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영덕 성내리 팽나무·느티나무와 영해향교 회화나무 노거수
볼품이랄까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376-2번지 한 자리에 500여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났다. 성내리 마을은 조선시대 영해부(영덕, 영양, 울진)의 관아가 있던 유서 깊은 문향의 마을이다. 마을 주민의 보호 속에 느티나무 노거수는 원 줄기는 고사 되었지만, 다른 줄기가 길게 뻗어 담장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수세는 매우 약해 보였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쳐진 좁은 공간에 팽나무와 함께 나무의 신이 좌정한 당우와 갇혀 있다시피 했다.
영덕 성내리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
신령스럽게 여겨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어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목은•신돌석 같은 위인의 정신적 바탕은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
주민들이야 나무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높은 담장으로 접근을 막았다지만, 노거수는 햇볕과 바람, 뿌리에서 물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여 생육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무의 지속적인 성장과 건강을 위해서 통풍이 잘되도록 담장을 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담장 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 들어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성내리 마을 박광환 노인회장과 조청해 주민이 친절하게 사다리를 가져다주어 담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무 앞에는 제단과 노동신위(路東神位)란 비가 세워져 있었다.
박광환 노인회장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온 마을이 이 나무 아래 모여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기원의 소지를 태운다고 했다. 영해 향교에도 제사를 지내는 나무가 있다고 하면서 한번 가 보기를 권했다.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발걸음 옮겼다. 영해 향교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 두고 몇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곳에 제당과 함께 느티나무와 향나무 노거수에 금줄이 쳐져 있었다.
나무 앞 안내판에 “영해 향교 내 이 자리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 지역에 파병 윤씨가 틀을 잡고 영해 박씨가 세를 누리며 살던 때부터 토속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재사를 올리던 곳이다. 지금은 300여 세대의 보금자리로서 매년 정월 보름날의 전통 제례에 따라 마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라고 하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고사한 느티나무에서 맹아가 발아하여 자라고 있는 나무의 주변에 목책을 둘러쳐서 보호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성내리 마을 주민은 노거수 보호의 지극함을 느꼈다. 한 마을에 두 곳의 나무를 당산목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도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향교로 들어가라는 하마비(下馬碑)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온 조선 선비의 품의가 돋보였다. 영해 향교에도 대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담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마침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함께 들어갈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언덕 위에 있는 영해향교 마당에서 또 다른 노거수와 마주했다. 바로 회화나무 두 그루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선비의 기상과 학문적 이상을 상징하는 나무로, 선비나무,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렸다.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학문이 높은 인물이 나오고, 대문 앞에 심으면 잡귀가 드나들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특히 양반가에서는 출세와 벼슬, 학덕을 상징하는 길상목으로 여겼다.
회화나무 가지마다 맑은 기품을 품고 서 있는 모습은 오래전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의연한 뒷모습을 닮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은은히 흔들려, 마치 경전의 장(章)이 바람에 읽히듯 속삭인다. 향교의 마루에 앉아 글을 읽던 선비들은 이 나무를 두고 “하늘의 지혜가 깃든 스승”이라 여겼을 것이다. 회화나무는 정신을 바로 세우는 묵언의 교사였다. 회화나무는 향교의 담장을 넘어 저 멀리 칠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동해의 바다를 볼 수 없지만, 칠보산 정상이라면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칠보산을 보면서 동해의 무한한 에너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요산요수( 樂山樂水)란 말이 있다. “이는 자연 풍광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길게 산다.”고하는 뜻이 품어 있는 말이다. 회화나무와 칠보산을 바라보면서 동해를 연상하게끔 하는 이 풍광은 선비들의 삶에 자연히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영해 향교는 고려 후기, 충목왕 1346년에 세워졌다. 수백 년 동안 책 읽는 소리와 향내가 흘렀다. 임진왜란의 불길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고, 또다시 고쳐 세워지며, 마치 불사조처럼 살아온 건물이다. 이곳의 기둥들은 세월을 버텨낸 나무의 뼈처럼 우직하고, 회화나무는 그 역사를 곁에서 묵묵히 증언해 왔다. 나무를 경외시하는 영해 주민의 자연관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보였다. 나무의 넉넉한 품은 주민들의 정신적 뿌리로 작용하여 이곳 출신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지 않았나 싶다.
향교와 바로 이웃한 괴시리 전통 마을은 목은 이색 선생의 고향이다. 기와 담 골목마다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2백 년, 3백 년을 견뎌낸 고택들이 흙담에 기대어 서 있다. 마을을 걸으면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고, 선비들의 발자취가 돌길에서 소곤거린다. 목은 선생은 혼란의 고려 말에 학문의 불씨를 지켜낸 대학자이다. 정도전과 정몽주, 이성계에게 사상적 뿌리를 내리게 한 것도 바로 그의 학문이었다. 목은의 정신은 곧 새로운 나라 조선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영해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낳은 고장이다. 평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산맥을 넘어 퍼졌고, 그의 전술은 일본군조차 두려워했다. 끝내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울분과 정의는 지금도 영해 땅의 바람 속에 살아 숨 쉰다.
성내리의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다. 사람들은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고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었다.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졌다. 목은 같은 대학자와 신돌석 같은 영웅이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정신적 바탕은 바로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노거수 앞에 서면,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인간은 겸허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우리도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노거수는 지금도 말을 걸어오는 현재의 존재다. 그것은 마을을 지켜온 뿌리이자, 사람을 길러낸 품이며, 역사를 이어온 숨결이다. 영해의 노거수와 향교, 그리고 그 땅에서 태어난 이들이 남긴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한 그루의 노거수처럼 묵직한 울림으로 서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신돌석 장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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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申乭石, 1878~1908)은 경북 영덕 출신으로, 평민 신분에서 항일 의병장이 된 인물이다. 본명은 신태호이나 어린 시절 이름인 ‘돌석’으로 불렸다. 1896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그는 10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1906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했다.
의병은 최대 3천 명에 달했으며, 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과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크게 괴롭혔다. 일본군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불렀다. 그러나 1908년, 배신한 옛 부하의 손에 독살당하며 짧은 생을 마쳤다. 비록 활동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신분을 넘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항일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독보적 인물이다. 영해에 신돌석 장군의 기념 공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