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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녀·유화·허황후… 그녀들의 신비한 역할

이용선기자 · 홍성식 기자
등록일 2024-11-24 20:00 게재일 2024-11-2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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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 <16>고대 국가 건국신화 속 여성들
선도산 성모의 설화가 떠도는 경주 서악 일대의 현재 모습.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있고, 사진이라는 구체화된 증거가 남는 시대의 역사는 왜곡될 가능성이 낮고, 미루어 추측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오래된 문헌과 낡은 고서(古書)에 짤막하고 은유적으로 남은 기록을 찾아내고 연구해 그 비밀을 푸는 행위다. 자료가 피상적이고 부족하면 실체를 밝히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고대국가의 태동과 그것에 얽힌 각종 설화나 전설을 들여다보면 ‘아득하다’는 느낌 앞에 서게 된다.

사학자건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건 마찬가지다.

“건국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고 말한 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 강사다.

채 강사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는 선도산 성모와 동일한 의미의 ‘선도산 신모’를 다루고 있다.

 

곰이 사람으로 변해 단군을 낳은 ‘웅녀’

아들이 주몽이 세운 고구려 여신 ‘유화’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印 공주 ‘허왕후’

고대 한국 신모들의 영향력 ‘매우 강력’

국가 정체성 형성에 신성한 존재로 인식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성모’는 누구였을까?

오랜 옛날 시작된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역사 속 성모(=신모)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죽음 이후엔 어떤 방식으로 추모됐는지를 추적하고 있는 채미하의 논문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한국 고대 각국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시조의 어머니와 시조의 비는 신모였다. 우선 시조의 어머니, 시조모로는 고조선 건국신화에 보이는 웅녀가 있다. 웅녀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곰이었으나 신의 아들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어 환웅의 시험을 통과한 후 사람이 되었고, 또 아이를 낳기를 간절히 원하여 인간으로 변한 환웅과의 결합을 통해 단군을 낳았다.”

채미하는 우리 땅 고대국가의 대표적인 신모로 고조선의 웅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화는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의 어머니다. 아들이 나라를 세운 후에는 여신(女神)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유화의 경우처럼 국가를 태동시킨 성모라면 사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허왕후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비(妃)이자 김해 허씨의 시조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됐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인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는 것이 ‘두산백과’의 설명. 유사한 맥락에서 이야기되는 정견모주는 또 어떤 관련 설화를 지니고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펼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된다.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 등장하는 가야 산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찬자가 인용한 ‘석이정전’ 즉, 승려 이정의 전기에 등장하는 것. ‘석이정전’은 신라 때 최치원이 지었다고 전한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가야 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게 감응돼 대가야와 금관국의 왕을 낳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순응전’ 즉, 승려 순응의 전기도 인용돼 있는데, 그에 따르면 대가야의 월광태자가 정견의 10대손이라고 한다.”

월정교 너머 신라인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여겼던 선도산이 보인다.
월정교 너머 신라인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여겼던 선도산이 보인다.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에 가까웠던 설화 속 성모들

앞서의 설명이나 인용처럼 고대국가의 태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神)에 필적하는 능력과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유화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계 왕들에 의해 부여신(神)으로 숭배받기도 했고, 허왕후는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가야에 불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한다.‘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신모는 시조모와 시조비로 대별’된다. 둘 가운데 시조모는 천신과 혼인한 웅녀, 유화, 정견모주가 있다. 배우자 없이 아들을 낳은 선도산 성모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 논문은 “시조비로는 알영과 허왕후가 있으며, 소서노는 시조모이자 시조비이기도 했다”고 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건국신화를 보면 신모 중 시조모는 시조를 낳고 양육하고는 건국 이후에는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신모가 한국 고대 건국신화에서 소외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유화는 시기에 따라 변화되는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시비·시아하백녀하백녀 유화로 나오며, 그 성격도 수신적 성격뿐만 아니라 신모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선도산 신모 역시 6촌장 세력과 연합하면서 신모로 자리매김했고 신라 중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나라를 통치할 아들을 낳거나, 최고 권력자의 아내가 된 여성.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석이정전’ 속에는 고대국가의 태동과 형성에 관여한 그녀들의 신비스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의 비밀이 온전히 풀릴 날이 언제일지 궁금한 게 비단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계속)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를 소재로 Chat GPT가 그린 그림.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를 소재로 Chat GPT가 그린 그림.

신라 첫 임금 박혁거세와 선도산 성모

신라 사람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를 떠도는 설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성모(聖母)가 살았던 곳이 선도산’이란 게 아닐까.

박혁거세는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으로도 불린다. 무슨 뜻일까? ‘거서간’은 진한 시대의 명칭으로 왕이나 귀인을 부르는 칭호다.

이와 관련 일연의 ‘삼국유사’는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고 쓴다. 그렇기에 여기서 ‘사소부인’으로 지칭되는 사람을 ‘선도산 성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건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은 구체적 증거가 없거나 부족한 ‘신화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두 사람이 어떤 방식이건 모종의 형태로 결부돼 이야기되고, 논의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고문헌에선 박혁거세의 출생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삼국유사’를 다시 펼쳐본다. 이런 서술이 등장한다.

“혁거세는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도무지 질서가 없다.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고 의논했다. 그때 알천 언덕에서 멀지 않은 양산(楊山) 기슭에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이 나정(蘿井)이란 우물 곁에 가보니 하얀 말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가 하늘로 날아갔다. 거기엔 자줏빛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는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요약해 정리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이 난생설화(卵生說話)와 더불어 신라의 첫 임금이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함께 언급한다.

“박혁거세는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있다. 사소부인은 선도산 성모와 같은 여신이다.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곳은 서형산(西兄山) 혹은, 선도산(仙桃山)이라 불리는 산이다.”

까마득한 2000여 년 전 고대왕국의 출발과 관련된 설화이니 현대의 시각과 인식에선 그저 허무맹랑한 풍문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게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 이야기다.

그러니, 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건 당연할 터.

하지만, 대부분의 고문헌이 기록하고 있는 박헉거세의 탄생설화는 “아기였지만 몸에서 광채가 나고, 그 아기를 본 짐승들이 몰려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는 등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이처럼 특별했던 아기, 즉 신라의 최초 통치자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을까? 선도산 성모가 낳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들려줄 사람은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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