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경북 청송 주왕산 주산지 왕버들 노거수
금강산의 봄 풍경이 마치 황금처럼 빛나고 생동감이 넘친다고 해서 금강산(金剛山)이라 하고, 여름은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모습이 신선이 사는 산과 같다고 하여 봉래산(蓬萊山)이라 한다. 가을은 붉게 물든 산의 모습에서 풍악산(楓嶽山)이라 하고, 겨울은 눈으로 덮여 마치 깨끗하고 청정한 골짜기 같다고 하여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리 운다. 이렇게 계절별 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북 청송 주왕산 자락에 주산지라 불리는 저수지 또한 계절별로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김기덕 감독은 주산지는 어느 한 계절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2003년 ‘봄. 여름, 가을, 겨울…그리고 봄’이라는 주산지를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신비스러운 주산지의 사계절 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산지 자연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이루어져 있기에 계절을 달리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자연의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봄에는 생명의 탄생을, 여름에는 성장의 신비함을, 가을에는 황혼의 화려함을, 겨울에는 한 생명의 침묵을 노래한다. 그 중심에는 물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에 목을 내밀고 물속에서 살아가는 왕버들 노거수이다.
주왕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주산지’
조선시대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져
사계절 신비로운 풍경, ‘황홀’ 그 자체
영화 촬영지로 유명… 명소로 우뚝
청송 주산지 상징 ‘왕버들’ 고사 위기
현재 300년 왕버들 6그루, 총 28그루
생태복원 등 ‘노거수 살리기’ 진행 중
주산지는 주왕산 깊은 계곡 속에 있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계곡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주산지는 약 300년 전 1721년 조선 경종 때 농업용 저수지로 길이 100m, 너비 50m, 수심 8m로 축조되었다. 마을 주민의 울력으로 계곡의 잘록한 동쪽과 서쪽의 산자락을 부여잡고 묶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분지에 물이 고여 산속의 작은 호수가 되었다. 주민이 만든 주산지에 계절별 풍경은 주왕산 신이 숨겨놓은 특별 전시장의 걸작품이다. 걸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나 또한 작품 속 일부가 되고 고요 속에 스며든다. 주산지는 사계절 내내 우리에게 기다림과 변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로운 풍경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잔잔히 머문다. 주산지도 사계별로 그 아름다움이 달라 별도의 계절별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주왕산 치맛자락이 주산지를 감싸고 있으면서 때때로 치맛자락을 들쳐 흔들기라도 하면 그 풍광은 180도로 변하여 또 다른 선경의 황홀함에 빠져든다. 주왕산 자락에 자리한 주산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그리고 주산지 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이 사계절 내내 변주곡처럼 다양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전국의 많은 사람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하여 또는 즐기기 위하여 찾아오고 있다. 계절별 풍광은 서로의 계절이 더 아름답다고 뽐내면서 자랑하는 것만 같다. 어느 계절이 못하고 좋음이 없이 모두가 훌륭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영화 촬영의 배경 지역으로 부각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주산지 절경은 사진작가들의 1순위 촬영지로서 주왕산국립공원의 대표적인 경관자원이자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어쩐 일인지 물속 왕버들은 점점 쇠약해져 고사 되어만 갔다. 주왕산 주산지 하면 물속 왕버들이 압권인데, 이에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나무의 수세가 약화 되어 점점 쇠퇴해 가는 왕버들을 살리고 보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기청산식물원 강기호 박사(현 국립세종식물원 본부장)가 맡아 진행되었다. 이에 나는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
왕버들 고사 원인을 분석했다. 1987년 더 많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2m 둑 높이 공사를 한 결과 주왕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저수지에 모이면서 연중 만수로 인하여 저수지 주변에 살던 왕버들이 완전히 물에 잠기어 오늘날까지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수문이 열리면 수면이 하강하여 왕버들 줄기에 난 부정근이 햇볕에 노출되어 줄기와 잎에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여 수세가 약화 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수면이 낮아지면서 노출된 뿌리 주변의 경사가 심해 뿌리를 덮고 있던 흙이 유실되었다. 그 두 가지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에 노출된 뿌리를 낙엽이나 부엽토로 덮어주고 종종 물을 뿌려서 건조하지 않도록 하고 토양의 경사가 급하여 덮은 부엽토가 흘러내릴 수 있는 곳에는 돌쌓기하기로 하였다.
먼저 주산지 물속 왕버들이 고사한 빈자리에 이식할 왕버들을 찾기로 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낙동강 상류 지역인 청송 파천면 신기리 하천에 왕버들이 군락을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가슴높이 둘레가 25cm 정도 되는 왕버들 4그루를 선택하여 이식했다. 이제 주산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은 모두 28그루나 된다. 저수지 축조 당시에 살고 있던 나이 300살, 가슴 높이의 둘레가 2.4m 이상인 왕버들 노거수 6그루가 아직도 주왕산 주산지 사계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가끔 이곳 물속의 왕버들을 찾는다. 볼 때마다 다른 풍광 다른 느낌을 받는다. 봄은 생명의 기운이 잔잔한 수면 위로 봄 햇살이 반짝이며 나무의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수면에 비친 풍경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답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물 위로 울려 퍼지고, 봄바람에 이따금 물결이 일 때 주산지는 마치 초록빛 꿈의 호수이다. 여름은 자연이 그려낸 초록의 싱그러움이 온 세상에 넘쳐흘러 젊음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저수지에 물안개가 스며들면 풍경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이다. 온천에 몸 담근 실루엣 걸친 왕버들은 푸른 향기 뿜어내는 천사이다. 가을의 왕버들 잎사귀는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어 저수지에 담아 놓은 꽃바구니이다. 갈바람에 나뭇잎들은 하늘과 물속에서 춤춘다. 겨울의 주산지는 얼음과 눈으로 덮이면서 고요함을 더한다. 적막하지만, 그 안에서 묵직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간택한 왕버들이 주산지 왕버들 후계목이 되어 잘 자라고 있었다. 사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아름다움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필자의 시] 주산지 왕버들
초록 꿈을 물들이는 녹화(綠花)
가지에 생명이 피어난다.
물안개 속 고요한 숨결
푸르름이 주산지에 깊게 뿌리내린다.
곱게 물든 단풍 수면 위 춤사위
바람이 꾸며 놓은 콘서트장
앙상한 가지에 서린 하얀 숨
고요 속에서도 생명은 깨어 있다.
주산지를 떠난 물속 왕버들 빈자리에
후계목 네 분을 모셔 오는 날
사계를 맞이하고 또 보내면서
만세무강을 기원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