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포항 마현리 장기초등학교 은행나무 노거수
조선 유배지의 고장, 경북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 331번지, 장기초등학교 교내 운동장에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살고 있다. 그는 17세기 조선의 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장기에 유배되어 머무르던 시절, 제자들을 가르치며 심은 나무라 전한다. 그때가 1675년 6월, 선생은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학문과 도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장기에 남긴 것은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 뜻을 담은 한 알의 씨앗이 바로 은행나무였다.
그로부터 3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떠나고 세상은 변했으나, 그가 심은 나무는 그 자리를 지켰다. 바람과 비, 전쟁과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펼쳤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었고, 아이들은 그 잎새 아래 자랐다. 이런 외형뿐만 아니라 이들의 내면 정신세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정신이 세대를 거듭하며 나무는 선생을 대신하는 시간의 스승이 되었다.
1946년 3월 5일 은행나무는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으로 지정되었다. 어린이들의 성장과 배움의 상징이 되었고, 1972년 6월 9일 포항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민 모두의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1993년, 장기초등학교 제40회 졸업생들은 나무의 뜻을 기려 세월을 잇는 존경의 비석을 세웠다. 이렇게 나무를 통하여 선생의 가르침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선생으로 또한 역사서로 그의 나이 350살, 키 14m, 몸 둘레는 2.3m의 노거수이다. 굵은 줄기마다 조선의 선비 정신이 서려 있고, 잎사귀마다 배움과 인내의 빛이 어른거린다. 인간의 생은 짧지만, 한 사람의 뜻이 나무로 이어질 때, 그것은 세대를 넘어 마을의 정신이 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는 바로 그런 삶의 흔적이자, 교훈의 나무로 오늘날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몸에 난 상흔으로 보아 그동안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상흔은 고난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 상흔이 선생의 당시 희생의 고통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옛날 공자는 은행나무 그늘에서 제자들에게 인의와 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350년 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 장기에 은행나무를 심을 때도 아마 그런 뜻을 품었을 것이다. 거대한 줄기로 세월을 견디며, 잎이 돋고 지는 사이에도 나무는 묵묵히 배움의 상징이 되어 왔다. 지금 그 나무 곁에는 장기초등학교가 서 있다. 교실 창가를 스치는 바람은 마치 우암의 숨결처럼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고, 아이들은 그늘에서 세상의 바름을 배운다. 공자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피어난 학문의 혼이 이곳에 옮겨와, 오늘의 아이들 마음속에서도 조용히 잎을 틔우고 있다.
푸른 바다와 맞닿은 포항 장기 들녘에는 한때 외로운 유배객들의 발자취가 머물렀다. 조정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흘러든 선비들은 절망 속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았고, 그 고요한 세월을 사유와 깨달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암 송시열은 제자를 가르치며 도의의 뿌리를 심었고, 다산 정약용은 목민의 길을 떠올리며 새 세상을 그렸다. 그렇게 포항 장기는 한때의 유배지였으나, 지금은 사색과 성찰의 땅, 인간의 깊은 정신이 깃든 문화의 터전이 되었다.
포항 장기는 조선의 두 거목,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머물며 사유의 깊이를 더한 유배의 땅이다. 우암은 장기에서 예와 의리를 가르치며,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바름의 길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한 인간이 먼저 마음을 닦아야 나라가 바르게 선다는 신념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뜻을 은행나무 한 그루에 담아 후세에 남겼다.
한 세기가 지나 다산 정약용 또한 장기의 바람과 바다를 마주하며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성찰했다. 그는 고난을 학문으로 승화시켜 백성을 위한 정치, 실천적 정의의 길을 모색했다. 두 선비가 거쳐 간 장기는 유배의 고통이 사색의 빛으로 변한 곳,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신을 닦아 세상을 바르게 한다’라는 수신위정(修身爲正)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찰의 고장이다.
수신위정(修身爲正)은 자신을 먼저 바로 세움이 세상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라는 뜻이다. 장기초등학교가 동학의 기상과 동해의 정기를 품고 배움의 터를 연 지 백 년, 그 세월은 한결같이 이 뜻을 지켜 온 시간이었다. 교정의 바람 속에서 아이들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배우고, 바른 품성과 정직한 마음을 길러 사회의 등불이 되었다. 조국의 어려움 앞에서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평화로운 시대에는 근면과 성실로 이웃을 밝혀 왔다. 수신위정의 가르침은 단지 공부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방향이었다. 장기초등학교의 백 년은 바로 그 철학이 피워낸 푸른 역사이며, 앞으로의 백 년 또한 그 뿌리 위에서 더 깊고 단단하게 자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곳 출신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애국지사 장헌문(蔣憲文) 의병장과 엄주동(嚴柱東) 선생 추모비가 은행나무 곁에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장헌문(蔣憲文) 의병장은 김재홍, 김복선 등과 뜻을 모아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영일을 중심으로 경주, 죽장, 흥해, 청하 등지에서 항전하며 정환직, 신돌석 의진과 연계해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애국지사 엄주동 선생은 이우용, 최규익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피탈 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쳤다.”라고 새겨진 추모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상징하는 은행나무 노거수 곁에 세워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장기를 방문하신 일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최고의 학문을 접할 수 있는 큰 행운이었다. 두 분이 남긴 가르침과 덕망은 오랫동안 장기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그 고매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이 글은 포항 장기의 자긍심과 학문의 전통을 기리는 마음에서 ‘장기 발전연구회’가 돌비석에 새겨 놓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우암 송시열이 망실(亡室) 이씨(李氏) 에게 올린 제문
아, 나와 당신이 부부로 맺은 지가 지금 5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의 가난함에 쪼들리어. 거친 밥도 항상 넉넉하지 못하여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던 그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쌓은 앙화 때문에 아들과 딸이 많이 요절하였으니, 그 슬픔은 살을 도려내듯이 아프고 독하여 사람들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근세(近歲)에 이르러서는 내가 화를 입어서 당신과 떨어져 산 지가 이제 4년이 되었는데, 때때로 나에 대해 들려오는 놀랍고 두려운 일들 때문에 마음을 녹이고 창자를 졸리면서 두려움에 애타고 들볶이던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끝내 몸이 지쳐 병에 걸려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시종을 따져보면 나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좋지 않아서 이같이 어질지 못한 사람과 짝이 되었으니, 당신이야 비록 원망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내 어찌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내겠습니까. 우암 송시열은 71세였던 1677년 3월 22일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여 멀리서 통곡했다.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우암의 벽 기록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