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안동 정상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
나무를 심어 그로 하여금 가훈을 삼거나 그의 삶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는 가문이 있다는 사실을, 노거수를 쫓아다니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무의 삶과 상징성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요, 인문학의 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서원과 향교는 물론이고 각 가문의 종택, 제실, 정자에 살고 있는 나무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동은 유교 문화, 선비 문화의 고장으로 우리 한국학의 본고장 정신문화의 수도이다. 안동은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옛 선비의 고고한 문화생활과 끈끈한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경북 안동 정상 770번지 귀래정(歸來亭)에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귀래정이라는 말에서 삶의 철학이 묻어나고 은행나무에서 공자의 인의예지가 생각나고 노거수라는 말에서 삶의 경륜이 반짝인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낙포 이굉(李宏, 1441~1516)이라는 조선 선비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7호인 귀래정은 조선 중기에 문신이었던 이굉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조선 중기 이굉이 안동에 지은 ‘귀래정’
후학양성·쉼터 ‘경북 문화재 17호’ 지정
500년 세월 귀래정에 터잡은 ‘은행나무’
1982년 보호수 지정·키 18m·둘레 6m
유교문화·선비정신·가문의 정신 상징
귀래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맹의 귀래처사(歸來處士)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귀양을 가기도 한 사람이다. 1513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이곳에서 귀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원래는 강변 가까이 있어 낙동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인하여 이곳으로 물러나 옮겨놓았다.
그는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로 귀래정에 은행나무를 심어 후학을 가르쳤다. 이 은행나무는 이굉을 상징하는 가문의 가훈 역할을 반세기 동안 이어 오고 있다. 조선의 가문(家門)은 한 집의 울타리를 넘어, 나라의 기둥이자 사회의 뿌리였다. 피붙이의 혈맥으로 이어진 그 울타리 안에는 예의와 도리, 충과 효가 자라났고, 조상의 숨결과 후손의 뜻이 한 줄기로 이어졌다. 은행나무는 세월이 흘러도 푸른 기개를 잃지 않았고, 그 정신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임청각의 이상용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가문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뿌리로 맺은 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신의와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조선의 가문은 그렇게 한 사람의 도덕을 세우고, 한 마을의 질서를 바로잡으며, 한 나라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가문은 피보다 깊은 정신의 혈맥이었고, 그 정신이 모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문화의 줄기의 바탕이었다.
또한 그의 현손인 이응태(李應台 1556-1586) 가족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 제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부인(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이다.
1998년 안동시 정하동 택지 개발 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써서 무덤의 관 속에 넣어 둔 것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병을 간호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어린 아들과 유복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그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그리움을 편지로 썼다. 편지의 절절하고 애틋한 내용은 평소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500년의 세월이 지나 그 편지가 세상에 다시 빛을 보았을 때, 그 속에는 한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한 사랑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피로 맺힌 인연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다리이며,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온기의 흔적이다. 말 한마디, 손길 하나, 밥 한 그릇에 스며 있는 정, 그것이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가족애의 언어이며,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자리다. 이곳 귀래정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뛰어놀며 나무를 보고 자란 이굉의 가정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귀래정의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의 공원을 찾은 것은 한국산림문학 가을 문학기행(안동 이육사 발자취, 청송 객주문학관) 때 김선길 이사장님과 김선완 교수(회원)와 함께 짬을 내어 귀래정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 상을 답사 했다. 우리는 은행나무를 통하여 원이 엄마의 가족애와 고성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등 내력을 더 깊게 알게 되었다. 가족과 가문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은행나무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나무는 옛날부터 이래저래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았다. 산림문학회는 문학이 숲이 되고 숲이 문학이 되는 날까지 나무와 숲, 생명, 환경을 모티브로 하여 문학으로 우리 삶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단체이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나이 500살, 키 18m, 가슴둘레 6m, 앉은 자리 폭이 16m인 거인이다. 원래는 귀래정 담장 안에 있던 나무를 지금은 담장 밖으로 나와 있다. 낙포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는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선비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귀래정에 은행나무가 없다면 그저 하나의 오래된 정자로 기억될 뿐일 것이다. 택리지에서도 하회의 옥연정, 임청각, 군자정과 함께 안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라고 했다. 또한 안동 팔경 중 제2경 귀래조운(歸來朝雲) 즉, 귀래정의 아침 구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귀래정을 품고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원이 엄마의 편지는…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 1586년 6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이르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가로 58.5cm, 세로 34.0cm 크기의 이 편지는 한지에 한글 고어체로 쓰여진 것으로 형의 만시 미투리, 의복 등 다른 출토 유물들도 함께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덤은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로 이장하였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