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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국가대표 ‘감홍 꿀사과’ 맛보고 문경새재 가을 단풍은 ‘덤’

초가을 단풍과 빨간 문경사과가 어우러져 문경의 가을은 더욱 깊어간다. 문경사과는 1930년대 선교사가 처음 재배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경 지역 특성상 밤낮의 일교차가 매우 크고, 비옥한 토질과 기후 덕분에 문경사과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고 당노가 매우 높아 ‘꿀사과’라는 별칭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문경은 사과의 한 종류인 ‘감홍’사과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감홍 사과는 우리나라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 개발한 순수 토종 사과품종이다. 문경에서는 감홍사과 작목반이 만들어져 자랑스런 우리 품종인 감홍사과 재배에 정성을 쏟고 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문경새재도립공원 일원에서 오는 19일부터 27일까지 9일간 제19회 문경사과축제가 열린다. 이번 축제는 감홍사과의 고장 문경을 알리고, 가족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신현국 문경시장은“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문경새재에 오셔서 사과 중에 가장 맛있는 문경감홍사과 꼭 맛보시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억 만드시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 사과 주산지 문경 문경시는 일교차가 큰 백두대간 산간 분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비옥한 토질과 기후, 기상재해가 없는 청정 자연환경에서 전국 최고 품질의 사과를 생산하고 있다. 주력으로 재배되는 감홍 품종은 높은 당도와 산미를 자랑한다. 식감까지 좋아 한번 먹어보면 다시 찾게 되는 사과로 알려져 있다. 감홍은 우리나라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 개발한 자랑스러운 우리 사과 품종이다. 문경시는 지난 1994년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권유로 지역 내 농원에서 전국 최초로 감홍사과를 심었다. 하지만 나무의 세력이 약하고, 고두병도 발생하는 등 일반적인 사과재배기술로는 재배가 어려워 포기하는 농가가 많았다. 그렇지만, 감홍사과재배연구회는 문경시농업기술센터와 전정기술을 확립하는 등 재배기술 연구해 재배 단지를 늘리는 등 국내 감홍사과 주산지로 발전시켰다. 문경 감홍 사과는 일본 품종 부사에 대적하는 우리나라 국가대표 사과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문경의 자연환경에 매우 적합한 ‘감홍’은 평균당도 18브릭스를 자랑하며 매년 열리고 있는 ‘문경사과축제’의 안방마님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문경시는 올해 지역의 풍토에 적합한 특화품종인 감홍사과 재배면적 확대 지원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재배면적 증대 실적으로는 감홍사과 262농가에 79ha로 재배면적을 확대했으며, ha당 지원기준으로는 감홍사과 4000만원을 지원했다. 지원내용으로는 묘목, 지주 등 재배에 필요한 기자재를 지원했으며, 전년 대비 지원 단가를 2배 인상 지원해 농가 부담을 줄였다. 아울러, 2028년까지 재배면적을 감홍사과 800ha로 늘리고, 1000㎡(300평)당 생산량도 2300kg에서 3200kg까지 늘려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하도록 할 방침이다. □ 문경사과축제 문경시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문경새재도립공원 일원에서 오는 19일부터 27일까지 9일간 제19회 문경사과축제를 개최한다. 이번 축제는 감홍사과의 고장 문경을 알리고, 가족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특히, 올해는 감홍사과가 익는 시기에 맞춰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가장 맛있는 감홍사과를 맛볼 수 있으며, 축제 기간 중 판매되는 감홍사과는 매일 당도 측정, 품질확인 절차를 거쳐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문경감홍사과를 5kg 한 박스에 특별할인해 7만원에 판매할 예정이다. 축제 개막은 감홍사과로 문경농업의 새 시대를 연다는 메시지를 담은 사과 열쇠 퍼포먼스와 이찬원, 박서진, 전유진 등 팬덤 있는 인기가수 축하공연을 시작으로 다양한 참여 프로그램과 만들기 체험, 포토존 및 쉼터 등을 운영해 축제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즐거운 추억거리를 제공할 준비를 마쳤다. 아울러, 지난해와 다르게 사과축제장을 제1관문 잔디광장으로 옮겨 가족 단위 관광객들을 위한 어린이 놀이터(에어바운스, 시소 등), 대형 에어 그늘막에서 즐기는 사과낚시, 사과양궁, 럭키박스 체험, 파크골프 체험, 사과모자, 사과손수건 만들기 체험 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장을 마련했으며, 축제 마지막 날에는 사과나눔 행사와 사과따기 체험 행사를 진행해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체험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문경사과 홍보관에는 감홍사과 이야기, 감홍사과 터널, 포토존 및 쉼터, 사과 품종별 전시, 문경사과 품평회 출품작 전시 등으로 문경 감홍사과의 우수성을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리고, 감홍사과의 주산지로서 명성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4-10-15

‘참’ 가치관 바탕 ‘원칙’ 생활화… 업무효율·안전한 현장 구축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관은 단 한 글자, 바로 ‘참’입니다.” 반드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비로서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다. 만약 설비의 아주 작은 문제점을 적당히 넘기면, 그 문제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더 큰 설비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곧바로 원인을 제거하기 힘들다면, 쉬운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된다. 그러다 어느새 문제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현장에서 지키도록 약속된 모든 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원칙은 당장 지키기에는 귀찮고 비효율적인 요소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원인을 따져보면 십중팔구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60·사진) 명장에게 우직한 소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뎌서 멀리 나아가는 ‘우보만리(牛步萬里)의 정신’을 최근 들어봤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넉넉지 못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개인의 꿈보다는 가족을 위해 서둘러 생활 전선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어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원인 모를 병으로 고생하고 계셨고, ‘실질적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일찌감치 대학의 꿈은 포기했다. 부모님께서는 대학에 가길 원하셨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나는 빨리 돈을 많이 벌어 아버지를 큰 병원에 모시고 가고 싶었다. 포철공고 모집 공고를 봤고 담임 교사의 추천을 받아 지원하게 됐다. 당시 포철공고 입학 요강에는 전원 학비 지원 및 숙식제공, 졸업 후에는 포항제철소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러한 조건에 반해 부모님 몰래 원서를 내어 합격했고, 이 계기가 포스코와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 순간이다. -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1982년 4월에 입사해 압연설비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압연설비 1, 2부의 설비 강건화 작업과 함께 설비의 고질적 문제점 해결 및 설비 장애 원인분석 후 개선방안을 도출하는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광양제철소 전기강판 설비 안정화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후배 사원들의 기술력 향상을 위해 현장 중심 교육에도 주력하고 있다. - 압연설비 업무를 42년 간 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01년 10월, 포스코의 1냉연공장에서는 DRM(Double Reversing Mill)라인 신설을 위한 TF팀이 발족됐다. 팀원들과 함께 설비 설계에서부터 설치 공사까지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시운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얇은 박판인 0.05㎜ 압연이 설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TFT 구성원들은 일주일 동안 밤을 지새우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쉽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메이커의 설계 사상을 참고해 롤 갭(Roll Gap)을 활용한 압하 압연과 철판을 당겨 두께를 얇게 만드는 연신 압연 방식을 결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 아이디어를 즉시 설비 프로그램에 반영한 결과, 성공적인 압연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포스코의 우수한 압연 기술력을 일본 등 철강 선진국에 알릴 수 있었고, 스스로에게도 큰 자신감을 주는 기회가 됐다. - 안전한 현장 만들기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원칙 준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켜야 할 원칙을 반복적으로 실천해 습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 없듯, 원칙을 지키며 ‘업무 효율성’과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아울러 설비 강건화를 통해 불안전한 현장과 행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 내가 조금 더 발로 뛰면 동료들이 더욱 안전하고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노력하고 있다. - ‘명장의 비결’은. △정비도 조업의 일원으로 운전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정비에만 신경 쓴다면 현상 유지는 가능하지만, 제품 고급화 및 다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운전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근본적인 기초 지식을 쌓아야한 응용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기정비로 입사했지만 기계 설비도 함께 익혔다. 더 나아가 전기와 기계의 유기적 결함으로 탄생한 압연 조업을 알기 위해 압연 운전실 동료들에게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또한, 실시간 형상 모니터를 꼼꼼히 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압연 조업을 익혔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다양한 업무를 두루 맡을 수 있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 특별한 인생 철학이나 업무 원칙이 있다면. △문제를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동료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운전과 정비, 기계와 전기의 총체적인 움직임 가운데 일어나는 만큼 동료들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협업이 절실하다. 나는 ‘무엇 때문이 아닌 무엇 덕분에’라는 마음가짐을 항상 실천하려 했다. 동료들과의 협력과 소통이 나를 스스로 성장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동료들을 통해 모르는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쉽고 빠르게 습득하고, 자신의 업무에 적용할 수 있었다.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최고의 공로자다. 힘든 일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앞장서서 도와주고 힘을 보태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나 자신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늘 참되게 살아라, 모임에 불려 나가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참’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일할 때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심지어 놀 때도 진짜 나를 보여준다. 이런 면모는 호감을 이끌어 내고, 이 호감은 다시 나를 참으로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의 주변에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내가 일에 있어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적당히’, ‘대충대충’이다. 일을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가면 나중에 그 대가가 두세 배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설비를 알고자 일본어 공부를 하고, 그것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1냉연공장 합리화 TFT에서 일할 때,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미숙했다. 우리가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일본 기술자들은 자기 분야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배울 점이 많았지만,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속성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한 나를 보고 당시 월세방 주인이 성실한 청년으로 판단해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 주었다. 그 조카가 지금 나의 아내가 됐으니, 공부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힌남노 시 제철소에 근무한 직원이라면 모두가 그 순간을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근 냉천이 범람하면서 포항제철소는 악몽 같은 상황을 맞았다. 정말 앞이 캄캄했다. 솔직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안 났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복구 대책을 고민하던 중, 일본의 쓰나미 피해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던 일본 기술자들에게 문의하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을 때였다. 설비 제작 메이커에서 전부 교체를 주장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름의 방안을 세워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과연 올바른 결정일까’라는 고민이 가장 어려웠다. 현장을 신뢰하는 경영진의 끊임없는 소통과 지원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다. - 포스코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구성원 각자가 기술력을 조금 더 높여 기초 체력을 키우면, 제철소는 항상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때문에’가 아닌 ‘누구 덕분에’라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 모두가 합심하여 노력하면, 더 행복하고 더 가치 있는 일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후배들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나 자신도 지금까지 하루에 무엇인가를 한 개씩이라도 배우려 하고 있다. 일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지식을 쌓아 놓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보면, 배움은 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소중하다. 서광일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명장은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1982년) △올해의 정비명인(2011년) 포스코 명장(2017년)△포스코 기술대상(2021년)△24회 철의 날 장관표창(2023년)△포스코 상무보 신규 선임(2024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0-13

초등학생 때 쓴 시 한 편이 문학의 길로 이끌어

안데르센은 환상이 들어 있는 놀라운 이야기가 동화라고 했다. 드넓은 바다를 향해 청보리가 출렁이는 호미곶에는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이한 김일광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김일광 작가의 작업실 ‘서경와’에서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동해를 굽이치던 한국 귀신고래를 다시 발견한다면, 그것은 한국 귀신고래의 본래 이름을 되찾는 큰 전환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동해’라는 우리 바다의 이름도 함께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김일광, 「작가의 말」, 『귀신고래』, 내인생의책, 2008. 이희정(이하 이) : 등단하신 지 40년이 되었고 40권이 넘는 책을 내셨습니다.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실 텐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일광(이하 김) : 코로나 이후 1년에 한 번 이오덕 제자 1기 문우들(서정오 외 7인)과 주제 없이 독후 감상과 근황, 일상의 안부를 나눕니다. 그리고 ‘햇살 동화문학회’에서 지역 동화작가들과 합평 만남을 갖습니다. 20여 년이 된 문우들이라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합니다. 종종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을 오가며 출판 담당자와 만나기도 합니다. 일상의 대부분은 호미곶의 작업실과 송도에서 보냅니다. 걷고, 읽고, 쓰며 시간을 보내지요. 이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줄곧 송도에서 사셨는지요? 김 : 1952년 12월 저녁 예배 종소리를 들으며 태어났습니다. 당시 선친께서는 6·25 전쟁에 징집되어 보급물자인 탄환을 수송했습니다. 전쟁 중이라 난방이 안 되어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 세 분의 체온으로 언 몸을 녹이며 자랐지요. 어릴 적 내 놀이터는 형산강과 섬안, 들녘 곳곳에 흩어져 있던 둠벙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옛강이라는 뜻의 구강이었는데 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커다란 못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즘도 그 강 자락에 자주 가곤 해요. 지금은 남의 땅이 되었지만, 거기에는 아버지가 분가루처럼 매만지던 흙이 남아 있어요. 물론 강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 강은 여전히 맑고 곱기만 합니다. 빛 고운 모래로 다져진 외가로 가던 오솔길, 달을 떠받치듯 서 있던 키 큰 미루나무, 물풀 사이에서 지지대던 개개비, 뜸부기 등 이제는 다 사라지고 나만 남은 것 같군요. 이: 부친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셨고, 어머니도 농사꾼의 딸이었습니다. 선대는 경주 양남면 나아리 마을의 유서 깊은 유학자 집안이었지요. 1883년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맺기 전부터 일본이 우리 바다에 와서 어로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바닷가에 움막을 만들고 반일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집안이 몰락했어요. 그 바람에 양남 고개를 넘어 장기에서 오천으로 와서 자리를 잡게 되지요. 증조부 때부터 쫓겨 다니게 되지만, 6·25 전쟁 피난길에도 1800년대 조상들의 문집은 잃어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시면서 부친은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여덟 살에 가장이 되어 농사일을 하셨지요. 이 : 선생님의 성함인 ‘일광(日光)’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김 : 원래 집안 족보에 올린 이름이 따로 있었어요. 항렬대로 진환(鎭煥)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전쟁 후에 돌아와 보니 체격이 미숙해서 족보대로 하자면 아이가 이름에 눌려 죽을 것 같은 염려가 들었던 게지요. 그래서 태양처럼 살아나라는 의지를 담아 일광(日光)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호적에 올렸답니다. 이후 문학의 인연으로 몇 개의 호를 받았지요. 은사이신 손춘익 선생이 일광이 산야에 가득하라는 뜻을 한글로 풀어 ‘들뫼’를, 아촌 이삼우 선생이 동촌(童村)을, 진촌 배용일 교수가 동진(童津)이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후배 시인이 “나이 들수록 귀는 높이 매달아두고 입은 나무 아래에 묻어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속담을 빌어 ‘이수(耳樹)’라고 지어 낙관에 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문학적 DNA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듯하군요.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집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봤어요. 1960년대 우리 동네에 책이 많은 목사님 집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 손자가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목사님 집에서 책을 빌려볼 수 있었지요. 큰 기쁨이었습니다. 당시 편은범 목사님께 선물 받은 책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연극 어린이 대본이었어요. 1930년에 발행된 번역본이었죠. 부산 곰곰이서점에 어린이 책 박물관 건립 계획이 있어 기증했습니다. 4학년 때 특활반을 구성했는데 고학년으로 구성된 혼합 축구부가 유명했습니다. 축구부에 들지 못한 학생들 중에서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아 반 칸짜리 교실에서 문예반을 만들었어요. 그때 「소나기」라는 시를 썼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보리타작 중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허둥지둥 거둬들이는 내용이었어요. 문예반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그 시를 판서해놓으셨더군요. 내 시 한 편으로 한 시간 동안 수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를 경험하고 감상했던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자신감이나 재능보다는 책과 친해지게 되고, 글쓰기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지요. 이: 선생님의 청년기는 어땠나요? 김 : 우리 세대는 청소년기는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진학률이 낮았지요. 집안을 도와 사회로 나오는 예가 많았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버지는 자식 교육열이 높았던 덕분에 대학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비 부담이 없었던 대구교대로 진학했습니다. 이 : 그러면 문학과의 인연은 대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나요? 김 : 대구교대에 다닐 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경북고등학교 출신 친구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시월유신이 발표될 무렵, 야학 활동을 했는데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시와 산문을 습작하고 막걸리집에서 그 친구와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야학이 불량 서클로 찍혀서 중단되고 말았어요. 그 후 지산교회 장로님이 양계장 한 동을 빌려서 야학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버려진 책상과 의자를 수거해 교실을 만들었지요. 화가였던 유병우가 교감, 유익종 씨가 교무 그리고 나는 학생과 일을 맡았습니다. 이 : 선생님의 문청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포항의 박수철 화백과 김원택 등이 모여서 ‘형상회’라는 동인 활동을 했어요. 시내 백양식당에서 500원 하던 빈대떡을 놓고 소주를 마시며 시와 산문 습작을 읽고 토론했지요. 글과 그림과 음악을 혼합해 시화전도 세 차례 열었습니다. 김원택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르는 등 그 시절 작가 지망생들의 열정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문학 등단 플랫폼이 넘쳐나는 요즘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요. 김일광은… 1952년 12월 포항 남구 섬안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창주문학상 동화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바다’를 비롯해 동화와 청소년소설 등을 40여 권 발간했다. ‘귀신고래’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됐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과 ‘포항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애린문화상(2018)과 경상북도 문화상(2014), MBC삼일문화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2024-10-13

1970∼80년대 시장 인파로 북적, 명절 땐 밤샘 장사도 예사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 전통시장의 ‘빅2’를 형성하고 있는 큰동해시장.(물론 외형, 규모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만) 전통시장으로서 포항시 정식 인증을 받은 게 2008년이니까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죽도시장이 1500개 점포의 매머드급 상권을 자랑하는 데 비해 큰동해시장은 150여 개 점포에 하루 유동 인구도 2000여 명 남짓하다. 포항시 남부 조그만 근린시장으로 그다지 주목할 요소가 크게 없어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뜻밖의 내공(內功)에 놀라게 된다. 송도, 해도동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소금을 생산, 유통하던 동해안 제염(製鹽)의 전초 기지였고, 1960~70년대 포항종합제철 태동시기 근로자들의 애환이 깃든 삶의 터전이었다. 또 바로 옆 지역 최대 물류거점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의 상권을 양분하며, 서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생활경제 현장이기도 하다. 포항에 상업을 일으키고, 물류 전통을 세웠던 큰동해시장으로 들어가 보자. ◆해도동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소금 생산 기지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이의민(李義旼)의 부친은 경주의 소금 갑부였다고 한다. 경주에 염전이 있을 일은 없고, 그렇다면 이 소금은 포항 송도, 해도동 일대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들은 형산강-부조장(扶助場)을 거쳐 경주를 거쳐 영남의 내륙으로 유통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포항 해도동 일대 소금 생산 기원을 신라시대까지 소급하고 있다. 해도동 일대의 미네랄이 풍부한 염수(鹽水), 풍부한 일조량에 형산강 교역루트까지 소금 생산의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진흥왕 조(條)’에서도 형산강과 서형산성(西兄山城)에 ‘염고’(鹽庫)가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 소금은 단순 생산을 넘어 집하(集荷)-도매-유통을 망라하는 산업 단계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주로 형산강 뱃길과 보부상을 거쳐 내륙으로 팔려 나갔고 일부 상등품은 왕실에까지 진상됐다고 한다. 과거 해도동의 지명은 ‘염동골’(鹽東谷). 1961년까지 이 지역엔 8만평(26만4462㎡) 정도 소금밭이 경영되었고 100여 명의 염부(鹽夫)가 연간 2000가마를 생산 했다고 한다. 해도동 소금은 전통 방식으로 생산된 자염(煮鹽)으로 염도를 높인 함수를 가마솥에 끓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영양소가 풍부해 서민들의 반찬, 양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자염은 일제강점기 이후 천일염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송도해수욕장 배후이자, 형산강 하류에 위치한 해도동은 1960년대만 해도 갈대밭, 연밭, 염전으로 이뤄진 저습지대였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서면서 짧은 기간 내에 주거지역으로 변모했다. 지반이 약한 늪지대라는 핸디캡 때문에 그 흔한 대단지 아파트 하나 들어서지 못했지만, 철강공단과 시가지를 연결하던 길목이라는 입지를 배경으로 해도동은 포항 남부의 대표 주택단지로 부상했다. ◆1980년도 본격 상가 건물 들어서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포항제철과 철강단지 근로자들이 해도동으로 몰려들면서 1970년대 주택가 공터, 대로변에 노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 남짓 거리에 죽도시장이 있었지만 당장 급한 생필품 조달처가 따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설 장옥(場屋)이나 비닐하우스가 얼기설기 노점 형태로 이어져 오던 시장은 1980년에 들어와 본격 상가 건물을 짓고 전통시장 외형을 갖추게 됐다. 현재 시장 안쪽에 좌우로 늘어선 복합건물이 그 당시 완공된 상가다. 시장은 들어서자마자 꽤 큰 상권을 형성했다. 1980년 당시 해도동 인구만 4만여 명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포항제철, 철강단지 근로자들이 대거 몰려 살면서 시장은 성장을 거듭했다. 1980년대 들어 인근에 갑자기 들어선 아파트도 상권 형성에 큰 도움이 됐다. 1979년 ‘동아아파트’를 시작으로 ‘코스모스빌라’ ‘동부타운’ ‘점보맨션’ ‘명성 송도타운’ 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유동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뭐니뭐니해도 큰동해시장의 상권에 큰 영향을 끼친 건 포항제철, 철강공단 근로자들이었다. 고(高)임금군에 속했던 이들은 구매력을 바탕으로 시장의 주 고객이자, 소비자로 부상했다. 근로자들은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삼삼오오 모여 소주 한잔으로 하루 피로를 풀었고, 귀갓길엔 가족들을 위해 간식이나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가는 것이 당시 흔한 풍경이었다. 제철소와 공단 근로자들이 들락거렸던 술집, 칼국숫집, 분식집 등 몇몇 가게들은 지금도 시장을 대표하는 맛집으로 남아있다. ◆1980년대 밤샘 장사 예사, IMF 이후 쇠퇴 큰동해시장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당시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외식이나 쇼핑을 나온 시민들로 넘쳐났다. 발이 밟히고 어깨가 부딪혀 교행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산업화 시기 막강한 배후 인구와 구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이나 명절 전날에는 새벽까지 손님들이 몰려들어 가족들이 돌아가며 밤새 영업을 하는 것도 당시엔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시장에서 자전거 점포를 했다는 한 어르신은 “어린이날엔 자전거를 사러 온 손님들이 새벽까지 문을 두드려, 밤새 자전거를 수십대씩 팔았다”며 “그 때는 송도해수욕장 자갈을 가져다 팔아도 장사가 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기억 했다. 40년간 떡집을 운영했다는 한 어르신도 “그땐 정말 명절을 전후해서는 밤새도록 쌀 불리고, 가루 내서, 찌고, 썰고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가족들은 물론 멀리서 친척들 일손까지 불러들여야 겨우 주문을 맞춰 냈다고 한다. 한때 짐자전거를 몇 대씩 둘 정도로 번창했던 전통시장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 우선 4만여 명에 달하던 해도동 인구는 1만6000여 명으로 줄면서 유동인구가 급감했고, 공장의 설비 자동화로 많은 근로자들이 해도동을 떠났다. 시장 상권, 외형의 뚜렷한 변화는 1997년 IMF 이후부터였다.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며 유통업계도 무한경쟁 시대가 열렸다. 마을마다 대형마트, SSM들이 생겼고 홈쇼핑 등 온라인 업체들이 들어서며 전통시장 등 오프라인 상권은 급속히 쇠락했다. ◆‘문광형 시장’ 등 선정되며 상권 활성화 갈수록 위축되는 전통시장의 위상, 상인들도 대안 모색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상인회에서는 먼저 전통시장 정부 지원사업에 주목했다. 우선 예산과 행정지원이 있어야 상인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큰동해시장은 정부 지원사업 첫 번째 단추인 ‘특성화 첫걸음’(2018년)에 선정되면서 상인들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 내친 김에 2019년엔 ‘도약 단계’인 ‘문화관광형 시장’에 응모했다. 까다로운 심사 조건 때문에 선정이 힘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철의 기상, 운하의 낭만’을 컨셉으로 한 스토리텔링이 평가를 받아 문광형 시장에 선정돼 예산(10억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상인회는 2021년 ‘문화관광형 시장’에 또다시 선정되면서 상인회 활동에 연속성을 갖고 활발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상인회의 저력을 보여주는 쾌보(快報)는 계속 이어졌다. 전국에 5곳만 지정해 지원한다는 ‘카카오 전통시장’에 선정되는가 하면, 상거래 IT 정책을 지원하는 ‘디지털 전통시장’에도 뽑혔다. 이런 예산 지원과 정부 지원을 배경으로 상인회는 많은 활성화 작업을 펼치고 있다. 전국 최초로 ‘고객회원제’를 실시했고, 모바일 장보기 앱 ‘달려라 큰동해’ 사업을 펼쳤다. 매주 토요일엔 ‘세일거리’가 열리고 매주 마지막 주는 ‘고객 회원 할인 주간’이 운영된다. 또 큰동해시장 만의 특산품, 밀키트 등을 개발하고 지역 대표상품인 과메기, 대게 전국배송을 통해 상인들의 수입을 늘린다는 계획도 진행하고 있다. 김병석 상인회장은 “각종 시장 활성화 사업을 통해 시장의 매출이 30~40% 이상 상승했고 상인, 소비자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 이라며 “이 모든 성과는 삶의 터전인 시장을 살려 보자고 팔을 걷어붙인 상인들의 노력, 희생, 협조 덕”이라고 강조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0-10

‘청년이 찾아오는 도시 고령’ 지방 소멸 위기 극복한다

지난달 22일 고령군 대가야문화누리 우륵홀에서는 600여 명의 청년이 참석한 제2회 고령군 청년의 날 기념공연이 열렸다. ‘청년의 꿈을 더 크게’라는 부제로 기획된 그날 공연처럼 고령군은 청년들의 열정과 꿈을 응원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입안해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군정 슬로건부터 “젊은 고령, 힘있는 고령”이다. 고령군은 인구 감소에 따른 지방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구정책도 청년인구 활성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투자 역시 아끼지 않는다. 청년인구 활성화 정책이 인구의 주요 이탈층인 청년을 붙잡고, 이를 통해 미래 출산율도 끌어올려 장기적으로 안정된 지역의 인구 구성을 이끌어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청년’과 ‘인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령군의 지방소멸 위기극복 정책을 점검해본다. □ 인구 감소 막아줄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 청년층의 주거 안정을 위한 사업은 고령군의 핵심 정책 중 하나다. 지난 9월 말에는 다산면 벌지리에서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 기공식’을 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하고,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다짐했다.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사업’은 경북도가 인구 감소로 쇠퇴하는 지역의 위기 앞에서 모범적이고 자랑스러운 전통인 하회마을처럼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흔들림 없이 지속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이는 새로운 도시 모델 구축을 목표로 8개 시·군을 선정해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그중 고령군이 가장 먼저 시작을 알린 것이다. 고령군의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사업은 지역 특성에 맞는 지속가능한 주거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인재와 청년들이 찾아오는 지방시대 전환의 상징적인 장소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앞으로 사업비 230억 원을 들여 면적 2만5370㎡ 부지에 임대주택 25동 70호(공동주택 8동 44호, 단독주택 17동 26호), 커뮤니티센터, 테라피농장, 체육시설, 돌봄시설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 사업은 올해 9월 착공해 2027년 준공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국토부 공모사업인 청년복합귀농타운과 일자리 연계형 주택지원사업 등에 선정돼 국도비를 확보했고, 현재 사업을 적극 추진 중”이라고 고령군은 알려왔다. □ 돌봄시설 포함된 청년·신혼부부 임대주택도 고령군은 노후된 다가구주택을 매입한 후 리모델링을 진행해 저렴하게 임대공급 하는 ‘청년행복 임대주택 사업’도 진행해 지난 8월 첫 입주를 시작했다. 이 임대주택은 월 1만원의 파격적인 임대 조건으로 최장 4년 동안 거주가 가능하다. 9세대의 입주자 모집에 44명이 신청해 세간의 높은 관심을 증명했다. 이런 관심을 바탕으로 향후 사업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경북개발공사와 함께 하는 임대주택사업도 추진 중이다. 청년과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50호 정도를 공급할 예정이라는 게 고령군의 부연. 2026년 하반기가 되면 1차사업으로 지어질 20호에 사람들이 입주할 예정이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경북도의 저출생 대응사업과 연계해 돌봄시설을 포함하는 공동주택으로 공급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주거 안정을 위한 다양하고 차별화된 지원정책도 발굴해 시행하고 있다. 최대 10개월간 월 10만 원을 지원하는 청년 월세주거비 지원사업은 소득기준을 완화해 호응을 얻었다. 2023년부터 시행된 주택대출 이자지원 사업도 연간 최대 400만원을 지원해, 2024년 6월 말까지 28세대가 혜택을 받았다. 이는 고령군으로 이주하는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또한, 이 정책은 경상북도 공모사업에 선정돼 이주를 목적으로 하는 신규 주택건축에 필요한 도로, 상하수도 등의 생활SOC 시설을 가구당 최대 1500만원 내에서 지원하기도 한다. 청년층의 주거 안정과 함께 일자리 창출 사업도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활용해 하나씩 진행중에 있다. 먼저 임대형 스마트팜을 조성하고 지난 7월부터 임대를 시작해 청년농부들의 지역 정착을 돕고 있다. ‘고령군 임대형 스마트팜’은 다산면 좌학리 1007번지 일원에 6500㎡ 크기의 경량철골 비닐온실 2동과 복합환경 제어설비를 갖춘 시설이다. 이는 창업농의 안정적인 농촌 정착형 모델을 정립하고, 인구 유입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된 사업. 스마트팜 보육사업을 수료하는 등 영농동기가 확실하고 준비가 된 농업인 6명을 선발해 7월 1일부터 최대 3년간 임대 형태로 운영을 시작했다. 고령군은 “향후 계속적인 임대를 통해 새로운 농업인을 발굴하고,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반시설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청년창업공간 ‘들썩거리’를 조성하고 7월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전통시장 내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전통시장의 오랜 역사와 청년들의 젊은 감성이 하나돼 큰 시너지를 만들어갈 목적으로 조성된 청년창업공간 들썩거리는 2023년 부지 매입을 시작해 2024년 6월에 조성이 완료됐다. 열정적인 청년이 창업교육을 수료하는 등 철저한 준비기간을 거쳐 돈가스 전문점 갈돈, 브런치 식당 시장브런치, 일본카레와 덮밥 전문점 코메야, 베이커리 전문점 희한한제과점 등 총 4곳이 창업됐다. 앞으로도 고령군은 행정력을 집중해 지역경제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전통시장을 성장시켜 나갈 각종 정책을 펼칠 계획이다. □ 청년 정책으로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 수상 위와 같은 직접사업 외에도 일자리·청년창업지원센터 운영, 자격증 취득 지원, 청년 근로자 교통비 지원, 청년 창업자 임차료 및 리모델링 지원, 예비창업가 육성사업 등 적극적 청년일자리 정책을 추진하는 고령군은 7월 9일 제29회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에서 ‘일자리 창출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거와 일자리 관련 정책과 함께 청년층 이탈의 주요 원인인 자녀의 양육과 교육환경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시책도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추진 중이다. 원어민 영어교실, 창의력 증진 프로그램 등 수요는 높으나 지역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교육과정을 개설해 제공하고 있으며, 4월에는 고령 어린이과학체험관을 개관해 부족한 교육 인프라를 확충했다. 다자녀가정의 양육부담을 경감해 출산과 양육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도 멈춤 없이 진행됐고, 3월부터 다자녀가정 양육장려금과 학자금 지급사업을 시작했다. 양육장려금은 고령군에 사는 3자녀 이상 가구 중 1~6세 셋째 이상 자녀에게는 매월 20만원, 7~18세 셋째 이상 자녀에게는 매월 15만원을 고령사랑상품권 등으로 지급한다. 다자녀가정 학자금은 고령에 사는 3자녀 이상 가구 중 34세 이하의 자녀가 국내 대학에 재학 중인 경우 학기당 15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출산 지원을 위한 고령군의 시책인 ‘산모 산후조리비 지원사업’도 시행 중이다. 고령군 거주 산모에게 출산 1회당 100만원, 쌍생아는 150만원을 지원한다. 고령군 관내에는 산후조리 시설이 없으나, 인접한 대구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 산모들의 관심과 호응도가 높다. 올해 6월부터는 지역 내 소아청소년과 부재로 인한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해 고령군 보건소 1층 출산통합지원센터에서 소아청소년과 진료도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된 정책들이 적극적인 소통의 장을 통해 발굴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고령군은 다자녀가정, 청년농업인, 청년창업가 등과 수시로 소통간담회를 가지고 있다. “이 자리엔 군수가 참여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이 고령군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이남철 고령군수는 “젊은 고령, 힘있는 고령이라는 군정 목표로 2년을 달려왔다”며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향후 관련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약속했다. 저출생과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소멸 위기는 어느 지자체 할 것 없이 주요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다. 미래를 바라보며 청년들을 지역에 불러들여 활기찬 도시를 만들겠다는 고령군의 정책이 어떤 구체적 결실을 맺을지 주목된다. /전병휴 기자 kr5853@kbmaeil.com

2024-10-10

‘부부의 연’ 맺은 팽나무와 말채나무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72-1번지 나즐로(나홀로 즐겁게) 자인 계정숲을 찾았다. 작은 구릉지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로 구성된 혼효림의 도시 숲으로 보기 드문 자연 원림이다. 이팝나무, 말채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원림으로 과거 경산 자인지역에 자생한 나무를 알 수 있어 앞으로 산림을 복구할 때 중요한 사료적 가치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태적, 학문적인 것과는 별개로 한 장군과 관련된 무형유산과 지방 수령의 선덕비를 소장하고 있는 노천 역사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산책 중 재미있는 스토리를 전해주는 혼인목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팽나무와 말채나무가 한 몸이 되어 혼인목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두 나무가 한 몸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나무 앞에 산신 제단을 설치하여 고단한 삶을 나무에 의지하면서 소원을 빌고 위로를 받고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천신과 땅의 지신, 또는 인간과 연결해 주는 것이 나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마을 나무나 특별한 나무를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어 신목으로 귀하게 여기며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보호했다. 이러다 보니 그러한 나무가 있는 곳을 신성한 땅, 숲으로 여겼다. 지금까지 숲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산 자인 계정숲도 그러한 곳이 아닐까 싶다. 계정숲에는 이곳 출신 한 장군 묘와 시중당, 진충묘, 한 장군 오누이와 여원화상 등 시설물과 조선 왕조 시대 사또라 부르는 고을 수령 공덕비, 선정비가 31기나 있었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로 수피는 회색이다. 꽃은 4~5월에 피며 열매는 10월에 적갈색으로 익는다. 경북은 동해안 지역에 많이 분포하며 내염성과 병충해에도 강하다.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정자목, 방풍림으로 할머니처럼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 있는 나무이다. 이에 비해 말채나무는 층층나무과로 수피는 검은색으로 그물처럼 갈라진다. 꽃은 취산화서로 6월에 피고 열매는 9~10월에 흑색으로 익는다. 다른 나무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나뭇가지는 말을 부리는 말채로 할아버지처럼 작은 거인의 인격자 나무이다. 팽나무와 말채나무의 혼인목은 바로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혼인목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사랑목으로 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릎 높이나 가슴높이에 보기 흉한 혹부리를 달고 있는 참나무를 볼 때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는 아마 주민들이 도토리를 줍기 위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두들겨 패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매년 얻어맞다 보니 혹부리가 되어 아픈 고통의 역사를 몸에 세겨두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고 기념탑을 세우거나 역사를 기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우리의 가난한 시절,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로 남아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산물로 교훈이 되고 있다. 한 장군 묘 앞에서 그 옛날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보았다. 산책길에 세워둔 안내 표지판에는 ‘경산자인단오제’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민속축제란다. 단오절에 한 장군 묘 대제를 올리고 여원무, 자인팔광대, 자인단오굿 등 각종 민속 연희를 연다고 한다. 이러한 제례 의식과 충의 정신 그리고 다채로운 민속놀이는 독특한 양식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여원무는 자인 도천산에 기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던 왜적을 버들못으로 유인하기 위해 한 장군이 그의 누이와 함께 꾸민 춤으로 화려한 꽃관을 쓰고 장정들이 여자로 가장하여 추었던 화관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단오제 때에는 자인면 계정숲을 중심으로 주로 농사철에 부르던 들소리로 11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인계정들소리’로는 들지신밟기, 망깨소리, 모찌기소리, 논매기소리, 메타작소리, 방아타령, 칭칭이, 목도소리, 보억사소리, 모내기소리, 어사잉어가 있다고 한다. 이 모두 어릴 적에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들이었다. 경산 자인 계정숲은 이제 이 지역의 지난 유무형의 역사를 한데 묶은 역사박물관과 자연 생태적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숲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여 새들의 천국이 되고 많은 생명체가 찾아드는 생태계로 거듭나도록 모두가 보호에 앞장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바로 우리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숲의 가장자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수령의 공덕비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비석이 깨끗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깨지고 흠이 간 부분을 이어 붙인 흔적이 있는 것도 있었다. 이는 과한 공적의 자랑으로 아이들의 비석치기 놀이가 어른들의 비석치기 대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지방 수령의 선덕비는 역사적 유물임이 분명한데 그동안 방치하다시피 한 것을 이제 한데 모아 계정숲에 줄 세워 놓았다. 세월에 이길 장사가 없는 것처럼 선정비도 비바람에 두들겨 맞아 비문 해석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무덤 속의 생활 도구나 몸의 장신구는 문화재라 하여 박물관에 온도, 습도까지 맞추어 영구히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형평성에 맞추어서라도 선정비는 최소한 비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는 보호 장치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계정숲이 품어 온기라도 불어넣어 주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황처사학유공비 (黃處士鶴有功碑) 내용은 무릇 사람에게 공덕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잊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며 선행을 행하도록 장려하는 뜻을 펼칠 수가 없다. 저 처사 황학은 외촌에 사는 사람이다. 그가 단을 세우고 성인께 임금의 장수를 비는 것은 타고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며, 가산을 기우려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사람으로 행해야 할 도리와 연관된 것이다. 우리 자인 고을은 가장 고질적인 병폐가 가산의 환곡이었다. 처사 황학께서 몹시 분해하며 그 병폐를 혁파할 마음을 가지셨다. 임신년으로부터 시작하여 밭과 농막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열일곱 번이나 상경하였다. 여러 번 새 당상관에게 청을 넣고, 자주 여섯 판서에게 호소하였다. 또 비변사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폐를 혁파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나가 호소하다가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석 달 동안이나 지루하게 갇혀 있다가 풀려나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임오년에 이르러 다시 순영에 환곡의 콩 구백 석을 다른 진에서 옮겨오는 것에 대해 글을 올리니, 이때가 정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이어서 다시 환곡 쌀 사백 석을 본진에 귀속시켜 달라는 글을 올리니, 이때가 김상국께서 절제사로 계실 때이다. 또 김 어사께서 남쪽으로 오시는 날을 맞이하여 산역인 박송학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이끌고서 남아 있는 환곡 칠백 석을 혁파하였다. 처사께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세분 대신의 두터운 은혜이다. 어찌 그 공을 노래하지 않으며, 그 덕을 기리지 않겠는가.“ 이에 자인 고을의 백성들에게 말을 꺼내 환기시켜 비석에다 새겨 그 덕을 찬양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위대한 업적이 어찌 세상에 드물지 않겠는가? 오직 이 고을의 어른아이 할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 공을 잊거나 그 사적을 민멸하게 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이 짧은 비석을 길가에 세워서 잊지 못하는 뜻을 보이노라. -1842년 8월 기록함·처사 황학·건립연대 1842년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09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함께 추고 싶어

마지막 대담은 장소가 바뀌었다. 그동안 동빈내항 인근에 있는 포항예총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마지막 대담은 남구 연일읍 자명리에서 하자고 했다. 그곳에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자명리의 폐교된 자명초등학교는 예술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일을 김동은 회장이 벌인 것이다. 비옷을 입고 옮겨 심었다던 백일홍이 주인보다 먼저 반겨주었다. 전은주(이하 전) : 자주 지나다니던 길인데 여기에 예술촌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다들 그러더군요. 4차선 도로 공사한다고 문패까지 떼버려 더 그럴 겁니다. 전 : 넓은 운동장과 야외 데크가 인상적이군요. 김 : 이 운동장 때문에 여기 들어왔습니다. 아늑한 운동장에서 아이와 어른들이 다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싶어서요. 전 : 지난번에 들려주신 포항의 노래를 자꾸 흥얼거리게 됩니다. 김 : 그 노래가 중독성이 있지요. 한번은 어머니들과 평생학습원에서 수업하다가 야외 수업으로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 갔어요. 광장에서 연습복 치마를 입고 ‘포항의 노래’에 맞춰 ‘월월이청청’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귀비고에 현장학습을 온 초등학생들이 함께해도 되냐고 해서 다 함께 춤을 추었지요. 아이들이 아주 재미있어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음악 좀 구할 수 없냐”고 묻더군요. “연락처를 주시면 보내드리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연락처가 적힌 쪽지가 없어진 거예요. 전 :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봤을 때 어떠셨나요. 김 : 그때 새삼 느꼈지요.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춤을 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전 : 그래서 ‘자명예술촌’을 만든 건가요. 김 : 원래 환여동에 있는 폐교된 대양초등학교 부지를 생각했습니다. 바다와 가깝고,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추면 끝내줄 것 같더군요. 밤만 되면 그 학교 앞에 가서 서성거렸어요. 그런데 그 학교는 교육청에서 유아교육체험센터로 운영하면서 물거품이 됐지요. 대안으로 폐교된 자명초등학교를 자명예술촌으로 바꿔 2022년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올 때 쑥이 제 키만큼 자라 있었어요. 2년에 걸쳐 그 풀을 제거했는데 저 교실 뒤편에는 아직 손도 못 댔습니다. 사실 관리하기가 아주 힘든데 기분은 정말 좋습니다. 여기 와서 새벽형 인간이 되었지요. 온갖 새소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호미를 들고 나가 풀을 맵니다. 새까맣게 탄 거친 손을 보고 무용가의 손이 왜 그러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내 손이 자랑스러워요. 요즘 매일 운동장에서 궁리합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에 일인용 매트 하나씩 깔고 다 함께 요가를 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운동장 가득 원터치 모기장 속에 앉아 별과 달을 보며 우리 노래를 함께 듣고 부르면 얼마나 황홀할까, 하고요. 전 :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추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월월이청청’은 어떤 춤인가요. 김 : 전라도에는 ‘강강술래’가 있습니다. 목포 등지에서 불렸으니까 전라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라도 ‘강강술래’라고 하지는 않지요. ‘월월이청청’은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면서 부르던 노래인데, 소리하며 춤을 춘다 해서 ‘소리춤’이라고도 합니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월월이청청’에 대한 연구를 했지요. 민속무용 전문위원인 중앙대 정병호 교수님께 “‘강강술래’가 지역 문화재로 등록돼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월월이청청’도 지방문화재로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면 될까요?” 하고 여쭤봤더니 이슈로 만들어 널리 알려야 도움이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2000년 경주 엑스포 폐막공연을 비롯해 행사만 있으면 ‘월월이청청’을 공연했습니다. 포항, 경주 등에서 ‘월월이청청’ 공연을 했다는 뉴스가 나가니까 영덕에서 갑자기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더군요. “문화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냐”고 반문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우리 모두의 ‘월월이청청’이 되어야 하는데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전 : ‘월월이청청’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김 : ‘강강술래’는 엄청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가사마다 동작을 예술적으로 만들어놓았지요. ‘월월이청청’도 재 밟기, 대문 열기 등 대목마다 동작이 있어요. 여성들이 춤을 추면서 한풀이를 한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여기서 이렇게 하고 저기서 저렇게 하고, 이런 것은 하나도 없었지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누군가 한 사람이 일어서서 흥얼거리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서 흥얼거리고요. 옛날에 시골에 가면 “모둠 떡 해 먹는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보름달 밤에 누구는 뭘 가져오고, 또 누구는 다른 걸 가져오고, 이런 식으로 하나씩 가져와서 먹고 놀다가 우리 춤 한번 춰 볼래, 그랬겠지요. 걷고 돌다 보니까 더 크게 한번 돌아보자 했을 테고, 인원이 점점 많아지니까 안으로 한 사람 손 놓고 들어가다 보니 골뱅이, 실꾸리 감기가 되고요. 그리고 실꾸리 감았으니 풀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실꾸리 풀기가 되고요. 그런 놀이가 춤으로 된 것이 ‘강강술래’고 ‘월월이청청’인 겁니다. 전 : ‘강강술래’와 ‘월월이청청’의 원리가 그렇게 되는 것이군요. 회장님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퍼블릭 프로그램이나 시니어 수업을 많이 하시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김 : 학생들을 가르쳐 전문가로 키워내는 일은 다했으니 일반인들과 같이 놀 수 있는 게 뭘까, 그런 궁리를 합니다. 나도 내 나이에 맞게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무용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하지요. 그래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 관심이 많아요. 포항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만든 ‘사철춤’도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씨뿌리기, 모내기, 추수하기…, 이런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 동작만으로도 굴신운동이 됩니다. 평생학습법이 시행되면서 예전에는 문턱이 높던 문화예술교육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지요. 양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우수한 프로그램으로 대상자들을 만나고자 늘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 : 아직도 춤에 대해 공부하실 게 있습니까. 김 :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겠지요. 새로운 것도 접해야 하고요. 그래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어요. 코로나가 유행할 때는 한국댄스테라피협회 류분순 이사장님한테서 동작 치유에 대해 배웠습니다. 1년 동안 꾸준히 수업을 받았고, 2급 자격증도 취득했지요. 내가 해온 춤은 주입식으로 배우고 가르쳤다면, 동작 치유는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게 해야 합니다. 류분순 이사장은 현대무용을 전공하셨는데 내가 한국무용 동작을 하면 그게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곤 했어요. 한국무용이 가장 자연스럽다면서요. 전 : ‘김동은 무용단’은 연오랑세오녀를 바탕으로 한 ‘Sun Moon-별이 된 연인’, ‘충비 단향, 대를 잇다’를 비롯해 포항의 문화유산을 콘텐츠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는 지역 예술가가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승화해야 하는 주제가 아닐까요? 춤으로 좀 더 친근하게 포항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일월문화제 때 길쌈놀이를 접목해 세오녀의 비단 짜기를 기획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길쌈놀이를 민속놀이로 많이 하는데 다양한 색깔을 사용하곤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줄을 만들어서 포항의 노래에 맞춰 공연했습니다. 관객이 동참해서 다 함께 줄을 잡고 춤을 추었는데 반응이 참 좋았어요. 전 : 혹시 포항에서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없었는지요. 김 : 시립무용단을 해체한 일입니다.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지요. 그때 억울하더라도 좀 참을 걸, 시립무용단이 있으면 후배나 제자들이 돌아올 자리도 있었을 텐데……. 아주 아쉽습니다. 전 :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김 : 포항에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포항예총 회장으로 봉사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래전에 예술의 경계는 무너졌지요. 길가의 백일홍도 색색이 피어 있으니 보기에 더 좋지 않아요? 어머니의 품으로 보듬어 포항의 예술가들이 더불어 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끝

2024-10-09

포스코·포스코이앤씨 “중소협력사와 함께 나아간다”

포스코와 포스코이앤씨가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선정하는 2023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이번 평가 결과로 포스코는 5년 연속 최우수 등급을 획득하게 됐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 2021년부터 3년 연속 최우수 등급을 획득해 신규 최우수 명예기업에 선정됐다. 지난 8일 개최된 제80차 동반성장위원회에서는 대·중견기업 218개사를 대상으로 2023년 동반성장지수 평가 결과를 확정 공표했다. 이번에 발표한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포스코를 포함해 상위 44개사가 최우수 등급으로 결정됐다. 이 기업들에게는 공정위 직권조사 면제, 공공입찰 사전심사 가점 등 정부차원의 인센티브가 제공된다. ◆ 동반성장지수 동반성장지수는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 촉진을 목적으로 대·중견기업의 동반성장 수준을 평가해 계량화한 지표다.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동반성장 종합평가’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공정거래협약 이행평가’를 합산해 산정하고 있으며, 평가에 따라 최우수, 우수, 양호, 보통, 미흡 총 5개 등급으로 나눈다. 포스코는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 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상생협력을 적극 실천한 점을 인정받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포스코는 강건한 공급망 구축을 위해 성과공유제, 동반성장지원단 등 8대 대표 동반성장 프로그램을 운영해 중소기업과의 지속적인 동반성장을 추진하고 있다. 포스코 동반성장 8대 대표 프로그램으로 △성과공유제 △스마트화 역량강화 △1~2차 대금직불체계 △철강ESG상생펀드 △PHP봉사단 △포유드림 잡매칭 △동반성장지원단 △벤처육성이 있다. ◆ 포스코 성과공유제 도입 20주년 성과공유제는 2004년 포스코가 국내 최초로 도입한 제도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개선 과제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것이다. 개선 과제 수행을 통해 중소기업은 기술력 확보와 동시에 수익성을 높이고, 포스코는 전문성과 역량있는 중소기업을 통해 우수한 제품을 공급받는다. 장기적으로 포스코와 중소기업의 상호 경쟁력을 동시에 강화한다는 점에서 산업계 동반성장을 대표하는 표준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포스코는 지난해까지 2316개사와 국산화, 원가절감, 안전환경, 매출확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총 5521건의 개선 과제를 수행해 누적 8031억 원을 중소기업 성과보상으로 지급했다. ◆ 스마트공장 구축 통한 생산성 향상 지원 중소기업의 생산성 혁신을 지원하는 ‘스마트화 역량강화’는 포스코 고유의 혁신 기법인 QSS(Quick Six Sigma)를 통해 중소기업 임직원들의 혁신 마인드를 배양하고, 그 토대 위에 스마트공장 구축을 지원함으로써 개선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포스코는 2013년도부터 지난해까지 총 393억 원을 출연해 2234개의 거래·미거래사를 지원했다. 매출액 증대, 생산 리드타임 감소와 같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며 수혜 기업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 ‘중소기업 고민 해결사’ 동반성장지원단 올해 출범 4년 차를 맞이하는 ‘동반성장지원단’은 각 분야에서 오랜 근무 경력과 전문성을 갖춘 포스코 직원들로 구성된 중소기업 지원 조직이다. △스마트공장 구축 △설비·공정 개선 △품질·기술 혁신 △ESG 현안 해결 등 총 4개 분야에서 맞춤형 컨설팅을 실시해 중소기업의 혁신을 돕고 있다. 2021년 출범 이후 지난해까지 약 100여 곳의 중소기업이 참여해 300여 건의 과제를 수행해 약 339억 원의 재무효과를 거뒀다. 포스코는 지속가능한 공급망 구축이 곧 대한민국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와 직결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의 경영역량, 제품 품질, 생산성 향상을 도모해 포스코와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도록 동반성장 활동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 ◆ 포스코이앤씨, 3년 연속 최우수로 ‘최우수 명예기업’ 포스코이앤씨는 2020년부터 자체적으로 △공정 △공존 △공감 △공유 △공생 등 동반성장 5대 브랜드를 도입했다. 중소협력사를 위한 실질적인 동반성장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소통활동을 전개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성과공유제’ 운영으로 협력사의 기술력 제고는 물론 장기공급권, 단가계약 등의 성과보상을 통해 다양한 판로를 지원하고 있다. 포스코이앤씨는 중소협력사와 2008년부터 지금까지 총 115건의 기술협약을 체결했고, 1605억원의 성과보상으로 협력사의 수주 경쟁력 및 매출 증대에 기여해 오고 있다. 또한 ‘동반성장지원단’을 통해 안전, 품질, 리모델링 교육 및 안전, ESG 컨설팅 등 포스코이앤씨가 보유한 역량 및 인프라를 활용해 협력사를 지원한다. 원자력, 해상풍력, 이차전지 등 회사가 추진하는 신사업 분야의 공동기술개발을 통해 중소협력사의 기술역량 향상에 앞장서고 있다. 이외에도 포스코이앤씨는 2020년부터 협력사의 적정이윤 보장을 위한 저가제한 낙찰제를 도입해 운영해 오고 있다. 협력사의 안전사고 예방 및 탄소 감축 실천을 위한 태양광 이동식 근로자 휴게실 지원, 협력사 유동성 제고를 위한 금융지원 등 중소협력사와 상생협력을 위한 다양한 동반성장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포스코이앤씨 관계자는 “앞으로도 비지니스파트너인 중소협력사와 지속적인 상생협력을 통해 강건한 공급망 생태계를 조성하고 친환경 미래사회 건설을 위해 업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0-09

대박 난 ‘구미푸드페스티벌’… 성숙한 시민의식 빛났다

첨단산업도시인 구미의 대표 음식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음식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사실상 없음에도 구미에서는 푸드페스티벌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구미는 1969년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기위해 많이 사람들이 찾아 온 곳이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전국 각 지역의 음식이 존재하게 됐다. 구미 토박이인 김장호 시장은 전국의 음식이 모여있는 구미만의 특색을 살려 ‘구미푸드페스티벌’을 만들었다. 올해 3회째를 맞은 구미푸드페스티벌은 시민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말그대로 대박이 났다. 구미푸드페스티벌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현장에서 찾아봤다. □ 음식에 트렌드를 담다 지난 5일부터 6일까지 구미시 송정맛길(복개천)에서 열린 제3회 구미푸드페스티벌에는 지역 60개 음식점이 참여했다. 대부분의 음식축제에서는 대표 음식을 판매하는데 그치지만, 구미푸드페스티벌은 다르다. 음식에 트렌드를 담았다. 삼겹살을 구우며 도심 속 캠핑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삼겹굽굽존’이 대표적이다. 인조잔디가 깔린 이곳에서 조리해 먹는 삼결살은 가족단위 방문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또 요즘 젊은 세대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정호영 셰프와 함께하는 구미 미식존’을 만들어 운영했다. 구미 미식존에는 푸드페스티벌에 참가하는 60개 업소 중 정호영 셰프팀에서 선정한 10개 업소가 ‘구미의 맛’을 현대적인 트렌드로 해석한 음식들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다른 참가 음식점들도 각양각색의 다양한 음식들을 선보이면서 방문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밖에도 한식대가 7명, 일본 젠다마요리연구회 7명이 참여한 한·일 음식교류전도 눈길을 끌었다. 한·일 음식교류전에서는 한국의 도토리 쇠고기말이와 일본의 타코야끼, 화과자(스하마)를 체험할 수도 있어 큰 관심을 받았다. □ 한 자리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보다 구미푸드페스티벌의 가장 큰 장점을 바로 한 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전에 구미지역 음식점 중 엄격한 심사를 거쳐 맛집 60곳을 선정해 참여시켰다. 선정된 60곳 맛집의 음식도 다양하다. 복어요리를 비롯해 백숙, 떡볶이, 닭갈비, 통닭, 국수, 칼국수, 쌀국수, 알탕, 버거, 닭발, 삼결살, 냉삼겹, 막창, 추어탕, 케밥, 회, 찜요리, 초밥 등 다양한 메뉴를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특히, 가격도 저렴하게 판매해 방문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또 우리밀로 만든 베이커리와 베이쿠미, 지역 농산물도 선보여 관심을 끌었다. 대구에서 연인과 함께 행사장을 찾은 노정욱(26)씨는 “여러 축제장을 가봤지만 구미처럼 한 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면서 “음식의 맛, 가격, 위생과 더불어 친절함도 모두 만족한다. 내년 축제도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 눈과 귀가 즐거운 푸드페스티벌 이번 구미푸드페스티벌은 ‘맛남, 그 이상의 즐거움을 만나다’라는 주제답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넘쳐났다. ‘포크페스티벌’에서는 유리상자, 동물원, 여행스케치, 마로니에 등 국내 대표 포크 뮤지션들이 가을 감성을 더했고, 행사장 중간지점에 마련된 이벤트 존에서는 버스킹 공연과 ‘쉿!(무소음) EDM파티 가면무도회’로 축제의 열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또 ‘구미어울림마당극큰잔치’와 ‘구미전국가요제’도 함께 열려 축제에 풍미를 더했다. 또 구미 수제맥주 마시기 대회, 구미빵 먹고 휘파람 불기 등 지역 특화 먹거리를 이용한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돼 호응을 이끌었다. 가족단위의 방문객을 위한 ‘키즈랜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곳에서는 에어바운스, 과학 체험, 쿠킹 체험 등 다양한 활동이 마련돼 온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밤에는 복개천 주차장 가로수길에 조성된 은하수 점등이 도심 야경과 어우러지면서 야외 음식축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축제를 빛내다 구미푸드페스티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축제장이 송정 복개천 주차장이다보니 접근성은 뛰어나지만, 축제장을 찾는 인파를 감안하면 주차시설이 부족하다. 지난해도 15만여 명이 축제장을 찾으면서 인근 도로는 심각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구미시민들도 1회, 2회 페스티벌을 거치면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교통이 원할하게 소통했다. 특히 지난해 15만여 명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축제장에서도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야외 축제임에도 흡연자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미푸드페스티벌에는 가족단위의 방문객이 많아서인지 야외 축제임에도 흡연자의 모습은 없었다. 흡연실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음에도 흡연자들은 축제장을 빠져나가 흡연하면서 비흡연자, 특히 어린이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또 축제장이 주거지역이라 소음 등의 민원요소가 있지만,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상생하자는 마음으로 축제가 준비되면서 민원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상인들도 인근 주민들의 이러한 배려에 보답하고자 축제를 오후 8시에 마감해 저녁시간 소음을 없앴다. 축제에 참여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먹고 남은 음식물을 직접 프레시존에서 분리수거를 하고 테이블과 주변을 정리하는 등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주면서 구미푸드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구미시와 관계자들의 노력도 한몫을 했다. 친환경 청결 축제를 위해 프레쉬존을 설치해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보관하도록 이끌었다. 또 시간별로 쓰레기를 수거해 축제 기간 냄새와 거리미관에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구미 음식의 자부심을 높이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구미푸드페스티벌을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구미 대표 축제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며 “다음달 1일 열리는 라면 축제도 즐길 거리와 낭만이 가득한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4-10-06

관객들 눈물바람 난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무용은 전용 공연장 없이는 관객들과 만나는 데 어려움이 있다. 1980년대 무용 공연은 육거리에 있는 시공관에서 열렸다. 하지만 시공관은 수준 있는 무용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무용 공연이 열리면 웃지 못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동은은 지역 무용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다. 전은주(이하 전) : 이매방 선생의 포항 공연 이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김동은(이하 김) : 그 공연을 계기로 포항에서 무용의 저변을 넓히려면 하루빨리 무용협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했지요. 지금 열리는 전국무용제를 그때는 대한민국 무용제라고 했어요.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대상을 받은 팀은 3개 지방을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 후 한 해도 빼먹지 않고 그 순회공연을 유치했어요. 시민들이 공연을 많이 봐야 무용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기고 무용에 대한 수준도 높아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전 : 특히 인상 깊었던 공연이 있습니까. 김 :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그 하늘 그 북소리’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만 해도 책 몇 권은 될 거예요. 당시에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조명을 비출 수가 없었습니다. 시공관 앞마당에 발전차를 불렀는데 주변 상가에서 시끄러워서 장사가 안된다며 시에다 진정을 넣어 공연을 못 할 뻔했지요. 그때 무용단이 20∼30명 정도 내려왔는데, 시공관 안에 분장실이 없어서 남자들은 바깥 골목에서 빗방울을 맞으며 화장하고 분장하고 그랬습니다. 전 : 믿기지 않는 얘기입니다. 김 : 돌이켜보면 힘들었지만, 가슴 벅찬 일이기도 했지요. 국립무용단을 초청해놓고 제가 학교마다 표를 팔러 다녔습니다. 교장 선생님들께 문화교실 때 무용 공연을 봐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객석 수는 생각하지 않고 표를 너무 많이 팔아버렸어요. 사실 표가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도 몰랐지요. 공연 당일 국립무용단 단장님이 관객을 더 입장시키면 너무 복잡해서 공연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밀려드는 관객을 보면서 저도 대책이 없었습니다. 통로는 물론이고 무대 바로 앞에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지요. 그런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다들 몰입하니까 숨소리만 나고 잡음 하나 없었습니다. ‘그 하늘 그 북소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무용 극화한 공연입니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한테 너희 북을 찢으라고 시키잖아요. 그걸 두루마리 편지로 연출해서 낙랑공주가 그 편지를 펼쳐 읽는데 무용수가 눈물을 흘리니 객석에서도 훌쩍거리면서 난리가 난 거예요. 공연이 끝나고 감사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전 : 많은 학생을 지도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는지요. 김 : 제자들은 하나같이 다 기억에 남지요. 무용가로 남아 있든 아니든 스쳐 간 인연이든 다 소중합니다. 1994년에 전국무용제가 대구에서 열렸을 때였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데 남자 무용수가 없어서 무용학원 1층에 있던 합기도 도장에 가서 남학생 몇 명만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관장은 아이들이 말을 듣겠냐며 난색을 보였는데 다행스럽게 남학생 7∼8명이 하겠다고 나섰지요. 그중 한 명이 경찰이 되었는데 오늘 전화가 왔어요. 스승의 날이라고 꽃을 보내주면서 제가 포항예총 회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며 축하해주더군요. 전국무용제가 열렸을 때 저 멋있는 남자 무용수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해병대 군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연습실에 오면 늘 배고프다고 했어요. 전기밥솥 세 개에 밥을 하고 찜통에 닭을 몇 마리씩 삶아서 닭개장을 끓여놓으면 순식간에 먹어치웠지요. 과일도 한 상자씩 넣어놓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 사라졌고요. 그래도 그때가 정말 행복했습니다. 전 :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군요. 김 : 그 남학생들 중에 무용을 전공한 친구도 있습니다. 말을 좀 더듬는 친구였어요. 이따금 짜장면을 시켜줬는데 먹고 나면 다른 아이들은 그냥 나가버렸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뒷정리를 깔끔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선생님, 저 무용 전공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똑같이 동작을 가르쳤지만, 그 친구는 감정이 탁 나왔어요. 딱 무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전공을 하겠다고 나서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더군요. 그때도 무용을 하겠다는 남학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극히 드물었지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무용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 현장에 들어와서 하는 것이 정말 다르다. 결코 화려하지 않으며 자신과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한다. 많이 힘든 일이라 권하고 싶지 않다.” 전 : 그 학생이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김 : 이미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말을 더듬으니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은 가지기 힘들 테지만, 춤은 몸으로 하는 것이니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가정도 이루어야 하는데 무용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레슨비를 받지 않고 그냥 한번 해보고 그래도 할 수 있겠으면 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정말 열심히 하는 거예요. 무용하는 사람은 몸이 악기니까 안경을 끼면 얼굴형이 변할 수 있으니 렌즈를 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실행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렌즈 끼우는 게 적응되지 않아서 나뿐만 아니라 학원의 여학생들도 다 같이 들여다보며 렌즈를 끼워주곤 했지요. 그 친구는 결국 서울로 진학했고 무용수로 성공했습니다. 우연히 접한 무용이 인생을 바꿔놓은 거죠. 전 :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생각납니다. 김 : 그렇지요. 저도 영화 수십 편을 찍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특히 그 남학생들과 전국무용제를 준비하면서 희열을 느끼곤 했답니다. 무대 세트를 밤새도록 만들어서 트럭에 싣고 대구까지 갔지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서 감격해하곤 합니다. 전 : 혹시 무용교육을 하면서 회의를 느낀 적이 있나요. 김 : 예전에는 학부모와 진로 상담할 때 아이가 학교 무용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국립무용단이나 시립무용단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어요. 무용학원 원장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을 거라고 합니다만, 무용과는 그보다 빨리 문을 닫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춤은 더 그래요. 아이들이 전공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제가 말렸어요. “전공은 안 된다, 춤이 좋으면 그저 춤만 추러 와라, 밥벌이도 안되는 게 무용이다” 하고요. 기존에 전공하려고 연습하던 애들은 가르쳐서 진학시켰지만, 그 후로 전공하려는 학생들은 아예 받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기수 중 한 명은 경기도립무용단에 들어갔지요. 예쁜 제자들이 참 많았어요. 여제자들이 결혼해서 다른 지역에 살다가 친정에 와서 무용학원 간판을 볼 때면 “우리 선생님 아직 저기 계시구나”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원 운영이 진짜 힘들 때도 학원 간판을 못 내렸습니다. 전 : 무용교육의 현실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김 :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춤에는 ‘강강술래’, ‘월월이청청’이 있습니다.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며 걷기만 해도 춤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춤이라고 하면 “나는 춤을 못 춰” 하며 거부 반응부터 보여요. 왜냐하면 요즘 무용이 너무 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만들어서 하다 보니 무용 인구가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무대라는 공간에 가둔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무용이 극소수의 사치스러운 취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거죠. 전 : 그렇다면 무용교육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 : 우리 춤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움직임이 곧 춤이다!’ 특히 우리 춤은 자연과 닮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지요. 돌담체가 뭔지 아시나요? 길을 가다 돌담이 가로막혀 있으면 돌아서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 춤에서 이 동작을 돌담체라고 부릅니다. 또 날아가는 기러기를 형상화해서 기러기체, 성주신을 받드는 모양이라고 성주체라고 하고요. 일상에서 우리 자세나 자연의 형상을 모방해서 박금슬 선생님이 우리 춤 동작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생활, 자연과 닮았습니까? (김 회장은 이 대목에서 직접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전 : 직접 보여주시니 바로 이해가 되는군요. 김 : 이 동작에 음악만 틀면 저절로 춤이 되지요. 음악은 ‘김동은 무용단’이 포항 대잠홀 상주단체로 활동할 때 만든 ‘포항의 노래’입니다. “파란 동해 바다 너머 너머∼” 전 : 노래를 들으니 저절로 몸이 들썩이네요. 김 : 그게 바로 춤이지요. 춤이 별거 있나요.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10-06

“성모사에서 고백을 하면 사랑도 쉽게 잉태되겠지”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책방은 열한 시에 문을 열어 여섯 시에 닫는다. 영업시간을 가급적 지키는 편이지만 상황에 따라 조금 빨라지기도 하고 반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마당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봉선화와 백일홍에 물을 주고 호두가 헤집어놓은 잔디를 손보느라 십 분 정도 늦게 문을 열었다. 책방을 방문하려면 마을 중간에 있는 경로당 마당에 주차를 하고 안쪽으로 이삼 분쯤 더 걸어야 한다. 대문을 열고 잔디 마당을 가로질러 한옥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 신어야 들어올 수 있는 책방은 주로 독립 출판사에서 낸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경주에 관련된 엽서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방의 식구는 나와 엄마 그리고 열두 살 강아지 호두까지 셋이다. 커다란 무덤들을 품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책방은 원래 아빠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집이었다.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삼 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집의 상속인이 독자였던 아빠의 외동딸인 내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살던 집은 낡기도 했거니와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면서는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나 다름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일본으로 가 살던 엄마와 나는 처음에 집을 처분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코로나에 걸린 내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패혈증으로 진행되어 죽기 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왠지 고국이 그리워졌다고 할까. 거기에다 이국에서 딸을 잃을 뻔했던 엄마가 외국살이에 대한 염증이 깊어져 계획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할머니와 아빠의 유산과 엄마가 모은 돈으로 집을 새로 짓다시피 고친 후 카페와 책방 중 뭘 할까 고민을 했는데 큰 병을 앓은 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카페 일은 무리일 것 같아 책방으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했던 엄마의 영향도 컸다. 책방 옆에 딸린 조그만 밭은 엄마를 위한 것이다. 지금도 엄마는 꽤 유명한 소설 전문 번역가이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엄마가 그곳에 산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쯤 아빠는 막 유학을 와 한인 학생들 모임에 처음으로 나갔는데 고향 사투리가 정겨워 둘이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외국살이 선배로서 도움이 되는 정보도 주고 이것저것 챙겨주다 보니 아빠가 엄마에게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엄마는 아빠에게 언제 관심이 갔던 거야?” “이성으로? 음, 글쎄? 아빠 고향을 들었을 때?” “같은 경상도인 것은 처음부터 알았다며?” “그땐 그냥 고향 사람이라 반가웠던 거고. 아빠 집이 어딘지 알았을 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곳곳에 널린 커다란 무덤들, 높이 올라 하늘을 가리는 나이 많은 소나무, 아주 옛날엔 글 읽는 소리가 담 밖으로 들렸을 서원과 이것들을 아우르는 마을, 그리고 마을을 안고 있는 뒷산까지… 아빠를 보면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떠올랐어. 그러다 보니 아빠를 한 번 더 보게 되고, 그러면서 또 정이 들고.” “뭐야?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그러니까 아빠가 살던 동네가…. 엄마가 첫사랑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곳이거든.” 엄마의 첫사랑이라는 남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책장 서랍 속에서 종이봉투 안에 있는 사진 뭉치들을 발견했었다. 요즘 유행과는 많이 다른 머리 모양과 화장들이 신기하고 재밌는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들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서너 살이나 어린 엄마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앞머리를 봉긋하게 말아 고정했고 진한 자주색 립스틱으로 입술을 굵게 칠했었다. 우리는 정리를 잠시 멈추고 사진을 앞에 두고 웃었는데 엄마의 웃음에는 반가움과 회상이, 내 웃음에는 신기함과 촌스러움에 대한 놀림이 들어있었다. 한 장씩 넘기던 사진 중간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어머나, 이게 여기 있었네. 잃어버리거나 버린 줄 알았는데.” 사진마다 언제 찍었고 옆에는 누구누구라는 걸 어린애처럼 알려주던 엄마가 여기에서는 말을 잊은 채 한참을 사진 속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릴 때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엄마, 엄마? 누구야? 누구냐니까?”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골판지박스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오랜만에 엄마와 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이고 자정이 넘어 겨우 몸을 누였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옛날얘기 해줘.” “엄마도 옛날얘기 잘 몰라.” “아니, 엄마 첫사랑 이야기 말이야. 언제 만났어? 얼마나 사귄 거야? 왜 헤어진 건데?” “야, 헤어지긴… 시작도 안 했는데.” 짝사랑이었던 것이다. 학교와 과를 정해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서 대학을 가던 시절, 시험장에서 앞뒤로 앉았던 엄마와 Y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금세 친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의 눈에 누가 봐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해 보이는 옆자리의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라고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알아채고 먼저 다가가 챙기는 것은 엄마의 타고난 능력이다. 엄마가 그 남자에게 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엄마와 Y, 그와 옆에 J까지 네 사람은 친해져 한동안 붙어 다녔다. 사랑의 감정을 우정으로 덮은 채로. “근데 왜 그 남자한테 마음이 갔던 거야? 잘 생기지도 않았고, 엄마 스타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왜 끌렸을까? 그 친구가 좀 어두운 구석이 있었거든. ‘나 우울한 사람이요’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 평소에 농담도 하고 웃기도 잘하다가 긴장이 살짝 풀릴 때 보이는 어둠 같은 거 이해해?”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 저 사람의 어둠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의 어둠을 없애줘야겠다, 그런 연민 같은 거였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어둠까지는 맞아. 근데 연민은 아니었어. 그냥 그 어둠에 공감한 거지. 일종의 동질감이랄까?”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밝은 얼굴의 엄마였다. 엄마의 마음 안에 어둠이 없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마한테 직접 얘기를 들으니 이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두 달쯤 지났을까,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방문을 열었다가 식탁에 엎드려 있는 엄마를 보고는 문을 다시 닫았던 때가 있었다. 일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건지, 울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안고 있는 슬픔에 대해 자각하는, 처음으로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엄마의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해를 표현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아빠는, 무덤덤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엄마 옆에 가만히 있어 주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비바람에 떨어진 벚꽃잎이 거리에 떨어져 대책 없이 젖던 날, 엄마는 무슨 이유인지 우울해하는 Y를 데리고 술을 마셨다. 시장 안 분식집에서 막걸리를 평소보다 많이 마신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엄마가 숨겨 왔던 짝사랑에 관해 Y에게 털어놓았다. 다음 날 술이 깬 엄마는 부끄러움에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한 편으로는 후련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기회를 봐서 직접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Y에게는 남자에 대한 이런저런 감정들을 솔직하게 얘기를 했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신통할 정도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던 엄마의 능력이 그때 왜 Y에게는 통하지 않았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엄마의 적절한 고백 기회는 곧 찾아왔다. 전공수업의 조별 과제를 구실로 둘이서 유적지로 답사를 가게 된 것이다. 남자의 불성실한 학업 태도로 인해 대부분 그와 같은 조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에 둘이 한 조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과제는 여러 유적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무열왕릉과 선도산으로 정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거기에 성모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신라를 세운 이의 어머니를 모신 곳이거든. 한 나라를 세운 아이를 잉태한 분의 사당이라는데, 거기서 고백을 하면 사랑의 감정쯤은 쉽게 잉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사랑을 앓고 있는 스무 살의 간절한 바람이라 생각한다. 첫 데이트 날(물론 엄마만의 생각이다), 점심을 먹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고백의 장소를 향해 올랐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에 사람들이 오며 가며 하나씩 쌓은 돌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뒤따라오던 남자가 거기에 돌을 하나 보태는 것을 보았다. “정상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 앞에서 걔가 그러더라. 자기랑 Y가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자기가 모난 구석이 많은 게 이유였다고. 자기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타이밍 참 기가 참 기가 막히지 않냐?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인 거지,” 그 후 엄마는 두 사람과 마주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Y에게 떠들어 댄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두 사람 이별의 이유가 엄마에게 있는 것 같아 미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이었고 그러다 보니 전공에 대한 회의도 들었기에 다음 해에 휴학을 하고 큰이모가 있는 일본으로 갔다. “그 후로는 그 아저씨랑 Y를 본 적이 없었던 거야?” “걔가 군인일 때 누구 결혼식에서 얼굴을 본 것 같고… 아, 자퇴서를 내러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구나. 아빠를 만나고 있었을 땐데 그래도 마음이 좀 이상하더라. 헤어지고 나서 눈물도 좀 흘렸던 것 같고. Y는 한 번도 못 봤어. 연락이 닿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그 돌탑 말이야. 거기 가면 아직 그 아저씨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쌓인 탑이니까.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돌무더기 아래에서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받치고 있지 않을까? 시시하지?” “그러게…. 흔한 삼각관계네. 본인들은 심각했겠지만…. 이제 잠 온다.” 한국에 오면 뒷산에 꼭 가 봐야지 생각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산을 오를 체력이 될지 겁이 나기도 했고 책방 문을 열고 운영하는 게 예상했건 것 보다 일이 많았다. 엄마는 올라가 봤을까? 오늘도 아침부터 무척 더운 날씨다. 물기를 못 빨아들인 텃밭의 콩과 들깨가 창백해진 이파리들을 땅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엄마는 밭 전체가 충분히 젖을 정도로 물을 준 다음 책방으로 올 것이다. 호두는 잔디 속에서 무얼 봤는지 앞발로 흙을 한 무더기 파헤쳐 놓고 지금은 마루 밑에서 혀를 쑥 내밀고 엎드려 있다. 방금 튼 에어컨이 책방 안을 식히기도 전에 첫 손님이 들어왔다. 귀밑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한, 5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큰 눈이 왠지 익숙한 남자였다. 책방을 둘러보는 남자를 신경 쓰며 전날 매출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이고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덥대? 호두야!” 마당을 들어서는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 끝) 김도일 소설가 소설가 김도일(49)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2024-10-01

“건강·웰빙축제도 즐기고 ‘풍기 보약’ 인삼요리도 맛보세요”

500여 년 소백산 기슭 골골마다 인삼향이 감도는 고장 영주시. 조선 중종 36년인 1541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에 의해 재배삼의 시배지가 된 풍기, 500여 년을 이어오며 인삼의 생명력, 인류 행복, 미래 산업으로 성장을 거듭하며 발전해 오고 있다. 영주풍기인삼축제는 고려인삼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려 인삼 종주국으로서의 위상 회복과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삼이 먹을거리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산업으로 나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자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올해 축제는 영주시 풍기읍 남원천 및 인삼문화팝업공원 일원에서 5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명예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된 풍기인삼축제는 매년 인삼채굴 시기에 맞춰 품질 좋은 인삼을 저렴한 가격에 만날 기회 제공과 지역 특징을 살린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대표 건강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한국 인삼 자존심, 천년건강 풍기인삼 영주시 풍기읍은 예로부터 기후가 서늘하고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를 지녀 품질 좋은 삼이 나기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은 백성으로 하여금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산삼 종자를 이곳에 심어 재배인삼의 시배지가 됐다. 영주는 북위 36.5도에 위치해 평균 7시간이 넘는 일조량과 11.9도의 높은 일교차가 특징인 지역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인삼은 조직이 치밀하고 저장성 또한 우수해 가공에도 적합한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면역증진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유효사포닌 함량이 36종으로 미국산 19종, 중국산 15종에 비해 월등히 높아 인삼 가운데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영주 풍기인삼으로 만든 가공식품은 산지에서 직접 가공해 신선도가 높고 오랜 시간 재배해 온 역사를 바탕으로 가공 기술이 뛰어나다. 영주에서는 삼포에서 캔 수삼과 캐낸 수삼을 쪄서 말린 홍삼, 6년근 홍삼에서 추출한 홍삼농축액, 홍삼을 벌꿀에 당침해 원형을 살린 홍삼 정과와 홍삼절편, 홍삼엑기스, 홍삼 뿌리제품 등 다양한 가공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 2024 경북영주 풍기인삼축제 올해로 27회째를 맞는 경북영주 풍기인삼축제는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풍기의 문화와 역사를 일군 인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지역 대표행사다. 인삼 수확기에 맞춰 열리는 축제는 품질 좋은 인삼을 저렴한 가격에 만날 기회 제공과 인삼 축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채로운 기획전시와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축제 첫날 고을의 번영과 인삼의 풍년을 기원하는 풍기인삼 개삼터 고유제, 이색 볼거리인 풍기군수 주세붕 행차 행렬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풍기인삼 대제와 전국 우량인삼 선발대회, 인삼깎기 경연대회, 소백산 영주풍기인삼가요제, 마당놀이 덴동어미전 등 공연이 펼쳐진다. 체험 행사로 인삼병주 만들기와 인삼요리 전시 및 체험, 인삼 경매 등이 열린다. 무대공연에는 퓨전 국악공연, 덴동어미 화전놀이, 인삼인형극, 주민자치 동아리와 지역 문화 예술인 공연, 개·폐막식 축하공연이 이어진다. 축제장에서는 인삼을 통째 튀겨낸 인삼 튀김, 마삼족발보쌈, 인삼정과, 인삼차, 인삼으로 만든 다양한 웰빙 인삼요리를 맛볼 수 있어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올해 풍기인삼축제는 한국관광공사 2024 지역축제 수용태세 개선사업에 선정돼 새로운 인삼먹거리 개발과 홍보도 진행된다. 풍기인삼축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코레일과 연계한 반값으로 즐기는 풍기인삼축제 상품을 코레일앱 등에서 구매하면 최대 50%의 운임 할인과 영주사랑상품권 1만원이 지급된다. 연계행사도 다양하게 펼쳐진다. 인삼축제 개막일인 5일에는 문수면 무섬마을에서 2024영주 무섬외나무다리축제, 영주 원도심 야행 ‘관사골에 비친 달빛’이 함께 열려 영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의보감에는 “인삼은 오장의 부족한 기를 채워주고 정신과 혼백을 안정시켜 눈을 밝게 하며 허약하고 기운이 약함을 보한다” 는 인삼의 효험을 기록하고 있다. 박남서 영주시장 인터뷰- 박남서 영주시장 500년 인삼 재배 역사 바탕으로 국민에게 신뢰 쌓는 축제로 육성 -영주풍기인삼축제의 성격은. △경북영주풍기인삼축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의 명성에 걸맞게 판매 위주의 행사가 아니라 풍기인삼에 대한 역사를 스토리텔링 하고 있다. 풍기인삼의 역사와 풍기인삼 재배 농가, 상인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영주 지역이 가진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 해마다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기대되는 축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다. 500여년의 인삼재배의 긴 역사를 바탕으로 집약된 기법과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 그리고 국민들에게 신뢰를 쌓아가는 축제로 성장시켜 나갈 것이다. 풍기인삼의 경쟁력은. △영주시는 풍기인삼 품질향상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삼생산 기반 조성과 산업화와 마케팅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풍기인삼 시험장에서는 유기농 인삼을 생산, 공급해 농가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영주풍기인삼축제는 풍기인삼을 널리 알리고 판매하는 것은 물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파급 효과를 가져와 지역경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영주시의 이 같은 노력은 문화체육관광부 명예문화관광축제 선정, 한국관광공사 2024 지역축제 수용태세 개선사업 선정으로 이어져 발전 토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영주풍기인삼의 품질이 좋은 이유가 있다면. △영주는 지리적으로 소백산 줄기를 따라 이어진다. 위도 36.5도의 위치. 온대와 한 대의 경계로 하루 15℃ 이상 일교차가 나는 소백산 산기슭에서 생산되는 영주의 농특산물은 조직이 단단해 빨리 상하지 않고 당도도 뛰어나다. 영주는 소백 산록의 풍부한 유기질을 함유한 토질과 고산 분지형의 지형, 높은 일교차 등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품질 좋은 인삼을 생산하는 고장이다.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영주 풍기인삼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며 국내의 명성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인삼 산업발전을 위한 계획은. △영주 풍기인삼은 사과, 한우와 더불어 영주 지역을 대표하는 주요 소득원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인삼을 이용한 가공식품의 메카로 풍기인삼의 해외수출이 급신장하면서 글로벌 특산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풍기인삼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역사성에서 비롯된 집약된 기술과 현대적인 농법을 접목하기 위한 농업인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현장체험, 관광, 가공 등 다한 분야에 접목시켜 6차 산업으로 부가가치를 증대시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풍기인삼의 명성을 갖겠다는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이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4-10-01

무용 불모지에서 고군분투하며 무용의 저변 넓혀

개척자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영역, 운명, 진로를 처음으로 열어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용가 김동은이 포항 무용을 개척했다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개척은 남모를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포항에 무용을 뿌리내리고 그 저변을 넓혀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은주(이하 전) : 회장님은 포항에 무용이라는 예술 영역을 개척하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하다 보니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내가 우겨서 한 무용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말을 못 했지요. 진짜 힘들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집에 전화도 안 했어요. 전 : 그 시대에는 예술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무용은 어땠나요. 김 : 무용학원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딴따라’라며 대놓고 비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무용도 열심히 가르쳤지만 몸가짐, 말투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 : 회장님은 어떤 무용 선생님이셨습니까. 김 : 제자들이나 수강생들은 내가 그렇게 무서웠다고 합니다. 잘 가르쳐야겠다, 반듯하게 키워내야겠다, 얼른 그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억척스럽게, 혹독하게 가르쳤지요. 대학입시에는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등을 다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본기부터 확실하게 가르쳤지요. 한 동작 한 동작, 완성될 때까지 붙잡고 시켰어요. 팔꿈치를 교정해야 한다면 팔꿈치에 멍이 들 정도로 내 손아귀에 꽉 힘을 주고 교정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폭력으로 신고당하겠지요. 전 : 열정이 대단하셨군요. 김 : 그럼요. 무용은 물론 악기도 가르쳤습니다. 음악을 알아야 무용 동작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가르쳐서 대학에 보냈더니 기본이 잘된 학생들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대학교수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콩쿠르에 나갈 때는 다리미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 무대의상을 구김 하나 없이 다려 입혔어요. 무대 위에 세워놓으면 인형같이 예뻤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말만 하면 사람들이 확 깨는 거예요. 아이들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퐝서 왔는데예”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면 “퐝? 퐝이 어디야?”라고 사람들이 되묻곤 했지요. 지금은 나도 포항 사투리를 많이 씁니다만 그때는 그게 참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아이들 말투를 고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전 : 제자들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할 때 참 뿌듯했겠습니다. 김 : 말할 수 없이 뿌듯했지요.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가르쳐 원하는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첫 제자 둘(경북무용협회 지회장을 지낸 손현, 조은정)이 대학에 갔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딸을 시집보내면 그런 기분이 들까 싶었지요. 허전함과 허탈함에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입시를 한두 해 치르는 것도 아닌데 늘 적응이 안 됐어요. 한번은 너무 힘들어하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물이 함지박 같은 큰 그릇에 담기는 속도와 종지처럼 작은 그릇에 담기는 속도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 채워진다.” 에너지를 많이 쓴 만큼 채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픈 시간이 반복되어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고 포항무용협회, 포항시립무용단도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전 : 학원을 운영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김 : 지금도 인간관계가 어렵습니다만 젊어서는 더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학부모들과 좀 더 잘 지낼 수 있었겠지요. 그때는 나무 사이에도 간격이 필요하듯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적당함이 얼마만큼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학부모와 저와의 관계는 아이들이 없으면 남이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저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선택했어요. 전 : 묘령의 무용 선생님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학부모들이 더 좋아했겠는데요. 김 :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2층 학원에서 내려다보면 길 하나만 건너 바로 제자인 혜승이네 집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누구네 집, 또 그 옆에는……. 그 동네 원생들이 많았지요. 누구 집에 제사를 지내거나 큰일이 있으면 음식을 가득 차려 보내주시곤 했어요. 전 : 무용의 불모지에서 어떻게 단시간에 학원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는지요. 김 : 지금처럼 홍보 수단도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열심히 가르치면 알아줄 거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표회를 했지요. 1979년 3월 11일. 그 날짜는 잊을 수가 없어요. ‘김동은 무용학원’의 1회 발표회 날입니다. 1978년 6월에 정식으로 학원을 열었는데 채 1년도 안 된 시점이었지요. 전 : 발표회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김 : 무용은 종합예술이잖아요. 그런데 미술, 음악, 무용, 의상 등 포항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음악 녹음 편집도 매번 서울 가서 해야 했지요. 서울에 갔다가 타이밍이 안 맞으면 날밤을 새워 직접 음악 편집을 해야 했어요. 의상도 작품마다 다르게 맞춰 입혔지요. 학부모님들이 많이 협조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아요. 그저 아이들이 예뻤습니다. 1회 발표회의 첫 무대는 꼬마 신랑이었는데 내가 무용학원 1호 등록생인 여섯 살 초슬이를 업고 춤을 췄지요. 힘들었지만 그 시절이 참 인간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 : 첫 공연 후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첫 공연을 시공관에서 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포항 KBS 김순명 아나운서가 사회를 봐주셨어요. 반응이 뜨거웠지요. 발표회를 마치고 나오면 온 시내가 시끌벅적했습니다. 무용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장구를 배우러 오시는 분도 있었고 며느리 하자는 분도 많았어요. 공연했던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또래의 우상이 되었고, 공연을 본 아이들은 집에 가서 무용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지요. 그 후 해마다 발표회를 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어요. IMF를 겪으면서 2년에 한 번씩 하게 되었죠. 전 : 황당한 일도 겪으셨다면서요. 김 :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첫 무용학원은 죽도성당 골목 안에 있는 2층집이었어요. 그 일대의 유일한 2층 건물이었지요. 1층은 합기도 학원이었고 2층이 무용학원이었습니다. 그 골목은 비만 오면 장화 없이 못 지나다닐 정도로 진창이었어요. 그런 골목에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면 검정 세단이 줄을 지어 대기하곤 했습니다. 자가용이 귀할 때였으니 도대체 저기가 뭐 하는 곳인지,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았지요. 그러다 보니 세무조사 리스트에 올랐나 봅니다. 전 :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무용 공연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김 : 늘 아쉽고 안타까운 점은 무용에 대한 이해도가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대사가 있어 쉽게 이해되고 빨리 공감할 수 있어요. 반면에 무용 공연을 본 관객 중에는 “뭐, 나와서 뺑뺑 돌기만 하다 들어가는구먼”이라고 하는 분도 있지요. 1986년인가 강선영 선생님이 무용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매방 선생님 순회공연을 포항에서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려 성사된 일이 있습니다. 공연 당일 관객들 줄이 동빈동까지 이어질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요. 사진 섭외를 미처 못 해서 그 귀한 자료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더군요. 전 :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야, 실컷 졸다가 봐도 아직도 북을 두드리고 있네.” 이매방 선생님이 공연하는데 객석에서 그런 말이 오가는 거예요. 내용을 모르면서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무용인들에게는 주옥같은 시간인데 말입니다. 또 박재근 선생님이 조승미 선생님하고 파드되(pas de deux, 남녀 2인무)를 공연하려고 발레복을 입고 등장했을 때는 “민망하게 꼬락서니가 저게 뭐꼬?” 하며 객석에서 쑤군댔습니다. 공연 후 박재근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발레리나를 리프트 한 상태로 퇴장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순간 몸에 힘이 다 빠져 상대를 들어올릴 힘이 없어서 간신히 들어왔다고. 정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29

대구 유일 ‘더블 초역세권’ 품은 도심 속 자연친화 아파트

DL이앤씨는 지난 27일 대구 남구 대명동 2017-2번지 일원 대명2동 명덕지구 주택재개발정비사업을 통해 선보이는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의 주택전시관을 개관하고 본격 분양에 나선다. 대구에서 유일한 1·3호선 더블 초역세권에 들어서는 데다 브랜드 가치에 맞춰 차별화된 상품 설계가 적용돼 수요자들의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지하 2층∼지상 35층, 17개 동, 전용면적 39∼110㎡ 총 1758가구의 대단지로, 이중 전용 59∼84㎡ 1112가구를 일반 분양으로 공급한다. 일반분양 물량은 △59㎡ 482가구 △84㎡A 223가구 △84㎡B 400가구 △84㎡C 7가구 등 수요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중소형 위주로 이뤄진다. 단지의 청약 일정은 오는 10월 7일 특별공급을 시작으로 8일 1순위, 10일 2순위 접수로 진행된다. 당첨자 발표는 10월 17일, 정당 계약은 10월 28일∼30일 3일간 진행된다. 일반공급의 경우 대구 또는 경북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청약통장 가입 기간 6개월 경과, 지역별·면적별 예치금액을 충족한 경우 주택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1순위 청약이 가능하다. 앞의 요건을 충족했다면 유주택자나 세대원 모두 1순위 청약접수가 가능하고, 재당첨 여부 및 과거 당첨사실과도 상관없이 청약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전 주택형 시스템 에어컨, 발코니 확장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중도금 60% 전액 무이자 혜택을 통해 수요자들의 자금마련 부담을 덜었다. 주택전시관 운영시간 및 청약 방법의 자세한 내용은 e편한세상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대구도시철도 1·3호선 명덕역 더블 초역세권…초·중·고도 가까워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대구에서 유일한 대구도시철도 1·3호선 더블 초역세권 단지다. 대구도시철도 1·3호선 명덕역 바로 앞에 들어서며, 단지 북측에 진출입로가 계획돼 있어 역으로의 접근성이 더욱 높아질 예정이다. 2호선 환승역인 반월당역도 반경 1㎞ 내에 위치해 대구 전역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단지 주변 북대구IC와 이어지는 신천대로, 신천동로가 인접하며, 파동IC와 이어지는 앞산순환로, 앞산터널로의 이동도 편리한 사통팔달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교육 환경도 우수하다. 단지 내 어린이집을 비롯해 직선거리 300m 거리에 대구영선초가 위치한다. 또 반경 1㎞ 내에 경상중, 대구제일중, 경구중, 경북예고, 경북여고, 대구고 등 다수의 중·고교가 밀집해 있다. 대구교육대, 계명대 대명캠퍼스, 영남대 대구캠퍼스, 영남이공대 등 주요 대학도 가깝다. 올해 완공 예정인 ‘대구 대표 도서관’을 비롯해 구립 도서관인 ‘이천어울림도서관’과 ‘남구 스마트도서관’ 등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주변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대구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반월당역 상권과 지하상가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인근에 더현대 대구, 동아백화점 쇼핑점, 탑마트 대구점 등이 자리해 있고 중앙로, 동성로, 교동 거리 등이 가까워 다양한 편의·문화시설을 누릴 수 있다. 영남대학교병원, 경북대학교병원 등 대형 병원도 가깝다. 쾌적한 주거환경도 돋보인다. 단지 동쪽 대봉교를 통해 신천 진입이 용이해 산책, 조깅, 자전거 타기 등을 즐길 수 있다. 대봉교 부근에는 파도풀과 유수풀 등을 갖춘 ‘신천 사계절 물놀이장’이 올해 개장해 사계절 내내 다양한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다. △ e편한세상 조경 브랜드 ‘드포엠(dePoem)’ 적용, 쾌적한 주거환경 조성 DL이앤씨의 주택 브랜드인 ‘e편한세상’은 비즈빅데이터연구소에서 발표한 4년 연속 스마트 아파트 브랜드 1위 달성과 더불어, 소비자가 뽑은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 대상 총 12회 수상, 소비자가 선정한 품질만족대상 7년 지속 수상, 대한민국 올해의 브랜드 대상 총 10회 수상 등으로 대한민국 대표 주거 브랜드로서의 가치와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는 이러한 브랜드 가치에 걸맞게 차별화된 상품을 적용해 입주민들의 주거 만족도를 극대화할 계획이다. 우선, 동간 거리를 최대한 확보하고 지상 공간에 조경 공간을 크게 늘려 쾌적한 주거환경은 물론 사생활 침해를 최소화했다. 특히 조경의 경우 e편한세상의 프리미엄 조경 브랜드인 ‘드포엠(dePoem)’을 적용한다. 드포엠의 대표 공간인 ‘드포엠파크’는 잔디마당과 수경시설이 있는 공간으로 단지 중심에 조성할 예정이다. ‘로비계절정원’은 동 출입 시 풍성한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특화 정원으로 꾸민다. ‘미스티포레’는 미스트분사시설, 휴게시설 등이 미세먼지 저감 식재와 어우러진 상쾌한 숲으로 조성한다. 또 어린이 놀이터인 ‘드포엠플레이’는 조합놀이대와 놀이시설물, 파고라 등 시설과 식재가 조화를 이루는 자연친화적인 복합놀이정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라이프스타일 맞춤 주거 플랫폼 ‘C2 하우스’ 및 넉넉한 수납공간 적용 세대 내부에는 e편한세상만의 라이프스타일 맞춤 주거 플랫폼인 ‘C2 하우스’를 적용한다. C2 하우스는 최소한의 내력벽 구조만 남겨둔 가변형 구조로 설계해 고객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운 구조 변경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넉넉한 수납공간과 효율적인 가사 동선을 고려한 설계로 소비자들의 높은 선호도를 자랑한다. 전용 84㎡A, C타입의 경우 4베이(Bay) 판상형 구조를 적용해 맞통풍이 가능하며, 전용 84㎡ 전 주택형에 현관 팬트리, 안방 파우더룸, 드레스룸 등 넉넉한 수납공간을 마련한다. 현관 팬트리의 경우 유아차, 자전거, 각종 레저 용품을 충분히 보관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으로 설계한다. 주방의 경우 전 주택형(임대 세대 제외)에 일반 창문보다 넓은 ‘와이드 주방 창호’를 적용해 개방감을 더했다. △실내골프연습장, 게스트하우스 등 차별화된 커뮤니티 공간 조성 단지 규모에 걸맞은 커뮤니티센터도 눈길을 끈다. 입주민의 쉼터인 라운지카페(작은도서관)와 입주민 건강을 위한 스크린이 적용된 실내골프연습장, 피트니스, 스포츠코트, 건식사우나, 스터디룸, 키즈라운지 등 가족 모두가 누리는 최신 커뮤니티 시설이 마련된다. 아울러 게스트하우스와 같이 차별화한 공간도 조성해 입주민의 주거 만족도를 한층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일반 아파트보다 2배 두꺼운 ‘60T 바닥 차음재’를 적용해 층간 소음을 최소화했으며, 미세먼지 저감 시스템인 ‘스마트 클린케어 솔루션’을 도입한다. 지하 주차장은 세대당 1.3대의 넉넉한 주차 대수로 설계하며, 충분한 전기차 충전기를 마련한다. 아울러 각 동의 지하 1층은 택배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주차장 높이를 확보해 안전한 단지 내 환경을 갖출 예정이다. 분양 관계자는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트는 대구에서 희소성 높은 더블 역세권 입지에 위치해 편리한 생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데다 주변에 예정된 다양한 개발호재로 높은 미래가치를 기대할 수 있다”며 “대규모 조경 특화 설계 등 수준 높은 상품들을 선보일 예정인 만큼 수요자들의 많은 관심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e편한세상 명덕역 퍼스트마크의 주택전시관은 대구시 수성구 동대구로 283 일원(범어네거리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2026년 1월 입주 예정이다.

2024-09-29

시민 누구나 일상 속 문화예술 누리도록… 품 넓히는 포항

포항은 철강 산업 도시와 법정 문화도시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다. 포항문화재단은 시민들의 인식 변화를 촉진하며, 시민 누구나 일상 가까이에서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또 사회계층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며 시민들이 문화예술 경험을 통해 함께 창조하는 문화 공동체 구축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포항문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문화 예술의 접근성 향상을 통한 함께 행복한 문화도시 정책’을 살펴본다. △ 누구나 누리고 즐길 문화권리, 문화 접근성 문화 접근성은 모든 시민이 사회적, 경제적, 물리적 제약 없이 문화예술을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보장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문화예술 행사에 대한 접근성을 넘어, 문화적 소외를 겪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현대사회에서 문화 접근성의 필요성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저소득층, 장애인, 노인, 청소년, 이주민, 다문화가정, 여성 가장 등 사회적 약자층은 경제적 불균형, 물리적 장애, 사회적 고립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평등하게 문화예술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문화기본법 제4조를 통해 모든 국민이 문화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특히, 포항과 같은 중소도시의 경우 경제적 제약, 사회적 인식 부족, 충분하지 못한 인프라 등의 차별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역 사회가 문화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사회적 포용을 증진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방 소도시에서도 누구나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통합과 포용성을 증진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 문화로 더 가까이, 포항문화재단 문화 접근성 사업 문화 접근성을 확대하는 것은 시민이 단순히 문화예술을 즐기는 것을 넘어 사회적 통합과 포용성을 증진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부족하면 문화적 이해와 교육 부족으로 인한 여러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최근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문화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1차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된 포항시는 최근 지역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문화 접근성 사업을 통해 시민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해 오고 있다. 문화 접근성 사업을 주관하는 포항문화재단은 지역 간, 계층 간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누구나 차별 없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문화시설 등의 서비스 접근성을 개선하고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도시 외곽 지역에 생활권 문화거점 연결망을 구축해 주민들의 문화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 누구나 접근 가능한 객석으로의 초대,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 포항문화재단은 올해 처음으로 지역에서 물리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포항문화예술회관 세미나실에서 개최한 무장애 활성화 접근성 ‘배리어 프리’ 공연장 접근성 서비스 활성화 교육에 이어 ‘배리어 프리 공연’도 개최했다. ‘배리어 프리(barrier-free)’란 영문 그대로 직역하면 장벽(barrier)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자는 의미다. 매년 60여 회의 공연을 기획·선보이고 있는 포항문화재단은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공연문화거점인 문화예술회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기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발전시켜나갈 계획이다. 지난 8월에는 안동문화예술의 전당, (재)달서문화재단 달서아트센터와 공동기획으로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연과 객석을 열고 운영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역 장애인들의 문화향유권 보장을 위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배리어 프리 연극 ‘하늘, 바람, 바다’를 공동 기획해 안동, 대구 달서에 이어 지난 8월 29일 포항시청 대잠홀에서 무료관람 행사를 연 바도 있다. △ 10분 생활문화권역, 동네 문화놀이터 ‘삼세판’ 시민문화거점 조성 및 커뮤니티 활성화 사업 ‘삼세판’은 포항의 골목골목에 다양한 문화거점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삼삼오오 모여 세상을 바꾸는 문화판’이라는 의미를 지닌 삼세판은 이름 그대로 서너 명의 시민만 모여도 자신의 동네 공간에서 하고 싶은 문화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역주민이 거주하는 생활권 내 동네 카페, 책방, 도서관, 마을 숲, 빈 점포 등의 공간을 다양한 주민이 운영 주체가 된 일상적 문화거점으로 활용하는 ‘10분 생활문화권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삼세판 동네 거점으로 선정되면 일부 시설비와 동네 주민들이 원하는 문화활동 프로그램비를 지원받는다. 삼삼오오 모여 함께 책을 읽거나, 도예, 그림, 자수 등 취미를 함께 배우거나, 공통의 문화활동을 통해 새로운 관계 주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삼세판 사업은 2024년 9월 현재 총 55개의 문화거점을 운영·지원하고 있으며, 연간 600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통해 그동안 6500여 명의 시민들이 문화 혜택을 누렸다. △차별 없는 문화권 보장, ‘포항형 문화안전망 특화사업·문화로 사회연대’ 포항문화재단은 지역 사회의 특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항형 문화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진과 코로나19 등의 재난을 겪으며 무너진 지역 사회의 일상회복을 위한 문화프로젝트로 시작했다. 사업의 코어그룹인 ‘문화재생활동가 F5’를 매년 선발·교육해 사회적 재난 연구 및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다양한 그룹이 연계해 지역 이슈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인문 활용 심리지원과 다양한 지역자원과의 연결을 통해 문화적 치유와 연대를 추구하는 ‘문화로 사회연대’ 지역거점센터 사업이 선정돼 맞춤형 처방 문화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실효성 있는 보편적 문화안전망 구축에 박차를 가한다. 포항문화재단은 ‘문화로 사회연대’ 지역거점센터 선정을 계기로 지역사회 자원과의 연결·협력·매개를 통한 시민의 관계회복을 지원하는 지역문화안전‘망’으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계획이다. △ 상상력·창의력의 장벽을 뛰어넘다… ‘예술 놀이터 만지작만지작’ 여름방학 기간이었던 지난 8월 포항문화예술팩토리 아트갤러리는 웃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움직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포항문화재단 문화예술팩토리가 마련한 기획전시 ‘예술 놀이터 만지작만지작’에 하루평균 400여 명의 어린이가 전시체험에 참여하는, 이른바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예술 놀이터 만지작만지작’은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다’라는 파블로 피카소의 명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어린이들이 물리적·심리적 장애물 없이 자유롭게 작품을 만지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실과 바늘, 천조각 등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해 아이들이 직접 작가가 돼 작품을 만들어가는 참여형 놀이작품을 구현한다. 이는 ‘예술작품은 만지면 안 된다’는 전통적인 관람형 전시를 넘어 지역의 어린이들이 창의적인 예술활동에 직접 경험하게 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 지역 아동과 청소년들의 꿈의 향연, ‘꿈의 오케스트라 포항’ 포항문화재단은 음악을 통해 지역 아동과 청소년들이 협력과 자존감을 키울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3년 첫 운영을 시작한 꿈의 오케스트라 포항은 취약계층 아동을 우선적으로 선발해 음악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이 문화적 소외를 겪지 않도록 지원하고 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8개 파트에 청소년 단원 등 20여 명으로 구성돼 활동 중이다. 단원에게는 교육 기간 악기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예술 강사로부터 역기 연주법과 다양한 앙상블 교육을 통해 정기연주회까지 이뤄진다. 지역의 다양한 곳에 찾아가는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아동과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은 물론 지역사회와의 연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문화, 다양성의 사회를 품다 문화 접근성 사업은 단순히 특정 계층을 위한 복지가 아닌,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 창출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사회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게 된다. 포항문화재단이 추진하는 다양한 문화 접근성 사업은 지역 특성에 맞춘 맞춤형 프로그램을 통해 포항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포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차별 없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고민과 과제연구가 필요하다. 다양한 사회적 약자층에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 개발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행정·제도적 뒷받침도 수반돼야 한다. 지역 사회와의 협력, 정부의 정책적 지원, 그리고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통해 문화로부터 소외된 시민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의 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4-09-29

역사강사 최태성, 경주박물관을 안내하다

“세계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다. 여행을 하다보면 그 도시가 궁금해진다. 그럴 때 나는 박물관을 찾는다. 박물관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예술이 응축돼 모여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28일 오전 10시 40분. 경주화백컨벤션센터 3층에서 열린 역사강사 최태성사진의 강연회엔 간간히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임에도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멀리 경기도 용인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한 가족들부터 울산, 안동, 구미, 포항, 경주에서 최 강사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든 청중들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강연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경주의 재발견-국립경주박물관 속 경주’라는 타이틀의 강연회엔 주낙영 경주시장과 이동협 경주시의회 의장, 배진석 경상북도의회 부의장, 최영기 경주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주낙영 시장은 환영사를 통해 “해마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이끌어내는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어 더없이 즐겁다”며 “신라 역사의 대중화를 이끄는 최태성 강사에게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했다. 이동협 의장과 배진석 부의장 또한 “가족들이 함께 경주의 아름다운 유적과 유물을 즐기시길 바란다”고 했고, 이번 강연을 주최한 경북매일신문의 최윤채 대표는 “에이팩 (APEC) 개최지인 경주가 더 큰 역사문화도시로 도약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태성 강사의 강연은 제목 그대로 경주박물관의 핵심 유물을 효과적으로 관람하는 방법이 주된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주박물관 100% 즐기기’. 경주박물관엔 자그마치 27만여 점의 신라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제대로 꼼꼼히 살펴보려면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 터. 하지만, 박물관 견학에 그만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경주박물관의 핵심 유물을알기 쉽게 설명하고, 그 유물이 전시된 공간을 알려준 최 강사의 이번 강연은 향후 경주박물관을 찾을 이들에게 유용한 ‘가이드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박물관 초입에 자리한 성덕대왕신종과 신라역사관의 ‘토우를 붙인 항아리’ 황남대총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 등의 유물, 신라 청년들의 다짐과 각오를 돌에 새긴 ‘임신서기석’, 불교왕국 신라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이차돈의 순교비, 얼굴무늬 수막새 등이 최태성 강사가 ‘빼놓을 수 없는 경주박물관의 핵심 유물’이라고 지적한 것들이다. ‘경주의 재발견-국립경주박물관 속 경주’ 강연회엔 적지 않은 초등학생들이 참석했다. 최 강사는 부모와 함께 강연장을 찾은 아이들에게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들려주고, 간단한 역사 상식 문제도 출제함으로써 어린 학생들의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당연지사 아이들은 이런 시간을 즐거워했다. 최 강사는 구미에서 온 한 가족 앞에서 “이분들은 벌써 5년 가까이, 30번 이상 내 강연회를 찾아다니며 한국 곳곳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 지역을 여행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말에 참석자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1시간 넘게 이어진 강연회는 ‘웃음 속에서 역사 지식을 담아가는 자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을만했다. 어른과 아이들 모두가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최태성 강사를 좋아하는 아들과 함께 포항에서 왔다는 아버지는 “경주박물관에 몇 번 갔지만, 갈 때마다 어디서 무엇부터 봐야하는지 막막했는데 앞으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 잘 들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09-28

39세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온갖 역경 딛고 ‘석경 화법’ 완성

먹을 듬뿍 머금은 큰붓이 한지에 마찰음을 내며거친 사선(斜線)으로 뻗쳐 내려간다.발묵(發墨)한 먹이 종이에 스며들자붓을 곧게 세워 허공으로 뻗친 가지를 그리기 시작한다.두어 번 큰 붓질에 고목의 태점(苔點)들이 뚜렷하고,세필(細筆)이 가해지면서한 그루 고매(古梅) 모습이 완연하다.아교로 갠 붉은 물감을 점점이 입히는 홍매 채색,흑과 홍의 극적인 대비에보는 이들은 절로 감탄이다.나뭇가지들은 화점(花點)으로 이어지고,고목은 태점으로 연결되며홍매화 가지의 암향(暗香)이허공중으로 스민다. 대대로 유학 가문에서 성장한 석경(石鏡) 이원동에게 서예는 일상이요, 한학은 생활이었다. 어른들 손엔 언제나 경전이 들려 있었고, 집안엔 늘 묵향이 배 있었다. “기억하기를, 연필보다 붓을 먼저 쥐었고, 동화책보다 천자문을 먼저 읽었습니다.” 어릴 적 석경은 희미하게나마 서예와 한학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 소질도 있었지만 워낙 글쓰기와 한문을 즐겼기 때문에 이 일이 평생 업(業)이 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청년 시절 석경이 서예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뜻밖의 한 사건이 그를 묵연(墨硯)의 세계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교사가 천석(千石) 박근술 선생님이었어요. 어느 날 호출을 받고 작업실로 뛰어갔는데 선생님은 대나무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5월로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 러닝셔츠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시는 겁니다. 그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글씨를 좀 쓰네’라는 주위의 칭찬에 들떠 손재주만 믿고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화선(畵禪)일치’의 경지를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박근술은 석재(石齋) 서병오에 이어, 죽농(竹農) 서동균을 사사해 대구 서화계의 도도한 맥을 잇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그길로 석경은 반(半) 학생, 반 제자가 돼 천석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의 서예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고, 마침내 그는 간절히 원하던 동국대 불교미술과에 진학하게 됐다. ◆ 대나무 화법 깨버린 대상작 오랫동안 회자 대학 졸업 후에도 석경은 대구를 떠나지 않고 서예와 문인화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런 한편, 그는 무애자재한 ‘붓의 길’을 얻기 위한 구도(求道)의 방편으로 세상을 주유하기도 했다.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 유명 작가, 예술인들을 찾아다녔고, 한때는 지리산 한 암자에서 외부와 문을 걸어닫은 채 좌선(坐禪)에 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석경 화업 인생에 큰 획을 긋는 1998년이 다가왔다. 그해 석경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 부문에서 영광의 대상(大賞)을 거머쥐었다. 그 당시 서예와 문인화가 통합 운영되던 시절이어서 예술계 관심은 미술대전에 집중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 공모전에서, 석경은 서화계 내로라는 3000여 명 고수들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39세, 본격 붓을 잡은 지 20년 만이었다. 그의 수상은 영남지역 서예를 일으킨 석재 서병오 문중의 경사요, 전국대회의 대상은 죽농 서동균 타계 이후 반세기 만에 이뤄낸 ‘사건’이었다. 당시 서예대전 출품작은 대나무(竹)였는데, 그 화법이 너무 독톡해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이때부터 석경에게 ‘대나무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기존의 대나무 그림이 줄기(竿)-가지(枝)-잎(葉)-마디(節)로 이어지는 패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석경은 이 틀을 과감히 깨버렸다. 석경의 대나무는 잎이 먼저 그려진다. 잎은 구도(構圖)의 소품이자 작가의 화의(畵意)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석경의 댓잎 배열은 구도상 공간배치를 잡아주는 소품이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정신세계의 표현, 즉 화격을 보여주는 언어가 됐다. 가로, 세로 한지에 죽엽이 자리를 잡으면, 잎 사이를 뚫고 줄기가 순식간에 댓잎들을 관통하며 그림이 완성된다. 줄기는 이상과 관념들을, 번뇌와 고뇌들을 한 흐름으로 꿰뚫으며 작가의 지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거침없이 뻗어나간 줄기는 수도자의 게송(偈頌)이요, 선승의 깨달음의 일갈(一喝)인 것이다. 평론가 이인숙은 “초기 필획과 여백의 이중주에 머무르던 석경의 묵죽이 후기에 이르러 담묵(淡墨), 선염(渲染)의 죽영(竹影)이 들어가 공간이 깊어지고 여백의 밀도가 높아진 삼중주로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역 서단의 한 작가도 “석경의 죽(竹)에는 석재(石齋)의 웅장하고 호방함, 죽농의 아름답고 세련됨, 천석의 깔끔하고 간결함이 잘 녹아있다”고 평했다. 석경은 이 모든 것에 아울러 꼿꼿함과 소쇄함을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냈다. ◆ 한때 생활고 시달리며 노동판에서 노역도 불혹(不惑)도 안 된 나이에 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며 석경은 순식간에 화단의 블루칩으로 부상했다. 전화통이 불이 날 정도로 하루 종일 전화를 받았다. 축하 전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서울 문화계 쪽이나, 주류 서예단체의 러브콜도 상당수였다. 그들은 목돈을 제시하며 기획전, 초대전으로 그를 유혹했다. 수도권 주류 문화계에서는 ‘명망가’로 향하는 급행티켓을 제시했다. 그러나 ‘맹수는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다’는 스승의 유훈에 따라 그는 시류와 타협을 거부했다. 오히려 은둔을 자처해, 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이후 10년 동안 두문불출 작업에만 전념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세상의 ‘주류’를 외면한 후유증은 너무 컸다. 세상이 보내온 환대를 거절한 것은, 사실상 세상을 적으로 돌린 것이어서, 모든 공적인 활동, 전시의 길이 막혀버렸다. 스스로 자처한 궁핍과 고립은 오로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도저히 가족을 건사할 길이 없어 막노동판에 나갔다. 공사판 생활 그 몇 년 동안 몸은 고되고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 영혼이 투명하고 맑아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자들과 지인들이 ‘대상 작가가 막노동을 하느냐’며 우려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중에는 그것 역시 근육이 돼, 오히려 주변의 제약이나 화단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껏 자신의 서화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됐다. ◆ 도전, 또 도전… 해마다 새로운 화풍 선보여 화가들은 쉴 새 없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작업 경지를 넓혀가고, 피아니스트들도 끊임없이 새 주법을 시도하면서 마스터로 성장해 간다. 서예가들도 작품의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자기의 작업 세계를 확장해 간다. 대나무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후, 석경에게 따라다니는 ‘대나무 작가’ 꼬리표는, 그에게는 되레 굴레였다. ‘그림이나 화풍에 어떤 작가가 떠오르면 그 작가는 이미 죽은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석경은 철저하게 자신을 객관화했다.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 그는 대나무 장르 한 분야에서만 4, 5번의 변주(變奏) 과정을 거쳤다. 서법에서도 전서, 예서에 편식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했다. 매난국죽 문인화 가운데서도 다수가 외면하는 ‘국화’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능소화, 장미, 포도 등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여 문인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석경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형화된 문인화의 틀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패기 넘치던 시절 화두로 삼았던 ‘서화(書畵)일치’를 되새겨, 서예에 회화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한때 동양화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였기에, 이런 그의 재능이 징검다리가 되어 글과 그림의 접목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이런 그의 작풍(作風)은 보랏빛 담묵을 배경으로 그린 국화나, 천연색 녹색 죽영(竹影)을 과감하게 도입한 죽엽도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화선일치 반세기 맞아 작품에만 몰두 많은 예술가들이 ‘장르 외도’를 하고 끊임없이 변신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버려지고 취하는 것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립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수많은 취사(取捨)의 갈림길에서 석경은 끊임없이 장르를 파괴하고 구도를 깨뜨리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한때 그는 전통 문인화의 틀을 깨보려고 힘썼다. 그러나 그는 지금 크게 의미 없었던 것이 아닌가 회의한다. 다시금 정통 문인화법으로 회귀했지만 그는 아직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화업(畵業) 50년을 맞은 석경, 그는 오늘도 대구 대봉동 서실에서 조용히 먹을 갈아 붓을 세우고 있다. 20여 년 전 대상 작가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때, 그 역시 세속의 영화에 관심이 없기야 했겠나. 그러나 지금은 에둘러온 지난날 길을 되짚어보며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할 뿐이다. “아마 제가 서울로 갔더라면 시류(時流)와 영합해 대중이 원하는 그림만 그리는 장사꾼이 되었을 겁니다. 아니면 대중매체,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 밑에서 위선(僞善)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랬다면 돈과 명예는 얻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평안이나 잘살았다는 자부(自負)는 없겠지요.”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09-26

스물다섯 살에 연고 없는 포항에서 무용학원 개원

여고 시절의 무용 선생님은 수업 전에 덧버선 검사를 했고, 꼭 수돗가에서 발을 닦고 들어오게 할 정도로 엄격했다. 당시 선생님의 반듯한 용모와 도도한 기품은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김동은 무용가와의 첫 통화 때 바짝 긴장했다. 내 염려를 알아차렸는지, 본인도 이런 대담은 생소하다며 서로 마음 편하게 만나자고 했다. 김동은 무용가는 지난 2월 23일 사단법인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선에서 당선된 바 있다. 동빈내항에 있는 포항예총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전은주(이하 전) : 지난 3월에 한국예총 포항지회장에 취임하셨죠. 그 후로 바쁜 나날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네, 회장 취임 후 한동안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바빴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열심히 공부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전 : 포항예총 역대 회장 중 첫 여성 회장이자 첫 무용협회장 출신입니다.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김 : 1978년에 포항에 왔습니다. 그전에 포항에 무용학원 한 군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1970년대 이후 포항에서 학원 무용 선생으로는 내가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좀 어렸지요. 어리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스물다섯 살이었어요. 포항에 와서 교육청에 무용학원 인가를 받으러 가니까 내주지 않더군요. 춤이라면 사교춤으로만 생각할 때여서 무용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어요. 학원 장소를 마련해놓고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인가를 받았지요. 인가 번호를 지금도 기억하는데 13호입니다. 그때 포항 시내에 공연장이 딱 하나 있었는데 시공관이었어요. 지금은 중앙아트홀이 있는 자리지요. 그곳에서 공연할 때 연극인들이 조명을 도와주고 미술가들이 무대를 꾸며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신상률 포항예총 회장님, 김삼일 은하 극단 대표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언젠가 때가 되면 신세를 갚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포항예총 회장이 되고 보니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요. 전 : 지금도 무용 하면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 시절에 무용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 초등학교 때 학예회가 열리면 주인공으로 뽑혀 공연을 했었지요.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무대에 서는 게 좋았어요. 중학교에 무용반이 있어서 무용을 했고 경북예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경북예고 5회 졸업생입니다. 전 :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김 : 선생님들이 나더러 “너, 아양 초등학교 졸업했냐”며 웃으시곤 했어요. 내가 아양(애교)을 많이 떨어서 그랬답니다.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친구들한테는 잔소리를 많이 해서 시어머니라는 얘기를 들었고요. 피부가 곱고 뽀얘서 규율 선생님한테 볼 검사를 자주 받았지요. 가제를 손가락에 말고 볼을 싹 닦아보곤 하셨어요. 손톱도 유난히 반짝여서 무색 매니큐어를 발랐다고 혼나기도 했습니다. 전 : 어여쁜 학생이셨군요. 혹시 롤모델이 있었나요. 김 : 있었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에 무용학원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백년욱 원장님이 운영하는 학원에 가게 되었는데, 원장님의 첫인상이 근엄하면서도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가 겨울이라서 한복 치마저고리 위에 마고자까지 갖춰 입고 올림머리를 하고 계셨지요. 그때 목표가 딱 생겼습니다. 무용학원 원장이 되어야겠다고. 전 : 무용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김 : 나는 2남 1녀의 맏딸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기생으로 만들 수 없다며 극심하게 반대했어요. 그래서일까요? 아버지는 생전에 한 번도 제 공연에 오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섭섭하지는 않았어요. 무용하는 걸 묵인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지요. 내가 무용에 온 힘을 쏟는 걸 보고 나중에는 참 열심히 한다고 인정해주시더군요. 전 : 그 시절에는 아버지가 반대하면 무용뿐만 아니라 뭐라도 하기 힘든 시절이었을 것 같습니다. 김 :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뒤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머니가 너 때문에 내가 주머니를 두 개 차야 한다고 하셨지요. 아버지 눈치 보느라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 해준다며 늘 미안해하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전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김 : 군인이었습니다. 육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지요.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있는 참전용사 비문에 아버지 존함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집이 엄청나게 셌어요. 국가유공자 훈장을 받으러 오라고 했을 때 “그깟 종이 쪼가리는 받아서 뭐 하노” 하시면서 안 가셨답니다. 미군 부대에서도 표창장을 준다고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끝까지 안 가셨고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 국가유공자 가족으로 아무 혜택도 못 받았어요. 어머니께서 그 훈장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안타까워하셨지요. 세월이 흘러 막냇동생이 국방부에 의뢰했더니 아직 훈장이 있으니 찾아가라고 했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영천 호국원에 영면하셨지요. 전 : 국가유공자인데 아무 혜택도 못 받으셨군요. 김 : 연금은 물론이고 혜택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강사 지원서에도 국가유공자 자녀라 쓰면 우선권이 주어진다는데…. 지난 6월 25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74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군인들이 깃발을 들고 무대에 입장할 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전 : 포항에 오실 때 연고는 있었는지요. 김 : 없었습니다. 전 : 연고도 없는 포항에 가서 무용학원을 열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 : 아버지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저를 포항으로 시집보냈다고 생각하시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듯합니다. 전 : 포항에 온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김 : 친구가 동지여상 무용 교사였어요. 그 친구를 의지해 포항으로 왔는데 정작 그 친구는 결혼 후 포항을 떠났습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대구에서 무용학원을 열면 스승이나 선배들의 영역과 겹치게 되지요. 그걸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 : 어쨌든 용기가 대단했군요. 김 :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나이 어리다고 무시할까 봐 허리까지 긴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틀어 올려 비녀 같은 걸 꽂고 다녔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려고요. 지금은 빈말이라도 젊어 보인다고 하면 기분 좋은데…. 그저 웃음만 납니다. 전 : 그 당시 포항 분위기는 어땠나요. 김 : 죽도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슬래브 지붕의 단층주택뿐이었어요. 밤이면 시내 전체가 조용했고 제철소의 용광로에서 뿜어내는 시뻘건 빛과 용광로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들렸지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 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김동은은… 195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왜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북예고와 광주대를 졸업하고, ‘월월이청청에 관한 연구’로 중앙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제2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폐막공연에서 ‘월월이청청’을 선보이는 등 ‘월월이청청’의 가치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78년 포항에서 무용학원을 개원한 후 지역 무용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썼다. 포항무용협회 초대 회장, 경북무용협회장 등을 지냈으며, 제14회 금복문화대상, 제44회 경북도문화상 은상 등을 받았다. ‘충비 단량, 대를 잇다’ 등 지역에 기반한 20여 편의 창작 한국무용을 발표했다. 2024년 3월 제14대 포항예총 회장에 취임했으며, (사)한국미래예술문화진흥원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09-25

한강 선생의 충의 실천하며 수백 년간 서원을 지킨 느티나무

비구름 안개가 산천을 덮으며 점점 퍼져 간다. 구불구불한 시골 산길은 끝도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면 또 모퉁이가 나오고 하얀 구름안개 꽃은 달리는 자동차까지도 에워서 싼다. 피어오르는 하얀 구름안개 꽃 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길섶에는 풍성한 녹색 물결이 출렁인다. 펼쳐지는 녹색 자연은 가슴을 물들이고 꿈속 같은 어린 시절의 과거로 돌려놓는다. “go back to the past”. 하얀 구름안개 꽃을 헤집고 옛 유생들은 하염없이 이 산길을 걷고 또 걸어 선비 선생님이 계시는 성주 신정리 회연서원으로 걸어갔겠지.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는개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겠지. 녹색 산길을 돌고 돌 때마다 배움의 신비감은 더해져만 갔겠지. 회연서원으로 가는 길은 성리학의 깨우침일까, 자연 만물의 생과 사는 이(理)와 기(氣)의 합체와 이별의 조화인가. 마음은 배움으로 향하고 몸은 서원으로 향하는 유생들이 보인다. 도중에 흰 두루미가 푸른 볏논에 모양새 나게 앉는 꿈속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처럼 나풀거리거나 나뭇잎처럼 살랑거림도 없다. 그렇다고 하늘로 던진 돌멩이가 땅으로 뚝 떨어지는 속도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정적이면서 내려오는 동적인 모습은 정중동이랄까, 우주의 중력의 법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특급 비밀인지 모를 참으로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행위 예술이었다. 아름다움의 절정은 마지막으로 긴 다리를 살짝 굽히면서 연착륙을 시도 하는 모습이야말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오로지 잿빛으로 물들인 하늘과 짙은 녹색의 산야는 신비감을 더했다.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우주 만물에는 이(理)가 깃들여 그 본성이 나타나고… 기(氣)와 이(理)를 가지고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 질서를 논하는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향배하는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 느티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정구 선생은 이이 퇴계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성리학을 바탕으로 실천적 실용주의를 지키면서 후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회연서원은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요즘의 지방 학교와 같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지난 역사와 함께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여가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정문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야말로 한강 선생의 충의를 실천하며 서원을 지키고 있어 선생의 숨결이 스며있지 않을까 싶다. 현도루(見道樓) 망루 위에 오르니 회연서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생들이 강당에 모여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글 읽는 모습이 보인다. 서원으로 들어서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우람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서 유생을 맞이한다. 지금은 400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키 20m, 가슴둘레가 5m이다. 경내 뜰 정원에는 매화나무, 회화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백매원(百梅園)이라 부르고 있다. 꽃 피는 봄이면 모를까 뭐니해도 나이가 제일 많고 몸집도 제일 큰 정문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제일 높은 어른 같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서원 유생들의 등교 시 품성을 점검하는 규율부장 선생님 같다. 아니 한강 정구 선생이 느티나무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선생은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하여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선생의 사상적 유산과 성리학적 가치를 충의로 연결하여 이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느티나무가 하여 왔지 않나 싶다. 대가천 물을 남으로 돌린 봉비암을 업고 회연서원은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이 무흘구곡(武屹九曲)을 노래하면서 깎아지른 듯 봉비암(鳳飛巖) 단예를 조각해 놓았다. 봉비암은 무흘구곡 중 제1곡의 자리이다. 대가천의 아름다운 계곡을 오르내리며 시를 지어 무흘의 절경을 노래한 것이 무흘구곡이다. 9곡의 굽이마다 이름을 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이학(理學)으로 상징화함으로써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과정이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한편으로 도학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종의 수양 과정이기도 하다. 조선의 무흘구곡 문화는 산림 문학의 원류란 생각이 든다. 구곡 문화는 유학을 바탕으로 자연, 문학, 예술이 조화롭게 혼합하여 빚어진 조선 유학의 꽃이요, 진수라 할 수 있다. 완전한 구곡 문화의 향유는 구곡원림과 구곡시, 구곡도를 모두 갖춘 것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원림은 물론 산의 숲과 나무, 계곡, 바위, 폭포 등 모든 자연물은 산림 문학의 대상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시를 짓는다거나 음악으로 표현한 노래 가사도 산림 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마을을 드나들면서 마을 어귀에 있는 당산목 앞에서 몸가짐을 되돌아보았듯이 유생들 또한 서원을 드나들면서 늘 맞닥뜨리는 규율부장 선생님 느티나무를 보면서 충의를 불태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꼿꼿함에서 충을 보았고 수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의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물의 상징성에서 늘 깨닫고 배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느티나무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서 서원을 지키면서 선비들의 몸가짐과 행동을 보았을 것이니 회연서원 느티나무 노거수는 조선의 선비라 해도 좋을 듯하다. 이제는 학생을 가르치는 서원은 문화재가 되어버렸다. 현도로 망루에서 보는 경관이 어쩜 이렇게도 아름다운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곱게 가지런히 쌓은 돌담은 서원의 지붕과 어울리고 병풍처럼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봉비암 숲은 하늘과 맞닿은 듯 고요, 적막, 평화로움으로 내게 다가왔다. 회연서원과 한강 정구 선생, 그리고 성리학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은 1654년에 한강 정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한강 정구의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을 후대에 전파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서원은 한강 정구의 성리학적 사상을 보존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중요한 장소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은 1543년에 태어나 1620년에 사망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교육자로 이황과 이이를 잇는 중요한 학자로 평가된다. 성리학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고, 학문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중 의병 운동을 했으며 도덕적 자기 수양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조선 중기 이후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性理學)은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유교 철학이다. 조선시대 이황과 이이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理)는 만물의 본질적 원리이고, 기(氣)는 그것을 실현하는 물질적 요소다.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며, 도덕적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유교 철학이다. 성리학은 도덕적 인간이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25

제철소 심장, 고로를 움직이는 전기… 40년 한 길로 명장 반열

“모든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흔히들 제철소의 고로는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포항제철소의 심장이라 부른다. 고로를 포함한 제철소의 모든 설비는 전기를 먹고 산다. 포항제철소를 가동하는 무한한 에너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전기. 즉, 전기는 제철소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혈액과 같은 존재이다. 현재 포스코 전기 분야 최고 숙련인 정규점(63) 명장. 1985년 포스코에 발을 들인 그는 지금까지 전기를 주제로 한 길만을 걸어와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제철소 전력 공급 지킴이 EIC기술부 정 명장에게 최근 숙련기술인이 되는 과정을 들어 봤다. - 현재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수변전(受變電)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수변전이란 한국전력이나 자체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받아 각 공장에서 사용할 수 있게 변전해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제철소의 모든 생산시설과 생활 지원 시설에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포항제철소는 365일 밤낮으로 가동되는 장치산업으로, 잠시라도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제철 공정이 중단돼 큰 생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맡고 있는 업무에 문제가 발생하면 제철소 모든 곳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설비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정비부서는 설비사고를 예방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해 생산 피해를 최소화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 포스코에 입사했을 때의 첫인상은. △포스코에 처음 입사할 당시 전기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입사했지만, 현장 전기설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제철소는 거대한 장치산업이다. 쇠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필요한 전기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전기 관련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제가 입사한 당시에는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전기기술 월간지 등을 참고해 실무에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며 틈틈이 공부했다. - 15개의 국가전문기술자격증을 취득하게 된 동기와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전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일 만큼의 열정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부족한 전문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 틈만 나면 전기기술 서적을 뒤적였고, 핵심적인 기술이나 자료는 노트에 빼곡히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취득한 국가전문기술자격증만 15개에 달한다. 전기 관련 자료와 지식을 모두 수집하겠다는 욕심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끈기 있게 도전하면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신념이 생겼다. 입사 초기 부대시설 정비감독 업무를 하면서는 인위적으로 고장을 내어 트러블 조치 방법을 습득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자신감이 붙자, 업무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고질적인 설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 분석과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가 필요했다. 설비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바탕으로 끈기 있게 집중하다 보면,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리듯 해답이 나타나곤 했다. - 기술대학에서의 학업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가장 큰 성과는. △1992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더욱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기술대학에서 공부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맨 앞자리에 앉아 강의를 녹음하고, 노트가 닳도록 외우며 최신 기술을 습득했다. 기술대학에서의 학업은 전기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됐다. 회사의 배려 덕분에 기초와 기본기를 탄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기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수석으로 졸업한 후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과제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론과 실무를 바탕으로 제철소 전기설비 유지 보수는 물론, 해외 글로벌 패밀리, 그룹사 및 동반성장사 등에서 발생하는 설비 장애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됐다. - 전기정비 업무를 39년 동안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설비가 정상 가동되던 순간이다. 특히 광양 2제강 화재, 포항 2열연 화재, 중국 청도 불수강 화재 등 대형 사고 복구 후 설비가 정상 가동될 때의 성취감과 전율은 잊을 수 없다. 2022년 9월 힌남노 태풍으로 인한 냉천 범람으로 포항제철소 전체 공장이 가동 중지된 사상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당시 제철소 전체가 정전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공장 가동이 멈추고, 밤이면 제철소 전체가 고요함과 적막감에 휩싸였던 그 순간, 전원 공급이 재개돼 용광로가 다시 가동되고 135일 만에 주요 공장이 기적처럼 정상 가동됐을 때의 행복감은 잊을 수 없다. - 후배 양성과 기술 전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EIC 기반기술인 전력설비 인프라 기술 교육용 아이템을 5가지 선정해 후배 사원들이 전기의 기본과 기초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재를 만들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많은 직원들이 이 자료를 공유하며 현장 전기업무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현재 포스코 사내 인재창조원에서 기술교육 전문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저근속 직원들을 위한 정비 기초 핵심기술 강의와 파트장을 대상으로 설비 관리 중점 포인트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패밀리사, 고객사, 동반 성장사, 해외 글로벌 생산기지 등에도 기술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기술 지원을 하고 있다. - 숙련기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후배들에게 꾸준함과 도전 의식을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현장에는 늘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매일 새로운 과제가 발생한다. 이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 있을 것이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그 힘이 아니라 꾸준함 때문이다. 주자의 10가지 후회 중 ‘소불근학노후회’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는 뜻으로, 자기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 길은 끊임없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주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면 일 자체가 재미있어지고, 신뢰받는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내 인생철학은 “노력하고 도전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 이다. 또한,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와 “땀 흘리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無汗不成)”는 속담을 자주 인용한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오듯이, 직장생활에서 문제 해결 능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직장생활의 재미는 물론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밑거름이 된다. - 3000시간 이상의 봉사 활동을 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에서의 경험은. FFFC△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왔다. 사내 전기기술 봉사단을 비롯해 쇠터얼 문화재돌봄 봉사단 및 자율방범대 활동을 20년 동안 해오고 있다. 특히 자율방범대는 자녀들의 안전한 귀가를 돕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몇몇이 모여 창설하게 됐다. 이를 통해 지역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물론, 소년·소녀 가장을 비롯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었다. 늦은 밤거리를 서성대는 청소년들이나 학생들을 잘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낼 때는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요즘은 문화재돌봄 봉사단에서 지역 문화재를 보존하고 알리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지키고 잘 보존하는 데 열정을 다하고 싶다. - 이밖에 하고 싶은 말. △포스코의 미래는 후배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애사심과 주인 정신을 가지고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맡은 업무에 대한 열정과 기술적인 열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각자의 마인드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간디의 명언처럼, “네 생각은 네 말이 되고 네 말은 네 행동이 되며 네 행동은 습관이 되어서 네 습관이 바뀌면 네 가치가 된다”고 했다. 내 가치는 내 운명으로 생각이 있는 곳에 행동하게 되고, 행동이 곧 습관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성공으로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한다. 정규점 EIC기술부 포스코 명장은 △마산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부산 동의과학대학교 전기학과 졸업 △창립 제40주년 올해의 포스코인(2008년)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 위촉(2012년) △경북도 최고 장인(2019년) △포스코 명장(2020년) △포스코 상무보 신규 선임(2023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25

‘청정 봉화’ 송이솔밭·내성천 특설무대서 펼쳐지는 문화축제

올해로 28회째를 맞이하는 ‘봉화송이축제’가 오는 10월 3일부터 10월 6일까지 4일간 봉화읍 내성천 및 관내 송이산 일원에서 개최된다. ‘송이향에 반하고, 한약우 맛에 빠지다’라는 슬로건으로 펼쳐지는 이번 축제는 체험, 공연, 전시 부대, 연계 행사 등 약 24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올해 축제는 천혜의 환경에서 자란 봉화송이를 알리고 청정 봉화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힘썼다. 지역주민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를 만들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풍성한 체험프로그램으로 고품격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박현국 봉화군수(봉화축제관광재단 이사장)는 “이번 송이축제는 송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버섯 등 품질 좋은 우수 임산물도 많이 준비돼 있다”며 “가을문화 축제인 봉화송이축제의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테마(청량문화제, 목재문화, 세계문화 등)의 체험, 전시관을 운영하는 만큼 가족, 친구와 좋은 추억 쌓아가시길 바란다 ”고 밝혔다. □ 송이향에 반하고, 한약우 맛에 빠지고 봉화송이축제 대표 주제 체험인 송이 채취체험은 축제기간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진행된다. 축제 참가자들은 직접 송이를 채취하며 자연의 선물인 송이를 경험하는 특별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송이 채취체험은 선착순으로 접수되며 체험은 하루 두 차례 무료로 진행된다. 회차마다 50명씩 참여할 수 있다. 봉화송이와 한약우에 관련된 퀴즈를 통해 숲속도시 봉화를 알아보는 ‘도전! 송이 골든벨’은 10월 5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내성천 특설무대 앞 잔디광장에서 펼쳐진다. 또한 축제 기간 중 진행되는 게릴라 이벤트인 ‘송이 한송이 챌린지’는 뽑기, 딱지치기 등 남녀노소가 쉽게 즐길 수 있는 간단한 게임으로 축제장 서편에서 진행되며 다양한 경품이 준비돼 있다. 이외에 송이 가요한마당, 목재문화축제 등 7개의 체험행사도 진행될 예정이다. 송이판매장터와 송이 한약우 식당 등 다양한 먹거리들도 판매해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품질 좋은 등급별 송이를 구매할 수 있는 송이 마켓, 안동 봉화축협과 봉화한약우작목회에서 주관하는 한약우 홍보관 및 판매 마켓이 개설된다. 봉화군의 우수 농특산품을 직접 비교하며 구매할 수 있는 농·특산물 먹거리 마켓, 송이와 한약우의 화려한 조합으로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송이 한약우 셀프 식당도 운영돼 봉화 송이와 한약우를 활용한 미식 경험을 즐길 수 있다. □ 오색오미 비빔밥 퍼포먼스, 다채로운 공연 개막 첫날인 10월 3일 오후 12시 30분 내성천 특설무대 앞 잔디광장에서는 ‘제3회 오색오미 대형 비빔밥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봉화군 우리음식 연구회 주관으로 봉화송이와 한약우를 비롯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하고 신선한 나물을 재료로 만든 비빔밥을 무료로 나눠주며 관광객과 지역민들이 하나로 화합하는 자리를 만든다. 축제 기간 동안 다채로운 공연행사도 이어진다. 축제 첫날인 3일 오후 7시부터는 송이축제의 성공적인 개최 염원을 담은 개막선언과 함께 최우진, 채희, 김소유, 정미애, 진해성이 출연해 멋진 공연을 선보이며 송이축제의 화려한 막을 올릴 예정이다. ‘몽룡전’뮤지컬, 봉화 샤이닝 스타 콘서트 등 지역 문화 예술인이 참여하는 다양한 공연도 마련돼 방문객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관광객이 직접 참여하는 코미디 토크쇼 ‘톡까놓고 말해보쇼 시즌2’도 열린다. 개그콘서트에 출연했던 유명 개그맨 총 9인의 화끈하고 열정 넘치는 토크쇼가 펼쳐져 즐거움과 함께 지역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느껴볼 수 있다. 축제 마지막날인 6일에는 내성천 특설무대에서 지역주민, 관광객들과 함께 제28회 봉화송이축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공연행사가 진행된다. 황인욱과 송하예, 경서예지, 한강, 배아현이 출연하며, 올해 축제의 끝맺음과 내년 축제에 대한 기대를 담아 가을 밤하늘을 밝히는 불꽃쇼를 끝으로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 넘쳐나는 볼거리와 즐길거리 ‘숲속도시 봉화’브랜드에 알맞은 목재 친화도시 및 도시 재생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목재문화축제를 함께 열어 목재를 활용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봉화송이축제의 대표적인 연계문화행사인 청량문화제에서는 고유의 전통민속놀이를 재연한다. 봉화군민과 관광객이 화합할 수 있는 삼계줄다리기, 한시백일장, 보부상 공연, 서예 전시 및 체험, 우리음식만들기, 전통민속놀이체험 등 다양한 문화행사 및 체험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지역의 많은 문화단체들이 준비한 전시 및 체험행사를 즐겨볼 수 있다. 이밖에도 베트남 홍보관, 성이성문화제, 2024 어린이집 연합운동회 등 다양한 전시, 문화, 체육 연계 행사도 열려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할 계획이다. □ 지속 가능한 축제를 위한 노력 올해 송이축제는 지역 사회 단체의 협력을 통해 지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주민 화합형 축제로 계획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상업 중심형 축제에서 벗어나 체험형 축제로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예방중심 안전관리 강화로 군민과 관광객이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 구현을 목표로 철저한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해 관련 유관기관과 연계 및 협력해 안전사고 예방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바가지 요금 근절을 위해 가격 표시제를 추진하고 고객편의 및 친절, 위생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입점 자격 요건을 강화해 관광객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관광 친화도시 이미지를 조성해 만족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4-09-25

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문사에 있는 선배에게 전화가 온 것은 해가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막 접어들 때였다. 수은주를 뚫을 듯한 기세가 한풀 꺾일 시간이었지만 한낮의 더위에 의식마저 녹아 방바닥에 흥건히 고인 기분이었다. 에어컨 바람 앞에서 의미 없이 TV 리모컨만 괴롭히다가 수신 단추를 눌렀다. “김 선생, 내가 어제부터 매주 연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경주 선도산에 관한 이야기야. 매번 취재 기사만 올리면 독자들이 식상해하니 연재 중간에 김 선생 소설이 한두 번 들어갔으면 좋겠어. 생각 좀 해보고 답을 줘요. 나와 시간을 맞춰 취재를 같이 가보는 것도 괜찮고.” 평범한 원고청탁의 전화였다. 그러나 통화의 여운은 한참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간 얇은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잊고 있었던 커다란 기억이 삼십 년을 시간을 거슬러 떠오르는 것을 예고하듯. 1994년, 대학 학보사의 오월은 창문 너머 캠퍼스의 활기찬 기운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총학생회 출범식을 앞두고 취재 방향을 정하고 대학방송국, 교지편찬위와 공동기자단을 꾸릴 준비, 처음으로 큰 행사를 경험하는 1학년 수습기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대학의 낭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고달픈 기자 생활을 못 견뎌 다 떠나버리고 3학년 편집장 선배와 2학년인 나와 동기, 이렇게 셋이서 격주로 신문을 내야 했다. 그래서 사망한 북한 지도자의 분향소를 설치해 논란이 된 다른 지역 대학의 취재도 나 혼자 가야 했고 학교 재단 비리를 파헤치는 단체의 움직임도 놓칠 수 없었다. 수업은 고사하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학보사에서 먹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소파의 높낮이를 등으로 느끼며 잠에 빠져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전날 밤도 선후배들과 결론 나지 않을 주제로 떠들며 냉동식품과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를 나눠 마신 후 그대로 쓰러진 것이었다. 두통과 속쓰림에 괴로워하며 일어나니 학보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지만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마다 가득 박힌 담배꽁초만 역한 냄새를 내고 있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 네가 웬일이냐? 들어와. 담배 있냐?” “어제도 여기서 잤냐? 와, 냄새 지린다. 아무리 집에 안 들어가더라도 좀 씻고 다녀라.” 같은 과 친구 H가 가방에서 새 담배를 꺼내 갑 채로 던지고는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았다. 나는 내 책상 의자에 앉아 담배의 비닐을 벗겨 불을 붙이고는 옆 책상의 의자를 친구에게 내주었다. “과는 잘 돌아가지? 교수님들도 다 잘 계시고? 안부 좀 전해주라. 근데 누추한 분께서 이 귀한 곳에는 어쩐 일이냐?” “저 주둥이는 여전하네. 아무리 여기 꿀단지가 있어도 한 번씩 수업 들어와서 성의도 좀 보여라. 교수님 화 많이 나셨어. 이번에 조별 과제에도 참여 안 하면 너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 수업 들어오지 말래. 전공 교수가 들어오지 마라는 건 너 졸업 안 시키겠다는 거야 임마. 내가 교수님께 사정사정해서 너랑 같은 조 하겠다고 했어. 너 인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말이야. 어쩌다 너 같은 놈하고 친구가 돼서 내 청춘이 꼬이는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우연히 내 오른편에 앉은 H와 그 오른편에서 이미 H와 친해 보이던 Y, 군을 전역하고 입학을 해 또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왼편에 앉아 있던 J형과 나는 처음부터 마음이 맞아 학기 초부터 붙어 다녔다. 숫기 없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바를 모르고 힘들어하는 게 그들에게 전달되었는지 내게 제일 먼저 말을 건 사람이 J형이었고 두 번째가 H였다. 1학년 수업은 시간표가 거의 똑같았기에 우리는 학교에서 늘 함께였고 내가 학보사 일로 하교가 늦어지면 그들은 학교 근처 시장에 있는 분식집에서 나를 기다렸다. 2학기가 되자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 기자가 되었고 학보사 일은 더 바빠졌다.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빠질 때가 많았고 과제물 제출도 빼먹기 일쑤였다. 이미 학사경고를 예상했고 그렇게 된다면 2학년이 되기 전 휴학과 입대를 선택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학사경고를 면한 성적은 꽤 의외였다. 나를 위해 J형이 대리출석을, H와 Y는 과제물을 대신 써서 제출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이렇게 나를 이해해주고 바라는 것 없이 나를 챙겨주는 그들이었다. 특히 H는 한 번씩 학보사로 생사 확인을 한다며 찾아와 시험 족보와 담배 따위를 던지고 가며 나를 물가에 내놓은 동생 취급하듯 했다. 학보사 사람들이 H를 내 여자친구로 오해를 해 이를 전해 들은 넷이서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답사지인 무열왕릉으로 가려면 기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H가 시키는대로 일회용 카메라 하나만 챙긴 나와 달리 H는 배낭에 무언가를 가득 담아 왔다. 2명이 조를 맞춰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포함해야 하는 요구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반드시 답사지에서 조원 두 명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혼자 과제를 하고 나머지 하나는 숟가락만 얹는 (나 같은) 얌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임을 알았기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벌써 열한 시 반이 지나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고 도로 건너 넓은 주차장에도 버스와 차들이 가득 차 빈 곳을 찾기 어려웠다. 무리를 지어 놀러 온 사람들 속에 섞이니 내 마음에도 공간이 생기는 것 같았다. 흐리지 않지만 희고 두꺼운 구름이 높은 곳 군데군데에서 태양열을 가려 주어 덥지 않은 상태에서 푸른 하늘을 누릴 수 있는 날씨였다. H는 내게서 받은 카메라로 입구의 조감도를 찍었고 나는 뒤에서 H의 배낭을 멘 채 그녀가 하는 것을 지켜보며 담배를 피웠다. 왕의 무덤과 그 뒤로 왕을 호위하듯 네 기의 무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무덤과 무덤 사이에는 생의 활력들이 소란스럽게 돌아다녔다. 살아서는 고귀한 존재였다가 죽어 누운 자리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은 어떨까를 생각하며 사진 찍는 H를 따라다녔다. “야, 여기에 내려놓고 거기 앞주머니에 자리 있을 거야. 그거 깔고 가방 안에 있는 것 꺼내 예쁘게 한 번 차려 봐. 누님이 시장하시다.” “또 오라버니한테 까분다. 근데 이게 다 뭐냐? 너희 집 식당이나 반찬가게 같은 거 차렸냐?” “야, 말도 마라. 새벽부터 이거 준비하느라고 아주 죽는 줄 알았다. 이 누님이 어디서 죽도 못 얻어먹을 것 같은 너 먹이려고 이 고생을 한 거 아니겠냐.” “오, 좀 감동인데? 우리 H 시집보내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차려입은 것 같다? 얼굴에도 분칠 좀 한 것 같고.” “쉰 소리 그만하고 먹기나 해, 물도 먹어가며. 야, 근데 나한테 장가오는 남자는 확실히 땡잡을 것 같지? 이 차린 것 봐라. 내가 만들었지만…… 감동이다 감동.” 준비한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였고 맛도 상당히 좋았다. 맛있는 음식과 끊이지 않는 즐거운 대화, 맑은 공기와 선명한 색깔의 경치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잊게 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이나 소풍을 나온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점심을 먹고 왕릉을 둘러본 후 나가기 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부부에게 우리 둘의 사진을 부탁했다. 친밀한 포즈를 취하라는 아기 아빠의 요구에 나는 손가락으로 V를 그렸고 H는 내게 팔짱을 꼈던 것 같다. 왕릉 옆에 있는 마을에서 선도산 정상까지는 삼십 분 거리의 산길이었다. 술과 담배에 몸을 맡긴 대가를 근육과 폐의 고통으로 치르는 것 같았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한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기다려주는 H와 가다 쉬다를 서너 번 한 후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의 저질스러운 체력과는 별개로 산 정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높이와는 달리 산은 아래로 도시와 도시를 감싸고 펼쳐진 들판, 그 평야를 가르는 고속도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풍경을 제공하였다. 바위를 품고 있는 산 정상에는 절벽 한쪽을 깎은 불상 셋이 있었는데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부처와 보살들이 새겨진 암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깎이고 패이고 닳아져 있었다. 특히 중앙의 불상은 그 훼손 정도가 심하여서 얼굴의 절반 이상은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바위가 깨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나마 양쪽 보살들은 세월을 따라 부드럽게 닳아 형체만 희미했을 뿐 날카롭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한 자리에서 한참 동안 불상을 바라봤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움과 뾰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똑같았다. 보살들의 밝은색과는 달리 검은 바위에 새긴 모습 또한 근본이 어두운 내 성격에 비교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저 바위들의 본성처럼. 그래서 내 마음과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짜 보살이라도 되었나?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어?” “H야, 내가 왜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학보사에 눌러있는지 아냐? 물론 학보사 사정도 있지만 사실은 Y 때문이다. J형이랑 넌 몰랐겠지만 우리 작년에 잠시 사귀었어. 그런데 Y가 싫다네. 가까워질수록 내가 어두운 사람이래. 친해질수록 너무 날카로워서… 그래서 자기가 상처를 많이 받는단다. 내 의도와는 달리 걔는 그렇게 느꼈나 봐. 그런 말 듣고 관계가 일방적으로 정리되니까 Y 얼굴을 마주할 용기라 안 나더라. 반박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학보사는 내 도피처야. 앞으로 누굴 만나도 상처만 줄 것 같아.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내가 앞으로 누굴 좋아할 수 있겠냐? 아까 올라올 때 돌탑에 돌 하나를 보태면서 Y에 대한 마음, 이성으로서 누굴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탑 위에 얹었다. 하, 털어놓고 나니 시원하네. 어이 친구, 그만 내려가자.” 다음 해 H는 휴학을 한 후 일본으로 갔고 나는 입대를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넷이 모이는 일도 사라졌다. 내가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J형이 결혼했는데 식장에서 만난 H는 학생 때의 선머슴 티 대신 우아하고 성숙한 여성이 되어있어 아직 군인인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복학을 하고 자퇴 신청서를 들고 온 H와 다시 만났다. 전공을 바꿔 일본에서 공부를 새로 할 예정이며 유학 중에 만난 남자와 거기에 터를 잡을 예정이라고 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고 헤어진 후 피운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Y의 소식은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돌탑 위에 마음을 두고 온 때문인지, 아직 닳지 못한 성격 탓인지 등 떠밀리다시피 한 결혼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린 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십 년 동안 선도산 지척에 살며 거기에 한 번 가볼 생각은 왜 나지 않았던 걸까? 그때 두고 온 내 마음은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까? 다음 주 잡은 선배와의 취재 약속 전에 혼자 삼십 년 전 그 길을 좇아 걸어봐야겠다. 소설가 김도일(49) 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계속)

2024-09-24

내과·가정의학과·정형외과 등 주요 과목 전문의료진 상주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는 정부와 의료계간의 갈등으로 제때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갈등의 매듭이 속히 풀리기를 기다리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근처에 대형 병원이 없는 농어촌 지역의 공공 의료서비스는 그 중요성이 커진다. 고령화와 저출생이라는 사회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필수 공공 의료의 필요성은 거듭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시기에 청송군 보건의료원이 지역 주민들의 건강 증진과 의료 서비스 향상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주목받고 있다. 지역 의료의 공백을 해소하고, 공공의료의 모범사례로 도약하려는 청송군 보건의료원이 집중하고 있는 각종 의료 서비스와 관련 사업들을 아래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산부인과 등 지역민 위한 다양한 의료 서비스 제공 청송군 관계자에 따르면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단순한 보건소의 기능을 넘어서고 있다. “농촌 지역 유일의 종합병원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진료 과목을 제공하고 있어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내과, 가정의학과, 정형외과 등 주요 과목에 전문의가 상주하고 있다. 여기에 소아청소년과, 재활의학과, 치과 등의 진료도 폭 넓게 제공함으로써 청송군 지역민의 건강에 관한 다양한 요구들을 해소함과 동시에 먼 곳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니기에 여의치 않은 이들의 의료 수요를 충족하고 있다. 지난 9월 6일부터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매주 금요일 산부인과 진료를 시작했다. 그동안 부족한 의료진으로 인해 산부인과 진료가 중단돼 산부인과 관련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지역 주민들은 인근 지역으로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 불편을 겪은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청송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과 협약을 체결해 임산부와 여성들을 위한 산부인과 진료를 다시금 재개하게 됐다는 것이 관련 담당자의 설명이다. 청송군 보건의료원의 산부인과 진료는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산부인과 장원규 교수가 담당하고 있다. 이와 관련 청송군은 “산부인과 진료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산부와 가임 여성에게 편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지역 여성들의 건강관리와 출산율 증가에도 적지 않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망했다. □ 고령화 대응과 의료 접근성 개선으로 농어촌 모범사례 비단 청송군만이 아니다. 한국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은 고령 인구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의료의 접근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청송군은 전국 최초로 농어촌 버스를 무료로 운행하여 군민들이 병원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청송군 관내를 운행하는 모든 시내버스가 보건의료원을 경유하게 함으로써 주민들의 교통비 부담을 줄이고, 보건의료 서비스 이용을 활성화한다는 것이 청송군의 복안이다. 이 정책은 주민들 역시 반기고 있으며, 무료 농어촌 버스 이용 만족도 또한 높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정책으로 인해 접근성이 보다 좋아진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전국 15개 지역 공공의료원 중 유일하게 인근 종합병원과 진료 부문을 위탁 체결해 다양한 진료 과목과 응급실, 입원실을 운영 중이다. 특히, 안과 등 접근하기 어려운 과목은 안동성소병원과 협력해 월 1회 ‘찾아가는 특별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시간 부족 등의 각종 여건 문제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지역 어르신들에게 호평받는 의료 서비스로 자리매김 중이다. 여기에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24시간 운영되는 응급실과 닥터헬기를 통한 긴급 환자 이송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부연이다. □ 다양한 건강증진 사업과 맞춤형 복지사업도 함께 추진 청송군 보건의료원은 최근 급식시설의 현대화, 최신 의료 장비 도입 등도 의욕적으로 진행했다. 자동혈구분석기, 고압증기멸균기 등의 장비는 신형으로 교체됐고, 물리치료실 증축과 체외충격파치료기, 로봇 고출력 레이저치료기 등 전문 치료 장비도 확보해 양질의 의료 서비스 제공에 가일층 노력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다양한 건강증진 사업을 추진하고, 주민맞춤형 복지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무료 대상포진 예방접종 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고령층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건강한 노후 생활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AI-IoT 기반의 어르신 건강관리 사업, 재가 치매 환자 돌봄사업 등 다양한 맞춤형 복지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고 청송군 관계자는 말한다. 치매 가족을 위한 1박 2일 ‘엄마와 하룻밤’ 프로그램도 부모와 자식 세대 모두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청송군은 전했다. 고령화 문제와 함께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주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저출생 문제의 해결에도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청송군은 출산 지원을 확대해 첫째 자녀 출산시 200만 원, 둘째 자녀 이상은 300만 원의 ‘첫 만남 이용권’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난임 부부 지원사업도 체외수정 및 인공수정 시술비 지원을 총 25회로 더 넓게 확대했고, 산모와 신생아 건강관리 지원사업의 소득 기준을 폐지했다. 더불어 “고위험 임산부 의료비 지원 대상자의 소득 기준 폐지, 출산·육아용품 무료 대여방 증축 등을 통해 아이를 낳아 기르기 좋은 출산 친화환경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청송군의 설명이다. 이러한 제반의 공공 의료사업과 관련해 윤경희 청송군수는 “언제나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의료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며 “앞으로도 최신 의료장비 도입과 다양한 건강증진 사업을 통해 지역민의 건강과 복지를 꾸준히 챙겨가겠다”고 약속했다. /김종철·홍성식 기자

2024-09-24

“APEC 유치 성원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예술로 보답”

경주 문화예술축제인 제51회 신라문화제가 가을축제 만족도를 높여 지난해와 달라진 내용으로 찾아온다. 올해는 예술제와 축제로 구분해 2025 APEC 정상회의 유치를 축하하고 내년 성공개최 기원을 담아 어느 해보다 뜻깊은 행사로 구성했다. 이번 축제는 안전상의 문제로 개막식 장소를 월정교에서 대릉원으로 변경하고 금관총 주변에 푸드트럭존을 신설, 스마트 QR 주문 및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또 봉황대 법장사 뒤편에 ESG 존을 마련해 친환경 체험 공간과 반려견 동반 구역을 새롭게 준비했다. 신라예술제는 오는 28일부터 29일까지 주제공연 및 미술, 사진전시, 체험행사 등의 콘텐츠로 경주 예술의 전당 일원에서 펼쳐진다. 이어 신라문화제(축제)는 10월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신라복판타지 패션쇼, 실크로드 페스타, 화랑힙합 페스타, 달빛난장 등으로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를 선사한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올해 신라문화제는 무더위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APEC 정상회의 유치에 끝까지 성원을 해준 모든 분들에게 문화·예술로 보답하고자 수준 높은 콘텐츠로 준비했다”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9~10월에 신라문화제에 반드시 오셔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가득 담아 가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 개막식 월정교에서 대릉원 변경 올해 신라문화제 개막식은 대릉원에서 개최된다. 지난 2년간 월정교 수상 객석에서 진행했던 ‘화백제전’의 하천 지반 등 안정상 문제 우려에 따른 조치다. 경주시는 화백제전을 대신해 신라복판타지 패션쇼를 선보인다. 패션쇼는 신라 스토리를 담은 슈퍼모델 100인의 신라복쇼와 함께 미디어아트, 라이트쇼, 드론 등을 결합한 멀티미디어쇼로 진행된다. 쇼는 주요 내빈의 신라 상징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신라의 태동을 상징하는 박혁거세, 강한 국력의 진흥왕, 한반도 최초의 여성 군주인 선덕여왕, 김유신 생애, 문무왕APEC 등의 세부 내용으로 펼쳐진다. 특히 황리단길을 찾아오는 관광객을 대릉원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봉황대로 퍼져나가게 해 ‘황리단길-대릉원-중심상가’를 잇는 새로운 축제관광 벨트를 만들어 낸다는 게 경주시의 올해 전략이다. □ 지역 상권과 동반 성장하는 상생형 축제 신라문화제 기간에만 즐길 수 있는 감성 낭만 야시장인 ‘달빛난장’이 봉황대 광장과 금관총 일원 등에서 진행된다. 판매 공간은 총 3개 구역, 41개 규모로 진행된다. 감성판매존은 나무부스와 파티라이트를 활용한 공간으로, 모던판매존은 네온을 활용한 공간으로 꾸려진다. 여기에 올해는 금관총 일원에 푸드트럭존을 신설해 스마트 QR 주문 및 결제 시스템을 시범 운영한다. 떡볶이, 어묵 등 간단한 요깃거리가 가능한 분식류부터 부대찌개, 제육볶음 등 입맛을 자극할 식사류, 케밥과 양꼬치 등 글로벌한 먹거리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취식공간도 총 3개 구역, 190개 규모로 마련했다. 차도 위 파라솔 공간인 레트로가맥존, 나무팔레트와 파티라이트 공간인 감성피크닉존, 캠핑테이블과 LED 공간인 신라라운지존은 방문객들이 축제장에 오래 머무르며 소비할 수 있게 준비했다. □ MZ세대 겨냥 화랑힙합 ·실크로드 페스타 실크로드페스타는 해외 2팀을 포함해 전문거리 예술팀 30개 팀이 70회 정도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봉황대 광장을 비롯해 공연 구역을 총 7곳으로 마련해 광장을 거닐며 공중극, 서커스, 마임, 마술, 버블쇼 등 다양한 공연을 제공한다. 특히 올해에는 봉황대 법장사 뒤편에 ESG존을 마련해 친환경 체험 공간과 반려견 동반 구역을 신설했다. 친환경 체험공간인 ‘그린어스 존’은 문정헌 뒤 잔디밭에 마련돼 폐플라스틱 업사이클링 체험부터 멸종위기 동물을 캐릭터로 한 에코백 제작까지 친환경을 소재로 재미를 더한 체험이 가능하다. 또 반려견 동반 구역은 그린어스 존 옆에서 반려견 TV를 관람하고 미로 체험을 하는 등 색다른 즐길거리로 채워진다.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화랑힙합페스타는 요즘 힙합씬에서 가장 핫한 출연진으로 섭외했다. 출연진은 비와이, 비오, 자이언티 등 8팀이다. 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 라인업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 시민축제단 운영 올해 초 공개모집을 통해 축제 SNS홍보단(시민서포터즈) 207명, 실크로드 페스타(시민프로듀서) 85명, 친환경 그린리더(화랑원화단) 48명을 구성했다. SNS홍보단인 시민서포터즈는 인스타, 유튜브, 블로그 등 SNS를 통해 신라문화제와 시정에 관한 홍보활동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실크로드페스타 시민프로듀서는 생활문화, 체험예술, 마을축제로 팀을을 나눠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축제 기간 시민들과 함께 호흡한다. 친환경 그린리더 화랑원화단은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친환경 체험학습을 운영하고 있으며, 축제 기간 친환경 체험·전시뿐만 아니라 축제장 플로깅 활동을 선보인다. □ 시민과 나눔의 장으로 승화 신라예술제가 28일과 29일 이틀간 경주예술의전당 일원에서 개최된다. 한국예총 경주지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7개 예술협회가 힘을 합쳐 수준 높은 경주예술을 선보이는 축제다. 오는 28일 오후 7시 열리는 개막식은 일본 오이타현의 문화교류 공연을 시작으로 드론라이트쇼와 주제공연 ‘신라의 빛’이 차례로 펼쳐진다. 드론라이트쇼와 함께 하늘에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신라의 빛’ 주제공연을 통해 시민 마음에 희망의 빛을 띄운다. 체험 프로그램은 28일부터 29일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경주예술의전당 분수광장에서 열린다. 한국예총 경주지회 7개협회의 다양한 체험은 물론 플리마켓, 지역명인, 전통놀이 체험, 예술피아노 등의 20여개 체험이 분수광장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4-09-23

‘계단식 성장 맞춤형 정책’ 으로 창업 기업 지원 체제 구축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구미시가 창업특화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구미시는 민선8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글로벌 유니콘 스타트업 탄생을 위한 창업지원 정책과 기능을 점검하고 창업지원 체계 대전환에 대한 방향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침체된 구미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선 혁신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기업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제조업 수출 중심의 국내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스타트업은 국내 산업의 활로를 모색하며 성과를 창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침체에 따른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3년 연속 20%대 성장률을 기록하는 고성장 스타트업 기업의 숫자는 2020년 4215개사에서 2021년 4995개사로 18% 증가했다. 스타트업 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정부와 지자체들도 다양한 창업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2023년 국내 창업지원사업의 규모는 426개 3조 6607억원에 달한다. 사실상 후발주자인 구미시가 창업특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선 현재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타 시·군보다 차별화된 지원정책이 필요했다. 이에 김 시장은 기업지원과에 창업벤처팀을 신설하고 그동안 창업정책들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매월 평균 630여 개의 기술기반 창업기업이 경북에서 탄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구미시는 2800여 개의 제조기업을 보유하고 있어 기술경력을 가진 잠재적 창업자가 풍부하다. 제조업 기술경력이 중요한 이유는 창업기업 중 기술제조 분야 7년 생존기업 비중이 전체(18개 분야)의 37%나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구미시는 수요와 자원 등 환경적인 요인은 타 시·군에 비해 매우 우수한 편임에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혁신 기술을 자진 창업기업이 일명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맞춤형 지원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창업기업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시제품 제작까지 추진하고서도 상용화가 어려워 시장 진입을 눈 앞에 두고 주저않는 경우가 많아, 아이디어 검토에서 연구개발과 시제품 제작까지의 단계를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구미지역 창업기업들도 이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구미시 창업벤처팀은 구미전자정보기술원과 그동안의 창업지원 정책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동안의 지원책들은 특정 대상과 산업, 지원분야별로 지원금을 주다보니 단기 성과 창출에 집중할 수 없어 지속적인 기업밀착형 지원과 성과 관리에 미흡했다. 또 지원금도 수요자 중심이 아닌 공급자 위주의 지원체계로 되어 있어 통합된 관리 체계가 부족하고 지역기업 상호 연계기반도 약화시키는 악순환이 지속돼 왔다. 구미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창업기업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창업기업이 원하는 지원책을 마련하게 된다. □ 성장 맞춤형 지원체계를 구축하다 구미시는 혁신 기술을 보유한 스타드업 기업들의 전 주기를 지원하는 ‘계단식 성장 맞춤형 지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계단식 성장 맞춤형 지원’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성장하는 단계별 맞춤 지원정책으로, 초기 창업기업, 혁신 스타트업, 글로벌 창업기업으로 구분해 성장 단계별 계단식 지원프로그램이다. 초기 창업기업에게는 기술 고도화 자금 1억원, 입주공간 제공, 창업 아카데미, 시드 머니 투자 등 기술 고도화 지원에 따른 혁신 창업기업으로의 전환을 돕는다. 혁신 스타트업에게는 사업화 자금 최대 2억원, 가치 평가·전담 연구, 인증·마케팅, VC 투자(인프라 구축) 등의 풀 패키지 지원과 지역 중소공장과의 연계강화로 공동 연구개발을 지원한다. 글로벌 창업기업에게는 해외 진출 컨설팅, 글로벌 컨텐츠 제작, 전시회 참가, 해외 바이어 매칭, VC 투자(성장 자금) 등을 집중 지원한다. 구미시의 이러한 성장 단계벌 맞춤 정책은 전국 창업기업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실제, 지난해 12월 혁신 스타트업 지원 수요기업 사전 모집에 전국에서 300여 개사가 지원하기도 했다. 시는 이들 중 본사 및 근로자 70% 이상이 구미로 이전을 희망한 혁신 창업기업 182개사(구미 88개사, 타지역 94) 중 5개사를 최종 선발했다. 이러한 관심은 구미시가 창업기업들에 자금도 충분히 지원하면서 글로벌 창업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지원정책을 마련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 산·학·연이 창업기업을 돕다 구미시는 창업지원 사각지대를 보완하고, 분산된 창업 정책을 일원화하기 위해 창업지원 통합 플랫폼인 ‘산학연관 커넥티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산학연관 커넥티드 프로그램’은 구미시 창업지원 사업의 목적에 따라 세부적으로 유형을 구분한 것으로, △창업지원 사업 통합 정보제공 서비스 △지역 산업과의 기술 교류를 위한 이노테크 포럼 △지원기관 협의회를 통한 원스톱 창업지원 등으로 구성됐다. 통합 안내사이트는 창업지원에 대한 맞춤형 알림 서비스 제공 및 원클릭 간편 신청접수 기능으로 접근성과 편의성을 제공하며, 지원기관 협의회는 혁신 스타트업 공동 발굴과 집중 육성을 위해 종합적 검토 및 최적의 창업지원 모델을 제공한다. 벤처투자 협의회는 지역 창업기업의 투자 요구에 신속 대응하고 기술, 사업성 등 성장 가능성이 높은 혁신 스타트업을 발굴해 글로벌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후속 투자를 지원한다. 또 이노테크 포럼은 지역 기업 간 기술교류 촉진과 관심 기술에 대한 기술 협력 중개 등 급변하는 신산업 미래기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SOS 대응 서비스는 창업기업의 애로사항을 신속 정확하게 해결하기 위한 1대 1 맞춤형 밀착 서비스를 제공한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구미는 반도체 소재부품 특화단지 지정과 방산 혁신 클러스터 유치 등 대형 국책사업 선정으로 다시 한번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지만,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선 혁신 기술을 보유한 글로벌 창업기업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구미만의 독립적이고 차별성 있는 창업지원 프로그램으로 창업 특화도시 구미를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4-09-22

“지금도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 간절해”

구순을 바라보는 김자중 선생은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여건만 만들어준다면 가위를 다시 잡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고 했다. 김자중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는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남편과 함께 만든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돼 여한이 없다고 술회했다. 김홍제(이하 제) : 1985년 동해안별신굿이 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선생님도 지화 전승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김자중(이하 김) : 그때는 무형문화재라 했는데, 김석출과 그의 아내 김유선이 지정되었지요. 김석출은 넉살이 좋아 굿판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요. 우리 집에 대학교수들이 한창 찾아올 때는 경상도, 강원도 어촌에 풍어제나 굿이 많이 열렸고, 그 바람에 나도 바빴던 터라 무형문화재 같은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굿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많이 작고할 때여서 굿판에 사람이 부족했지요. 김석출이 2005년에 세상을 뜨자 조카인 김용택이 전승자로 지정되었고, 김석출의 딸들도 전승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도 노력을 좀 했으면 전승자로 지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왜 없겠어요? 워낙에 나서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지요. 제 : 지화를 계속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 : 이제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바람에 나부끼는 가랑잎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2021년에 지화 전시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과연 가능할까 싶었는데 막상 가위를 잡으니 힘이 나더군요. 그때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50평 정도 되는 작업실을 누가 마련해준다면 지화를 다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지화를 평생 만들어왔지만 솔직히 돈 없이는 힘든 일입니다. 화주가 내는 돈이 많을수록 힘이 더 날 수밖에 없어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지화를 만들어보고 싶군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았던 어부들을 생각하며 정성이 가득 들어간 지화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고 싶어요. 동해안별신굿은 무형유산으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지만, 지화는 개인의 솜씨에 달려 있지요. 지금 굿판을 장식하는 지화는 성에 안 차요. 지화가 사라지지 않고 예술작품으로 계속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흥과 장단이 용솟음칩니다. 동해안별신굿의 드렁갱이장단이 아직 내 몸속에 흐르듯이요. ※ 김자중 선생과 대담을 마친 후 김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와 대담을 이어갔다. 김홍제(이하 제) : 사모님도 지화를 만들 때 함께하셨습니까? 장숙자(이하 장) : 나도 지화를 잘 만들어요. 영감만큼 가위질에 능숙하지는 않지만요. 지화를 염색하고 말리는 일은 주로 내가 맡았지요. 지화는 혼자서 만들기 힘들어요. 누군가와 함께해야 할 수 있는 힘든 작업이에요. 우리는 생계가 달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진짜 열심히 했어요. 굿이 겹쳐서 잡히면 밤을 꼬박 새울 때도 많았지요. 제 : 김자중 선생이 지화를 만들며 굿판에 나선 세월이 70년 가까이 됩니다. 결혼하고 60여 년을 함께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나요? 장 : 나도 흥이 참 많았어요. 영감을 따라다니면서 사설과 가락을 배웠고, 장구와 국악기를 잘 다뤘지요. 가장 기억나는 일은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한 일입니다. 영일군이 포항시와 통합된 게 아마 1995년이지요. 그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청하면장이 찾아와서 영감한테 영일군 국악경연대회에 청하면 대표로 출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영감이 젊은 사물놀이패들과 함께 굿거리장단을 가르치고 대회에 나갔는데 나도 갔지요. 다행스럽게 영일군 경연대회에서 우리 청하면이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이 영일군 대표로 경상북도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지요, 그때 마침 영감한테 일이 들어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가 젊은이들을 인솔해 경상북도 대회에 나가 2등을 했어요. 영감과 함께 나갔으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인데 정말 아쉽더군요. 전국대회에 나가서 입상했더라면 국악으로 무형유산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제 : 굿판에서 일하는 분을 남편으로 둔 인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장 : 굿판에 가보면 양중이 장구를 치며 추임새를 넣고, 무당이 사설을 늘어놓을 때 제 신랑인 양중이가 계집질에 노름까지 한다며 신세 한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구경꾼들은 재미있다며 배꼽을 잡으며 웃지만 실은 무당 자신의 신세 한탄인 거죠. 굿판에 나선 남자들은 술과 노름, 계집질에 흥청거리며 살았어요. 그걸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속이 어떻겠어요? 까맣게 타들어갔지요. 그래도 그 험한 세월을 참고 견뎌냈습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디 가당키나 했겠어요? 모두 모성으로 버텨냈지요. 그런 세월이 다 지나자 영감도 늙고, 나도 늙어버렸군요. 꽃 같은 호시절이 다 지나갔어요. 요새는 영감이 저 없으면 꼼짝도 못 해요. 제 :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 장 : 2남 1녀를 두었어요. 큰아들은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다니고 있어요. 포항 시내에 삽니다. 가까운 곳에 살아 자주 우리 내외를 찾아온답니다. 며느리도 참 좋아요. 둘째 아들은 울산 현대자동차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옛날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요. 막내딸이 있는데, 용두리 한동네에서 살아요. 사위가 어선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지요. 의지가 많이 되는 딸 내외입니다. 제 : 아주 다복하군요. 자녀들은 자라면서 부모가 굿판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장 :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반대를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큰아들이 교회를 다녔겠어요? 이제 성인이 되어 다들 이해하지만, 한창 자랄 때는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고 봅니다. 나도 아이들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살았어요. 지화 일을 그만두게 된 것도 아이들 영향이 컸지요. 제 : 가슴에 품고 있는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장 : 그럼요. 다 이야기하자면 장편소설 몇 권을 쓸 수 있을 텐데 이젠 기억이 가물거려요.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영감이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주니 고맙지요. 영감이 얼마 전에 화장실 바닥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병원에 다녔어요. 그때는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 제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죠. 장 : 영감과 나는 지화 만드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어요. 천직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감이나 나나 생각을 미처 못한 게 있어요. 영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을 받았는데 영감은 그걸 못한 겁니다. 영감도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촌에 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어두워 그런 걸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그래도 영감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가족들 무사태평하니 한평생 고생했지만 나름 잘 살았다고 여깁니다. 영감과 내가 만들던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되니 여한은 없어요. 끝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22

KT, 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와 소통… “그저 함께 살아가는 것”

기업이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실현하는 가치는 단순한 기부나 자선 활동을 넘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있다. 이는 기업이 속한 지역사회와의 상호 유대를 강화하고,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하며, 나아가 장기적인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KT가 2만여 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된 사랑의 봉사단 활동으로 지역사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 올해로 24년째이다. 직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문제를 바탕으로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며 사회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KT대구경북광역본부 사랑의 봉사단 단원들을 만나 봉사 경험, 그 과정에서 경험한 땀의 가치와 자기효능감에 대해 들었다. 주인공은 노조 지부장을 맡고 있는 대구코어운용센터지부 하정명 지부장과 대구ICT기술지부 이상열 지부장, 대구고객본부지부 정재윤 지부장이다. -봉사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고, 어떤 활동들을 주로 하나. △ 정재윤 지부장 : KT 사랑의 봉사단 이름으로 지난 20여 년간 농촌일손돕기, 김장 나눔, 장애인 도우미, 목욕 봉사, 후원물품 전달 등의 활동을 해왔다. 그러면서 봉사는 특별한 일이 아닌 그저 함께 살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척수장애인은 신체의 일부 또는 전체가 마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대다수가 일상생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단독으로 외출 자체가 어려운 이들에게 짧은 시간이지만 틈이 나면 이동 지원과 동행 봉사, 문화 체험 지원 등 자립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선한 행동 하나 하나가 모여 우리 사회가 편견없이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정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 - 바쁜 업무 시간에 일부러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힘들지 않나. △ 하정명 지부장 : 사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시켜서 하는 업무 연장선 정도로 생각했고 일이 많고 바쁠 때는 귀찮기도 했다. 그러다 내 손길이 닿는 사람들의 미소와 눈빛, 표정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기쁨과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점차 보람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이 삶의 활력이 됐다는 부분에서 봉사활동은 업무로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오히려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KT의 얼굴로서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주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이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업무에 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여러 부서 직원들과 어울려 하는 봉사활동은 세대나 직급, 직무에 상관없이 소통과 공감의 시간이 된다. 구슬땀을 흘리다 보면 어느새 진한 전우애가 생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시작이 중요하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부터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주변에 작은 도움이나마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곳곳이 많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 뿌듯함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면 어려움을 느낀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 하정명 지부장 : 코로나 19 장기화로 자원봉사 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면 봉사 활동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봉사활동도 주춤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았고 후원의 손길도 줄어들었다. 비대면으로 독거노인 반찬 배달 봉사를 시작했다. 문고리에 반찬이 담긴 봉투를 걸어놓고 문밖에서 어르신에게 안부인사를 건네는 정도였지만 많이 고마워 했던 기억이 난다. 재택근무, 자가격리, 비대면 기간이 늘어나면서 우울, 고독, 분노 등이 쌓여 심리 방역이 화두로 떠오르던 모두가 힘들던 시기였다. 특히 사회적 고립에 취약한 고령자 지원사업이 절실했었다. 그때부터 반찬 배달은 지금도 월 1회 정기활동으로 하고 있다. 점심 배식봉사를 하다 보면 오후 12시부터 식사시간임에도 이미 한 두시간 전부터 어르신들이 줄을 서고 계시는데 거의 오픈런 수준이다. 단촐한 식사에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미소를 짓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어쩌면 그날의 첫 끼니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많은 독거노인들은 정서적,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 그런 분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특히 봉사활동 중에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고민을 털어놓으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적인 도움을 드릴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 안타까울 때가 많다. 마음 한켠이 무겁지만, 오히려 이러한 경험들이 더 큰 책임감을 심어 주었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는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줬다. - 보람되거나 인상 깊었던 경험을 들려달라. △ 이상열 지부장 : 개인적으로 201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연탄배달 봉사를 한 적이 있다. 한겨울이었지만 땀을 흠뻑 흘렸다. 여느 때 같으면 연말 연시 송년회나 부서 회식 등으로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을 텐데, 가족과 함께 참여한 첫 봉사활동이라 그런지 의미가 더 컸던 것 같다. 그 시간을 계기로 더불어 사는 삶과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겨울철 실내 온도를 높이기 위해 ‘뽁뽁이’라고 불리는 기포 단열재를 창문에 붙이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장애인이나 독거 어르신 등 취약 세대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창문에 ‘뽁뽁이’를 부착하고 창문 틈새도 막고 실내 간이보온텐트도 설치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는 것이 피곤하긴 했지만 겨울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3D프린터로 명화를 제작하고 ‘손으로 만지는 명화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명화들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설명을 듣는 학생들을 보니 마음 한 켠이 울컥했다. 장애란 결국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간 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닌지, 세상을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러웠다. -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 △ 이상열 지부장 : 언젠가 복지관에서 배식봉사를 하던 중 한 어르신께서 너무 착하고 믿음직하다고 손을 덥석 잡으며 당신 딸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셨다. 그때 이미 대학에 다니는 자녀가 있었던 터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저도 다큰 딸이 있다’고 하니 크게 실망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동안으로 봐주셔 감사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지난 연말 김장김치 봉사 활동에 참가했다. 양념을 버무린 김장 김치를 옮기다가 바닥에 떨어진 배추 조각에 미끄러졌고 그 바람에 온몸이 김장 김치 양념으로 빨갛게 뒤범벅이 되어 다 같이 크게 웃은 적이 있다. 반찬 배달 사고가 난 적도 있다. 문 손잡이에 잘 걸어 뒀는데 길고양이가 봉지를 뜯어 반찬을 먹고 헤집어 놓았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다시 어르신을 방문해 반찬을 전달했다. 이런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나중에 소중한 추억으로 될 것이다. 무엇보다 봉사활동을 통해 배운 배려와 감사함은 개인이나 우리 사회가 건강한 성장을 하는데 자양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 활동에 동참하여 함께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4-09-19

600년 넘게 마을 공동체 안녕과 평화의 지킴이 역할

노거수에 대한 고사와 설화에는 노거수의 실질적인 수령을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거수를 보호해야 하는 마을 공동체의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실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는 가상의 설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자연재해에 대한 취약한 마을의 구조와 자연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그런 사례가 있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의 지킴이로서 특정 수목의 식재와 보호는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노거수의 고사와 설화는 현장의 자연환경 조건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가 포함되는 한편 나무를 지켜주는 강력한 보호 수단이 된다. 조선시대 흥해군 관아의 동헌인 제남헌(포항 영일민속박물관) 앞뜰에 나이 640살, 키와 맞먹는 몸 둘레 6.7m 되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동헌(東軒)은 조선왕조 지방 관청의 중심 건물이다. 수령(守令), 즉 사또(使道)라고 불리던 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이 직무를 보는 관청 건물로서, 오늘날의 시군 청사 본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회화나무는 당시의 관아 건물과 함께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정원수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또한 청렴과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조선 선비들이 애호하는 나무로 집무실 앞 뜰에 심어 나쁜 유혹과 흐트러지는 마음가짐을 다잡지 않았나 싶다. 이웃 청하현 관아(포항 청하면사무소)에도 회화나무 노거수가 살고 있다. 그러나 이 회화나무는 정원수가 아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는 치료제로 심은 나무란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유명한 풍수지리학자인 성지(?-1623년)가 영남 지방의 산세를 조사하고자 흥해 지날 때 동해를 따라 내려오는 낙동정맥을 잇는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를 바라보고 ‘과연 천년 옛 고을의 승지’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풍수가요 조정의 권문세가와 대신들도 앞다투어 초청하던 어전 관상감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흥해 군수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환대하였다. 그는 ‘흥해는 다풍질(多風疾, 바람과 질병이 많은 곳)이라서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5대 이상 그 후손이 세거할 곳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 연유를 묻자 ‘흥해의 지세와 지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먼 옛날 선사시대에 이곳은 필시 큰 호수였을 것이다. 수만 년 동안 호수였던 이곳을 동편 낮은 곳의 산맥을 절단하여 그곳으로 호수의 물을 흘러가게 하여 평야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겠으나 그 반면에 습기가 많아 필시 괴질이 많이 돌고 피부병을 앓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마을 노인 한 분이 ‘과연 그렇다. 이 고을에는 괴질을 앓는 사람이 많은데, 그 원인을 말했으니, 처방도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성지는 ‘바람과 습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회화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화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물을 섭취하는 양이 4~5배나 많으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양 또한 4~5배나 되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흥해 군수는 고을 전체에 지시하여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집마다 회화나무 심기를 권장하여 그 후 물 좋고 농사 잘되는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흥해지역에 내려오는 회화나무에 대한 전설이다. 회화나무는 우리 민속문화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조경 측면에서 보면 나무 없는 삭막한 마을에 녹음이 짙고 단풍이 아름답게 물이 드는 나무를 선택하여 심기를 권유하였다는 것은 지방 수령으로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지만, 오랜 옛날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낙엽교목으로 키가 30m까지 자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정자나무나 기념식수로 안성맞춤이다. 또한 열매가 겨우내 열려있다 보니 직박구리 같은 새들이 열매를 먹으러 많이 모여 자연적이다. 7, 8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9, 10월에 황색으로 익으며 꼬투리는 잘록잘록한 모양이다. 꽃과 열매는 약용으로 사용되며 꽃봉오리는 황색의 염료를 만들기도 하여 옛날에는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인문학적으로는 예로부터 선비 나무라 하여 서원이나 향교, 문중의 제실 등 많이 심었다. 특히 선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집의 마당이나 마을 어귀에 심기도 하였다. 이러하다 보니 통용되는 명칭이 많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회화(槐花)나무, 회나무, 홰나무, 괴나무, 괴화(槐花)나무 등 많은 이름이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고 있다. 회화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학자수(學者樹)라 통한다. 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고 해서 회화나무 3그루와 가시나무 9그루를 심어놓고 여기에 정승 3명, 고급관료 9명 등을 세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궁궐이나 정승이 태어난 고택, 문묘 등지에서 회화나무를 심어 길상 목으로 여겨왔다. 임금이 친히 상으로 하사하거나 기념식수로 심어 오늘날 수령이 몇백 년 이상의 회화나무 노거수가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회화나무 괴(槐)를 풀어보면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되므로, 회화나무를 귀신 쫓는 나무라고 하여 잡귀를 쫓기 위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도 한다. 수형이 제멋대로 뻗는 듯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학자의 기개를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회화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주변의 건물과 함께 멋진 뷰를 선물한다. 겨울에는 열매가 오래도록 달려 있어 새들이 찾아와 나목의 삭막함과 겨울의 쓸쓸함을 달래 준다. 회화나무는 더위와 가뭄 그리고 오염에 아주 잘 견디며 성지의 말대로 왕성한 증산작용으로 땅속의 지하수를 정화하고 초겨울까지 잎을 달고 있으니 방풍 방습 기능이 있는 유용한 식물 자원이란 생각이 든다. 회화나무 주변에 세워진 대원군척화비, 항왜혈전기념비, 흥해군수 공덕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들의 주인공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 회화나무 노거수만이 덩그렇게 남아 그 역사를 더듬어 보게 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석을 세우지 않는 날이 올까?”라고 회화나무 노거수에 한 번 물어나 볼까. 필자의 시 ‘회화나무 노거수’ 관아 뜰에 서서 세월을 품은 그대 말없이도 깊은 지혜로 바람을 막아주네. 고요한 관아의 품속에서 그대의 잎은 흩날리고 긴 역사의 그림자는 그대 아래에 머물러 있다. 학자수 회화나무 나 그대를 닮으리라는 흥해 사또의 고백이 들리는 듯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09-18

포스코에서 35년간 취련직 외길… ‘용강의 마술사’ 별명

“저의 운명은 쇳물을 다루는 야금(冶金)의 기술자입니다.” 자원도, 재력도 없는 빈국(貧國)이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휘호를 내걸었다. 조국의 근대화 작업에 참여한 기술인들은 과학 기술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산업의 쌀은 ‘철’이었다. 산업 전반에 가장 폭넓게 사용되는 게 철이었기 때문이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전 명예회장은 품질 좋은 철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게 곧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고 강조했다. 포스코에서 35년 간 ‘용강의 마술사’라 부르는 취련직을 담당한 김영화(62·사진) 금속재료분야 명장. 쇳물로 뜨거웠던 산업 현장에서 학구열이 불타는 교육 현장으로, 제2의 인생을 그려가고 있는 김 명장의 여정을 최근 들어봤다. - 서울에서 포항으로 오게 된 계기는. △서울에서 초·중·고등학교, 전문대학을 다녔다.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렵게 중학교를 마친 후 학비가 저렴한 서울소재 공립공업학교인 용산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쇳물을 용해해 주형에서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기술을 배워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 생활을 했다. 홍익공업전문대학 금속과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를 한 후 졸업과 동시에 군 입대를 했다. 양구에서 2년 5개월(군사복무 혜택으로 조기 전역) 근무한 후 (주)POSCO에 1986년 7월 1일 입사했다. - 포스코에 입사한 이유는. △한 편의 영화 ‘팔도강산’ 덕분이었다. 영화에서 1남 6녀를 둔 한 노부부가 전국 팔도강산에 뿔뿔이 흩어져서 사는 자식들의 집으로 유람여행을 떠난다. 근대화로 대한민국 곳곳이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식 중 한 명이 포항제철이라는 회사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고로에서 나오는 쇳물을 강(steel)으로 제조하는 제강공장, 코일이 생산되는 열연공장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던지 연고가 전혀 없었음에도 꼭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군 제대 후 포항까지 내려가 시험을 봤다. 고등학생 때 딴 주물조형 자격증을 갖고 포스코에 입사했다. 마치 철을 다루는 마술사가 되는 운명인 것 같았다. 제강분야 자격증인 제강기능사 1급, 제강기능장, 철야금기술사, 주조기능장만 취득한 것을 보면 나는 ‘용강의 마술사’라는 직함이 어울리게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 우수제안과 특허 14건을 출원시키고, 철야금기술사(현 금속제련기술사)를 취득했다. 이어 나의 인생 좌표인 “이론과 전문성을 겸비한 최고의 기술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 제강공정과 취련사란 무엇인가. △고로에서 철광석 코크스와 함께 반응을 시켜 녹여 만든 용선을 전로에 장입해 고압의 산소를 불어 넣어 인, 황, 탄소, 규소, 망간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자동차나 배등의 소재를 생산하는 작업이다. 한번 작업할 때마다 전로에는 용선 과 고철 수백 톤이 들어가는데, 취련 정련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취련사의 직무는 용선의 불순물을 제거해 용강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강온도가 1670℃정도에서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강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시스템적으로 용강이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쓸모있는 강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오직 기술자의 숙련된 노하우와 판단으로 만들어진다. 2제강 공장에서 나가는 강종만 무려 600여 종, 화학성분이 전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르는 상황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작업 중 가장 까다로운 공정은 용강온도 1670℃ 정도에서 저린강제조시‘인 [P]’을 제거하는 것이다. ‘인 [P]’을 10ppm 이하로 낮게 만들지 않으면 압연 시 압하력에 의해서 쇠에 금이 가버리기 때문에‘인 [P]’을 완벽히 제거하면 불량률이 엄청나게 낮아지고 제품 납기도 정확히 맞출 수 있다. 원가와 물류비 절감은 물론 회사 신용도까지 높아질 수 있다. 그래서 ‘인 [P]’을 없애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기술중의 하나이다. 용강 작업중 ‘인 [P]’제어를 위해 꾸준히 연구해 특허 14건 출원과 무결점 작업을 1년 이상해 부소장 표창 5회 수상했다. -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작업 공정의 개선을 위해 특허와 우수제안을 자연스럽게 하게 돼 무결점을 1년 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명장이 됐다.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기술사 자격 취득으로 경주에 있는 서라벌대학제철산업 플랜트과에서 철강공학 강의를 했다. 학문과 기술을 좀 더 배우고 싶었다. 금속 중 화학야금과 물리야금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에 부경대학 금속공학과에 진학해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다. 특허 출원과 우수제안의 실적을 도출하면서 석사과정 중 논문 1건, 박사과정 중 논문 6건(SCI급 1건, SCIE급 1건)을 학술지에 발표했다. 박사 과정 중 산업현장 교수 위촉(2016년), 사회 봉사활동으로 국회의원 표창장 수상(2016년), 경북도 최고 장인에 선정(2017년)됐다. 그 후 우수숙련기술자 선정(2018년)과 노동부 장관상을 수상(2019년)했고, 2020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다. 대한민국 명장, 기술사, 공학박사를 취득한 저에게 대학원 졸업식장에서 “개천에서 용 났다”며 축하해 준 아내에게 감사하다. - 개천(川)에서 용(龍)이 되기까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전문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제선, 제강 자격증 취득과 철강회사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제선과 제강 기능사 문제집, 주조공학, 열처리공학을 출판했다. 산업인력공단에서 NCS 제강분야와 용접기능장 출제위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이차전지와 리사이클링의 제련기술 및 철강의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제조업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기술자를 양성해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학생을 지도하고 싶어 포항대학교와 울산 및 대구 폴리텍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박사 학위 취득 및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까지 전 직장 동료들의 응원이 있었다. 대학원 다닐 때 휴가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빈자리를 메꿔준 건 전부 동료들이었다. 학교에 강의하러 다닐 때도 모두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고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도 해줬다. 나의 노력은 물론, 전 직장동료들과 아내의 도움의 도움으로 기술사, 공학박사, 명장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올 수 없는 길이었다. 실패로 좌절도 했었지만,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 준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가족이 있었기에 힘든 일도 극복해 지금의 내가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그동안 야금 기술자의 외길을 걸어왔다. 이제는 학교 강의를 통해 기본적 기술력 배양과 현업에 조기 적응을 할 수 있는 현업 실무능력을 보유한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기술적인 지식과 현장 실무에서 필요한 노하우, 특허 도출, 설비와 작업시 안전을 고취시키면서 후배들의 진로와 계획을 지도할 것이다. 또한 기술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 인성,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집념 등 실무형 엔지니어를 양성하고 싶다. 정년 퇴직이 없는 기술자를 만들고 싶다. 나와 같이 ‘개천에서 용이 되는 기술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제2의 인생을 잘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영화 금속재료분야 명장은 △1980년 용산공고 졸업 △1983년 홍익공업전문대 졸업 △1986년 POSCO입사 2021년 정년퇴직 △2004년 제강기능장 취득 △2007년 철야금기술사 (현 금속제련기술사)취득 △2016년 금속공학박사 취득,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2017년 경북도 최고 장인 선정 △2018년 우수숙련기술자 선정 △2019년 노동부 장관상 수상 △2020년 주조기능장 취득, 대한민국 명장 선정 △2022년~ 현재 포항대학교, 울산 및 대구 폴리텍대학 외래교수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9-18

‘경북 대표 랜드마크’ ‘문화예술 성지’… 기대감에 영천 들썩

한국 영화계 거장 고(故) 신성일 배우가 타계하기 전 10년간 직접 지어 살았던 한옥 성일가(星一家·영천시 괴연동 160-7)에서 5분쯤 걸어 올라가자 가지런히 정리된 벌판이 나왔다. 영천시가 오는 2025년 7월 완공을 목표로 신성일기념관을 지으려는 부지다. 최기문 영천시장은 지난 13일 이곳에서 강석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와 신성일의 장남 강석현 지피워크샵 대표 부부, 이만희 국회의원, 김선태 영천시의회 의장, 김상철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 등 정·관계 관계자와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기공식을 열었다. 오후 3시부터 1시간여 동안 열린 기공식 행사에는 이춘우·윤승오 경북도의원 등 영천시 정치인과 관료뿐만 아니라 무용인 등 문화예술인도 참석했다. 신성일의 조카인 강석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는 축사에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문화예술발전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고 신성일 배우를 기념하는 공간을 마련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유족을 대표해 전한다”면서 “영천시가 숙원사업으로, 신성일기념관 건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결실은 많은 이들에게 문화예술의 향기를 전해주는 문화예술의 성지로 돌아올 것”이라고 밝혔다. 강 총재는 또 “작은아버지는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 배우로 많은 팬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시면서 대학교수, 국회의원 등의 길을 걸으며 문화예술 발전을 이끌다가 2008년 영천에 성일가를 지어 노후를 보내셨다”며 “그의 아름답고 멋진 삶의 흔적이 반영된 훌륭한 건축물이 완성되면 아마도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공간으로, 또 하나의 세계적 명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를 대신해 기공식에 참석한 김상철 경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신성일기념관 건립에 대한 영천 시민들의 높은 기대와 바람을 알고 있기에 경상북도에서도 재원을 투자했다”면서 “한국 영화계 거장 신성일 배우를 추모하는 신성일기념관이 영천시의 문화관광자원으로서,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노후를 보냈던 성일가를 먼저 돌아본 강석현 지피워크샵 대표는 “2020년 9월 어머니(배우 엄앵란씨)와 함께 성일가 단독 주택(113㎡)을 비롯해 7필지 2839㎡를 영천시에 기부채납했다. 기념관이 아버지의 삶과 업적이 오래 기억되고 탄탄한 콘텐츠로 꾸며져 한국영화의 메카가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지역 사회는 관광객들이 찾아올 새로운 문화시설이 건립되는 데 대해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괴연리 이장 김효섭(61) 씨는 “오늘은 괴연동 주민들이 갖게 된 새로운 공간, 새로운 기회를 축하하는 날”이라며 “이번 신성일기념관 건립 기공식은 우리 영천을 미래 수십 년 동안 경쟁력 있는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한 걸음”이라고 말했다. 생전 신성일과 호형호제했던 정길락(75·영천시 완산동) 전 영천중앙로타리클럽 회장은 “괴연리 마을의 애량산과 치악산의 빼어난 경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신성일 배우와 생일잔치를 함께 하는 등 정을 나누며 즐겁게 지냈던 주민들에게는 오늘이 더욱 감사하고 기쁜 날”이라고 말했다. 괴연리 주민 허은숙(69·영천시 신성일길 14-10) 씨는 “영천시에서 신성일 배우를 기리며 신성일길이라 이름도 붙였다. 청바지 입고 본천까지 개를 끌고 산책하시던 모습이 선하다”며 “기념관이 웅장하고 멋지게 잘 지어졌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