하고 묻자 할머니는 팥들이라고 대답한다. 밭에서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고 살짝 조신다. 뜸이 든 팥 냄비에 팥이 으스러지지 않게 조심히 수도꼭지에서 아주 약하게 물을 흘려 냄비에 팥물이 투명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팥을 자세히 사랑스럽게 들여다본다. 건져낸 팥에다 당을 넣어 섞은 후 또 기다린다. 왜 기다리냐고 남자가 묻자 할머니는 갑자기 끓이는 건 실례라고 하며 팥이 당과 친해지길 기다려주자고 한다. 마치 맞선과 같으니 뒷일은 처녀 총각에게 맡기자 한다. 얼마나 기다려요 하니 2시간이란다. 그 후 팥이 으깨지지 않게 서서히 저으면서 뭉근히 달여 불을 줄인 후 물엿을 넣어 완성한다. 팥알이 한알한알 제 모습 그대로 간직한 맛있는 앙이 완성되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라는 가게 주인 남자, 이제껏 도라야키를 한 개 다 먹은 적이 없다고 한다. 팥을 정성스럽게 만들면서 늘 무표정이던 그의 표정에도 웃음이 살아난다. 살아가는 것도 팥을 삶는 것과 같다라고 감독이 우리에게 일러준다. 해맑은 동심의 세계 그린 명작 애니메이션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 경주 천년의 정원 외나무다리에서 찍은 영상을 sns에 올리니 지인이 토토로의 숲같다고 좋아했다. 오랜만에 ‘이웃집 토토로’를 돌려보았다. 주인공 사츠키와 메이 자매, 음력 5월을 뜻하는 사츠키. 나이는 12살. 소학교(초등학교) 6학년이다. 쿠사카베 가의 장녀로, 메이의 언니. 씩씩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단발머리의 소녀다. 비가 몹시 쏟아지던 날 버스 정류장에서 아빠를 기다리다가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 동생 이름의 유래는 영어로 5월을 뜻하는 메이(May). 나이는 4살. 사츠키의 여동생으로, 아빠와 언니를 잘 따른다. 숲에서 놀다가 조그맣고 이상한 동물을 발견하고 뒤를 쫓아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도토리나무의 요정 토토로를 만난다. 사실 메이는 원안에는 없던 캐릭터였다. 당초 기획 단계에서는 주인공은 사츠키 단독으로 하려 했으나 주인공의 배역을 둘로 나누어서 동생 캐릭터인 메이가 추가로 만들어지게 된다. 작품의 성격상 외동딸보다는 자매나 남매로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두 소녀가 뛰어다니다 큰 나무를 가리키자 아빠는 녹나무라고 알려준다. 녹나무 파수꾼이란 일본 소설이 떠오른다. 이 영화로 감독은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도 훌륭한 숲이 많다. 경북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등등 추석 연휴에 가족이 함께 산책하기 좋은 숲이다. /김순희 수필가

2024-09-12

재밌고 신나고 여유롭고 … ‘봉화’로 떠나는 모든 이유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왔다. 올해 추석은 주말 포함해 5일간 황금연휴가 이어져 가족들간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다. 올 추석 뭐 하고 보낼까를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반가운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봉화의 추천 관광지를 소개한다. □ 백두대간수목원에서 재밌게 봉화군 춘양면에 자리잡은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 크기가 약 5179ha, 1500만 평으로 전 세계에서도 두번째로 큰 규모이다. 특히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기후변화에 취약한 희귀·특산식물을 수집·보존하고 있다. 희귀식물 313종, 특산식물이 164종에 달한다. 이 밖에도 각종 식물 전시원과 백두대간의 상징 동물인 백두산 호랑이, 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 ‘시드 볼트(seed vault)’를 보유하고 있다.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가장 많은 곳은 ‘호랑이숲’이다. 호랑이숲은 멸종위기종인 백두산호랑이의 야생성을 지키기 위해 자연서식지와 유사한 환경을 조성한 전시원으로 면적은 총 3.8ha(약 1만 1000평)로 축구장 6개 크기와 맞먹는 거대한 규모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사육환경을 갖추고 있는 이 호랑이숲에서 6마리의 백두산 호랑이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90분 동안 수목원 내 주요 전시원 30곳을 탐방하는 ‘달려라 어흥카트’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전문 숲해설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고산식물의 안식처 ‘알파인하우스’부터 인기 전시원인 호랑이숲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추석 당일을 제외한 14일부터 18일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연휴 동안 투호, 윷놀이, 제기차기 등 전통놀이 3종과 백두랑이 캐릭터 풍선 나눔 행사, 한가위 행복 나눔 추억의 선물뽑기, 수목원 on 버스킹 공연(14 하루) 등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돼 가족나들이로 제격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은 관람객 편의를 위해 추석 연휴 안동버스터미널과 영주역에서 매일 1회 왕복 셔틀버스(무료)를 운행한다. 한창술 백두대간수목원장은 “추석 연휴 가을꽃으로 물든 수목원을 관람하면서 즐겁고 풍요로운 한가위를 보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분천산타마을에서 신나게 분천 산타마을은 봉화군 소천면 분천역에 위치해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자연 자원과 동심을 자극하는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접목해 1년 내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됐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가 함께 기다리는 즐거운 날, 크리스마스를 여름에도 느껴볼 수 있다. 새파란 여름 하늘과 새빨간 산타의 모습들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입구에서부터 아기자기한 산타 조형물들이 반기고 있으며 곳곳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포토존이 있어 예쁜 사진들을 남겨볼 수 있다. 특히 분천산타마을 내 산타우체국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산타옷과 모자가 마련돼 있어 산타로 변신해 사진을 찍어볼 수 있으며, 크리스마스에 받아볼 수 있는 엽서 쓰기 체험도 해볼 수 있다. □ 선유교와 범바위 전망대에서 여유롭게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에 이르는 35번 국도는 세계적인 여행정보지 미슐랭 그린가이드가 유일하게 별을 준 한국 최고의 길이다. 구불구불 강변을 따라 청량산입구에서부터 낙동강을 거슬러 명호면사무소로 가는 방향에는 길이 120m, 폭 2.5m의 봉화 선유교가 있다. 선유교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보면 청량산의 풍경이 낙동강과 어우러지며 윤슬 일렁이는 옥빛 강물까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선유교 끝에 도착하면 작은 정자가 있어 햇살도 피하고 산바람을 맞으며 잠시 쉬어갈 수 있다. 35번 국도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다보면 ‘삼동재 호랑이상 경관 쉼터’라는 팻말이 보인다. 봉화에서 낙동강 줄기를 가장 잘 굽어 볼 수 있는 범바위 전망대다. 범바위 지명은 고종 때 선비 강영달이 선조 묘소를 바라보며 절을 하다 만난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얘기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전망대 옆 바위 위에는 호랑이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전망대에서는 낙동강이 만든 물돌이 모습과 그 중심으로 태극 문양을 하며 돌아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맑은 하늘 아래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경치를 배경 삼아 사진을 남기기에 좋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4-09-12

달빛 아래 책 한권… 가족과 함께하는 지혜의 시간

‘AI 시대의 소크라테스’ 2022년 11월 챗GPT의 상용 버전이 공개된 이후, 생성형 인공지능은 사회경제적 변화의 선두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어떤 질문에도 척척 답하고 그림을 그려주며 영상을 만들면서 사람들은 진짜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인간과 비슷하거나 넘어서는 일반인공지능 또는 초지능의 출현도 머지않았다는 기대감과 그에 따라 인간은 필연적으로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엇갈리고 있다. 고통과 불평등 속에서도 어떻게 사유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를 천착해온 철학자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는 신간 ‘AI 시대의 소크라테스’(휴머니스트)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원하는 결과물을 즉각 제공하는 인공지능을 ‘21세기의 소피스트’라고 규정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지혜’라고 강조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진우 교수는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대체할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인공지능은 못 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는 질문을 통해 인간 조건과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기계는 느낄 수 있는가? 기계는 의식을 갖고 있는가? 이진우 교수는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공지능 시대 또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 조건을 성찰하자고 제안한다. 이진우 교수는 챗GPT가 상징하는 기술 진보를 구텐베르크 혁명에 못지않은 지성 혁명으로 파악하고, 인공지능 혁명이 불러일으킨 철학적 전환에 주목한다. 이 교수는 현대의 인공지능이 고대 아테네에서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지식과 기술을 전수했던 소피스트와 같다고 본다. 실제로 고대의 소피스트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했지만 정작 지혜는 전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대의 소피스트를 비판하고 무지를 고백함으로써 진정한 지혜를 추구한 소크라테스의 질문이다. 이 교수는 “인간이 계산으로 단순화된 사고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왜?’라는 질문도 사라진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란 질문은 결국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가’란 질문으로 이어진다”며 “이제 인공지능은 생각을 넘어 공감까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이 잘하는 것은 인간이 뒤떨어지고 인간에게 능숙한 것은 인공지능이 하기 어려워한다는‘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은 감정이라는 문제로 집약된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기에 감정을 가졌고 인공지능은 그렇지 않기에 감정에 미숙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감정 인공지능’이 상식을 바꾸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또 “감정 인공지능은 사용자의 ‘깊은 감정’보다 ‘피상적 감정’에 집중한다. 사용자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는 감정 인공지능은 영화 ‘그녀(Her)’가 미리 보여준 인공지능과의 우정과 사랑이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진짜와 구분할 수 없는 가짜 감정으로 소통하는 인공지능이 출현하면서 감정이 인간에게 고유하다고 강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며 도덕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인공지능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인간에게 과연 감정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화’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이며 평화운동가인 틱낫한(1926~2022) 스님의 ‘화’가 20여 년 만에 새롭게 선보인다. 틱낫한 스님 하면 ‘화’(초판 2002년)가 연상될 정도로, 이 책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음의 불꽃을 식히는 지혜’라는 부제를 달고 최근 번역·출간된 책은 화, 절망, 좌절감 등에서 벗어나 나와 상대가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것은 난해하거나 깊은 이론적 공부, 극한의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마음챙김’수행 하나면 된다. 현대인들은 ‘화(분노)’를 촉발, 촉진시키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물질주의, 이기심, 무한경쟁 등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스님은 화는 정신적, 심리적 현상이지만, 생물학적, 생화학적 요소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본다. 즉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니며, 몸이 마음이고 마음이 몸이다. 따라서 화의 뿌리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에도 존재하며, 결국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등 ‘마음챙김 먹기 수행’을 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돈, 권력, 높은 지위가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다 얻고도 불행하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고 스님은 지적한다. 결국 분노, 절망감, 좌절 등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스님은 화가 날 때는 수백개의 근육이 긴장해 아름답지도 멋지지도 않은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 바로 미소 짓기를 해보라고 권한다. 타인의 행동 때문에 화가 치솟을 때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맞대응하는 것을 경계하고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며 화를 다스려야 한다고 알기 쉬운 비유로 깨달음을 전한다. ‘부의 설계자들’ ‘페이팔(PayPal)’은 전 세계 온라인 지불 시스템을 운영하는 미국 회사다. 일론 머스크, 피터 틸, 리드 호프먼, 맥스 레브친 등 실리콘밸리의 부흥을 이끈 일명 ‘페이팔 마피아’들은 현재 테크 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으로 일컬어진다. 테슬라, 메타, 유튜브, 스페이스X, 팔란티어, 링크드인 등 이 시대를 이끈 수많은 기업을 창시하고 투자하고 경영한 이들의 시작점에는 모두 페이팔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 논픽션 작가 지미 소니의 신간 ‘부의 설계자들’(위즈덤하우스)은 일론 머스크 등 창업자와 초창기 직원들과의 수백 건의 인터뷰와 수십만 장에 달하는 방대한 내부 문건 분석을 통해 페이팔이 어떻게 태동했고 성공했는지 그 전략을 낱낱이 파헤친다. 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페이팔의 창업 과정과 초기 운영을 추적하며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책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페이팔의 역사를 조명한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난민 소년 맥스 레브친이 다소 엉뚱한 꿈을 좇다가 스탠퍼드대학에서 피터 틸을 만나고,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창업에 나서는 데서 전설의 첫 막이 열린다. 그들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디지털 금융 서비스를 그린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같은 발상의 사업을 전개하던 일론 머스크와의 만남, 그리고 두 기업의 합병과 페이팔의 탄생이 이어진다. 페이팔의 사업은 낯선 개념을 고객에게 설득하는 일, 경쟁자의 도전과 음해, 해커와 사기꾼들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생존 기반을 뒤흔드는 도전이 계속됐다. 이 속에서 페이팔 구성원들은 갈등과 협력, 원칙과 효율성, 사려와 신속함의 균형점을 찾아가며 성장을 이룬다. 이후 이베이에 매각하고 기업공개를 함으로써 창업자들은 거부가 되고, 종업원들은 안정적 고용 기반을 만든다. 하지만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일론 머스크가 대표적이다. 지분 매각 대금을 바탕으로 스페이스X와 테슬라를 설립했다. 피터 틸은 팔란티어와 파운더스펀드를 설립했으며 페이스북의 최초 투자자가 됐다. 맥스 레브친은 슬라이드와 어펌홀딩스를 만들어 도전을 이어간다. 페이팔 초기 직원들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유튜브 공동 설립자 채드 헐리, 스티브 첸, 자웨드 카림이 모두 페이팔 출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지금은 존경의 대상이 돼 장막 뒤에 숨겨진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 등의 초년기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됐다는 것이다. 19세의 일론 머스크가 피터 니콜슨이라는 인물에 매료돼 단지 그를 따르고자 스코샤 은행에 인턴으로 들어가 근무한 이야기는 이색적이다. 저자는 이들이 기존 관행을 거부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남다른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아웃사이더’의 모습을 특별하게 보였다는 얘기다. 이 책은 행운과 불운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주인공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했는지를 덤덤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 건조한 진술들은 때로 더 묵직한 통찰을 던져주곤 한다. “옳은 것보다는 틀린 것을 찾아라”, “경계를 부수어라”, “시장을 독식하라” 등 파괴와 혁신을 일으킨 이들의 전략은 현재 디지털 스타트업 문화의 토대가 됐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4-09-12

문경으로 떠나는 스무번째 五味여행

우리나라 중부 내육에 위치한 문경은 높은 일교차로 사과를 비롯한 각종 농산물의 품질이 우수하다. 이 가운데 지역을 대표하는 농산물로 오미자가 유명하다. 기후적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오미자가 가장 많이 생산된다. 문경시는 오미자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로 20회째를 맞고 있다. 제20회 문경오미자축제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오미자 주산지인 문경시 동로면 금천둔치에서 열린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솜사탕 같은 오미자꽃이 새빨간 결실로 변신한 9월, 문경으로 오셔서 추석 선물도 구입 하시고 문경오미자로 건강도 챙기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문경 오미자 축제 문경시는 지난 6일 문경시청에서 신현국 시장을 비롯해 관계 공무원, 문경관광진흥공단, 축제대행사가 참석한 가운데 가을철 문경 대표 농산물 축제인 문경오미자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추진상황 보고회를 갖고 축제 전반에 대한 점검을 했다. 2024년 제20회 문경오미자축제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문경시 동로면 금천둔치(동로면 적성리 525-11)에서 개최된다. 박서진과 마이진, 정서주 등 유명가수 축하공연을 비롯해 오미자 할인판매, 청담그기체험, 미각체험관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해 전국 일등 문경오미자의 위상을 높일 계획이다. 축제장에서는 최고품질 생오미자, 건오미자, 오미자당절임을 특별할인가(생오미자 1만5000원/kg)로 구입할 수 있다. 또한 오미자홍보관, 농특산물판매장, 미각체험관을 통해 다양한 오미자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올해는 가족 단위 관광객을 위해 키즈존(에어바운스, 친환경 나무놀이터), 키다리 삐에로 아저씨 공연, 오미자 수상라운지가 준비되어 있으며 축제장에 조성된 파크골프장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시는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스퀘어 광장에서 2024년 제20회 문경오미자축제 개최 홍보와 제2중앙경찰학교 유치 홍보 행사를 열었다. 시는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문경오미자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일 평균 10만명이 방문하는 서울 강남구 강남스퀘어 광장에 홍보 부스를 설치 운영했다. 문경시와 오미자축제추진위원회, 문경관광진흥공단 등 관계자들이 참석해 수도권 시민에게 오미자슬러시를 나눠주며, 관광도시 문경과 특산품을 함께 홍보했다. □ 다섯가지 맛의 오미자 문경 오미자가 제철을 맞아 빨갛고 탐스럽게 익은 열매를 요즘 한창 수확 중이다. 오미자는 준고랭지 작물로서 문경의 백두대간을 형성하고 있는 문경시 동로면 황장산과 대미산 중턱이 바로 우리나라 최대의 오미자 자생지로 알려져 있다. 백두대간의 해발 300~700m 산자락에서 천혜의 자연환경조건과 친환경 과학농법으로 재배되고 있는 문경오미자는 신이 준 열매로 불리며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오미자(五味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달고, 시고, 맵고, 쓰고, 짠 맛 등 다섯 가지 기본 맛을 다 갖춘 유일한 열매로서 다양한 효능을 자랑한다. □ 오미자의 효능 오미자는 기침과 천식 등 호흡기 질환에 좋아 연예인을 비롯한 목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인에게 인기 만점이다. 예로부터 천연 강장제로 불리며 동의보감에서 남녀 모두의 정력에 좋다고 했으며, 시잔드린 성분과 사과산 등 유기산이 풍부해 기력 증진과 피로회복 효과가 뛰어나 태릉선수촌의 대표적 건강식품으로 꼽히고, 기억력을 증진시키고 머리를 좋게 해 수험생 등 학생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또한, 술과 담배의 부작용을 줄여주는 효능이 있고, 여성들의 자궁을 건강하게 해주며, 이 외에도 뇌졸중과 간·심혈관 질환 등에 뛰어난 효능을 가졌음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 오미자의 활용법 오미자는 9~10월이 제철로, 요즘 오미자를 구입해 오미자청을 담가놓으면 1년 내내 온 가족의 건강음료이자 만능조미료로 활용할 수 있다. 생과를 활용한 오미자청은 보통 오미자와 설탕을 1대1 비율로 담지만, 문경에서는 설탕량을 30% 줄이고 그 대신 올리고당을 첨가한다. 왜냐하면 올리고당은 설탕보다 칼로리가 40% 정도 낮고 체내 흡수율 역시 낮기 때문에 설탕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해준다. 오미자는 색상이 환상적이고 다섯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루어 어떠한 식재료와도 찰떡 궁합을 보여준다. 가정에서 오미자 음료, 술 등으로 손쉽게 이용함은 물론 야채샐러드, 김치류, 소스류 등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생선 요리에는 비린내를 없애주고, 육류 요리에서는 누린내를 없애주며 고기를 아주 부드럽게 하고 풍미를 더해준다. 이뿐만 아니라 오미자차는 차게 혹은 따뜻하게 4계절 모두 즐길 수 있는 전천후 음료로 각광받고 있다. □ 문경 오미자의 특징 문경오미자 생산에서는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맞춤형 안심먹거리를 위해 천적과 생물제제 활용, 제초제 사용금지 등 친환경 농법으로 오미자를 재배하고 있다. 상품 포장마다 문경오미자 진품확인 스티커를 부착해 QR코드, ARS, 인터넷 등을 이용해 소비자가 구매한 제품의 문경오미자 진품 여부를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경 오미자가 세계 최고로 꼽히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생산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청정제품 생산과 우수한 기술연구 시스템, 가공산업에 대한 당국의 지원, 업체들의 자생력이 그것이다. 오미자생산자협회는 친환경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뭉친 생산자 단체로 오미자 가공제품에 질 높은 원료를 공급하는 주역이다. 문경의 오미자연구기반은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는 쫓아올 수 없는 수준으로 친환경미생물센터, 토양검정실, 오미자연구소, 친환경오미자대학 등 다양하게 운영된다. 문경/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4-09-11

참혹한 동족상잔 ‘비극의 역사’와 함께 하다

요즘 단체 카톡방에 79주년 8·15 광복절에 관한 논쟁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광복절에 기모노와 기미가요가 흐르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영한 방송국을 지탄하고 있다. 물론 오페라 장면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오랜 일본 강점기 시대를 끝내고 해방을 맞은 날을 기념하는 날에 방영되었으니 어떤 변명이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독립기념관 관장 인사에 반발한 광복회장은 숭고한 8·15 광복절 국가 기념식에 불참하고 따로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국민 분열 행위로 손가락질 받고 있다. 이 또한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광복절 기념행사와는 무관한 일로써 수긍하기 어렵다. 조선 왕조시대 당파 싸움 같은 소모적인 정쟁 같아 또다시 주변국이 얕잡아 야욕의 불꽃을 피울까 우려스럽다. 장훈(張勳) 선수를 일본 야구인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생애 홈런 504개와 안타 3085개를 치는 등 기록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당시 프로선수 등용문인 고시엔 대회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으로 1990년 일본 야구의 전당에 입성했다. 또한 전 일본 고등학교 야구대회 2024년 고시엔(甲子園) 대회에서 한국계 고등학교인 교토국제고(京都国際高)가 우승배를 거머쥐면서 한국어로 된 교가를 우승할 때마다 일곱 번이나 일본 전국에 울려 퍼졌다. 이처럼 교포들의 뭉친 하나 된 단결의 힘과 우수한 능력만이 반일을 뛰어넘어 극일로 나아감을 우리는 보았다. 광복절에 대한 논쟁은 광복절에 대한 추모와 국민의 자긍심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내부 분열의 씨앗이 될 뿐이다. 교포 장훈 선수와 교토국제고의 활약이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일본인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보여주어 과거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나의 쐐기를 박는 극일의 길이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에 국권이 빼앗겨 나라 잃은 슬픔을 경험해 보지 않아도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가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일부의 영토를 빼앗아 점령하고 통치하고 있다. 세계 각 국가가 국제법상 불법이고 나쁜 짓이라고 하면서도 응징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평화군이 있지만, 무용지물인 것 같다. 약소국인 우크라이나는 각국의 도움을 요청하지만, 원하는 만큼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억울하게 지옥 같은 고통의 삶에 시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침략자의 땅따먹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심보일까. 생명체가 지향하는 본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서식처를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 번식한 개체들이 살아가 위해 서식처를 넓히는 것이다. 이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보아 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손이 점점 늘면서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부족이 모여 국가로 발전되었다. 대부분 민족 단위로 국가가 탄생했다. 주변국을 침략하여 삶의 터전을 넓히고 재물을 빼앗아 끝없는 욕망의 배를 불렸다. 이렇게 불변의 진리처럼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평화 공존을 부르짖으면서도 극단적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밑바탕에는 생명체가 지향하는 유전자, DNA 본능에 따른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보면 스스로 강해지는 것만이 나라를 지키고 평화 공존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칠곡군 가산면 유학산 자락 학산리 1034번지 다부동 전투에서 ‘지게 부대원’을 숨겨준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나러 갔다. 이곳 유학산은 6·25 한국 전쟁 때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하여 수많은 남과 북의 젊은 군인과 경찰, 주민들이 전사한 곳이다. 이곳에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유학산 고지 점령 전투에서 아홉 번이나 빼앗고 뺏기는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군과 아군을 포함하여 2만7500여 명의 인적 손실 피해를 보았다. 당시 참전한 대대장은 전투의 절반은 지게 부대원이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회고를 남기고 있다. 승리를 이끈 지게 부대원의 몸을 숨겨주고 휴식하게 장소 제공해 준 것은 바로 500살 먹은 느티나무 노거수라고 한다. 키 18m, 가슴둘레가 7m, 앉은 자리 폭이 18m나 되는 거인 느티나무 노거수가 지금도 계곡가에 주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온전히 살아가고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폭탄과 총탄이 하늘을 덮고 땅이 진동할 때도 느티나무 노거수는 꼼짝하지 않고 현장을 지키며 지게 부대원들을 숨겨주고 전투를 목격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지난 역사를 나이테에 고스란히 기록하여 먼 훗날 우리의 후손에게 전해 줄 것이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곳에 느티나무 노거수에 아내와 함께 머리 숙여 경외감을 표했다. 김만섭 학산리 마을 이장으로부터 6.25 전쟁 당시의 치열한 전투 상황과 ‘지게 부대원’의 활약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군인도 아닌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지게 부대원’이라고 하는 생소한 이름의 부대로 군번도 계급장도 없었다. 주민들로 군복을 받지 못해 평상복으로 식량과 탄약 등 40~50kg 짊어지고 가파른 유학산 고지를 올라가 전쟁물자를 날랐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부상병을 업고 내려왔다. 오직 대한민국 국군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죽음의 전장 속을 누비다 하루 평균 50여 명 지게 부대원이 전쟁 동안 모두 2800여 명이나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주민들의 애국 애향심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느티나무와 함께 있는 돌탑이 희생된 지게 부대원의 영혼을 추모하는 위령탑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무속인들이 이곳을 찾아 제를 지낸 음식을 그대로 방치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어 노거수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철책을 둘러쳐 놓았다. 주민들은 주변에 경쟁하는 음나무를 베어내고 정자를 철거하는 등 환경 개선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느티나무 노거수와 함께 있는 돌탑을 없애 공간을 넓게 확보하려 했으나 마을 할머니와 어르신들이 극구 반대하여 옛 원형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느티나무가 여성이라면 돌탑은 남성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양과 음이 함께 마을 수호신으로서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파란 하늘 아래 유학산과 마을, 느티나무 노거수 모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풍성하고 평화로운 가을맞이를 하고 있다. 귀가하는 도중에 유학산 자락에 있는 다부동 6·25 전적기념관에 들러 희생자를 추모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1950년 8월 l일에서 9월 24일까지 55일간 전개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최대 격전지인 칠곡군 가산면 유학산 혈투의 현장에 세워져 있다. 암벽을 오르며 9번에 걸친 백병전 끝에 결국 유학산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의 최대 위기를 넘기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전사한 희생 장병을 1994년 9월부터 1997년 1월까지 8차례에 걸쳐 육군 제50사단 장병들이 유학산 일대에서 발굴한 259기의 유해가 ‘구국용사의 묘’에 합장되어 있다. 구국용사충혼비, 구국경찰충혼비도 세워져 있다. 격전지였던 유학산 자락에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전차 형상으로 지어진 다부동전적기념관 상단에는 기념 조형물이, 기념관 주위로 국군이 사용했던 무기와 북한군 노획 무기가 함께 전시돼 있다. 백선엽 장군, 이승만,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도 함께 서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11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지화의 예술적 가치

지화는 예술작품으로도 훌륭하다. 가위와 손으로 한지를 수없이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색을 입혀야 지화는 아름답게 피어난다. 따라서 굿청을 장식하는 지화는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배어야 한다. 굿판이 열리면 구경꾼들은 무당과 양중의 솜씨와 함께 지화를 평가하며 굿의 수준을 논했다. 물론 화주(굿을 맡긴 사람)의 돈 씀씀이에 달라지지만, 지화를 만들 때는 온 정성을 다해야 했다. 김홍제(이하 제) : 지화를 어떻게 만드는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자중(이하 김) : 지화는 원래 바닷가의 위령제에 많이 썼어요. 그 위령제를 수망(水亡) 오구굿이라 했지요. 바다에서 죽은 어부의 영혼을 불러내고, 좋은 곳에 보내주는 굿입니다. 동해안에는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많아서 굿이 많이 들어왔어요. 굿이 잡히면 우선 재료를 구하러 갑니다. 한지와 염색약이지요. 대개는 부산 범일동 시장으로 갔어요. 그리고 날짜에 맞춰 몇 날 며칠 지화를 만들지요.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손으로 만듭니다. 지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풀 먹임을 한 후 종류별로 색을 입히고 마당에 내놓아 햇볕에 색이 잘 들도록 말려야 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두 명 이상이 하지요. 대개 부부가 같이합니다. 굿을 장식하는 굿청은 꽃이 병풍처럼 두르는 형태로 복잡하고 화려합니다. 제 : 지화의 종류가 다양할 것 같습니다. 김 : 전국화, 가시게국화, 청계작약, 추라작약, 다래화, 든불국화, 외든불국화, 매화, 산함박, 함박, 불도화, 외추라작약, 한지추라통, 반연봉, 연봉, 연등, 외박꽃, 강화, 허드레꽃 등등 셀 수 없이 많아요. 보통 우리가 지화를 말할 때 한 묶음을 한 병이라고 표현하는데, 아홉 송이 또는 열 송이, 많게는 스무 송이 정도 됩니다. 이 한 병을 만드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릴 때도 있어요. 그리고 지화는 아니지만 굿판을 장식하는 제일 크고 아름다운 연등이 있어요. 신태집(신(神)광주리의 사투리)과 용선(龍船)도 아름답지요. 굿청에 이런 지화를 스무 병 이상 장식하니 지화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되시겠지요. 제 : 수망 오구굿에 지화를 많이 쓴다고 하셨는데, 오구굿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김 : 예전에는 뎅구리(머구리)나 목선에 장비가 부족해서 해난 사고가 잦았어요. 그래서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위령제인 오구굿을 많이 했지요. 오구굿은 우선 바닷물에 들어가 망자의 넋을 달래고, 조상굿, 베리데기(바리데기)굿을 하지요. 오구는 바리데기 공주 설화에 나오는 저승 왕의 이름입니다. 제 : 바리데기에 대해서도 좀 더 말씀해주세요. 김 : 바리데기를 경상도 사투리로 베리데기라 했어요. ‘버린다’는 뜻이죠. 옛날에 딸만 여섯 낳고 아들을 간절하게 원하던 왕이 있었는데, 왕비가 또 딸을 낳자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베리데기입니다. 훗날 왕과 왕비가 불치병을 앓게 되자 여섯 딸은 아예 나 몰라라 했답니다. 그런데 베리데기 공주가 저승의 오구대왕(염라대왕)을 찾아가 저승 문지기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되었고, 오구대왕이 베리데기 공주에게 불로초를 주어 이승으로 돌아와서는 왕과 왕비를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속에서는 바리데기 굿을 발원굿이라고도 하지요. 지역마다 다르지만 우리나라 거의 모든 굿에 펴져 있는 한국 굿의 원형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제 : 지화를 만들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이 있는지요? 김 : 지화는 대대로 전수되어온 기술을 몸으로 체득하고, 특히 손으로 익혀야 하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굿을 주문한 화주나 구경꾼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하고요. 제 : 지화 중에 어떤 게 가장 아름다운가요? 김 : 나는 추라작약이 가장 아름답다고 봅니다. 추라는 종이를 잘게 썬다는 뜻이고 작약은 붉은 꽃입니다. 가위로 오려 잘게 썬 추라작약은 염색해서 꽃병에 담아놓으면 정말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 같아요. 추라작약의 꽃심은 꽃의 암술이나 수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지화의 가운데를 풍성하게 장식하지요. 또 살잽이꽃이라고 있어요. 이 꽃은 바리데기 설화에 등장하는 존귀한 꽃입니다. 불등화라고도 하는데, 만들기가 참 어려워요. 죽은 목숨을 살려낸다는 바리데기의 다부살이(다시 산다는 뜻) 전설이 담긴 꽃입니다. 제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화 제작은 맥이 끊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제자는 있는지요? 김 : 나이 들면서 굿이나 지화 만드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어요. 정연락(동해안별신굿 전승 교육사)이라는 이가 지화에 관심을 가져서 지화 만드는 도구와 기술을 거의 다 전수했어요. 정연락이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요. 제 : 과거에 굿 연구자들이 선생님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 :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교수들이 집이나 굿판으로 찾아왔어요. 지화 만드는 과정과 굿에 대해 많이 물어보더군요. 그 무렵에 정연락이 찾아왔지요. 경북대학교 최경희 교수도 자주 찾아왔고요. 한번은 최 교수가 외국인을 데려오기도 했어요. 내가 만든 지화를 촬영해서 프랑스의 유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대구의 한 화가는 지화를 본떠 화폭에 담아 유럽에서 전시했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내가 시골에 살다 보니 그런 정보에는 어두웠지요. 하지만 지화가 그런 방식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제 : 2021년에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지화 개인전을 하셨지요? 김 : 예, 그랬지요. 포항문화재단 관계자들이 찾아와 지화 전시회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요. 손을 놓은 지 꽤 되었지만 마음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화 20여 개를 만들어 전시했지요. 작은 작품은 집에서 만들고, 연등과 용선처럼 큰 작품은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했어요. 제 : 굿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군요. 포항과 다른 지역의 굿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만. 김 : 동해안 어촌마다 굿이 비슷하면서도 지역에 따라 무당의 사설과 노래가 조금씩 다르고 양중 또는 화랭이가 연주하는 박자와 춤도 차이가 있어요. 동해안 마을굿 중에서 포항의 흥해와 청하 굿이 가장 좋았지요. 전통이 잘 보전되어 있으니까요. 후포 삼율의 무당이 영덕과 울진에서 활동했는데, 뚱띠 무당이라 불렀어요. 가락이나 사설, 춤은 포항 무당에 비해 좀 떨어졌지만 사설할 때 촉성(초성의 경상도 사투리)이 좋아서 인기가 높았어요. 뚱띠 무당은 놋동이굿(별신굿에서, 무녀가 놋동이를 입에 물고 장군신을 모시는 굿)도 아주 잘했어요. 8단까지 쌓아 입에 물었지요. 강원도 임원, 호산, 삼척에서도 굿이 활발했어요. 북쪽으로는 강릉과 주문진 그리고 속초에도 강릉을 거점으로 굿을 하는 무당이 있었지요. 강원도는 가락이나 장구로 치는 드렁갱이 굿거리장단이 약했어요. 포항 무당들이 많이 가르쳐줬지요. 내가 젊은 시절에는 강원도 고성까지 불려 다녔어요. 강릉 단오제도 별신굿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도 강릉 단오제에 수없이 참여했어요. 제 : 이제 별신굿은 바닷가 마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죠. 하지만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예술공연으로 가끔 무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김 : 안동 하회마을에서도 별신굿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굿을 예전처럼 며칠씩 안 해도 사람들에게 이런 굿이 있었네, 하고 기억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또 젊은 사람들이 국악을 배울 때 동해안별신굿도 배우는 모양인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11

서악마을 곳곳 거대한 능들, 신라 천년 가족사·사연 서려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그 외에도 왕이나 최고위층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능(陵)들…. 선도산과 서악마을을 돌아본다는 건 신라 왕들이 조용하게 잠든 유택 사이를 방황하는 일과 다름없다. 신라 천년의 역사 속을 거니는 행위인 것. 진흥왕과 진지왕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고,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다. 살아서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죽어서도 1천년 이상을 지호지간에 묻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은 무언가 애틋하고 가슴 뜨거워지는 감흥을 보는 이에게 선물한다. 그게 최고 권력자의 봉분이 아니라 보통 백성의 무덤이라 해도 다를 게 없을 듯하다. 기자 역시 그런 감정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진흥왕의 손자가 묻힌 진평왕릉에서 쓴 한 편의 시 신라사(新羅史)를 돌아볼 때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통치자 중 하나이며, 공적 또한 숱했던 진흥왕의 능을 찾았던 지난달 하순. 그가 아낀 장남 동륜(銅輪)의 아들, 그러니까 진흥왕의 손자이자 진지왕의 조카인 진평왕의 유택(幽宅)까지 찾아갔다. 할아버지와 숙부가 묻힌 선도산이 아닌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한 진평왕의 능. 후텁지근한 바람 부는 한낮.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평왕의 모습을 상상했다. “진평왕(眞平王)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다. 거기에 지혜롭고 의지가 굳기까지 했다. 사냥을 무척 좋아해 이를 말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다만, 죽은 뒤 무덤 속에서도 간언(諫言·왕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는 신하의 말)을 하는 충신에게 감동해 사냥을 그만둔다. 진평왕은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天柱寺)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서지기도 했다.” 다수의 신라 왕들에 관한 책과 논문을 읽고, 그들의 유택을 찾으며 보낸 몇 주의 시간 탓이었을까? 진평왕릉에 갔던 날 밤엔 다음과 같은 졸시를 쓰기도 했다. 제목은 ‘진평왕릉 훑어간 바람’. 화살 맞은 사슴이 악몽으로 돌아온 밤 청동가위로 길어진 초의 심지를 자른다 조부 진흥이 그토록 만류했으나 버리지 못한 사냥 취미, 그 탓인가 사찰 돌계단을 두부처럼 부순 완력도 열 자 아홉 치의 몸피로도 꿈을 막을 수야 일찌감치 정해놓은 장지가 땅꺼짐에 벌어지고 어젠 검은 그늘 만드는 까마귀 떼 다녀갔다고 품고 자던 마야부인 목을 틀어쥐고 식은땀 범벅으로 깨어난 미명 문득 내려다보니 무섭게 자라있는 발톱 왕의 의지로도 불가능한 일이 있다. ◆선도산, 조카와 숙부의 안식처...문성왕릉과 헌안왕릉 진평왕의 할아버지인 진흥왕과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의 유택 외에도 선도산엔 왕의 지위에 올랐던 조카와 숙부의 안식처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다. 선도산 자락에서 볼 수 있는 두 능 역시 그다지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진 않았지만, 고적한 풍경 속에 소박하게 솟아 있는 게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문성왕과 헌안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에 대해서 ‘나무위키’는 이런 설명을 들려준다. “신라 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로 신라 하대에서 애장왕(제40대)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적장자 군주다. 김제륭, 김명, 장보고로 이어진 반란의 시대를 끊어내고, 통일신라의 수명을 늘린 수성 군주로 평가된다. 857년 승하했고 공작지(孔雀趾)라는 땅에 묻혔다. 문성왕은 죽을 때 유언으로 아들이 아닌 숙부 김의정(金誼靖)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공작의 발가락’이라는 묘한 이름의 땅에서 영원한 잠에 든 문성왕. 그렇다면 지금의 경주시 효현동이 문성왕 때는 ‘공작지’로 불렸던 걸까?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취재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조카로부터 왕의 권력을 받아 신라 47대 왕이 된 헌안왕의 삶은 어떠했을지. 헌안왕의 재위 기간은 857년 가을부터 861년 1월까지로 3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왕으로 있던 858년 봄과 여름에 이상 기후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서라벌 전역에 관리를 파견해 곡식을 나눠주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제방을 쌓아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자 힘썼기에 ‘어진 군주’로 불리던 헌안왕은 당시 열여섯 살이던 사위 김응렴(경문왕)에게 양위(讓位·왕의 자리를 물려줌)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문헌에 의하면 헌안왕 역시 ‘공작지(孔雀趾)에 묻혔다’고 기록돼 있다. (계속) 서악서원에 서려있는 김유신 설화 설총·최치원·김유신 서원에 위패 모실 때‘김유신 빼자’ 는 말에 꿈 속 나타나 불호령 경주 선도산 입구의 무열왕릉 지척엔 서악서원(西岳書院)이 자리해 있다.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유교의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에 설립한 교육기관. 그중에서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왕이 서원에 현판과 책, 노비 등을 하사함으로써 권위를 높여준 서원을 지칭한다. 서악서원은 사액서원 중 하나다. 서악서원엔 3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설총, 최치원, 김유신이 바로 그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셋 모두 여러 차례 이름을 들어봤을 사람들이다. 헌데, 이 가운데 김유신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이 옛이야기로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의 야담을 모아 펴낸 ‘천예록(天倪錄)’에 실린 설화다. 서악서원이 사액서원으로 지위를 높일 즈음의 일이다. 김유신,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서원. 이 서원이 사액(賜額·왕이 서원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림)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 유학자 중 한 명이 말한다. “설총은 중국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장군으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에서 빼야 한다.” 그런 말을 한 며칠 후. 그 유학자는 자다가 꿈을 꾼다.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혔다. 그때 나타난 김유신이 일갈한다. “유학자의 덕목은 충(忠)과 효(孝)가 아닌가.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그것이 충이요, 입신양명으로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건 효다. 그런데, 감히 네가 나를 함부로 평가하느냐?” 꿈에서 깨어난 서생은 두려움에 떨면서 며칠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는 김유신이 가졌던 정치·사회적 위상이 신라시대를 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낮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악서원 설립의 배경과 역사적 내력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래와 같다. “1561년(명종 16)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했다. 1563년(명종 18) 신라의 문장가 설총·최치원의 위패를 추가로 배향했다. 처음은 선도산 아래 서악정사(西岳精舍)로 창건해 향사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00년(선조 33) 서원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봉안했다. 1602년 묘우(廟宇)를 신축하고, 1610년 강당과 재사(齋舍)를 중건했다. 1623년(인조 1) ‘西岳(서악)’이라고 사액됐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헐리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10

무당 고모의 권유로 굿판에 뛰어들다

우리나라는 굿을 통해 동제(洞祭)를 지내는 풍습을 오랜 세월 이어왔다. 수심이 깊고 파도가 높은 동해안에서는 별신굿이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동해안별신굿의 한 요소인 지화(紙花, 종이로 만든 꽃)를 70여 년간 만들어온 김자중 선생을 댁에서 만나 어릴 때부터 지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동해안별신굿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김홍제(이하 제) :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김자중(이하 김) : 지화 만드는 걸 그만둔 지 좀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지화를 만들 수 있는 기력은 있지요. 제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김 : 지금은 청하 용두리에 사는데, 태어난 곳은 흥해 대벌리(현 죽천리)였어요. 광복 후에 죽천초등학교(1940년 5월 개교)에 입학했고 8회 졸업생입니다. 할아버지는 굿판의 양중(兩中, 남자 악사)을 했고, 아버지는 한평생 한량과 어부로 사셨지요. 그 때문에 집이 가난했어요. 나는 아버지가 사십을 넘겨 얻은 늦둥이 외동아들로 자랐어요. 위로 형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외동이 되고 말았지요. 제 :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김 : 부산으로 가서 택시회사에서 일했어요.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스따찡’(자동차 엔진 스타터의 일본식 발음)을 돌려야 하는 시절이어서 기술 배우기가 엄청 힘들었지요. 제 : 그러면 굿은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나요. 김 : 고모가 무당이었는데 이름은 김일향입니다. ‘무숙’이라고도 하고, ‘간데기 무당’이라고도 했지요. 흥해, 청하에서는 꽤 유명한 무당이었어요. 내가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하고 있을 때 고모가 같이 일하자고 꼬드겼어요. 아버지는 엄청나게 반대했고요. 당시에도 굿판에서 일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인식이 무척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고모는 집요하게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고모와 일을 하게 됐어요. 제 : 고모님의 설득으로 굿과 인연이 되었군요. 선생님은 오랫동안 동해안별신굿의 지화를 만드셨는데, 요즘은 동해안별신굿을 보기 힘들지요. 김 : 아마 그럴 겁니다. 부산 기장에서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 대부분의 마을에서 별신굿을 했어요. 별신굿은 ‘벨신’, ‘별손’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형편이 넉넉한 마을은 격년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마을은 5년에 한 번씩 했어요. 굿이 열리면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3박 4일 했고요. 젊은 날의 김자중 제 : 일반인들은 지화를 잘 모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김 : 지화는 굿판에서 생화 대신 종이로 만든 꽃을 말합니다. 원래 동해안별신굿에서는 지화를 많이 쓰지 않았고, 위령제인 오귀굿(오구굿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많이 썼지요. 예전 별신굿에서는 지화 몇 병을 만들어 제당인 굿청을 소박하게 장식했는데, 오귀굿이 점차 줄어들자 무당들이 수입을 늘리려고 별신굿에서도 지화를 많이 장식했어요. 제 : 선생님과 고모님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김 : 고모는 강신무(降神巫, 신이 내려서 된 무당)가 아니라 세습무(世襲巫, 조상 대대로 무당의 신분을 이어받아 된 무당)였어요. 동해안별신굿에서 강신무는 보기 어렵고 거의 다 세습무지요. 고모는 할아버지 영향을 받았는데, 포항 여남의 3대째 세습무 집안과 인연이 있었어요. 동해안별신굿이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포항 여남 출신으로 부산 기장에 살면서 동해안별신굿을 한 김석출 씨가 전승 보유자로 선정되었지요. 그분의 호적(태평소) 산조가 아주 유명했어요. 김석출은 형과 남동생이 있었지요. 형은 김호출이고 동생은 김재출입니다. 삼 형제 모두 굿을 했는데, 남자는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장구, 태평소 등을 연주했어요. 고모는 김호출과 같이 살면서 세습무를 했지요. 김호출에게는 김용택이라는 막내아들이 있었고 나보다 여덟 살 아래였어요. 용택이는 초등학교 3학년만 다니고는 아버지를 따라 굿판에 나섰지요. 나와 용택이는 비슷한 시기에 지화 만드는 일을 시작했어요. 용택이는 장구를 비롯해 악기를 잘 다루었지요. 용택이도 삼촌인 김석출에 이어 동해안별신굿 보유자로 인정되었어요. 그런데 2018년 5월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참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제 : 고모님이 김석출의 형과 결혼하면서 선생님이 김석출 집안과 인연이 되는군요. 김 : 그렇게 되었지요. 원래 무속 일은 남녀 기본 2인 1조로 하고 큰 굿은 몇 팀이 모여 했어요. 당시엔 수입이 꽤 괜찮았고요. 고모는 김호출과 살다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헤어졌는데, 그 후로 독립해 굿을 생계로 살았어요. 굿판에는 준비 과정부터 일손이 많이 필요해요. 특히 굿을 할 때는 양중이나 화랭이, 즉 남자 악사 겸 조력자가 있어야 하는데 고모는 피붙이인 내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고모가 몇 년을 졸라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내면서 내가 고모 밑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게 되었지요. 내 나이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제 : 지화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 : 내가 만들어온 지화도 어쩌면 김석출 집안에서 내려오던 기술을 습득했다고 볼 수 있어요. 김호출이 지화를 참 잘 만들었거든요. 그때는 김호출과 고모 사이가 좋을 때라 김호출에게 지화 만드는 기술을 직접 배웠지요.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굿판에 필요한 지화를 만들려면 수천, 수만 번의 가위질을 해야 하는데, 나한테 남들보다 눈썰미도 있고 손재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만든 지화를 보고 김호출이 탄복했거든요. 가락에 맞춰 장구를 메는(장구를 친다는 경상도 사투리) 것도 내가 잘했지요. 나는 처음 굿판에서 일할 때는 비우(비위의 사투리)가 없고 남사스러워서 굿판에 얼씬도 안 했어요. 고모를 도와 지화를 만들고 굿판을 준비하는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지요. 제 : 남자가 그 나이에 지화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군대도 가야 했을 테고. 김 : 입대 영장이 나와 스물한 살에 입대했어요. 그때 부모님은 환갑이 넘었고 죽천을 떠나 청하 용두리에서 사셨지요. 일은 못 하고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강냉이 배급을 타서 끼니를 때웠어요. 전쟁 직후 보릿고개가 있던,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지요. 제대 1년을 앞두고 휴가를 나왔을 때 고모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장가를 들게 되었어요. 군복을 입고 경주에서 혼례를 치렀지요. 그런데 신부가 썩 맘에 들지 않는 겁니다. 게다가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귀대했는데, 신부가 고모와 다투고 집을 나가버렸다고 하더군요. 내키지 않는 결혼을 했는지라 솔직히 그 여자에게 정이 없었어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당시에는 호리호리하고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듣던 터라 여자 보는 눈이 높았지요. 제 : 선생님 삶에는 고모님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군요. 김 : 그런 셈이지요. 제대 5개월을 앞두고 서울에 있는 사촌이 편지를 보냈는데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바빠서 문상을 못 왔다는 겁니다. 아버지 부고를 그 편지로 알게 된 것이지요. 고모는 부대에 관보(기관으로 보내는 전보)를 보냈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도착하지 않았어요. 워낙에 어수선한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대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집에 왔더니, 아버지는 산에 묻히시고 어머니는 혼자서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어렵게 지내시더군요. 당장에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그래서 귀대를 못 하고 고모를 따라다니며 본격적으로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일했어요. 나중에 부대에서 인사계가 찾아왔더군요. 사정을 고려해 다행히 탈영 처리는 안 되고 제대증을 직접 갖다주었습니다. 김자중 명인은… 1939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죽천에서 태어나 죽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8세에 고모를 따라 동해안별신굿의 세습무가 일을 시작했다. 70여 년간 동해안별신굿을 장식하는 지화(紙花) 제작과 굿판의 양중(兩中)으로 활동했다. 은퇴 후 청하면 용두 2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2021년 12월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대안공간 298에서 지화 개인전(‘바다에 핀 종이꽃’)을 개최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08

‘안전 부서’ 명장 선정 첫 사례, 포스코 장인문화 새 지평 평가

포스코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인성을 겸비한 직원을 ‘포스코 명장’으로 매년 선발한다. 제철 기술의 발전과 전수를 목표로 하는 명장 제도는 2015년부터 시작돼 현재까지 총 28명의 명장을 배출했다. 명장으로 선정되면 특별 직급 승진, 5000만 원의 포상금, 명예의 전당 영구 헌액 등의 혜택을 받게 된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지난 7월 12일 올해 명장으로 안전방재그룹의 서정훈(52) 차장과 포항 EIC 기술부 이원종(57) 부장을 선정했다. 특히 안전 부서에서 명장이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포스코 내 기술 장인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숙련기술인의 날(9월 9일)을 맞아 2024년 포스코 명장들의 인터뷰를 최근 진행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두 명장의 소감과 그들의 기술적 성과,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 봤다. ● 서정훈 명장 2020년 철강업계 최초 안전관리평가 P등급 획득에 결정적 기여기업이 제품 뿐 아니라 사람 생명 중시하는 문화 정착 계기 되길 ● 이원종 명장 모든 공정 컴퓨터 제어 ‘PLC 전문가’ 평가, 이번 수상에 큰 도움후배들 기술 교육 중 ‘선배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말 들을때 보람 ◇안전방재그룹 서정훈 명장 - 자기소개 및 명장 선정된 소감은. △1990년 입사해 34년째 포항제철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산시스템부, 계측제어부, 전기제어설비부, 압연정비부, 혁신지원그룹을 거쳐 2015년부터 안전방재그룹에서 위험물질을 취급하는 설비에서 누출, 화재, 폭발 등 중대 산업사고를 예방하는 PSM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번에 안전 분야 1호 명장으로 선정됐다. 평소 동경의 대상이었던 포스코 명장에 선발돼 매우 기쁘고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 포스코 명장으로 선정된 의미는. △포스코 명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인품을 겸비한 직원을 선발해 예우하는 제도이다. 현장 기술인 최고의 명예이자 후배들에게 롤모델이 되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지금까지 선발된 명장은 모두 운전, 설비관리 등 제품 생산과 직결된 분야에서 선발됐다. 나는 올해 안전관리 분야 최초로 명장이 됐다. 이는 포스코가 제품의 품질, 비용, 생산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롤모델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안전을 생산, 품질, 비용, 납기, 공기 등 그 무엇보다 최우선시한다는 경영방침의 실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 포스코 명장 선정 기준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선정된 것 같은지. △포스코를 대표하는 기술 전문가로서, 엄격한 심사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선정된다. 우선, 포스코 기술역량 인증제도 테크니컬 레벨 5.0 이상을 보유하고, 기능장 또는 기술사 자격과 인사고과 기준을 충족해야 지원이 가능하다. 선발 과정은 1차 서류심사, 2차 현장실사 및 동료평가, 3차 적합성 심사 및 기술 심사 등 체계적인 검증 단계를 거친다. 본심사에서는 포스텍 교수 등 각 분야 전문가를 대상으로 직접 보유기술과 업무성과를 발표하고, 기술 수준과 조직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받게 된다. 나는 업무편람을 제작해 포스코형 공정안전관리체계를 정립하고, 누구나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전면 시스템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점에서 현장 안전 관리 역량과 안전 체계 구축을 위해 노력한 부분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것 같다. - 2020년 포스코가 철강 업계 최초 공정 안전관리 평가 P등급(최고등급) 획득하는데 서정훈 명장의 기여가 크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공정 안전관리 분야는 사회적 영향이 커서 4년마다 국가기관에서 이행 수준을 평가하도록 규정돼 있다. 법적으로는 제철소 전체를 1개의 평가 단위로 받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수많은 인원과 설비를 운영하는 포항제철소의 특성을 고려, 13개 현장 부서장 단위로 세분화해 평가를 받게 했다. 부서원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체계적인 현장관리를 하도록 해 공정 안전에 대한 인식변화, 실행수준 향상 등 공정 안전관리 체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다. - 근무하면서 좋은 점과 힘든 점은? △누군가의 생명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반대로, 제 가정에는 조금 소홀할 수밖에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어서 아쉬운 순간들도 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포항제철소 안전방재그룹에 전입해 오면서 다짐한 게 세 가지 있다. 첫째, 안전은 최종적으로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안전 스텝으로서 안전 전문가가 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초심을 끝까지 잃지 말자는 세 가지 다짐을 했다. 앞으로도 기술을 갈고닦아서 현장에 있는 후배 사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런 마음을 변치 않고 끝까지 견지하도록 하겠다. ◇ EIC 기술부 이원종 명장 - 자기소개 및 명장 선정된 소감은. △EIC기술부의 EIC는 Electric(전기), Instrument(계측), Control(제어)을 의미하며 전체적으로 전기제어의 기술력을 갖춘 부서이다. 나는 1985년 입사 후에 후판, 냉연, 전기강판 정비부서에서 전기와 PLC 제어설비를 담당했다. 지금은 제철소 전 공장의 PLC 제어 부분의 기술지원을 통한 설비 안정과 생산성, 품질향상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포스코 명장으로 선발돼 큰 영광이지만, 앞으로 포스코 명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책임감도 있다. - 포항제철소 PLC 전문가라고 들었다. PLC는 무엇이고,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지. △PLC는 ‘Programmable Logic Controller’로 쉽게 설명하자면,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모든 공정에 컴퓨터를 이용해 자동제어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물을 공급하고, 세탁과 탈수 등 일련의 순서를 순서제어라고 한다. 이런 제어를 수행하는 것이 PLC 제어와 유사하다. 나는 여러 공정 과정을 두루 거치며 압연 분야 PLC 전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주로 공정에 대한 프로그램 개발 및 개선, PLC 이상 발생 시 빠르게 원인을 파악하고 정상화하는 기술지원을 수행하고 있다. - 포스코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아무래도 처음으로 제어 업무를 맡았던 시기가 아닐지 생각된다. 입사 후 처음으로 2후판 가속냉각설비가 도입될 때, 자동 제어 부분을 맡아 가속냉각 후판강 제조를 성공시켜, 당시 제철기술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계기로 지금까지 ‘제어인’으로 현장설비 자동화 기술개발과 안정화의 역량을 향상시켜 포스코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근무하면서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다면. △본연의 업무 분야에서 창의적인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조직문화 분위기가 가장 좋은 점이라 생각한다. 반면, 24시간 가동되는 제철소 설비 특성상 주야로 장애가 발생할 때가 있어 즉각적인 복구를 위해 비상 출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줄이기 위해 예방정비와 설비 강건화에 힘쓰고 있다. - 명장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솔직히 ‘내가 명장의 역량이 충분하고 수행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현장에서 후배에게 기술교육을 할 때 한 후배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는데 ‘선배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제 가슴을 뛰게 한 것 같다. 앞으로도 열정을 갖고 내가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의 역량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후배들에게 내가 걸어온 길이 디딤돌과 나침판이 돼, 후배들 또한 최고의 기술인으로 성장하는 데 이끌어줄 수 있는 그런 명장이 되고 싶다. 서정훈 안전방재그룹 명장은 △포철공고 졸업△1990년 입사, 34년 근무 중△대구지방노동청장 산업안전유공표창△기계안전기술사 이원종 EIC 기술부 명장은 △포철공고 졸업△1985년 입사, 39년 근무 중△후판 가속냉각 DDC 제어△냉연 자동 두께제어, 자동형상제어△크레인 무인 자동화△전기강판 소둔로 장력제어△전기공학사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08

포항제철 사택·효자역 화물·여객 후광 업고 1970년대 전성기

물류의 집산(集散), 유동인구, 특정 작물 대량 재배, 장인(匠人) 집단 활동 여부, 교통의 요지…. 전통시대 시장의 성립 요인은 다양하다. 열거한 요인 중 한두 가지만 중복돼도 쉽게 시장은 형성되고, 더 많은 요인이 겹치면 대형 상권이 조성되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할 효자시장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효자시장은 앞서 언급한 시장 성립 요인 중 교통, 그 중에 철도역과 관련이 깊다. 잘 알려져 있듯 포항에는 경동선(1927년 개통), 동해선 (1945년 개통), 괴동선이 운행됐다. 이 중 효자시장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은 괴동선(槐東線)이다. 1971년 개통된 이 철도는 부조(지금의 부조장터)와 효자-괴동-제철(포항제철역)을 잇는 10.6km 노선을 말한다. 짧은 노선이지만 이 철길로 철강 공단의 화물, 제품, 원자재들이 수송되었고 포스코 근로자들을 위한 국내 최초 통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화물의 집산과 근로자, 인구의 유입은 필연적으로 시장을 필요로 했고, 효자시장은 그 ‘수요’에 대한 대안이었다. ◆지역 3대 시장 중 하나인 부조장 전통 계승 효자동 일대는 조선시대 연일현 북면에 속했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흥해, 영일, 청하, 장기 4개군으로 개편될 때 영일군 북면에 귀속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4개군이 영일군으로 개편될 때 연일면에 편입됐고 효자동과 지곡동을 통합해 효곡동이 됐다. 효곡, 효자동은 포항의 서쪽 관문에 위치해 옛날부터 신라, 경주 세력들의 관문 역할을 했다. 고대에는 형산강 줄기를 따라 신라나 내륙의 문물이 동해로 진출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육로를 따라 동해의 문물이 양동-경주를 경유에 영천-경산으로 드나들었다. 효자동의 서쪽 형산강 변에는 지역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부조장터가 있는데 효자시장은 바로 이 부조장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부조장이 형산강을 배경으로 포항의 청어, 소금 등 해산물을 전국으로 유통시킨 물류의 중심이었다면, 효자시장은 효자역 철도, 포항제철 유동인구를 배경으로 지역의 전통시장을 일으킨 골목상권의 디딤돌이었다. 효자시장의 태동은 포항제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68년 포철이 들어서면서 효자동 일대에는 포철 직원들을 위한 대규모 사택 단지가 조성됐다. 갑작스럽게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근에 상가, 학교, 관공서들이 따라서 들어왔다. 이때 설립된 학교, 연구소가 포항제철초-중-고교와 포스텍, 포항테크노파크, 방사광가속기연구소였다. 효자역 인근엔 포항제철 직원들과 인근 공장 인부들, 학생들을 위한 식당, 생필품점, 노점상인들이 대거 들어섰고 이런 수요를 바탕으로 1971년 효자 시장이 정식으로 개설됐다. ◆1970년대 밀려드는 손님으로 골목 북적 “당시 1970년대 주말에는 시장에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손님들이 넘쳤습니다. 하루 종일 리어카 소리, 짐자전거 소리로 늘 소란스러웠죠. 장사도 얼마나 잘 됐는지 배추를 트럭 채 가게 앞에 부려 놓으면 반나절도 안 돼 한 차씩 다 팔아 치우곤 했죠. 그땐 다들 정직해서 분에 넘치는 이윤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손만 바쁘고 계산하느라 정신만 없었지, 살림은 늘 그대로였어요.” 한 야채가게 어르신의 증언처럼 1970~90년대 전국의 전통시장은 전성기를 누렸다. 아직 백화점, 대형마트,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유통체계는 생산자-도매업자-소매로 연결되는 단선(單線) 라인이 주류를 이룰 때였다. 무엇보다 풍부한 ‘인구’는 시장을 견인하는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이었다. 당시엔 가구당 4~7자녀가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고, 인구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필품은 대부분 전통시장에서 조달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효자시장의 8할은 포항제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둘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수천 세대에 이르는 포철 직원, 주민들의 생필품 공급처이자, 수천 명에 이르는 포철재단 학생들의 간식, 군것질거리, 학용품 조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만난 야채 가게 어르신은 “1970년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사택, 학교들이 들어서면서 기존 시장 규모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당시 효자역 부근 논밭을 따라 노점상들의 비닐하우스, 가건물들이 들어서며 시장이 급속히 확장됐다”고 증언했다. ◆포철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시장도 가동 재미있는 것은 효자시장의 모든 운영이 포철 직원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 1970년대 보통 효자시장은 4시 무렵이면 문을 열었다. 당시 효자역 포철 통근기차 첫차가 5시57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효자시장엔 미처 아침을 챙기지 못한 직원들이 국수, 국밥, 간식을 먹느라 식당마다 북적거렸고, 아침 일찍 찬거리를 사기 위해 나온 주부들로 혼잡을 이뤘다. 당시 포철 출퇴근 열차가 하루 열 번 정도 운행되었는데 매 시간 마다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상인회 김병근 회장은 “당시 안전화에 제복을 입은 포철 직원들이 수백 명씩 여명을 뚫고 효자역으로 출근하는 모습은 자체로 감동이었고 풍경이었다”고 말한다.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고 당시 근로자들은 대부분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이런 노력과 희생들이 쌓여 오늘날 포항 경제를 이룬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통근열차가 가고 나면 이제 학생들이 통학 행렬이 시장을 쓸고 지나갔다. 포항의 다른 지역 아이들보다 살림이 나았던 아이 학생들은 시장에서 떡볶이, 어묵, 라면, 튀김 등 간식거리를 소비하고, 학교준비물과 학용품을 준비해 갔다. 당시 포철초교 학생들은 노랑 모자에 노랑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등하교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상인들이 ‘병아리들’이라고 부르며 반겼다고 한다. ◆효자역 사라진 시장, 급격히 쇠락의 길로 2000년대 이후 전통시장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인구의 감소, 온라인 쇼핑몰, 대형마트의 등장, 소비 행태의 변화 등이 주 원인이었다. 효자시장이 있는 효자, 지곡동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1970년대 건축됐던 포항제철 사택들이 민간에 분양되고, 상당수는 효자동을 떠났다. ‘제철(製鐵) 빌리지’를 이뤘던 효자, 지곡동 사원 아파트에는 이제 소수의 직원들만 남아 당시를 추억할 뿐이다. 포철과 효자시장을 끈끈하게 이어주던 효자역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30년 동안 657만 명을 실어 나르던 괴동선은 이제 통근버스나 시내버스, 자가용으로 대체돼 효자시장의 유동인구에 큰 타격을 입혔다. 포항제철과 효자역과 반세기를 함께해온 효자시장. 이제 괴동선엔 하루 30여 차례 화물열차만 운행된다. 2015년 4월 마지막 여객열차가 멈춰선 이후 효자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효자역 플랫폼엔 안전화 소리도 사라지고, CDC 기관차의 거친 엔진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기적소리라도 한번 울려 퍼지면 거친 음파(音波)를 따라 옛 추억이라고 소환해 보고 싶지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까요?” 한 시장 어르신의 넋두리를 배웅 삼아 시장 골목을 빠져 나온다. ◆괴동선은? 30년 동안 포항제철 직원들 657만 명 출퇴근길 실어날라 포항시 효자역과 괴동역을 연결하는 철도로 포항과 부산진역을 이어주던 동해남부선의 지선(支線)이다. 제철선 또는 포항제철선으로 불렸다. 1968년 4월 25일에 착공하여 같은 해에 효자역-괴동역 구간이 완공됐으며, 총공사비는 2억3313만원이었다. 1970년 10월에 괴동역에 포항제철전용선이 부설돼 1975년부터 포항제철 직원 전용 통근열차로 기능했다. 포철 통근열차는 30년 동안 운영 되며 하루에 총 10회, 약 109만km를 운행했다. 총 이용 승객은 약 657만명. 30년 동안 운행하면서 사고는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 화물수송량은 263만2172t으로, 무연탄 103만1847t, 잡화 159만901t을 처리했다. 1975년 7월 1일 운행을 시작할 당시 운임은 일반 이용객은 40원. 제철 근로자는 할인 혜택이 주어져 28원만 냈다. 2005년 폐선 당시 운임은 353원. 새벽 교대근무자를 위해 첫차가 오전 5시 57분에 출발했으며, 야간 근무자를 위해 막차는 밤 11시 30분에 들어왔다. 한국철도공사와 포스코 간의 운행 협상이 결렬되면서 2006년부터 운행이 중단됐다. 현재 괴동선은 화물전용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여객수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9-05

‘실패 없는 성공’은 이루기 어려운 법 작은 목표라도 도전하는 습관 길러야

“누구나 실수를 한다. 좌절도 경험한다. 기술은 그런 것이다.” 현장의 많은 문제점 개선을 하다 보면 실수나 실패를 할 때도 있다. 이때 좌절을 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한가지 실수는 한가지 안 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천재가 아닌 이상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는 말을 믿어야 한다. 때론 이 말이 두렵지만, 해야 한다. 그리고 비판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 권영국(59·사진) 포스코 포항제철소 열연부 기술개발섹션 부장(명장)은 실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2018년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권 명장은 42년 간 포스코에 근속하면서 세계 최초로 열간 연연속 압연기술 도입 및 상용화를 통해 생산성의 획기적인 향상과 제조범위 확대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았다. 최근 권 명장에게 소성가공 분야의 장인이 되기까지 노력의 과정에 대해 들어 봤다. - 소성가공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목표를 갖고 선택했다기보다는, 어려운 시기에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해 압연과를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포항제철소 2열연공장으로 배치됐다. 열간압연을 하게 된 것이 오늘까지 한길을 걷게 됐다.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어린 나이에 병환이 있으신 아버님을 돌보며 어렵게 성장하면서도, 이웃집 어르신의 대장간을 놀이터로 삼았다. ‘쇠’라는 것이 불속에서 뜨겁게 가열됐다가 두드림에 의해 모양이 만들어지고, 물에 넣을 때 수증기가 나오며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유일한 세상 문물이었다. 포철공고의 모집 요강을 보고 철에 대한 추억으로 주저 없이 지원했다. 포항제철소의 웅장함과 생기 있는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웠다. 처음으로 포항제철소 2열연공정을 견학할 때 거대한 설비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면서 열연코일을 생산하는 것을 보고 겁도 났다. 그러나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전달이 됐는지, 1982년 포항제철소 열연공장 열간압연공정에 배치돼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포항제철소의 허리인 열간압연 공정에서 운전요원으로 현장 교대 근무를 했다. 현장의 굉대한 설비와 그 설비를 한치의 오차 없이 컨트롤하는 설비를 운전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고 학습했다. 어려운 문제점을 하나하나 해결을 하면서 주위에서 인정과 보상을 받으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 이는 끊임없는 학습과 개선을 통한 오늘의 철강 기술인으로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 소성가공은 무엇인가. △소성가공이란 금속이나 기타 재료를 변형시켜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가공 방법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재료는 영구적으로 변형되지만, 파괴되지는 않으며, 재료를 부수지 않고 모양을 바꾸는 가공 방법이다. 소성가공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내가 하고 있는 압연(Rolling)이 있다. 압연중에서도 열간압연은 금속을 재결온도 이상의 고온까지 가열한 후 롤러로 압연해 원하는 두께와 형태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금속은 더 유연해지고 변형이 쉬워지며, 내부 결함이 줄고, 또한 재료의 낭비가 적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포항제철소에서는 2개의 열연공장에서 연간 850만t의 열연코일을 생산하고 있다. -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 위한 노력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도전을 한다면 좋겠지만, 나는 솔직하게 목표를 정해놓고 일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 하는 일에서 문제점이 발생하면 항상 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고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패 없이 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많은 개선을 하면서 실패의 아픔을 겪으며 터득한 기술을 정리해 운전방안을 만들고 현업 후배들과 신입인턴 사원들에게 경험을 공유하면서 보람을 얻었다.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의욕을 가지고 개선을 했다.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롤교체 방법 개선 우수 제안 등록에 성공해 포상을 받았다. 회사에서 백암온천 1박2일 포상 휴가를 갔을 때 정말 즐겁고 뿌듯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현장 문제점에 대한 개선의 DNA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열간압연 2열연공장은 대규모의 설비가 동조돼 돌아가는 설비로서 어떠한 트러블 발생시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골든타임이 있다. 그것이 잠깐이라도 늦어지면 많은 피해를 볼 수 있다. 운전자의 대응이 늦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데이터를 이용한 자동 기능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정비와 협업을 통해 작업 중 이상시자동 정지 기능을 만들어 많은 효과를 봤다. 포스코의 모든 열연공장에 전파 적용하는 기술이 됐다. 한번은 열간 연연속압연시 두 장의 소재를 접합 후 트러블이 발생했다. 제대로 분석이 안 된 상태에서 다시 시도했으나 같은 트러블이 발생해 체면을 구긴적이 있다. 이후에는 같은 작업 시 설비와 제어 상태를 확인하는 체크시트를 만들어, 이상 발생시 체크시트 기준으로 하나하나 체크를 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했다. -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라. 그렇다고 목표가 클 필요는 없다. 작은 목표를 세우더라도 성공하는 습관을 길러라. 일을 함에 있 꼭 목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지금 있는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성공의 씨앗이 한 알 한 알 쌓일 것이다.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버티는 힘도 능력이다. 힘들 때 좀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조언자를 찾아라. 힘들 때 의지할수 있는 주위의 동료를 멘토로 만들어라. 그리고 배워라. 나의 기술 노하우는 주위의 필요한 모두에게 공유하라. 그러면 더 큰 기술이 돼 나에게 돌아온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가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의 긍정과 부정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모든 일에 가능한 긍정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라. - 앞으로의 포부는.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 많은 기술을 개발하고, 인생의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기술이 됐든, 삶의 지혜가 됐든, 기회가 있을때마다 후배들에게 많은 것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숙련기술인으로서 해당 분야 산업발전에 이바지, 후진양성 등 전문적인 활동을 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철강산업이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고자 후배들의 기술력 향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가르치겠다. 특히 후배 직원들을 잘 이끌어 선배들의 기술이 잘 전수가 될 수 있게 해 현재의 기술을 향상·발전시키겠다. 후배들의 업무 외적인 부분까지도 관심을 갖고 도와 회사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 마이스터고등 후배들에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전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회를 만들어 나가겠다. 또한 사회봉사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기술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포스코 명장 선정 이후 사내 기술전수 및 특강 등을 통해 기술 전수를 했다. 경북최고장인 선정 이후 도내 사회 봉사 및 학교 강의를 통해 나눔을 했다. 이제 대한민국 명장이 됐으니 더 넓은 분야에서 기술 전수 및 봉사 활동을 할 것이다. - 이 밖에 하고 싶은 말 . △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위치한 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할 것이고, 경쟁도 할 것이다. 주위의 동료를 이겨야 할 경쟁자보다는 함께 일을 해야 하고 성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협업의 대상자로 서로 협력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랬고, 아니면 많은 일 중에서 현장에 답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려움이 있다면 현장에서 직접 보고 현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을 즐겨라.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현장에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아무런 기반 없이 세계최초 신 열간연연속 압연 기술을 개발할 때도 많은 어려움과 좌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일을 즐겼던 것 같다. 또한 기술 개발은 치열한 도전 정신과 끝을 모르는 가능성을 열어준 또 하나의 새로운 경이로운 세계이다. 세상의 모든 곳에는 나의 스승이 있다. 나는 일본의 ‘호리이’라는 기술자가 현장의 설비 공사 및 시운전을 하면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기술하는 것을 보고 나도 업무하면서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이는 많은 기술 자료가 돼 후배들이 찾아보고 활용을 하고 있다. 권영국 소성가공 경북최고장인, 포스코 명장은 △포철공고졸업 △1982년 포스코 입사~ 현재 근무중 △2015년 포스코명장 △2016년 경북최고장인(소성가공) △2018년 철의날 은탑산업훈장 △2018년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2024년 대한민국명장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04

효를 상징하는 삼구정과 함께하는 마을 숲, 삶의 교훈으로

나뭇잎이 물드는 가을에 농촌 마을을 찾아들면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머문다는 당우와 곱게 물들어 가는 당산나무가 한 세트가 되어 풍요롭고 평화로운 가을을 맞이하는 풍경이다. 또한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볼 수 있는 바위 언덕 언저리나 마을의 동산 숲속의 스토리가 있는 정자와 나무는 부부의 인연처럼 절경의 주인공이 되어 한 폭의 가을 풍경화를 연출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을 풍경화 속으로 빠져들어 그들의 품에 안겨 옛이야기를 들어본다. 끝없는 욕망과 불안에 지친 마음은 안정을 찾고 야생마 같은 거친 나의 삶에도 고운 단풍 물이 스며든다. 농촌 마을의 당우와 당산목, 정자와 노거수는 풍요와 평화를 선물하는 우리 전통 민속 생명 문화의 자연자산이다. 특히 안동은 노거수의 고장이다. 서울 면적의 2.5배나 클 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보다 마을에는 노거수가 많이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우와 정자도 많다. 안동 풍산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넓은 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지방 문화재가 무려 7점이나 있다. 이런 문화재를 품게 된 것도 마을 숲속에 있는 삼구정과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 노거수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직에 있을 때 안동 출신 국장으로부터 지역 신문 기사를 펼쳐 놓고 열변을 토하면서 소산마을을 자랑하던 것이 아삼아삼하다. 안동김씨 집성촌 마을로 전통과 효심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라면서 역사적 고증을 들어가면서 설명하는 모습에서 안동인의 자긍심이 짙게 묻어났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신 후 “이 마을을 좀 더 품위 있는 역사적 마을로 가꾸어 볼 아이디어가 없을까?”라고 물었다. 안동은 우리나라 삼대 문화권 중 유교문화권의 중심지이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의 이 시대에 행복의 근원은 정신에 있다면서 끈질기게 목소리 높이고 있다. 그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이러한 주민의 정신 바탕에는 정자와 마을 숲, 노거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삼구정만 해도 그렇다. 조선 시대 문신 김영수와 그의 형제들이 어머니 예천권씨를 위해 1496년 마을 동산 위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세 개 있는 것을 보고 삼구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정자 이름에서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아들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자와 함께 있는 느티나무와 소나무 역시 우리 삶에 중요한 가치 개념으로 삼고 있는 건강, 장수, 다산, 절개, 사랑 등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하니 마을에 훌륭한 인물들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마침 중앙정부에서 ‘2002 월드컵 축구 경기 맞이 공원 조성’ 사업비가 내려왔다. 삼구정 주변의 마을 숲과 문화재 등을 연계하는 역사가 숨 쉬는 인문, 생태 마을을 조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문화재와 함께 삼구정에 담긴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마을을 품은 숲과 숲을 이룬 나무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싶었다. 마을 주민과 이장, 안동김씨 종친회장 등 관계 어르신들과 삼구정에 모여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다. 종친회에서도 문중 재산을 희사하겠다면서 흔쾌히 동의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열변을 토하면서 소산마을과 안동을 자랑하던 안동 출신 김휘동 국장이 2002년 7월 1일 자로 민선 3기 안동시장으로 취임했다. 아마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나 싶다. 때마침 환경부에서 주관하는 자연보호에 대한 의식 함양과 소재를 제공하여 방송을 포함한 문화·예술 부문과의 자연생태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하고자 방송작가, 소설가, 시인 등 원로작가 생태기행이 있었다. 2000년 3월 10일부터 1박 2일간 26명으로 구성된 원로작가 자연생태 기행 대표로는 경북 청송 출신 소설가 김주영 작가였다. 자연생태 기행 안내를 맡아 일정 중에 하회마을 대신 소산마을을 방문할 것을 권했다. 김명자 환경부 장관도 일행과 함께 소산마을을 방문했다. 문화재는 물론 삼구정 정자와 마을 숲, 노거수를 둘러보고는 전통과 효심이 살아있는 마을이라면서 모두 감탄했다. 원로작가들에게 마을 숲과 노거수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공익적 환경가치를 설명하고 글의 소재로 많이 사용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안동 부용대 옥연정사에 갔다. 버스에 내리면서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손을 잡고 오르막 숲속 오솔길을 택해 부용대로 걸어서 올라갔다. 그리고 정상에서 수건을 내렸다. 모두가 놀랐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하회마을의 자연경관에 감탄을 자아내었다. 하회마을과 만송정 숲, 굽이 흐르는 푸른 낙동강과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했다. 하회마을에 갔으며 전체의 마을 경관을 조망할 수 없을 것인데 여기로 오기를 잘했다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사랑하는 이여 언제라도 님이 오시는 날만 기다릴지니 아니 오신 듯 다녀가시옵소서”라는 원로작가들의 표어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소산마을을 찾아 삼구정 누대에 올라 주변 숲의 노거수를 바라보기도 하고 숲속을 거닐어 본다. 어머니의 건강을 보살피는 아들의 효심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삼구정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또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으면 이러한 자식의 효심을 불렀을까, 오늘날 옛 제도가 맞지 않다고 야단이다. 모두 버리더라도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효도는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삼구정 아래 이곳 출신 삼당 김영이 지은 빗돌에 새겨진 “빈 배에 섯는 백로/ 벽파에 씻어 흰가/네 몸이 저리 흰들 마음조차 흴쏘냐/ 만일 마음이 몸과 같으면 너를 좇아 놀리라.”라는 시조 한 수는 소산마을의 순결하고 청렴한 정신을 가장 잘 노래한 시조라고 여겨진다. 소산마을의 삼구정 주변에 자리한 느티나무 노거수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삼구정을 건립할 때 심었다면 나이가 530살이 된다. 나무는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침묵하며 우리에게 전해줄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마을이었고, 그 중심에는 삼구정과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며 마을의 역사를 지켜본 생명의 증인이자, 마을 주민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봐 준 친구였다. 노거수를 보호하는 이유는 단지 오랜 세월을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랫동안 살아있음이 그리고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갈 생명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효를 상징하는 삼구정과 함께하는 마을 숲, 노거수는 그저 오래된 자연물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역사이자,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교훈이다. 소산마을 지방문화재는 뭐가 있을까 삼구정(三龜亭)은 장수의 상징인 거북처럼 생긴 세 개의 바윗돌이 정자 뜰에 놓여 있어 붙여진 것으로, 노모의 장수를 비는 뜻도 담겨 있다. 청원루(淸遠樓)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풀려난 뒤 이곳에 내려와 머물면서 ‘미운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 지었다. 양소당은 안동 김씨 종택(安東金氏 宗宅)이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명신 김영수(金永銹) 선생이 연산군(燕山君) 7년(1501년)에 지은 집이기도 하다. 동야고택은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노인(魯人) 동야필사(東埜畢事)를 인용 영조(英祖)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면시(面試)에서 답안에 공자가어의 노인 동야필사를 인용한 것에서 유래했다. 묵제고택은 감찰공파(監察公派) 자손이 누대에 걸쳐 세거(世居)해 온 집이다. 비안공 구택은 조선 세종(世宗) 때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안동 김씨 김삼근(金三根, 1419-1465) 선생이 살던 집이다. 삼소재는 선안동(先安東) 상락 김씨(上洛金氏) 시조의 18대손인 김용추(金用秋, 1651-1711) 공의 종택이다, 현종(顯宗) 15년(1674년)에 건립됐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04

‘2퍼센트’ 불가능 아닌, 도전을 위한 출발점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영화계에서 낯선 존재였던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놀랄 만큼 높아졌다. 한국 영화는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인재들의 도전의 무대가 되었고, 포항에서도 영화산업을 일으켜보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포항의 인적, 물적 자산으로 제작된 영화 ‘2퍼센트’의 개봉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2퍼센트’는 문신구 감독의 새로운 시도이자 고향에 보내는 연서다. 배 : 본명 대신에 ‘문신구’라는 이름을 쓰고 계신데. 문 : 문신구는 필명입니다. 내가 1986년에 쓴 희곡 ‘분출구’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필명을 썼습니다. 배 : 감독님께서 연극영화계에 입문한 지 50년이 넘었습니다. 열정 하나로 뛰어들어 장르를 불문하고 역할을 가리지 않으며 활동했습니다. 지난 활동을 되돌아본다면 현재는 어느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문 : 돌이켜보니 긴 시간이 흘렀군요. 그동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했고 침잠기도 거쳤습니다. 현재는 지금까지 걸어온 예술세계를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원죄’와 ‘2퍼센트’입니다. ‘원죄’는 외부 자본의 도움 없이 내가 하고 싶고 또 해야 하는 이야기를 밀어붙인 작품이지요. ‘2퍼센트’는 고향 이야기를 하나쯤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배 : ‘원죄’는 감독님께 많은 상을 안긴 작품이고, ‘2퍼센트’는 포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문 :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포항지부를 출범하면서 지역 영화인들과 영화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았습니다. 그중 하나로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포항 단편 시나리오 공모전을 개최했어요. 수상작 한 편을 내가 각색해 장편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정된 예산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뭘까 고민했어요. 적은 예산이라고 작은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배 : ‘2퍼센트’에서는 포항의 명소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지요. 등장인물을 포항의 여러 공간에 담아내는 데 고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문 : 시나리오를 포항이라는 공간에 녹여내는 작업이 감독으로서 풀어야 할 과제였습니다. 되도록 골고루 소개하려고 애쓰면서도 배경이 스토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어요. 포항의 아름다운 풍광도 담아내고 의도하는 스토리도 잘 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심했죠. 배경 중에 월포해수욕장 인근 이가리 닻 전망대는 효과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바다 장면은 동시녹음을 했는데 소음 때문에 촬영지를 두세 번 옮겨야 했어요. 해변 도로를 지나는 차량은 CG로 지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배 : ‘2퍼센트’는 실패를 거듭하다 생존 확률 2퍼센트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영화감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연한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니 주인공으로 나오는 고집불통의 감독이 문 감독님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하더군요. 감독님은 촬영 현장에서 어떤 감독입니까. 문 : 상황을 배우들에게 주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미친놈, 무모한 놈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영화는 촬영하고 필름에 담기는 모든 순간이 최선이어야 합니다. 최선의 장면을 뽑아야 하니 현장에서는 거칠고 날카로워집니다. 충분치 않은 예산에 맞추다 보니 여유가 없기도 하죠. 사비로 제작한 ‘원죄’는 하루 3시간씩 자면서 11회차에 끝냈어요. 비슷한 시기에 백승철 배우가 ‘군함도’를 촬영했는데, 거기서 한두 컷 찍을 동안 우리는 열 컷도 더 찍으니까 “감독님, 이게 영화가 돼요? 이게 되면 감독님 천재예요”라고 했을 정도죠. ‘2퍼센트’ 촬영도 13회차로 끝냈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죠. 해 뜨는 장면을 찍느라 자동차에서 밤새고, 성당 꼭대기에서 촬영한 적도 있어요. 배 : 등장인물 중에 가장 짧고 강렬하게 나오는 남명렬 배우는 문 감독을 두고 ‘변신의 귀재’라고 하더군요. 감독님의 정체성을 묻는다면요. 문 : 1980년대 중후반은 나도 주목받는 배우였지요. 신성일 세대 다음에 신영일 세대, 그다음에 안성기 세대가 있었고, 나는 바로 그다음 세대라고 봅니다. 연기를 계속했다면 사람들에게 익숙한 얼굴이 됐을지도 모르죠. 나의 정체성을 말한다면 배우나 연극 연출가라기보다 영화감독이에요. 부러울 정도로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은 정말 많습니다. 그래도 스스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상업영화는 시류를 탑니다만 내 작업은 그렇지 않죠. 지금도 해외 영화제 관계자가 내 작업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배 : ‘2퍼센트’라는 영화 제목이 흥미로운데, 지역 영화산업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문 : ‘2퍼센트’는 불가능이 아니라 도전을 위한 출발점입니다. 포항은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인 ‘인디플러스 포항’이라는 귀중한 자산이 있습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니 안타까워요. 다른 지역에 없는 자산이 포항에는 꽤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배 : 감독님 말씀대로라면 2퍼센트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시작되는 비율인데요, 지역의 영화산업 여건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 포항은 문화예술적으로는 좀 건조한 것 같습니다.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아날로그적 사고에 갇혀 있어선 안 되겠죠. 영화 제작자의 눈으로 보면 경상북도만큼 숨겨진 명소가 많은 곳이 없어요. 하지만 행정에서는 관심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안타깝게도 경북은 영상위원회가 없는 유일한 지역이죠. 이제는 콘텐츠의 시대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앞서지는 못하더라도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배 : 콘텐츠의 시대를 포항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문 : 전국 청소년 영화제 심사를 하다 보면 실력이 출중한 친구들이 많아요.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영상교육 시스템을 갖춘 곳이 꽤 있습니다. 포항에서 훌륭한 콘텐츠 작가가 나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제2, 제3의 봉준호가 포항에서 나올 수도 있어요. 지방자치단체나 학교도 인식을 전환해 영화 관련 인재 발굴에 힘써야 해요. 세상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데 지역의 영화산업도 이런 변화를 따라갔으면 합니다. 영화는 대중 예술의 한 영역이 되었고, 앞으로 영상에 대한 소비와 제작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영상산업에 대한 교육도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 제공되어야 합니다. 배 : 감독님께서는 그동안 노동과 정치, 성(性), 종교까지 한국 사회의 굵직한 이슈를 다뤄왔는데, 앞으로는 어떤 주제를 다룰 계획인가요. 문 : 세상이 다원화되고 복잡해질수록 정치가 중요하죠. 그래서 정치 문제를 다뤄보려고 해요. 구체적으로는 태종 이방원의 장자인 양녕대군 이야기를 다뤄볼 생각입니다. 양녕대군은 왕이 되지 않을 방도를 궁리하며 스스로 비뚤어지는 독특한 인물이죠. 결국 동생인 세종이 세자에 책봉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들 간의 갈등과 투쟁이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정치 이야기는 곧 복잡다단한 인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여겨져요. 그리고 ‘안동포 짜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사라져가는 옛것에도 관심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배 : 감독님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이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문 :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위해 평생을 살아왔고, 남은 인생도 영화를 위해 살 겁니다. 앞으로 몇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남기고 싶은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으려 합니다. 영화가 세상을 바꾸지 못해도 적어도 하나의 문제를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감독이 되고 싶어요. 자식들에게도 그렇고, 가장 죄스러운 부모님께도 말입니다. 끝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9-04

가장 넓은 영토 지배했던 진흥왕과 아들 진지왕

신선이 먹는 복숭아가 열린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산. 서라벌 서쪽에 있는 거대한 봉우리라 해서 서악(西岳). 부처가 다스리는 불화 없는 이상향을 의미하는 서방정토(西方淨土), 또는 극락정토(極樂淨土). 지금의 경주시 효현동에 위치한 선도산(仙桃山) 일대를 신라 사람들은 위와 같이 받아들였다. 거대한 불상 ‘마애여래삼존불’이 내려다보는 곳에 다수의 왕릉이 솟았고, 신라의 첫 번째 통치자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숭배 받는 성모(聖母)가 기거했던 곳. 무언가 비밀스럽고 신비한 분위기 속에 갖가지 설화와 전설이 숨겨진 공간이 바로 경주 선도산이다. ‘두산백과’는 이곳에 자리한 유적, 그 가운데서도 왕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능(陵)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문장이다. “선도산 주변에 유적지가 많다. 경주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과 무열왕릉, 법흥왕릉, 서악리 고분군 등이 선도산 자락에 있다.” ◆신라시대 선도산의 위상을 짐작케 해주는 왕릉들 지난 주말 다시 찾은 선도산. 그 산 입구 무열왕릉을 지나 10~15분쯤 야트막한 산자락을 오르면 몇 기의 봉분(封墳)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크기가 경주 시내에서 볼 수 있는 대릉원의 봉분이나 황남대총과 달리 ‘거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찌 보면 소박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라벌 백성들에게 선도산이 어떤 의미를 지녔었고, 동시에 그 시절 서악의 위상을 떠올려보면 ‘왕의 영원한 안식처’를 그곳에 만들었던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동국대 사학과 최연식 교수의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 “선도산의 신라시대 위상과 관련해서는 산의 동편 자락에 조성된 왕릉들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장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법흥왕과 진흥왕의 능이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근처에 있는 다수의 왕족 및 귀족들의 고분도 왕릉과 마찬가지로 6세기 후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시기부터 이 지역이 왕실과 귀족들의 장지로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두 명도 아니다. 다수의 신라 왕이 잠들어있다고 추정되는 선도산 초입은 그런 이유로 묘한 기운이 감돈다. 한여름 뙤약볕을 피해 왕릉 주변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불어오는 한 점 바람도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한 가지. 진흥왕, 진지왕과 달리 무열왕은 6세기 아닌 7세기의 신라 통치자다. 7세기에 세상을 떠난 다른 왕들은 선도산 인근이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 헌데, 어째서 무열왕릉은 선도산 입구에 조성된 것일까? 앞서 언급한 최연식의 논문이 아래와 같은 답을 들려준다. “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능은 모두 선도산을 떠나 왕경의 다른 지역에 만들어졌는데, 661년에 죽은 무열왕의 능이 다시 선도산 지역 기존 왕릉 옆에 조성된다. 이는 동륜계의 성골 출신이 아닌 진골로서 왕위에 오른 무열왕이 자신의 혈연 계보가 6세기 후반의 법흥왕·진흥왕·진지왕 등에 이어짐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으로 생각된다.” 이는 충분히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장이다. 고대국가는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통치권을 부여받는 현대의 공화정과 달리 권위와 신성(神性)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신성과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늘이 선택한 자’라는 백성들의 무조건적 믿음이 있어야 했고, 존귀한 혈통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을 터.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 왕이라는 ‘정치적 약점’의 극복을 위해 무열왕은 ‘동일한 혈통’ 진흥왕에게 기댄 것이라는 추정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선도산 자락에서 영면(永眠) 중인 진흥왕은… 그렇다면 무열왕의 선대 혈족인 진흥왕은 어떤 사람이며 신라 역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한 권력자인지 궁금해진다. 534년에 태어나 576년 마흔두 살에 타계한 것으로 알려진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왕’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는 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해 사상적 통합을 도모했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해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돼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됐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해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돼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 훨씬 너머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무열왕이 기틀을 닦고 문무왕이 완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진흥왕이 있었던 것이다.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고, 대가야를 병합했으며, 백제의 팽창을 저지했던 사람이 바로 진흥왕이었던 것. 그렇다고 진흥왕이 ‘비교할 대상이 드문 강한 무력을 가졌던 통치자’로만 기억되는 건 아니다. 윤희진의 책 ‘인물한국사’는 진흥왕의 예술적 심미안(審美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 “진흥왕이 지방을 시찰하던 중 가야 출신인 우륵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진흥왕은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고, 552년 계고·법지·만덕 세 사람을 시켜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친 뒤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니, 왕이 기뻐하며 크게 포상했다고 전한다.” ◆차남 진지왕도 진흥왕릉 곁에 묻혀 진흥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곳곳에 순수비(巡狩碑·왕이 살피며 돌아다닌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를 세워 복속시킨 땅의 광대함을 내세워 자랑하려했던 ‘정복 군주’였다. 물리적인 힘과 예술적인 감각을 동시에 지녔던 인물이었음에도 진흥왕의 삶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아끼던 장남 동륜(銅輪)이 572년 사망한 것이다. 진흥왕이 서른세 살이던 때다. 아들을 앞세운 참척(慘慽) 앞에서 그 슬픔이 왕이라고 달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쏟았을 터. 선도산 자락 진흥왕릉 지척엔 진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무덤도 있다. 진지왕은 죽은 형 동륜을 대신해 보위(寶位)에 오른 진흥왕의 차남이다. 역사학계는 그를 아버지와 달리 인색하게 평가한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 같은 고문헌은 진지왕을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끝내 폐위되어 쓸쓸하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릉이 다른 왕릉에 비해 작은 게 그런 이유가 있어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재위 기간 역시 576년에서 579년까지로 3년 남짓한 시간이었기에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지왕은 김춘추(무열왕)의 조부로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이것 하나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건 선도산 아래쪽엔 증조부(진흥왕), 조부(진지왕), 손자(무열왕)가 함께 잠들어 있다. 아버지 진흥왕은 20대에 요절한 아들 진지왕의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삶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03

‘농심 품은’ 영주 농·특산물로 추석 감사의 마음 전해요

수확의 계절, 넉넉함이 있는 가을이다. 가을은 나눔의 계절이기도 하다, 풍성한 마음과 농심이 가득 담긴 가을걷이는 명절인 추석을 맞아 좋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따뜻함이 담겨 있다. 영주시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이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제품의 우수성 때문이다. 소백산 기슭에서 자란 다양한 농축산물은 맑은 공기, 맑은 물, 우수한 토양과 기후, 그것에 더해 정성과 땀방울로 농심을 담았기 때문이다. 영주시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은 소백산록의 자연환경과 전통기법에 따른 생산 방식을 선택해 그 맛과 품질이 우수해 추석 선물 및 제수용품으로 그 가치성이 높이 인정되고 있다. □ 풍기인삼 국내 최초 재배삼의 시효지인 영주 풍기 지역은 500여년의 재배인삼 역사를 통해 우수한 인삼을 생산하고 있다. 소백산록의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에서 생산되는 풍기인삼은 타 지역 인삼에 비해 내용과 조직이 충실하고 인삼향이 강하며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다. 특히, 다양한 홍삼제품은 웰빙건강 식품 뿐만 아니라 선물용으로도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홍삼제품은 홍삼절편삼, 홍삼차, 홍삼정과, 홍삼정, 홍삼타브렛, 홍삼액, 홍삼분말, 인삼분말, 홍삼정, 홍삼캡슐, 홍삼비누, 홍삼제리, 홍삼캔디 등이 있다. 인삼은 혈압조절, 간장보호, 항암작용, 항당뇨, 피로회복, 식용증진, 면역력 강화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영주사과 영주시는 국내 사과 생산의 14.5%를 차지하는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로 백두대간의 주맥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분기하는 지역의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산지 과원에서 생산,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에 의해 맛과 향이 뛰어나며 성숙기 일교차가 커 사과의 당도가 높다. 영주사과는 대부분 15kg 상자로 포장되어 출하되고 있으나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포장단위를 5kg, 10kg 단위로 다양화 체제를 갖췄다. 사과는 피로회복, 피부미용, 위장장애 등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영주한우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소백산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서 사육된 영주한우는 개량된 암소에 1등급 정액으로 인공수정해 생산된 우량 숫송아지를 5-6개월에 거세하고 한우고급육 표준사양관리프로그램에 의거 사육한다. 비육 후기에는 특수사료 급여와 초음파 육질진단을 실시해 출하적기를 판단, 고품질의 육질만을 생산·판매한다. 영주한우는 위생 및 질병 안정성을 위해 부루세라병 등의 악성가축전염병을 차단하고 축산물의 위생·안정성에 대한 소비자 신뢰확보를 위해 사육 ·도축·가공·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기록·관리하는 쇠고기이력추적시스템을 2006년부터 실시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 풍기인견 풍기인견은 천연섬유라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되며 땀띠가 예방되고 촉감이 좋아 냉장고 섬유, 에어컨 섬유라 불린다. 인견은 땀 흡수력이 탁월하며 정전기가 없고 부드러우며 식물성 자연섬유로 피부가 여린 갓난아기,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분들에게 좋은 건강섬유다. 가볍고 얇아서 여름 실내복, 반바지, 잠옷, 침구류, 천연염색을 한 외출복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어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 영주복숭아 소백산 자락의 청정 자연환경 속에서 자란 영주복숭아는 과실이 크고 육질이 연하며 과즙이 많고 당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비타민A와 펙틴이 풍부하여 향이 뛰어나다. 복숭아에 함유된 구연산 등 유기산은 니코틴 해독과 항암작용, 펙틴 성분은 장을 부드럽게 해 변비에 좋으며 혈액순환을 도와 관상동맥경화 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숭아는 단맛이 강하지만 실제 당분은 10% 정도에 불과하며 펙틴 성분 때문인 포만감으로 다이어트에도 도움을 준다. □ 단산포도 단산포도는 간이비가림 시설과 저농약 고품질 호맥재배로 생산 되는 유기물 생산품이다. 단산 포도는 미숙과는 출하하지 않고 적정량을 착과시켜 품질이 우수하다. 특히, 유기물효소를 균형시비하고 선과와 포장을 철저히 관리한다. 단산포도의 특징은 포도생육에 가장 적합한 최적의 기후조건과 비옥한 토양에서 유기농업으로 재배해 육질이 조밀하고 맛과 향이 뛰어나다. □ 소백산 오정주 옛날 사대부가의 선비들이 건강 약용주로 마시던 술로서 소백산 청정약수, 우리 쌀, 우리 밀로 만든 누룩,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약초로 빚어 만든 전통 명주다. 저온에서 백일이상 장기 숙성해 뒤끝이 깨끗한 오정주는 영주시 고현동 박찬정가에서 4대째 그 비법을 전수해 오고 있다. □ 정도너츠 영주지역에서 생산되는 국내산 찹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찹쌀 도너츠로 지역의 특산물인 인삼, 사과, 생강, 고구마 등을 재료로 만든 웰빙 식품이다. 찹쌀을 주재료로 해 밀가루로 만든 도너츠 보다 영양 성분검사를 해보면 적개는 7배 많게는 10배 이상 지방함량이 낮게 나오며 콜레스테롤과 트렌스지방이 0%로 먹을거리로 맛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 순흥 기지떡 기지떡은 서리꽃처럼 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상화떡, 상화병이라고도 하며 기지떡은 술로 빚어 여름철에도 쉬지 않아 오래두고 먹을수 있다. 칼로리가 낮고 속을 든든하게 해줘 여성들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한국 전통음식 조리법을 대표하는 발효 과정을 거친 떡이라 살아있는 유산균 덩어리로 단순한 계절떡, 의례떡과 달리 기지떡은 건강을 생각한 고품격 떡이다. □ 상떼마루 천혜의 자연속에서 재배된 지역 특산물인 영주사과로 만든 100%순수 천연제품으로 설탕과 알코올이 전혀 첨가되지 않은 제품이다. 상떼마루 아이스와인은 2013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와인품평회에서 은상을 받은바 있는 지역 특산품이다. □ 선비촌 한과 전통의 맛을 지켜가는 선비촌 한과는 영주지역의 특산품인 인삼, 마, 자연 식품인 쑥, 솔잎 등을 이용해 생산되고 있다. 달지않고 담백하며 고소한 맛이 특징으로 제수용, 선물용, 혼수용으로 구분 생산된다. □ 고구마빵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 영주에서 재배 가공한 자연 웰빙 건강제품으로 고구마는 칼륨성분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으로 소화촉진, 변비해소, 노폐물 배출, 간의 신진대사, 피부노화 방지, 체내지방 분해, 체중감량에 효과적이며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및 식이섬유가 함유된 국내산 100% 고구마로 만든 빵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수 있는 고구마빵이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4-09-02

10,000여 참가자들, 포항 영일만 앞바다 뜨거운 레이스

아름다운 영일만 앞바다의 풍경을 무대로 8000여 명의 건각들이 힘찬 레이스를 펼쳤다.  전국 마라톤 동호인들의 축제인 ‘2024 제8회 포항 철강 마라톤(Steel Run!) 대회’가 지난달 31일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서 화려하게 개최됐다.  경상북도와 포항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이번 대회에는 전국 각지의 마라톤 동호인 8천여명과 가족, 지역 주민 등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강덕 포항시장을 비롯해, 김일만 포항시의회 의장, 김정재·이상휘 국회의원, 이정우 경북도 메타 AI 과학국장, 최윤채 경북매일신문 대표가 참석해 축하의 인사말을 전했다. 또 박용선, 이칠구, 손희권 경상북도의원, 나주영 포항상공회의소 회장, 전익현 포항철강관리공단 이사장, 천시열 포스코 포항제철소장, 이재한 포항시체육회장, 김종익 포항시의회 운영위원장 등 지역 각계 인사들이 건각들과 함께 달리며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행사는 남·녀 개인 10㎞(STEEL Run), 남·녀 개인 일반 5㎞(FUN Run), 남·녀 개인 학생부 5㎞(Z-Run) 등 6개 부문으로 나눠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 동해 바다를 보며 질주하며 그동안 갈고 닦아온 기량을 선보였다. 남자 개인 10㎞ 부문(STEEL Run)은 박현준씨가 32분36초07의 기록으로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또 여자 개인 10㎞ 부문 우승은 38분12초07로 완주한 정순연씨가 거머쥐었다. 개인 5㎞ 부문 남자는 감진규(16분23초)씨가, 여자는 박교빈(20분47초)씨가 각 1위로 골인했다. 학생 5Km 부문 남자는 정지성(20분05초)군과 여자 조미라(25분42초)양이 이름을 올렸다. 마라톤이 끝나고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기념 메달과 상품 등이 수여됐다. 이후 참가자 전원을 대상으로 한 추첨을 통해 다양한 경품을 전달하는 행사도 진행해 대회의 풍성함을 더했다.  최윤채 경북매일신문 대표는 환영사에서 “1만여명에 달하는 참가자들이 포항철강 산업발전을 염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면서 “지금 이 순간 참가자들이 보여주는 열정과 정열, 용기와 힘이 모여서 포항 철강산업이 세계 속의 중심지로 다시 우뚝 설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강덕 포항시장도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활력 있고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면서 “대회에 참가한 여러분 모두 힘내라”고 응원했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대회 이모저모 ○…“내년에는 또 다른 코스튬을 입고 참가할 거예요!”  31일 ‘스파이더맨‘복장으로 대회에 참가한 정우남 (32·경주)씨는 선수와 가족 등 1만 명이 모인 마라톤 참여자 중에 단연 돋보였다.  정 씨는 지난해에 ‘캡틴 아메리카’복장을 하고 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분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면서 자신도 꼭 코스튬을 하고 마라톤을 한 번 뛰어 보고 싶었다며 이색 복장 착용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이날  다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코스튬을 입고 10㎞ 마라톤을 완주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날 출발 전에 스파이더맨 복장을 한 정 씨가 행사장에 나타나자 참가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며 몰려드는 등 정 씨는  이날  대회 내내 인기남이 됐다.   ○…미국에서 온 사업가 더스틴 앨런는 전투복을 입고 참가, 주목을 끌었다. 그는 “포항이란 도시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뛰기에 좋은 곳”이라며 해병대는 포항의 또다른 상징이어서 전투복을 입고 나왔다고 했다.  평소 달리기를 꾸준히 했지만 마라톤은 처음이라는 그는 기록을 세우기보단 완주를 목표로 세우고 참가했다고 했다. 이날 진행된 포항철강마라톤에는 더스틴 앨런을 포함한 다수의 외국인이 참여해 글로벌한 행사가 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포항제일교회에서 박영호 담임목사와 김경원 부목사 등 10명의 목사와 신자들이 대회에 참가, 포항철강발전을 염원했다.  첫 출전임에도 이 교회는 단체 부스를 설치, 청년부 등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기도 했다.  신자들은 “아름다운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자연을 느끼고 달리기 하는 동안 묵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감을 할 수 있었다”면서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성도들과 함께 뛰겠다”고 전했다.  포항의 대표적 교회를 이끌고 있는 박영호 담임목사는 “올 초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다"면서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기도의 한 형태, 또는 신앙 성장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뛰는 운동을 예찬했다. 이날 참가 목사들은 5㎞ 코스를 완주, 신자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철강마라톤 최고령 참가자는 10㎞ 코스를 완주한 한기식(78)씨. 한 씨는 “마라톤을 좋아해서 56년간 꾸준히 대회도 나가고 연습을 틈틈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한씨의 마라톤 경력은 예사롭지 않아. 국내외 마라톤 경기부터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까지 뛰었을 정도로 마라톤에 진심이다.  한 씨는 마라톤에 대해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운동, 완주 했을 때 뿌듯함이 크다”고  극찬과 애정을 드러냈다. 대회 최연소 참가자는 돌이 채 지나지 않은 11개월 이도율(2023년생) 아이였다. 도율이네 가족은  이날 아빠 이근주(37), 엄마 조아라씨(34), 누나 지율(4)이 등 4식구가 함께 출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윤희정·단정민기자/김채은수습기자·성지영인턴기자 남자 10㎞ 우승 박현준“아침 햇살 반짝이는 바다보며 달리니 즐거워” “생각보다 기록이 잘 나와서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31일 포항철강마라톤 남자 개인 10㎞에서 32분 36초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한 박현준 씨(41·대구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1위를 차지한 그는 이날 RMC런마클 크루들과 함께 마라톤에 참가했다. 박 씨는 “평소 주 2회 가볍게 러닝을 해왔다”며, “8㎞ 지점에서 맞바람이 불어 힘들었지만,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달릴 수 있어 즐거웠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날씨가 많이 덥지만, 러닝이 큰 인기를 얻고 있어 뿌듯하다”며, “다들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거운 러닝 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남자 5㎞ 우승 감진규“3회 연속 우승… 마라톤은 내 삶의 활력소” “마라톤은 내 삶의 활력소입니다.” 남자 개인 5㎞에서 16분23초 성적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감진규(31·부산)씨는 지난해 포항철강마라톤대회에 이어 3연승을 달성했다. 감씨는 “철강마라톤 1회부터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첫회에 우승하고 2022년부터 올해까지 계속 1등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소방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그는 “친구들과 취미로 마라톤 대회에 나갔는데, 그게 너무 재밌어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감씨는 지난해 본인 기록보다 24초 앞당긴 것에 대해 “스마트 워치를 안 차고 왔다. 2, 3등과 같이 맞춰 가려고 했는데 뛰다보니 욕심이 생겨서 기록을 빨리 당긴 것 같다”고 밝혔다.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학생부男 5㎞ 우승 정지성“두번째 참가해 1위… 막판까지 열심히 뛰어” “이번 대회가 2번째 마라톤 참가였는데 우승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학생부 5km에서 우승한 동지고 3학년 정지성(19) 군은 뜻밖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솔직히 눈 앞에서 남자 초등학생이 열심히 뛰어 가길래 뒤따라 가게됐는데 들어와보니 1등이라고 하더라며 환하게 웃었다.   학교 유도부 선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운동을 하고 싶다면서 내년에는 일반부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유도부 코치선생님께서 대회에 나가 체력테스트를 한 번 해 보라고 해서 참가했는데 뜻밖의 성적까지 냈다며 코치선생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우승 상금으로 같이 대회에 참가한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는 그는 "영일만 앞 바다를 보며 뛴 포항철강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추억은 나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소중한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석윤기자 lsy72km@kbmaeil.com 여자 10㎞ 우승 정순연“즐기려고 출전했는데 좋은 결과 얻어” “즐기려고 왔는데 더워서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앞에 뛰는 남자분들 보면서 끝까지 뛰었더니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31일 포항철강마라톤 여자 개인 10㎞에서 38.13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정순연 씨(51·대구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30대에 마라톤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 정순연 씨는 51세의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마라톤을 뛴다. 그녀는 평소 러닝동호회 사람들과 주 3회 짧게는 5㎞ 길게는 10㎞ 러닝하며 체력을 길렀다. 언제가 가장 고비였냐는 질문에 정 씨는 “5㎞가 딱 넘어갈 때 너무 힘들었다. 평소에 연습할 때도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래도 걷지만 말자, 걸으면 여태 뛴걸음들이 다 무너지는 거다”라고 마음을 다 잡았다고 전했다. /성지영 인턴기자 thepen02@kbmaeil.com 여자 5㎞ 우승 박교빈“10년 만에 결승 골인… 달리는 모든 순간 좋아” “10년 만에 결승선을 뚫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2024 포항철강마라톤 여자 개인 5㎞(FUN RUN) 우승자 박교빈(22)씨는 20분 47초를 기록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씨는 중학교까지 체전을 준비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운동을 잠시 쉬다 올해 포항공과대학을 조기졸업한 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박씨는 “마라톤이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며 “공부와 운동 모두 체력이 중요한 만큼 달리기를 통해 길러둔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학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철강마라톤 FUN RUN 구간에 대해서는 “평지가 많은 데다 구간 통제도 아주 잘 돼 원활하게 경기를 치룰 수 있었다”며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구경모기자 gk0906@kbmaeil.com 학생부女 5㎞ 우승 조미라“서울서 포항 방문… 가족들 응원 덕분에 1등 ”  이번 대회 학생부 5km 여자 1등은 12세 조미라(초등학교 6학년) 양이 차지했다.  서울시 구로구에 살고 있다는 조 양은 마라톤 대회 참가는 처음이었는데 가족들 응원으로 1등을 한 것 같다고 기뻐했다.   어릴 때부터 마라톤에 관심이 많았다는 조양은 “우승 상금으로 아빠 엄마에게 맛있는 것을 사드릴 생각”이라며  소감을 전했다.  포항은 이번 대회 때문에 처음 오게됐다는 조 양은 “포항은 바다도 예쁘고 자연 환경이 참 좋다고 생각해요”라며 귀엽게 살짝 웃었다.   조 양을 데리고 온 아버지 조성연 씨는 "포항까지 거리는 좀 멀었지만  막상 대회에 참가하고 보니 가족들 모두 아주 만족했다"면서 특히 바다를 보면서 뛰는 것이 아주 특별했다며 “내년에도 기회가 되면 꼭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이석윤기자 lsy72km@kbmaeil.com

2024-09-01

“아무리 힘들어도 하고 싶은 얘기를 할 터”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는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저마다의 시절과 인연을 떠올린다. 상상과 사유의 안락의자에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지만 스크린을 직조하는 영화인에게 안락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스태프들의 일터이자 관객 수와 투자자와의 끊임없는 눈치싸움이다.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점은 자본의 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영화계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던 문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녹여내기 위해 기나긴 준비 과정에 돌입한다. 문 감독에게 이 시기의 영화는 ‘시간을 인내하는 예술’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10여 년의 공백기 끝에 영화 ‘원죄’를 세상에 내놓았다. 배 : 연극 ‘미란다’로 법정 공방을 벌이면서도 같은 제목의 영화를 내놓으며 화제를 모았는데 그 후로는 공백기가 길었습니다. 문 :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작품을 만들다 보니 저항에 부딪혔지만 감당할 자신이 있었죠. 창작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관람자의 비판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사회가 그로 인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문제는 자본입니다. 영상산업은 자본이 수반되어야 하니까요. 경제 논리와 나의 예술세계가 다르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배 : 연극 ‘미란다’가 화제성이 컸던 만큼 돈은 좀 벌지 않았나요. 문 : 그 돈으로 영화 ‘미란다’와 ‘콜렉터’를 제작했어요. 하지만 자비로 만드는 영화는 한계가 있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계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영화계 구조가 바뀌고 배우 개런티도 큰 폭으로 올랐지요.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려면 가게를 하든 사업을 해야지, 영화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깊었어요. 한국 영화는 1990년대 들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마주한다. 한국 영화가 예술에서 산업으로 거듭나는 시기였던 것이다. 영화계는 1990년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1990년대 한국 영화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95·96년 흥행 순위 10위 내 작품 대부분이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일 정도로 대기업 자본은 한국 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됐다. 대기업의 막대한 자금이 영화계로 흘러들어오자, 영화 제작비와 마케팅비는 점차 상승하고 한국 영화의 대형화가 시작됐다. 영화계에 유입된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여 영화 제작의 전문화를 이뤘으며, 영화산업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대기업 자본과 영화 인력의 결합으로 제작된 기획 영화는 영화를 예술이 아닌 상품으로 간주하면서 한국 영화는 ‘산업’으로 거듭났다. - 김소영·백해린·임대근,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100쪽·120쪽. 배 : 긴 공백을 깨고 2018년에 나온 영화가 ‘원죄’입니다. 힘든 삶을 살면서도 세상의 동정을 거부하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수녀의 이야기를 그렸죠. 문 :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진학했어요. 신학 공부를 10년 가까이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1년여 동안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영화를 만들었고, 사회적으로 터부시하는 문제여서 더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배 : 신학적인 주제를 담으려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고요.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는 각오였나 봅니다. 문 :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고 나는 하나님을 심판한다.” 영화 포스터에 이렇게 적혔습니다. 선천성 지체 불구자인 주인공은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영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목회자가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고발합니다. 가식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희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 가장 힘들고 어렵고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교회당은 헌금을 받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예배를 드립니다. 배 : 종교를 주제로 다루기 위해 종교인들과 대화도 나누었나요. 문 : 교회에 관한 주제를 담으려고 국내 유명한 목회자를 여럿 만났습니다. 서울 강남에 10만 가까운 신도가 있는 교회를 떠나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존경하는 분이죠. 그리고 두 살 아래 제 동생이 승려이기도 합니다. 배 : 그 동생도 영화를 관람하셨나요. 문 : 시사회 때는 안 왔어요. 내가 3남 1녀의 장남인데 바로 아래 동생입니다. 일찍 출가한 동생은 형제나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포항의 조그만 사찰에 있죠. 배 : 형은 목사, 동생은 승려라니 평범한 가족은 아니군요. 문 : 부모님은 순박한 분이셨어요. 내가 영화 한다고 했을 때 다른 부모라면 두들겨 패기라도 했을 텐데……. 자녀들이 하고 싶은 걸 꺾지 못하셨어요. 되돌아보면 죄스럽죠. 두 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더 아쉬워요. 배 : 영화 ‘원죄’는 주제와 서사도 충격적이지만, 흑백의 미학적인 화면과 연극적인 장면, 시적인 대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문 : 내가 남의 작품을 못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입니다. 표현은 절제하고 반어법을 많이 쓰는 편이죠. 표현하면 할수록 상상력은 줄고 절제할수록 상상력은 늘어납니다. ‘원죄’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수녀를 카메라가 멀리서 잡아요. 보통은 수녀의 표정을 클로즈업했겠지요. 표정을 모를 때 상상하게 되고 감동의 폭은 커집니다. 그런 보너스를 왜 버리겠어요. 나는 반어법도 즐겨 쓰는데, 호감 가는 사람에게 보기 싫다고 말하는 식이죠. 그러다 보니 배우들이 오해한 적이 많아요. 물론 친절한 설명을 삼가니 호불호가 갈립니다. 배 : 영화의 결말도 충격적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파격적이었어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요. 문 :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편집을 모두 끝내고 재촬영했어요. 배우들이 왜 재촬영을 해야 하는지 물었죠. 편집해놓고 보니 스스로 용서가 안 되었어요.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하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으로 끝내는 건 아니다 싶었죠. 등장인물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관객과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장면이 있어야 했어요. 춤을 통해 그들이 세상 또는 신과 화해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춤추는 내내 들리는 웃음소리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작품 ‘미궁’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배 : ‘원죄’로 2018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 작품상, 제38회 황금촬영상영화제 촬영 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유난히 상을 많이 안겨준 영화입니다. 문 : ‘원죄’시사회 때 목사님 50명을 초대했는데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리더군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일본 유바리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과 함께 초청을 받았어요. 국내에서 별 반응이 없던 영화를 일본에서는 심사위원 전원이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춘사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감독상을 받았고, ‘원죄’는 특별 작품상을 받았어요. 수상 소감에서 “‘기생충’이 300억짜리 영화인데 ‘원죄’는 1억 5천짜리 영화”라고 했더니 큰 박수가 나오더군요. 기독교윤리실천위원회에서도 움직이지 않았고요. 저들에게 빈틈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이 실수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 : 영화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문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9-01

“빠듯한 생활비에 자식 부담될까… 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죠”

퇴직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노동 시장에 남아야 하는 고령층의 현실은 고단하다. 포항시 남구 효자동에 살고 있는 A씨(70)는 50대 초반 대기업에서 퇴직한 후 몇 년간 작은 가게를 운영했지만, 경기 악화와 매출 부진으로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50대 후반부터 다시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해왔고, 현재는 대형 마트에서 출납원으로 일하고 있다. A씨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힘들지만, 생활비 마련과 자녀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어쩔 수 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쉴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2022년 기준, 한국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49.3세. 실질적으로 노동 시장에서 퇴장하는 나이는 72.3세로 조사됐다. 고령층이 퇴직한 후에도 약 23년간 다른 일자리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66세 이상의 노인 인구의 소득 빈곤율은 40.4%로, OECD 평균 14.2%의 세 배에 달해 우리나라 고령층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준다. 포항시 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B씨(66)는 “국민연금을 받긴 하지만, 그 돈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경비원 일은 다행히 나이 제한이 덜해서 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월급과 국민연금을 합쳐야 겨우 생활이 가능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지난달 3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년 12월 기준 국민연금 공표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중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은 498만명으로, 전체 973만명 중 무려 51.2%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수급률이 노인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것은 1988년 제도 도입 이후 최초다.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82만원 정도다. 국민연금만으로 안정된 노후를 기대하기 어려운 고령층이 노동 시장에 재진입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진다.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5월 경제활동인구 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고령층 55~79세 인구는 1598만3000명으로 전년동월대비 50만2000명 증가했다. 고령층 경제활동참가율은 60.6%로 전년 동월 대비 0.4%p 늘었다. 고령층 취업자는 943만6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31만6000명 증가, 고용률은 59.0%로 0.1%p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래 근로 희망자는 1109만3000명으로 전년동월대비 0.9%p 상승, 희망 근로 연령은 평균 73.3세로 0.3세 증가했다.경북도의 경제활동 인구 현황에 따르면 55~64세 예비노인은 69만2000명, 65세 이상 노인은 59만 9000명으로 집계됐다. 대구시의 경제활동 인구는 55~64세 예비 노인이 53만1000명, 65세 이상 노인이 22만800명으로 드러났다. 포항시의 노동 연령 별 취업자는 50~64세 9만1200명, 65세 이상 취업자는 3만5400명으로 조사됐다.김진홍 포항시지역학연구회 연구위원은 “한국의 고령층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노동 시장에 남아야 하는 현실은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지방정부는 은퇴 고령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의 선택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필요한 재교육, 재훈련의 역할을 지역의 대학과 협력 연대해 예비 고령자들의 전반적인 지식과 직업 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지역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영훈 포항 시니어클럽 관장 인터뷰 / 황영훈 포항 시니어클럽 관장“고령자 경험·능력 활용 가능한 양질의 일자리 마련돼야”저소득층·고연령 어르신 위한단순 노무직·공공근로에 집중경제적 자립·자아실현 충족 못해보상·근무형태 등 맞춤지원 기대 은퇴후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다양한 취미생활에 몰입하면서 평온한 노년을 보내는 것은 이제 꿈이 되어 버렸다.한국의 고령층들은 경제적 이유로 노동 시장에 계속 남아야 하는 상황이다. 평균 퇴직 연령은 49.3세지만, 실제 노동시장에서의 퇴직 연령은 72.3세다. 심지어 66세 이상의 노인 중 40.4%가 소득 빈곤에 처해 있으며, 국민연금만으로는 안정된 노후를 기대하기 어렵다.황영훈 포항 시니어클럽 관장은 고령근로자가 증가하는 원인에 대해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주된 원인이라고 밝혔다.1955~1963년 사이에 태어난 이 세대는 약 713만 명에 이르며,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은퇴를 시작했다는 것.“은퇴는 했지만 경제적 필요, 건강 개선, 사회적 참여 욕구로 인해 이들은 꾸준히 일자리를 찾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령 근로자가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황 관장은 고령 근로자의 사회적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이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현재 대부분의 노인 일자리는 저소득층과 고연령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익형 일자리에 편중되어 있어, 이들의 경험과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자리는 낮은 임금과 제한된 근로 시간으로 경제적 자립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고령 근로자들의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죠.”노인일자리의 대부분이 시청이나 동사무소에서 주선해주는 단순 노무직이나 공공근로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지속적이지 않은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무엇보다 노인 일자리 사업의 다양화와 전문화가 필요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 교육, 창업 지원, 사회적 기업 연계 등의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또한 사회참여 기회를 확대해야 합니다. 고령 근로자들이 교육,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원봉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황 관장은 또 노인들이 꾸준히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과에 따른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맞춤형 지원과 인센티브 제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유연근무제나 시간제 근무 등 다양한 근무 형태를 제공하고 보상(급여)도 성과에 맞게 현실화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노인들도 보람과 성취감을 가지고 일을 하죠.”황 관장은 노인일자리 문제는 단순히 노인에게 일자리를 시혜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의 경험과 경력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며 “지역 내 기관 및 기업과 협력해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고 성과를 토대로 성공모델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4-08-28

‘첫 국·공립 통합대학’ 국립경국대, 내년 3월 첫발 내딛어

지속적인 학령인구 감소와 지방기피 현상으로 지방 대학교들이 큰 위기를 맞으며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경북도립대와 국립안동대는 이같은 교육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통합을 추진해 왔다.두 대학은 마침내 전국 최초로 국·공립대 통합대학교를 출범한다. 교명은 ‘국립경국대학교’로 짓고 2025년 3월 새롭게 출발한다.국립경국대는 경북도와 지자체, 유관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경북도의 대표 거점 국립대학으로 지역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 전국 최초 국·공립 통합대학 출범경북도립대학교와 국립안동대학교는 학령인구 감소와 급격한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대학교육체제 전반의 변화와 혁신을 선도하고자 대학 통합을 추진해 마침내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2025년 3월 ‘국립경국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한다.통합의 주요내용은 △(학사조직) 학부 12, 학과 15, 대학원 4(일반 1/특수 3) 운영 △2025학년도 입학정원 1539명 선발 △(행정조직) 총장 1, 부총장 2, 4처 1국 1본부 1센터, 4행정실 운영 등이다.국립경국대학교는 전국 최초의 통합 국·공립 통합대학이자 경상북도 지역대표 거점 국립대학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안동, 예천캠퍼스가 소재한 지자체, 산업체, 공공기관과 유기적 네트워크를 기반한 통합대학으로서 경북 중심의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 지역 특화 산업과 연계한 인문, ICT, 바이오, 백신 및 공공수요 분야 특성화와 교육여건 개선을 통해 통합대학교의 경쟁력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안동캠퍼스는 인문, ICT, 바이오, 백신 분야를 특성화 분야로 전통문화 기반 K-인문 글로컬 인재양성, 농생명과 공학 간 융합을 통한 AgTech 인재양성, 지·산·학·연 협업 기반 경북백신산업 성장 견인을 목표로 한다.또한 학과 간 벽을 허물 수 있는 융합교육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인문사회·IT 단과대학 같은 융합단과대학을 운영하며 전공 분야가 상이한 전공을 통합한 광역 학부제를 추진한다.예천캠퍼스는 축산, 응급구조 등 공공수요 분야를 특성화를 통해 지역 공공수요 기반 인재양성을 통한 지역발전 선도를 목표로 한다. 향후 지역수요 기반의 새로운 전공 신설과 함께 글로벌 한글학교 등을 설치해 캠퍼스별 차별화된 특성화 전략을 추진한다.캠퍼스별 특성화를 기반으로 지역 맞춤형 인재 양성 및 청년들의 지역정주 유도를 통한 지역소멸 예방에 기여하고 다양한 계층에 맞춤형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대학의 책무를 다할 예정이다. □ 광역 학부제 통합모집국립경국대학교는 2024년 9월 9일부터 9월 13일까지 2025학년도 신입생 수시 원서접수를 실시한다. 선발인원은 정원 내 1521명, 정원 외 86명을 포함한 전체선발인원 1625명의 98.9%인 1607명을 수시에서 모집한다.특히 이번 수시모집은 작년 학과 단위 개별모집과는 달리 광역 학부제 통합모집을 통해 학부 내 전공선택권을 100% 보장한다.학부 입학생은 1학년 2학기에 학부 내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사범대학 전 학과, 간호학부, 성인학습자학부 제외)할 수 있으며 학과(전공)를 선택한 이후에도 자유전과제를 통해 학년 제한 없이 학과(전공) 변경이 가능하다. 국립경국대학교는 경북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혜택도 마련했다. 2025학년도 신입생을 대상으로 경북도에 주소를 둔(2025. 6. 30. 기준) 학생에게 1년간 등록금이 면제된다. 안동시·안동시의회와의 협약에 따라 안동시에 주소를 둔 신입생에게는 매년 100만 원의 학업장려금이 지원된다. 이외에도 천원의 아침밥 사업, 다양한 장학제도, 풍부한 해외연수 등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24-08-28

“예술의 사명은 그릇된 통념을 깨는 것”

문신구 감독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줄기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이다. 문 감독은 1990년대 중반 연극 ‘미란다’로 외설 시비에 휘말리며 법정에 서게 된다. 이 사건은 언론의 문화면보다 사회면에 더 자주 등장했다. 이후 연극 ‘미란다’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연극보다 영화가 더 충격적이라는 세간의 평을 들었다. 문 감독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어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던 충무로 시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10대 중반에 상경한 후 이만희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하면서 영화계 경력을 쌓으셨습니다. 주로 어떤 작품을 했나요?문신구(이하 문) : 닥치는 대로 했죠. 장르도 역할도 가리지 않았어요. 글도 쓰고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하고 잠깐 록밴드에서 보컬도 했지요. 초기에는 주로 노동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김지하의 민중극처럼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무대를 만들었지요. 공연하다가 경찰에 쫓겨 도망 다니기도 했습니다.배 : 199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극 ‘미란다’는 울산에서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문 : 군대에서 제대하고 울산에 간 적이 있어요. 울산 지역 방송국에서 영화음악을 소개하고 울산 지역 신문사와 왕가위 감독을 주제로 한 영화제도 개최했지요. ‘포스트 극단’을 창단해 공연하고, 포항과 경주의 연극인들과 교류했습니다. 경주의 이수일 선생은 연극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으로 중앙 무대에서도 인정하는 연극인입니다. 당시 나는 이 선생의 제안으로 연극 ‘무녀도’에 출연했고, 경주시립극단 창단에도 참여했습니다. 포항의 김삼일 선생도 그때 뵈었죠.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도전 의식이 생겼고,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문제작을 하기도 했지요. 배 : 제작하신 작품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문 :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 출연까지 한 첫 연극 ‘섹스’가 기억납니다. 남녀의 성에 관한 이야기로 공연이라기보다 해프닝에 가까웠어요.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공연했는데, 조명기를 담당하던 공무원이 공연 도중에 도망가는 일이 벌어졌어요. 상상도 못 한 일이 무대에서 펼쳐지니 너무 놀랐던 거죠. 결국 4회차로 기획된 공연이 무대 인사도 없이 종료됐어요. 공연장을 대관해 준 공무원은 좌천되고 난리가 났죠. 그리고 울산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1인극으로 각색한 ‘햄릿’을 올렸습니다. 오필리어 같은 등장인물은 인형을 만들어 무대에 세워놓은 전위적인 스타일의 작품이었죠.배 : 정말 실험적인 작품이군요. 세간의 화제가 된 연극 ‘미란다’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문 : ‘미란다’의 원작인 ‘콜렉터(The Collector)’는 납치범의 이상심리를 다룬 영국 소설이지요. 사랑을 얻기 위해 여자를 납치해서 감금하고 구애하는 내용입니다. 서울에서 연극 ‘콜렉터’가 무대에 올랐을 때 나도 그 작품을 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원작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원작은 납치범인 ‘콜렉터’와 피랍자인 ‘미란다’의 두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내가 본 연극은 ‘콜렉터’의 관점에서 만든 것이지요. 하나의 사건이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나를 지금까지 끌고 온 동기입니다.배 : 연극 ‘미란다’는 외설 시비에 휩싸이며 국내 공연 예술물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도 법정 다툼을 벌이던 때여서 ‘문학계의 마광수, 영화계의 문신구’는 예술계 에로티시즘 논란의 쌍두마차로 회자되었지요.문 : ‘성(性)’은 덕과 윤리, 제도와 종교로부터 죄악으로 취급당하던 시절이었죠. 많은 예술인이 그것은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했고요. 마광수 교수와 내가 세운 기록이 있어요. 대법원까지 변호사 없이 재판에 임한 겁니다. 당당하게 작품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연극 로리타(연출 문신구)의 포스터. 1990년대 문화계의 화두는 ‘성(性)’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작품이 끊임없이 생산되면서 외설이냐 예술이냐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성’은 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 문화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문신구 감독은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언론의 반응을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급문화가 옷을 벗는다. 연극, 무용, 문학, 미술 등 대중문화와 거리를 두었던 분야에서도 누드와 에로티시즘, 섹스를 다룬 작품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성을 포함한 모든 규제에 대해 너그러워진 우리 사회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관심’이라는 90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반영하고 있다. 정신은 고상하고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체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예술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연극의 경우 현재 서울 대학로에서는 ‘벗기기 연극’으로 이름난 존 파울즈 원작의 ‘콜렉터’가 ‘어떤 고백’ ‘콜렉터’ ‘미란다’ 등의 이름으로 네 군데 극단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 중 공연음란 혐의로 고발됐던 최명효씨(문신구 감독의 본명) 제작의 ‘미란다’는 11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앞으로 벗기기 연극은 예술적 당위성이 없는 한 처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고급문화 누드-에로티시즘 홍수’, ‘동아일보’ 1996년 6월 12일.배 : 언론에 노출된 횟수도 그렇고 화제성으로 보면 전성기였군요.문 : ‘미란다’로 서울에서 장기 공연할 때는 대기업 영상사업단에서 돈다발을 들고 나를 찾아왔어요. 세금도 많이 냈죠. 현금 장사인 연극으로 돈을 가마니로 끌어왔으니까요. 미국 공연도 잡혔는데 재판이 오래가다 보니 공연이 무산되고 계약금을 돌려주는 일이 생겼어요. 배 : 연극 ‘미란다’를 각색해 영화를 제작하셨지요.문 : 예술의 테마와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음란성만을 전제로 한 사법 판결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자 제안이 있었지만 마다하고 자비로 ‘미란다’를 영화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상영하기도 전에 기독교윤리실천위에서 고발을 하더군요. 간이 더 커져서 김종학 피디가 소개한 일본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콜렉터’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주인공 할 배우가 없어서 내가 출연했어요. 변태적 성향의 남자를 그린 영화인데 센세이션을 일으켜 지금도 회자됩니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어요. 1시간 50분이 흐르고 마지막에 “물 좀 주세요” 한 마디가 전부죠. 전위적이고 획기적이긴 한데 아무래도….배 : 전위적이고 획기적인 이야기에 끌리게 된 계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문 : 전위예술 그룹인 ‘제4 집단’ 선배들을 쫓아다니다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이 그룹은 한국 전위예술의 시초라 할 수 있지요. 광화문 광장에서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을 치르고, 희곡과 무대, 조명 등의 인위적 구조와 형태를 부정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많이 했어요. 내가 구상한 걸 누가 듣고 괜찮다는 반응이 나오면 덮어버려요. 다른 사람이 괜찮다고 인정하면 굳이 해야 할 이유가 뭘까 싶어요. 반대로 말도 안 된다거나 미쳤냐는 반응이 나오면 이거 건드려볼 만하겠구나 싶은 거예요. 구상부터 그렇게 출발하니까…. 시나리오로 투자받기는 애초에 글러 먹은 거죠.배 : 사회풍속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아쉬움은 없습니까.문 : 나는 늘 당대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아름다워야 할 성을 죄악으로 여기던 시대에 예술가는 그릇된 통념을 고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예술은 논쟁의 도마 위에 이슈를 올려 그 영향으로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때문에 욕을 먹고 손가락질도 당했지만 영광의 상처인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8-28

평생을 내어주며 속이 텅 비어버린 우리네 부모님 같은…

오동나무는 아니지만 오동나무와 비슷하다고 하여 개오동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잎이나 꽃의 생김새와 냄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하고 목재도 오동나무처럼 윤이 난다. 습기에 견디는 성질이 강하여 가구나 악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 또한 비슷하다. 둘 다 양지에 사는 속성수로서 수명이 짧은 선구성 하록 교목이다. 개오동나무는 능소화과로서 긴 콩꼬투리를 닮은 삭과의 길이가 20~35cm이지만, 현삼과의 오동나무는 둥근 콩 모양의 삭과가 5cm 정도로 완전히 다른 종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수인 개오동나무 노거수가 경북 청송군 부남면 홍원리 547번지에 살고 있다. 나이 450살, 키 14m, 가슴둘레 4.25m로 민속문화와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12월 23일에 천연기념물 401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고 있는 귀한 민속 식물자원이다. 개오동나무를 만나러 갔다. 마을로 들어가는 첫째 나무는 아직 젊은 청춘 나무이고 둘째, 셋째는 늙은 부모님이랄까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이다. 나무의 모습에서 우리 세대의 부모님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무한한 사랑을 주시면서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입는 옷이며, 먹는 음식이며, 자는 잠자리조차 변변치 못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먼저 자식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근검절약하여 한푼 두푼 모든 돈은 모두 자식을 위한 일에 쏟아부었다. 문풍지가 떨면서 소리치는 추운 겨울, 따뜻한 방구들 아랫목은 늘 자식들에게 양보하고 자다가도 깨어나 포근한 솜이불을 자식 몸을 덮어주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그런데 우리는 우리만을 위해서 고집을 부렸다. 더 좋은 것, 더 풍족한 것을 원했다. 그러다 보니 늘 부모님을 원망하고 그 못남을 불평했다. 떼쓰고 대꾸하고, 심지어 울고불고하면서 항의의 표시로 입을 닫고 침묵하거나 심지어 가출까지 했다. 부모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친구와 비교하고 이웃과 비교하면서 못난 부모님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가슴을 후며 파는 아무런 생각도 죄의식도 없이 막무가내로 철없는 행동을 해 댔다. 이제 속이 시꺼멓게 타버려 아무것도 내어줄 것도 없다. 개오동나무 노거수처럼 몸은 찢어지고 속은 텅 비었다.개오동나무 노거수 역시 가지는 욕심을 내어 어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빼앗으려다 이제는 한 몸에서 태어난 가지가 둘로 나누어졌다. 꼭 자식들이 부모님 재산을 더 가지려고 싸움하다 의절한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노거수 또한 젊은 시절에는 우람하고 멋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내어줄 것 아니 내어줄 것까지 다 내어주고 자신은 허기와 외풍에 견딜 수 없어 겨우 주민들의 외과 수술과 지팡이 선물의 도움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과거의 영광을 안고 추억하며 굳건히 살아가고 있다.봄이 되면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더운 여름을 견디면서 가을이 되면 잘 익은 긴 콩깍지 탄생시킨다. 겨울이 되어도 긴 콩깍지 열매 떠날 채비도 하지 아니하고 나뭇잎처럼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어미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삭막한 겨울까지 부모의 품에 안겨있다. 오늘의 젊은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열매가 안쓰러움을 넘어 얄밉기까지 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결혼과 출산을 늦추거나 부모님 품에서 살아가는 캥거루족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조어가 생기고 있다. 부모님은 노후의 자신 몸조차 보전키 어려운데 이 또한 무슨 업보란 말인가.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일제 강점기 시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라도 개인도 곳간이 텅텅 비어 자력으로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형국이 되었다. 침략자 일본은 시도 때도 없이 갖은 명목을 붙여 공출을 요구했다. 이 모두가 못 배운 탓이라 여기고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데 희생했다. 자신의 노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이 성공하고 행복한 모습만 꿈꾸며 살아왔다. 장성한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안갚음에는 인색했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외면하기까지 하기도 한다. 노거수는 외세의 침략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민들은 노거수를 경외하면서 보살펴 주었다. 침략자들도 물러가고 우리 자력으로 국력을 키우고 살만해지니 이제는 노거수를 그전처럼 대해주지 않고 있다.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경제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눈치까지 주고 있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천연기념물 홍원리 개오동나무 노거수는 마을 주민들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서울에서 고향인 청송 홍원리까지, 다시 대구에서 서울까지 걷으면서 길 위에서 만나는 서민의 이야기와 지난 역사를 오늘날 재해석한 ‘남듬길(進處道)’의 저자 조대환 변호사가 이곳 홍원리 출신이다. 험난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려 했던 조 변호사의 올곧은 애국충정을 책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자서전을 넘어, 권력과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인간적 고뇌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 그의 부모는 자신의 중한 병을 돌아가실 때까지 숨기면서 자식이 나라의 공무에 전념하게 했다. 또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심상택 이사장도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보고 자란 홍원리 출신이다. 산림청 산림복지국장으로 재임 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산림문학회 활성화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상투를 고집하고 사신 분으로 ‘상투할배집’이라 불리었다 한다. 시골 농촌의 어려운 환경에 자식을 공부시키고 또 공무에 전념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당연시한 이러한 힘은 지난 나라 잃은 슬픈 역사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우국 충절이 아닐까.우리 부모 세대의 어르신들은 오천 년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보릿고개라는 헐벗은 삶 속에서 인재를 양성하여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이어 민주화도 이루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양날의 칼처럼 좀처럼 양립하기가 어렵다. 이를 인재 양성으로 극복한 우리 부모 세대들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지혜가 돋보인다. 나라 발전에 공헌한 돌아가신 어르신들에게는 영혼을 위로하고 살아계시는 어르신들에게는 예와 효를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이웃 꽃밭고개라는 화전등(花田嶝) 마을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있다. 적원일기(赤猿日記)라는 청송지역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의 진중일기가 청송에서 발견된 것도 우연만이 아닌 것 같다. 청송에서 공직에 근무할 때 항일 의병기념관 건립에 정성을 쏟았다. 청송은 자연도 수려하지만, 우국충정의 고장임을 새삼 느꼈다. 조대환 변호사 부모님 같은 분이 어디 한 분밖에 없겠는가. 대부분 부모님이 다 그러하실 것이다.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뒤로하고, 아내와 함께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을 방문하여 항일 의병 역사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부모 세대 어르신들의 희생정신에 고개를 숙였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은…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313-1에 위치했다. 2011년 전국 항일 의병들을 추모해 ‘항일의병기념공원’이 화전동에 세워졌다.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6월 1일이다. 2022년 1월부터 경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연락처는 054-870-6550.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다. 시설물은 창의루(倡義樓), 동재 인의예지재(仁義禮智齋), 서재 효제충신재(孝弟忠信齋), 충의사(忠義祠) 등. 2701개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무명의병용사충혼탑과 2개의 명각대(名刻臺)가 있다.적원일기(赤猿日記)는 청송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 2일부터 본진의 활동이 종료된 5월 25일까지 85일간의 청송의병 활동을 김숭진(金崧鎭), 심의식(沈宜植), 오세로(吳世魯), 서효격(徐孝格) 등이 매일 상세히 기록한 진중일기다./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8-28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도전 정신’ 명장 반열에 오르는 비결 아닐까요

“도전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습니다.”기술은 단순 개인의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타 국가간 경쟁, 동종 회사간 경쟁을 하는 기술력은 생존경쟁에 큰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전 정신,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필요하다.세계 최고수준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갖춘 2019년 ‘포스코 명장’에 선정된 오창석(61·사진) 포항제철소 기술컨설턴트.오 명장은 제강 연속주조분야 최고기술자로 연주기롤(roll) 직경을 확대해 교체시기를 늘려 원가절감을 이끌어 냈다. 특히 그가 개발한 연주기 몰드 실링재는 조업사고를 제로화 하는 등 조업 경쟁력 향상과 안전 조업현장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 오 명장이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한 노하우를 본지에 전했다. - 금속재생산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어릴 때부터 철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농번기가 끝나는 시점 마을 한구석 이동식 대장간(작은 철공소)이 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동네 마을 어르신들이 낫, 호미, 도끼 등 농기구들을 가져왔다. 대장장이의 손에 의해 불에 달구어 지고 다듬질 돼 날카롭게 새로운 도구로 개선되는, 변화무상한 철에 대해 호기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경북 청송에 있는 부곡초등학교와 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포철공고 금속 분야(제강과)에 입학한 것이 금속재생산을 선택한 큰 계기가 됐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고등학교시절 교련복 어깨 와펜(마크)에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글귀가 있었다. 내 시대의 시대적 사명이라 할까. 늘 마음속엔 대한민국을 우리가 새롭게 더 발전시켜야 된다는 다짐을 했다. 지금부터 41년 전인 1983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를 했다. 어린 약관의 나이(20세)로 포스코 생산현장에 근무를 하면서 선배로부터 그 동안의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면서 아직도 개선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음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불합리 업무를 반드시 개선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특허(노하우)개발과 제안 및 개선과제 프로세스를 통해 하나하나 해결을 해 왔다. 2002년 제강부 29주년기념 ‘올해의 연주인’, 2005년 제강부 ‘우수제안 왕’으로 선정됐다. 큰 보람을 느꼈다. 앞으로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며,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도 함께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 씨름 선수로도 활동했다고.△어릴 적 친구들과 만나서 강가에서 물놀이와 씨름을 하면서 놀이를 하는 것이 농촌의 유일한 큰 즐거움이었다. 방학 때면 소를 마을 뒷산에 풀은 뜯어먹도록 하고 우린 숨바꼭질 및 씨름을 하면서 해가 지는지도 모르고, 또 송아지가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르고 놀이에 정신이 빠지기도 했다. 소는 농촌의 일꾼이자, 생활을 함께하는 또 다른 가족이다. 가보1호 및 재산증식과 더불어 집안 곳곳에 생활의 훈훈한 온기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3년 포스코에 입사를 하면서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몇 달 동안 월급을 모아 송아지 2마리를 선물로 사 드린 적이 있다. 초·중학교 학교별 대항씨름대회가 있으면 선발이 돼 대회 우승을 하면 담임 선생님이 자장면 한 그릇을 사 주는 것이 그 때 당시 유일한 희망이었다. 포철공고에 오면서 고등부 도민체전 선발전에 참여 대표선수로 선발돼 당시 1981~1982년 영일군 대표를 맡았다. 포항시로 통합이 되면서 포항시 대표선수로, 경북도민체전에 고등부 선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포항시 대학부·청년부·장년부씨름왕을 거치면서 포항시씨름협회 전무 및 부회장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현재 포항시씨름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경북도 씨름협회 부회장을 맏아 경북씨름발전에 기여로, 지난 17일 이철우 경북도지사로부터 표창패를 받기도 했다.- 고향인 청송에 포스코를 더 사랑하는 어르신들이 있다고.△청송군 진보면 어르신들께서는 대한민국을 선진화로 발전하는데 1등 공신인 포스코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오씨 종친회’ 때 고향을 빛낸 ‘자랑스러운 율리인 1호’로 선정하는데 포스코명장인 나를 첫번째로 선정했다. 포스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아, 고향 어르신들께 감사드린다. 포스코인으로 회사에 오래도록 근무하는 것이 더욱 보람있고 흐뭇함을 느낀다. - 제강의 연속주조 공정과 흥미는.△제강 분야 연속주조 공정은 금속을 용해해 연속적으로 주조하는 것이다. 주로 철강 산업에서 사용되며, 이 공정은 용융된 금속을 연속적으로 주형에 주입해 긴 슬래브, 빌렛, 불름 동의 형태로 만드는 과정을 포함한다. 연주 공정은 생산 효율성을 높이고,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키며, 비용을 절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물을 다루는 연속 주조작업은 짧은 공정 내 많은 변화(쇳물→슬라브)들이 있는 공정이라 관심만 가지면 많은 특허 및 노하우를 개발 가능한 공정으로서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오랜 근무기간에도 싫증이 나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기술개발에 관심과 연주공정작업 흥미가 더 있기도 하다.- 우수제안 1등급 포상금 전액을 기부했다는데.△연속주조공정 조업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고 원가절감에 크게 기여해 사내 우수제안 1등급에 채택됐다. 당시 포스코 창립 51년 중 전사 12번째 나온 우수제안이라서 더 감회가 깊다. 1등급 포상금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하고 싶어서 포상금 전액(500만원)을 기부했다. 그 당시 강원도에 큰 산불로 고생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포스코 1%나눔봉사 정신으로 전액 기부를 해 강원도지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 어떻게 ‘포스코 명예의 전당’에 올랐나.△처음부터 꼭 명장이 되려고 노력한 건 아니었다. 회사 생활 본연의 업무를 충실히 하고 오랜 기간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 협업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원만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평소 고질적 문제점을 해결하고 많은 불합리 개선 과제의 성과들이 나타났다. 연주공정의 안전과 품질향상, 제조공정의 생산 원가절감 등 특허(노하우)개발로 인한 연주 조업기술개발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또한 제강, 연속주조공정은 쇳물을 다루는 공정이어서 안전 및 조업사고나 품질사고의 위험이 있다. 작업공정의 개선 및 방법의 개선에는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개선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개선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을 설득해서 표준시험 Process를 거쳐 이론적 이해를 돕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 20~30건의 특허 개발을 바탕으로 불합리함을 개선해 우수제안 1, 2등급 선정 포함 약 227건 과제, 32억원/년 원가 절감 과제수행으로 2017·2019년 포항제절소 우수제안 왕 2회를 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포스코 (본부장)사장표창 및 포스코 창립기념 우수사원 표창 등을 받았다. 이로 인한 크고 작은 노력과 그동안 함께한 (포)제강부 및 2연주공장 동료, 직원 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2019년 7월 포스코명장에 선정됐다. ‘포스코 명예의 전당’에 영구 헌액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고.△산업현장의 오랜 근무기간 동안 불합리 업무와 설비개선으로 근로자의 복리 증진과 산업발전에 많은 기여를 인정받아 ‘2023년 근로자의 날 유공 정부포상 시상식’서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은 함께 노력해 온 회사 동료 및 선후배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선후배들에게도 기회가 된다면 큰 성과와 업적을 올리는데 많은 노력과 협업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본인이 근무하는 회사의 주인라는 마음가짐과 자부심을 갖고 생활하도록 부탁을 드리고 싶다. 본인이 개발하고 연구하는 일들이 더 가치 있게 사용이 될 수 있도록 더 다듬고 관리를 잘해 기술의 고유성(보호)을 지닐 수 있도록 특허 등록 관리할 것을 추천한다. 또한 세계최고 철강사인 포스코에 나의 크고, 작은 특허 기술이 적용이 돼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존감이 넘치며 회사 생활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경험과 폭 넓은 지식을 쌓고, 본인 고유의 기술력을 갖추고, 중장기 계획을 세워 목표로 하는 많은 공적이 쌓이면 본인 분야에 명장의 반열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의 포부는.△후진 양성을 위해 지역사회에 재능 봉사활동과 불합리 업무개선 및 신기술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금속재료 분야의 소재 연구과정을 통해 작년 재료공학 박사를 졸업했다. 더 많고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한 기술력을 쌓고 훌륭한 후진 양성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오랜 산업현장의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자료를 만들어 공유하고 대한민국 산업현장을 더욱 기술 선진화로 변화시키는데 주력하겠다. 제선, 제강, 압연, 금속재료 등 7종류의 금속관련 도서를 만들어 포스코 도서관에 기증했다. 또 기술(전문)대학 교재로 사용을 해 후배들의 기술력향상에 지원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공계 고등학교 및 전문대에 특강을 통해 차세대 대한민국산업을 이끌어 갈 우수인재들이 많이 배출이 될 수 있도록 마인드 교육과 기술교육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아울러 (주)포스코 산하 국내외 법인 회사에도 필요할 시 기술 전수와 지도를 할 예정이다. 미래 꿈나무들이 산업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홍보에도 적극 나설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대한민국 젊은 인재들이 오래도록 행복하고 보람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산업현장을 더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만드는데 최대한 뒷받침하겠다.오창석 포항제철소 금속재생산 포스코명장은△ 포철공고 졸업△ 포스코 1983입사~현재 41년 근무 중△ 우수숙련기술인(금속재료)△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금속재료)△ 포항시 및 경북도 최고 장인(금속재료)△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 수훈△ 재료공학 박사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8-27

평화로운 땅에 우뚝 선 깔끔하고 단아한 무열왕릉

묘호(廟號·왕이 죽은 후 살아생전의 공덕을 기려 붙인 명칭) 태종.시호(諡號·이전 왕이 사망한 후 다음 왕이 선대 군주에게 붙인 이름) 무열대왕.휘(諱·선조의 생전 이름)는 김춘추.비단 신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중고교 시절 졸면서 역사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이름 무열왕 김춘추(603~661).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아들 문무왕(김법민)이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게 초석을 깔아준 사람이다.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삼척동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무열왕 김춘추의 능(陵)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선도산 입구에 자리해 있다. 고문헌은 아주 짤막하게 그의 유택이 위치한 지역을 지목했다. 이런 문장이다.“661년 음력 6월. 59세로 무열왕이 죽었다. 그는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묻혔다.”추정하면 7세기 중반 신라엔 영경사라는 이름의 규모가 큰 절이 있었고, 그 절 북쪽이 여러모로 길한 땅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터. 왕의 장지(葬地)를 아무 곳에나 쓰는 경우는 없는 법이니까.법흥왕 때 불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던 신라는 선도산 일대를 서방정토(西方淨土)라 부르며 ‘부처가 다스리는 평화로운 땅’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서방정토 들머리에 존경 받는 왕의 시신을 매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 ‘서방정토’에 잠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선도산 초입엔 공원 형태로 커다랗게 조성된 무열왕릉(사적 20호) 묘역이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 꼭대기에서 서라벌의 서악(西岳)을 내려다보는 형상이라면, 무열왕릉은 서악 입구를 지키며 우뚝 선 모습이다.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 신라가 성스럽게 여겨온 땅에서 영원한 잠에 든 무열왕 김춘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의문에 간명하게 답하는 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래와 같은 설명이다.“태종무열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이름은 김춘추로 진덕여왕 사후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을 열었다. 즉위 전부터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를 직접 오가며 탁월한 외교역량을 보여주었고, 김유신과 연합해 신귀족세력을 형성하여 보다 강화된 왕권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토대를 마련한 후 재위한 지 8년 만에 사망했다.”여러 가지 취재를 위해 지난 몇 년 사이 경주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무열왕릉을 네댓 번 찾았다. 그때마다 ‘참으로 깔끔하고 단아한 고분이구나’란 생각을 했다.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위 풍광도 좋았다. 다른 왕릉 주변에선 볼 수 없었던 귀부(龜趺·거북이 형상의 비석 받침돌)도 이채로웠다.무열왕은 신라 992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왕 중의 왕’이라 불러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역사학자가 별로 없을 정도의 행적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학식과 외교 협상력은 탁월했고, 잘생긴 외모까지 돌올했다.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룬 7세기 중후반을 다룬 각종 학술논문에서도 무열왕 김춘추의 ‘튀는 행적’은 여러 차례 발견된다.“668년에 문무왕은 고구려를 평정하고 선조묘 종묘에 개선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태종(무열왕)에게 ‘일통삼한(삼국통일)’의 공덕을 올렸다 일통삼한은 삼한이라는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의미로 신라의 왕이 삼한의 천자(天子·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라는 것을 뜻한다.”위의 서술은 경북대 사학과 안주홍의 논문 ‘신라 태종(太宗) 묘호(廟號)와 일통삼한 의식’ 중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란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문무왕은 무열왕의 아들. 하지만,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터무니없는 업적을 억지로 부풀려 아버지 앞에 바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 백성들의 비웃음을 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므로. ◆ 고문헌과 학술논문에서 보여지는 무열왕은…무열왕은 신라 내부에서만이 아닌 당시로선 군사·경제·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 당나라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조금은 우스운 비유가 될 수 있겠으나, 지금의 보이 밴드가 일으킨 ‘한류 열풍’ 같은 인기였다.동국대 사학과 김상현의 논문 ‘일연(一然)의 일통삼한(一統三韓) 인식(認識)’에서도 무열왕에 대한 국내외적 호평은 간명하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형태다.“당나라의 황제는 김춘추의 풍채를 보고 ‘신성지인(神聖之人·고결하고 거룩한 사람)’이라 칭찬했다. 무열왕이 통치하던 시대를 백성들은 ‘성대(聖代·어질고 현명한 왕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불렀다. 이는 태종무열왕에 대한 서술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후략)”이처럼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탁월한 정치·외교적 성과와 영토 확장이라는 통치자로서의 업적을 보여준 사람이 묻힌 곳이라면, 그 시절 선도산과 서라벌 서악이 가졌던 위상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지난 7월 하순. 무열왕릉을 찾았을 땐 무시무시한 폭염이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어지럽게 매미가 울고,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괜한 짜증과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무열왕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풀밭 그늘에 다리를 뻗고 앉아 1400여 년 전 드라마나 영화 같았던 신라의 역사를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을 듯한 더위도 ‘한순간 지나가는 짧은 고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 무열왕 외에도 4명의 신라 왕이 묻힌 선도산무열왕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도산 입구 묘역엔 적지 않은 여행자와 경주시민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드나든다. 남녀노소 불문이다. 그들을 위해 무열왕릉의 간략한 개요를 ‘위키백과’를 인용해 소개한다.“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4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사적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능으로 보여지고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이다.”세상 인간 대부분이 그렇듯 무열왕 김춘추도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몸 안에 지니고 살았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여타의 인물들처럼 호오(好惡)가 엇갈린다.“김춘추가 외교관일 때 일본과 중국은 그를 ‘잘생긴 외모에 빼어난 화술을 구사하는 사내’로 기록한다. 동맹을 맺었던 중국만이 아닌 적대국가였던 일본도 김춘추를 좋게 평가한 것”이라는 호평과 함께 “삼국통일 과정에서 대동강 이북을 포기한다는 협약을 당나라와 체결했고,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민족주의 성향 사학자들의 비난도 받고 있는 것.어쨌건 세간을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무열왕은 자그마치 136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선도산 자락에 누워 웃지도, 울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다. 그 잠은 편안했을까?선도산엔 무열왕릉 외에도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다. 당연지사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거기도 가봐야 할 터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8-27

대구 ‘자갈마당’ 사례 처럼 포항도 이제 본격 재정비 나서야

대구에서 110년간 성업했던 성매매업소 집결지인 ‘자갈마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약 6년이 지났다. 이곳은 현재 원도심 개발사업을 통해 대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섰다.이전 성매매 현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성매매집결지가 평범한 주택가로 변화하기 까지는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반발과 반대 집회,  철거에 이르는 과정 등 시행착오를 겪은 후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현재 이곳은 주거복합단지에 입주가 한창 진행 중이며, 원도심의 개발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대구시 성매매 집결지 ‘자갈마당’ 정비의 역사를 살펴보고 포항시 성매매 집결지 ‘중대’의 개발 대책을 모색해봤다. △습지 메우려 자갈 깐 것이 지명유래자갈마당은 1909년 중구 도원동 일대에 설립된 성매매집결지를 말한다.원래 이곳은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몰려와 집단 거류지를 형성할 때 공창을 함께 들여온 것이 시초라고 한다.자갈마당이라 불리게 된 것은 집창촌 여인이 달아나면 잡으려고 자갈을 깔아 소리가 나도록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 자갈마당을 ‘넓은 마당’이라고도 했다. 저습지대로 쓸모없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6. 25사변 이후 대구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됐다.이곳은 대구의 북쪽 관문구실을 한 교통의 중심지가 돼 이 일대 전체가 넓은 장터로 변했다. 그래서 한때는 ‘넓은 마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이곳은 땔감(주로 소나무 잎)과 구들장을 팔기 위해 인근 시골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그러나 비만 오면 땅이 질어 대단히 불편했다. 주민들은 대구읍성을 철거할 때 나온 돌로 비만 오면 질퍽한 습지를 메워서 자갈을 많이 깔아놓게 됐다. 그 후에 사람들은 ‘넓은 마당’ 대신‘자갈마당’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자갈마당은 대구시의 대표적인 성매매 집결지인 데다가 집결지에서 300m도 채 안 떨어진 곳에 대구 수창초등학교가 있고 인근의 옛 전매청 자리에 대구역센트럴자이 아파트가 당시 신축 중인 지라 대구시 및 많은 시민들이 폐쇄를 원했다. △성매매 특별법 이후 쇠락의 길 걸어 자갈마당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성매매방지 특별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특별법 제정 이전에는 약 350명이 일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제정 이후에는 100여 명으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2015년부터는 도시철도 3호선 개통과 대규모 아파트 건설로 인해 집결지 주변의 유동인구가 늘면서 ‘자갈마당’의 폐쇄를 요구하는 민원이 빗발쳤고, 이는 집결지 정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대구시는 도심부적격시설(1만 4000㎡)과 상가 등 1만 9000㎡를 재개발해 주거시설과 공원을 조성하려고 했다. 대구시에 따르면, 당시 ‘자갈마당 재개발’에는 민영과 공영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대구시는 ‘민영·공영 병행’이라는 강수를 던지며 사업 추진에 나섰다. 그 결과 2019년 1월 ㈜도원개발이 부지를 매입해 사업 승인을 신청하며 본격적인 개발에 발을 뗐다. △폐쇄를 위한 노력시가 재정비에 착수하자 자갈마당에 위치한 건물주들은 쉽사리 수긍하지 않았다. 저항도 심했다. 하지만 시의 의지는 확고했다. 물러서기보다 각종 제제 수단을 내세워 압박하며 강력한 정비 의지를 내세웠다. 지속적인 대화가 오갔고, 결국 중구 도원동 일대를 민간 주도로 재개발한다는데 합의를 이끌어 냈다. 건물주 80% 이상 매수 동의를 받은 시는 이후 재개발에 속도를 냈고, 성공적으로 일대를 깔끔히 정비했다.당시 시는 건물주와는 민간개발로 합의를 했지만 성매매 여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생존권을 내세운 이들이 반발한다면 정비도 쉽지 않지만 해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 뻔해서였다. 예민한 문제이기도 했고 조심스럽기도 한 이 사안에 대해 시는 과감한 지원이라는 카드를 꺼냈다.먼저 시는 2016년 자갈마당을 폐쇄하기 위해 성매매 피해자 자활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성매매 피해 여성에게는 10개월간 생계유지비 월 100만원, 훈련비 300만원, 주거 이전비 700만원 등 최대 2000만원을 지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외에 타 기관의 이런저런 지원책도 함께 제시되며 힘을 보탰다. 그 결과, 순조롭게 관련 일이 추진됐다. 대구시에 따르면, 조례 제정 이후 2018년까지 57명이 상담을, 27명이 자활 지원을 받았다. 전체 성매매 여성 추정인원 110명 중에서 4분의 1 정도는 시의 지원을 받은 후 현장을 떠났고 5명은 새로 취업에 성공하기도 했다.대구 여성인권센터 관계자는 “성매매 자체가 불법이다 보니 개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부터 자활 사업을 통해 성매매 여성의 정착을 유도하고 있었는데 시 지원책이 나오니 순순히 그걸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이는 자갈마당 사업장 철거 전에 이미 성매매 여성 이주가 모두 완료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110여년을 버티어 온 자갈마당은 그렇게 해서 2019년 5월 모든 영업을 중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갈마당의 현재 모습대구시는 이 일대의 대구 도심부적격시설(1만4000㎡)과 상가 등 1만9000㎡를 재개발해 주거시설과 공원 조성을 계획했다. 2019년 6월 4일, 시행사 ㈜도원개발에 의해 자갈마당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1달가량 진행된 철거 현장에는 많은 주민들이 나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 찬반 논쟁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이 한잔 후 내뱉는 입담에 불과했을 뿐 개발은 계획대로 진행됐고, 자갈마당 부지에는 현재 주상복합아파트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역사 속 자갈마당은 과거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별개로 이 일대 원도심 개발의 원심력 작용을 하기도 했다. 그간은 그곳이 대구 지역 최고 번화가인 동성로로 도보로 이용이 가능하며 대구역도 인접해 있어 대구 지역에서도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지로 입지를 평가받았었지만 자갈마당 존재 때문에 일대 개발은 엄두도 못낸 채 있었다. 그러나 자갈마당이 없어지면서 일대는 입지적인 장점 때문에 재개발, 재건축, 도시정비사업 등이 잇따랐고 지금은 대구 신흥 주거지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포항도 과감한 결단을포항 성매매 집결지 ‘중대’ 역시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중앙동에 있어 대구 ‘자갈마당’과는 얼추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그러나 이 문제 처리에 있어선 대구시와 포항시 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대구시는 철거 원칙 아래 대책을 수립한 후엔 과감하게 또 속전속결로 이 사안을 정리했다. 반면 포항시는 다소 미지근하다. 현재의 성매매집결지를 그대로 놔두고 3m 길 바로 건너편 구 포항역사에 70층 높이의 주상복합 건물, 그것도 5성급 호텔 까지 입주를 내용으로 하는 인허가를 내줬다.기자는 이번에 포항성매매 집결지를 취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고 호텔이 문을 열면 외국인들이나 관광객들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성매매 실태를 보고 포항을 어떻게 생각할까’ ‘성매매 집결지 건축주는 그렇더라도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은 또 뭔가. ‘왜 다른 곳은 다 정리하는데 포항은 미진할까’ 참으로 난해한 질문들이 수없이 오갔다. 그러나 취재 기간 내내 어디 한군데서라도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성매매집결지는 그 도시의 품격 및 품위와도 연결된다.여성친화도시 포항, 100만 포항을 기대한다면 이제 포항성매매집결지 정도는 정리할 때가 됐다. 현장에 답이 있다고들 했다. 글로벌 포항을 외치는 이면에는 아직도 60∼70 대 여성이 성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포항이다. 그런 점에서 대구의 자갈마당 사례는 포항에게 좋은 시금석이다./김재욱 기자·성지영 인턴기자끝

2024-08-26

철강업계도 AI 홀릭, 정확하고 안전하게 작업...AI 제철소로 변신한 포스코

사람의 개입이 없는 자동화가 실현된다.전 세계적인 인공지능(AI) 붐이 일면서 철강업계도 고위험·고강도 현장에 산업용 로봇을 도입한다.안전한 현장과 생산성 향상을 제고하고, ‘인텔리전트 팩토리’ 구현을 지원하기 위함이다.글로벌 업황 둔화 속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산업용 로봇과 AI 기술의 적용이 핵심요소라는 판단에서 해당 분야에 대한 회사 차원의 투자와 인력육성 및 인재 영입을 강화해 나간다.포스코는 주력 생산현장을 대상으로 로봇을 우선적으로 적용해 무엇보다도 안전한 현장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CCTV를 활용한 육안작업 자동화, 조업상황 및 소재품질 상시 모니터링 등에 AI기술을 접목시켜 운전자의 작업 부하를 줄이고, 생산성과 수익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AI로 코크스오븐 연소 제어코크스는 제철소에서 쇳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연·원료로, 코크스의 품질은 곧 쇳물의 품질과 직결된다. 코크스는 코크스오븐에서 석탄을 가열해 만들어진다. 이때 코크스를 어떻게 가열하느냐에 따라 코크스의 품질이 결정된다.열화상 이미지와 AI를 활용한 코크스오븐 자동 연소 제어 시스템은 열화상 이미지를 이용해 코크스의 건류 상태를 판단한다. 이를 딥러닝으로 학습시켜 AI가 적정 연소량에 맞춰 연소를 제어하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다. 시범 도입을 통해 70만 개 데이터를 실시간 검증한 결과, 기술 정합성이 95%가량으로 높게 나타나 실제 조업에서도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포항제철소 2코크스공장은 3기 코크스오븐에 자동 연소 제어 시스템을 일부 활용하고 있다. 연소 제어는 작업자가 수동으로 하되, AI가 제안하는 적정 연소량을 작업에 활용하는 것이다.시스템을 실제 조업에 적용한 결과, 코크스 품질과 연소 효율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열화상 카메라로 코크스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해 품질 편차를 줄이고, 코크스 제조에 필요한 최적의 연소량을 도출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었다. 안정적인 연소 제어를 통해 질소산화물(NOx) 배출량 또한 감소시킬 수 있어 대기오염물질 저감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까지 자동연소제어시스템은 작업 보조용으로만 활용되고 있지만, 향후 포항제철소는 시스템만으로 자동 연소 제어가 가능하도록 사용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2코크스공장 3기 코크스오븐 외에도 시스템 적용 개소를 4기, 5기 코크스오븐 설비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 작업 데이터 재학습하는 AI기술 개발철강제품은 두께와 성분 등 고객사의 주문사항에 맞춰 출하되는데, 생산을 거친 제품의 형상이 고객사의 요구 규격을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교정 공정에서 이를 바로잡게 된다.가장 두꺼운 제품을 생산하는 후판공장에서는 별도의 온도조정 없이 생산된 제품을 롤(Roll)과 롤 사이로 통과시켜 물리적인 힘으로 제품을 정정하는 ‘강력교정’ 방식을 사용한다. 현재까지의 강력교정은 제품의 규격과 변형 정도에 따라 압하량이 정량적으로 정해져 있어, 정해진 데이터에 맞게 입(入)측과 출(出)측의 롤 사이 간격을 조절해 실시해왔다.‘후판 강력교정 자동화 모델 재학습 기술’은 단순 정량 데이터 적용을 넘어 AI가 이전 조업 결과를 바탕으로 재학습하고, 보다 효과적인 압하량을 스스로 찾아 교정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술이다. 재학습 기술을 적용한 이후 포항제철소 후판공장에서는 교정 전과 비교한 교정 후 평탄도 형상관리 지표가 10% 이상 개선되는 등 효과적인 정정작업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고강도강 교정 시 제기됐던 설비사고 위험성도 크게 줄었다.◇ ‘지게차 안전제동 AI시스템’ 현장도입고용노동부에서 공개한 산업재해 분석정보에 따르면, 제조업 12대 사망사고 기인물 중 지게차에 의한 사망사고가 1위로 20%(632건 중 124건)를 차지하고 있다.‘지게차 안전제동 AI시스템’은 영상인식 기술과 자동정지 속도제어 기술 등이 적용돼 충돌에 따른 재해를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지게차가 주변 작업자에게 접근하면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지게차가 단계적으로 자동 정지한다. 충돌 위험 거리가 6m 이내일 경우 알람이 울리고, 4m 지점에서는 감속이 시작되며, 2m 이내로 작업자가 근접하면 지게차가 자동 정지한다.해당 기술은 운전자 또는 작업자가 스스로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돌발상황 발생 시 지게차 속도를 자동으로 제어해 지게차 충돌에 의한 재해를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제철소 열악한 현장과 다양한 지게차 Maker에 ‘지게차 안전제동 AI 시스템’을 적용한 실증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2024년부터 포스코 DX는 (주)태양전기와 협업해 포스코 뿐만 아니라 포스코그룹 전체로 적극 확산할 계획이다. ◇ Smart CCTV와 AI기술 융합으로 선재제품 라벨 검수작업 자동화포항제철소에서 생산돼 고객사로 출하되는 선재, 코일, 후판 등의 제품 생산 정보와 차량에 상차된 현품 정보의 일치 여부를 검수하는 검수장이 있다. 만약 제품라벨이 검수위치의 반대편에 부착될 경우, 검수자가 차량에 탑승해 직접 육안으로 검수를 실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검수자가 MES 송장정보와 제품라벨을 육안으로 대조하기 때문에 휴먼에러 발생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고객사의 클레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적재 차량 위에서 검수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생산기술부 제품출하섹션은 포스코DX와 협업해 Smart CCTV를 활용한 ‘선재제품 라벨 검수 자동화’ 기술은 12대 카메라의 회전과 줌 기능을 제어하는 ‘추적좌표 영상분석’ 모델이 차량에 불규칙하게 적재된 선재제품의 라벨위치를 자동으로 추적해 문자를 인식한다. 인식된 문자는 MES 데이터와 비교한 뒤 검수 결과를 시스템으로 출력한다.해당 스마트 기술은 객체인식 AI 알고리즘을 활용한 것으로, 고정된 화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AI모델이 직접 CCTV의 각도와 줌 기능을 제어해 라벨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적용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개발된 객체인식 AI 알고리즘을 기존에 설치된 CCTV에 적용하면, 선재제품 뿐만 아니라 후판, 코일 등 다른 제품의 출하 검수장에도 쉽게 확대적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포항제철소는 2025년까지 코일 및 후판 제품 검수장에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 AI 영상기술로 스마트 제조 혁신 추진포항제철소는 포항 체인지업그라운드에 입주한 AMSquare사, SensingPlus사와 함께 인공지능 및 영상기술 분야에서 합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 포스코는 산업현장의 데이터와 제철 공정의 운영 노하우를 공유하고, 벤처기업은 이를 최신 스마트 기술과 혁신적인 분석 아이디어를 활용해 스마트 예측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양측은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특히 인공지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AMSquare사와의 협력을 통해 포항제철소는 생산 공정에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한 스마트 제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영상분석 전문업체 SensingPlus사와는 열연공장 및 STS냉연공장 입측을 고해상도 3D 스캐너와 카메라로 정밀 실사해 정교한 3D 모델링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포항제철소는 디지털트윈 및 고위험개소 원격점검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이러한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 간의 상생협력 모델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8-25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지방의회 혁신’ 필요하다

‘의회 없는 자치 없고 자치 없는 민주 없다’는 말이 있다.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 나라에 민주주의란 무의미하단 뜻이다. 하지만 최근 시민들 사이에서는 ‘지방의회 무용론’이 대세다. 포항시의회의 경우, 원구성에서 파행과 갈등을 거듭해 시민들의 우려가 더욱 심화했다. 이번 제9대 후반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평소에도 의회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뚜렷한 정치철학이나 기조 없이 중앙 정치의 논리와 의석수에 따라 움직인 결과물이다. 뿐만이 아니다. 의원들이 의회 활동 중 일으키는 물의도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민생과 관련된 시급한 안건들도 별다른 진전 없이 대부분 묶여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방의회가 다시 제 기능을 하도록 혁신할 방법은 없는지, 여러 각도에서 모색해봤다. ◇정당공천제 폐지지방의원 정당공천제는 광역의회는 1991년부터, 기초의회는 2006년부터 도입해 지속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다.지방선거에 정당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방자치도 민주정치의 일환으로서 정당 참여로 인해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의 의사 결정에 대한 책임소재가 명확해진다. 현실적으로도 지방선거에서 정당 참여는 이뤄져 왔다.하지만 정당공천제도로 인해 지방선거의 중앙 정치 예속화가 점점 심화됐다는 부정적 의견도 커지고 있다. 또 지방선거가 지역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중앙정부의 중간평가로 전환, 정당의 지역패권주의가 재현되고 있다. 포항시의회 제9대 후반기 원구성에서도 국민의힘 중앙당의 공문에 따라 의장단 선거 전 의원총회를 열고 내정자를 선임했다. 국민의힘 의원이 다수라 내정자는 그대로 본회의 선거에서 당선됐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당공천을 받기 위해 중앙당이나 지역 국회의원에게 일종의 줄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초단체장이나 의원 출마자들이 지역 국회의원에게 고액 후원을 하는 일도 다반사다. 또 각 정당이 후보자 선출을 위한 경선을 줄이고 ‘내 사람 끼워 넣기’식의 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정당공천제도는 정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조돼 지방자치를 역행하는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중앙당도 이 같은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인 공천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자 여야 정치권은 지난 4월 총선에서 향후 치러질 지방선거에 시민 투표로 결정되는 ‘상향식 공천’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이 나왔지만 이것이 지켜질지는 미지수다.우수인력의 지방의회 진입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지방선거 때 일부 대상에 대해 정당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기초의원의 경우 정당공천제를 없애고 기초단체장의 정당공천 배제에 대해서도 충분한 검토를 거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포항시의회 한 의원은 “기존에 논의되던 국민경선제의 방식을 보다 체계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며 “장기적으로는 정당공천을 완전히 배제하는 점진적인 대응책 마련이 강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섭단체 조례 제정포항시의회 김성조(개혁신당, 장성동) 의원은 지난달 31일 제317회 포항시의회 임시회 전 5분 발언에서 “‘포항시의회 교섭단체 구성과 운영에 관한 조례 제정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광역·기초의회에서 산발적으로 ‘교섭단체 조례’가 제정되고 있다. 25일 자치법규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전국 243개 기초·광역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교섭단체를 구성·운영하는 곳은 91개 지자체다. 지난해 3월 개정된 ‘지방자치법’ 63조의2에는 ‘조례로 정하는 수 이상의 소속 의원을 가진 정당은 하나의 교섭단체가 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국회에서와 같이 교섭단체를 지방의회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교섭단체는 의회 의사 진행에 관한 중요한 안건을 의장과 협의하기 위해 일정한 수 이상의 의원들로 구성된 의원 단체를 말한다. 보통 의회에서 일정한 정당 또는 원내 단체에 소속한 의원들의 의사를 사전에 통합·조정해 정파 간 교섭의 창구역할을 함으로써 의회의 의사를 원활하게 운영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국회에선 20명 이상의 소속 의원을 가진 정당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 행정안전부 자치법규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기초의회 교섭단체 소속 의원 수를 보면 많게는 9명에서 적게는 3명만 있어도 구성할 수 있다. 소수당이 교섭단체를 구성해 원내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게 됐다.지방의회의 교섭단체 대표의원은 국회에서의 각 당 원내대표와 마찬가지로 의회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방의회 교섭단체와 그 대표의원의 권한은 의회 의원 구성 협의, 소속 의원의 상임위 배정, 의장단과 상임위원장 등 직위에 관한 인선, 위원회 위원 선임과 개선의 요청과 협의, 의회 일정과 의사 진행순서 협의, 대집행부 질문의원 수와 질문순서, 긴급 현안질문 관련 협의, 정례회 중 대표연설 등과 같이 막중하다. 즉 소속 정당 의원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의회운영에 있어 상당한 결정권을 가지며 정당 간 교류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포항시의회는 교섭단체 구성·운영에 관한 조례가 아직 없다. 지역 사회에서는 정당이나 원내 단체에 속하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파 간 교섭 창구 역할을 할 교섭단체가 구성돼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포항시의회 더불어민주당 김상민 원내대표는 “현재 포항시의회는 7명의 소수당 의원을 배제함으로써 포항시민 약 5분의 1을 배제하고 있다”며 “교섭단체를 통해 정당 간 견제와 협력으로 균형을 이뤄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더 보장하고, 포항시의회 민주주의 또한 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의회법 제정지방의회는 지방정부를 통한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지방의회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5일 현재 지방의회(광역의회 17개·기초의회 226개) 의장 협의체인 대한민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와 대한민국시군자치구의장협의회는 지방의회법 제정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지방의회법 제정은 지방헌법을 만들어서 각 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인정하고 각자의 권한 속에 진행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책지원관 정상화, 수석전문위원실 증설 등 숙원 과제를 지방의회에 관한 독립법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지방의회와 관련한 법률 조항은 ‘지방자치법’에 포함돼 있는데 △지방자치 분권에 따른 지방의원 역할 확대 △의원 2인당 1명 배정방식의 정책지원관 부족 문제 △특례시의회 출범 등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을 법 조항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법은 지방의회의 조직·예산권을 규정하지 않아 의회사무처 운영 등에 있어 차질을 빚고 있다.문제는 전국 243개에 달하는 지방의회 규모와 기능에 비해 지방의회법 등 독립법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낮다는 것. 때문에 국회 등 중앙 정치에서 지방의회법은 주요 법안으로 분류되지 못하고 있다. 지방의회법은 지난 2018년 전현희(더불어민주당, 강남을) 국회의원이 최초 발의했지만 계류,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는 4건의 지방의회법이 상정됐지만 모두 불발됐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인 ‘지방시대위원회’도 지난해 7월 10일 출범, 약 1년 넘게 지역 균형발전 정책, 지방분권 과제 등을 총괄해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방의회법을 주요 안건으로 삼지 않고 있다.지방의회법은 일선 지방의회에서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후반기 시도의회의장협의회와 시군자치구의장협의회 활동이 본격화되면 전국 지방의회 대표들이 모여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난 14일 열린 ‘대한민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 정기회’에서도 지방의회법 제정 촉구를 논의했다. 또 각 당 대표들에게도 지방의회법 필요성을 전달해 국회에서 공론화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대구권 대학의 한 행정학과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는 기관대립형 정부형태지만 단체장 권한이 우위에 있다”며 “지방의회법 제정으로 지방자치를 실현할 법률을 만들어 의회와 단체장의 관계가 각 지역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장은희기자

2024-08-25

영화가 좋아 중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 노숙하며 버텼죠

문신구사진 감독은 줄곧 시대의 금기를 화두로 꺼내왔다. 1970∼80년대에는 정치와 노동을 무대에 올렸고, 1990년대에는 연극 ‘미란다’로 ‘성(性)’을 파격적으로 다뤘으며, 2000년대에는 영화 ‘원죄’로 종교의 위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연극영화계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문 감독은 2023년에 고향 포항을 스크린에 담아 지역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포항 원도심의 오래된 커피숍에서 문 감독을 만나 연극과 영화에 바친 한평생을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작년에 영화 ‘2퍼센트’ 개봉으로 바쁜 한 해를 보내셨고, 이 작품으로 2023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문신구(이하 문) : ‘2퍼센트’는 고향 포항에서 만든 첫 작품이지요. 이 작품으로 국제 영화상을 받게 돼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전에 영화 ‘원죄’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적은 있지만 감독상은 처음이라 더 기뻤습니다. 지금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호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안동포 짜기’를 다큐멘터리 영화 ‘베틀소리’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여인네들의 삶을 노래한 ‘베틀소리’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수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두 분이 요양원에 계시지요.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담아보려 합니다.배 : ‘2퍼센트’는 한마디로 ‘메이드 인 포항’ 영화인데요. 영화의 배경으로 포항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문 : ‘2퍼센트’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포항지부가 발족하고 지역 영화인들이 합심해 만든 영화입니다. 시민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공모와 신인 배우 공모 등의 과정을 거쳤고, 경상북도와 포항시가 제작을 지원했습니다. 나는 포항 흥해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갔고, 그 때문에 늘 마음에 포항을 품고 있었습니다.배 : 어릴 적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문 : 포항시 흥해읍 남송2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20여 년 전에 가보니 마을은 숲으로 우거지고, 고향집은 사라졌더군요. 그땐 1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어요. 산 넘고 곡강천을 건너 들판을 지나다녔지요.배 : 시골 소년이 영화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문 :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영화관을 들락날락했어요. 수업을 마치면 이른 저녁을 먹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지요. 외국영화는 1962년에 국내에 개봉된 ‘벤허’와 ‘십계’ 등을 봤고, 국내 영화는 ‘빨간 마후라’(1964), ‘광야의 호랑이’(1965) 등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신작만 나오면 영화관으로 냅다 달려갔죠. 상영작을 보려면 저녁을 서둘러 먹고 영화관으로 뛰어야 했어요.배 : 지금은 흥해에 영화관이 없는데 당시에는 있었군요. 관람권은 어떻게 구했나요.문 :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읍내에 영화관이 있었어요. 그러니 산 넘고 강 건너 들판을 뛰어야 했지요. 어린 나이에 돈이 어디 있었겠어요. 표 살 돈이 없으니 쌀이나 달걀을 훔쳤지요. 쌀은 한 되 정도, 달걀은 한 판을 팔아야 표를 살 수 있었어요. 혹시나 학교 선생님들과 마주칠까 봐 숨어서 관람했죠. 기가 막힌 추억도 꽤 있습니다. 하루는 달걀을 보자기에 싸서 영화관으로 뛰어갔는데 거의 다 와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거예요. 티켓값이던 달걀이 깨졌으니 어떻게 되었겠어요? 영화관 문턱에서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지요. 영화인을 꿈꾸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1960년대 포항의 영화관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영화관 현황을 ‘포항시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96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활성화되면서 포항시, 영일군 지역에는 사설 영화관 개설 붐이 일어나 관내에 총 13개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포항시에는 포항극장(대흥동, 1964년 개관), 시민극장(상원동, 1964년 개관), 대신극장(대신동, 1964년 개관), 아카데미극장(여천동, 1965년 개관), 부민극장(죽도동, 1966년 개관)이 있었고, 영일군에는 흥해극장(흥해읍 성내리, 1960년 개관), 오천극장(오천읍 세계리, 1961년 개관), 양포극장(장기면 양포리, 1962년 개관), 연일극장(연일읍 생지리, 1963년 개관), 구룡포제일극장(구룡포읍 중앙리, 1963년 개관), 지행극장(장기면 읍내리, 1963년 개관), 흥해제일극장(흥해읍 성내리 1964년 개관), 동보극장(청하면 미남리, 1965년 개관)이 있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제2권, 2010, 26~27쪽.배 : 영화관이 감독님의 ‘시네마 천국’이었군요.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걸 넘어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였나요.문 :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성적도 괜찮았고 글과 그림, 운동 등 다방면으로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집안의 기대가 컸지요.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철학 개론서나 융의 심리학 등을 읽었습니다.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에 매료됐지요.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무작정 서울에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배 : 집안의 반응은 어땠나요.문 : 원래 본명은 최명효로 경주 최씨 종갓집 종손입니다. 당시 조부는 상투를 틀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딴따라’ 할 거면 호적을 파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어쩌려고 그러냐고 걱정했죠. 그래도 봇짐 하나 메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촌놈이 빈털터리로 갔으니 결론이야 뻔하죠. 남산 야외 음악당 벤치 밑에서 노숙했어요. 새벽에 시장에서 식은 연탄을 끌어안고 몸을 녹이고,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를 채웠어요. 결국 3개월 만에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호적을 판다던 부모님도 포기하시더군요. 말려서 될 일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고향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했더니 논을 팔아 방 하나 얻어주셨지요.배 : 열예닐곱에 혼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갔다니 대단했군요.문 : 영화배우 이혜영의 아버지이자 영화 ‘만추’로 유명한 이만희 감독을 찾아갔어요. 영화 잡지를 뒤져보면서 이 사람을 찾아가면 되겠다 싶었거든요. 충무로에서 물어물어 이만희 감독의 단골 다방 앞에서 일주일을 기다렸어요. 그러다 지인들과 다방으로 들어가는 이 감독님을 본 거예요. 들어갈 때 인사하고 바깥에서 기다렸다가 나오면 인사하기를 사나흘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혼자 계실 때 따라 들어가 배우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차를 시켜주면서 나이를 묻더군요. 나이를 말하니 감독님이 웃으며 “학교는?” 하시길래 그만뒀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이 감독님이 배우는 영화를 알아야 한다며 연출부로 들어오래요. 그렇게 스크립터부터 시작했어요. 장면 하나 찍으면 그림 크기, 배경, 렌즈 크기, 배우 동선, 대사를 모두 기록하는 역할입니다.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여죄수와 위조지폐범으로 쫓기는 남자의 절박한 사랑을 미학적으로 그려낸 1966년도 영화로 국내 흥행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되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만추’ 이후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가 연이어 나오면서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문예영화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소영·백해린·임대근 지음,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69쪽.배 : 제작에 처음 참여한 작품을 기억하십니까.문 : 1972년에 개봉한 전쟁영화 ‘1950년 6월 25일 04시’를 포항 오천에 와서 찍었어요. 한국전쟁 때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참상을 그린 영화예요. 이 영화는 제9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지요. 영화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 고생을 많이 했어요. 총 맞아 죽는 역할만 열 번 이상 했으니까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무지했으니 용감했고요. 그걸 하면서 영화를 배웠는데, 어린 눈에 감독이 멋있었나 봐요. 언젠가 감독이 되어야지 다짐했고 결국은 이루어냈지요. 그 뒤로 박노식 감독과도 작업했어요. 그러다 5년간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중사로 제대했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했습니다. 주인공으로 일고여덟 작품을 했으니 연기를 계속했다면 지금쯤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겠지요. 문신구 감독은…본명 최명효. 1955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와 흥해중학교를 졸업했다. 영화인을 꿈꾸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상경했으며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연극을 주로 했다. 1994년 연출한 연극 ‘미란다’가 외설 시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며 영화 제작에 나섰다. 노동과 정치, 성(性) 등 사회적 금기를 주로 다뤘으며,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했다. 영화 ‘원죄’로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작품상 등을 받았고, 2023년에는 포항을 배경으로 한 영화 ‘2퍼센트’로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8-25

포항 아치못-아치골-연화재-대안저수지 돌아보기

포항 IC를 빠져나와 연화재에 이르면 길 양옆으로 산줄기가 나란히 펼쳐진다. 오른쪽이 포항 도심의 주산(主山) 양학산 줄기고, 왼쪽이 오늘 소개할 아치재다.‘아치재’는 이름에서 보듯 산(山)도 아니고 령(嶺)도 아닌 재(峙)다. 100m 남짓한 조그만 봉우리이지만 시계를 잠시 전통시대로 돌려보면 재밌는 사실들과 만난다. 아치재 인근은 조선 후기엔 흥해군에 속했다. 당연히 인접한 포항과 흥해 사이에서 행정구역을 둘러싸고 많은 조정 과정이 있었다. 또 이름(阿雉)에서 보듯 꿩과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행정구역 상 같은 북구지만 외곽에 위치한 탓에 우창동이나 용흥동처럼 도시의 주류에 포함되지 못했고, 늘 도시의 변방으로만 머물렀다. 개발 수혜는 비켜갔지만 옛 전통부락 마을길, 지명 등 민속적 전통이 잘 남아 있어 포항의 옛 자취를 더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조선 후기 아치골은 흥해읍 동상면에 위치아치재가 위치한 북구 우현동은 조선후기에는 흥해군 동상면(東上面)에 속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여천동(余川洞) 일부를 통합해 우현동이 됐다. 한자로 ‘우현(牛峴)’은 우리말로 ‘소티’ ‘쇠퇴’의 뜻인데 지명 유래와 관련해서 몇 가지 설이 전한다.첫째는 7번 국도를 따라 흥해로 넘어가는 재의 모습이 마치 ‘누운 소(牛峴)’같다 하여 유래됐다는 설, 둘째는 옛날 소장수가 날이 저물어 이 고개에서 잠을 자던 중 소뼈가 쌓여 있는 꿈을 꾸고 이 골짜기를 소티골로 불렀다는 설, 셋째는 ‘작은 고개’라는 뜻의 소티가 변음되어 ‘소현 ‘우현’으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다.우현동 일대는 옛부터 숲이 울창해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고장으로 소문이 난 곳이다. 현재는 시세(市勢)가 확장,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신흥 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 2019년 개통한 서울∼포항간 KTX의 역사가 흥해읍 이인리로 이전함에 따라 포항의 새 관문으로서 도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꿩이 알을 품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아치재우현고개는 연화재와 함께 7번국도에서 포항과 흥해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아치재는 우현고개와 비슷한 공간에서 재(峙)로써 역할을 해왔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기능과 역할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우현고개가 큰 도로와 인접한 중심 도로에서 포항 북부와 흥해를 연결하던 재(峙) 역할을 했다면, 아치재는 아치골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주변의 마을과 마을을 잇던 산속 교통로로써 의미를 갖는다.‘아치골’이라는 이름 유래도 재미있다.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알을 품고 있는 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유래됐다고 한다. 사실 꿩은 닭이나 오리처럼 가금(家禽)은 아니지만 산이나 들, 민가 주변에 동거하면서 반(半) 가금 상태로 인류와 함께 해왔다. ‘꿩먹고 알먹는다’‘꿩 잡는 게 매 ‘꿩 궈 먹은 자리’ 등과 같이 우리 속담에 등장하며 민중들의 일상 속에서 함께 공감해왔다. ‘꿩! 꿩!’ 하고 힘차게 우는 소리는 까치소리와 함께 마을을 울리던 정겨운 소음이었다. 또 밀밭, 보리밭이나 산에 수북이 알을 낳아 민초들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아치골은 흥해-대련-연화재로 통하던 교통로고향이 포항인 사람들도 아치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북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해 밖으로 드러낼 기회를 잘 얻지 못해서다.나루끝 큰도로에서 우현동 쪽으로 접어들어 아치골사거리에서 한신휴 아파트, 우현 화성타운을 끼고 직진하면 잠시 후 아담한 못이 나오는데 바로 아치못이다. 전통시대 우현동 일대 농사를 위한 관개(灌漑)시설로 추측된다.못의 북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본격 아치재의 시작이다. 아치재는 앞서 언급한대로 옛날 우현마을과 흥해읍 이인리, 대련마을, 연화재를 연결하는 교통로는 몰론 밤밭골, 수태골, 뒷골 같은 재(峙) 주변 마을을 이어주던 산 속 교통로다.우주선이 행성을 날아다니고,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시대에 옛날 고샅길, 마을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의미를 두고 다가가면 전통시대 길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전통시대 옛길 걸으며 선조들 자취 탐방아치골 등산로는 사방으로 뚫려 있어 어느 쪽으로든 진출이 가능하다. 골짜기 전반을 아우르고 싶다면 아치못-아치재-대안지-연화재를 모두 돌아보는 코스를 권한다.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10~20분 간격으로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아치재에서 20분쯤 비탈길을 급한 걸음으로 오르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아치골이고 왼쪽으로 가면 대안지-연화재 가는 길이다. 아쉽게도 아치골 골짜기에 민가(民家)는 이제 거의 없다. 흥해와 통하는 큰길 공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삼거리에서 10분쯤 오르면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흥해읍 이인리 방향이고 직진하면 연화재다. KTX 역사가 들어선 이인리 쪽은 이제 전통마을은 볼 수가 없고, 대단위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산에서 만난 배정숙(72)씨는 “20~30년 전만 해도 아치재 주변엔 ‘뒷골’ ‘말골’ ‘큰골’ ‘밤밭골’ 같은 전통부락들이 널려 있었다”며 “이 모든 마을들의 중심에 아치재가 있어 (이 재가) 산속 교차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이 길을 따라 흥해에서 포항장으로 가던 장꾼들이, 행정문서·세수미(稅收米)를 실은 아전들이, 대련으로 마실을 가던 민초들이 왕래했다.◇연꽃 활짝 핀 대안저수지 돌며 늦여름 정취 만끽아치재와 연화재는 30분 거리에 있다. 양학산으로 연결해서 산행을 하고 싶다면 연화재 육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산림조합 뒷산을 지나 시청 뒤 양학산과 연결된다.흙산(土山) 위주 밋밋한 산행에 식상했다면 대안못 방향을 추천한다, 연화재 갈림길 못 미쳐 대안못-포항여자전자고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접어들면 된다.대안지는 전통시대 조성된 소류지로, 작은 연못이지만 규모에 비해 호수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아담한 저수지를 푸르게 덮고 있는 연잎과 그 위를 아름답게 채색한 연꽃에, 싱그러운 초록의 기운에 빠져드는 것도 여름 산행의 이벤트다. 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데크가 조성돼 있고 못을 둘러싼 백일홍 등 수 십여 종 식물이 수채화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늦여름 한나절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아치재 옛길, 저수지 둘레를 걸으며 선조들의 자취를 한 번 느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 듯하다. 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