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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 깨어나는 생명의 서사

등록일 2025-07-30 19:03 게재일 2025-07-3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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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경북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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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숲.

숲,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 다시 깨어나는 생명의 서사이다. 나무들이 모인 곳, 숲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고 힐링 되는 기분이다. 숲은 모임의 장소, 만남의 장소, 삶의 터전이며 시장과 같은 생명체가 모여드는 공공의 장소이다. 숲은 많은 동물과 식물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간이 태어난 최초의 자궁이다. 

 

4억 년 전 숲이 지구에 생겨난 후,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200만 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숲의 품속에서 첫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첫울음 소리를 내질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의 인간은 거대한 숲의 품 안에서 열매를 따 먹으며 살았다. 나무 위는 적들로부터 피난처였고, 숲속의 바위 아래에서 눈비를 피했다. 

 

뇌는 작고 언어도 없었지만, 본능은 또렷했고, 바람과 빛, 동물의 발소리를 기억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숲은 도시였고, 나무는 집이었고, 물은 길이었으며, 짐승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친구였다. 인간의 가장 깊은 무의식 속에는 그 숲에서 살아온 기억이 고스란히 세포의 유전자 DNA에 담겨 남아 있다.

 

조선시대 주막을 운영한 김설보 여인
월포만 해풍 막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
홍수 때 마을 구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 숲의 가치 발굴
‘여인의 숲’이라 이름 짓고 기념비 조성
공동체 위한 헌신·공익 위한 정신 상징


원초적 기억은 문명이 발달해도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직립보행을 하며 불을 다루고, 언어를 익히고,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인류는 점차 사유하는 존재로 진화해 갔다. 그때부터 숲은 단지 생존의 터전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품는 공간이 되었다. 사계절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숲의 풍경은 인간의 정서를 풍요롭게 했고,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했다. 숲의 자연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또한 깨우치며, 아름다움을 형성했다. 숲은 인간 삶의 그 모든 기능을 수행해 온 최초의 스승이자, 인류 정신의 뿌리였다.

 

이처럼 숲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그 깊은 연대감은 단순한 상징이나 은유를 넘어, 실제적인 구원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경북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이 바로 그런 사례다. 경북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을 아내와 함께 찾았다. 낙동정맥이 동해를 향해 마지막 숨을 고르는 포항-울진 간 7번 국도변에 인접한 포항시 청하면 하송리 마을에는 오래된 인공 숲 하나가 있다. 

 

숲에는 봄이면 녹색 잎의 꽃을 피우고, 여름엔 짙은 녹음 아래 새소리가 적막을 깼다. 가을엔 누렇게 익은 들녘 곁에서 단풍이 붉게 타오르고, 겨울이면 가지마다 나뭇잎을 떨꾼 채 하늘 향해 팔을 벌렸다. 하지만, 숲이 진정 위대한 것은 이런 계절의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의로운 여인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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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숲 기념비.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말기, 관동에 찰방이 주둔함에 따라 외역이 되어 번성했던 하송리 마을에는 김설보라는 여인이 있었다. 주막을 경영하며 큰 부를 쌓게 된 그녀는, 마을을 향한 사랑과 책임으로 한 가지 결단을 내린다. 월포만에서 불어오는 거센 해풍을 막고 마을이 배 형태인 고로 풍수 사상에 따라 ‘수구막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참나무, 쉬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 활엽수를 심어, 마을 앞으로 열려 있던 자연의 틈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마을의 생명과 복을 지키는 숭고한 장벽의 비보림 숲이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어느 해 거대한 홍수로 안청계리 소재 저수지가 범람하여 마을과 전답을 덮쳤다. 이때 이 숲이 그 걸름막 역할을 하게 되었다. 떠내려가던 가구랑 볏단이며, 가축, 그리고 사람들까지 이 숲에 걸려 살아났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그 숲을 ‘식생이 숲’ 곧 생명을 살린 숲이라 불렀고, 간편하게 ‘외역숲’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는 그냥 전설이라기보다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름도 사라지고 기억도 희미해졌을 무렵,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이 숲의 가치를 다시 발굴했다. 김설보 여사의 공덕을 기리며 숲의 존재 가치를 고무시키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그 숲을 ‘여인의 숲’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단순히 여성이 만든 숲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름에는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사적인 부를 넘어 공익을 위해 나선 담대한 기부 실천이 담겨 있다.

 

‘여인의 숲’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풍수적 기능이나 홍수 방지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공동체적 기억의 공간’이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한 여인이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는 이야기와 그녀의 결단이 자연을 이기려 하지 않고 품으려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마을 주민과 홍수에 떠내려가는 가축 등 뭇 생명을 구했다는 감동적인 전설은 지금 시대에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여인의 숲’을 찾는 이유는 단지 자연을 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 숲에 깃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마음을 닮고자 함이다.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보고다. 그늘에서 참나무 씨앗인 도토리를 두 손으로 품에 안고 기도하는 다람쥐를 보며, 우리는 숲을 만든 한 여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여름의 녹음 아래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가을에 누렇게 익은 풍성한 벼들을 바라보면서, 겨울의 쓸쓸한 가지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때, 고요한 침묵 속에 여인의 용기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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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6월 6일 열린 여인의 숲 기념비 제막식.

이름에는 단지 여성이 조성한 숲이라는 뜻만이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은 사적인 부를 넘어 마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어준 한 여인의 용기 있는 실천 그리고 생명을 품은 결단의 기록이자, 우리가 숲에서 다시 배워야 할 고귀한 정신을 상징한다. 도시는 숲을 떠났지만, 인간은 끝내 다시 숲을 찾고 있다. 이는 단지 쉼의 욕구가 아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생태계의 법칙을 무시해 온 인간이 그 법칙 앞에 다시 무릎 꿇는 과정이다. 숲은 지금도 스스로를 가꾸고, 생명을 순환시키며, 인간이 잃어버린 질서를 조용히 되돌려주고 있다.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숲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현재형이다. 나무 아래 드리운 그늘에서 우리는 김설보라는 이름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가지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보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숲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오늘도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김설보의 숲은, 아직도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되돌아올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수구막이 숲, 생명을 품은 ‘여인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깨닫게 해 주고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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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보 여사 송덕비.


설보 여사 송덕비는…

 -김설보(金薛甫) 여사:  본관은 청풍김씨(淸風金氏), 헌종 7년(1841) 12월 30일생, 고종 37년(1900, 광무4년, 更子年) 1월 18일 60세를 일기로 사망. 그해 9월 8일 내연산 계조암에 논 5두락(5마지기, 약 1500평 정도)을 시주하였고, 남편 윤기석 공의 영정이 보경사에 봉안. 묘는 현재 포항시 북구 송라면 방석1리 뒷산에 남편 윤기석 묘역 내에 있다. 

 

-송덕비 : 出身坡平尹公琦碩妻淸風金氏薛甫不忘碑(출신파평윤공기석처청풍김씨설보불망비)
出義捐財 壬年我藪 百堵頌德(출의연재 임년아수 백도송덕)     
罕覩基人 幾滅更新 銘此采隣(한도기인 기멸갱신 명차채린) 
光武元年丁酉九月日外一二三洞立(광무원년정유구월일외일이삼동립)  
재물을 희사하여 임년에 조성한 우리 숲을 백대로 송덕하노니 
보기 드문 그 분이 거의 사라질 뻔한 것을 새롭게 하였으매 옥돌을 캐어다 이를 새겨 두노라. 

 

-남편 윤기석 : 여인의 남편 윤기석(尹琦碩)은 무과에 급제해 부사과(副司果, 조선시대 종6품 무관 벼슬)를 지냈으며, 고승 대덕의 영정만이 안치되는 보경사 원진각에 영정이 봉안될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자료 제공: 이삼우 노거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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