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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전쟁의 공포 속 신라 백성의 마음 위로해준 ‘염화미소’

불국정토(佛國淨土) 혹은, 서방정토(西方淨土)가 되고자 했던 신라엔 돌과 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부지기수였다. 이 사실에는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석굴암은 직사각형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돼 있다. 360여 개의 돌로 천장을 만들어낸 기법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 빼어남이 빠지지 않는다. 석굴암 본존불(本尊佛·가장 높은 지위의 부처)과 십일면관음보살상, 사천왕상 등은 능수능란한 석조 기법과 사실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표현, 화려함과 미려함에서 21세기 석물조각 기법을 훌쩍 뛰어넘는 신라 석공들의 기예를 보여준다. 경주 남산의 미륵곡 마애여래좌상(彌勒谷 磨崖如來坐像) 또한 신라 사람들의 탁월한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불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다. ‘위키백과’는 “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불상”으로 미륵곡 마애여래좌상을 평가한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는 상투 형태로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는 묘사는 이 불상이 지닌 사실감과 핍진함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시대 만들어진 불상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한 시절에 들어선 왕릉이 즐비한 서악 일대를 굽어보며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어떤 위상과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과 4.53m의 관음보살상 영남대학교 한국학과 이창국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에선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논문은 아래와 같은 서술로 시작된다. “경주 시가지 서쪽에는 서천(형산강)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 서천 너머에 무열왕릉과 경주 서악동 고분군이 자리한 선도산(해발 380m)이 있다. 선도산에는 신라 왕릉과 고분을 비롯하여 ‘서형산성(西兄山城)’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 ‘성모사(聖母祠)’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있다. 그리고 아미타삼존상이 이 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 쓰인 ‘아미타삼존상’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대 신라는 물론, 현대 경주에서도 기이한 설화와 신성함이 숨 쉬는 지역으로 지목되는 선도산 일대의 형상을 설명한 이창국의 논문은 마애여래삼존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높이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좌측에 높이 4.53m의 관음보살상, 우측에 현재 높이 4.56m의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이중 본존불은 자연 암벽인 안산암에 조각된 마애불이고, 좌우측의 협시보살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별도의 독립된 입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현재 코의 일부와 입과 턱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바닥에는 별석의 화강암대가 있다. 대좌는 복판의 복련석 5매로 구성되어 있으나, 우협시상 측면에 본존불의 대좌로 추정되는 석재편들이 있어 현재의 대좌는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차례 찾아 그 지역을 꼼꼼히 돌아본 경주 서악마을(선도산 일대)엔 무열왕릉을 비롯해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법흥왕릉 등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지호지간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자면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 정상 부근에 우뚝 서서 부처를 숭배하고, 불가(佛家)의 이념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신라의 지배자들이 묻힌 능(陵)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신라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낼 대상물의 필요성 이런 외형적인 모습을 갖춘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에 자리한 것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엔 “신라의 지배층들은 민심 이반에 대처하고, 삼국통일전쟁에 따른 신라인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강구했을 것”이란 문장이 나온다. 6~7세기는 신라가 백제·고구려·당나라와 영토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다투던 시기다. 피와 살점이 튀고, 언제 생명을 잃을 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신라의 지배층은 백성을 하나로 묶어낼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을 터. 그랬기에 “불교적 대안으로 아미타신앙을 유행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미타신앙의 대상물로, 신라인들의 마음을 위로할 존재물로 삼존불을 조성했을 것”이란 게 논문을 쓴 이창국의 추론이다. 살아있을 때 덕을 쌓고 선행을 베푼다면 죽어서 부처가 다스리는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삼국통일 즈음 전쟁 시기에 신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그런 믿음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던 게 아닐지. 계속 경주 서악마을엔 어떤 이야기가…선도산 성모 설화 스며있는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공간 지금의 경주 서악마을은 ‘황금의 고대왕국’으로 불리는 신라의 시작을 알린 선도산 성모의 신비로운 설화가 스며있고, 미학적인 측면에서의 완성도가 그 어느 석불보다 뛰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또한, 신라를 통치한 여러 왕의 유택(幽宅)들까지 줄지어 늘어선 지역이니 서악마을은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공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한국관광공사는 경주 서악마을 고분군(古墳群·다수의 고분이 집중된 곳)의 가치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려주고 있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뒤편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1964년 8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곳 고분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봉토 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를 알 수는 없으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왕릉으로 추측한다.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왕의 무덤과 신라인들이 ‘성스러운 어머니’로 추종했던 여성의 신화, 여기에 거대한 석불의 비밀스러움까지 깃든 서악마을은 그간 유물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지역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24년 3월 출간된 ‘서악마을 이야기’엔 이런 노력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담겨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선도산 아래 서악마을이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쏟은 15년간의 땀방울을 보여준다. 그랬기에 경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문화유산 주변의 경관과 마을을 대상으로 삼은 선도적 노력과 풍성한 활용 사례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간 서악마을은 삼층석탑 주변에 작약과 구절초를 심어 지역민과 관광객을 위한 축제를 열었고, 인근 서원과 서당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가 어우러지는 각종 행사도 다수 기획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신라 왕릉 여러 기가 선도산에 자리한 이유는 서남으로 뻗은 능선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설에 더해 경주 서악마을을 ‘고대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조성할 수 있었던 건 신라의 문화와 예술을 역사적 단절 없이 오늘에 이어가고 싶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꽃피는 계절엔 자연이 선물하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고, 울울창창 나무들 푸른 여름엔 우리 땅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눈 내리는 겨울이면 낭만과 서정 속에서 즐거이 서성일 수 있는 경주 서악마을. 이런 공간을 가졌다는 건 비단 경주 사람들만의 행운이 아닌 우리 모두의 즐거움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2-03

이차돈의 순교… 불교 공인으로 재탄생한 신라

“잘려진 목에서 하얀 피가 솟고, 처형되던 날 서라벌 하늘에선 꽃비가 쏟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시절 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이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을 위해 쓰러진 그날 이후 신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으로 재탄생한다. 불교가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가 된 것이다.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도입은 비교적 늦었다. 토속 신앙을 받드는 백성들이 많았고, 권력층 역시 부처가 설파한 도리가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하여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게 이유다. 하지만, 막상 불교가 국교 수준으로 숭배 받게 되자 신라는 빠른 속도로 대형 사찰을 건설하고, 절에서 생활하는 불자들을 귀하게 대접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책 등에 의하면 ‘신라는 불교 도입에 대한 반대가 심해 아도 화상(삼국시대 경북 일대에서 활동한 승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뒤늦게 국가가 불교를 공인’한다.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공인 이후로 신라의 불교 신봉은 삼국 중에서 가장 열성적이었고, 불교를 국가 운영원리로 채택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신라 불교의 전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민승(民僧)이 들어와 공식 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한 것이 고구려·백제 불교와의 차이점이다.” ◆호국적 성격이 강했던 삼국시대 신라 불교 이차돈의 죽음이 촉발시킨 ‘불교의 국교화’ 이전에도 불교를 신라에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없지 않았다. 각종 고문헌과 전래 기록상에는 신라 제13대 미추왕 2년(263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의 신라 불교는 나라와 왕실을 수호한다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이 강했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단합시켰다. 대표적인 사례로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황룡사 9층탑 건립, 사천왕사(四天王寺) 건립 등이 있으며, 특히 화랑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불교정신으로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지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위키백과’의 설명이 이 사실을 부연한다. 법흥왕 통치 시절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에선 금속, 목재, 석재로 만들어진 수천, 수만의 불상이 탄생한다. ‘숭배의 대상’을 형상화 하는 작업이었다. 왕을 포함한 신라의 지배층이 이런 작업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유사한 형태를 띠며 국가가 주도한 불교 프로젝트는 6세기 이후 신라가 멸망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지속됐다는 게 대다수 사학자들의 이견 없는 주장이다. 6세기에 조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또한 ‘불교 전파의 어려움-이차돈의 죽음-불교의 국가 공인-급속하게 진행된 거대 불사(佛事)-불교왕국으로 전이(轉移)된 신라’라는 공식 속에서 세워졌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영남대학교 한국학과 이창국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은 선도산 아미타삼존상(마애여래삼존불)의 현재 모습을 서술하면서 시작된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삼존상은 현재 높이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좌측에 현재 높이 4.53m의 관음 보살상, 우측에 현재 높이 4.56m의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이중 본존불은 자연 암벽인 안산암에 조각된 마애불이고, 좌우측의 협시보살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별도의 독립된 입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현재 코의 일부와 입 및 턱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파손됐으며, 바닥에는 별석의 화강암 대좌가 있다.” 이창국의 논문은 불상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세밀하게 관찰해 “본존불에는 표면 곳곳에 원형 구멍이 있는데, 실제 청동못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과 “좌우 협시상 조성 당시에는 머리부터 신체, 대좌와 발을 조각한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무열왕 통치 기간에 깎아 세웠을 것이라 유추하고, 또 다른 사학자들은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 김법민 재위 시절에 조성된 게 아닌가라고 짐작한다. 세 개의 불상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이제 세상에 남아있지 않으니, 어떤 추론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든 거대 불사는 당시의 신라사회 분위기로 봤을 때 ‘호국(護國)’이라는 목적의식에 아래에서 이뤄졌음이 분명할 듯하다. 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역시 논문의 맺음말을 아래처럼 끝내고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전쟁의 참가자뿐만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심리적 안정과 전쟁에 대한 의지를 결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문무왕은 민심 이반에 대처하고 왕권의 안정화를 추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계속) 선도산 성모, 혹은 서술산 성모 200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이다. 기원전 57년. 현재의 경주를 포함한 영남 일대에 하나의 고대왕국이 형성된다. 훗날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삼한을 통합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사라진 935년까지 ‘황금의 제국’ 또는, ‘빛나는 불교왕국’으로 한국사에 이름을 남긴 신라. 그 신라의 첫 번째 왕으로 기록된 이는 박혁거세.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와 때놓을 수 없는 ‘설화 속 인물’이 바로 선도산 성모다. ‘삼국사기’ 등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에 의하면 선도산 성모는 선도성모(仙桃聖母), 서술성모(西述聖母) 등으로도 불렸다. 한국 신화에서는 선도산의 성모로, ‘삼국유사’에선 신라의 시조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생모로 지목된 여성. 사소부인(娑蘇夫人), 서술산 성모 역시 선도산 성모를 칭한 다른 이름으로 추측된다.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윤혜신의 논문 ‘서술산 여신 신화와 선도산 여신 신화의 서사 윤곽과 구비문학적 면모’는 이 여성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래 그 내용을 인용한다. “서술산에 여신이 있었다. 서술산 여신은 솔개를 따라 산에 이르렀고 이곳을 집으로 삼았다. 서술산 여신이 박혁거세를 낳았다. 서술산 여신이 계룡으로 현신하여 알영을 낳았다.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해 붉은색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었다. 그걸 남편에게 주니 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해 신이한 영험을 알았다. 서술산 여신은 나라를 지켰고, 신령한 이적(異跡·신비롭고 기이한 일)을 많이 행했다. 서술산 여신은 나라가 생긴 이래로 나랏제사를 받았다. 제54대 경명왕의 매를 여신이 찾아주었다. 서술산 여신은 안흥사의 불전을 수리하도록 도왔다.…(후략)” 자그마치 1000년 가까이 지속되며 사회시스템·문화양식·예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뒤를 이은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 영향을 미친 신라였기에 그 시작에 관한 궁금증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노력이 오랜 시간 지속됐다. 오늘날도 관련된 연구서와 학술논문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과정 가운데 앞서 말한 윤혜신의 논문은 선도산 성모를 ‘성스러운 처녀’로 설명한다. 이런 대목이다. “고대의 여신에게 처녀성이라는 용어는 생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자질, 주관적 상태, 심리적인 태도에 관련돼 있는 정신적 자질로 남성과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남성에 의존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여신은 남성 위주의 질서로 재편되기 전의 사회에서 발견된다.” 몇몇 사람들은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다는데, 그렇다면 선도산 성모가 알을 낳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다. 거기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선도산 성모의 이야기는 사실의 잣대가 아닌 고대 설화의 특성인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2-01

‘리왕조 인연’ 봉화군-베트남 우호교류 협력 새 지평

봉화군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K-베트남밸리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베트남과의 교류를 확대한다. 봉화군은 최근 베트남 다낭시 화방군을 상호방문하며 교류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다진바 있다. 베트남 북부(하노이)에서 시작한 봉화군-베트남 교류는 중부지역(다낭시)으로 확장됐고 앞으로 베트남 남부지역까지 교류 협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이러한 노력은 봉화군이 추진하고 있는 K-베트남 밸리 사업을 국가 대 국가 사업으로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베트남 화방군 대표단 봉화 방문 봉화군은 지난 27일 베트남 다낭시 화방군 대표단이 봉화군을 방문해 두 지역 간의 우호 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이는 지난 8월과 11월 봉화군 대표단이 화방군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으로 이뤄진 것으로 두 지역 간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보여주는 뜻깊은 행사로 평가된다. 화방군 도반훙 당 서기를 비롯한 대표단은 처음으로 봉화군을 직접 방문해 봉화군의 대표적인 역사적 유산인 충효당을 관람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봉화의 전통 음식을 경험하며 지역의 매력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현국 봉화군수는 환영 인사에서 “화방군 지도부와의 재회가 매우 기쁘고 뜻깊다”며 “지난 화방군 방문 당시 따뜻한 환대와 세심한 배려를 잊지 못하고 있다. 두 지역이 함께 체결한 우호 교류 의향서와 계절근로자 협약을 기반으로 농업, 관광,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협력을 이뤄 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1월 봉화군이 화방군을 방문한 때에는 상호 우호 교류 의향서를 체결하고 계절근로자 교류 협약식을 했다. 상호 우호교류 의향서에는 문화,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호 발전과 실질적인 협력 방안을 구체화할 것을 명시했다. 특히 계절근로자 교류 협약을 통해 화방군이 봉화군으로 계절근로자를 파견해 농촌 지역의 일손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두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봉화군 봉성면에는 베트남 왕족으로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곳에는 이용상의 13세손인 이장발(1574~92)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충효당이 있다. 이장발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9세의 어린 나이로 전장에 달려가 문경새재에서 혈전에서 전사했다. 봉화군은 화산 이씨의 집성촌인 베트남 마을에 ‘K-베트남밸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다낭시로 교류 확대 봉화군은 올해 베트남 북부에 치우쳐진 교류·협력 활동을 중부로 넓혀가고 있다. 지난 11월 7일에서 11일까지 봉화군 베트남교류협력 추진단이 베트남 다낭시를 방문해 큰 성과를 거뒀다. 주 다낭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방문해 강부성 총영사관에게 K-베트남 밸리 조성 사업의 설명과 지원을 요청해 화답을 받았다. 특히 주 다낭 총영사관에서는 향후 다낭시 및 직속 기관과의 인적교류를 위한 원활한 비자 발급을 약속했다. 또한 다낭시의 듀이탄대학교 개교 30주년 및 국가대학교로의 승격 축하 행사에 초청받아 봉화군과 베트남 리왕조의 역사적 연원을 설명하고 듀이탄대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원했다. 향후 K-베트남 밸리 조성에 있어서 듀이탄대학교의 역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봉화군 국제 자매도시이자 베트남 리왕조의 고향 뜨선시 인사이동에 따른 신임 당서기장과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만나 두 도시의 우호 관계를 재확인하고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의 실질적 참여방안도 논의했다. 신임 당서기장인 루딘특(Luu Dinh Thuc)은 박닌성 사무국장으로 근무했을 때부터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사업의 성공을 위해 꾸준히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봉화군이 주최하고 경북연구원 및 하노이대학교가 주관한 K-베트남 밸리 발전 글로벌 포럼에도 참석해 하노이대학교 학생들에게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따른 주제발표 및 토론을 이어갔다. 포럼에 참석한 하노이대학교 학생들은 베트남 리왕조와 봉화군의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내며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참여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앞서 지난 7월에는 봉화군수(박현국)가 주한 베트남 국가 관광청이 주관한 ‘한국-베트남 관광 활성화 및 문화 협력 포럼’에서 봉화군 역점추진사업인 K-베트남 밸리 조성에 대해 설명하고 처음 한국을 방문한 팜민찡 베트남 총리 앞에서 K-베트남 밸리 충효공원 내 리태조 동상 설치를 베트남 정부에서 제작·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6월에는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과 부호 주한베트남대사가 봉성면 창평리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 대상지에서 진행한 ‘베트남 리왕조 유적지 충효당 방문행사’에 참석해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을 높이 평가하고 정부 차원의 지원을 약속했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4-11-28

은행나무처럼 깊이 뿌리 내린 흔들리지 않는 충절과 신념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한 선량들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산 메아리로 허공을 맴돌며 패거리 문화를 양산할 뿐 아무런 감동이 없다. 국가나 국민보다 개인적으로나 자신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치우친 논리 개발로 궤변을 늘어놓고 우격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삿대질하며 남 탓을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그들은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의견을 하나로 모우고 뭉치기는커녕 서로 자기주장만 되풀이하고 파벌과 분열의 씨앗을 키울 뿐이다. 이럴 때 충절과 신념의 표상이 된 포은 정몽주 선생이 더욱 그립다. 가을빛이 완연한 영천의 임고서원. 그 입구에 이르면 은은하게 노랗게 물든 잎사귀들이 반기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은행나무는 키 30m, 가슴둘레 5.95m, 앉은자리 폭 22m에 달한다. 거인의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오랜 세월과 굳건한 신념을 상징한다. 무수한 계절을 지나오며 바람과 비를 견뎌낸 그 자태는 흡사 살아 숨 쉬며 말 없는 교훈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나무 곁에 서면 은행나무의 물음이 들려온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이 고장 출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아는가? 라는 물음으로 들린다.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그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킨 충신으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애를 걸었던 역사적 인물이다. 고려가 흔들리던 시절, 그는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물결 속에서도 그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은행나무로 변신하였다. 그의 길은 외롭고도 험난했으며,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충절은 후대에 빛나는 유산으로 남았다. 임고서원은 그가 남긴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진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을 지켜온 은행나무는 그의 이야기를 말없이 이어가고 있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포은 선생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충절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선생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읊조려 본다. 단심가에서 드러나는 신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는 단순한 충성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고백이자 헌신이다. 이에 포은 선생 자당이 지은 ‘백로가(白鷺歌)’를 보면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울세라/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는 시조에서 보듯이 포은의 충절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가정교육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그 어머니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은 단지 왕조에 충성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킨 것은 바로 자신의 신념이었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고려를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에게 충절이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고, 그의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을 보며 진정한 충성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내린 신념은 어떤 시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신념이 있기에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중에 부래산에 세워진 서원이 소실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불길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서원 앞을 지키고 있다. 마치 충절의 상징처럼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가을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무가 지닌 고귀한 가치를 마음에 새긴다. 이곳을 지키며 자라는 은행나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이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조상들이 물려준 정신의 상징이다. 그 정신은 바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지킨 충절과 신념이다. 노랗게 물던 우람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곱씹어본다. 마치 뿌리 깊이 내린 은행나무처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신념과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는 5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서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과 보호 덕분이었다. 공직에 있을 때 모셨던 이곳 출신 이남철 선배님은 여러 지역의 자치단체장을 역임하고 퇴직 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숭모사업회장과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장을 역임했다.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선생의 충효 정신을 늘 강조했다.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나무를 보호하며 그의 신념을 이어갔다. 충절과 신념이란 거창한 말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가야 하는 일상의 다짐임을 은행나무는 조용히 일러준다. 우리는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쉽게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와 서원 앞에서는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은 단지 왕조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가 은행나무처럼 뿌리 깊이 신념을 내렸기에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포은 선생을 대신하여 은행나무는 말없이 우리에게 전한다. 임고서원과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선 명종 1553년에 경상북도 영천시의 부래산에 처음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160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고, 여러 번 중건과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서원은 고종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으나, 1965년에 복원되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1337년에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고려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정을 바로잡고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를 원만히 하고, 내부적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등 고려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 개국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1392년에 이방원에 의해 피살당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여겨져 후세에 큰 영향을 남겼다. 선생의 비문에는 그의 출생, 학문적 업적, 정치적 기여, 그리고 그가 고려 말기 혼란 속에서도 충절을 지킨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행적을 기리는 동시에 후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충절을 본받기를 기원하는 문장들이 기록되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27

“설비 매뉴얼·도면·정리정돈… 조업 현장의 필수 수칙이죠”

“기술이 곧 희망입니다.”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에너지정비섹션에 근무 중인 이정한(61) 포항시 최고장인. 그는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며 평생을 기술 발전에 헌신해 왔다. 이정한 최고장인은 동력설비와 제철소 전체 유틸리티 공급을 담당하면서, 여러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노력과 열정은 포스코 내에서 일찌감치 인정받았고, 여러 특허와 제안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장인의 인생 여정과 그의 철학,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도록 한다. - 전기를 전공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호롱불로 생활하던 초·중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전기를 접하게 되면서 놀랍고 신기한 모습을 보고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 결심은 경북공업고등학교 전기과로 진학하게 만들었고, 이후 전기 분야에서 경력을 쌓는데 큰 동기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 집안 형편상 대구에 전세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대구에 사글세를 얻어 혼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혼자 생활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는 사글세 주인집 초등학교 아들 두 명을 과외를 해가며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는 저에게 어떻게든 열심히 공부해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늘 학업에 열중했다. 그 결과 항상 1~3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포스코에서의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설비개선 및 프로젝트는. △포스코에서 제철소 고로 송풍 설비와 에너지설비의 정비 업무를 담당해 왔다. 에너지설비란 제철소 전체 전력, 부생가스, 스팀, 용수 등을 공급 및 감시하는 설비이다. 입사 후 신입사원을 막 벗어날 때쯤 발전설비 신설에 따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 나가사키 미쓰비시(주) 터어빈 제어 기술 연수를 받았다. 설비에 대한 능력을 키우고 선진 기술과 문화를 배워 좀 더 빠른 설비 시운전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때 배운 기술과 일본의 기술을 접목해 나만의 노하우를 만들어 책으로 편철했다. 그 중에서도 1990년 대부분 일본 설비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설비를 프린터 로깅 인터페이스 장치 개발로 국산화 시켜 원가 절감과 대일 무역 역조방지에 큰 성과를 이루었다. 제철소 고로에 Air를 공급하는 송풍 설비가 일본 설비로 조업하고 있을 때였다. 노후 열화로 교체 추진 중 같은 일본 메이커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다수 있었지만, 독일 설비로 개조 교체해 성능 향상과 운전 중 전력이 절감되는 성과를 이루어서 가슴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송풍 설비 메탈 베어링의 오일 리크 문제점을 여러 시행 착오 끝에 완벽하게 개선했다. - 이러한 기술을 특허 노하우에 등록해 기계장치 설비개선에도 자신감이 생겼다고. △제철소 송풍 설비 문제점으로 조업 불가능한 답답한 환경에서 솔루션 아이디어를 제공해 문제점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조기에 설비를 복구했다. 이와 같은 내용을 광양 제철소, 울산 SK공장, 울산 효성 공장에 기술지도를 하기도 했다. 제철소 송풍 설비 기동장치 독일 연수를 통해 기술을 습득해, 외국 기술자만 시운전 하던 것을 자체 기술력만으로 시운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것은 신규 설비에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교체 성공한 설비에 대한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SIEMEN와 공동으로 유튜브로 제작해 홍보하기도 했다. 이 같이 제철소의 다양한 에너지설비의 신설과 개조, 개선업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한 것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현재는 제철소 가스, 발전, 전력, 용수설비 기술지원과 문제점에 대한 검토 그리고 안전하게 작업하는 방법으로 위험성 평가, 잠재위험 발굴 후 문제점에 대한 대책수립등을 하고 있다. 제철소 핵심 설비 정비와 문제점 개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나의 노력과 열정을 인정받아 특허 우수상, 우수 제안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는. △설비 매뉴얼과 도면, 현장 정리정돈이다. 설비를 정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련도면을 정독한 후에 접근을 해야 한다. 도면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비하는 것은 실이 없는 상태에서 바느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기담당자라면 100%의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전기 작업을 수행하지 않아야 한다. 즉 실수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전기도면을 숙지한 후에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비업무를 수행해 오면서 느낀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문제점이 발생돼 설비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꼭 도면을 보고 내용 확인 후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현장에 나가서 설비를 보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나가면 쉽게 설비복구가 가능했다. 지금도 습관이 돼 이렇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래야 안정된 설비운전이 가능하고 현장에서 단 한 건의 실수도 없으며 안전사고 발생 없이 작업수행이 가능하다. 불필요한 낭비 발생도 방지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다. 설비 대·중수리를 실시하는 경우 수많은 부품들을 교체하고 수리함에 있어서 사전에 충분한 도면 검토와 현장 확인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설비의 품질과 안전한 작업을 장담할 수가 없다. - 포항시 최고장인으로서 후배 숙련기술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지금까지 배운 기술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많이 전수해 주고 욕심을 내기 보다는 베풀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전문기술과 지식 그리고 노하우는 기회가 있을 때 배워야 한다. 어느 회사에 입사하든지 신입사원때 배운 지식이 평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본인이 맡고 있는 설비나 업무에 최선을 다한다면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해 나간다면 언젠가 최고의 기술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늘 책과 함께 있어야 하며 부족함이 없도록 숙지하고 배워야 한다. 지금의 시대는 초스피드 시대이다. 지금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도태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힘들고 피곤하고 어렵다고 하지 말고, 항상 노력하고 정진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 인생 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도전 정신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고 방식과 최선을 다 해보자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해보지도 않고 노력도 하지도 않고 안된다는 말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물론 안될 수 있겠지만 먼저 최선을 다해서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후배사원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전수해주고 안전하게 작업하는 방법과 원칙을 준수하면서 작업하는 방안을 공감하도록 하겠다. 기회가 된다면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베풀고 살고 싶다. 욕심은 끝이 없겠지만 포항시 최고 장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마지막으로 인생 비전 3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나라 문화와 전통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하는 역사 해설가 되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부분을 세계 널리 알려주면서 우수하고 부지런한 국민이라는 것을 인식해 주고 싶다. 둘째,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책임감 있게 일하며 누구에게나 부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셋째, 내가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하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 앞으로의 목표는. △포항시 최고장인으로 선정된 후에도 기술 전수와 멘토링을 통해 후배들의 직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하우를 전수하고 제철소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선봉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국가자격시험 실기 감독과 기업의 생산성과 안정된 근무 환경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술이 곧 희망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고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포항시와 포스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경주시 천북면에 소재한 아동복지시설 대자원에서의 나눔의 실천 봉사활동과 대한적십자사 후원활동을 지속하며 따스함을 세상에 나누고자 한다.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에너지정비섹션  이정한 포항시 최고장인은… △경북공업고등학교 졸업(1981년) △포항전문대학 졸업(1988년) △포항시 최고장인(2022년) △포항제철소 제안 협의회 회장(2022년) △한국해양안전협회 포항시장 표창(2023년) △한국산업인력공단 감독위원(2024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1-27

왕릉 굽어보는 부처… 서방정토 꿈꾸던 신라인들의 성지

40대 초반 시절이다. 보름쯤 이란을 여행했다. 지금처럼 이스라엘과 군사적으로 극단적 대립을 하던 시기가 아니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인도 ‘이슬람 공화국’ 이란을 돌아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지(城地)로 불리는 야즈드(Yazd)는 이란 중부에 자리한 사막도시다. 사흘을 거기 머물며 적지 않은 이란 사람들과 만났고, 하루는 시간을 내서 석조건물과 꺼지지 않는 불을 보존한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란 곳을 찾아갔다. 기원전 2000년경에 생겨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다. 이란 동부 지역을 활동 근거지로 삼았던 그는 이미지와 상징으로의 ‘불’을 숭상했다. 이 종교를 배화교(拜火敎·신격화된 불을 숭배하는 신앙)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지금의 이란은 이슬람교를 축으로 하는 신정일치국가에 가깝다. 그렇기에 한때 페르시아를 상징하기도 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다. 하지만, 특정 종교의 성지로서 가지는 무게감은 여전해 보였다. ‘성지’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지역을 뜻한다.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사전적 의미 파악을 위해 자료를 찾아보면 이런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종교의 발상지나 종교사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난 장소를 성지로 지정한다. 해당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민간에서 전승되는 경우도 있다. 다수의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성지로 여기는 곳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예루살렘이다. 그곳은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 3가지 유력종교의 성지다. 사실 유대교의 성지는 대부분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도 성지로 인정된다.” ◆ 신라인들이 ‘성지’라 여겼던 지역은… 이란의 야즈드가 조로아스터교의 성지고, 예루살렘이 유대교를 포함한 3개 종교의 성지라면 경주 서악과 선도산 일대는 ‘신라 불교의 성지’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불교가 국교의 위치로 격상됐던 법흥왕 이후 신라의 지배자들은 나라를 서방정토(西方淨土·부처가 다스리는 불화 없는 땅)로 만들고자 했다. 어떤 왕도 예외가 없었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운 무열왕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삼존불과 불교신앙의 수호자로 역할했던 신라 왕들의 무덤 다수가 서악과 선도산에 있다. 거기에 더해 그곳엔 신라의 최초 통치자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불리는 선도산 성모의 설화까지 떠돈다. 동국대학교 사학과 최연식 교수의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성지로서의 선도산에 관한 요약 설명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은 경주평야 입구의 중요한 지역으로 신라시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경주의 서악(西岳)으로 크게 중시되었다. 이곳에는 법흥왕과 진흥왕, 진지왕, 무열왕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왕릉들을 비롯해 다수의 상층 귀족들의 고분이 만들어졌고, 산 정상 근처에는 대형 아미타 삼존불상이 왕릉을 바라보고 서 있다.” 기자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악과 선도산을 찾을 때면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어떤 묘한 기운에 휩싸이곤 했다. 아마도 짧지 않은 시간 그 일대에 관한 연구서와 관련 논문들을 눈여겨 읽었던 탓이었을 게다. 때론 보잘것없는 지식이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모종의 기운’과 ‘상상력’은 앞서 언급한 이란의 사막도시 야즈드를 여행했던 당시에도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시나고그(synagogue)’로 불리는 유대교 회당과 조로아스터교 사원, 이슬람 사원 모두가 비교적 원형을 갖춘 채 남아있었고, 흙으로 지어진 전통 페르시아 가옥들도 보존돼 있는 지극히 ‘성지스러운 풍경’ 속에서 지냈던 까닭이었다. 경주 서악과 이란 야즈드가 마찬가지다. 두 지역은 사람들에게 고고학적 상상력을 펼치게 하고, 종교가 가진 엄숙함을 체험하게 해준다. ◆ 고려시대에도 신성함을 인정받았던 곳 앞에서 말한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 역시 선도산이 비단 신라시대만이 아니라, 왕조가 바뀐 고려 때도 그 존엄성을 인정받은 지역이라고 쓰고 있다. 이런 서술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시조를 낳은 존재이자 유력한 산신이라고 하는 선도산 성모에 관한 전승(傳承·문화, 풍속, 제도 등을 이어받아 계승함)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 전승 등은 선도산이 신라시대 이래 경주의 주요한 신앙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동쪽 입구의 토함산과 함께 경주를 수호하는 양대 신성(神聖)으로 중요하게 제사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후략)” 신라 태동기의 경주 서악을 떠올려본다. ‘성스러운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이 신이(神異)한 술법을 행하고, 신령스런 기운을 간직한 구름이 산을 에워싼 풍경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6~7세기엔 바로 거기서 마애여래삼존불을 깎아 세우는 거대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생명을 다한 왕들이 극락정토(極樂淨土)로 갈 것임을 믿으며 고단한 몸을 눕혔다. 이런 곳이 성지가 아니면 어디가 성지겠는가? (계속) ‘서악’에 누운 신라의 왕들 얼핏 봐도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무덤은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다소 과장하면 작은 산처럼 솟은 거대한 봉분의 크기가 그렇고, 깔끔하게 단장된 묘역 풍광이 그러하다. 게다가 핏줄로 연결된 이들의 유택(幽宅)임을 증명하듯 줄지어 자리했다. 사람들이 ‘서악동 고분군’이라 칭하는 신라시대 무덤들은 왕이나 최고 권력자의 능(陵)으로 추정된다.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이것들은 선도산 정상 부근에 꼿꼿이 서서 1400년 세월을 이겨낸 마애여래삼존불,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태동시킨 선도산 성모의 전설과 함께 경주 서악(선도산 일대)을 ‘참으로 서악답게’ 보이게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는 6세기 이전까지는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대릉원 등에 왕의 묘역을 조성했다. 이후 6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왕릉이 서악 일대에 축조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서악동 고분군은 신라 중고기 왕들의 묘역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1963년 8월 29일 사적 제142호로 지정됐고, 지정 당시 ‘서악리 고분군’으로 불리던 것이 2011년에 서악동 고분군으로 명칭 변경됐다. 지난여름부터 가을이 깊어져 찬바람이 부는 11월 중순까지 여러 차례 서악동과 선도산을 찾았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방문이 거듭될수록 그곳 고분에 묻힌 이들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다를 뿐, 1400여 년 전 신라의 왕들이나 기자나 결국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유한하고 미미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그런 날은 무덤 사이를 거니는 산책 시간이 길어지곤 했다. 그렇다면 서악동 고분군엔 누가 묻혀 있을까? 어떤 이들이 영욕(榮辱)이 반복되는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잠에 들어있을까. 이 의문에 ‘나무위키’가 답을 들려줬다. “역사고고학적으로는 무열왕을 비롯해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등의 무덤으로 서악동이 거론된다.…(중략) 조선시대에 비정돼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이 실제 진흥왕과 진지왕의 능이 아니라 서악동 고분군의 대형분이 진흥왕릉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은 왜 나왔을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이름 높은 통치자다. 그런데, 서악동 고분군에서 진흥왕릉으로 지목된 능은 그 규모와 주변 장식이 작고 소박하다. 그런 이유로 “남긴 업적과 위상에 맞지 않게 너무나 초라한 무덤”이라는 의구심이 떠돌았고, 실제 진흥왕의 유택은 봉분의 크기가 비교적 큰 고분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논란이 있었던 것. 하지만, 이러한 논란과는 무관하게 선도산 아래 너른 평지에 만들어져 있는 서악동 고분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엄정한 진리를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또 다른 선도산의 보물’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26

웅녀·유화·허황후… 그녀들의 신비한 역할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있고, 사진이라는 구체화된 증거가 남는 시대의 역사는 왜곡될 가능성이 낮고, 미루어 추측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오래된 문헌과 낡은 고서(古書)에 짤막하고 은유적으로 남은 기록을 찾아내고 연구해 그 비밀을 푸는 행위다. 자료가 피상적이고 부족하면 실체를 밝히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고대국가의 태동과 그것에 얽힌 각종 설화나 전설을 들여다보면 ‘아득하다’는 느낌 앞에 서게 된다. 사학자건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건 마찬가지다. “건국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고 말한 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 강사다. 채 강사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는 선도산 성모와 동일한 의미의 ‘선도산 신모’를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성모’는 누구였을까? 오랜 옛날 시작된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역사 속 성모(=신모)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죽음 이후엔 어떤 방식으로 추모됐는지를 추적하고 있는 채미하의 논문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한국 고대 각국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시조의 어머니와 시조의 비는 신모였다. 우선 시조의 어머니, 시조모로는 고조선 건국신화에 보이는 웅녀가 있다. 웅녀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곰이었으나 신의 아들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어 환웅의 시험을 통과한 후 사람이 되었고, 또 아이를 낳기를 간절히 원하여 인간으로 변한 환웅과의 결합을 통해 단군을 낳았다.” 채미하는 우리 땅 고대국가의 대표적인 신모로 고조선의 웅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화는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의 어머니다. 아들이 나라를 세운 후에는 여신(女神)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유화의 경우처럼 국가를 태동시킨 성모라면 사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허왕후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비(妃)이자 김해 허씨의 시조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됐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인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는 것이 ‘두산백과’의 설명. 유사한 맥락에서 이야기되는 정견모주는 또 어떤 관련 설화를 지니고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펼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된다.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 등장하는 가야 산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찬자가 인용한 ‘석이정전’ 즉, 승려 이정의 전기에 등장하는 것. ‘석이정전’은 신라 때 최치원이 지었다고 전한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가야 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게 감응돼 대가야와 금관국의 왕을 낳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순응전’ 즉, 승려 순응의 전기도 인용돼 있는데, 그에 따르면 대가야의 월광태자가 정견의 10대손이라고 한다.”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에 가까웠던 설화 속 성모들 앞서의 설명이나 인용처럼 고대국가의 태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神)에 필적하는 능력과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유화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계 왕들에 의해 부여신(神)으로 숭배받기도 했고, 허왕후는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가야에 불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한다.‘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신모는 시조모와 시조비로 대별’된다. 둘 가운데 시조모는 천신과 혼인한 웅녀, 유화, 정견모주가 있다. 배우자 없이 아들을 낳은 선도산 성모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 논문은 “시조비로는 알영과 허왕후가 있으며, 소서노는 시조모이자 시조비이기도 했다”고 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건국신화를 보면 신모 중 시조모는 시조를 낳고 양육하고는 건국 이후에는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신모가 한국 고대 건국신화에서 소외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유화는 시기에 따라 변화되는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시비·시아하백녀하백녀 유화로 나오며, 그 성격도 수신적 성격뿐만 아니라 신모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선도산 신모 역시 6촌장 세력과 연합하면서 신모로 자리매김했고 신라 중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나라를 통치할 아들을 낳거나, 최고 권력자의 아내가 된 여성.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석이정전’ 속에는 고대국가의 태동과 형성에 관여한 그녀들의 신비스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의 비밀이 온전히 풀릴 날이 언제일지 궁금한 게 비단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계속) 신라 첫 임금 박혁거세와 선도산 성모 신라 사람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를 떠도는 설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성모(聖母)가 살았던 곳이 선도산’이란 게 아닐까. 박혁거세는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으로도 불린다. 무슨 뜻일까? ‘거서간’은 진한 시대의 명칭으로 왕이나 귀인을 부르는 칭호다. 이와 관련 일연의 ‘삼국유사’는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고 쓴다. 그렇기에 여기서 ‘사소부인’으로 지칭되는 사람을 ‘선도산 성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건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은 구체적 증거가 없거나 부족한 ‘신화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두 사람이 어떤 방식이건 모종의 형태로 결부돼 이야기되고, 논의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고문헌에선 박혁거세의 출생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삼국유사’를 다시 펼쳐본다. 이런 서술이 등장한다. “혁거세는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도무지 질서가 없다.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고 의논했다. 그때 알천 언덕에서 멀지 않은 양산(楊山) 기슭에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이 나정(蘿井)이란 우물 곁에 가보니 하얀 말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가 하늘로 날아갔다. 거기엔 자줏빛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는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요약해 정리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이 난생설화(卵生說話)와 더불어 신라의 첫 임금이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함께 언급한다. “박혁거세는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있다. 사소부인은 선도산 성모와 같은 여신이다.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곳은 서형산(西兄山) 혹은, 선도산(仙桃山)이라 불리는 산이다.” 까마득한 2000여 년 전 고대왕국의 출발과 관련된 설화이니 현대의 시각과 인식에선 그저 허무맹랑한 풍문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게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 이야기다. 그러니, 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건 당연할 터. 하지만, 대부분의 고문헌이 기록하고 있는 박헉거세의 탄생설화는 “아기였지만 몸에서 광채가 나고, 그 아기를 본 짐승들이 몰려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는 등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이처럼 특별했던 아기, 즉 신라의 최초 통치자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을까? 선도산 성모가 낳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들려줄 사람은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24

오염된 플라스틱에 형성된 해양 생태계… 결국엔 ‘우리 입’으로

“홍합이 해변으로 떠밀려온 플라스틱 부표와 페트병에 붙어 자라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결국 우리가 먹는 홍합도 이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호미곶에서 해녀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정해숙씨(61)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경험을 전했다. 정씨는 “바람이 많이 불거나 파도가 높게 치는 날이면, 해변으로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어마어마하게 밀려온다”며 “이게 다 어디서 왔을까 했는데, 중국 문자로 된 라벨이 붙어있는 페트병들이 해변에 널려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행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놀랐던 순간도 언급했다. 정씨는 “순창 고추장 통이 일본 해변에 떠다니는 걸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우리가 먹고 버린 것이 이렇게 먼 곳까지 가는구나 싶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해변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기자가 직접 10L짜리 쓰레기봉투 두 장을 들고 포항시 북구에 있는 해수욕장을 찾아가 봤다. 화진해수욕장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건넨 것은 파도에 떠밀려 해안을 구르는 생수병이었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쓰레기를 주워 담다 보니 그 출처는 다양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중국과 일본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페트병들이었다. 쓰레기를 줍기 시작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봉투는 금세 플라스틱 쓰레기들로 가득 찼다. 다른 해수욕장은 어떨까. 월포 해수욕장에 도착하자마자 그 답은 쉽게 나왔다. 거센 파도에 밀려온 해조류 사이로 숨어있는 페트병들, 찌그러진 막걸릿병, 그리고 쓸모를 잃은 일회용 플라스틱 용품들이 해변의 일부가 된 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칠포해수욕장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누군가 먹다 버린 고추장 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 액체가 든 페트병, 푸바오가 그려진 플라스틱 모자 등 예상치 못한 다양한 쓰레기들이 발견됐다. 해수욕장 앞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씨(63)는 “파도에 떠밀려오는 쓰레기가 정말 많다. 가끔 해변 청소를 하러 여러 단체에서 오지만 그때뿐이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제 해양환경단체 오션 컨서번시(Ocean Conservancy)에 따르면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에는 1억5000만t 이상의 플라스틱이 떠다니고 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날 때마다 800만t이 추가된다. 이는 1분마다 쓰레기 수거차 한 대 분량의 플라스틱을 바다에 버리는 것과 같다. 바다로 흘러든 플라스틱 쓰레기 가운데 일부는 대양을 순환하는 해류를 따라 이동하며 쓰레기 섬(Garbage Patch)을 형성한다. 그중 가장 큰 것이 북태평양 아열대 환류가 만든 쓰레기 섬 ‘거대 태평양 쓰레기 지대’(Great Pacific Garbage Patch)다. 하와이에서 북동쪽으로 1600㎞ 떨어져 있는 이 쓰레기 섬의 크기는 무려 160만㎢에 이른다. 한국 국토 면적의 16배에 달하는 규모다. 과학자들은 7만9000t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이곳에 몰려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자연기금(WWF)이 플라스틱과 관련한 연구 2600여 개를 종합해 분석한 결과, 해양 생물 297종 중 88종이 플라스틱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물에 몸이 걸리고, 낚싯바늘에 입이 얽히고, 배에는 먹이 대신 플라스틱 조각이 쌓이는 등 다양한 피해가 발생했다. 실제로 작년 8월 강원도 고성 해안에서 발견된 바다거북 폐사체 부검 결과 뱃속에서 비닐, 플라스틱 조각이 쏟아져 나왔다. 쓰레기를 먹이로 착각한 것이다. 발견된 폐사체 10마리 중 7마리 뱃속에서는 총 64점의 플라스틱 조각이 나왔다. 정회헌 해양환경공단 해양폐기물 관리센터 대리는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는 하천·하구, 해양 레저 활동, 어업·양식 활동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바다로 유입된다”며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망 훼손 및 어획물 오염을 일으켜 조업 시간이 지연되고, 해양생물의 서식지를 훼손한다. 해안 경관 훼손도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쓰레기 불법 투기를 방지하며 해양 환경 보호를 위한 인식 개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해외사례 수거∼재활용, 신제품으로플라스틱 오염 막는 해양청소기술세계적 혁신기술·시스템으로 주목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는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환경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중 네덜란드의 ‘오션 클린업’(The Ocean Cleanup)과 ‘그레이트 버블 베리어’(Great Bubble Barrier), 호주의 ‘씨빈 프로젝트’(Seabin Project)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들 단체는 각각 혁신적인 기술과 시스템을 통해 해양 쓰레기를 효율적으로 수거하고 재활용하는 동시에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네덜란드 ‘오션 클린업’ ‘오션 클린업’은 해양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네덜란드의 비영리 단체로, 특히 태평양에 형성된 ‘거대 태평양 쓰레기 지대’(Great Pacific Garbage Patch·GPGP) 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23년에 도입된 ‘시스템 03’은 거대한 U자형 구조로 설계돼 있으며, 길이가 약 2.2km에 달해 한 번에 축구장 크기만큼의 해양 구역을 청소할 수 있다. 시스템 03의 가장 큰 장점은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면서도 플라스틱을 효과적으로 수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중 카메라와 해양 동물 안전장치(MASH)를 통해 쓰레기 수거 과정에서 해양 생물이 그물에 갇히는 것을 방지하고, 필요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오션 클린업은 수거한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다양한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며, 해양으로 다시 유입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네덜란드 ‘그레이트 버블 배리어’ 독일 출신 엔지니어 필립 에르호른이 2015년 호주 유학 중 폐수 여과 기술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그레이트 버블 배리어’(The Great Bubble Barrier) 는 해양 플라스틱 오염 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적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이 시스템은 강이나 바다의 운하 바깥쪽에서 강력한 공기를 내뿜어 거품장벽을 만들고 장벽에 막힌 플라스틱 쓰레기가 다시 운하 입구로 돌아오도록 설계됐다. 테스트 결과, 버블 배리어는 강으로 유입된 플라스틱 쓰레기의 86%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은 환경친화적 특성도 갖췄다. 거품으로 만들어진 장벽이기 때문에 어류와 선박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으며 물속 산소 농도를 증가시켜 수질 개선에도 기여한다. 현재 암스테르담의 운하에 설치된 시스템은 연간 약 42t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거하며 실효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 혁신적인 기술은 강이나 운하를 통해 바다로 유입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차단해 해양 환경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호주 ‘씨빈’ ‘씨빈’(Seabin·바다 쓰레기통) 프로젝트는 호주의 두 서퍼, 앤드류 터튼(Andrew Turton)과 피트 세글린스키(Pete Ceglinski)에 의해 시작됐다. 이 두 서퍼는 항구와 마리나에서 해양 쓰레기를 효과적으로 수거할 수 있는 장치인 씨빈을 개발했다. 씨빈은 간단한 설치와 유지보수로 다양한 해양 환경에서 널리 사용될 수 있는 장치로, 현재 전 세계 860곳 이상의 항구에 설치돼 있다. 씨빈은 전기 구동식으로 하루 24시간 운영되며 물을 끌어당겨 부유 쓰레기, 미세 플라스틱, 기름 찌꺼기 등을 빨아들인다. 이 장치는 하루 약 3t, 지난 6년간 총 약 2000t 이상의 해양 쓰레기를 수거했다. 씨빈 프로젝트의 장점은 간편한 설치와 유지보수, 그리고 해양 쓰레기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수거된 쓰레기는 재활용 시스템을 통해 처리된다. 씨빈 프로젝트는 기술적 솔루션뿐만 아니라, 해양 환경 보호를 위한 교육적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어 지속 가능한 해양 관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4-11-24

의소세자 태를 묻은 ‘태실’, 소의 여물통 닮아 ‘쇠죽골’

‘곱작골, 질바들…’ 지난 2018년 6월 27일 본지 10면에 소개된 영주지역 옛지명이다. 들으면 정겨운 마을이름 속 켜켜한 역사의 의미란 제목으로 영주시의 지명 유래를 게제했었다. 지명유래는 그 자체가 역사이다. 영주시에는 다양한 지명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있다, 지명은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자 숨겨진 비밀을 찾는 작업이다. 영주지역 역사에 대한 이해와 중요성을 다시 한번 짚어보기 위해 영주 속 지명 이야기를 이어간다. □ 영주동 지역 △ 수용소골 제일교회 옆 왼쪽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철탄아파트가 나온다. 이곳이 수용소골이다. 일본의 침략으로 고향을 떠나 만주와 중국으로 이주해 살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이주민을 수용하고자 5평 정도 규모의 주거지를 마련해 살던 곳으로 수용소골이라 불렀다. △ 염매시장 기독병원 뒷골목이 염매시장이다. 원래는 물건을 싸게 파는 곳이라 해 염매시장(廉賣市場)이라 했지만 이곳에 영주역이 들어서면서 다방, 여관, 술집 등이 생기면서 요염한 여자들이 모여들며 요염할 염(艶), 팔매(賣)자를 써 염매시장의 뜻이 바뀌게 됐다. 현재는 재래시장으로 남아 있다. △ 부용대(芙蓉臺) 고청산 남록 커다란 바위 주변을 부용대라 한다. 영광중학교 왼쪽 길을 따라 서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태호목공소라는 건물이 바위위에 지어져 있다. 옛날 서천이 이곳으로 흘렀는데 맑은 물과 버드나무 숲이 절경을 이루어 퇴계 선생이 부용대라 이름 지었다. △ 쪽박소 시가지 인근 봉송대 암벽 아래 옛날 서천이 흐를 당시 물길에 의해 소용돌이치는 소가 있었다. 이를 쪽박소라 불렀다.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목욕과 낚시 뱃놀이를 했다 전해진다. 이 쪽박소 위 암벽에 신재 주세붕(周世鵬)과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시를 새겨 놓았는데 지금은 메워지고 주택들로 가려져 잘보이지 않는다. □ 가흥동 지역 △ 태봉(胎封) 귀내마을 동편골 숲속에 있는 괴정(槐亭)이라는 작은 정자 동편의 봉우리를 태봉이라 한다. 조선조 왕세손의 태(胎)를 봉안한 곳이라해 태실(胎室)이라 불리다가 태봉(胎封) 혹은 태봉(胎峰)으로 부르게 됐다. 2008년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태실이 확인됐다. 이 태실은 영조의 장손이자 사도세자의 적장자며 헌경왕후의 소생으로 이름은 정(琔)이고, 시호는 의소(懿昭)이며 정조의 친형이다. △ 한절마(大寺洞) 현 강변아파트 인근이 한절마다. 신라시대 때 조성된 큰 절이 있었다 해 한절마로 불렸다. 1961년 영주 대 수해 이전까지는 영주세무서와 마을까지 이어지는 큰 마을이었다. 또, 광승마을에 살던 김광헌이란 선비가 수해로 마을이 물에 잠기자 서천 물가 한적한 곳에 이주해 살았다고해 한저(閒渚)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 애고개(阿也峴) 영주군지에 의하면 작은 언덕 고개라 해 언덕 아, 이끼 야, 고개 현자를 써 아야현이라 불렸지만 우리말 발음으로는 애고개 또는 애얏고개라 부르게 됐다. 이 고개는 어린 아이에 대한 슬픈 사연이 있어 애고개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상망동(上望洞)-하망동(下望洞) 지역 △ 갱변마 현 삼일주유소 앞에서 코아루아파트로 가는 골목주변 마을로 갱변마라 불렀다. 철탄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보름골 및 단운마을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이곳에서 합류돼 강변 모래밭을 이루었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 진펄리골 큰 단운 마을 입구에서 왼편 농로를 따라 영동선 철길 옆을 지나 약 1㎞쯤 가면 진펄리골이 나온다. 옛날 이곳은 가뭄이 심해 모내기를 할 수 없어 질펀하게 많다는 뜻으로 진펄리골이라 했는데 이후 물이 많아져 농사를 잘 짓게 됐다는 구전이 내려오고 있다. △ 쇠지골 원당로를 따라 봉화방향으로 가다보면 봉화 삼거리 오른편 철길 건널목 너머 마을이 쇠지골이다. 옛날 옥천 전씨들이 터전을 이루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고 마치 소의 여물통과 닮았다해 쇠죽골이라 불렸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쇠지골로 변화하고 쇠지골을 서자곡(書子谷)으로 부르기도했다. △ 원댕(元塘)이 영동선 철길 옆 하망동행정복지센터가 소재한 마을이다. 이 인근 지역을 원댕이라 불렀다. 조선 명종때 고령 박대령(朴大齡)이란 사람이 처음 터전을 이루고 살 때 마을 뒤편에 있는 큰 절 마당에 원당지(元塘池)라는 못이 있었다고 해 마을 이름을 원당이라 불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원댕이가 됐다. □ 휴천동 지역 △ 말무덤골 영주파머스마켓에서 봉화통로를 잇는 우회도로를 가다 오른쪽을 보면 유전사란 절이 있는 골짜기가 있다. 이곳이 말무덤골이라 불리는 원리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 고을 관내에서 병으로 죽은 말과 소를 묻던 곳이라 해 말무덤골이라 했다. △ 술바우(酒岩) 휴천동 선영여고로 가는길 좌측 산기슭의 바위를 술바우라 한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예안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주막촌이 형성 됐다고 한다. 옛날 이 바위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흔적을 찾을수 없다. 옆에는 군수 조영화(趙永和)와 군수 정동기(鄭東箕)의 선정비가 새겨져 있다. △ 둘구비(二曲) 전단마을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노인회관이 있는 작은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둘구비라 한다. 약 300년전 강릉 유씨 일족이 터전을 잡아 살았다. 이 마을을 굽이치는 곳에 명당터가 있다고 하였는데 고령 박씨 묘터라고 한다. 두 굽이의 명당터를 둘-굽이라 불렀는데 연철이 되어 둘구비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 풍기읍 △ 달밭골(月田) 비로사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산 비탈면에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이 달밭골이다. 높은 곳에 위치해 보름달을 훤하게 볼수 있다 해 달밭골로 불리게 됐다는 설과 달밭은 옛 한글로 다락 밭, 산전을 뜻하는 말로 산중에 밭을 일구고 사는 마을이란 의미도 있다. △ 잿밭(災田), 잣밭(栢田) 풍기 금계중학교와 인근한 작은 마을로 잿밭이라 부른다. 원래는 낮은 밭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옥룡자금계도(玉龍子金鷄圖)에 따르면 이곳을 재밭(災田)이라 불렀는데 발음과 의미가 변하고 마을 주변 기슭에 잣나무가 많다해 잣밭(栢田)이라 부르고 있다. △ 희여골(白洞) 억새풀이 우거져 가을이면 희게 보인다 해 백동, 희여골로 불리고 있다. 약 500여년전 창원 황씨들이 이주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지역으로 생거백동(生居白洞), 사거묵동(死居墨洞)이라 해 살아서는 풍기 묵동에 죽어서는 순흥 묵동에 묻혀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4-11-24

1970~90년대 해도동·상대동 주민들의 쇼핑·외식 ‘일번지’

양학시장, 큰동해시장, 북부시장, 죽도시장…. 포항 도심에는 많은 전통시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장들은 1970~90년대 도심 유통,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서민, 생활경제를 지탱하는 든든한 배경이었다. 포항에서 도심 시장의 등장을 논할 때 1980년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우리 일상에서 전통시장은 늘 우리 주위에 있어 왔기에 매 순간, 매 시기가 중요했겠지만, 이 시기(1980년대)에 이르러 전통시장은 양적,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뭘까. 1980년대 전통시장이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유는? 학자들은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첫째 이유로 든다. 인구 팽창은 국민 수의 양적(量的) 증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의식주 등 생활필수품의 급격한 수요 증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이 본격화 되고,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민소득이 급속히 높아진 점도 시장과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늘어난 소득과 생활수준의 향상은 쇼핑이나 외식 문화 수요를 급속히 신장시켰고, 이런 흐름이 전통시장 발전으로 연결됐음은 물론이다. 이런 등식에 정확히 일치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포항대해불빛시장’(이하 대해시장)이다. 설립 시기도 1981년이고 앞에 열거한 여러 요인들과도 정확히 겹친다. 1980년대 대해시장이 어떻게 포항 남부 도심의 주요 상업, 유통거점으로 부상했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자. ◆1970∼80년대 해도동, 상대동 인구 급증 우선 대해시장의 공간적 근거가 되는 해도동과 상대동의 인구 변화에 주목해 보자. 1985년 해도동의 인구는 4만1000명, 1990년 상대동의 인구는 4만6000명에 이른다. 두 지역의 인구 합계는 웬만한 지방 소도시를 초과하는 규모다. 현재 해도동 인구가 1만6000명, 상대동 2만6000명이니 당시 인구 밀집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해도동, 상대동 인구 증가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자료가 있다. 바로 1970~90년대 이 일대에 들어선 아파트, 연립주택들이다. 연도 별로 살펴보면 △동아아파트(1979년) △상대주공아파트(1981년) △해도대보아파트(1982년) △반도맨션(1984년) △대명뉴타운맨션(1984년) △금강맨션(1985년) △명성제2광장(1987년) △태양아파트(1988년) △신흥주택1차(1988년) △대림힐타운(1988년) △학산타워(1989년) △현대종합금속사원아파트(1989년) △선화아파트(1990년) △상록수아파트(1990년) △명성해도타운(1990년) 등이다. 대략 헤아린 것만 해도 15개가 넘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고층 아파트나 대단지 규모는 아니지만 이들 주택들이 시장 근처에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유동인구와 시장 수요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8년 포항제철의 설립과 1973년 용광로의 가동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철강산업의 발달은 포항의 경제를 수직적으로 끌어올렸고, 안정된 일자리와 고임금 근로자를 발생시켰다. ◆대해불빛시장의 정식 설립과 발전 대해시장의 정식 설립은 1981년으로 기록돼있다. 하지만 시장 관계자와 원로 상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1970년대 이미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인연합회 김하일 회장은 “마을 어르신들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 이미 노점 형태의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 허름한 장옥(場屋)과 가건물 위주의 점포들이 상가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 들어와 부쩍 비대해진 상대동, 해도동 일대의 인구나 경제규모는 기존의 노점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포철 근로자들이 이 일대에 대거 입주하면서 생필품 수요가 증가하자 포항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생활근린형 시장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대해시장은 여타의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오후 3시부터 6시 사이에 가장 붐볐는데 가게마다 손님으로 물결을 이뤄 교행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구내식당이나 학교 급식시설이 없어 직장이나 학교에서 식사를 모두 도시락으로 해결하던 때였다. 이에 주부들은 오후가 되면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으로 나왔는데, 마침 학생들 하교 길과 겹쳐 시장이 북새통을 이뤘다는 것. 대해불빛시장은 2019년까지 대해종합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2020년 ‘포항국제불빛축제’를 계기로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당시 불꽃축제장이 시장과 가장 가까웠고 포항시의 대표 야경 명소인 포스코가 500여m 거리에 있어 이런 이미지를 시장과 접목하기 위한 시도였다. ‘큰 바다’라는 이름처럼 시장 내에는 다양한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각종 채소, 금은방, 생선점, 옷 가게, 분식점 등 100여 개의 점포가 구색을 맞추고 있다. 대해시장은 상인들 특유의 단결력과 끈끈한 유대감으로 유명하다. 98%를 웃도는 상인회 가입률이 이를 입증한다. 김하일 상인회장은 상인들 의식의 큰 변화 계기를 ‘시장첫걸음 사업’ 때 진행했던 ‘상인대학’을 든다. “나만 성실하게 일하고 좋은 물건 싸게 팔면 장사가 잘되겠지. 하던 상인들이 자신의 점포보다 ‘시장’이라는 더 큰 틀에서 상업을 이해하기 시작한 거죠. 상인회가 단결해 시장 전체 분위기를 이끌고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 이벤트를 진행함으로써 시장 전체의 가치와 이미지를 올려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된 상인들이 ‘무언가 한 번 해보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면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현재 시장에선 카드 단말기 설치, 온라인 결제, 원산지 표시제, 가격 표시제는 기본이고 구획선 지키기 등 질서들이 잘 유지되고 있다. 특히 2020년에는 전국 전통시장 우수 시장에 선정되었고, 중소벤처부 장관상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상인회의 단합과 문화 공간 조성의 비전 상인들의 단결과 높은 상인회 가입률은 시장 활성화에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결집을 바탕으로 상인회는 다양한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정기적인 봉사활동은 물론 플리마켓과 바자회 등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한 행사들도 열고 있다. 특히 상인회는 향후 시장 내 120평 유휴공간에 대형 문화공간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공간이 완성되면 각종 축제 행사와 버스킹, 바자회, 경로잔치, 심지어 연예인 초청공연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는 대불빛시장을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김 회장은 대해시장을 한마디로 ‘정(情)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또 인심과 활력이 넘치고 저렴한 가격에 모든 종류 상품을 원스톱으로 구매할 수 있어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의 장점이 골고루 갖춰진 곳이라고 자랑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해시장이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현재 상인회는 ‘문화관광형시장’ 공모 준비에 전념하고 있다. 이 제도는 정부에서 전통시장의 대표상품 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공모에 선정되면 연간 5억원 정도 정부지원금을 확보하게 돼 시장 환경 개선, 건물, 가로 정비 등 상인회 활동에 탄력을 받게 된다. 이제까지 포항의 도심시장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대해시장이 이번 ‘문광형시장’ 선정을 계기로 포항의 전통 상업 공간, 시민 경제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1-21

전로 취련조업 무결함 ‘기록 제조기’ 역사를 쓰다

“취련사는 목표 온도와 성분에 맞게 쇳물을 조리하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제철소에서는 생산직 중 유일하게 취련 작업자에게 ‘사’자를 붙여 ‘취련사’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제강공정은 철을 만드는 중간 단계이다. 포항제철소 철강제품의 70~80%가 제강부를 거쳐간다. 어떤 성분으로 쇳물을 만드는지에 따라 철강제품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이 과정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포항제철소 제강부 3제강공장 이영진(56) 포스코 명장에게 취련사의 길에 대해 들어본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내가 태어난 곳은 버스와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누나 두 명과 나,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힘겹게 노력했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작은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누나들과 헤어져 경기도 가평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담임 교사가 학비 무료, 기숙사 제공, 군 입대 면제 등의 혜택이 주어지는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새롭게 전환하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먼 데까지 가서 공부할 수 있겠냐”며 걱정부터 하던 어머니의 말씀을 뒤로 하고, 가족을 떠나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포항으로 오게 됐다. 처음에는 고향 생각과 외로움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리기도 했다. 포철공고 제강과를 졸업한 후, 1987년 곧바로 포항제철소의 심장 제강부에 입사하게 됐다. 이때부터 나는 용선(쇳물)을 다루는 취련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현재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포항제철소의 심장이라 불리는 제강공정, 그중에서도 3제강공장 전로파트는 철강제품의 성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용선에 산소를 불어 넣는 양을 조절하고 황, 인, 탄소와 같은 불순물을 제거해 질 좋은 철강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과정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기 위해 너무 졸여버리면 짠 음식이 되는 것처럼 쇳물 중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산소와 냉각재를 투입해야 한다. 무조건 산소를 많이 불어넣으면 용강의 청정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 업무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포항제철소 3제강공장을 처음 지을 때, 프로젝트 건설요원으로 공장 건설에 뛰어들었다. 당시 23년 차가 되던 해 ‘맨땅에 헤딩’을 하게 된 것이다. 주변서는 익숙한 업무를 뿌리치고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만류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공장을 처음부터 계획해 보는 일은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고 특성에 따라 각종 표준을 만드는 기초적인 작업을 하면서 때론 아주 힘들었지만, 평생 남을 경험과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설비와 공장을 다 지어놓고 시운전을 앞둔 상황에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에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가 터지지는 않을까?” 매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결국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와 눈썹이 빠지는 지경까지 갔다. 당시 몸도 마음도 지친 상황 속에서 포항 시민들의 따뜻한 응원과 지원 덕분에 큰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포항 시민들이 나서서 떡도 나눠주고 성공적인 공장 가동을 위해 응원의 목소리를 내줬다. 포항 시민들은 큰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한결같이 포스코를 지지해 준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덕분에 3제강공장은 무사히 착공돼 지금까지도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 무결함 작업으로 ‘기록제조기’라는 별명이 있다고. △자랑 같아 보일 수 있지만, 회사에서 “취련 좀 한다”라는 말은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무결함 작업을 지속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비법은 몇 가지 중요한 요소에 기인한다. 첫째, 철저한 준비와 분석이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해 먼저 작업한 취련사의 작업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이를 통해 작업의 흐름과 문제점을 사전에 파악하고, 다음 작업에 반영할 수 있는지를 찾았다. 둘째, 집중력과 끈기이다. 취련에 들어가면 작업에만 몰두한다. 작업이 의도한 대로 온도와 성분이 나오면 보람과 희열을 느끼지만, 좋지 않게 나올 경우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트레스조차도 나에게는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셋째, 지속적인 학습과 개선이다. 항상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배우고, 이를 실제 작업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덕분에 금속제련기술사, 제강기능장, 제선기능장, 주조기능장 등 많은 자격증을 취득했고, 특허출원 5건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동료와 수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해 더 나은 작업 환경을 만들어가고자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열정과 책임감이다. 취련사 직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포스코와 함께한 지난 시간 동안, 회사와 함께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더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해 지속 노력할 계획이다. - 국내 최초로 전로 출강 작업 자동화에 성공한 스토리를 들려 달라. △제강공정에서 작업자들이 가장 긴장하는 순간은 전로에 담긴 쇳물을 래들에 옮겨 담을 때이다. 이를 ‘출강작업’이라 부르는데 쇳물을 전로에서 정련한 뒤 깨끗한 쇳물만 분리해 내는 고위험 고기술 공정으로 작업자의 숙련도에 따라 품질 및 작업 편차가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처럼 중요한 작업을 수작업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해, 포스코는 2018년 전로 출강 작업 자동화 기술을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관련 핵심 기술은 원격으로 고열의 출장 조업을 정밀하게 조작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정 자동 프로세스이다. 고성능 적외선 카메라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돌발 상황을 제어하고, 출강 작업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자가 학습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 결과, 작업자는 컴퓨터 화면에서 시작 버튼을 한 번만 클릭하면 출강 공정에 필요한 7가지 절차가 자동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이를 통해 전로 운전자는 더욱 안전하게 작업함과 동시에 연평균 4.5건의 품질 불량을 사전에 방지하고, 연간 수억 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현재 3제강공장에서 생산되는 전체 강종의 약 90% 이상이 출강 자동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 현장 관리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는. △새로운 실적을 발굴하는 것도 좋지만, ‘협력과 팀워크’가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 생각한다. 선후배가 함께 만들어내는 ‘조직의 힘’을 믿고 있다. 협력은 지식과 경험의 공유를 통해 조직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팀워크는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서로의 강점을 활용하여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협력과 팀워크를 통해 이루어진 성과는 조직의 목표 달성에 기여하며, 공정한 보상을 통해 지속적인 동기 부여를 자극한다.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조직을 끌어 나갈 때, 새로운 실적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 명장으로서 후배 양성과 기술 전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현재 작업자 안전, 품질향상, 생산성을 중심으로 명장이 되기까지 터득한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특히, 작업 현장에서의 안전 수칙 준수와 효율적인 작업 방법을 강조하고 품질 관리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제 퇴직이 4년 남짓 남았지만, 그동안 선배들이 쌓아온 기술과 경험을 후배들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이다. 그래서 후배들이 현장에서 겪을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멘토링을 진행 중이다. 포스코인의 명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나의 인생 철학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이다. 이 말은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경험과 도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세상의 이치이다. 어떤 일이든지 노력과 헌신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후배들도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 자신만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 더 큰 성과를 이뤄내고, 새로운 50년 철강 산업의 미래를 주도해 나가길 바란다. 어려운 도전에도 좌절하지 않고 까다로운 조건에서도 완벽하게 해내고자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 믿는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철강 산업은 마치 배고프고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은다면 이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다면, 이 겨울은 반드시 끝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힘을 모으며 배려해 새롭게 도약할 원동력을 준비해야 한다. 이영진 제강부 3제강공장 명장은 △금속제련기술사(2006년)△포스코 기술대상(2015년)△포항시최고장인(2020년)△대한민국 우수숙련기술인(2021년)△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위촉(2021년)△포스코명장(2023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1-20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10년을 바치기도

박수철 선생은 해안둘레길을 자주 걸었다. 바다의 도시 포항에 사는 화가로서 바다를 제대로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듯 그는 작품 한 점 한 점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에게 작품은 신앙이다. 김도형(김) : 선생님이 사신 흥해 해원빌라는 2017년 포항 지진 때 심하게 파손돼 언론에도 소개되었지요. 박수철(박) :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졌지요. 한마디로 끔찍했습니다. 나중에 빌라를 철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바람에 두 달 가까이 흥해체육관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보상금으로 용흥동에서 전세를 살다가 송도에 작은 집을 장만했습니다. 이 집도 6개월 동안 수리한 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도 힘든 일을 당하게 되더군요. 2022년 태풍 힌남노가 몰아쳤을 때 집에 물이 차올라 화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김 : 지상에 집 한 채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군요. 집수리 기술은 언제 익혔습니까? 박 : 조각하는 후배의 집안이 죽도시장에서 가구점을 했습니다. 후배는 가구점을 기반으로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그때 후배와 함께 다니며 집수리 기술을 배워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년 정도 되었군요. 김 :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바다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유가 있는지요? 박 : 포항은 바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바다와 함께하고 있으니 바다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바다를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안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지요. 구룡포에서 호미곶 구만리까지 가는데 하루가 더 걸렸어요.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해야 하니까요. 도중에 민박하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김 : 구만리 사진은 지금도 갖고 계시겠군요. 박 : 구만리뿐만 아니라 포항의 옛 풍경 사진을 여러 장 갖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괜히 울적해지지요. 김 : 선생님의 과거 사진 중에 ‘사라진 구만의 언덕을 애도하며’라는 글을 배낭에 붙이고 몇 사람과 함께 걷는 장면이 있습니다. 박 : 구룡포에서 구만리까지 가는 길에 큰 도로가 나면서 아름다웠던 모래 언덕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정말 가슴 아팠지요. 지인들과 그 길을 걸으며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송도해수욕장에도 모래 언덕이 참 좋았는데……. 물론 개발이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지워버리면서 해야 하는 건지, 참 안타깝습니다. 박 선생은 젊은 날부터 작가 노트를 꾸준히 써왔다. 31년 전 여름 어느 날, ‘송도의 모래 언덕’에 관한 상념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바람이 불던 날 송도의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파도가 일고, 바람이 바다 내음을 몰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위로 사라지는 그 한나절을 그렇게 무릎 조아려 세워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그 언덕에 앉아 있다. 하모니카와 하프 연주의 브리티시 포크를 들으면서. 삶이란 수많은 모래알 속의 하나로 반짝이면 되는 것을 왜 저 혼자 바위가 되려 하는지. - 1993년 7월 18일 김 : 작업은 주로 언제 하십니까? 박 : 자연광이 비치는 낮에만 합니다. 그림이 인공조명을 받으면 색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광도 오전과 오후의 느낌이 다르지요. 그리고 여름 풍경은 여름에, 겨울 풍경은 겨울에만 그립니다. 그 계절에 마무리하지 못하면 다음 해로 넘어갑니다. 여름 풍경을 겨울에 그리면 여름의 느낌을 살려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작업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김 : 그렇다면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박 : 평균 3∼4년이 걸립니다. 10년 넘게 걸린 작품도 있어요. 김 : 아직 완성이 안 된 작품도 있을 텐데, 그런 작품을 보면 어서 완성해야지 하는 조바심이 나지 않습니까? 박 : 사는 게 미완성인데 조바심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김 : 젊은 날에도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까? 박 : 젊은 날에는 1년에 100여 점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그중 90여 점은 찢거나 뭉개버렸어요. 해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요. 김 : 다작(多作)을 하다가 과작(寡作)으로 바뀐 거군요. 박 : 젊은 날에는 의욕과 열정이 넘쳐 작품 수가 많았지요. 나이 들수록 작품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되니 작품 수에는 집착하지 않게 되더군요. 김 : 열정적으로 그리다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박 : 젊은 날 눈이 내리면 자전거를 타고 동빈내항과 철길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녔습니다. 나의 내면에 그 풍경을 꼭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제 포항도 눈을 구경하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김 : 그림을 그리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박 : 내가 벌어서 해결했고, 미국에 있는 누나와 조카가 물감과 이젤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김 : 포항의 풍경 중 각별히 애정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박 : 구만리이지요. 구만리는 가장 포항다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토에서 싹을 틔우고, 바람과 싸우며 결국 이겨내는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나는 구만리를 포항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김 :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 : 동빈내항을 어머니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지켜주는 곳이니까요. 태풍이 오면 동해안의 많은 선박이 동빈내항으로 몰려오지요. 김 : 신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박 : 나에게 신앙은 곧 작품입니다. 믿는 만큼, 다가서는 만큼, 노력하는 만큼 신앙도 작품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김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박 : 갖고 있는 물감과 캔버스를 모두 소진한 후 죽고 싶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고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말했다. 고흐와 이중섭 그리고 많은 예술가가 그랬다. 하지만 고통은 지나가도 아름다움은 남지 않을 수 있다. 1950년 전쟁통에 태어난 이 화가는 숱한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일흔 중반에 이르렀다. 인생을 정리할 시점에 이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현장에 나간다. 신은 과연 이 화가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줄 것인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묵직한 질문이 명치를 찔렀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20

깊이 깃든 전설과 함께 우리 이야기를 담은 은행나무

고향인 청도를 오고 갈 때면 길목에서 쉼터를 제공해 주고 반겨주는 고마운 분이 있다. 청도 대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서원리 자계서원 은행나무,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삼총사이다. 서원리 은행나무는 자계서원에 배향되는 탁영 김일손 선생의 상징물이고 원리 은행나무는 사대천왕과 함께 천년 고찰 적천사의 호위 무사다. 대전리 은행나무 노거수는 내려오는 전설로 인하여 나무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보호받으며 마을을 홍보하는 홍보대사이다. 원리의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나라의 보호를 받는 귀족계급의 나무이다. 삼총사로부터 쉼터를 제공받고 가르침과 교훈을 얻고 있으니 그곳 나무 밑은 나에게는 안락한 카페요, 나무는 인자하신 스승님이다.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달래 주며 힘과 용기를 준다. 그분들 품에 안겨 편안히 쉬기도 하고 늠름하고 우람한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요즘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리면 주변은 만산홍엽으로 아름다움에 취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조상 묘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638번지 마을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은행나무를 찾아 쉬었다 왔다. 주민들은 나무 방책에다 작은 돌로 주변을 경계 지우고 그에게 물리적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귀한 손님에게 주인이 제공한 푹신한 방석에 곧게 앉은 자세이었다. 정자를 설치하고 대리석으로 앉을 자리는 물론 주차장까지 조성하여 방문객의 편의를 돕고 있었다. 우람한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단풍을 배경으로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이 기념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의 우람한 모습과 노란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무가 되어갔다. 아직 노란 단풍이 물들어 가는 중이라 주말인 11월 23일 토요일 전후로 정점을 찍을 듯싶다. 산그림자가 어둠의 이불로 마을과 은행나무를 덥고 동산으로 달음질칠 때 마을을 빠져나왔다. 대전리 천연기념물 301호 은행나무는 키 30.4m, 가슴둘레 8.8m의 수나무이다. 밑둥치에서 처음 두 가지가 자라 하나로 붙고 나중에 또 새로운 가지가 자라 또 하나로 되어 지금은 모두 하나의 큰 줄기로 탄생했다. 이렇게 다수의 수간(樹幹) 다발로 왕성하게 성장하면서 웅장한 수형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낙엽이 질 때 소리 없이 조용히 지면 이듬해에 풍년이 들고, 여러 차례 바람에 흩날려서 낙엽이 지면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식물 개체의 생장 환경이 양호하면 일정 기간 내에 낙엽이 지며, 생장 환경이 불량하면 각각의 수간별로 낙엽이 지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노거수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생활 속의 과학이다. 많은 사람이 노거수 나이가 얼마인지 묻는다. 아마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누군가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다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럴 때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수백 년을 살아오고 있는 신령 같은 분의 나이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얼버무려버린다. 물론 과학적으로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은 있지만, 경비도 많이 들고 고령의 노거수 몸을 상처 내는 일은 좋은 방법도 아니고 또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나이는 4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오래된 1300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1300년 전 이곳을 지나가던 한 도사가 원래 이곳에 있던 우물의 물을 마시려다가 빠져 죽었으며, 그 후 우물에서 이 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또 다른 비슷한 전설로, 이 마을을 지나가던 한 여인이 물을 마시려다가 빠져 죽었는데 주머니에 있던 은행의 싹이 터서 자랐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지만 때로는 은행이 달리는 수도 있다고 전해 온다. 마을 당산나무로 취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전설이 아닌 실제 사건이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설정해 보았다. 재미 삼아 전설의 나이가 맞는지 조사자의 나이가 맞는지 궁금하여 나름대로 나무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가슴높이 둘레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1982년엔 8.5m이었고 2005년 조사에서 8.65m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23년 동안 15cm 굵어졌다. 이는 일 년에 평균 6.5mm씩 굵어진 셈이다. 이러한 가슴높이 둘레의 증가를 고려한 대전리 은행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2005년에 1,330세가 된다. 이 수령은 전설로 전해지는 수령 1982년 당시 1308세이고, 2005년 1331세이다. 공교롭게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설의 이야기가 맞는지 조사자의 기록이 맞는지는 나무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전설의 나이가 맞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등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의흥 예씨(義興芮氏) 세거지인 이곳 청도 대전리는 ‘한밭’으로도 불리며, 골이 깊고 들이 넓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북 예천 부군수를 역임한 예경해 시인은 이곳 대전리 출신이다. 2019년 시집 ‘누고?’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경상도 사투리를 활용하여 서민들의 삶과 정서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표제작인 ‘누고?’는 성형수술 후 할아버지를 찾아간 손녀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간의 소통과 정체성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또한, 예경해 시인은 전통과 현대, 서정과 비밀, 사랑과 사투리, 고향과 도시, 선(禪)과 해학 사이의 역설적인 시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곳에 태어나서 살면서 천 년 묵은 은행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서정시를 창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우리의 삶에 문학과 예술 등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지구상 다양한 인류 문화 가운데 노거수 사랑은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전통문화가 아닐까 싶다. 필자의 시 ‘은행나무’ 오랜 세월 뿌리내린 너아득한 세월을 넘어 깊이 깃든 전설과 함께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구나.긴 세월을 품고 서서말없이 나를 반겨주는 너 바람에 실린 낙엽 소리에풍년을 속삭이는 나무 고단한 몸 기댈 때마다넌 조용히 힘을 주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20

‘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진 영적이고 신령한 땅

가을 하늘 아래 서있는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너른 벌판 아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을 내려다보고 선 마애여래삼존불, 고대왕국 신라 첫 번째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성모(聖母)의 설화, 성스러운 기운이 서렸다는 땅 서악(西岳)…. 이 모두는 선도산(仙桃山)이란 키워드와 연결되는 것들이다. 조용한 늦가을 오후. 한낮에 찾은 선도산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길게 엎드려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얼핏 보기엔 경주의 여느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른바 ‘서악’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역사학계가 주목한 곳이다. 민족사학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이기백(1924~2004)은 삼한일통(삼국통일) 이전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다는 지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74년의 일이다. “신라에는 통일전쟁 전에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오악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서쪽의 선도산, 남쪽의 남산(南山), 북쪽의 북악(北岳), 중앙의 부악(釜岳)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전쟁을 치른 뒤에는 오악도 국토의 사지(四至)에 있는 산들로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이때의 오악은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북쪽의 태백산(太白山), 중앙의 부악이다. 이는 각 방위에 따라 국토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그 지역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제압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고 한다.” ◆‘명당 중 명당’으로 여겨졌을 경주의 서악 앞서의 언급처럼 서악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선도산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세상이 오래 기억해주길 원한다. 민의가 반영되는 선거가 아닌 타고나는 혈통으로 왕위를 이어갔던 고대엔 이런 열망이 더 컸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나 어마어마한 규모로 축조된 중국 서안의 진시황릉은 그런 열망이 낳은 유적이 아닐까. 합리와 이성보다는 하늘의 뜻과 임금의 의지로 지배되던 고대엔 이른바 ‘명당(明堂) 중 명당’이 죽은 왕의 유택(幽宅) 자리로 선택됐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분명 서악을 명당이라 믿었을 터. 1964년 여름 사적 제142호로 지정된 경주 서악동 고분군(慶州 西岳洞 古墳群)은 통일신라시대 즈음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선도산 초입에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낸 무열왕릉의 뒤편 언덕에 자리한 네 개 봉분을 지칭하는 서악동 고분군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 고분들은 경주 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서악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상), 7세기 신라 불교 조각과 아미타신앙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논문 역시 서악과 선도산이 가진 지리적·역사적 위상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불상(마애여래삼존불)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해 서악 동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 같이 조성돼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 ◆마애여래삼존불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대부분이 알다시피 신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이었다. 법흥왕 이후 국교(國敎) 수준으로 귀하게 대접받았던 신라 불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불교신앙을 아미타신앙이라 한다. 그렇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뭘까? 불화와 번뇌가 없는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부처다. 앞서 말한 최미경의 논문엔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해 조성 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는 서술이 나온다. 여기에서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이유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논문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이러한 대규모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 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최미경을 포함한 적지 않은 사학자들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무열왕 김춘추, 또는 문무왕 김법민 재위 시절에 바위에 새겨졌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신라 사람들이 영험이 깃든 성스러운 땅이라 믿었던 서악, 조금 더 좁혀 말하자면 선도산은 그런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가 행해지기에 모자람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추정된다. 영적이고 신령한 땅, 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지기에 안성맞춤인 산, 신라를 태동시킨 여성의 신화….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 역시 이 지역이 가진 신비스러움에 관해 짤막하게 서술한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 불구내왕이라고도 하는 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현인(賢人)을 잉태해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후략)” ◆마애여래삼존불은 수나라 시대 양식 영향 받아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마애여래삼존불의 양식을 “본존은 고부조임에도 볼륨감이 없어 전체가 하나의 원통형 기둥처럼 보이며 세부 표현을 생략해 간결하다. 이런 간결함, 양감 없는 체구, 부드러운 조형은 북제불(北齊佛)과 유사하나 적절한 신체 비율과 당당한 체구는 수대(隋代·수나라 시대)의 양식”이라고 보고 있다. 더불어 “통견의 법의는 굵은 선을 한 줄 새기고 그 아래 얕은 선을 번갈아 넣는 새김을 반복해 조각의 단조로움을 피했다. 몸에 밀착된 얇은 옷주름이 대칭으로 내려오는 것은 북제 불상의 특징이지만 장대한 신체는 오히려 수대 불상에 가까운 것으로, 본존은 북제불을 원류로 하면서도 보다 진전된 수대 양식을 받고 있다”고 쓴다. 7세기 중반 무렵. 번창 일로에 있던 불교왕국 신라는 당시 최고의 석조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동원해 부처와 보살의 형상을 선도산 정상 부근에 새겼을 것이다. 그것들이 장구한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신라를 신라답게, 경주를 경주답게’ 보이게 하는 보물로 존재하고 있다.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19

다 쓴 물감 튜브에 십자가 새기며 시련을 견뎌내

오지호의 죽음 이후에 박수철 선생은 오지호의 둘째 아들인 화가 오승윤과 인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일요화가회를 만들어 지역 미술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가 의지하던 이들이 죽음을 맞고 사업이 실패하면서 큰 시련을 겪는다. 김도형(김) : 갈뫼화실을 운영하면서 일요화가회도 만드셨지요? 박수철(박) : 오지호 선생의 둘째 아들인 오승윤 선생이 포항에 가면 일요화가회를 만들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1979년에 일요화가회를 만들었는데, 10명 정도가 참여했습니다. 제1회 일요화가회 작품전 축사를 오지호 선생이 쓰셨지요. 오승윤(1939∼2006)은 1939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 8·15 광복 후 아버지(오지호)의 고향인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이사했다. 196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4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창설에 참여하여 1982년까지 교수를 지냈다. 198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00E9mie de la Grande Chaumi00E8re) 등에서 공부했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전업 화가의 길을 걸으며 한국 전통의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승윤의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미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오승윤’,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하신 후 오승윤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의 빈자리를 오승윤 선생이 채워주었지요. 그분께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오승윤 선생이 사기를 당하면서 그 괴로움으로 2006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로서는 기댈 언덕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지요. 그 충격과 상실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김 : 포항 출신 화가 중에는 장두건 선생이 유명한데 혹시 교류가 없었는지요? 박 : 1990년대 후반 장두건 선생이 동아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직후 선생의 본가가 있는 흥해 초곡에 집을 지을 때 형상회 동인이자 동양화가인 정대모와 함께 도와주었지요. 그 후로도 선생과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장두건(1918~2015)은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에서 태어나 흥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미술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 법과로 옮겨 졸업했다. 이때 법과에 학적을 두고 야간에는 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리며 프랑스 유학의 꿈을 품었다. 귀국 후 서울사대부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장두건은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하며 ‘르살롱(LeSalon)’전에 ‘내려다본 식탁’(1958)을 출품해 동상을 받았다. 귀국 후 세종대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 미술학과장, 성신여대 예술대학장, 동아대 예술대 초대학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미술단체인 목우회, 이형회 등을 결성했다. - ‘서울아트가이드’ 참조. 김 :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한 이듬해인 1983년에 결혼했습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돈이 안 되는 화실은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형은 국민은행 최연소 차장으로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형의 도움으로 1980년대 후반 중앙상가에서 신사복 대리점(코오롱 맨스타)을 열었지요. 하지만 대리점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형이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믿던 또 하나의 의지처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김 : 신사복 대리점은 잘되었습니까? 박 : 영업을 몰랐으니 잘될 리 없었고 본사에서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요. 그래도 후배들한테 밥 사주고 술 사줄 형편은 되었습니다. 그 뒤에 제일모직 브랜드(빈체레)로 바꿨다가 IMF 때 문을 닫았습니다. 김 : 후유증이 컸겠습니다. 박 : 암담했지요. IMF 후에 우동 장사, 꽃집 등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서 누나와 막냇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갈까 고민했어요. 마침 지인이 죽도파출소 맞은편의 건물 지하를 무상으로 내주어 ‘자유인’이라는 술집을 열었습니다. ‘자유인’을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많은 예술인이 찾아왔지요. 하지만 3년을 버티다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김 : 장사하면서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신사복 대리점을 하면서 중앙상가 상인회 총무를 맡았습니다. 중앙상가 한중간에 길이 있으니 길을 중심으로 상가를 살려보자고 하면서, 메타세쿼이아 같은 나무를 심자고 했지요. 하지만 의견이 수용되지 않더군요. 지금 중앙상가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김 : ‘자유인’이 문을 닫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집을 팔아 빚을 정리하니 2000만 원이 남더군요. 그 돈으로 어디를 가겠습니까. 또 한 번 앞이 캄캄해졌지요. 그때 지인이 흥해 양백리에 자신이 소유한 빈집이 있다며 거기서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그 집에 가보았어요. 그런데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던지 수풀이 우거져 출입구를 찾을 수 없었고 집 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5개월 정도 수리해 그 집에 들어갔지요. 모든 것을 잃고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겨우 얻게 되자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고, 그림의 주제에도 반영되었어요. 김 : 흥해 양백리에서는 얼마나 사셨습니까? 박 : 7년쯤 살았는데, 어느 날 집주인이 그 땅을 판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집에서 나가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였지요. 자존심을 접고 통사정을 했지만 주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내는 큰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김 :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갔습니까? 박 : 절망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새벽 기도를 열심히 다녔어요. 새벽은 하나님께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김 : 새벽 기도 후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박 :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더군요. 2009년에 미국에 있는 누나와 막냇동생이 4000만 원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흥해에 있는 해원빌라를 매입해 4개월 동안 수리한 후 입주했습니다. 김 : 교회는 언제부터 나갔습니까? 박 : 바로 위 누나가 태어나자마자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그때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나도 어머니를 따라 나갔지요. 어릴 때야 신앙이 무엇인지 알았겠습니까. 20대 후반에 신앙을 제대로 받아들였고, 50대 들어 힘든 일을 겪으며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김 :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요? 박 : 다 쓴 물감 튜브 안쪽을 긁어서 십자가를 새겼습니다. 그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십자가 연작이 만들어지더군요. 박수철 선생은 2023년 5월 흥해 성곡리에 있는 푸른마을교회에서 개인전 ‘The Cross 40’을 열었다. 전시를 본 한 관람객은 이중섭의 은지화가 떠오른다고 했다. 또한 수명을 다한 물감 튜브가 십자가로 다시 태어난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와 중첩되며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7

완공 1년 앞둔 포항∼영덕 고속도, 동해안 관광·교통 중심지로

포항~영덕 고속도로는 지난 2017년 9월, 영덕 3, 4, 5 공구별로 착공되면서 신호탄을 쐈다. 타 공사와 특이한 점은 공구별 시공사가 다른 점이다. 총 4개 시공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1공구(흥해읍 곡강리~청하면 신흥리)는 (주)한화, 2공구(신흥리~송라면 화정리)는 디엘이앤씨(주), 3공구(송라면 화진리~영덕 남정면 부흥리)는 대우건설, 마지막 4~5공구(부흥리~남정리~강구면 원직리)는 현대산업개발이 맡아 하고 있다. △ 차별화된 시책 도입 안팎으로 호평 공사 초기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 산 8-6 일원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토석혼축목책성곽’이 발견돼 진행에 차질이 발생했지만, 문화재청과 문화재 유적 보존방안을 2021년 5월 최종협의 하면서 탄력이 붙었고 현재 마지막 공사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도로공사 측은 “당초 2024년 말 계획됐던 개통이 내년 12월로 1년 정도 지연된 것은 여러 사정 변경이 발생, 연기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주요시설물로는 분기점 1개소(영덕)와 나들목 3개소(북영일만, 북포항, 남영덕)를 비롯해 휴게소 2개소(포항, 영덕)가 건설된다. 특히 포항~영덕 간은 산악지역을 통과하는 것으로 설계되면서 상대적으로 구조물 비율이 높아 시공에 난관이 많았다. 실제 이 구간은 교량이 37개소에 6.43㎞(21%), 터널이 14개소에 9.89㎞(31%)에 달하고 있다. 현재 교량과 터널 공사 큰 줄기는 거의 마무리됐고, 터널 내 포장과 교량 상부 공사가 차질 없이 진행 중에 있다. 2025년에 본선 토공부 및 교면포장, 부대시설 설치 등을 추진해 공사를 마무리 할 예정이다, 시공 과정에서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지만 이 구간은 차별화된 시책 도입 등으로 안팎으로 호평을 받았다. 사업단이 추진한 폴더형 교량 점검시설 출입문 개발과 진동저감 터널발파 공법 등은 한국도로공사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안전관리 부분에서도 순조롭게 대처해 눈길을 모았다. 한국도로공사 측도 이 사업에 거는 기대가 크다. 박재범 포항영덕건설사업단장은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동해안을 잇는 남북축이 형성돼 교통망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포항∼영덕 고속도로는 국가간선도로망 중 남북 10축 동해선 고속도로에 포함돼 있다. 전체 구간 433㎞중 222.7㎞는 이미 개통됐으며 포항~영덕 간 30.9㎞가 내년 준공될 경우 나머지 179.4㎞는 장래 단계별로 사업이 추진된다. △ 포항시 접근성 강화 위해 도로정비 내년 말 개통에 맞춰 포항과 영덕은 지역발전 프로젝트 수립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포항시는 고속도로 접근성 강화를 위해 시가지내 도로 정비와 신설에 들어갔다. 시가지내 도로망 재정비를 통한 효율적인 도로운영과 교통량 분산으로 시민 불편을 사전에 해소하기 위해서다. 먼저 북구 한동대 인근에 설치되는 북영일만 IC 접근성 강화 및 시내구간 교통량 분산을 위해 주 출입도로인 국도대체 우회도로와 도심과 주거 밀집 지역 연결도로를 확충한다. 득량동, 죽도동에서 우회도로로 연결되는 도시계획도인 중로 1-55호선(양학체육공원~연화 IC)은 총사업비 328억원 연장 L=1.76㎞를 시행중이며 토지보상이 마무리돼 수용절차가 끝나면 내년 하반기에 착공된다. 우현동, 학산동에서 우회도로로 연결되는 도시계획도로 대로 3-27호선(한신공영~흥해읍 이인리)도 총사업비 434억원 연장 L=2.74㎞로 현재 공사 중이며 내년 12월에 준공할 예정이다. 또한 구도심과 용흥동 접근성 향상을 위해 연화재에서 연화IC를 연결하는 도시계획도로 대로 2-47호선을 현재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할 계획이며, 국도 28호선과 초곡지구, 성곡지구와 우회도로를 연결하기 위해 리도 211호선은 총사업비 25억원으로 연장 L=1.2㎞를 개설할 예정이다. 북구 청하면 필화리에 설치되는 북포항 IC는 진출입도로가 2차로로 협소해 고속도로 개통 전 7번국도 청하4거리에서 IC간 도로를 4차로로 확장한다. 이 사업은 경북도에서 시행하는 국지도 20호선 상원~청하 간 도로 확장공사에 포함되어 있다. 모두가 포항∼영덕 고속도로 개통에 맞춰 계획된 지역발전, 주민편의 등을 향한 맞춤형 사업들이다. 시 관계자는 “그동안 포항은 북쪽 도로가 사실상 7번국도 하나뿐이어서 도시가 뻗어나가는데 한계가 있었다”면서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북 지역 개발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영덕이 동해안권 교통중심지 될 것 영덕은 그동안 교통오지라고 불려왔다. 인구와 물자가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상황에서 수도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도로환경 또한 매우 불리한 입지 조건이었다. 영덕군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개통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실제 2016년 687만여명 이었던 영덕 관광객 수는 2017년 984만여명으로 급증하였고 2018년 1000만명 대에 들어서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해양 휴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고속도로 하나가 한 지역의 미래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일으킨 대표적 케이스로 꼽힌다. 하지만, 교통인프라에 있어서 아직 다각화와 효율성이 필요하다. 다행히 동해선 포항~삼척 동해선 철도는 다음달 개통 예정이고 포항~영덕 고속도로 개통은 이제 1년을 남겨두고 있다. 포항~영덕 고속로도가 개통되면 7번 국도의 정체 해소와 함께 주행거리는 기존 37㎞에서 31㎞로 줄어든다. 주행시간도 지금은 40∼50여분 걸리지만 20분 이내면 주파가 가능하게 된다. 이로 인한 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포항~영덕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대구~포항 고속도로와 부산~포항 고속도로 등의 간선도로망이 연결되면서 주변 메가시티와의 접근성이 비약적으로 개선되고, 상주~영덕 고속도로와도 격자형 도로망을 구축할 수 있게 돼 영덕의 관광 등 관련 산업이 날개를 달 수 있을 전망이다. 군에서도 지역 성장 동력이 될 동해선 철도와 고속도로 개통 효과를 극대화하기위해 대중교통 강화 등 대비에 나서고 있다. 국지도 20호선 구간의 강구대교 건설 등 주요 관광지를 연결하는 도로 개선과 상위 교통수단과의 연계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버스 증차와 노선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김광열 군수는 “2025년 말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이제 영덕은 더 이상 교통오지가 아니라 동해안 해양관광의 중심지이자 동해안권 교통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면서 관광, 에너지, 해양 등의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초광역 교통망 구축에도 군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울진도 포항~영덕 고속도로 개통에 거는 기대가 적잖다. 영덕까지 오는 교통 접근 개선이 이뤄지면 풍선효과로 울진 후포 등이 후광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울진군 역시 이런 상황에 맞춰 담대한 후포발전계획을 구상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석윤기자 lsy72km@kbmaeil.com

2024-11-17

인구절벽 속 ‘희망의 빛’ 품은 청도, 살기 좋은 지방시대 만든다

청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며 청동기시대 유물과 유적이 지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원(水源)이 풍부해 한때는 인구가 10만 명에 육박하고 각기 특색이 있는 5일 장으로 상권이 활성화됐던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하지만, 산업경제의 발달과 도시 및 수도권 인구 집중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2021년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새로운 성장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북도의 인구감소지역은 봉화와 안동, 영덕, 영양 등 15곳이지만 청도는 지난 1분기 행정안전부의 인구감소지역 생활인구 조사에서 전국 7위, 경북도 내 1위라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하며 지방소멸과 인구감소의 위기 속에서 희망의 빛, 정주 인구의 확산 가능성을 보았다. 화랑도와 새마을운동 발상지라는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위해 꿈틀거리는 청도의 변화 물결을 살펴본다. □ 살아 있는 정신문화 청도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고 인심이 좋은 삼청(三淸)의 고장이라는 천혜의 자연뿐만 아니라 화랑정신과 조국 현대화를 앞당긴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는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청도를 화랑정신의 발상지로 부르는 이유는 사군이충(事君以忠)과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등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이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서기 600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작갑사(현 운문사)와 가슬갑사에 머물고 있을 때 화랑인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 세속오계를 지침으로 받아 실천함으로써 세속오계가 화랑의 행동 지침으로 보편화하고 삼국통일의 바탕이 되었다. 또 청도읍 신도리는 1969년 8월 경남지역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고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철로 주변 마을의 슬레이트 지붕을 보고 기차를 멈추게 하고 새마을운동에 착안하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한 최초의 마을로 대한민국 전역을 새마을운동으로 점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 청도행복헌장 재정과 자생 돌봄 공동체 발굴·육성 지자체의 정주 인구는 특수성이 있겠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가 어울리며 공경과 사랑, 배려가 어우러지는 사회로 구성되는 것이 마땅하다. 청소년 인구의 비중이 약한 청도는 이를 해결하고자 지난 2023년 1월 군민의 행복과 공동체를 위한 ‘청도행복헌장’을 제정하고 지방소멸 대응 기금을 투입하고 있다. 자생 돌봄 조직 활성화와 공동체 정신 함양을 강조하는 행복헌장은 서로 배려하고 웃어른을 공경하기 등 10가지 계명으로 삶의 발전을 위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다. 2022년부터 확보하기 시작한 지방소멸 대응 기금의 활용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자생 돌봄 조직의 활성화는 마을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청도군은 올해 초, 지방소멸 대응 기금을 재원으로 시작된 자생 돌봄 공동체를 통해 지역 아동들의 돌봄 공백을 메우고, 부모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자 기획된 ‘행복 울(ALL)타리 프로젝트’는 △마을 탐험(마을 지도 만들기) △플로킹(청도천 쓰레기 담기) △소셜다이닝, 부모의 식탁 △두부 만드는 아이들 △마을회관 어르신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등 특색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고령화된 농촌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세대 간 소통을 활성화로 단순한 돌봄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회복과 지속 발전이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생 돌봄 공동체를 통해 저출생 문제 해결과 지속 가능한 마을 공동체 구축, 마을 돌봄 센터 확충, 돌봄 전문가 양성, 돌봄 네트워크 구축 등 적극적인 행·재정적 지원으로 저출생 위기를 극복해 가고 있다. 자생 돌봄 공동체의 평균 자녀의 수가 2명 이상으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 □ 지방소멸대응기금의 지속적인 확보 2022년부터 2031년까지 10년간 연간 1조 원 규모로 지원되는 지방소멸대응기금은 기초자치단체에 75%가 배분된다. 자치단체가 여건에 맞는 투자계획을 자율적으로 수립하고 일 잘하는 곳이 더 많이 배분받을 수 있다. 청도군은 지금까지 470억 원의 기금을 확보했다. 9개 사업에 기금을 투입해 정주 여건 개선과 체류형 생활인구 유입 증가를 위한 환경조성 구축에 힘쓰고 있다. 특히, 지난달 16일에는 2025년 기금을 확보하고자 김하수 청도군수가 직접 사업 계획(PPT)을 발표하고 질의·응답에 나서는 등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6일 발표된 2025년도 인구소멸대응기금 배분에서 160억 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재원으로 ‘작고 강한 학교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교육시설 개선, 특성화 영어 프로그램 운영, 교원연수비 지원 등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 3대 비전으로 변화 주도 청도군의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변화에는 민선 8기 군정을 이끌어 가는 김하수 군수가 강조하는 ‘평생학습 행복 도시와 문화·예술·관광의 허브 도시, 농업대전환’이라는 3대 비전이 한몫하고 있다. 평생학습 행복 도시는 생애 전 주기에 필요한 평생학습을 제공하는 것으로 단편적인 지식을 제공에 그치지 않고 전문성으로 지역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국 최초로 대구한의대에 ‘청도인적자원개발학과’를 개설해 지역의 인재를 맞춤형 교육으로 미래의 청도를 혁신할 자원으로 활용하고 평생교육을 청도 군정이 나아갈 기조로 정립했다. 문화와 관광, 예술이 어우러진 지역의 내실을 다지고 있다. 역사유적인 청도읍성, 운문사,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석빙고, 레일바이크 등의 관광자원을 즐기고자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자연드림파크와 예술인 창작 공간 등의 조성, 적극적으로 유치에 나선 대규모 위락단지와 종합레포츠단지는 청도를 정주를 꿈꾸는 고장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농업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변화시킬 농업대전환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과학·기술 영농으로 살기 좋고 지속 가능한 농촌을 꿈꿀 수 있다. 청도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말처럼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이라는 위기를 자생 돌봄 공동체를 통한 저출생 극복과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시대정신인 ‘평생교육’이란 성장의 사다리를 놓아 희망을 숲을 조성하고 있다. 김하수 청도군수는 “청도는 청도군보건소에 소아청소년과를 개설해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고 인구정책 지원 조로 재정 등 지역민, 특히 유입되는 젊은 세대를 위한 정책마련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젊은 층의 유입은 지역의 미래와 연결된다는 철학으로 이미 정주해 터전을 일군 군민들, 새로운 시도를 통해 청도로 이주하는 군민 모두를 아우를 군정이 민선 8기의 최대 목표로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4-11-14

AI 열풍에 빅테크 기업 전력 확보전… 새로운 성장 기회 온다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은 이제 단순한 에너지 공급 수단을 넘어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자, 국가 안보와 지속 가능한 성장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특히 최근 글로벌 주요 반도체 및 빅테크 기업들이 원전 지역으로 이전하고 있음은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 센터 운영에 막대한 전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적재적소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멸 위기에 처했던 지역들이 원전 사업을 기반으로 고급 인력과 관련 기업들이 모여 성장하는 사례 또한 증가 추세다. 당연 경북에도 기회가 오고 있다. 이런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 원자력 산업의 중심지인 경주에서 ‘2024 경북 원자력포럼’이 마련됐다. 13일 라한셀렉트 경주 베가홀에서 열린 이번 포럼에서는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원자력산업과 관련된 화두들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다. 이인선 국회의원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남태석 교수,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사업본부장, 임승열 KHNP 처장, 김한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단장이 주제발표를 진행했다. 이인선 국회의원이 ‘지역발전과 원자력,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고준위 방폐장 건설, 현 세대가 책임져야” 기조강연 이인선 국회의원 국가와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원자력이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원자력은 온실가스 감축과 안정적 전력 공급에 기여한다. 국가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핵심 자원이기도 하다. 원자력 발전은 전기요금 안정화에도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국민 에너지 비용 절감에 효과가 있다. 나는 경북도경제부지사로 4여년 재직하면서 경북원자력을 앞장서 이끌었다고 자부한다. 경주는 중저준위처분시설 유치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유지해 가고 있다. 방폐기금을 통한 특별지원금으로 지역 인프라를 개선하고 교육, 의료 등 주민 삶의 질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경주는 앞으로도 원자력산업의 핵심이자 중심지역으로 그 자리를 확고히 해 나갈 것임을 확신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1978년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 가동이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수십 년간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시설 확보 실패는 ‘화장실 없는 아파트’와 같은 상황이다. 아파트에 화장실이 없다고 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현 세대가 원자력 혜택을 누리면서 폐기물 처리 부담은 미래 세대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현 세대의 책임으로 해결해야 하며, 사용 후 핵연료 관리 또한 시급하다. 실제 사용 후 핵연료 임시저장 시설은 현재 포화상태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놔 둘 곳도 없다. 이래서는 안된다. 특히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반출이 지연되면 안전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 경우 국민 부담이자 사회 갈등 요소로 커질 것이다. 이제 이를 해결해야 한다. 그 방법과 열쇠는 고준위방폐물관리특별법 제정이다. 고준위 방폐장 확보의 지연은 국제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원자력산업이 기지개를 켠 부분은 정말 다행이다. 향후 에너지 시책은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를 믹스해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K-택소노미, 즉 원자력이 RE100에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 원전산업이 도약하고 글로벌 경제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얼마 전 원전 생태계 복원을 위해 신한울 3·4호기가 착공됐고 현재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 중에 있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글로벌 원전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한 것들이다. 원자력의 유연성과 안전성을 높이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 기술은 우리가 앞서나가고 있다. 경주나 대구 군위 중에서 최적 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원자력 산업은 앞으로도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하며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지속적인 소통과 혁신을 통해 지역 발전과 원자력 산업의 상생을 추구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경북원자력 산업이 미래 국가 경쟁력의 한 축으로 더욱 우뚝 자리 잡길 소망한다. 그 길에 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주낙영 경주시장 “원자력 전주기 관할 첨단과학 산업도시로” 주낙영 경주시장 환영사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가을, ‘Miracle Again, 원자력’이라는 주제로 2024 경북 원자력 포럼을 개최하게 됨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 현재 원자력은 저탄소 에너지원으로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이자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시는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원자력환경공단, 문무대왕과학 연구소, 중수로해체기술원, 한국원자력연구원 등 공공기관 및 연구기관이 밀집된 원자력 산업의 중심지이다. 특히 SMR(소형모듈원자로)은 일반 원전 대비 매우 높은 안전성과 낮은 건설비, 다양한 활용성을 가지고 있어, ‘2050 탄소중립’의 해결사이자 차세대 원전 ‘블루칩’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동안 대형원전을 통해 축적된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우수한 원자력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SMR로 전환되는 세계적 추세에서 경주시는 지난해 3월 ‘SMR 국가산업단지’를 성공적으로 유치했다. 또한 혁신원자력 RD 거점기관인 문무대왕과 학연구소는 2025년 준공을 앞두고 있다. 연구-발전-산업화-해체 등 원자력의 전주기를 관할하는 첨단과학 산업도시, 미래형 청정에너지 친화 도시 경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 이번 포럼이 원자력산업과 경주시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동협 경주시의회 의장 “국가 경제·에너지 안보 중심지로 자리매김” 이동협 경주시의회 의장 축사 원자력 에너지는 탄소 중립을 달성하고,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경북과 경주는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의 중심지로서, 국가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번 포럼을 통해 최신 기술 동향을 공유하고, 원자력 산업이 한층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시민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원자력 에너지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함께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남태석 중부대학교 항공서비스학과 교수 “APEC 경주 성공적 개최 위해 시민 역할 중요” 주제발표 남태석 중부대학교 항공서비스학과 교수 2015년 필리핀 마닐라 APEC 정상회의에서 2025년 개최국으로 대한민국이 결정됐다. 2023년 3월 APEC 경주유치 범시민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적극적인 유치전을 벌여 2024년 6월 27일에 2025 APEC 개최지로 경주가 최정 선정됐다. 1989년 출범한 12개국의 각료회의로 출범한 APEC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21개 주요 국가가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APEC은 전 세계 국내 총생산의 62%, 교역량 5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 지역·경제 협력체이며 우리나라는 APEC 창설의 주도국 중 하나이다. 정상회의가 열리면 보통 미국·중국·일본 등 회원국 정상과 고위 관료,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 등 6000여 명과 국내 경제인·행사관계자 등 1만7000여 명을 포함한 총 2만3000여 명이 직접적으로 경주에 모일 것으로 예상된다. 2025 경주 APEC 때는 정상회의 2박 3일, 장관회의와 각료회의는 2005 부산 APEC때와 상황이 상이할 수 있지만 5박 6일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성공적 정상회의를 위해서는 시민과 시민단체의 역할과 참여가 절실하다. 단계별 실천방안 로드맵을 완성해 시민과 시민단체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행정적·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APEC 개최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닌 미래 100년의 지속가능한 경주관광의 이미지 안착을 위한 프로그램 제시가 필요하다. 2025 경주 APEC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는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주시 범시민단체 협의회 발족 △경주시 분과별 자원봉사단 발족 △경주시 APEC 경주 시민대학 개설 △APEC 경주 민관산학협의회 발족 △경주시 APEC 범시민 및 시민단체 결의대회 필요 △단계별 로드맵, 실천방안 수립해 시민단체에게 공유 △정부·광역 및 기초단체·시민단체·시민 간 정보 공유 △경주시민이 홍보대사, 자원봉사자, 안전지킴이로서 참여와 역할이 절실하다.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사업본부장 “방폐물 저장시설 한계… 부지선정 등 절차 법제화 필요” 주제발표 이재학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사업본부장 2024년 6월말 기준 국내 원전내 저장시설에 보관된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는 53만6598다발이며 원전 부지내 저장시설에서 보관 중이다. 작년 2월 발표된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자료에 따르면 원전내 저장시설이 부족해 2030년 한빛원전, 2031년 한울원전, 2032년 고리원전 순으로 포화가 예상된다. 원전을 지속적·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조속히 고준위방폐장을 확보하거나 원전부지내에 저장시설을 확충해야 한다. 1970년대부터 32개 원전 운영국 중 23개 국가에서 원전부지내 또는 부지외부에 건식저장시설을 건설해 안전하게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는 1988년 7월, 제220차 원자력위원회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안으로 원전부지외에 중간저장시설 확보를 결정한 후 수 십 년간 부지선정을 추진했으나 주민 반대로 실패했다. 2004년 12월, 제253차 원자력위원회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침은 국민적 공감대 하에서 추진하기로 결정한 후, 박근혜정부와 문재인정부에서 2차례 공론화를 거쳐 제10차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고준위방폐물 직접처분을 원칙으로 하는 제2차 고준위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제2차 관리 기본계획에는 부지 착수부터 처분시설을 운영하는 37년 간의 고준위방폐물 관리로드맵이 포함됐다. 특별법 제정 필요성은 원전확대 또는 탈원전 등의 원전정책과 무관하게 현재 발생한 고준위방폐물의 안전한 관리, 2차례의 공론화에서 국민과 원전지역주민들이 고준위방폐장 부지선정절차와 원전내 건식저장시설의 한시적 운영에 대한 법제화 요구, 원전 강국으로서 우리나라의 국제 위상 강화 등이다. 주요 내용은 고준위방폐물 관리위원회 설치, 부지선정과정에 지역의 결정권 및 국회 보고절차, 고준위방폐장 운영시점, 원전부지내 건식저장시설 인허가 과정에 주민의견수렴 및 지역지원절차 반영 등이다. “세계 원전 동향 파악, K-원전 글로벌 시장 확대해야” 주제발표 임승열 KHNP 처장 2024년 10월 현재, 세계 원전은 가동 원전 415기, 영구정지 원전 211기, 신규원전 63기가 총 16개국에서 건설 중에 있다. 글로벌 에너지시장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신규원전 건설 감소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따른 탈탄소 에너지정책,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대두 및 AI사용에 따른 에너지 수요 증가로 2022년 변곡점을 맞이했다.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들은 강력한 친원전 정책을 발표했다. 글로벌 얼라이언스도 원전확대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은 2022년 국정과제를 통해 2030년까지 10기 수출을 목표로 함을 밝혔다. 이를 위해 발족한 원전수출전략추진위원회를 통해 하나된 팀코리아의 힘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수원은 고리 1호기 건설 이후 약 50년간 국내외 원전건설 및 운영을 통해 제반 과정의 최적화를 이뤘고, 원전산업 전분야에 완벽한 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바라카 원전을 ‘On time Within Budget’으로 건설함으로써 한국의 기술과 능력을 증명했다. 한수원은 현재 진행 중인 신규원전 건설산업, OM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실적을 갖춘 신뢰받는 기업이 될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글로벌 원전시장에서 점유율을 높혀갈 계획이다. 김한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단장 “탄소중립 위한 중요 수단 ‘SMR’… 혁신기술개발 총력” 주제발표 김한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단장 소형모듈원자로는 원자로 모듈을 공장에서 제작할 수 있는 정도의 원자로로 최근 세계 에너지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각광받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90여 종의 SMR이 개발 중에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를 획득한 SMART 원전을 비롯해 5종의 SMR을 개발했거나 개발 중이다. 이 중 현재 정부의 국가전략과제로 추진중인 혁신형 SMR은 2021년부터 기획과 4차례의 국회 포럼을 거쳐 2023년 사업을 착수해 2028년 표준설계인가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중이다. SMR이 에너지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주목받는 가장 중요한 탄소중립의 주요 수단이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 인류가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2030년대부터 연간 약 130조원 이상의 SMR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선진국들은 예측하고 있다. 현재, 세계 각국은 전력 뿐만 아니라, 수송 분야, 산업분야에서의 탄소배출을 SMR로 대체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 및 사업을 시도중이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SMR 선도국들은 최소 SMR을 성공적으로 완공해 2030년대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세계 SMR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할 경쟁을 벌이고 있고, 우리나라도 2035년까지 최초 혁신형 SMR 원전 준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리=황성호·이부용기자

2024-11-13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스승 오지호

박수철 선생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포항에 살던 박 선생이 어떻게 광주에 있는 오지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지호는 어떤 가르침을 전했을까. 그 특별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도형(김) : 현대미술학원이 지역 청년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고 하셨는데, 동인 활동은 없었습니까? 박수철(박) : 1976년으로 기억하는데, 문학과 미술을 하는 청년들이 모여 형상회라는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김 : 동인 활동을 하며 각별히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형상회 동인 중에 김원택이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이 천박한 땅에서』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런데 시대 분위기 때문에 시집 제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요. 한번은 형상회 동인들이 김원택의 시집을 들고 한흑구 선생 댁에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사모님께서 “제목을 왜 하필 천박한 땅으로 했냐”고 하자 한흑구 선생이 “땅이 천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천박해서 그랬겠지”라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더군요. 김 : 선생님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인 오지호(1905∼1982) 선생을 사사하셨는데, 어떻게 된 인연입니까? 박 : 1977년에 생계를 위해 부산 온천장에 있는 이화당표구사에서 일했습니다. 부산 석마미술학원의 윤석균 원장이 포항에 왔을 때 소개받았지요. 이화당표구사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던 오재봉(1908∼1991)의 조카가 운영했어요. 오재봉은 오지호와 친분이 있었고, 오재봉의 조카는 광주에 있는 오지호 선생을 만나러 간다고 자랑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오지호 선생을 만나야겠다고 작심하고 오지호 선생에게 10장 가까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김 : 장문의 편지에 뭐라고 쓰셨나요? 박 :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하지 못한 처지인데 어떻게 하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지, 또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김 : 답신이 왔나요? 박 : 답신과 함께 선생님의 저서인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보내주셔서 뛸 듯이 기뻤습니다. 박수철 선생이 간직하고 있는 오지호 선생의 답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서양화는 재료와 도구가 많고 커서 그림을 그리자면 일정한 면적의 장소가 필요한 것이요. (……) 서양화는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요. 그리고 서양화 재료는 고가이고 많은 분량이 필요해서 상당한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요. 이러한 관계로 서양화 공부는 제자를 스승의 집에 두는 법이 없는 것이요. 그리고 공부를 하자면 학교나 연구소에서 하게 되어 있소. 그리고 이 밖의 방법은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작품을 가끔 스승에게 가지고 가서 평(評)과 지도를 받는 것이요. 귀군(貴君)도 이런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귀군이 부산이나 대구로 나와서 일정한 직업을 갖고 생활비를 얻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그곳 화가들에게 지도를 받도록 하는 게 좋을 줄 아오. - 1978년 11월 30일 김 :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이 무명의 청년 화가에게 이렇게 정성 들여 답신을 보냈다니 뜻밖입니다. 박 : 오지호 선생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지요. 선생은 답신 말미에 추신으로 한자 1800자를 완전히 습득하기를 부탁한다고도 하셨어요. 김 : 무슨 이유로 그런 부탁을 하신 걸까요? 박 : 한자를 알아야 우리 전통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글도 정확하고 품위 있게 쓸 수 있다는 게 선생의 소신이었습니다. 미술 이론에 해박했던 오지호는 한자 교육 부활 등 사회 현안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1970년 정부가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거하자 작품 활동을 뒤로 하고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글을 써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1975년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킨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밖에 문화유산 보호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던 앞선 지식인이었다. - 「오지호」,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박 : 『계간 미술세계』에서 오지호 선생의 작품을 보자마자 빠져들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즐겨 쓰는 청보라색(울트라마린 블루)을 선생도 즐겨 썼습니다. 나는 하늘과 바다, 설경을 그릴 때 이 색을 주로 씁니다. 둘째, 고추장을 이겨놓은 듯한 끈적임과 어우러짐의 질감(마티에르, mati00E8re)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김 : 그 후로도 오지호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는지요? 박 : 그랬지요. 선생한테 받은 편지가 꽤 되는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을 뵙기도 했겠습니다. 박 : 선생한테 첫 번째 편지를 받고 1년 후인 1978년에 선생이 계신 광주로 찾아갔습니다. 그 후로 1년에 두어 번씩 광주로 갔습니다. 김 : 당시 광주 가는 길이 멀었을 텐데요. 박 : 기차로 광주까지 여덟 시간쯤 걸렸어요. 포항역에서 출발해 동대구와 대전을 거쳐 광주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쌀 포대에 작품 두세 점을 담아서 기차에 올랐지요. 김 : 오지호 선생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군요. 박 : 선생을 뵈러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걸 스무 가지쯤 종이에 적었어요. 그런데 막상 선생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면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셨지요. 선생은 미술에 관한 얘기보다 주로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 등 윤리에 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의 대표작 중 「항구」가 있지요. 박 : 선생은 항구를 즐겨 그렸는데, 지금도 많은 미술 애호가의 사랑을 받습니다. “배는 자유롭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선생이 1981년 울릉도에 가기 전에 동빈내항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진 촬영을 많이 하셨지요. 선생이 이듬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동빈내항 그림을 많이 그렸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김 :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박 : 선생은 택시 타는 걸 싫어했습니다. 택시는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울릉도에 다녀온 후 광주에서 택시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이듬해 숨을 거두었습니다. 김 : 이화당표구사에서 계속 일하셨나요? 박 : 부산에서 1년쯤 있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큰숲교회(옛 성남교회) 인근에 갈뫼화실을 열었습니다. 그때가 1978년이었어요. ‘갈뫼’는 수도산을 뜻합니다. 수도산은 포항 원도심의 어머니 같은 산으로, 내게는 정신의 의지처입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3

주렁주렁 은행 열매·땅과 맞닿은 가지들… 금빛 물들다

청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 세속오계를 창시한 원광법사가 주지로 있은 고찰 호거산 운문사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 스님이 역사 자료를 수집한 비슬산 대견사가 있는 고장이다. 고구려는 평양, 백제는 부여,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삼국이 삼분하여 적대하면서 서로 국경 침략 등 백성은 편안할 날이 없었다. 분열된 한민족을 하나로 만든 신라 삼국통일 군사 훈련 중심이 된 곳도 이곳이며, 우리의 역사를 오천 년으로 끌어올린 삼국유사의 역사 자료를 수집한 장소도 이곳이다.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며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를 기술하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인 청도는 산자수명하고 인재 또한 많아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고장이다. 역사적 인물로 탁영 김일손(1464~1498)은 조선 중기 사관으로 무오사화에 희생된 청도인이다. 그는 절효 김극일의 손자로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486년 성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서원리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등과 교류하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가 이조정랑을 지냈다.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돕기도 했다. 춘추관에 근무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1498년 반역죄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회왕 의제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나라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세조가 권력을 찬탈한 부당성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권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그의 굽히지 않는 올곧은 성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 젊은 시절에 운계정사에 심어 놓은 은행나무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싶다. 선생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우람하게 자라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탁영(濯纓)이란 호는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로 중국의 고대 서적인 초사(楚辭) 굴원의 글에 나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물이 맑을 때 갓끈을 씻고, 탁할 때 발을 씻겠다는 비유로 세상의 혼탁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다. 비록 현실이 혼탁하더라도 자신의 고결함과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손수 서원 내 은행나무를 심고 그를 닮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계서원이 있어 마을을 서원리라는 이름의 지명을 붙였고, 자계서원을 상징하는 것은 나이 500살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 노거수이다. 청도군청 김윤길 행정안전복지국장의 도움으로 굳게 닫힌 서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은행나무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키 15m, 가슴 높이 둘레 4.4m 두 그루가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 그루는 5가지 줄기가 하나로 뭉쳐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암그루로 은행 열매가 나뭇가지에 너무 많이 열려서 가지가 땅에 맞닿아 있었다. 1983년 7월 2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지만, 나무의 수령이나 그 크기 등 역사 문화적 가치로 보아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몇 년 전 11월 5일 자계서원을 찾았을 때는 은행나무가 가을 하늘과 서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리의 발과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란 이름을 가진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하늘에서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앉은 노란 압각수 잎으로 덮었다. 자계서원의 은행나무 노란 단풍잎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그해의 기후와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청도의 진산인 아름다운 남산을 바라보면서 아담한 동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비슬산에서 발원한 청도천이 흐르고 있는 서원리는 유서 깊은 자계서원을 품고 또한 자계서원은 은행나무를 품고 평화롭게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에서는 은행나무가 인문학적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속과 과의 나무이다. 화석식물이라 할 만큼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나무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1200년이 지났지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서원에 다니는 유생들에게 은행나무는 지식과 학문의 지속성, 변치 않는 가치를 상징하면서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으로 지속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교육 공간이라는 점에서 은행나무는 이러한 교육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천천히 자라며 장수하는 나무이다. 그러면서도 건강하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유생들에게 이와 같이 지혜와 인내, 꾸준한 끈기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이는 선비 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은행 열매는 약재로 쓰이며, 나무의 모습 또한 우람하면서도 단정하여 선비의 지조와 품격을 떠오르게 한다. 서원에서 수양하고 학문을 닦는 선비들은 이러한 은행나무의 상징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원의 은행나무는 단순히 조경의 일부가 아닌 유교적 가치와 관련된 상징적, 정신적 요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유교적 사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당에 은행나무는 이러한 사상을 잘 반영하는 나무이다. 자연에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원리를 찾는 데 의미를 두었고 은행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은 자연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서원은 학문을 탐구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공간이기도 하므로, 은행나무는 그 상징적 의미를 강화한다. 서원 내의 은행나무는 학문적 가치, 정신적 수양,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조선시대 철학의 핵심을 상징하고 있다. 탁영 김일손 선생처럼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리 마음먹으면서 노란 은행잎처럼 내 마음도 곱게 물들어 간다. 자계서원은 처음에는 은행나무를 담장 안으로 품었지만, 지금은 은행나무가 자계서원을 품고 탁영 김일손 선생의 올곧은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은행나무를 닮고자 손수 심은 선생의 나무 사랑은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청도 서원리 자계서원(紫溪書院)은…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는 1400년경 김극일(金克一)이 입향하여 정착한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선조 1578년에 사당의 중수와 함께 학사 곳간 등의 새로이 세워져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자계서원이 되었다. 김일손이 형벌을 당할 때 그의 고향에 있는 냇물이 별안간 붉게 물들어 사흘 동안 물 색깔이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그런 까닭에 붉은 시내라는 뜻의 자계(紫溪)라 불리게 되었다. 1615년에 절효 김극일, 삼족당 김대유를 병향하고, 현종 1661에는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고종 1871에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김용희(탁영 14세손)의 사재로 복원되었다. 197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솟을삼문인 유직문(惟直門), 서원에서의 여러 행사를 하거나 학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인 영귀루(詠歸樓), 강당인 보인당(輔仁堂),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사당인 존덕사(尊德祠), 제사 준비를 하는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다. 1482년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절효김선생효문비명’과 대제학 조정이 지은 ‘효자승사랑김극일정려본김해’ 두 기의 비석이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13

선도산이 간직한 최고 유물은 ‘마애여래삼존불’ 아닐까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무너지고, 파괴되고, 시간에 깎여나간 것들이 멀쩡하고, 번듯하고, 번쩍거리는 것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로 폐허와 상실을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20년 전쯤이다. 인도를 여행했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 낡은 버스와 연착을 거듭하는 기차를 갈아타며 인도 남부 내륙 깊숙이 자리한 도시 ‘함피(Hampi)’를 찾아갔다. 아주 오래 전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수도였던 함피는 힌두왕국과 이슬람제국이 번갈아가며 지배한 지역. 예나 지금이나 서로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자주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함피도 다르지 않았다. 힌두왕국이 번성할 때 이슬람 세력은 웅크렸다. 힌두교도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을 탄압하고, 그들의 종교가 발붙일 수 없도록 억눌렀다. 이슬람 세력은 ‘우리가 권력을 얻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힌두교도의 통치가 끝났을 때 등장한 새로운 지배자는 이슬람제국이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힌두교와 힌두교도에 대한 가혹한 핍박이 시작됐다. 힌두교를 신봉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고, 힌두교가 섬기는 갖가지 신(神)의 형상은 모조리 목이 날아갔다. 이슬람교도의 보복이었다. 파괴된 함피의 신전과 조형물은 지금까지도 온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도시 곳곳에 무너진 유적들이 보인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함피를 ‘아름다운 폐허’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서진 유적과 유물은 부서진 유적과 유물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터. 그래서다. 1986년 유네스코는 폐허의 함피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세월과 세파도 온전히 파괴하지 못한 선도산의 불상들 올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취재를 위해 여러 차례 경주 선도산을 찾았다. 선도산이 간직한 최고의 유물은 누가 뭐래도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닐까? 처음으로 그 불상을 봤을 때 20년 전 인도 함피에서의 기억이 소환됐다. 시간에 깎여나가고, 세월에 풍화되며 잊힐 수도 있었던 신라의 석불(石佛)은 21세기인 오늘도 실체로 우리들 앞에 존재하고 있다. ‘경이(驚異)’는 이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닐지.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는 바로 이 마애여래삼존불이 무열왕 시기에 만들어졌다 추정하며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이란 논문을 쓴다. 논문에 쓰인 ‘아미타삼존불입상’은 마애여래삼존불을 지칭한다. 같은 불상을 이야기하는 것. 그 논문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외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왕경 경주 서편에 위치한 선도산(仙桃山)의 정상에는 높이 6m가 넘는 마애불이 조성돼 있다. 우뚝 솟은 안산암 암벽 위에 환조에 가까울 정도의 고부조로 새겨진 불상은 현재 얼굴과 몸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간직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상의 현존 높이는 5.81m이지만 얼굴이 온전히 남아 있다고 가정하고 복원한 높이는 6.4m 남짓이다. 불상의 좌우에는 각각 높이 4.49m와 4.56m의 보살상이 서있는데, 두 상은 안산암이 아니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NBA 농구팀. 그들 가운데 최장신 선수보다 2배 이상 큰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가운데 불상. 법흥왕 이후 신라의 국교로 역할했던 불교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만들어졌을 7세기 당시 그 불상의 미려함과 섬세함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왕이나 최상층 귀족의 명령에 의해 신라 최고의 석공(石工)이 조각했을 터이니. ◆‘아미타삼존’을 표현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가운데 가장 큰 불상은 마모와 훼손이 심하다. 반면 양쪽에 선 두 보살상은 파괴의 정도가 덜하다. 그래서, 여전히 은은한 미소와 부드러운 곡선을 확인할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위의 논문은 이 보살상에 관해 서술하며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을 언급한다. 아미타삼존은 아미타불을 중앙에, 그 좌측에 관음, 우측에 세지(勢至)의 양 보살을 안치한 삼존을 말한다. 다시 한 번 논문을 인용해보자.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역시 부분적으로 마모됐으나 불상보다는 보존상태가 양호해 상호와 복식, 지물, 장신구 등 중요한 세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불상의 왼편, 즉 좌협시보살상의 보관에는 화불(化佛·부처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일)이 남아 있어, 세 구의 상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하는 아미타삼존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그마치 1400~1500여 년 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신라 석공은 우뚝한 불상 하나와 보살상 두 개를 힘겹게 만들어 왕릉을 굽어보게 했다. 바위를 깎고 다듬는 지난하고 긴 작업이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희미하게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유적과 유물엔 만든 이들의 피땀이 깊게 배어있을 터. 이는 신라와 백제가 다르지 않고, 동양과 서양이 동일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바라볼 때면 그걸 깎아 세운 신라 석공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계속) 서산과 태안에도 마애여래삼존불이… 불교는 꽤 오랜 시간 우리 땅을 지배한 종교이자 통치이념이었다. 신라와 백제가 그러했고, 고려 또한 사찰과 그 안에서 수도하는 불승(佛僧)을 귀하게 대접했다. 한국에서 ‘명산’이라 불리는 곳엔 대부분 큰 사찰이 있고, 불당과 인근 바위에선 수많은 불상과 보살을 만날 수 있다. 그 형태와 예술적 완성도는 각기 다르지만. 그러니, 한때 ‘불교왕국’이라 불렸던 신라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는 경주에 불상과 보살상이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도 그런 차원에서 보고 해석해야 존재 이유가 선명해진다. 마애여래(磨崖如來)란 ‘바위에 새겨 넣은 부처의 형상’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삼존불(三尊佛)은 뭘까? 어렵지 않은 한자이니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하다. ‘3개의 존엄한 부처’라는 뜻이 아닌가. 비단 옛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만이 아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불교는 한 시대의 통치이념이자 많은 백성들이 믿었던 종교였다. 그런 까닭에 경주 이외의 다른 지역에도 ‘마애여래삼존불’이라 불리는 불상이 존재한다. ‘위키백과’가 “백제 후기 중국 및 고구려와의 해상 교통을 통한 불교문물 수용의 요지였던 서산에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중앙에 여래 입상의 거구(巨軀)를 양각(陽刻)하고 여래의 오른쪽에 보살 입상을, 왼쪽에 반가사유형 보살좌상을 배치했다. 삼존에 나타난 고졸(古拙)한 미소는 백제 불상의 특이상(特異相)으로 지적된다”라고 설명하는 건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이다. 가야산 적벽에 부조(浮彫)된 이 불상은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귀한 유물. 1959년 4월 보원사지 유물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됐고, 이후 국보고적보존위원회가 국보로 지정했다. 충청남도 태안 동문리의 마애여래삼존불은 백화산 바위에 새겨져있다. 이 불상은 신라와 함께 패권을 다퉜던 또 다른 고대왕국 백제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마애여래삼존불보다 더 빨리 조각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불에 관해서 ‘나무위키’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마애불 가운데서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로 판단되며, 그 형식에서도 아주 특수한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삼존불은 크게 묘사된 석가모니와 같은 본존불의 좌우로 보살이 보좌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 마애여래삼존불은 중앙에 위치한 작은 보살의 좌우로 중앙 보살보다 큰 여래입상이 있는 대단히 특이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현재까지 발견된 마애불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것이다.”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불 역시 경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바람과 파도에 깎여 본래의 형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라인이 만든 것이건, 백제인이 조각한 것이건 1500~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치 있는 유물이란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12

대구 패션의 전설, ‘한땀 한땀 한사람 위한 작품’ 혁신을 더하다

대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섬유산업의 메카이자 한국 패션 산업의 중심지다. 천상두(70) 디자이너는 무려 4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대구에서 ‘옷’과 동행해 왔다. 천상두 디자이너의 컬렉션은 독특하면서도 단순하다. 천상두 디자이너는 매번 신선한 작품을 런웨이에 펼쳐 보여 놀라움을 안긴다. 지난달 28일 대구 중구 대봉동에 자리한 자신의 브랜드인 이노센스(INNOCENCE) 매장에서 만난 천상두 디자이너는 45년 동안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이날 인터뷰를 시작했다. 패션쇼가 예정돼 바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금세 안광을 밝히며 발언을 이어갔다. ◇톱 디자이너로 롱런할 수 있는 비결 천상두 디자이너는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국내 유수의 패션쇼에 다수 초청받고 경북외국어테크노대학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 대구경북패션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패션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같이 학문적인 배경을 쌓는 대신, 경험과 실험을 통해 디자인 세계를 익혔다. 천 디자이너는 “처음에는 제대로 된 방향을 잡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결국 나만의 옷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천상두 디자이너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에 대한 고집이다. 그는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와 같은 대중적인 상업 패션보다는 한땀 한땀 정교하게 완성된 오트 쿠튀르 디자인을 고집한다. 천 디자이너는 1981년 캐나다에 사는 한 선배의 권유로 ‘Mr.천’이란 옷가게를 오픈했다. 2년 뒤 ‘보니클라이드’로 상호를 변경한 의상실은 마네킹 대신 대나무를 사용해 옷을 전시하고 의상 디자인 또한 독특해 배우 엄앵란 씨의 관심을 받았다. 이후 1988년 대구 향촌동 출신의 디자이너이자 영화배우인 하용수 씨가 상호를 지어준 이노센스를 오픈했다. 현재 이노센스 건물 3층은 천 디자이너의 옷 공장으로 최대 하루에 한 벌만 의상을 제작한다. 대량 생산되는 기성복을 거부하고 오트 쿠튀르 방식, 즉 유일의 고급 의상만 제작하는 천 디자이너는 “오트 쿠튀르는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며 “옷이 사람을 표현하고, 그 사람의 삶과 성격을 담을 수 있어야 진정성 있는 패션이 된다”고 강조했다. 천 디자이너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디자인이 일상생활에서 얻은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는 “패션은 거창한 디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거리에서의 사람들, 자연에서의 색감,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들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다. 천 디자이너는 한 의상을 꺼내 보이며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색감이나 형태들을 디자인으로 풀어내면, 더욱 진솔하고 감동적인 작품이 나온다”며 “어릴 적 고향 하늘에서 본 은하수를 떠올려 검정색 원단에 흰색 무늬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패션쇼 천상두 디자이너는 예술적인 ‘패션쇼’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최근에는 45주년을 맞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디너 패션쇼를 개최했고 오는 15일 대구시 산격동에 위치한 한국패션센터 대공연장에서 패션쇼 ‘더 마스터피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여전히 패션쇼 준비를 직접 구상하고, 음악과 쇼 연출, 모델들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쓴다. 패션쇼가 시작되면, 그는 무대에서 모델들의 표현력과 관객들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며 작품의 완성도를 점검한다. 천 디자이너는 “패션쇼는 제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는 순간”이라며 “관객의 눈길이 모델을 끝까지 따라가면, 그 작품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 디자이너는 1997년 대구 프린스호텔에서의 봄 패션쇼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고, 그때부터 패션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130벌의 옷을 선보였던 그 패션쇼는 가수 계은숙 씨의 관심과 동시에 매스컴과 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줬다. 그 이후로 패션쇼는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통해 관객을 만난다. 지역에서 열리는 패션쇼만 직물과패션의만남전 10회, 대구컬렉션 11회, 대구패션페어 5회 등 참여했고, 오사카컬렉션, 경북패션이노베이션, 부산패션위크 등의 패션쇼에 참가했다. 천 디자이너는 해외까지 무대를 넓혀 일 년에 최소 두 번 중국에서 패션쇼를 연다. 대련, 베이징, 상하이, 연길, 칭다오, 온주, 정저우, 충칭 등 중국 전역이 그의 패션쇼 무대였다. 천 디자이너는 대구시립극단 악극 ‘울고 넘는 박달재’, 뮤지컬 ‘만화방 미숙이’, MBC드라마 ‘내딸 금사월’등 수 많은 드라마와 뮤지컬, 연극에 의상을 협찬했다. 또 대구섬유박물관에 작품을 45벌이나 기증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예술은 패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 디자이너는 패션쇼에서 무대장치와 음악, 모델의 표현 등을 연결성 있게 구성해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고 있다. 그는 “패션쇼에서 클래식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김추자의 ‘눈이 내리네’ 혹은 샹송이나 팝송도 사용한다”며 “계속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고 연구한다”고 말했다. ◇“클래식, 심플, 모던”…세월이 지나도 예쁜 옷 만들 것 천상두 디자이너는 45주년을 맞으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후반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단다. 트렌드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방황하던 그 시절, 그는 자기만의 색채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다. 그는 여러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를 찾아다니며 ‘자신만의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천 디자이너는 매년 패션쇼를 통해 경험을 쌓으며 비로소 자신만의 옷에 대한 철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디자이너 천상두의 이미지’로 불리는 클래식함을 주제로 한 그의 옷들은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입을 수 있는 작품을 목표로 한다. 심플함과 모던함은 그의 의상 철학의 핵심이다. 천 디자이너는 지금도 매일 아침 의상실로 출근해 해가 질 때까지 옷을 만들며 하루를 보낸다. 아이디어가 샘솟으며 에너지가 넘치는 그는 자다가도 옷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공장으로 나와 직접 확인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그 결과가 생각대로 나오지 않으면 완제품도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천 디자이너는 하루 종일 의상 작업에만 몰두하느라 밖을 나가지 않아, 대구에서 유명하다는 수성못도 택시를 타야만 갈 수 있을 정도란다. 천 디자이너는 패션계에서 45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음에도 앞으로 20년을 더 옷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품고 있다. 전 세계를 다니며 패션쇼를 더 열고, 더 완벽한 옷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다. 천 디자이너는 “2013년 아시아 광저우 패션 최우수 디자이너상을 받았을 때,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며 “이때부터 10년, 20년이 지나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고 말했다. 천 디자이너는 오늘도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는 연령대, 유행,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구상한다. 그의 창조적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그 끝없는 탐구와 열정은 앞으로도 패션계에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2024-11-11

“타 도시로 환자 가지 않고,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했으면…”

“병원을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병원을 통해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지난 10일 개원 16주년을 맞이한 에스포항병원의 김문철 대표 원장은 자신의 운영철학을 설명하며 미소 지었다. 김 원장은 “뇌졸중(Stroke)과 척추(Spine) 분야에서만큼은 환자들이 타 도시에 치료받으러 가는 불편을 겪지 않게 하겠다”면서 “환자들이 우리 병원이 있는 포항에 사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에스포항병원은 올해 초 ‘보건복지부 제5기 1차 연도 뇌혈관부문 전문병원’으로 지정됐다. 앞서 2011년 1기 신경외과 전문병원에 지정된 후 2∼5기 ‘5회 연속 뇌혈관 전문병원’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리기도 했다. 에스포항병원은 개원 이래로 대학병원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전문화된 진료로 ‘지역민의 건강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오고 있다. 지금의 모든 영광은 김 원장의 피나는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원장은 대구 경북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그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됐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밤을 꼬박새서 만든 신규 논문 계획서가 교수회의에서 매번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다니던 대학병원을 과감히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퇴직 후에는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더 높은 연봉과 조건을 제시하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자리는 없었다. 고심 끝에 김 원장은‘지역 의료 질을 높일 수 있는 제대로 된 병원을 만들자’라는 일념 하나로 돌연 ‘포항행’을 택했다. 2008년 11월 마침내 김 원장은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북구 죽도동에 에스포항병원을 개원했기 때문이다. 개원 후 환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개원 9년 만에 병원 규모는 3배가량 늘었고, 남구 대이동으로 신축 이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4명의 의사와 70여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병원은, 현재 66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16년간 성장시킨 병원의 모습은 만족스럽나? -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에스포항병원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본다. 병원이 단순히 치료를 제공하는 곳을 넘어,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신뢰와 희망을 주는 사회적 책임을 가진 기관이다. 병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환자의 건강을 개선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좋은 병원의 시스템을 가지고 치료의 질을 높이고 우리 지역사회를 안전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병원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갖길 바라나. - ‘진짜 괜찮은 병원’, ‘진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는 병원’이다. ‘진짜 목적’의 의미는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내 부모와 형제, 친구가 사는 이 도시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 진료 시 의료진이 가장 중점을 두는 점은. - 우리 병원의 모토는 ‘가치 있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하자’이다. 어떤 이들은 ‘병원 모토에 정작 환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환자를 잘 보기 위한 가치 체계가 바로 우리 병원의 모토이고, 이것이 곧 우리 병원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를 잘 보기 위해서는 먼저 병원과 구성원들이 건강해야 한다. 건강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비전과 삶의 태도에 대한 건강함을 뜻한다. 이 모든 게 합쳐진다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이 목표는 개인의 영달이 아닌, 오로지 공적 가치를 공동으로 추구했을 때 가능하다. 그래야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의료봉사 등 사회공헌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떠한 활동들이 있나. - 병원이 지역사회와 긴밀한 연결을 통해 지역사회의 건강을 증진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한 예로 매주 포항시 남·북구 치매안심센터로 신경과 의료진을 파견근무하고 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병원이 가진 전문성을 가지고 치매안심센터에 직접 나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치매 환자의 초기 증상과 경과를 잘 파악해 조기에 치매를 발견하고, 향후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나 예방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치매 친화적인 지역사회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 앞으로의 에스포항병원은? - 우리 병원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미션, 목표는 단순히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시스템을 바탕으로 가치와 정보를 직원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통합이 되었을 때 혁신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스포항병원이 단순히 환자 치료를 넘어서, 사회적 책임, 지속 가능한 가치공유, 혁신적인 의료 서비스 제공하는 병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4-11-11

중학생 때 미술 선생님을 보며 화가를 동경

포항 미술계는 배원복, 김두호 선생이 첫 장을 열고 이방웅(동아미술학원), 강문길(현대미술학원), 박수철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박수철 선생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해 호미곶 구만리, 포항역, 철길 같은 포항의 풍경을 깊고 따듯한 색채로 그려냈다. 또한 1979년 일요화가회를 창립하는 등 지역의 화단을 두텁게 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중앙동에 있는 그의 화실과 오래된 커피숍 그리고 죽도시장의 보리밥집을 오가며 선생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도형(김) : 이 화실에는 언제쯤 들어오셨는지요? 박수철(박) : 7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식당을 하다가 비어 있던 곳인데, 고쳐서 화실로 만들었습니다. 김 : 근사한 화실이군요. 박 : 생계를 위해 집수리하는 일을 20여 년간 해왔습니다. 덕분에 이런 일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6·25 전쟁이 터진 1950년에 태어나셨더군요. 박 : 전쟁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울산 호계동 근처의 신답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 배 속에 있었어요. 박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9월 말(음력 8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4남 1녀 중 셋째였지요. 김 : 전쟁통에 태어난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 선린병원과 나루끝 사이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은 기와집이었지요. 아버지는 페인트 판매업을 준비하다가 친척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힘든 처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페인트칠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지요. 집 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장독대 주변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어요. 모란, 작약 등이 핀 작은 꽃밭도 있었지요. 집 주변 텃밭에는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포플러가 우리 집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마루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면 포플러 사이로 송도 송림이 보였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이전에 풍경을 먼저 봤습니다. 이런 환경이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김 :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아름다운 풍경화 한 점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박 :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의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연장자이고 마당이 넓은 편이었기 때문이지요. 김 : 댁 주변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습니까? 박 : 지금 선린병원 자리에 선린애육원이 있었어요. 미 해병대에서 선린애육원에 지원을 많이 해줬는데, 여러 가지 물품 중에 종이 팩에 담긴 우유를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포항세무서 자리에 덕수교회가 있었고, 근처에 구세군교회가 있었습니다. 점심때 구세군교회에서 강냉이죽을 배급했어요. 나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그 강냉이죽을 먹었습니다. 김 :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도 배급이 있었나요? 박 :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옥수수빵을 무상으로 주더군요. 배가 고프기도 했고 빵을 난생처음 맛보았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우리 집에서는 시래기와 쌀을 섞어 끓인 시래기갱죽을 자주 먹었습니다. 집 근처 술도가에서 달착지근한 술찌끼를 받아먹고 취했던 게 떠오르는군요. 김 : 당시 포항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박 :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 앞에 북부시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요. 시장 바닥이 질퍽질퍽했고 주변에 오리가 뒤뚱뒤뚱 다녔지요. 그리고 칠성천 옆 뻘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좌판을 놓고 장사했어요. 그곳에 엉성한 판잣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죽도시장은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 고아나 소아마비, 언청이가 많았어요. 걸인들이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연민을 느꼈지요. 김 : 미술을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박 : 포항중학교 다닐 때 미술 교사인 권영호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권 선생님은 한마디로 자유분방한 분이었어요. 미술실의 책걸상을 모두 빼내고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화가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림에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권영호(1936∼2012)는 경주에서 태어나 포항 구룡포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항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미술과로 전과해 2년 과정을 마쳤으며, 그 뒤 영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부터 경북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부임해 2001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 「권영호」,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 : 중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박 :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대구매일신문을 돌렸는데, 한 달에 450원을 받았어요. 석 달 치를 모으면 한 분기 공납금을 내고 50원이 남았지요. 김 : 고등학교는 동지상고로 가셨지요? 박 : 동지상고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야간부로 옮겼습니다. 학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당시 야간부는 한 학년에 한 학급이 있었어요. 1학년 때는 대신동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0원을 받았고, 2학년 때는 포항경찰서 정보과에서 한 달에 2000원을 받았지요. 3학년 때는 서경도서관(훗날 포항문화원이 되었던 곳)에서 한 달에 3000원을 받고 일했습니다. 그때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돈을 벌어가며 학교에 다녔어요. 김 : 고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박 : 2학년 때 200일가량 결석했어요. 사춘기의 방황이었지요. 왠지 학교에 가기 싫었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빠졌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 게시판 유급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지요. 다행히 담임교사였던 손춘익 선생이 손을 써서 유급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김 : 중고등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가 있는지요? 박 : 중학교 다닐 때부터 새벽마다 수도산 자락의 철길을 따라 수도산에 올라갔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는데, 당시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덟 살 터울의 누나도 시집갈 때 철길을 걸어서 포항역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기차를 타고 포항을 떠났지요. 철길에 많은 추억이 묻혀 있는데, 철길이 사라지면서 추억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대입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지자 군 입대 영장이 날아왔습니다. 서울 거여동에 있는 30사단에서 근무했지요. 군에서 제대한 후 집 안의 헛간을 개조해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네 살 터울의 형이 대학 다닐 때 보던 영문 소설책의 표지를 복사해 드로잉 연습을 했지요. 형도 동지상고 야간부를 나와서 서경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서경도서관에 형의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을 정도였지요. 김 : 이제 선생님의 미술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박 : 20대 중반 무렵 포항에는 미술학원이 하나뿐이었어요. 바로 시민제과 2층에 있던 현대미술학원이었습니다. 강문길이라는 사람이 원장이었는데 형을 무척 따랐지요. 형 덕분에 나보다 한 살 많은 강 원장과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레슨비를 낼 형편이 안 되어 돈이 생기면 소주 한잔은 사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학원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미술학원은 예술을 하는 청년들의 아지트가 되었어요. 난로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삶과 예술에 관한 열띤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러면 누군가 옆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지요. 박수철은… 1950년 6·25 전쟁 때 포항에 살던 가족이 피난을 간 울산 신답에서 태어났으며, 9·28 서울 수복 후 포항으로 돌아왔다. 포항중학교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고,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갈뫼화실을 운영했으며, 1979년 포항일요화가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 포항문화예술회관 기획 초대 개인전, 2017년 포항 우수작가 초대전(포항문화재단), 2023년 ‘The Cross 40’(개인전), 2024년 ‘Still Life’(개인전)를 열었고, 그 밖에 여러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0

“트로트계에 전유진 있다면 클라이밍엔 박지유가 있지요”

15m, 인간이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높이라고 한다. 암벽 여제(女帝) 김자인도 클라이밍 첫 도전 때 밑을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는 높이다. 이 높이를 오르내리는 운동이 스포츠클라이밍이다. 60여 개의 홀더를 이용해 직벽과 오버 행어를 올라야 하니 국대급 피지컬은 기본이다. 푸시-업 100개에 턱걸이 50개는 해줘야 ‘선수급’ 명함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극한의 운동에 뛰어든 어린 꼬마가 있다. 바로 포항 효자초등학교 3학년 박지유 양이다. 키 135cm, 체중 27kg으로 놀이터 구름다리나 타면 딱 맞을 나이인데 지유의 성적을 들여다보면 깜짝 놀란다. 지방, 전국대회 입상 메달이 10개가 넘고 우승컵도 몇 개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록이 입문 1년 여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트로트계에 전유진이 있다면 스포츠클라이밍에는 박지유가 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오늘도 열심히 인공암벽을 오르고 있는 박지유 양을 만나보았다. ◆놀이터 구름다리에서 발견한 지유 재능 “엄마 손 떼도 돼. 나 혼자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지유와 암벽과의 만남은 동네 놀이터에서부터 시작됐다. “지유가 5살 때 놀이터 구름다리에 올려달라는 거예요. 위험했지만 애가 원하니까 난간을 잡게 해주었는데 바로 한달음에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때 우리 애의 손힘이 남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딸의 운동 재능을 발견한 가족은 그 길로 포항의 클라이밍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지유는 여러 종목 중 리드(Lead, 정해진 시간 안에 높이 오르기 경쟁)에서 강점을 보였다. 아이의 재능을 살릴 전문시설을 찾고 있는데 마침 클라이밍 선배가 구미의 ‘포시즌’(센터장 김기만)을 추천해줘 그곳에 등록을 했다. 좋은 코치진, 훌륭한 시설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지유의 기량은 날로 향상됐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 다행히 지유는 부모님의 기대와 믿음대로 따라 주었다. 입문 두 달 만에 출전한 영남이공대총장배 ‘전국 클라이밍 대회’에서 2등(초교 저학년부)을 차지하며 가족은 물론 코치진을 놀라게 했다. 출전 학생들은 대부분 2~3년씩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선수들이고, 이미 ‘전국구급’에 이름을 올린 애들이 대부분이어서 부모님의 보람은 더 컸다. 아직 초보 수준이었지만 ‘일등’이 못내 아쉬웠는데 금메달 갈증은 6개월 후에 풀렸다. 2024년 4월 ‘광주김홍빈컵 클라이밍대회’에서 지유가 1위 시상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지유 역시 초등학교(저학년부) 유망주에 이름을 올리며 전국구급 선수로 부상했다.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에 승부욕까지 “아빠도 체육중학교 육상선수 출신이고, 저(엄마)도 학교 대표로 각종 육상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나름 운동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단기간에 성장을 거듭한 지유 운동 능력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 덕인 듯하다. 타고난 근력과 운동신경 외 성적을 받쳐주는 또 하나의 축(軸)이 있으니 바로 지유의 정신력이다. “지유가 처음 클라이밍장에 등록을 하고 며칠 훈련을 받았는데, 코치가 조용히 부르는 거예요. 지유가 암벽에 최적화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 못지않게 정신력과 도전 자세가 너무 좋다는 거예요. 저 정도 멘탈이면 중간에 슬럼프가 와도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보통은 초창기에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거나 피가 나면 훈련을 멈추거나 권태기가 한두 번 오는데 지유는 지혈이 끝나는 대로 암벽장으로 달려간다는 것. 엄마 눈에는 10살 어린 나이에 하루 5시간 고된 훈련에도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지유가 대견하고 애처롭기만 하다. 피로 물든 홀더를 바라보는 부모님 가슴은 안타깝지만 고통을 견딘 후에 돌아올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있다. 구미 포시즌에 등록하면서 지유는 어쩌면 본격 선수의 길로 들어선 셈인데, 이곳의 훈련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근력을 위해 턱걸이 100개(세트), 푸시-업 300개(세트) 크런치 100개(세트), 스쿼트 200개(세트)는 기본이고 하체 근육을 위해 개인 PT를 별도로 받고 있다. 클라이밍장에는 난이도 별로 A부터 F코스까지 있는데 이 코스를 하루 10번씩 반복하고 있다. ◆포항 유소년 클라이밍의 기대주로 성장할 “현재 지유의 라이벌은 전주의 오채서, 시흥의 김재령이에요. 동갑내기인 이 3명은 전국 대회에서 1~3위를 주고받으며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 구미에서 동계훈련 후 지유는 성장을 거듭해 현재 위의 두 학생과 초등학교 저학년부 전국 ‘빅3’를 형성하고 있다. 앞선 두 학생이 2~3년 체계적인 레슨을 거친 데 비해 지유는 입문 1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성장 가능성은 더 크다고 보지만, 다들 어린 선수들이어서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유는 현재 기록에서 앞서고 있는 채서보다 기량이 날로 향상되고 있는 재령이가 더 두렵다고 말한다. 이에 코치진은 경쟁 선수들을 공략할 나름의 작전과 훈련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 지유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는 국가대표 서채현 선수다. 서 선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암벽 여제’로 불리던 김자인 선수를 단숨에 제끼며 국내 정상에 올랐다. 장기적으로 서채현 선수처럼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지만 우선은 각종 대회, 체전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2025년 전국소년체전에서 클라이밍의 정식 종목 채택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우리 지유한테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입니다.” 클라이밍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 지역 대표에 선발돼 전국체전에도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체전에서 공인(公認) 입상은 국가대표로 가는 중요 관문이기 때문에 지유 입장에서는 가장 절실한 부분이다. 센터에서는 우선 전국대회에 참여해서 기량을 더 쌓고 몸을 만든 후 소년체전 참가 기회가 오면 포항시 명예를 걸고 훈련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전유진이 압도적인 노래 실력으로 ‘포항의 딸’이 되었듯이, 우리 지유도 더 열심히 성장해서 포항 클라이밍의 기대주로 거듭나겠습니다.” ◆2023∼24년 박지유양 입상 성적 ◇2023년10월 영남이공대총장배 2위11월 제주도지사배 스포츠클라이밍 3위 ◇2024년4월 김홍빈컵 광주시 스포츠클라이밍 1위5월 서울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2위5월 전주 스포츠클라이밍 동호인대회 2위5월 문경 전국 청소년스포츠클라이밍 2위6월 영남이공대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6월 대구시장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8월 부산 스포츠클라이밍 2위9월 포항 스포츠클라이밍 1위10월 엄홍길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 (초교 저학년부)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1-07

“해월 최시형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

경주에서 태어난 해월 최시형은 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10대 중반에 포항으로 옮겨 신광면에서 살았다. 34세인 1861년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해 수운(水雲)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1863년부터 영덕, 영해 등 경상도 곳곳을 다니며 포교 활동을 했다. 1863년 8월 도통(道統)을 승계받으며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김용옥은 “오늘 우리의 가능성의 모든 씨앗이 동학에서 뿌려졌다”고 했고, 김상봉은 동학을 “현대 한국 철학의 시원”이라고 했다. 이형수 선생은 환갑을 넘어 동학에 매료되어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려왔다. 포항에 깃든 동학 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도형(이하 김) : 언제부터 동학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형수(이하 이) : 서울에서 그림을 배울 때 동학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해월이 포항에서 살았다는 걸 몰랐어요. 환갑이 지나 동학 공부를 하면서 해월과 포항의 깊은 인연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김 : 해월의 살림터에도 가보셨겠군요. 이 : 신광면 기일리와 마북리 검곡에 자주 갔어요. 기일리는 오지이긴 하지만 산세와 터의 기운이 참 좋습니다. 기일리는 해월이 일하던 제지소가 있던 곳이고, 검곡은 해월이 농사를 지으면서 동학 수련을 하던 곳이지요. 김 : 동학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습니까? 이 : 당시에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선포한 것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은 알면 알수록 가치와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해월은 36년 동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도피 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을 보듬어 안으며 인내천 사상을 전했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해월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 동학에 관한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 그렸습니까? 이 : 동학의 깊은 뜻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물화를 그릴 때 해월과 장일순, 김지하도 그렸어요. 해월의 정신이 장일순과 김지하로 이어지니까요. 2022년에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문화예술촌 벽면에 삼례의 역사 기록 도판화를 만들어 부착했습니다. 삼례읍은 동학운동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지요.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51A4) 운동을 했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가 있었던 곳입니다. 동학의 역사를 기록한 도판화 1천여 장을 그려서 그중 420장을 도판으로 만들어 삼례문화예술촌 벽면에 부착했어요. 참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김 : 천도교에서 제작한 2024년 달력에 선생님의 작품이 있더군요. 이 : 해월의 큰딸 최윤(1878~1956)과 외손자인 정순철(1901~?)을 그린 인물화입니다. 정순철은 전 국민의 애창곡인 짝짜꿍, 졸업식 노래를 작곡했고 윤극영, 박태준, 홍난파와 함께 한국 동요 4대 작곡가로 꼽힙니다. 방정환과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 운동에도 앞장섰어요.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확인이 안 되면서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지요. 정순철은 충북 옥천 출신으로 정지용 시인의 문우(文友)다. 도종환 시인이 2022년에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어린이를 노래하다-한국 동요의 선구자 정순철 평전』(미디어창비)을 내면서 한국근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한 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평전에 따르면, 정순철이 방정환과 함께 전개한 어린이 운동은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라고 한 해월의 「내수도문(內修道文)」에 뿌리를 둔다. 김 : 정순철의 어머니도 명성이 높은 분이지요? 이 : 그렇지요. 정순철의 어머니 최윤은 경주 용담정을 지키며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해 ‘용담 할매’라고 불립니다. 그분이 고생한 건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김 : 수운 최제우는 경주 최부자 가문의 정신적 지주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의 7대 후손입니다. 동학은 경주 최부자 가문과 인연이 깊을 것 같습니다. 이 : 해월의 첫째 아들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손병희가 주선했지요.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에 보낸 감사의 편지를 최부자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어요. 김 : 죽도시장과 동학 외에 관심 있는 분야가 있습니까? 이 : 동해안별신굿도 귀중한 문화유산이지요. 한번은 영해에서 별신굿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1박 2일 동안 구경했는데 정말 볼만하더군요. 다른 곳에서도 별신굿 한다는 소식이 있으면 달려갑니다. 김석출 만신에게 자문을 구한 백남준도 “나의 예술의 뿌리는 굿”이라고 했어요. 김 : 선생님을 뵐 때마다 배낭을 메고 걷기에 좋은 복장으로 오시더군요. 평소에 많이 걸으시나 봅니다. 이 : 걷는 게 삶 자체라 할 수 있지요. 60대 초반에는 호미곶 둘레길을 거의 다 걸었습니다. 구룡포 삼정리에서 호미곶면 신창리까지는 여섯 시간 정도, 구룡포에서 호미곶 보리밭까지는 네 시간가량 걸립니다. 60대 후반에는 집(장량동 대림골든빌아파트)에서 출발해 달전 사거리를 지나 도음산을 거쳐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신라 냉수비까지 걸었어요. 이 코스도 대략 여섯 시간이 걸리지요. 영덕에도 이따금 가는데 강구 버스 정류장에서 화림정맥을 타고 영덕군민운동장까지 가면 여섯 시간쯤 걸립니다. 강구 등대에서 오십천변을 따라 무릉도원교까지 가면 네 시간가량 걸리고요. 김 :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걷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는 작품 구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혼자 걸어요. 둘째는 작품을 계속 그리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 : 걷기 외에 꾸준히 하는 일이 있습니까? 이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점의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독서는 게을리할 수 없어요. 김 : 많은 작품을 그렸을 텐데, 작품을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이 : 시간 나는 대로 작품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작품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할 생각이에요. 김 : 한 점 한 점 공들여 그린 작품을 소각하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이 : 어차피 모든 작품을 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요. 김 : 최근에 하신 작업이 있습니까? 이 : 영덕 출신 동갑내기인 김종완 선생이 동시집을 내는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더군요. 동시에 어울리는 그림 50여 점을 그렸는데, 동시의 원천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최근 『열두 살의 봄』(청개구리)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김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이 : 한 자루 붓이 한 생명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숲을 찾으려 합니다. 지방에 묻혀 있는 귀한 인문학적 자료를 찾아내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06

신라의 전설 깃든 840년 은행나무… 그 시간과 마주한 장대함

하늘로 치솟은 웅장한 은행나무의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가렸다. 은행 나뭇잎에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은행잎에 모여 큰 빗방울로 변해 머리 위에 떨어졌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고 벼락 치는 우레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빗방울은 채찍으로 변해 대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거대하고 무성한 잎의 은행나무 아래에도 소낙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빗물은 도랑을 형성하고 산자락 경사진 개울로 쏟아져 내렸다. 신라 천 년 고찰 적천사로 뛰어들었다. 맞닥뜨린 것이 험상궂은 얼굴의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사대천왕이었다. 두려움에 간은 쪼그라들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내 유년 시절에 청도 원리 적천사에 갔을 때 은행나무와 사대천왕을 처음 보았을 때 경험한 일이다. 화악산 적천사는 나의 고향 청도군 청도읍 소재지에서 밀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에 원리 마을이 있다. 마을 고샅길을 따라 산 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고찰과 함께 원리 981번지에 나이 840살, 키 29m, 가슴둘레 9m, 앉은자리 폭이 30.8m 되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두 그루의 서 있다. 신라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는 웅장함에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고향 가는 길에 청도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이곳 원리 마을 출신 대구광역시 교육청 부교육감과 대구예술대학 총장을 역임한 도정기 선배님은 늘 고향 적천사 은행나무 자랑을 나에게 늘어놓곤 했던 기억이 오늘따라 새롭게 떠오른다. 고찰로 가는 산 비탈진 오솔길은 유년 시절에는 걸어서 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숨 한 번 헐떡거림 없이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노거수의 웅장한 몸집에 주렁주렁 달린 은행이 떨어져 나무 밑을 꽉 채워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잘못하여 은행을 밟기라도 한다면 신발에 그 고약한 냄새는 귀가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접근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은행나무는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나무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임을 알았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감정을 나무 아래에서 느꼈다. 나무는 그 자체로 시간의 기록이었고,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불교 신앙을 지키며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쉼터를 제공했을 것이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마치 그 시간 속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가지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장대한 모습, 그 아름다움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요와 평안을 담고 있는 듯했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나무, 그 나무를 지켜온 사찰, 아니 사찰을 지켜온 은행나무, 그리고 사대천왕의 존재는 나에게 자연과 불교, 그리고 인간의 삶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사대천왕은 그들의 세상을 지키고, 악을 물리치며,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천년의 세월을 지켜왔다. 나는 이곳에서 자연과 신앙, 그리고 인간의 삶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경험을 했다.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생불(生佛)이라 할 수 있다. 부처가 인간 내면의 불안감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주듯, 은행나무는 그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연의 지혜를 상징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그 고요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운다. 인간은 종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흔들리지만, 고요히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볼 때면 그 모든 걱정이 잠시나마 잊히고, 평온과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렇듯 은행나무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그리고 부처의 자비 속에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선사하는 생명의 상징이다. 천년 사찰의 은행나무는 이렇게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불과 같은 존재로 와 닿았다. 가을 햇살이 사찰을 비추고, 은행나무의 잎이 바람에 날리면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서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시간 속에 포함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이 저만큼 높이 솟아 있고 푸른 솔가지 위에 가을 햇살이 반짝인다. 사대천왕의 무서운 트라우마를 떨치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산사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내 빈자리에 누군가 또 다른 방문객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오르고 있다.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요히 방문객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있다. 천년의 시간은 은행나무와 사찰을 지나, 나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었음을 적천사를 빠져나오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적천사 사대천왕은… ①동쪽의 국토를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을 하고 있다. 치켜세운 눈썹과 드러난 이빨로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발로 마귀의 등을 밟고 있다. 발밑에 깔린 마귀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단청의 화려한 색상으로 앉아 있는 키만 하더라도 4m는 족히 되었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권선징악으로 인간을 고루 보살핀다고 한다. ②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이를 악물고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다.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세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진 마귀를 왼발로 배를 밟고 있다.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한다. ③서쪽을 방어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입을 꾹 다물고 부릅뜬 눈은 앞을 직시하고 있다.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는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광목천왕의 결의에 찬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느꼈다. ④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부릅뜬 눈으로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붉은 입술의 입을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손바닥 위에 보탑을 받들어 쥐고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고 하는 다문천왕은 다른 천왕과는 다르게 배와 발아래 이상하게 생긴 마귀가 있다. 사대천왕의 오른발 아래 악귀가 하나씩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미산(須彌山)에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제석천(帝釋天)의 명을 받아 불법을 수호하며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06

황산벌 5000 결사대는 떼죽음을 맞았고…

우뚝 선 부처와 보살이 장엄함을 보여주는 마애여래삼존불과 줄줄이 늘어선 왕릉, 여기에 국가의 시작을 알린 성모(聖母)의 전설이 떠도는 선도산. 신라는 56명의 왕이 통치하며 992년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였다. 하지만 백일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어쩔 수 없는 순리. 말기에 들어서며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이 다스렸으나, 지역에선 반란 세력들이 들끓었다. 중앙집권 정치의 힘을 잃고 있었던 신라. 이윽고 918년엔 궁예를 무너뜨린 왕건(王建)이 후백제와 비교해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신라의 마지막 집권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이름을 지우게 된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백제에 비해 신라의 멸망은 피비린내가 덜했다. 왕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새로운 실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반면 백제의 멸망 과정은 참혹했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맞서겠다고 황산벌로 나섰던 5천명의 결사대가 떼죽음을 맞았고, 이후 백제 수도로 쳐들어온 나당 연합군에 백성들은 혼비백산했다. ◆지는 해처럼 사라진 고대 왕국 백제는... 백제의 멸망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 등에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이를 요약해 옮기면 아래와 같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660년 6월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을 무사히 통과했고,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에 상륙했다. 의자왕은 계백을 출전시켰다. 하지만, 결사대 5000명은 황산벌전투에서 전멸했다. 이후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무너뜨리고…(후략)” 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인 의자왕은 무력했다.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 지척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왕자 중 한 명인 태(泰)가 끝까지 사비성을 사수하고자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남은 군대에선 이탈자가 속출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왕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한때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백제는 그렇게 지는 해의 형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자리했다. 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칠갑산 일대는 백제의 사라짐을 통곡하며 그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고자 했던 세칭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나당 연합군의 횡포로 촉발된 백제부흥운동 그렇다면 백제부흥운동을 촉발시킨 매개체는 무엇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들려주는 해답은 이렇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 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했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했다. 백제부흥군의 주요 인물로는 정무·지수신·흑치상지·복신·도침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또한 길었다. 그래서일까? 10월 중하순에 찾아간 청양 칠갑산엔 드문드문 물들어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보였을 뿐, 제대로 된 단풍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칠갑산의 초입과 등산로를 제법 오랜 시간 거닐었다. 한때는 신라와 고구려 못지않은 힘과 세력을 과시하며 일본으로까지 이른바 ‘문화 수출’을 했던 예술지향의 백제 왕조. 하지만, 사라짐의 순간은 찰나처럼 덧없고 짧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깨진 사발의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몰락한 국가를 재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백제부흥운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흥운동 초기 백제의 복신은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군을 압도하기도 했고, 661년 가을엔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일본에서 돌아와 왕에 오르며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부흥군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고, 주요 수뇌부가 암살되기도 한다.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부로부터의 불화와 같은 편끼리의 암투, 나당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 풍왕의 고구려 도피, 신라군에 의한 주류성과 임존성의 함락…. 백제부흥운동의 짧았던 3년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직까지 백제의 서러운 멸망사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내려오는 길에 본 칠갑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유독 핏빛으로 붉었다. (계속) 토기가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전시물. 절제되고 간결한 백제토기 고구려·신라 등과 비교하면 기종 다양장식성 강하지 않고 실용적인 면 선호 ‘백제부흥운동의 본산’으로 불리는 청양군. 그곳에 건립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가장 주목되는 건 토기다. 흙으로 만들어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던 그릇과 병은 1천 년 전 먼 옛 시대 백제인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용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엔 백제의 토기가 출토된 지역을 아기자기하게 복원해놓은 전시 공간이 있고, 흥미로운 형상을 지닌 여러 가지 토기를 모아 선보이고 있다. 박물관을 찾는 학생들이 토기 제작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전시물도 확인 가능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제 토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백제 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기종이 확인된다. 장식성이 강하지 않고 단순하며 색조, 유려한 선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인들이 보다 절제되고 간결함을 추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성기부터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 토기가 고분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됨으로써 실용적인 면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찾아 살펴본 백제의 토기는 위의 설명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많지 않은 소박함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가에서 봤던 그릇이나 항아리처럼 투박했지만 단아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 거기에 더해 연꽃무늬 수막새, 오수전무늬 벽돌, 귀면전, 암막새, 토제직구호처럼 신라와는 구별되는 백제만의 향기가 담긴 여러 생활용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인상적인 체험으로 다가왔다. 패망한 왕국 백제를 다시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지금의 청양 지역엔 청남면 왕진리 가마터, 장평면 관현리 가마터, 정산면 학암리 가마터, 목면 본의리 가마터 등에서 다양한 기와, 와당(瓦當), 토기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것들은 현재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다수 전시돼 있다. ‘고고학사전’에 따르면 ‘백제 토기는 백제라는 특정 정치체의 시공적(時空的) 영역 안에서 제작·사용되었던 것으로 여타 토기와 식별할 수 있는 일정한 양식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토기군’을 지칭한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와 특정 토기의 양식이 가진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일정 양식 토기의 성립이 반드시 국가의 형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정치적 긴장 상황이 매우 증대되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고구려나 신라 모두 그 시공적 영역 내에서 식별할 수 있는 토기양식이 등장하고 있어 이 무렵 국가와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 토기의 형성은 곧 백제라는 국가 형성의 한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청양군을 찾게 된다면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생활물품 가운데 하나였던 토기를 통해 백제의 실체와 그림자를 살펴보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1-05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운전자는 계기판을 보고 속도를 조절한다. 여기서 계기판에 표시된 속도가 ‘계측’이라면, 속도를 내거나 줄이는 게 ‘제어’이다. 우리의 일상은 알고 보면 ‘계측과 제어’로 구성돼 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살 때도 저울의 눈금을 보고, 주유소에서 주유할 때도 기름의 양을 숫자로 본다. 산업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상보다 현장의 계측은 더욱 빈번하고 극도로 정밀하게 이뤄진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계측제어 전문가인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계장정비섹션 이경재(60) 포스코 명장을 만나 섬세함을 배워 본다. - 현재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포항제철소에는 계측기가 무려 4만5000여 대가 있다. 이 모든 계측기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해서 유량, 압력, 온도, 레벨, 무게 등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측기는 사람이 정량화하지 못하는 많은 종류의 설비 상태를 숫자로 보여준다. 나는 이 계측기가 오차 없이 정확하게 측정하는지 진단하고, 교정하는 일을 한다. 계측기를 제어하는 DCS(분산제어시스템)에 대한 문제 해결 및 개선 방안 도출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또한 기술 검토 및 사양 설계, 후배 양성교육 등 기술 전수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다. - 업무를 하면서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제철 공정 중 연주설비는 용강을 천천히 흘려보내면서 냉각수를 분사해 고체 슬라브를 만들게 된다. 냉각수의 분사량에 따라 슬라브의 품질이 결정된다. 냉각수가 많으면 급격히 냉각돼 크랙이 발생하고, 적으면 블랙아웃이 발생하거나 강도가 약해진다. 2016년, 우리는 쇄빙선 선두의 철판이나 컨테이너선 갑판에 사용되는 후판 400㎜ 특수강 주편 생산을 해야 했다. 특수강 생산을 시도했지만, 냉각수의 미세 유량 제어 문제로 인해 품질 불량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따라 수요자는 구매를 꺼리기 시작했고, 제조 원가 손실도 증가했다. 운전, 정비, 기술부서가 모여 대책을 검토한 결과, 84대의 제어밸브를 교체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기존 제어밸브는 15~80% 범위에서 사용됐지만, 특수강 조업에서는 5~10% 범위에서 제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주설비 구성상 모두 교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는 제어밸브의 특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연주공정의 냉각 조업 패턴은 몰랐다. 그래서 기초부터 조업 기술을 파악하고 실적을 분석했다. 제어밸브 동작 특성을 5~60%로 바꾸고, 특수강 제어용 PID 제어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일반강 품질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50일간 밸브 특성을 개조하고 프로그램을 개선해 미세 유량 제어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크랙 발생 품질 불량을 0.8%로 낮추는 획기적인 개선을 이뤄냈다. 모두가 변화를 두려워할 때, 그간 쌓아온 밸브 특성과 제어 이론의 전문지식, 새롭게 습득한 조업 이론을 접목시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떤 문제든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며, 모르는 것을 알아내려는 평소의 지론이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 현장 관리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다. 스위스 치즈 모델이라는 안전 이론이 있다. 이는 모든 현상이 하나의 원인에서 기인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케이블이 자주 끊어지는 고장이 발생할 때, 단순히 해당 부위의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수리 방법을 찾기보다는, 그 환경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재질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론부터 먼저 파고들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아기가 울 때 엄마는 배가 고픈지, 기저귀가 젖었는지 아이의 입장에서 알아차리고 돌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직장은 학교나 군대와 달리 단기간에 관계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관계를 이어가는 집단이다. 따라서 후배라면 선배의 입장에서, 선배라면 후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먼저 다가가는 소통 방식이 중요하다. 이는 직장 생활의 보람을 배가시키는 요령이라고 확신한다. - 배드민턴 불모지 포항에 생활체육 클럽 31개를 만들었다고. △내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특기를 가지라고 권장하는 편이다. 나 역시 배드민턴을 취미이자 특기로 즐기고 있다. 처음에는 당구, 탁구, 테니스를 하다가 일본 유학 시절 학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 배드민턴을 처음 알게 됐다. 그때 배드민턴이 대중적인 스포츠라는 것을 느끼고, 다른 운동을 모두 그만두고 배드민턴에만 몰두하게 됐다. 한국에 돌아온 뒤, 포항에서 배드민턴을 하려고 보니 중앙고등학교와 포항공대 체육관에서 소규모 인원으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7년 6월, 12명을 모아 포항시 첫 생활체육 클럽인 ‘포스피드’를 만들었고, 주변 학교를 설득해 생활체육 배드민턴 연합회까지 탄생시켰다. 지금은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을 합쳐 31개 클럽, 3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포항시 배드민턴협회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정과 회사생활, 배드민턴 활성화까지 노력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첫째가 5살, 둘째가 100일 지난 시점부터 시작했으나, 아내와 수많은 갈등도 있었다. 심지어 애꿎은 라켓을 부러뜨리며 다시는 배드민턴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의 이해심 덕분에 지금의 큰 협회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배드민턴을 통해 남 앞에 서는 것을 꺼렸던 성격이 바뀌었고,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후배 숙련기술인에게도 자신의 특기를 가지라고 적극 추천하고 싶다. - ‘소프트웨어 개선’으로 전국 최초 자주관리대회 동상 수상 이야기를 들려달라. △1989년, 입사한 지 5년 정도 됐을 때였다. 당시 제강 탈가스 공정의 설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공정은 쇳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여러 종류의 합금철을 투입해 용강의 성분을 맞추는 작업이다. 매일 현장 설비 점검을 마치면 운전실에서 조업하시는 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업 방법이나 불편사항, 설비 성능 개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보니 운전과 조업에 대해 깊이 알게 됐다. 가끔 직접 조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어느 날 용강 성분을 조정하기 위해 3~8종류의 합금철을 한 종류씩 투입하는 것을 보고, 문득 ‘한꺼번에 투입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한꺼번에 투입해도 성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프로그램 개선을 시작했다. 운전부서의 협조를 받아 수차례 테스트를 거친 결과, 투입 횟수를 1~2회로 줄여 탈가스 공정의 경처리 조업시간을 20분대에서 10분대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단순히 제어 시스템의 프로그램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업 방법에 대한 이해도와 완벽한 제어의 균형을 통해 실질적인 기술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 당시 경북도, 전국 대회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개선이었기 때문에 “진짜 개선된 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에 “기계장치나 전기설비 등 눈에 보이는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프로그램을 활용한 개선이 더 큰 성과를 가져오고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설비 소프트웨어 개선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나만의 지침을 만들어 늘 체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포스코에 입사한 후, 나는 1제강 공장에서 계장정비 업무를 맡았다. 이때부터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라”,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마라”, “내가 하는 업무에 최고가 되어라”, “대인관계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후회하는 행동은 두 번 이상 하지 않겠다”라는 셀프 지침을 세우고 실천해 왔다. 명장이 된 후, 6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는 것을 묻지 않는 것이 창피한 것이다”라는 단순한 지침을 추가해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 앞으로의 포부는. △포항제철소는 스마트팩토리 구축, 4차 산업혁명 등 기술의 변화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계측제어는 안전, 품질, 생산, 에너지 등 모든 분야의 기초이다. 어떤 종류의 AI, 빅데이터라도 계측제어를 통해 기초 데이터의 신뢰성이 높고 정확해야 성공할 수 있다. 고급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집이라면, 건물의 기초가 바로 계측제어의 역할이다. 탄탄히 다진 기초 위에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다. 오차가 크고 수시로 흔들리는 데이터로 집을 짓는다면 그 집은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특히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소홀해지기 쉽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하고 있는 계측제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계측제어에 대한 인식의 저변을 넓히는 일에도 힘쓰고 싶다. 또한 이제 시작되는 수소환원제철 공법의 수소안전관리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에도 앞장설 계획이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이자 사명이다.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포스코 명장은 △포항제철공고 졸업(1984년) △전국자주관리대회 동상(1989년) △전사 제안왕(1990년) △일본 산업기술단기대 졸업(1997년) △포스코 명장(2018년) △위덕대학교 신재생에너지공학과 기업전문교수(2020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1-05

“유방암 수술 위해 포항을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이제 그것이 실현돼 너무 기쁘다"

사실 암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이 서울의 ‘빅5 병원’을 떠올리는데, 포항세명기독병원은 이런 편견을 깬 흔치 않은 병원으로 손꼽힌다. 전국 각지의 환자들이 치료 잘하는 의사를 찾아 수도권 병원에서 지역 병원으로 U턴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데, 실제로 많은 환자가 포항세명기독병원행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병원 백남선 원장은 유방암 분야의 세계적 명의로 정평이 나있다. 백 원장은 지난 2021년 인생 2막을 고향도, 오래 살아온 도시 서울도 아닌 ‘포항’에서 열기로 했다. 그가 포항에 내려온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유방암 분야 최고 권위자 백남선 원장을 지난 1일 만나 ‘유방암 예방과 극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우리나라 여성암 1위인 유방암이 급증한 원인은 무엇이며, 어느 연령대의 발병률이 가장 높나.  -국가암정보센터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유방암 환자는 2만8000명으로 여성암 1위를 차지했다. 연령대별로 40대 발병율이 가장 높고 50대, 60대, 30대 순서로 많다.  특히 최근 들어선 30대 발병률이 높아지는 추세다.  직장생활 하는 여성이 늘면서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식습관이 서구화되면서 고칼로리 음식 섭취가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또 피임약 복용이 늘고 첫째 아이 출산은 늦어지는데 반해 모유 수유 기간이 짧아진 것도 영향을 미친다. □ 백 원장은 전북 익산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 입학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서울에서 생활을 해왔다. 흔히 명의들이 은퇴를 고려하면 유명 병원에서 서로 모시려고 한다. 하지만 백 원장은 서울 지역 병원에서의 수많은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돌연 ‘포항행’을 택했다. -포항은 한국 경제의 주춧돌인 포스코와 세계적인 대학인 포스텍이 있는 지역으로, 글로벌 의료 활동을 펼치기에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2021년 9월 포항세명기독병원 유방갑상선암센터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지난달 14일까지 유방암 및 갑상선암 수술 500여 건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부분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제 병원은 유방암과 갑상선암 전문 치료를 위해 환자 중심의 가치관을 갖춘 우수한 의료진과 최첨단 의료 장비, 암환자를 위한 입원실 등 두루 여건을 갖춘 상태가 만들어져 있다.  진료 프로세스도 진척됐다.  그간 진단된 암에 대해 다각적인 분야에서 환자의 상태를 진료하는 최신 치료법인 다학제 진료 시스템을 적용하고 빠른 진단검사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암환자의 기다림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세명기독병워에서도 당일 진단 후 일주일 이내에 수술과 시술을 시행해 빠르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암환자의 불안감을 줄여줄 수 있다는 점이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진료를 해보면 지역 주민들이 보내주는 신뢰도를 느낄 수 있는데, 더 노력해 질 높은 의료서비스로 보답하겠다.  최근에는 수술 후에 항암제 치료가 꼭 필요할지를 알아보는 유전자분석법을 미국연구소와 협업해 실제 우리 환자들에게 응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나의 특기인 환자들의 생존율과 외적 여성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고려한 ‘암수술 후 동시재건술’이 인기다.  포항뿐만 아니라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광주 등 전국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심지어 미국, 영국, 중국,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도 환자들이 래방한다. 그들로부터 서울의 어느 대학병원보다 못지않은 치료를 해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때는 뿌듯하기도 하다.    지금 우리나라 지방 의료체계를 두고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포항에 내려오면서 지방에서도 ‘최신의 기술로 암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이 내 목표가 잘 안착돼 그동안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간과 치료비용을 최소화시켜줬다고 자부한다.  □ 1986년 당시 유방 전 절제 없는 유방보존술을 연구한 계기와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당시는 유방암에 걸리면 유방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암이 전이됐다. 마침 그때 방사선치료기가 구비돼 있던 원자력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던 터라 부분 절제를 하고 방사선 치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배 교수님들로부터 “위험하다. 조직을 살리면 암이 재발할 확률이 높아질 텐데 어린놈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그 방식을 나무랐다. 오기가 생겨 더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절제를 하지않고도 유방암을 퇴치하는 나만의 치료법을 개발해 냈다.   기억에 남는 환자는 많다. 결혼도 안 했는데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된 약사가 유방을 다 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울었다. 또 수술 후에 이혼을 당하거나, 신체적 약점에 따른 자괴감으로 먼저 이혼을 제안한 여성, 극단적 선택을 하는 여성, 직장생활을 포기하거나, 산으로 들어간 여성도 있었다. 어떤 환자는 목욕탕을 못 간다고 하길래, ‘팔 없는 사람도 가는데 왜 못 가느냐’고 했지만 당사자는 그게 아니었다. 여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았고, 그것이 나만의 길을 가게 한 동인을 만들었다.   최근 유방보존술은 유방 모양을 원래대로 갖추기 위해 수술 후 빈 공간에 팰릿 생체조직인 ADM을 채워넣는다. 쉽게 말해 사람 피부로 만든 알갱이다.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밥은 먹고살았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못한 꽃을 보려면 다른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유방암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식습관 영향이 가장 크다. 전체 암 원인의 35%가 잘못된 식습관이다.  암(癌) 자를 보면 입(口)이 산처럼 쌓여서 완성된다. 많이 먹고, 잘못 먹고, 맛있는 것만 먹어서 생기는 게 암이다. 여성호르몬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는데 폐경 여성 중에 삶의 질을 높이겠단 이유로 여성호르몬을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분들이 많은데 상당히 위험하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웃으면 암을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 □ 마지막 한 말씀 부탁 드린다. -우수한 의료진, 최첨단 방사선치료 장비와 시설시스템을 갖춘 지역 병원이 있다면 지역에서 암 수술받는 것이 환자에게 더 이득이다. 암 환자는 늘 불안감을 가지는데 굳이 대학병원을 찾아 한달, 두달 대기하면서 불안감을 키울 필요가 없다. 재수술 비율도 선진국에서는 20% 이상이나 우리 병원은 병리 의사가 진행하는 동결절편생검술을 수술 중 시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춴 놓아 재수술이 지금까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역 병원에서도 충분히 암 수술이 가능함을 우리 병원 암 수술 실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백남선 원장 백남선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 입학을 시작으로 50년간 임상의사로서 서울의 원자력병원장, 건국대학교병원 병원장, 이화여자대학교 여성암병원 병원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또 학생과 수련의들의 교육, 연구, 진료는 물론, 세계학회에서 기조강연(keynote lecture)을 수차례 해 오는 등 한국의 의료 수준을 세계에 알려왔다. 이 업적을 평가받아 한국 및 아시아 유방암학회장도 역임했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4-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