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신앙으로 여기며 포항의 풍경과 정신을 그린 화가 박수철<br/><2>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하다
박수철 선생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포항에 살던 박 선생이 어떻게 광주에 있는 오지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지호는 어떤 가르침을 전했을까. 그 특별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도형(김) : 현대미술학원이 지역 청년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고 하셨는데, 동인 활동은 없었습니까?
박수철(박) : 1976년으로 기억하는데, 문학과 미술을 하는 청년들이 모여 형상회라는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김 : 동인 활동을 하며 각별히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형상회 동인 중에 김원택이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이 천박한 땅에서』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런데 시대 분위기 때문에 시집 제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요. 한번은 형상회 동인들이 김원택의 시집을 들고 한흑구 선생 댁에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사모님께서 “제목을 왜 하필 천박한 땅으로 했냐”고 하자 한흑구 선생이 “땅이 천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천박해서 그랬겠지”라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더군요.
선생은 항구를 즐겨 그렸는데, 지금도 많은 미술 애호가의 사랑을 받습니다. “배는 자유롭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선생이 1981년 울릉도에 가기 전에 동빈내항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진 촬영을 많이 하셨지요. 선생이 이듬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동빈내항 그림을 많이 그렸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김 : 선생님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인 오지호(1905∼1982) 선생을 사사하셨는데, 어떻게 된 인연입니까?
박 : 1977년에 생계를 위해 부산 온천장에 있는 이화당표구사에서 일했습니다. 부산 석마미술학원의 윤석균 원장이 포항에 왔을 때 소개받았지요. 이화당표구사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던 오재봉(1908∼1991)의 조카가 운영했어요. 오재봉은 오지호와 친분이 있었고, 오재봉의 조카는 광주에 있는 오지호 선생을 만나러 간다고 자랑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오지호 선생을 만나야겠다고 작심하고 오지호 선생에게 10장 가까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김 : 장문의 편지에 뭐라고 쓰셨나요?
박 :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하지 못한 처지인데 어떻게 하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지, 또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김 : 답신이 왔나요?
박 : 답신과 함께 선생님의 저서인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보내주셔서 뛸 듯이 기뻤습니다.
박수철 선생이 간직하고 있는 오지호 선생의 답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서양화는 재료와 도구가 많고 커서 그림을 그리자면 일정한 면적의 장소가 필요한 것이요. (……) 서양화는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요. 그리고 서양화 재료는 고가이고 많은 분량이 필요해서 상당한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요. 이러한 관계로 서양화 공부는 제자를 스승의 집에 두는 법이 없는 것이요. 그리고 공부를 하자면 학교나 연구소에서 하게 되어 있소. 그리고 이 밖의 방법은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작품을 가끔 스승에게 가지고 가서 평(評)과 지도를 받는 것이요.
귀군(貴君)도 이런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귀군이 부산이나 대구로 나와서 일정한 직업을 갖고 생활비를 얻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그곳 화가들에게 지도를 받도록 하는 게 좋을 줄 아오.
- 1978년 11월 30일
김 :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이 무명의 청년 화가에게 이렇게 정성 들여 답신을 보냈다니 뜻밖입니다.
박 : 오지호 선생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지요. 선생은 답신 말미에 추신으로 한자 1800자를 완전히 습득하기를 부탁한다고도 하셨어요.
김 : 무슨 이유로 그런 부탁을 하신 걸까요?
박 : 한자를 알아야 우리 전통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글도 정확하고 품위 있게 쓸 수 있다는 게 선생의 소신이었습니다.
미술 이론에 해박했던 오지호는 한자 교육 부활 등 사회 현안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1970년 정부가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거하자 작품 활동을 뒤로 하고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글을 써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1975년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킨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밖에 문화유산 보호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던 앞선 지식인이었다.
- 「오지호」,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박 : 『계간 미술세계』에서 오지호 선생의 작품을 보자마자 빠져들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즐겨 쓰는 청보라색(울트라마린 블루)을 선생도 즐겨 썼습니다. 나는 하늘과 바다, 설경을 그릴 때 이 색을 주로 씁니다. 둘째, 고추장을 이겨놓은 듯한 끈적임과 어우러짐의 질감(마티에르, mati<00E8>re)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김 : 그 후로도 오지호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는지요?
박 : 그랬지요. 선생한테 받은 편지가 꽤 되는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을 뵙기도 했겠습니다.
박 : 선생한테 첫 번째 편지를 받고 1년 후인 1978년에 선생이 계신 광주로 찾아갔습니다. 그 후로 1년에 두어 번씩 광주로 갔습니다.
김 : 당시 광주 가는 길이 멀었을 텐데요.
박 : 기차로 광주까지 여덟 시간쯤 걸렸어요. 포항역에서 출발해 동대구와 대전을 거쳐 광주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쌀 포대에 작품 두세 점을 담아서 기차에 올랐지요.
김 : 오지호 선생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군요.
박 : 선생을 뵈러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걸 스무 가지쯤 종이에 적었어요. 그런데 막상 선생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면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셨지요. 선생은 미술에 관한 얘기보다 주로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 등 윤리에 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의 대표작 중 「항구」가 있지요.
박 : 선생은 항구를 즐겨 그렸는데, 지금도 많은 미술 애호가의 사랑을 받습니다. “배는 자유롭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선생이 1981년 울릉도에 가기 전에 동빈내항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진 촬영을 많이 하셨지요. 선생이 이듬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동빈내항 그림을 많이 그렸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김 :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박 : 선생은 택시 타는 걸 싫어했습니다. 택시는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울릉도에 다녀온 후 광주에서 택시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이듬해 숨을 거두었습니다.
김 : 이화당표구사에서 계속 일하셨나요?
박 : 부산에서 1년쯤 있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큰숲교회(옛 성남교회) 인근에 갈뫼화실을 열었습니다. 그때가 1978년이었어요. ‘갈뫼’는 수도산을 뜻합니다. 수도산은 포항 원도심의 어머니 같은 산으로, 내게는 정신의 의지처입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