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신앙으로 여기며 포항의 풍경과 정신을 그린 화가 박수철<br/><4>온몸을 던진 치열한 작가정신
박수철 선생은 해안둘레길을 자주 걸었다. 바다의 도시 포항에 사는 화가로서 바다를 제대로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듯 그는 작품 한 점 한 점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에게 작품은 신앙이다.
포항은 바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바다와 함께하고 있으니 바다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바다를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안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지요. 구룡포에서 호미곶 구만리까지 가는데 하루가 더 걸렸어요.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해야 하니까요. 도중에 민박하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김도형(김) : 선생님이 사신 흥해 해원빌라는 2017년 포항 지진 때 심하게 파손돼 언론에도 소개되었지요.
박수철(박) :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졌지요. 한마디로 끔찍했습니다. 나중에 빌라를 철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바람에 두 달 가까이 흥해체육관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보상금으로 용흥동에서 전세를 살다가 송도에 작은 집을 장만했습니다. 이 집도 6개월 동안 수리한 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도 힘든 일을 당하게 되더군요. 2022년 태풍 힌남노가 몰아쳤을 때 집에 물이 차올라 화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김 : 지상에 집 한 채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군요. 집수리 기술은 언제 익혔습니까?
박 : 조각하는 후배의 집안이 죽도시장에서 가구점을 했습니다. 후배는 가구점을 기반으로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그때 후배와 함께 다니며 집수리 기술을 배워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년 정도 되었군요.
김 :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바다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유가 있는지요?
박 : 포항은 바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바다와 함께하고 있으니 바다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바다를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안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지요. 구룡포에서 호미곶 구만리까지 가는데 하루가 더 걸렸어요.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해야 하니까요. 도중에 민박하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김 : 구만리 사진은 지금도 갖고 계시겠군요.
박 : 구만리뿐만 아니라 포항의 옛 풍경 사진을 여러 장 갖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괜히 울적해지지요.
김 : 선생님의 과거 사진 중에 ‘사라진 구만의 언덕을 애도하며’라는 글을 배낭에 붙이고 몇 사람과 함께 걷는 장면이 있습니다.
박 : 구룡포에서 구만리까지 가는 길에 큰 도로가 나면서 아름다웠던 모래 언덕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정말 가슴 아팠지요. 지인들과 그 길을 걸으며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송도해수욕장에도 모래 언덕이 참 좋았는데……. 물론 개발이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지워버리면서 해야 하는 건지, 참 안타깝습니다.
박 선생은 젊은 날부터 작가 노트를 꾸준히 써왔다. 31년 전 여름 어느 날, ‘송도의 모래 언덕’에 관한 상념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바람이 불던 날
송도의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파도가 일고, 바람이 바다 내음을 몰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위로 사라지는 그 한나절을
그렇게 무릎 조아려 세워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그 언덕에 앉아 있다.
하모니카와 하프 연주의 브리티시 포크를 들으면서.
삶이란 수많은 모래알 속의 하나로 반짝이면 되는 것을
왜 저 혼자 바위가 되려 하는지.
- 1993년 7월 18일
김 : 작업은 주로 언제 하십니까?
박 : 자연광이 비치는 낮에만 합니다. 그림이 인공조명을 받으면 색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광도 오전과 오후의 느낌이 다르지요. 그리고 여름 풍경은 여름에, 겨울 풍경은 겨울에만 그립니다. 그 계절에 마무리하지 못하면 다음 해로 넘어갑니다. 여름 풍경을 겨울에 그리면 여름의 느낌을 살려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작업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김 : 그렇다면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박 : 평균 3∼4년이 걸립니다. 10년 넘게 걸린 작품도 있어요.
김 : 아직 완성이 안 된 작품도 있을 텐데, 그런 작품을 보면 어서 완성해야지 하는 조바심이 나지 않습니까?
박 : 사는 게 미완성인데 조바심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김 : 젊은 날에도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까?
박 : 젊은 날에는 1년에 100여 점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그중 90여 점은 찢거나 뭉개버렸어요. 해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요.
김 : 다작(多作)을 하다가 과작(寡作)으로 바뀐 거군요.
박 : 젊은 날에는 의욕과 열정이 넘쳐 작품 수가 많았지요. 나이 들수록 작품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되니 작품 수에는 집착하지 않게 되더군요.
김 : 열정적으로 그리다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박 : 젊은 날 눈이 내리면 자전거를 타고 동빈내항과 철길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녔습니다. 나의 내면에 그 풍경을 꼭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제 포항도 눈을 구경하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김 : 그림을 그리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박 : 내가 벌어서 해결했고, 미국에 있는 누나와 조카가 물감과 이젤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김 : 포항의 풍경 중 각별히 애정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박 : 구만리이지요. 구만리는 가장 포항다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토에서 싹을 틔우고, 바람과 싸우며 결국 이겨내는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나는 구만리를 포항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김 :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 : 동빈내항을 어머니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지켜주는 곳이니까요. 태풍이 오면 동해안의 많은 선박이 동빈내항으로 몰려오지요.
김 : 신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박 : 나에게 신앙은 곧 작품입니다. 믿는 만큼, 다가서는 만큼, 노력하는 만큼 신앙도 작품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김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박 : 갖고 있는 물감과 캔버스를 모두 소진한 후 죽고 싶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고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말했다. 고흐와 이중섭 그리고 많은 예술가가 그랬다.
하지만 고통은 지나가도 아름다움은 남지 않을 수 있다. 1950년 전쟁통에 태어난 이 화가는 숱한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일흔 중반에 이르렀다. 인생을 정리할 시점에 이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현장에 나간다. 신은 과연 이 화가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줄 것인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묵직한 질문이 명치를 찔렀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