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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10년을 바치기도

등록일 2024-11-20 19:27 게재일 2024-11-2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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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신앙으로 여기며 포항의 풍경과 정신을 그린 화가  박수철<br/>&lt;4&gt;온몸을 던진 치열한 작가정신
박수철作 ‘구만 인상’.
박수철作 ‘구만 인상’.

박수철 선생은 해안둘레길을 자주 걸었다. 바다의 도시 포항에 사는 화가로서 바다를 제대로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듯 그는 작품 한 점 한 점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에게 작품은 신앙이다.

 

포항은 바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바다와 함께하고 있으니 바다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바다를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안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지요. 구룡포에서 호미곶 구만리까지 가는데 하루가 더 걸렸어요.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해야 하니까요. 도중에 민박하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김도형(김) : 선생님이 사신 흥해 해원빌라는 2017년 포항 지진 때 심하게 파손돼 언론에도 소개되었지요.

박수철(박) :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졌지요. 한마디로 끔찍했습니다. 나중에 빌라를 철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바람에 두 달 가까이 흥해체육관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보상금으로 용흥동에서 전세를 살다가 송도에 작은 집을 장만했습니다. 이 집도 6개월 동안 수리한 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도 힘든 일을 당하게 되더군요. 2022년 태풍 힌남노가 몰아쳤을 때 집에 물이 차올라 화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김 : 지상에 집 한 채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군요. 집수리 기술은 언제 익혔습니까?

박 : 조각하는 후배의 집안이 죽도시장에서 가구점을 했습니다. 후배는 가구점을 기반으로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그때 후배와 함께 다니며 집수리 기술을 배워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년 정도 되었군요.

김 :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바다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유가 있는지요?

박 : 포항은 바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바다와 함께하고 있으니 바다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바다를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안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지요. 구룡포에서 호미곶 구만리까지 가는데 하루가 더 걸렸어요.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해야 하니까요. 도중에 민박하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김 : 구만리 사진은 지금도 갖고 계시겠군요.

박 : 구만리뿐만 아니라 포항의 옛 풍경 사진을 여러 장 갖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괜히 울적해지지요.

김 : 선생님의 과거 사진 중에 ‘사라진 구만의 언덕을 애도하며’라는 글을 배낭에 붙이고 몇 사람과 함께 걷는 장면이 있습니다.

박 : 구룡포에서 구만리까지 가는 길에 큰 도로가 나면서 아름다웠던 모래 언덕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정말 가슴 아팠지요. 지인들과 그 길을 걸으며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송도해수욕장에도 모래 언덕이 참 좋았는데……. 물론 개발이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지워버리면서 해야 하는 건지, 참 안타깝습니다.

박 선생은 젊은 날부터 작가 노트를 꾸준히 써왔다. 31년 전 여름 어느 날, ‘송도의 모래 언덕’에 관한 상념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바람이 불던 날

송도의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파도가 일고, 바람이 바다 내음을 몰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위로 사라지는 그 한나절을

그렇게 무릎 조아려 세워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그 언덕에 앉아 있다.

하모니카와 하프 연주의 브리티시 포크를 들으면서.

삶이란 수많은 모래알 속의 하나로 반짝이면 되는 것을

왜 저 혼자 바위가 되려 하는지.

- 1993년 7월 18일

김 : 작업은 주로 언제 하십니까?

박 : 자연광이 비치는 낮에만 합니다. 그림이 인공조명을 받으면 색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광도 오전과 오후의 느낌이 다르지요. 그리고 여름 풍경은 여름에, 겨울 풍경은 겨울에만 그립니다. 그 계절에 마무리하지 못하면 다음 해로 넘어갑니다. 여름 풍경을 겨울에 그리면 여름의 느낌을 살려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작업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김 : 그렇다면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박 : 평균 3∼4년이 걸립니다. 10년 넘게 걸린 작품도 있어요.

김 : 아직 완성이 안 된 작품도 있을 텐데, 그런 작품을 보면 어서 완성해야지 하는 조바심이 나지 않습니까?

박 : 사는 게 미완성인데 조바심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김 : 젊은 날에도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까?

박 : 젊은 날에는 1년에 100여 점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그중 90여 점은 찢거나 뭉개버렸어요. 해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요.

박수철作 ‘태풍 전일의 구만’.
박수철作 ‘태풍 전일의 구만’.

김 : 다작(多作)을 하다가 과작(寡作)으로 바뀐 거군요.

박 : 젊은 날에는 의욕과 열정이 넘쳐 작품 수가 많았지요. 나이 들수록 작품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되니 작품 수에는 집착하지 않게 되더군요.

김 : 열정적으로 그리다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박 : 젊은 날 눈이 내리면 자전거를 타고 동빈내항과 철길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녔습니다. 나의 내면에 그 풍경을 꼭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제 포항도 눈을 구경하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김 : 그림을 그리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박 : 내가 벌어서 해결했고, 미국에 있는 누나와 조카가 물감과 이젤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김 : 포항의 풍경 중 각별히 애정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박 : 구만리이지요. 구만리는 가장 포항다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토에서 싹을 틔우고, 바람과 싸우며 결국 이겨내는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나는 구만리를 포항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김 :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 : 동빈내항을 어머니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지켜주는 곳이니까요. 태풍이 오면 동해안의 많은 선박이 동빈내항으로 몰려오지요.

김 : 신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박 : 나에게 신앙은 곧 작품입니다. 믿는 만큼, 다가서는 만큼, 노력하는 만큼 신앙도 작품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김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박 : 갖고 있는 물감과 캔버스를 모두 소진한 후 죽고 싶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고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말했다. 고흐와 이중섭 그리고 많은 예술가가 그랬다.

하지만 고통은 지나가도 아름다움은 남지 않을 수 있다. 1950년 전쟁통에 태어난 이 화가는 숱한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일흔 중반에 이르렀다. 인생을 정리할 시점에 이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현장에 나간다. 신은 과연 이 화가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줄 것인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묵직한 질문이 명치를 찔렀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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