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br/><19> 마애여래삼존불 왕들의 무덤을 내려다보다
불국정토(佛國淨土) 혹은, 서방정토(西方淨土)가 되고자 했던 신라엔 돌과 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부지기수였다. 이 사실에는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석굴암은 직사각형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돼 있다. 360여 개의 돌로 천장을 만들어낸 기법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 빼어남이 빠지지 않는다.
석굴암 본존불(本尊佛·가장 높은 지위의 부처)과 십일면관음보살상, 사천왕상 등은 능수능란한 석조 기법과 사실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표현, 화려함과 미려함에서 21세기 석물조각 기법을 훌쩍 뛰어넘는 신라 석공들의 기예를 보여준다.
경주 남산의 미륵곡 마애여래좌상(彌勒谷 磨崖如來坐像) 또한 신라 사람들의 탁월한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불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다. ‘위키백과’는 “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불상”으로 미륵곡 마애여래좌상을 평가한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는 상투 형태로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는 묘사는 이 불상이 지닌 사실감과 핍진함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시대 만들어진 불상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한 시절에 들어선 왕릉이 즐비한 서악 일대를 굽어보며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어떤 위상과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안산암으로 조각된 ‘아미타여래입상’ 본존불은
상투 튼 소라 모양 머리칼에 ‘은은한 웃음’ 특색
좌측 ‘관음보살상’·우측에 ‘대세지보살상’ 배치
두 협시보살상은 화강암으로 독립적으로 조각
백성을 하나로 묶을 이데올로기 필요했던 지배층
불교적 대안으로 아미타신앙 퍼트렸을 가능성 커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과 4.53m의 관음보살상
영남대학교 한국학과 이창국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에선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논문은 아래와 같은 서술로 시작된다.
“경주 시가지 서쪽에는 서천(형산강)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 서천 너머에 무열왕릉과 경주 서악동 고분군이 자리한 선도산(해발 380m)이 있다. 선도산에는 신라 왕릉과 고분을 비롯하여 ‘서형산성(西兄山城)’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 ‘성모사(聖母祠)’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있다. 그리고 아미타삼존상이 이 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 쓰인 ‘아미타삼존상’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대 신라는 물론, 현대 경주에서도 기이한 설화와 신성함이 숨 쉬는 지역으로 지목되는 선도산 일대의 형상을 설명한 이창국의 논문은 마애여래삼존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높이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좌측에 높이 4.53m의 관음보살상, 우측에 현재 높이 4.56m의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이중 본존불은 자연 암벽인 안산암에 조각된 마애불이고, 좌우측의 협시보살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별도의 독립된 입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현재 코의 일부와 입과 턱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바닥에는 별석의 화강암대가 있다. 대좌는 복판의 복련석 5매로 구성되어 있으나, 우협시상 측면에 본존불의 대좌로 추정되는 석재편들이 있어 현재의 대좌는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차례 찾아 그 지역을 꼼꼼히 돌아본 경주 서악마을(선도산 일대)엔 무열왕릉을 비롯해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법흥왕릉 등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지호지간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자면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 정상 부근에 우뚝 서서 부처를 숭배하고, 불가(佛家)의 이념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신라의 지배자들이 묻힌 능(陵)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신라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낼 대상물의 필요성
이런 외형적인 모습을 갖춘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에 자리한 것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엔 “신라의 지배층들은 민심 이반에 대처하고, 삼국통일전쟁에 따른 신라인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강구했을 것”이란 문장이 나온다.
6~7세기는 신라가 백제·고구려·당나라와 영토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다투던 시기다. 피와 살점이 튀고, 언제 생명을 잃을 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신라의 지배층은 백성을 하나로 묶어낼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을 터.
그랬기에 “불교적 대안으로 아미타신앙을 유행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미타신앙의 대상물로, 신라인들의 마음을 위로할 존재물로 삼존불을 조성했을 것”이란 게 논문을 쓴 이창국의 추론이다.
살아있을 때 덕을 쌓고 선행을 베푼다면 죽어서 부처가 다스리는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삼국통일 즈음 전쟁 시기에 신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그런 믿음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던 게 아닐지. <계속>
경주 서악마을엔 어떤 이야기가…
선도산 성모 설화 스며있는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공간
지금의 경주 서악마을은 ‘황금의 고대왕국’으로 불리는 신라의 시작을 알린 선도산 성모의 신비로운 설화가 스며있고, 미학적인 측면에서의 완성도가 그 어느 석불보다 뛰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또한, 신라를 통치한 여러 왕의 유택(幽宅)들까지 줄지어 늘어선 지역이니 서악마을은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공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한국관광공사는 경주 서악마을 고분군(古墳群·다수의 고분이 집중된 곳)의 가치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려주고 있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뒤편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1964년 8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곳 고분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봉토 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를 알 수는 없으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왕릉으로 추측한다.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왕의 무덤과 신라인들이 ‘성스러운 어머니’로 추종했던 여성의 신화, 여기에 거대한 석불의 비밀스러움까지 깃든 서악마을은 그간 유물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지역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24년 3월 출간된 ‘서악마을 이야기’엔 이런 노력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담겨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선도산 아래 서악마을이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쏟은 15년간의 땀방울을 보여준다. 그랬기에 경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문화유산 주변의 경관과 마을을 대상으로 삼은 선도적 노력과 풍성한 활용 사례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간 서악마을은 삼층석탑 주변에 작약과 구절초를 심어 지역민과 관광객을 위한 축제를 열었고, 인근 서원과 서당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가 어우러지는 각종 행사도 다수 기획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신라 왕릉 여러 기가 선도산에 자리한 이유는 서남으로 뻗은 능선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설에 더해 경주 서악마을을 ‘고대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조성할 수 있었던 건 신라의 문화와 예술을 역사적 단절 없이 오늘에 이어가고 싶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꽃피는 계절엔 자연이 선물하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고, 울울창창 나무들 푸른 여름엔 우리 땅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눈 내리는 겨울이면 낭만과 서정 속에서 즐거이 서성일 수 있는 경주 서악마을. 이런 공간을 가졌다는 건 비단 경주 사람들만의 행운이 아닌 우리 모두의 즐거움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