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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바람처럼 사리사욕 버린 재상'을 닮은 나무

등록일 2025-10-15 20:13 게재일 2025-10-1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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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경북 문경 대하리 천연기념물 탱자나무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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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와 오래된 집.

오늘날 언론에 비치는 선출직 고위 공직자, 소위 말하는 의원 나리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비리에 연루된 소식을 들을 때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실망과 허탈감을 느낀다.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야 할 이들이 책임과 도리를 저버린 채 개인의 이익을 좇는 현실은, 공동체 전체를 어둡게 만들고 신뢰를 흔들어 놓는다. 

 

이럴 때 나는 세종을 도와 나라의 기틀을 다졌던 황희 정승을 떠올린다. 청렴과 인자함으로 백성을 보듬고, 사리보다는 공익을 좇으며 청백리의 모범이 되었던 그의 삶은 오늘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세월은 흘러 시대와 제도는 달라졌지만, 참된 정치의 본질은 여전히 ‘깨끗한 마음’과 ‘곧은 뜻’에 있음을 그는 일찍이 몸소 증명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길 역시 그 맑은 정신과 청백의 자세 속에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조선 황희 정승 7대손 황시간 선생이 심은
장수황씨 종택 마당 400살 넘은 탱자나무 
청렴·절개의 상징으로 수백 년 자리 지켜
1982년 보호수·1999년 경상북도기념물 
2021년 천연기념물로 승격돼 보호 관리 
날카로운 가시로 집안 지킨 탱자나무 옆
배롱나무 연리지도 함께 가문 지탱해 와


조선 초 명재상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로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조선조에 들어와 판서, 대사헌 등을 두루 거쳐 세종 13년, 영의정 자리에 올라 무려 18년 동안 세종을 보좌하여 훌륭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평소 인자하고 깨끗한 관직 생활로 청백리로서 귀감이 되었다. 권세보다 도덕을 숭상하고, 탐욕보다 청렴을 지켰으며, 인자하고 포용력 있는 태도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청백리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삶은 세속의 욕망에 물들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향한 곧은 뜻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후세에는 그를 두고 ‘맑은 바람처럼 사리사욕을 버린 참된 재상’이라 칭송한다. 저서 방촌집은 그의 학문과 사유를 남겨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황희의 7대손 황시간 선생(1558-1642)은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집을 짓고, 마당 한가운데 탱자나무를 심었다. 이 탱자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려 단단히 버티며, 날카로운 가시로 자신의 몸을 지키고, 작고 쓴 열매를 꿋꿋이 맺었다. 화려한 풍요가 아니라 정신의 올곧음을 중히 여기는 가풍처럼, 탱자나무는 청렴과 절개의 상징으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비의 삶이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공정과 의리를 좇으며, 학문과 도덕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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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의 7대손 황시간이 마당 가운데 심은 탱자나무.

황시간 선생은 말이 아닌 탱자나무를 가훈으로 삼아 후손들에게 가문의 기둥이 무엇인지를 전하고자 했을 것이다. 권세와 이익 앞에서도 마음을 흐리지 말고, 맑고 곧은 길을 걸으라는 무언의 가르침, 그것이 탱자나무에 담긴 정신이 아닐까 싶다. 탱자나무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세월을 넘어오는 바람 속에서 후손들에게 조용히 뜻깊은 가훈을 전하고 있다.

 

탱자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약 400살, 키 6.3m, 몸 둘레 2.1m, 앉은 자리 폭은 동서 9.2m, 남북 10.3m이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1번지 장수황씨 종택 마당에 살아가고 있다.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시작하여 1999년 11월 2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35호, 마침내 2021년 10월 29일 천연기념물로 승격하여 자연유산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탱자나무는 경계 울타리로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담장용이나 논밭 두렁이나 옛날 군사적 요충지에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또는 중한 죄수를 가두어 두는 위리안치에 주로 심었다. 그러나 탱자나무를 가훈으로 삼아 마당에 심고 늘상 보면서 가문의 유훈처럼 마음에 새기도록 한 예는 실로 보기에 드물고 흔치 않은 일로 그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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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황씨 종택은 사정공파 종가로 세월을 품은 담장 너머로 고요한 기품을 뿜어낸다. 황시간 선생이 거처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집은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와 사당이 정연하게 어깨를 맞대며 서 있다. 방촌 황희 정승의 분재기와 벼루가 보존된 유물관은 이곳이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공간임을 일깨운다. 탱자나무와 오래된 기와 한 장마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한 가문의 뿌리를 지키는 상징이자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고택의 고즈넉한 마당에 서면, 옛 선비들의 청렴한 기상이 바람결에 스며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묵묵히 말을 건넨다.

 

문경 대하리의 장수황씨 종택은 수백 년 세월을 품은 채 선비 정신을 지켜온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고즈넉이 서 있는 마당 한가운데에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와 연리지 배롱나무 노거수가 어른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서 있다. 노거수는 한 가문의 역사와 정신을 묵묵히 지탱해 온 상징이다. 사계절의 햇살과 비바람을 함께 견디며 살아온 탱자나무와 배롱나무는 조상의 숨결이 깃든 종택과 한 몸처럼 어울려 있다. 굳건히 뻗은 뿌리는 가문의 뿌리를 닮았고,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순환은 선비 정신의 끊임없는 계승을 떠올리게 한다. 날카로운 가시로 집안을 지켜낸 탱자나무는 가문 울타리로 그리고 여름마다 붉게 타오르는 배롱나무 연리지는 꺾이지 않는 기개와 효도, 사랑의 상징물이 되었다.

 

지난 시절 공직에 있을 때 동료이며 친구인 황조연 교수는 황희 정승의 직계 후손임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또한 청렴을 몸소 실현하였다. 황희 정승의 청백 정신을 품은 탱자나무는 후손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오는 가훈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에도 맑은 바람 같은 울림을 전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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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연리지.


문경 장수황씨 종택, 숙청사(肅淸祠)와 숭모각(崇慕閣)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236호.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에 위치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은 경북 문경에 있는 양반 가옥으로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長水黃氏 司正公派宗宅)이며 조선 초기 재상인 황희 정승의 후손 황시간 선생(1558∼1642)이 살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고 우측에 별도로 사당 및 유물관이 담장 내 배치되어 있으며 유물관에는 방촌 황희 선생의 분재기와 벼루 등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내 숙청사(肅淸祠)는 ‘방촌(厖村) 황희(黃喜)’의 영정을 모신 곳, 숭모각(崇慕閣)은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16세기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위치는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사묘가 있는 곳에 있었으며 1960년대에 종택 내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황방촌유물(黃厖村遺物)은 경북 유형문화유산 제123호. 조선 전기 황희 정승의 유물로서 옥으로 된 종이 누르개(옥서진) 1쌍,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 벼루 1개, 코뿔소의 뿔로 된 띠(서각대) 1개, 재산 분할문서 1매(분재문서) 들이다. 홍치(弘治) 13년 경신년(庚申年) 연산군 6년(1500년) 황희(黃喜)의 증손인 정(庭)은 아들 사웅(士雄)에게 특별히 논, 밭을 지급하고 상국(相國)의 유물이 몇 점뿐이나 종가에서 잘 보존하여 잃어지지 말도록 하고 후일 다른 자손 중에 이를 두고 다투는 자가 있으면, 재산분할 문서(분재문서)로 해결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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