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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10년을 바치기도

박수철 선생은 해안둘레길을 자주 걸었다. 바다의 도시 포항에 사는 화가로서 바다를 제대로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듯 그는 작품 한 점 한 점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에게 작품은 신앙이다. 김도형(김) : 선생님이 사신 흥해 해원빌라는 2017년 포항 지진 때 심하게 파손돼 언론에도 소개되었지요. 박수철(박) :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졌지요. 한마디로 끔찍했습니다. 나중에 빌라를 철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바람에 두 달 가까이 흥해체육관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보상금으로 용흥동에서 전세를 살다가 송도에 작은 집을 장만했습니다. 이 집도 6개월 동안 수리한 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도 힘든 일을 당하게 되더군요. 2022년 태풍 힌남노가 몰아쳤을 때 집에 물이 차올라 화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김 : 지상에 집 한 채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군요. 집수리 기술은 언제 익혔습니까? 박 : 조각하는 후배의 집안이 죽도시장에서 가구점을 했습니다. 후배는 가구점을 기반으로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그때 후배와 함께 다니며 집수리 기술을 배워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년 정도 되었군요. 김 :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바다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유가 있는지요? 박 : 포항은 바다의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바다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바다와 함께하고 있으니 바다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바다를 그리려면 몸으로 바다를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안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걸었지요. 구룡포에서 호미곶 구만리까지 가는데 하루가 더 걸렸어요.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해야 하니까요. 도중에 민박하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김 : 구만리 사진은 지금도 갖고 계시겠군요. 박 : 구만리뿐만 아니라 포항의 옛 풍경 사진을 여러 장 갖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괜히 울적해지지요. 김 : 선생님의 과거 사진 중에 ‘사라진 구만의 언덕을 애도하며’라는 글을 배낭에 붙이고 몇 사람과 함께 걷는 장면이 있습니다. 박 : 구룡포에서 구만리까지 가는 길에 큰 도로가 나면서 아름다웠던 모래 언덕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정말 가슴 아팠지요. 지인들과 그 길을 걸으며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송도해수욕장에도 모래 언덕이 참 좋았는데……. 물론 개발이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지워버리면서 해야 하는 건지, 참 안타깝습니다. 박 선생은 젊은 날부터 작가 노트를 꾸준히 써왔다. 31년 전 여름 어느 날, ‘송도의 모래 언덕’에 관한 상념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바람이 불던 날 송도의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파도가 일고, 바람이 바다 내음을 몰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 위로 사라지는 그 한나절을 그렇게 무릎 조아려 세워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 작은 모래 언덕이 생각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그 언덕에 앉아 있다. 하모니카와 하프 연주의 브리티시 포크를 들으면서. 삶이란 수많은 모래알 속의 하나로 반짝이면 되는 것을 왜 저 혼자 바위가 되려 하는지. - 1993년 7월 18일 김 : 작업은 주로 언제 하십니까? 박 : 자연광이 비치는 낮에만 합니다. 그림이 인공조명을 받으면 색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광도 오전과 오후의 느낌이 다르지요. 그리고 여름 풍경은 여름에, 겨울 풍경은 겨울에만 그립니다. 그 계절에 마무리하지 못하면 다음 해로 넘어갑니다. 여름 풍경을 겨울에 그리면 여름의 느낌을 살려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작업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김 : 그렇다면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박 : 평균 3∼4년이 걸립니다. 10년 넘게 걸린 작품도 있어요. 김 : 아직 완성이 안 된 작품도 있을 텐데, 그런 작품을 보면 어서 완성해야지 하는 조바심이 나지 않습니까? 박 : 사는 게 미완성인데 조바심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김 : 젊은 날에도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까? 박 : 젊은 날에는 1년에 100여 점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그중 90여 점은 찢거나 뭉개버렸어요. 해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요. 김 : 다작(多作)을 하다가 과작(寡作)으로 바뀐 거군요. 박 : 젊은 날에는 의욕과 열정이 넘쳐 작품 수가 많았지요. 나이 들수록 작품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되니 작품 수에는 집착하지 않게 되더군요. 김 : 열정적으로 그리다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박 : 젊은 날 눈이 내리면 자전거를 타고 동빈내항과 철길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녔습니다. 나의 내면에 그 풍경을 꼭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제 포항도 눈을 구경하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김 : 그림을 그리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박 : 내가 벌어서 해결했고, 미국에 있는 누나와 조카가 물감과 이젤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김 : 포항의 풍경 중 각별히 애정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박 : 구만리이지요. 구만리는 가장 포항다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토에서 싹을 틔우고, 바람과 싸우며 결국 이겨내는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나는 구만리를 포항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김 :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 : 동빈내항을 어머니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지켜주는 곳이니까요. 태풍이 오면 동해안의 많은 선박이 동빈내항으로 몰려오지요. 김 : 신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박 : 나에게 신앙은 곧 작품입니다. 믿는 만큼, 다가서는 만큼, 노력하는 만큼 신앙도 작품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김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박 : 갖고 있는 물감과 캔버스를 모두 소진한 후 죽고 싶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고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말했다. 고흐와 이중섭 그리고 많은 예술가가 그랬다. 하지만 고통은 지나가도 아름다움은 남지 않을 수 있다. 1950년 전쟁통에 태어난 이 화가는 숱한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일흔 중반에 이르렀다. 인생을 정리할 시점에 이 화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현장에 나간다. 신은 과연 이 화가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줄 것인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묵직한 질문이 명치를 찔렀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20

다 쓴 물감 튜브에 십자가 새기며 시련을 견뎌내

오지호의 죽음 이후에 박수철 선생은 오지호의 둘째 아들인 화가 오승윤과 인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일요화가회를 만들어 지역 미술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가 의지하던 이들이 죽음을 맞고 사업이 실패하면서 큰 시련을 겪는다. 김도형(김) : 갈뫼화실을 운영하면서 일요화가회도 만드셨지요? 박수철(박) : 오지호 선생의 둘째 아들인 오승윤 선생이 포항에 가면 일요화가회를 만들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1979년에 일요화가회를 만들었는데, 10명 정도가 참여했습니다. 제1회 일요화가회 작품전 축사를 오지호 선생이 쓰셨지요. 오승윤(1939∼2006)은 1939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 8·15 광복 후 아버지(오지호)의 고향인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이사했다. 196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4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창설에 참여하여 1982년까지 교수를 지냈다. 198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00E9mie de la Grande Chaumi00E8re) 등에서 공부했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전업 화가의 길을 걸으며 한국 전통의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승윤의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미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오승윤’,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하신 후 오승윤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의 빈자리를 오승윤 선생이 채워주었지요. 그분께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오승윤 선생이 사기를 당하면서 그 괴로움으로 2006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로서는 기댈 언덕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지요. 그 충격과 상실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김 : 포항 출신 화가 중에는 장두건 선생이 유명한데 혹시 교류가 없었는지요? 박 : 1990년대 후반 장두건 선생이 동아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직후 선생의 본가가 있는 흥해 초곡에 집을 지을 때 형상회 동인이자 동양화가인 정대모와 함께 도와주었지요. 그 후로도 선생과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장두건(1918~2015)은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에서 태어나 흥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미술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 법과로 옮겨 졸업했다. 이때 법과에 학적을 두고 야간에는 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리며 프랑스 유학의 꿈을 품었다. 귀국 후 서울사대부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장두건은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하며 ‘르살롱(LeSalon)’전에 ‘내려다본 식탁’(1958)을 출품해 동상을 받았다. 귀국 후 세종대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 미술학과장, 성신여대 예술대학장, 동아대 예술대 초대학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미술단체인 목우회, 이형회 등을 결성했다. - ‘서울아트가이드’ 참조. 김 :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한 이듬해인 1983년에 결혼했습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돈이 안 되는 화실은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형은 국민은행 최연소 차장으로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형의 도움으로 1980년대 후반 중앙상가에서 신사복 대리점(코오롱 맨스타)을 열었지요. 하지만 대리점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형이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믿던 또 하나의 의지처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김 : 신사복 대리점은 잘되었습니까? 박 : 영업을 몰랐으니 잘될 리 없었고 본사에서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요. 그래도 후배들한테 밥 사주고 술 사줄 형편은 되었습니다. 그 뒤에 제일모직 브랜드(빈체레)로 바꿨다가 IMF 때 문을 닫았습니다. 김 : 후유증이 컸겠습니다. 박 : 암담했지요. IMF 후에 우동 장사, 꽃집 등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서 누나와 막냇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갈까 고민했어요. 마침 지인이 죽도파출소 맞은편의 건물 지하를 무상으로 내주어 ‘자유인’이라는 술집을 열었습니다. ‘자유인’을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많은 예술인이 찾아왔지요. 하지만 3년을 버티다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김 : 장사하면서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신사복 대리점을 하면서 중앙상가 상인회 총무를 맡았습니다. 중앙상가 한중간에 길이 있으니 길을 중심으로 상가를 살려보자고 하면서, 메타세쿼이아 같은 나무를 심자고 했지요. 하지만 의견이 수용되지 않더군요. 지금 중앙상가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김 : ‘자유인’이 문을 닫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집을 팔아 빚을 정리하니 2000만 원이 남더군요. 그 돈으로 어디를 가겠습니까. 또 한 번 앞이 캄캄해졌지요. 그때 지인이 흥해 양백리에 자신이 소유한 빈집이 있다며 거기서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그 집에 가보았어요. 그런데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던지 수풀이 우거져 출입구를 찾을 수 없었고 집 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5개월 정도 수리해 그 집에 들어갔지요. 모든 것을 잃고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겨우 얻게 되자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고, 그림의 주제에도 반영되었어요. 김 : 흥해 양백리에서는 얼마나 사셨습니까? 박 : 7년쯤 살았는데, 어느 날 집주인이 그 땅을 판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집에서 나가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였지요. 자존심을 접고 통사정을 했지만 주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내는 큰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김 :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갔습니까? 박 : 절망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새벽 기도를 열심히 다녔어요. 새벽은 하나님께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김 : 새벽 기도 후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박 :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더군요. 2009년에 미국에 있는 누나와 막냇동생이 4000만 원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흥해에 있는 해원빌라를 매입해 4개월 동안 수리한 후 입주했습니다. 김 : 교회는 언제부터 나갔습니까? 박 : 바로 위 누나가 태어나자마자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그때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나도 어머니를 따라 나갔지요. 어릴 때야 신앙이 무엇인지 알았겠습니까. 20대 후반에 신앙을 제대로 받아들였고, 50대 들어 힘든 일을 겪으며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김 :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요? 박 : 다 쓴 물감 튜브 안쪽을 긁어서 십자가를 새겼습니다. 그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십자가 연작이 만들어지더군요. 박수철 선생은 2023년 5월 흥해 성곡리에 있는 푸른마을교회에서 개인전 ‘The Cross 40’을 열었다. 전시를 본 한 관람객은 이중섭의 은지화가 떠오른다고 했다. 또한 수명을 다한 물감 튜브가 십자가로 다시 태어난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와 중첩되며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7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스승 오지호

박수철 선생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포항에 살던 박 선생이 어떻게 광주에 있는 오지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지호는 어떤 가르침을 전했을까. 그 특별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도형(김) : 현대미술학원이 지역 청년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고 하셨는데, 동인 활동은 없었습니까? 박수철(박) : 1976년으로 기억하는데, 문학과 미술을 하는 청년들이 모여 형상회라는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김 : 동인 활동을 하며 각별히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형상회 동인 중에 김원택이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이 천박한 땅에서』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런데 시대 분위기 때문에 시집 제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요. 한번은 형상회 동인들이 김원택의 시집을 들고 한흑구 선생 댁에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사모님께서 “제목을 왜 하필 천박한 땅으로 했냐”고 하자 한흑구 선생이 “땅이 천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천박해서 그랬겠지”라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더군요. 김 : 선생님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인 오지호(1905∼1982) 선생을 사사하셨는데, 어떻게 된 인연입니까? 박 : 1977년에 생계를 위해 부산 온천장에 있는 이화당표구사에서 일했습니다. 부산 석마미술학원의 윤석균 원장이 포항에 왔을 때 소개받았지요. 이화당표구사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던 오재봉(1908∼1991)의 조카가 운영했어요. 오재봉은 오지호와 친분이 있었고, 오재봉의 조카는 광주에 있는 오지호 선생을 만나러 간다고 자랑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오지호 선생을 만나야겠다고 작심하고 오지호 선생에게 10장 가까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김 : 장문의 편지에 뭐라고 쓰셨나요? 박 :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하지 못한 처지인데 어떻게 하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지, 또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김 : 답신이 왔나요? 박 : 답신과 함께 선생님의 저서인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보내주셔서 뛸 듯이 기뻤습니다. 박수철 선생이 간직하고 있는 오지호 선생의 답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서양화는 재료와 도구가 많고 커서 그림을 그리자면 일정한 면적의 장소가 필요한 것이요. (……) 서양화는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요. 그리고 서양화 재료는 고가이고 많은 분량이 필요해서 상당한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요. 이러한 관계로 서양화 공부는 제자를 스승의 집에 두는 법이 없는 것이요. 그리고 공부를 하자면 학교나 연구소에서 하게 되어 있소. 그리고 이 밖의 방법은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작품을 가끔 스승에게 가지고 가서 평(評)과 지도를 받는 것이요. 귀군(貴君)도 이런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귀군이 부산이나 대구로 나와서 일정한 직업을 갖고 생활비를 얻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그곳 화가들에게 지도를 받도록 하는 게 좋을 줄 아오. - 1978년 11월 30일 김 :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이 무명의 청년 화가에게 이렇게 정성 들여 답신을 보냈다니 뜻밖입니다. 박 : 오지호 선생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지요. 선생은 답신 말미에 추신으로 한자 1800자를 완전히 습득하기를 부탁한다고도 하셨어요. 김 : 무슨 이유로 그런 부탁을 하신 걸까요? 박 : 한자를 알아야 우리 전통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글도 정확하고 품위 있게 쓸 수 있다는 게 선생의 소신이었습니다. 미술 이론에 해박했던 오지호는 한자 교육 부활 등 사회 현안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1970년 정부가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거하자 작품 활동을 뒤로 하고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글을 써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1975년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킨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밖에 문화유산 보호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던 앞선 지식인이었다. - 「오지호」,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박 : 『계간 미술세계』에서 오지호 선생의 작품을 보자마자 빠져들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즐겨 쓰는 청보라색(울트라마린 블루)을 선생도 즐겨 썼습니다. 나는 하늘과 바다, 설경을 그릴 때 이 색을 주로 씁니다. 둘째, 고추장을 이겨놓은 듯한 끈적임과 어우러짐의 질감(마티에르, mati00E8re)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김 : 그 후로도 오지호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는지요? 박 : 그랬지요. 선생한테 받은 편지가 꽤 되는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을 뵙기도 했겠습니다. 박 : 선생한테 첫 번째 편지를 받고 1년 후인 1978년에 선생이 계신 광주로 찾아갔습니다. 그 후로 1년에 두어 번씩 광주로 갔습니다. 김 : 당시 광주 가는 길이 멀었을 텐데요. 박 : 기차로 광주까지 여덟 시간쯤 걸렸어요. 포항역에서 출발해 동대구와 대전을 거쳐 광주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쌀 포대에 작품 두세 점을 담아서 기차에 올랐지요. 김 : 오지호 선생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군요. 박 : 선생을 뵈러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걸 스무 가지쯤 종이에 적었어요. 그런데 막상 선생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면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셨지요. 선생은 미술에 관한 얘기보다 주로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 등 윤리에 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김 : 오지호 선생의 대표작 중 「항구」가 있지요. 박 : 선생은 항구를 즐겨 그렸는데, 지금도 많은 미술 애호가의 사랑을 받습니다. “배는 자유롭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선생이 1981년 울릉도에 가기 전에 동빈내항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진 촬영을 많이 하셨지요. 선생이 이듬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동빈내항 그림을 많이 그렸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김 :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박 : 선생은 택시 타는 걸 싫어했습니다. 택시는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울릉도에 다녀온 후 광주에서 택시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이듬해 숨을 거두었습니다. 김 : 이화당표구사에서 계속 일하셨나요? 박 : 부산에서 1년쯤 있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큰숲교회(옛 성남교회) 인근에 갈뫼화실을 열었습니다. 그때가 1978년이었어요. ‘갈뫼’는 수도산을 뜻합니다. 수도산은 포항 원도심의 어머니 같은 산으로, 내게는 정신의 의지처입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3

중학생 때 미술 선생님을 보며 화가를 동경

포항 미술계는 배원복, 김두호 선생이 첫 장을 열고 이방웅(동아미술학원), 강문길(현대미술학원), 박수철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박수철 선생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해 호미곶 구만리, 포항역, 철길 같은 포항의 풍경을 깊고 따듯한 색채로 그려냈다. 또한 1979년 일요화가회를 창립하는 등 지역의 화단을 두텁게 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중앙동에 있는 그의 화실과 오래된 커피숍 그리고 죽도시장의 보리밥집을 오가며 선생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도형(김) : 이 화실에는 언제쯤 들어오셨는지요? 박수철(박) : 7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식당을 하다가 비어 있던 곳인데, 고쳐서 화실로 만들었습니다. 김 : 근사한 화실이군요. 박 : 생계를 위해 집수리하는 일을 20여 년간 해왔습니다. 덕분에 이런 일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6·25 전쟁이 터진 1950년에 태어나셨더군요. 박 : 전쟁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울산 호계동 근처의 신답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 배 속에 있었어요. 박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9월 말(음력 8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4남 1녀 중 셋째였지요. 김 : 전쟁통에 태어난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 선린병원과 나루끝 사이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은 기와집이었지요. 아버지는 페인트 판매업을 준비하다가 친척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힘든 처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페인트칠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지요. 집 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장독대 주변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어요. 모란, 작약 등이 핀 작은 꽃밭도 있었지요. 집 주변 텃밭에는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포플러가 우리 집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마루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면 포플러 사이로 송도 송림이 보였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이전에 풍경을 먼저 봤습니다. 이런 환경이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김 :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아름다운 풍경화 한 점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박 :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의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연장자이고 마당이 넓은 편이었기 때문이지요. 김 : 댁 주변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습니까? 박 : 지금 선린병원 자리에 선린애육원이 있었어요. 미 해병대에서 선린애육원에 지원을 많이 해줬는데, 여러 가지 물품 중에 종이 팩에 담긴 우유를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포항세무서 자리에 덕수교회가 있었고, 근처에 구세군교회가 있었습니다. 점심때 구세군교회에서 강냉이죽을 배급했어요. 나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그 강냉이죽을 먹었습니다. 김 :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도 배급이 있었나요? 박 :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옥수수빵을 무상으로 주더군요. 배가 고프기도 했고 빵을 난생처음 맛보았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우리 집에서는 시래기와 쌀을 섞어 끓인 시래기갱죽을 자주 먹었습니다. 집 근처 술도가에서 달착지근한 술찌끼를 받아먹고 취했던 게 떠오르는군요. 김 : 당시 포항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박 :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 앞에 북부시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요. 시장 바닥이 질퍽질퍽했고 주변에 오리가 뒤뚱뒤뚱 다녔지요. 그리고 칠성천 옆 뻘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좌판을 놓고 장사했어요. 그곳에 엉성한 판잣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죽도시장은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 고아나 소아마비, 언청이가 많았어요. 걸인들이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연민을 느꼈지요. 김 : 미술을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박 : 포항중학교 다닐 때 미술 교사인 권영호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권 선생님은 한마디로 자유분방한 분이었어요. 미술실의 책걸상을 모두 빼내고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화가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림에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권영호(1936∼2012)는 경주에서 태어나 포항 구룡포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항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미술과로 전과해 2년 과정을 마쳤으며, 그 뒤 영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부터 경북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부임해 2001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 「권영호」,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 : 중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박 :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대구매일신문을 돌렸는데, 한 달에 450원을 받았어요. 석 달 치를 모으면 한 분기 공납금을 내고 50원이 남았지요. 김 : 고등학교는 동지상고로 가셨지요? 박 : 동지상고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야간부로 옮겼습니다. 학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당시 야간부는 한 학년에 한 학급이 있었어요. 1학년 때는 대신동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0원을 받았고, 2학년 때는 포항경찰서 정보과에서 한 달에 2000원을 받았지요. 3학년 때는 서경도서관(훗날 포항문화원이 되었던 곳)에서 한 달에 3000원을 받고 일했습니다. 그때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돈을 벌어가며 학교에 다녔어요. 김 : 고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박 : 2학년 때 200일가량 결석했어요. 사춘기의 방황이었지요. 왠지 학교에 가기 싫었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빠졌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 게시판 유급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지요. 다행히 담임교사였던 손춘익 선생이 손을 써서 유급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김 : 중고등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가 있는지요? 박 : 중학교 다닐 때부터 새벽마다 수도산 자락의 철길을 따라 수도산에 올라갔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는데, 당시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덟 살 터울의 누나도 시집갈 때 철길을 걸어서 포항역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기차를 타고 포항을 떠났지요. 철길에 많은 추억이 묻혀 있는데, 철길이 사라지면서 추억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대입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지자 군 입대 영장이 날아왔습니다. 서울 거여동에 있는 30사단에서 근무했지요. 군에서 제대한 후 집 안의 헛간을 개조해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네 살 터울의 형이 대학 다닐 때 보던 영문 소설책의 표지를 복사해 드로잉 연습을 했지요. 형도 동지상고 야간부를 나와서 서경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서경도서관에 형의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을 정도였지요. 김 : 이제 선생님의 미술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박 : 20대 중반 무렵 포항에는 미술학원이 하나뿐이었어요. 바로 시민제과 2층에 있던 현대미술학원이었습니다. 강문길이라는 사람이 원장이었는데 형을 무척 따랐지요. 형 덕분에 나보다 한 살 많은 강 원장과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레슨비를 낼 형편이 안 되어 돈이 생기면 소주 한잔은 사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학원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미술학원은 예술을 하는 청년들의 아지트가 되었어요. 난로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삶과 예술에 관한 열띤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러면 누군가 옆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지요. 박수철은… 1950년 6·25 전쟁 때 포항에 살던 가족이 피난을 간 울산 신답에서 태어났으며, 9·28 서울 수복 후 포항으로 돌아왔다. 포항중학교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고,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갈뫼화실을 운영했으며, 1979년 포항일요화가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 포항문화예술회관 기획 초대 개인전, 2017년 포항 우수작가 초대전(포항문화재단), 2023년 ‘The Cross 40’(개인전), 2024년 ‘Still Life’(개인전)를 열었고, 그 밖에 여러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0

“해월 최시형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

경주에서 태어난 해월 최시형은 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10대 중반에 포항으로 옮겨 신광면에서 살았다. 34세인 1861년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해 수운(水雲)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1863년부터 영덕, 영해 등 경상도 곳곳을 다니며 포교 활동을 했다. 1863년 8월 도통(道統)을 승계받으며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김용옥은 “오늘 우리의 가능성의 모든 씨앗이 동학에서 뿌려졌다”고 했고, 김상봉은 동학을 “현대 한국 철학의 시원”이라고 했다. 이형수 선생은 환갑을 넘어 동학에 매료되어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려왔다. 포항에 깃든 동학 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도형(이하 김) : 언제부터 동학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형수(이하 이) : 서울에서 그림을 배울 때 동학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해월이 포항에서 살았다는 걸 몰랐어요. 환갑이 지나 동학 공부를 하면서 해월과 포항의 깊은 인연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김 : 해월의 살림터에도 가보셨겠군요. 이 : 신광면 기일리와 마북리 검곡에 자주 갔어요. 기일리는 오지이긴 하지만 산세와 터의 기운이 참 좋습니다. 기일리는 해월이 일하던 제지소가 있던 곳이고, 검곡은 해월이 농사를 지으면서 동학 수련을 하던 곳이지요. 김 : 동학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습니까? 이 : 당시에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선포한 것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은 알면 알수록 가치와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해월은 36년 동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도피 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을 보듬어 안으며 인내천 사상을 전했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해월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 동학에 관한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 그렸습니까? 이 : 동학의 깊은 뜻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물화를 그릴 때 해월과 장일순, 김지하도 그렸어요. 해월의 정신이 장일순과 김지하로 이어지니까요. 2022년에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문화예술촌 벽면에 삼례의 역사 기록 도판화를 만들어 부착했습니다. 삼례읍은 동학운동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지요.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51A4) 운동을 했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가 있었던 곳입니다. 동학의 역사를 기록한 도판화 1천여 장을 그려서 그중 420장을 도판으로 만들어 삼례문화예술촌 벽면에 부착했어요. 참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김 : 천도교에서 제작한 2024년 달력에 선생님의 작품이 있더군요. 이 : 해월의 큰딸 최윤(1878~1956)과 외손자인 정순철(1901~?)을 그린 인물화입니다. 정순철은 전 국민의 애창곡인 짝짜꿍, 졸업식 노래를 작곡했고 윤극영, 박태준, 홍난파와 함께 한국 동요 4대 작곡가로 꼽힙니다. 방정환과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 운동에도 앞장섰어요.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확인이 안 되면서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지요. 정순철은 충북 옥천 출신으로 정지용 시인의 문우(文友)다. 도종환 시인이 2022년에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어린이를 노래하다-한국 동요의 선구자 정순철 평전』(미디어창비)을 내면서 한국근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한 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평전에 따르면, 정순철이 방정환과 함께 전개한 어린이 운동은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라고 한 해월의 「내수도문(內修道文)」에 뿌리를 둔다. 김 : 정순철의 어머니도 명성이 높은 분이지요? 이 : 그렇지요. 정순철의 어머니 최윤은 경주 용담정을 지키며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해 ‘용담 할매’라고 불립니다. 그분이 고생한 건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김 : 수운 최제우는 경주 최부자 가문의 정신적 지주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의 7대 후손입니다. 동학은 경주 최부자 가문과 인연이 깊을 것 같습니다. 이 : 해월의 첫째 아들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손병희가 주선했지요.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에 보낸 감사의 편지를 최부자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어요. 김 : 죽도시장과 동학 외에 관심 있는 분야가 있습니까? 이 : 동해안별신굿도 귀중한 문화유산이지요. 한번은 영해에서 별신굿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1박 2일 동안 구경했는데 정말 볼만하더군요. 다른 곳에서도 별신굿 한다는 소식이 있으면 달려갑니다. 김석출 만신에게 자문을 구한 백남준도 “나의 예술의 뿌리는 굿”이라고 했어요. 김 : 선생님을 뵐 때마다 배낭을 메고 걷기에 좋은 복장으로 오시더군요. 평소에 많이 걸으시나 봅니다. 이 : 걷는 게 삶 자체라 할 수 있지요. 60대 초반에는 호미곶 둘레길을 거의 다 걸었습니다. 구룡포 삼정리에서 호미곶면 신창리까지는 여섯 시간 정도, 구룡포에서 호미곶 보리밭까지는 네 시간가량 걸립니다. 60대 후반에는 집(장량동 대림골든빌아파트)에서 출발해 달전 사거리를 지나 도음산을 거쳐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신라 냉수비까지 걸었어요. 이 코스도 대략 여섯 시간이 걸리지요. 영덕에도 이따금 가는데 강구 버스 정류장에서 화림정맥을 타고 영덕군민운동장까지 가면 여섯 시간쯤 걸립니다. 강구 등대에서 오십천변을 따라 무릉도원교까지 가면 네 시간가량 걸리고요. 김 :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걷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는 작품 구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혼자 걸어요. 둘째는 작품을 계속 그리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 : 걷기 외에 꾸준히 하는 일이 있습니까? 이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점의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독서는 게을리할 수 없어요. 김 : 많은 작품을 그렸을 텐데, 작품을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이 : 시간 나는 대로 작품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작품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할 생각이에요. 김 : 한 점 한 점 공들여 그린 작품을 소각하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이 : 어차피 모든 작품을 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요. 김 : 최근에 하신 작업이 있습니까? 이 : 영덕 출신 동갑내기인 김종완 선생이 동시집을 내는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더군요. 동시에 어울리는 그림 50여 점을 그렸는데, 동시의 원천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최근 『열두 살의 봄』(청개구리)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김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이 : 한 자루 붓이 한 생명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숲을 찾으려 합니다. 지방에 묻혀 있는 귀한 인문학적 자료를 찾아내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06

“죽도시장 그리며 그림에 땀내가 나야 한다는 걸 깨달아”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문인화를 접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문인화는 현대인이 자주 접하는 예술 장르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문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렇다면 문인화가 지금 왜 필요한지, 그 가치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 평자는 이런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문인화가 어디 있느냐고 다들 반문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필묵(筆墨)의 현대적 재해석은 차치하고라도 작품의 형식, 구도, 소재 자체가 구태의연하다. 그러니 수구나 매너리즘의 끝자락으로 간주한다. 오늘날 문인화의 현실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문인과 문인화 이전에 인간과 예술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나의 실존의 노래 역사가 문인화의 역사고 예술의 역사다. 그런 만큼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가 문인화다. 오히려 그 중요성이 오늘날보다 더 큰 때도 없다. - 이동국, ‘역사와 실존·심관의 시서화 일체 언어’, ‘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서예문인화, 2017, 13쪽. 그렇다면 이형수의 문인화는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어떻게 펼쳐 보이고 있을까? 그 ‘가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김도형(이하 김) : 선생님은 근래 죽도시장 그리고 동학과 관련된 작업을 꾸준히 하시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형수(이하 이) : 60대에 김지하, 박동진 같은 역사에서 굵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 위주로 그림을 그렸지요. 일흔을 바라보면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방향을 두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멀리 갈 것 없이 내가 사는 바로 이곳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장소를 택해야 할 텐데, 그 장소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어야 하겠고요. 그래서 책과 자료를 찾아보며 고민하다가 두 군데를 떠올렸어요. 하나는 죽도시장이고, 또 하나는 해월(海月) 최시형이 살았던 신광면 마북리 검곡(劍谷, 검등골)입니다. 김 : 먼저 죽도시장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군요. 죽도시장은 동해안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인데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습니까? 이 : 2005년부터입니다. 그 당시 거의 매일 아침 죽도시장에 갔어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죽도시장에 가면 꿈틀거리는 생명력 같은 걸 느끼게 됩니다. 그런 체험을 하면서 죽도시장이야말로 인문학의 보고(寶庫)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 어떤 의미에서 죽도시장을 인문학의 보고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이 : 인문학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지요. 죽도시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삶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도시장은 다양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 문인화에서 시장 풍경은 잘 다루지 않는 것 같은데, 작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이 : 죽도시장을 100점 정도 그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림에 딸린 화제(畫題)를 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잘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물론, 상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요. 다루고자 하는 소재를 충분히 이해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니까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일주일가량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작업하면서 그림에 땀내가 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칼을 가는 여인 칼을 가는 여인의 삶은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칼날을 세우는 여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기운은 날카롭다.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짧은 일상의 한순간이지만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그녀의 손끝 칼날은 무섭다. 인생은 짧고 짧은 순간의 연속이지만 때가 되면 죽음은 칼같이 온다. - 2017년 6월, 죽도시장 어물전 옆 30년간 칼 가는 여인을 보며. 노점상 ‘규합총서’에는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고 했다.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들어야 제맛이 난다는 것이다. 시속 40킬로미터로 차가 다니는 노점상의 힘든 삶의 조그만 공간에서 맛난 점심, 삶의 엄숙함을 본다. 아쉬움이 많은 세상살이 할머니들에게서 꿈과 희망을 읽는다. - 2017년 6월. 아귀를 파는 여인 아귀는 방언으로 아구, 물 텀벙, 아구어라고도 한다. 아귀는 체형 탓인지 헤엄치는 속도가 느린 탓에 바닥에 엎드린 채 유인 돌기를 흔들어 먹잇감을 유혹해 잡아먹는다. ‘자산어보’에도 낚시하는 물고기 조사어(낚시조, 실사, 고기어)라고 했다. 한 번에 큰 입으로 큰 고기를 삼키는 먹성 때문에 탐욕과 욕심의 상징으로 통한다. - 2016년 6월, 어물전에서 본 아귀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두 아이와 부부를 그리다. 김 : 죽도시장을 오랫동안 다니셨으면 다양한 사연을 접했을 것 같습니다. 인상 깊은 사연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밥 한 끼를 천 원에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한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말을 안 들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한 스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말 잘 듣는 아들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지요. 스님은 할머니가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말 잘 듣는 아들이 될 거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할머니는 고민 끝에 시장에서 밥 한 끼를 천 원에 팔았더니 손님이 몰려들고 아들도 말을 잘 듣게 되었다고 해요. 김 : 한 편의 전설 같은 이야기군요. 인상 깊었던 장면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 한번은 식당에 들어갔는데 추사체를 흉내 낸 ‘淸淨(청정)’ 자가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씨 밑에서 한 할아버지가 밥을 앞에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겁니다. 아마 고된 일을 하고 힘이 들어서 졸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순간 ‘淸淨’과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지더군요. 김 : 죽도시장을 그린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셨지요? 이 : 2021년 10월에 포항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해도 도시 숲에서 30여 점을 전시했습니다. 죽도시장에서 전시를 더해 보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김 : 죽도시장을 100점 정도 그렸다고 하셨는데, 아직 제대로 된 전시가 이뤄지지 못했군요. 책자로 발간되지도 않았을 테고. 이 : 그런 셈이지요. 언젠가는 죽도시장을 주제로 한 좋은 전시가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김 : 혹시 포항의 풍경을 그린 작품 중에서 공개하지 못한 작품이 있는지요? 이 : 산수화를 제 나름대로 그리고 싶어서 2015년에 ‘청하골 12폭포’를 그렸어요. 그 후에도 다양한 크기의 ‘12폭포도’를 그렸습니다. 내연산 12폭포에 깃들어 있는 여러 이야기를 ‘12폭포도’에 화제로 썼지요. 아직 전시는 못 했습니다. 김 :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군요. 전시회를 통해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 : 개인전을 여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여는데 적어도 2000만 원이 듭니다. 작가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요.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03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문인화를 지향해”

이형수 선생은 20대 중반인 1976년 포항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간다. 1979년 포항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후로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초대전을 꾸준히 열었다. 일기처럼 그린 작품을 모아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엮어내기도 했다. 이형수 선생이 이런 활동을 펼치며 어떤 작품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는지 들었다. 김도형(이하 김) : 옥산 선생의 주변에도 유명한 예술인이 많았겠습니다. 이형수(이하 이) : 옥산 선생과 가까운 분으로 이상재, 문장호, 김춘, 최범술, 김범부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옥산 선생이 전라남도 진도 출신이다 보니 선생 주변에는 호남 사람이 많았어요. 호남 수묵화의 저변이 굉장히 넓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지요. 김 : 옥산 선생 문하에서는 언제까지 계셨는지요? 이 : 1973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문하에 있었습니다. 김 : 당시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힘들었지요. 집사처럼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따금 그림을 팔아서 생기는 돈과 선생님이 간혹 주시는 용돈이 수입의 전부였어요. 군대 가니까 오히려 편할 정도였습니다. 김 : 옥산 선생 문하에 있을 때 기억에 남은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옥산 선생이 차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의제(毅薺) 허백련 선생이 만든 춘설차를 좋아했어요. 그 덕분에 저도 차 맛을 좀 알게 되어 다인(茶人)이 되었습니다. 김 : 선생님은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대가들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셨습니다. 혹시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걸 후회하신 적은 없는지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진학했더라면 좋은 대학에도 가고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하지만 문인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이니까요. 다만 당시 큰 스승 밑에서 더 열심히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김 : 포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이 : 군에 입대하면서 서울 생활은 마무리되었지요. 충북 조치원에 있는 32사단에서 군수처에 근무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1976년에 포항으로 왔어요. 영덕에 계시던 부모님이 거주지를 포항으로 옮기셨거든요. 김 : 당시 포항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이 : 그때는 해도가 늪지대였습니다. 포항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도시에 활력이 넘쳤지요. 포항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고 보면 됩니다. 김 : 포항에서 작품 활동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해도동 집에서 작업했습니다. 1979년 육거리 근처에 있던 용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산수 여덟 폭과 기러기 병풍을 전시했습니다. 작품이 팔리긴 했는데 전시 경비를 제하고 나니 남는 게 없더군요. 당시에는 그림 전시회 등 웬만한 문화예술 행사를 다방에서 했어요. 그런 행사를 소화할 만한 문화 공간이 없었거든요. 김 : 사모님(효원(曉園) 최영란)이 서예가이시죠? 이 : 포항에서 금강연묵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1982년에 결혼했어요. 제가 아내가 쓴 금강경에 반했지요. 결혼 1년 후에 아내가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지요. 김 : 서실도 열었을 것 같습니다만. 이 : 1990년에 두호동 해변가 상가에서 서실을 열었습니다. 뒤늦게 대학에도 갔지요. 검정고시를 거쳐 경주 동국대 조경학과를 1992년에 졸업했습니다.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문인화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더군요. 이 : 1996년에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 경북문인화협회가 창립되었는데, 협회 회장을 10년 동안 맡았지요.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경북지회가 창립되면서 역시 10년 동안 지회장을 맡았고요. 그리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을 맡았는데, 그 후로는 두문불출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문인화와 서예 쪽에서 심부름을 많이 한 셈이지요. 김 : 전시도 꾸준히 하셨지요? 이 : 1995년 포항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할 때, 그리고 2007년 포항시 신청사가 개청할 때 초대전을 했습니다. 두 번 모두 전통 문인화를 소재로 전시했지요. 지금도 포항문화예술회관 1층에 ‘청매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2008년에는 대구 동아미술관에서 ‘먹빛이 마음빛’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어요. 성타 스님이 낸 생활법문집 ‘모래 한 알에 우주를 담다’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김 : 해외에서도 전시하셨지요? 이 : 2010년 12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19일까지 독일 베를린 스판다우 문화의 집 갤러리에서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鵲知孤虎)’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습니다. 독일에 있는 동포들이 환대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동포들을 위해 빨랫방망이에 까치와 호랑이 그림을 그려서 갖고 갔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그 이듬해 함부르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닷새 동안 ‘모든 사람은 꽃이다’를 주제로 초대전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묵죽(墨竹)을 좋아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김 :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까치와 호랑이가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뜻을 담은 것인지요? 이 :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지요. 알고 보면 까치도 호랑이도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까치는 서로의 속마음을 아는 친구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김 : 유럽에서 전시하면서 문화 체험을 폭넓게 하셨겠군요. 이 : 독일 베를린에서 한 달 동안 민박하면서 독일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미술관을 찾아갔지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미술관에도 갔는데, 벽면에 새겨진 “장소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변하고, 그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면 미래가 변한다”는 영어 네온사인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셀도 둘러봤습니다.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어요. 김 : 선생님이 낸 책 중에 ‘수묵 편지’ 두 권이 눈에 띕니다. 이 : 2015년에 낸 ‘수묵 편지’는 일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의 일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능소화, 대나무, 백합, 복숭아, 나팔꽃, 토마토, 참외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지요. 그림에 딸린 화제(畫題)는 제가 쓴 것도 있고 정희성 시인, 마종기 시인, 이해인 수녀 등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2017년에 낸 ‘수묵 편지’는 영덕 출신의 역사적 인물인 장계향, 나옹선사, 목은(牧隱) 이색 세 분을 다룬 것입니다. 장계향은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女中君子, 풍모와 도량이 큰 여인)의 칭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글로 쓴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저자이기도 합니다. 나옹선사와 목은은 워낙 유명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지요. 세 분은 송천강과 인연이 있는 큰 인물입니다. 송천강은 영해평야를 가로지르며 흐르다가 동해로 빠져나갑니다. 송천강 상류에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이 있고, 중류에는 장계향의 시댁인 충효당이 있으며, 하류에서 목은이 태어났습니다. 김 : 시(詩), 서(書), 화(畵)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작품을 그리려 합니다. 시서화가 혼융일체가 되려면 쉼 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10-30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

어린 나이에 고향 영덕을 떠나 서울로 갔고, 동양화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웠다. 20대 중반 포항에 정착한 후로 작품 활동에 정진했으며 환갑이 넘어서는 죽도시장과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흔이 넘어서도 풍경 좋은 곳을 오래도록 걸으며 작품 구상을 한다.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 선생의 이야기다. 창포동에 있는 선생의 작업실과 근처 카페에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들었다. 김도형(이하 김)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형수(이하 이) :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로 소일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포항 이곳저곳을 걷기도 하지요. 김 : 영덕이 고향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 영덕 오십천(五十川)에서 가까운 남석동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 중 넷째였지요. 부친은 농산물검사소에 다니다가 엽연초 조합에서 퇴직하셨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 있는 편이었어요. 김 : 영덕에서 태어난 분들은 오십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이 : 오십천은 영덕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어릴 때 소쿠리를 들고 오십천에 고기 잡으러 가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참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뛰놀았지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오십천이 범람해 우리 집 과수원이 물에 잠겼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일제강점기에 만든 강구대교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태풍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물난리가 났지요. 이형수 선생은 유년의 기억이 자신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유년의 살갗에 새겨진 고향 오십천의 맑은 물과 바람, 모래벌판의 풀잎과 나뭇잎, 종달새의 영롱한 소리가 내 몸과 마음속에 늘 남아 있습니다. 살다 보니 기쁨보다는 어렵고 바람 부는 날이 많았습니다. 힘든 삶을 아름답고 영롱한 유년의 추억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습니다. 나무가 뿌리의 힘으로 거센 바람을 견디듯이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이형수 ‘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서예문인화, 2015, 3쪽. 김 :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이 : 1958년에 영덕초등학교(현 영덕야성초등학교, 1911년 개교)에 입학했고 2학년 때 서울 신설동에 있는 안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큰형(1939년생)이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의과대학에 다녔는데, 큰형을 따라 서울로 간 것이지요. 김 : 어린 나이에 서울로 가셨군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 큰형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힐 수 있었지요.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한문 공부를 하면서 인문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큰형은 내가 그림에 재주가 있어 보였는지 나를 한국일보 주최 미술대회에 데리고 갔어요. 그 덕분에 그림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김 : 중학교 시절이 궁금합니다. 이 : 1964년에 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광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평안남도 출신 한경직 목사가 세운 대광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습니다. 대광중학교에서 『성경』을 접한 것도 인문적 소양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공부는 꽤 잘하는 축에 들었습니다. 정치인 김한길이 2학년 때 같은 반에 다녔어요. 그런데 중2 때 큰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충격을 받았고, 그러면서 사춘기에 접어들었지요. 그때 운명처럼 그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제운이 운영하는 성균서예학원에서 이철주 화백한테 수묵화 중 난초 그리기의 기초를 배우면서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김 : 일반적으로 어릴 때 그림을 배우면 수채화나 유화를 접하게 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문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까? 이 :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왠지 수묵의 세계에 끌렸습니다. 김 : 그 후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 중3 때 이당 김은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선생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편지에 매화 소품 한 점을 동봉했습니다. 김 :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당 김은호 같은 대가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는지 놀랍군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서 3년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고 했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을 접고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요. 동양화를 접하면서 이당 선생의 명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 : 답신이 왔던가요? 이 :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을 받았습니다. 한번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종로3가 비원 쪽(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선생 댁을 찾아가 큰절을 했더니 그날부터 당신의 수발을 들면서 그림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김 : 정규 교육과정을 포기하고 도제식 공부를 하게 된 거군요. 큰 결단이었을 텐데 집에서 반대하지는 않던가요? 이 : 반대는 안 했지만 밥벌이가 되겠느냐며 걱정하셨지요. 김 : 이당 문하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 : 선생이 바깥나들이 할 때 모시고 나가고 잔심부름도 했어요. 선생이 작품 구상에 필요해 고등어를 사 오라 하면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 왔지요. 김 : 이당 주변에 유명한 화가가 많았겠습니다. 이 : 오죽 많았겠습니까. 이당 선생 문하에 있으면서 운보(雲甫) 김기창, 혜촌(惠村) 김학수, 오당(吾堂) 안동숙, 유천(柳泉) 김화경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김 :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이 : 이당 선생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선생에게 감정을 의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가짜가 많았어요. 선생의 작품을 비싸게 매입한 사업가가 사업이 어려워져서 작품을 팔려고 감정을 부탁했는데 작품이 가짜여서 낭패를 보기도 했습니다. 김 : 이당의 작품은 고가였겠지요? 이 : 메이란팡(梅蘭芳)이라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 배우가 있었는데, 이당 선생의 작품 중 메이란팡을 그린 큰 작품이 있었어요.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 작품을 삼성 이병철 회장이 갖고 가면서 백지수표를 건넨 기억이 납니다. 김 : 이당 문하에서 공부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서화의 세계에 ‘체본(體本)’이라는 게 있어요. 배우는 사람이 따라 쓰거나 그리게 하려고 가르치는 사람이 써 준 글씨나 그림을 말하지요. 이당 선생은 세밀함이 특징인 북종화(北宗畵)의 대가였습니다. 이당 선생에게 처음 받은 체본이 참새였는데, 참새를 정밀하게 그리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내가 어려서인지 그 화풍이 갑갑하게 느껴지더군요. 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이당 선생 문하에서 1년이 지날 무렵에 더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방향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종화(南宗畵)에서 명성이 높은 옥산(沃山) 김옥진 선생을 찾아가기로 했지요. 옥산 선생의 작품은 먹색과 운무가 좋았거든요. 김 : 이번에도 편지를 보냈나요? 이 :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북가좌동 32번 버스 종점 앞에 댁이 있었지요. 인사를 드리고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이당 선생에게 허락을 받고 오라고 하셨어요. 김 : 이당 선생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 : 뜻대로 하라고 선선히 말씀하시더군요. 이형수는… 1952년 경북 영덕군 남석동에서 태어나 영덕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해 안암초등학교와 대광중학교를 졸업했다. 마 지막 어진(御眞) 화가인 이당(以堂) 김은호와 남종화의 대가인 옥산(沃山) 김옥진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다. 1976년 포항에 정착한 후 네 번의 개인전과 세 번의 초대전을 국내외에서 가졌으며,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냈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한국서가(書家)협회 초대작가가 되었고,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과 경북지회 초대 지회장을 지냈다. 경북문인화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871 영해동학혁명 기념사업회 고문으로 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0-27

“인물이 역사고, 역사가 인물이다”

김일광 작가는 윤봉길, 윤선도, 링컨 등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써왔다. 그뿐 아니라 포항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인물들, 이를테면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인 석곡 이규준, 항일 의병부대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동남제도 수호검 배상삼, 인간 상록수 재생 이명석 등에 관한 책을 펴냈다. 작가는 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꾸준히 다뤄왔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선생님은 역사 속 인물, 특히 우리 지역의 인물 이야기를 계속 쓰셨습니다. 그중에는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도 있지요. 김일광(이하 김) :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이야기는 아픈 손가락입니다. 2021년 현북스에서 출판되었는데 최세윤의병대장기념사업회가 있지만 이 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시 의병들이 흥해 사람인데도 말이지요. 기념사업회 사업도 지지부진해서 안타까워요. 흥해 지진 복구 사업으로 주민종합시설을 건립하고 있는데, 여기에 최세윤기념관과 포항시 의병기념관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나라마다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나에게 우리나라 자랑거리를 들라면 가장 먼저 ‘시민사회’를 꼽고 싶다. 어떤 사람은 짧은 기간 안에 우리가 시민사회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쉼 없이 펼쳐왔음을 볼 수 있다. - 김일광, 「작가의 말」,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현북스, 2021. 이 : 포항 장기면은 송시열과 정약용 등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데요, 장기에 조선시대 군마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김 : 2011년에 발간된 『조선의 마지막 군마』(내인생의책)도 공을 많이 들인 책이었습니다. 《고래가 숨 쉬는 도서관》이라는 잡지에서 권두 좌담으로 일제강점기 구룡포 장기목장이 폐목되는 과정과 구룡포와 호미곶 일대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동문학 평론가 김혜원은 「치열하고 성실한 글이 주는 즐거움」라는 글에서 김일광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야기의 한 축인 장기목장을 포함한 영일만, 포항, 구룡포 일대에 대한 일제 침략 과정은 작가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매우 견고하게 전달된다. 조선에 군마를 훈련시키는 장기목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훈련받던 많은 말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포항 토박이다. 그는 이미 발표한 『귀신고래』나 『강치야, 독도 강치야』 같은 책에서, 향토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이 책 『조선의 마지막 군마』도 그런 맥락에 기반을 두었다. 군마를 키우던 장기목장은 일제 침략 이후 황폐해져 말의 도망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산성의 흔적만 남겨놓고,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작가는 이렇게 사라진 기록을 찾기 위해, 당시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고금산에 말뚝이 박히며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 일본 배의 침몰과 등대 건설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기억에 의해 사실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자기가 있는 땅에 대한 애정, 사실에 기반을 둔 조사의 철저함, 그것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열정이 이 작가의 강점이다. 이 : 선생님의 작품에는 역사적 인물과 이야기 속 주인공이 공존하는데, 지역사의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김 : 『바위에 새긴 삼봉이』(봄봄출판사, 2017)는 장한상 수토사(搜討使)의 행적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울릉도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확보했지요. 동화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는 기행문 형식으로 『독도 가는 길』(현암사, 2017)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이 : 울릉도와 독도 이야기를 풀어낸 동화 중에 강치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2014년 일본의 전직 초등학교 교사인 스기하라 유미코(杉原由美子)가 『메치가 있던 섬』이라는 동화책을 냈어요. 이 책은 강치(‘메치’는 일본 지역 방언)와 일본 어린이들의 우정을 다뤘는데, 독도 인근의 강치가 한국 어부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되었다는 거짓말을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이 책의 전자도서를 전국의 초·중학교에 배포한 것은 물론,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지요. 제가 『강치야, 독도 강치야』(봄봄출판사)를 2010년에 냈는데, 2019년 우리 외교부에서 영문판 『Where are you, Gangchi』 3000부를 발행해서 외국 주재 한국어학당이나 교포 단체에 배포했습니다. 동화를 통해 독도 분쟁이 점화된 사례지요. 독도 강치는 독도를 중심으로 우리 동해에서 살았던 바다사자의 한 종류입니다. 독도 주변에는 오징어를 비롯하여 물고기들이 참 풍부합니다. 쉴 자리도 있어서 그야말로 강치가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요. 그래서 강치는 오랜 옛날부터 독도에 자리를 잡고, 울릉도나 동해안 뭍에서 고기잡이하러 오는 어부들과 평화롭게 살아왔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던 20세기 초부터 일본 어업회사가 고기와 기름, 가죽을 얻으려고 강치를 무참히 죽였습니다. - 『강치야, 독도 강치야』, 봄봄출판사, 8쪽, 2010. 이 : 등단 40년을 맞은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김 : 가수 송창식은 매일 네 시간씩 기타를 잡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저도 매일 원고를 쓴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어요. 항상 작품을 쓰고 있기에 언제든 보낼 수 있어요. 이오덕 선생한테서 정신적 자세를 배웠고, 손춘익 선생한테는 부지런함을 배웠어요. 두 분은 중앙지에 상금 사냥꾼처럼 응모하지 말고 창작에 전념해서 좋은 작가가 되라고 하셨지요. 호미반도의 산길은 달빛이 내리면 모두 바다로 향한다. 웅크리고 있던 바위들도 어둠 한 자락씩 감아들고 바다로 간다. 관목 숲 끝에는 키 낮은 곰솔들이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달빛이 그 옛날 목부들이 쌓아올린 석축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그 돌덩이들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면 수백 년 전 말을 기르던 목부들이 깨어나서 파도 소리에 몸을 뒤척인다. 달밤, 숲으로 들어선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달그림자를 늘어뜨린 한 그루 곰솔이 된다. 그렇게 모두 한마음으로 달빛 길을 걷는다. - 『호미곶 가는 길』, 단비, 140쪽, 2019. 다무포 해안에서는 ‘고래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고래가 많았던 동해를 보았다. 바로 그곳에서 한국계 귀신고래의 멸종 연유도 들려주었다. 고래가 사라진 텅 빈 다무포 해안을 내려다보는 학생들의 표정은 안타까움 그대로였다. - 앞의 책, 137쪽. 이 :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호미곶으로 오는 길이 기쁨으로 벅찼습니다. 고래를 기다리는 집 서경와)의 잔상이 오래 남을 듯합니다. 김 : 한반도 끄트머리 호미곶의 청록빛 바다와 일렁이는 보리밭의 조화를 보노라면 생명의 신비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서정주의 시구가 떠오르는군요. 인터뷰 내내 함께했던 인연들이 아슴아슴 떠오르면서 그리워질 만하지요.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으며, 귀하지 않은 생명이 따로 있을까요. 먼저 글을 쓴 선배로서 후학들에게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려고 합니다. 그들의 길을 열어주고 그들과 함께 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요.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끝

2024-10-23

소외된 이웃들의 굴곡진 삶을 품어내

그래서 동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인데, 그 가난한 이웃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살이입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많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자리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포항 운하는 복원되었어도 물길과 함께 사람들의 삶이 복원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죽도 어시장과 섬안들, 칠성강의 판타지를 다루었지요. 표지 그림이 재미있고 독특합니다. 웹툰 작가가 그렸는데 판매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한 권의 책을 내는 과정에는 못다 한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40권이 넘는 책을 낸 김일광 작가한테는 수많은 사연이 있을 터이고, 그 사연을 엮어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바다』부터 『말더듬이 원식이』, 『엄마의 바다』, 『귀신고래』 등 작가의 주요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선생님의 첫 번째 동화집 『아버지의 바다』는 “열아홉 편의 그만그만한 길이와 그만그만한 가슴의 이야기들로 엮어진 동화집”이라고 임길택 시인은 말했지요. 김일광(이하 김) : 여기서 ‘그만그만하다’는 말은 진실한 삶에 깃든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시장통으로, 바다로, 산으로, 들길로 다니며 만난 많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래서 동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인데, 그 가난한 이웃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살이입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많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자리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 『아, 여우다』의 주인공은 몸도 약하고 덩치도 작아서 동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외톨이입니다. 혹시 선생님의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요? 김 :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으나 어릴 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없어요. 몸이 약해서 혼자 놀 때가 많았지요. 그러면 혼자 놀았던 이야기도 좋다고 해서 쓰게 된 이야기입니다. 집 주위 뱀 이야기, 눈밭의 여우 이야기, 상념이 많았던 외로운 아이의 이야기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만큼 그 심심한 시간에 나는 활자 속으로 빠져들어 그들과 어울렸다. 책 읽기는 몸을 부딪칠 염려도 없고, 달리기처럼 꼴찌에 대한 창피함도 없었다. 책 읽기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놀이였다. - 『호미곶 가는 길』, 단비, 44쪽, 2019. 이 : 많은 작품 중에 아픈 손가락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2010년 봄봄출판사에서 나온 『아기염소 별이』 라는 작품인데, 납북 어민들의 후손 이야기를 다루었어요. 군사정부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조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간첩으로 핍박을 받고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지요. 그림이 아쉬워서 그림 작업을 다시 해서 개정판을 냈습니다. 이 : 책을 통해 만난 독자와의 인연이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는지요? 김 : 2007년 봄봄출판사에서 『순둥이』라는 동화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개 이야기인데, 태어난 새끼들을 하나씩 분양해 보내는 이야기가 담겼어요. 2010년에 개정판이 나왔지요. 볼로냐상을 받은 김재홍 화가가 포항에 와서 모델이 된 개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책이 나오고 몇 년 후 서울 답십리에 산다는 어떤 할머니가 어렵게 연락처를 수소문했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순둥이』를 읽고 우울증을 극복했다고요.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세 아이를 양육한 분이더군요. 당시 대문 바깥은 이리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밀림처럼 캄캄했다고 회상하며 그 험한 세월을 견디고 아이들을 출가시키고 나니 우울증이 왔다고 해요. 그런데 동화 속 강아지처럼 다시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자신을 일으켰다고 했어요. 그 할머니는 동화가 자신을 치유했으니 후속작을 써달라고 했는데 쓰지 못했지요. 내 동화가 누군가를 치유했다는 사실을 독자와 공유할 수 있어서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이 : 선생님은 일찍부터 소외된 이웃과 다문화 가정의 이야기에 주목해왔습니다. 김 : 『물새처럼』(우리교육, 2004)은 다문화 가정 이야기 세 편을 싣고 있는데, 이오덕 선생이 제 원고를 갖고 있다가 발간을 해주셨습니다. 『외로운 지미』(현암사, 2004)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이야기고요. 『따뜻한 손』(낮은산, 2006)은 한 버스 운전기사의 하루를 통해 약하고 보잘것없는 생명을 사랑하며 사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원제목은 ‘겨울밤 이야기’였는데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꾸면서 표지 그림도 바뀌게 되었어요. 그림을 그린 유동훈 화가는 인천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데, 판화도 잘하는 분입니다. 이 : 『말더듬이 원식이』는 30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김 :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모여서 우리교육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었지요. 김명수 시인이 원고를 보내달라고 해서 서광출판사에 보내고 남은 원고를 수정해 보냈어요. 『말더듬이 원식이』는 기존의 동화와 성격이 다릅니다. 일하는 사람들, 일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노동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동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조금은 무거운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지요. 이 : 『교실에서 사라진 악어』(우리나비, 2016)는 표지 그림이 기발해 보입니다. 선생님이 내신 기존 책들과는 이미지가 다르군요. 김 : 포항 운하는 복원되었어도 물길과 함께 사람들의 삶이 복원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죽도 어시장과 섬안들, 칠성강의 판타지를 다루었지요. 표지 그림이 재미있고 독특합니다. 웹툰 작가가 그렸는데 판매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이 : 선생님의 작품은 거의 우리 지역의 사람들과 자연,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 : 『산에서 피는 꽃』(통큰세상, 2014)은 수도산이 배경이고, 『아주 특별한 돌, 석탄』(교원, 2015)은 잠자리가 독수리만 하던 오래된 과거의 환상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산』(봄봄출판사, 2016)은 내연산 옆 샘재 지역을 배경으로 가족이 길을 잃었다가 다시 뭉치게 되는 이야기고요. 『울고 있는 숲』(단비, 2020)도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몸짓과 소리를 나누어보자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 : 구룡포 해녀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김 : 《포항문학》 편집장이었던 권선희 시인은 구룡포에 살고 있어서 그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어요. 어느 날 권선희 시인이 구룡포 강사리의 해녀 할머니를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할머니를 만나러 두부 두 판과 소주를 사 들고 경로당을 찾았습니다. 할머니 풍채가 건장했어요.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결혼했는데 소박을 맞고 강사리 어부를 만나 결혼했다더군요. 전처소생 넷과 자신이 낳은 자식 넷까지 모두 여덟 명을 키우며 살아온 할머니의 일생이 기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뼈대로 쓴 작품이 『엄마의 바다』(우리교육, 2008)입니다. 이 : 선생님의 인생 책이라면 동화 『귀신고래』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 그렇지요. 권선희 시인이 포경선 용운호의 선장이었던 김준기 옹의 구술을 기록한 녹취문을 《포항문학》 23호(2003)에 실었어요. 이 녹취문을 토대로 쓴 작품이 『귀신고래』(내인생의책, 2008)입니다. 2021년에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 : 『귀신고래』에 실린 그림이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작업실 ‘서경와’에 있는 원화 작품들도 인상적입니다. 김 : 『귀신고래』에 실린 그림은 연필로 그린 세밀화가 백미입니다. 장호 화백이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데리고 와서 호미곶의 풍광을 보고 느끼며 그린 작품이지요. 대전 한밭도서관, 포항 포은중앙도서관,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원화 전시회가 열렸어요. 동화책의 원화를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더군요. 이후 장호 화백이 연필화의 아쉬움이 남았던지 『아! 여우다』의 삽화를 유화로 그렸습니다. 『귀신고래』의 그림을 그릴 때는 유화 물감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되었거든요. 이 : 동화책은 서사도 중요하지만 그림이 주는 효과도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바다』에 실린 강요배 화가의 그림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김 : 제주도 그림으로 유명한 민중화가 강요배는 처가가 포항 오천이에요. 포항문협 회장을 역임한 최부식 시인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이 많습니다. 강요배 화가가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을 때 제 동화책을 최 시인이 갖고 가서 이야기를 잘한 덕분에 제주의 달이라는 대작을 최 시인이 사들였지요. 이 때문에 제주도가 술렁거렸다고 하더군요. 그림은 훗날 제주도 미술관에서 인수했습니다. 『어머니의 바다』를 그려준 화가가 『조선의 마지막 군마』의 표지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어요. 책을 통한 화가들과의 인연이 소중합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김일광은… 1952년 12월 포항 남구 섬안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창주문학상 동화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바다’를 비롯해 동화와 청소년소설 등을 40여 권 발간했다. ‘귀신고래’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됐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과 ‘포항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애린문화상(2018)과 경상북도 문화상(2014), MBC삼일문화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2024-10-20

이오덕, 손춘익을 만나며 동화를 쓰게 돼

김일광 작가는 2019년에 산문집 ‘호미곶 가는 길’(단비)을 내면서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다.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쌓이고 쌓여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다. 늘 그리운 인연들과 앞으로 만날 새로운 인연들에게 이 글을 전하고 싶다.”(작가의 말) 그렇다면 김일광 작가를 문학의 세계로 이끈 인연은 누구이며, 작가는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지역 원로인 박이득 선생의 동화책 출판기념회가 지난 8월에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 동화책 발간을 추진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일광(이하 김) : 1981년에 창간된 ‘포항문학’에 박이득 선생이 동화를 발표했습니다. 그 동화를 43년 만에 책으로 낸 겁니다. 포항은 원래 아동문학의 뿌리가 깊은 곳인데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박이득 선생은 그 1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서가 남지 않으면 후대에는 잊히기 마련이지요. 작품에서 몇 군데를 수정하고 내용을 줄여 포항의 동화 전문출판사에서 발간했어요. 박이득 선생의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될 듯하군요. 올해 ‘포항문학’ 51호 발간을 앞두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 선생님은 소설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셨는데, 동화를 쓰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이오덕, 손춘익 두 분과의 인연입니다. 이오덕 선생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 동화를 쓰면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갖게 된다며 적극 추천했지요. 이오덕 선생이 주도한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무크지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창작보다 운동으로 기울어진 경향이 강했지요. 아동문학 무크지 ‘우리들이 뽑은 대장’, ‘지붕 없는 가게’ 등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이오덕 선생님과의 인연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김: 1982년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심사를 맡았던 이오덕 선생이 저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주었어요. 2년 뒤 1984년에 ‘훈이의 손’으로 창주문학상을 받았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됩니다.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은 이오덕 선생은 과천으로 거주지를 옮기셨고, 대구·경북의 아동문학은 권정생 선생이 이끄셨지요. 이오덕 선생이 제 작품을 창작과비평사에 보냈는데 1990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 책이 ‘아버지의 바다’입니다. 사람보다 작품이 먼저 서울로 걸음을 해야 한다던 선생의 말씀대로 시골내기였던 저보다 작품이 먼저 인정받게 되었지요. 이오덕 선생이 디딤돌을 놓아준 겁니다. 이 : 포항의 문학을 얘기할 때 한흑구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한흑구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을 텐데 어떤 분이셨는지요? 김 : 인편으로 저를 부르시곤 했는데 항상 죽도시장에 있는 튀김집에 계셨어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식육점에서 간이나 천엽을 사 오게 해서 먹이셨죠. 평양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이광수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셨어요. 1960∼70년대 중앙 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연결고리가 한흑구 선생이었고, 선생 덕분에 포항 문화예술의 격이 높아졌지요. 한흑구 선생을 정점으로 ‘흐름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지역 문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선생은 누구를 흉보거나 싸운 적이 없었어요. 유신 시절에 한 후배 문인이 ‘이 참혹한 땅에서’라는 프린트판 시집을 냈을 때 다른 문인들이 “제목이 왜 그렇노”라며 나무랐지만, 선생만은 “왜 제목 탓을 하는가. 세상을 탓해야지…”라며 다독이셨죠. 포항 문인들은 여전히 그분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 한흑구가 작성한 ‘흐름회’ 결성 취지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향토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다음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난 1968년 12월에 첫출발한 ‘흐름회’. 이름마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인생은 그림자같이 흘러간다”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 연유한 것이며, 동해바다도 흐르고, 형산강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해서 항상 흘러서 새롭게 살고, 새롭게 성장하라는 뜻에서 문화예술인 5명이 주동이 되어 만든 모임. 예술을 애호하고 창작하는 사람끼리 오붓하게 모여서 표면에 나타내기보다 조용하게 숨어서 상호 연마하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실질적인 일을 해나가려 하는 ‘흐름회’ 회원들. 이 : 포항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손춘익 선생과의 일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지요. 2000년에 손춘익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함께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개풍약국 앞에서 만나 죽도시장으로 가 술잔을 기울였어요. 여름이면 구룡포 난전에 가서 고래고기를 놓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요. 구룡포는 포항 시내보다 2∼3도 기온이 낮아서 시원했어요. 1958년 박경용, 1966년 손춘익의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중앙 문단에 진출하는 문인들이 생겨났지요. 당시 박이득 선생은 문학에 뜻을 둔 시인이나 교사, 동화작가 등과 ‘청포도 문학동인’을 결성합니다. 이에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조직과 체계적인 운영이 필요해지면서 1968년 흐름회가 결성되고, 1979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가 만들어집니다. 이 : 선생님은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을 맡는 등 포항문인협회에서 많은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김 : 성홍근 동지고등학교 교장과의 인연으로 포항문인협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1985년 전국소년체전이 포항에서 열리면서 ‘포항문학’에 포항의 역사를 정리한 원고가 특집으로 실립니다. 그때 시 예산을 지원받으면서 ‘포항문학’의 격이 한층 높아졌지요. 그에 따라 회원 관리도 본격적으로 하고 제대로 된 문학인을 육성하자는 뜻에서 편집팀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회원 대부분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이기도 했고, 작품 경향이나 회원 성향이 민족작가회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이 시기는 노동운동이 활발해 ‘포항문학’ 8호에 노동운동을 특집으로 좌담과 관련 작품이 실렸습니다. ‘포항문학’ 10호까지 고은, 김지하, 이호철, 염무웅, 신경림 등의 글이 실렸고, 포항문인협회의 움직임이 주목받는 힘든 고비를 거쳤지요. 이 : 포항문인협회에서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습니까? 김 : 1998년 포항문인협회 주관으로 수도산에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를 세웠습니다. 재생 이명석 선생이 작사하고 장남 이진우 국회의원이 작곡한 ‘옛 포항시민의 노래’가 이 공덕비에 새겨 있지요. 이진우 의원은 법학 전공자인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이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할 때 ‘시민의 노래’를 공모해서 새로 만들었는데 작품성이 떨어집니다. 그 밖에 한흑구 문학비, 청포도 시비, 노계 박인로 시비, 손춘익 문학비 등이 포항문인협회와 포항시의 어려운 조율 과정을 거쳐 세워졌습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2024-10-16

초등학생 때 쓴 시 한 편이 문학의 길로 이끌어

안데르센은 환상이 들어 있는 놀라운 이야기가 동화라고 했다. 드넓은 바다를 향해 청보리가 출렁이는 호미곶에는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이한 김일광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김일광 작가의 작업실 ‘서경와’에서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동해를 굽이치던 한국 귀신고래를 다시 발견한다면, 그것은 한국 귀신고래의 본래 이름을 되찾는 큰 전환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동해’라는 우리 바다의 이름도 함께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김일광, 「작가의 말」, 『귀신고래』, 내인생의책, 2008. 이희정(이하 이) : 등단하신 지 40년이 되었고 40권이 넘는 책을 내셨습니다.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실 텐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일광(이하 김) : 코로나 이후 1년에 한 번 이오덕 제자 1기 문우들(서정오 외 7인)과 주제 없이 독후 감상과 근황, 일상의 안부를 나눕니다. 그리고 ‘햇살 동화문학회’에서 지역 동화작가들과 합평 만남을 갖습니다. 20여 년이 된 문우들이라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합니다. 종종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을 오가며 출판 담당자와 만나기도 합니다. 일상의 대부분은 호미곶의 작업실과 송도에서 보냅니다. 걷고, 읽고, 쓰며 시간을 보내지요. 이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줄곧 송도에서 사셨는지요? 김 : 1952년 12월 저녁 예배 종소리를 들으며 태어났습니다. 당시 선친께서는 6·25 전쟁에 징집되어 보급물자인 탄환을 수송했습니다. 전쟁 중이라 난방이 안 되어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 세 분의 체온으로 언 몸을 녹이며 자랐지요. 어릴 적 내 놀이터는 형산강과 섬안, 들녘 곳곳에 흩어져 있던 둠벙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옛강이라는 뜻의 구강이었는데 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커다란 못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즘도 그 강 자락에 자주 가곤 해요. 지금은 남의 땅이 되었지만, 거기에는 아버지가 분가루처럼 매만지던 흙이 남아 있어요. 물론 강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 강은 여전히 맑고 곱기만 합니다. 빛 고운 모래로 다져진 외가로 가던 오솔길, 달을 떠받치듯 서 있던 키 큰 미루나무, 물풀 사이에서 지지대던 개개비, 뜸부기 등 이제는 다 사라지고 나만 남은 것 같군요. 이: 부친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셨고, 어머니도 농사꾼의 딸이었습니다. 선대는 경주 양남면 나아리 마을의 유서 깊은 유학자 집안이었지요. 1883년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맺기 전부터 일본이 우리 바다에 와서 어로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바닷가에 움막을 만들고 반일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집안이 몰락했어요. 그 바람에 양남 고개를 넘어 장기에서 오천으로 와서 자리를 잡게 되지요. 증조부 때부터 쫓겨 다니게 되지만, 6·25 전쟁 피난길에도 1800년대 조상들의 문집은 잃어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시면서 부친은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여덟 살에 가장이 되어 농사일을 하셨지요. 이 : 선생님의 성함인 ‘일광(日光)’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김 : 원래 집안 족보에 올린 이름이 따로 있었어요. 항렬대로 진환(鎭煥)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전쟁 후에 돌아와 보니 체격이 미숙해서 족보대로 하자면 아이가 이름에 눌려 죽을 것 같은 염려가 들었던 게지요. 그래서 태양처럼 살아나라는 의지를 담아 일광(日光)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호적에 올렸답니다. 이후 문학의 인연으로 몇 개의 호를 받았지요. 은사이신 손춘익 선생이 일광이 산야에 가득하라는 뜻을 한글로 풀어 ‘들뫼’를, 아촌 이삼우 선생이 동촌(童村)을, 진촌 배용일 교수가 동진(童津)이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후배 시인이 “나이 들수록 귀는 높이 매달아두고 입은 나무 아래에 묻어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속담을 빌어 ‘이수(耳樹)’라고 지어 낙관에 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문학적 DNA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듯하군요.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집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봤어요. 1960년대 우리 동네에 책이 많은 목사님 집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 손자가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목사님 집에서 책을 빌려볼 수 있었지요. 큰 기쁨이었습니다. 당시 편은범 목사님께 선물 받은 책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연극 어린이 대본이었어요. 1930년에 발행된 번역본이었죠. 부산 곰곰이서점에 어린이 책 박물관 건립 계획이 있어 기증했습니다. 4학년 때 특활반을 구성했는데 고학년으로 구성된 혼합 축구부가 유명했습니다. 축구부에 들지 못한 학생들 중에서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아 반 칸짜리 교실에서 문예반을 만들었어요. 그때 「소나기」라는 시를 썼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보리타작 중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허둥지둥 거둬들이는 내용이었어요. 문예반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그 시를 판서해놓으셨더군요. 내 시 한 편으로 한 시간 동안 수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를 경험하고 감상했던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자신감이나 재능보다는 책과 친해지게 되고, 글쓰기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지요. 이: 선생님의 청년기는 어땠나요? 김 : 우리 세대는 청소년기는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진학률이 낮았지요. 집안을 도와 사회로 나오는 예가 많았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버지는 자식 교육열이 높았던 덕분에 대학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비 부담이 없었던 대구교대로 진학했습니다. 이 : 그러면 문학과의 인연은 대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나요? 김 : 대구교대에 다닐 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경북고등학교 출신 친구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시월유신이 발표될 무렵, 야학 활동을 했는데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시와 산문을 습작하고 막걸리집에서 그 친구와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야학이 불량 서클로 찍혀서 중단되고 말았어요. 그 후 지산교회 장로님이 양계장 한 동을 빌려서 야학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버려진 책상과 의자를 수거해 교실을 만들었지요. 화가였던 유병우가 교감, 유익종 씨가 교무 그리고 나는 학생과 일을 맡았습니다. 이 : 선생님의 문청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포항의 박수철 화백과 김원택 등이 모여서 ‘형상회’라는 동인 활동을 했어요. 시내 백양식당에서 500원 하던 빈대떡을 놓고 소주를 마시며 시와 산문 습작을 읽고 토론했지요. 글과 그림과 음악을 혼합해 시화전도 세 차례 열었습니다. 김원택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르는 등 그 시절 작가 지망생들의 열정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문학 등단 플랫폼이 넘쳐나는 요즘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요. 김일광은… 1952년 12월 포항 남구 섬안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창주문학상 동화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바다’를 비롯해 동화와 청소년소설 등을 40여 권 발간했다. ‘귀신고래’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됐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과 ‘포항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애린문화상(2018)과 경상북도 문화상(2014), MBC삼일문화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2024-10-13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함께 추고 싶어

마지막 대담은 장소가 바뀌었다. 그동안 동빈내항 인근에 있는 포항예총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마지막 대담은 남구 연일읍 자명리에서 하자고 했다. 그곳에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자명리의 폐교된 자명초등학교는 예술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일을 김동은 회장이 벌인 것이다. 비옷을 입고 옮겨 심었다던 백일홍이 주인보다 먼저 반겨주었다. 전은주(이하 전) : 자주 지나다니던 길인데 여기에 예술촌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다들 그러더군요. 4차선 도로 공사한다고 문패까지 떼버려 더 그럴 겁니다. 전 : 넓은 운동장과 야외 데크가 인상적이군요. 김 : 이 운동장 때문에 여기 들어왔습니다. 아늑한 운동장에서 아이와 어른들이 다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싶어서요. 전 : 지난번에 들려주신 포항의 노래를 자꾸 흥얼거리게 됩니다. 김 : 그 노래가 중독성이 있지요. 한번은 어머니들과 평생학습원에서 수업하다가 야외 수업으로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 갔어요. 광장에서 연습복 치마를 입고 ‘포항의 노래’에 맞춰 ‘월월이청청’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귀비고에 현장학습을 온 초등학생들이 함께해도 되냐고 해서 다 함께 춤을 추었지요. 아이들이 아주 재미있어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음악 좀 구할 수 없냐”고 묻더군요. “연락처를 주시면 보내드리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연락처가 적힌 쪽지가 없어진 거예요. 전 :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봤을 때 어떠셨나요. 김 : 그때 새삼 느꼈지요.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춤을 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전 : 그래서 ‘자명예술촌’을 만든 건가요. 김 : 원래 환여동에 있는 폐교된 대양초등학교 부지를 생각했습니다. 바다와 가깝고,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추면 끝내줄 것 같더군요. 밤만 되면 그 학교 앞에 가서 서성거렸어요. 그런데 그 학교는 교육청에서 유아교육체험센터로 운영하면서 물거품이 됐지요. 대안으로 폐교된 자명초등학교를 자명예술촌으로 바꿔 2022년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올 때 쑥이 제 키만큼 자라 있었어요. 2년에 걸쳐 그 풀을 제거했는데 저 교실 뒤편에는 아직 손도 못 댔습니다. 사실 관리하기가 아주 힘든데 기분은 정말 좋습니다. 여기 와서 새벽형 인간이 되었지요. 온갖 새소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호미를 들고 나가 풀을 맵니다. 새까맣게 탄 거친 손을 보고 무용가의 손이 왜 그러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내 손이 자랑스러워요. 요즘 매일 운동장에서 궁리합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에 일인용 매트 하나씩 깔고 다 함께 요가를 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운동장 가득 원터치 모기장 속에 앉아 별과 달을 보며 우리 노래를 함께 듣고 부르면 얼마나 황홀할까, 하고요. 전 : 보름달이 떴을 때 ‘월월이청청’을 추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월월이청청’은 어떤 춤인가요. 김 : 전라도에는 ‘강강술래’가 있습니다. 목포 등지에서 불렸으니까 전라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라도 ‘강강술래’라고 하지는 않지요. ‘월월이청청’은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면서 부르던 노래인데, 소리하며 춤을 춘다 해서 ‘소리춤’이라고도 합니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월월이청청’에 대한 연구를 했지요. 민속무용 전문위원인 중앙대 정병호 교수님께 “‘강강술래’가 지역 문화재로 등록돼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월월이청청’도 지방문화재로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면 될까요?” 하고 여쭤봤더니 이슈로 만들어 널리 알려야 도움이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2000년 경주 엑스포 폐막공연을 비롯해 행사만 있으면 ‘월월이청청’을 공연했습니다. 포항, 경주 등에서 ‘월월이청청’ 공연을 했다는 뉴스가 나가니까 영덕에서 갑자기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더군요. “문화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냐”고 반문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우리 모두의 ‘월월이청청’이 되어야 하는데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전 : ‘월월이청청’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김 : ‘강강술래’는 엄청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가사마다 동작을 예술적으로 만들어놓았지요. ‘월월이청청’도 재 밟기, 대문 열기 등 대목마다 동작이 있어요. 여성들이 춤을 추면서 한풀이를 한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여기서 이렇게 하고 저기서 저렇게 하고, 이런 것은 하나도 없었지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누군가 한 사람이 일어서서 흥얼거리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서 흥얼거리고요. 옛날에 시골에 가면 “모둠 떡 해 먹는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보름달 밤에 누구는 뭘 가져오고, 또 누구는 다른 걸 가져오고, 이런 식으로 하나씩 가져와서 먹고 놀다가 우리 춤 한번 춰 볼래, 그랬겠지요. 걷고 돌다 보니까 더 크게 한번 돌아보자 했을 테고, 인원이 점점 많아지니까 안으로 한 사람 손 놓고 들어가다 보니 골뱅이, 실꾸리 감기가 되고요. 그리고 실꾸리 감았으니 풀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실꾸리 풀기가 되고요. 그런 놀이가 춤으로 된 것이 ‘강강술래’고 ‘월월이청청’인 겁니다. 전 : ‘강강술래’와 ‘월월이청청’의 원리가 그렇게 되는 것이군요. 회장님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퍼블릭 프로그램이나 시니어 수업을 많이 하시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김 : 학생들을 가르쳐 전문가로 키워내는 일은 다했으니 일반인들과 같이 놀 수 있는 게 뭘까, 그런 궁리를 합니다. 나도 내 나이에 맞게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무용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하지요. 그래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 관심이 많아요. 포항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만든 ‘사철춤’도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씨뿌리기, 모내기, 추수하기…, 이런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 동작만으로도 굴신운동이 됩니다. 평생학습법이 시행되면서 예전에는 문턱이 높던 문화예술교육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지요. 양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우수한 프로그램으로 대상자들을 만나고자 늘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 : 아직도 춤에 대해 공부하실 게 있습니까. 김 :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겠지요. 새로운 것도 접해야 하고요. 그래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어요. 코로나가 유행할 때는 한국댄스테라피협회 류분순 이사장님한테서 동작 치유에 대해 배웠습니다. 1년 동안 꾸준히 수업을 받았고, 2급 자격증도 취득했지요. 내가 해온 춤은 주입식으로 배우고 가르쳤다면, 동작 치유는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게 해야 합니다. 류분순 이사장은 현대무용을 전공하셨는데 내가 한국무용 동작을 하면 그게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곤 했어요. 한국무용이 가장 자연스럽다면서요. 전 : ‘김동은 무용단’은 연오랑세오녀를 바탕으로 한 ‘Sun Moon-별이 된 연인’, ‘충비 단향, 대를 잇다’를 비롯해 포항의 문화유산을 콘텐츠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는 지역 예술가가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승화해야 하는 주제가 아닐까요? 춤으로 좀 더 친근하게 포항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일월문화제 때 길쌈놀이를 접목해 세오녀의 비단 짜기를 기획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길쌈놀이를 민속놀이로 많이 하는데 다양한 색깔을 사용하곤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줄을 만들어서 포항의 노래에 맞춰 공연했습니다. 관객이 동참해서 다 함께 줄을 잡고 춤을 추었는데 반응이 참 좋았어요. 전 : 혹시 포항에서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없었는지요. 김 : 시립무용단을 해체한 일입니다.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지요. 그때 억울하더라도 좀 참을 걸, 시립무용단이 있으면 후배나 제자들이 돌아올 자리도 있었을 텐데……. 아주 아쉽습니다. 전 :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김 : 포항에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포항예총 회장으로 봉사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래전에 예술의 경계는 무너졌지요. 길가의 백일홍도 색색이 피어 있으니 보기에 더 좋지 않아요? 어머니의 품으로 보듬어 포항의 예술가들이 더불어 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끝

2024-10-09

관객들 눈물바람 난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무용은 전용 공연장 없이는 관객들과 만나는 데 어려움이 있다. 1980년대 무용 공연은 육거리에 있는 시공관에서 열렸다. 하지만 시공관은 수준 있는 무용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무용 공연이 열리면 웃지 못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동은은 지역 무용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다. 전은주(이하 전) : 이매방 선생의 포항 공연 이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김동은(이하 김) : 그 공연을 계기로 포항에서 무용의 저변을 넓히려면 하루빨리 무용협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했지요. 지금 열리는 전국무용제를 그때는 대한민국 무용제라고 했어요.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대상을 받은 팀은 3개 지방을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 후 한 해도 빼먹지 않고 그 순회공연을 유치했어요. 시민들이 공연을 많이 봐야 무용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기고 무용에 대한 수준도 높아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전 : 특히 인상 깊었던 공연이 있습니까. 김 :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그 하늘 그 북소리’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만 해도 책 몇 권은 될 거예요. 당시에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조명을 비출 수가 없었습니다. 시공관 앞마당에 발전차를 불렀는데 주변 상가에서 시끄러워서 장사가 안된다며 시에다 진정을 넣어 공연을 못 할 뻔했지요. 그때 무용단이 20∼30명 정도 내려왔는데, 시공관 안에 분장실이 없어서 남자들은 바깥 골목에서 빗방울을 맞으며 화장하고 분장하고 그랬습니다. 전 : 믿기지 않는 얘기입니다. 김 : 돌이켜보면 힘들었지만, 가슴 벅찬 일이기도 했지요. 국립무용단을 초청해놓고 제가 학교마다 표를 팔러 다녔습니다. 교장 선생님들께 문화교실 때 무용 공연을 봐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객석 수는 생각하지 않고 표를 너무 많이 팔아버렸어요. 사실 표가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도 몰랐지요. 공연 당일 국립무용단 단장님이 관객을 더 입장시키면 너무 복잡해서 공연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밀려드는 관객을 보면서 저도 대책이 없었습니다. 통로는 물론이고 무대 바로 앞에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지요. 그런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다들 몰입하니까 숨소리만 나고 잡음 하나 없었습니다. ‘그 하늘 그 북소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무용 극화한 공연입니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한테 너희 북을 찢으라고 시키잖아요. 그걸 두루마리 편지로 연출해서 낙랑공주가 그 편지를 펼쳐 읽는데 무용수가 눈물을 흘리니 객석에서도 훌쩍거리면서 난리가 난 거예요. 공연이 끝나고 감사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전 : 많은 학생을 지도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는지요. 김 : 제자들은 하나같이 다 기억에 남지요. 무용가로 남아 있든 아니든 스쳐 간 인연이든 다 소중합니다. 1994년에 전국무용제가 대구에서 열렸을 때였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데 남자 무용수가 없어서 무용학원 1층에 있던 합기도 도장에 가서 남학생 몇 명만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관장은 아이들이 말을 듣겠냐며 난색을 보였는데 다행스럽게 남학생 7∼8명이 하겠다고 나섰지요. 그중 한 명이 경찰이 되었는데 오늘 전화가 왔어요. 스승의 날이라고 꽃을 보내주면서 제가 포항예총 회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며 축하해주더군요. 전국무용제가 열렸을 때 저 멋있는 남자 무용수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해병대 군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연습실에 오면 늘 배고프다고 했어요. 전기밥솥 세 개에 밥을 하고 찜통에 닭을 몇 마리씩 삶아서 닭개장을 끓여놓으면 순식간에 먹어치웠지요. 과일도 한 상자씩 넣어놓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 사라졌고요. 그래도 그때가 정말 행복했습니다. 전 :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군요. 김 : 그 남학생들 중에 무용을 전공한 친구도 있습니다. 말을 좀 더듬는 친구였어요. 이따금 짜장면을 시켜줬는데 먹고 나면 다른 아이들은 그냥 나가버렸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뒷정리를 깔끔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선생님, 저 무용 전공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똑같이 동작을 가르쳤지만, 그 친구는 감정이 탁 나왔어요. 딱 무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전공을 하겠다고 나서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더군요. 그때도 무용을 하겠다는 남학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극히 드물었지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무용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 현장에 들어와서 하는 것이 정말 다르다. 결코 화려하지 않으며 자신과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한다. 많이 힘든 일이라 권하고 싶지 않다.” 전 : 그 학생이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김 : 이미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말을 더듬으니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은 가지기 힘들 테지만, 춤은 몸으로 하는 것이니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가정도 이루어야 하는데 무용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레슨비를 받지 않고 그냥 한번 해보고 그래도 할 수 있겠으면 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정말 열심히 하는 거예요. 무용하는 사람은 몸이 악기니까 안경을 끼면 얼굴형이 변할 수 있으니 렌즈를 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실행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렌즈 끼우는 게 적응되지 않아서 나뿐만 아니라 학원의 여학생들도 다 같이 들여다보며 렌즈를 끼워주곤 했지요. 그 친구는 결국 서울로 진학했고 무용수로 성공했습니다. 우연히 접한 무용이 인생을 바꿔놓은 거죠. 전 :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생각납니다. 김 : 그렇지요. 저도 영화 수십 편을 찍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특히 그 남학생들과 전국무용제를 준비하면서 희열을 느끼곤 했답니다. 무대 세트를 밤새도록 만들어서 트럭에 싣고 대구까지 갔지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서 감격해하곤 합니다. 전 : 혹시 무용교육을 하면서 회의를 느낀 적이 있나요. 김 : 예전에는 학부모와 진로 상담할 때 아이가 학교 무용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국립무용단이나 시립무용단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어요. 무용학원 원장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을 거라고 합니다만, 무용과는 그보다 빨리 문을 닫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춤은 더 그래요. 아이들이 전공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제가 말렸어요. “전공은 안 된다, 춤이 좋으면 그저 춤만 추러 와라, 밥벌이도 안되는 게 무용이다” 하고요. 기존에 전공하려고 연습하던 애들은 가르쳐서 진학시켰지만, 그 후로 전공하려는 학생들은 아예 받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기수 중 한 명은 경기도립무용단에 들어갔지요. 예쁜 제자들이 참 많았어요. 여제자들이 결혼해서 다른 지역에 살다가 친정에 와서 무용학원 간판을 볼 때면 “우리 선생님 아직 저기 계시구나”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원 운영이 진짜 힘들 때도 학원 간판을 못 내렸습니다. 전 : 무용교육의 현실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김 :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춤에는 ‘강강술래’, ‘월월이청청’이 있습니다.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며 걷기만 해도 춤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춤이라고 하면 “나는 춤을 못 춰” 하며 거부 반응부터 보여요. 왜냐하면 요즘 무용이 너무 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만들어서 하다 보니 무용 인구가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무대라는 공간에 가둔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무용이 극소수의 사치스러운 취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거죠. 전 : 그렇다면 무용교육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 : 우리 춤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움직임이 곧 춤이다!’ 특히 우리 춤은 자연과 닮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지요. 돌담체가 뭔지 아시나요? 길을 가다 돌담이 가로막혀 있으면 돌아서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 춤에서 이 동작을 돌담체라고 부릅니다. 또 날아가는 기러기를 형상화해서 기러기체, 성주신을 받드는 모양이라고 성주체라고 하고요. 일상에서 우리 자세나 자연의 형상을 모방해서 박금슬 선생님이 우리 춤 동작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생활, 자연과 닮았습니까? (김 회장은 이 대목에서 직접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전 : 직접 보여주시니 바로 이해가 되는군요. 김 : 이 동작에 음악만 틀면 저절로 춤이 되지요. 음악은 ‘김동은 무용단’이 포항 대잠홀 상주단체로 활동할 때 만든 ‘포항의 노래’입니다. “파란 동해 바다 너머 너머∼” 전 : 노래를 들으니 저절로 몸이 들썩이네요. 김 : 그게 바로 춤이지요. 춤이 별거 있나요.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10-06

무용 불모지에서 고군분투하며 무용의 저변 넓혀

개척자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영역, 운명, 진로를 처음으로 열어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용가 김동은이 포항 무용을 개척했다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개척은 남모를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포항에 무용을 뿌리내리고 그 저변을 넓혀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은주(이하 전) : 회장님은 포항에 무용이라는 예술 영역을 개척하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하다 보니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내가 우겨서 한 무용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말을 못 했지요. 진짜 힘들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집에 전화도 안 했어요. 전 : 그 시대에는 예술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무용은 어땠나요. 김 : 무용학원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딴따라’라며 대놓고 비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무용도 열심히 가르쳤지만 몸가짐, 말투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 : 회장님은 어떤 무용 선생님이셨습니까. 김 : 제자들이나 수강생들은 내가 그렇게 무서웠다고 합니다. 잘 가르쳐야겠다, 반듯하게 키워내야겠다, 얼른 그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억척스럽게, 혹독하게 가르쳤지요. 대학입시에는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등을 다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본기부터 확실하게 가르쳤지요. 한 동작 한 동작, 완성될 때까지 붙잡고 시켰어요. 팔꿈치를 교정해야 한다면 팔꿈치에 멍이 들 정도로 내 손아귀에 꽉 힘을 주고 교정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폭력으로 신고당하겠지요. 전 : 열정이 대단하셨군요. 김 : 그럼요. 무용은 물론 악기도 가르쳤습니다. 음악을 알아야 무용 동작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가르쳐서 대학에 보냈더니 기본이 잘된 학생들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대학교수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콩쿠르에 나갈 때는 다리미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 무대의상을 구김 하나 없이 다려 입혔어요. 무대 위에 세워놓으면 인형같이 예뻤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말만 하면 사람들이 확 깨는 거예요. 아이들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퐝서 왔는데예”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면 “퐝? 퐝이 어디야?”라고 사람들이 되묻곤 했지요. 지금은 나도 포항 사투리를 많이 씁니다만 그때는 그게 참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아이들 말투를 고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전 : 제자들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할 때 참 뿌듯했겠습니다. 김 : 말할 수 없이 뿌듯했지요.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가르쳐 원하는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첫 제자 둘(경북무용협회 지회장을 지낸 손현, 조은정)이 대학에 갔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딸을 시집보내면 그런 기분이 들까 싶었지요. 허전함과 허탈함에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입시를 한두 해 치르는 것도 아닌데 늘 적응이 안 됐어요. 한번은 너무 힘들어하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물이 함지박 같은 큰 그릇에 담기는 속도와 종지처럼 작은 그릇에 담기는 속도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 채워진다.” 에너지를 많이 쓴 만큼 채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픈 시간이 반복되어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고 포항무용협회, 포항시립무용단도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전 : 학원을 운영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김 : 지금도 인간관계가 어렵습니다만 젊어서는 더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학부모들과 좀 더 잘 지낼 수 있었겠지요. 그때는 나무 사이에도 간격이 필요하듯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적당함이 얼마만큼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학부모와 저와의 관계는 아이들이 없으면 남이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저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선택했어요. 전 : 묘령의 무용 선생님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학부모들이 더 좋아했겠는데요. 김 :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2층 학원에서 내려다보면 길 하나만 건너 바로 제자인 혜승이네 집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누구네 집, 또 그 옆에는……. 그 동네 원생들이 많았지요. 누구 집에 제사를 지내거나 큰일이 있으면 음식을 가득 차려 보내주시곤 했어요. 전 : 무용의 불모지에서 어떻게 단시간에 학원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는지요. 김 : 지금처럼 홍보 수단도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열심히 가르치면 알아줄 거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표회를 했지요. 1979년 3월 11일. 그 날짜는 잊을 수가 없어요. ‘김동은 무용학원’의 1회 발표회 날입니다. 1978년 6월에 정식으로 학원을 열었는데 채 1년도 안 된 시점이었지요. 전 : 발표회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김 : 무용은 종합예술이잖아요. 그런데 미술, 음악, 무용, 의상 등 포항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음악 녹음 편집도 매번 서울 가서 해야 했지요. 서울에 갔다가 타이밍이 안 맞으면 날밤을 새워 직접 음악 편집을 해야 했어요. 의상도 작품마다 다르게 맞춰 입혔지요. 학부모님들이 많이 협조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아요. 그저 아이들이 예뻤습니다. 1회 발표회의 첫 무대는 꼬마 신랑이었는데 내가 무용학원 1호 등록생인 여섯 살 초슬이를 업고 춤을 췄지요. 힘들었지만 그 시절이 참 인간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 : 첫 공연 후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첫 공연을 시공관에서 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포항 KBS 김순명 아나운서가 사회를 봐주셨어요. 반응이 뜨거웠지요. 발표회를 마치고 나오면 온 시내가 시끌벅적했습니다. 무용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장구를 배우러 오시는 분도 있었고 며느리 하자는 분도 많았어요. 공연했던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또래의 우상이 되었고, 공연을 본 아이들은 집에 가서 무용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지요. 그 후 해마다 발표회를 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어요. IMF를 겪으면서 2년에 한 번씩 하게 되었죠. 전 : 황당한 일도 겪으셨다면서요. 김 :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첫 무용학원은 죽도성당 골목 안에 있는 2층집이었어요. 그 일대의 유일한 2층 건물이었지요. 1층은 합기도 학원이었고 2층이 무용학원이었습니다. 그 골목은 비만 오면 장화 없이 못 지나다닐 정도로 진창이었어요. 그런 골목에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면 검정 세단이 줄을 지어 대기하곤 했습니다. 자가용이 귀할 때였으니 도대체 저기가 뭐 하는 곳인지,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았지요. 그러다 보니 세무조사 리스트에 올랐나 봅니다. 전 :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무용 공연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김 : 늘 아쉽고 안타까운 점은 무용에 대한 이해도가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대사가 있어 쉽게 이해되고 빨리 공감할 수 있어요. 반면에 무용 공연을 본 관객 중에는 “뭐, 나와서 뺑뺑 돌기만 하다 들어가는구먼”이라고 하는 분도 있지요. 1986년인가 강선영 선생님이 무용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매방 선생님 순회공연을 포항에서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려 성사된 일이 있습니다. 공연 당일 관객들 줄이 동빈동까지 이어질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요. 사진 섭외를 미처 못 해서 그 귀한 자료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더군요. 전 :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야, 실컷 졸다가 봐도 아직도 북을 두드리고 있네.” 이매방 선생님이 공연하는데 객석에서 그런 말이 오가는 거예요. 내용을 모르면서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무용인들에게는 주옥같은 시간인데 말입니다. 또 박재근 선생님이 조승미 선생님하고 파드되(pas de deux, 남녀 2인무)를 공연하려고 발레복을 입고 등장했을 때는 “민망하게 꼬락서니가 저게 뭐꼬?” 하며 객석에서 쑤군댔습니다. 공연 후 박재근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발레리나를 리프트 한 상태로 퇴장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순간 몸에 힘이 다 빠져 상대를 들어올릴 힘이 없어서 간신히 들어왔다고. 정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29

스물다섯 살에 연고 없는 포항에서 무용학원 개원

여고 시절의 무용 선생님은 수업 전에 덧버선 검사를 했고, 꼭 수돗가에서 발을 닦고 들어오게 할 정도로 엄격했다. 당시 선생님의 반듯한 용모와 도도한 기품은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김동은 무용가와의 첫 통화 때 바짝 긴장했다. 내 염려를 알아차렸는지, 본인도 이런 대담은 생소하다며 서로 마음 편하게 만나자고 했다. 김동은 무용가는 지난 2월 23일 사단법인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선에서 당선된 바 있다. 동빈내항에 있는 포항예총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전은주(이하 전) : 지난 3월에 한국예총 포항지회장에 취임하셨죠. 그 후로 바쁜 나날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네, 회장 취임 후 한동안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바빴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열심히 공부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전 : 포항예총 역대 회장 중 첫 여성 회장이자 첫 무용협회장 출신입니다.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김 : 1978년에 포항에 왔습니다. 그전에 포항에 무용학원 한 군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1970년대 이후 포항에서 학원 무용 선생으로는 내가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좀 어렸지요. 어리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스물다섯 살이었어요. 포항에 와서 교육청에 무용학원 인가를 받으러 가니까 내주지 않더군요. 춤이라면 사교춤으로만 생각할 때여서 무용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어요. 학원 장소를 마련해놓고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인가를 받았지요. 인가 번호를 지금도 기억하는데 13호입니다. 그때 포항 시내에 공연장이 딱 하나 있었는데 시공관이었어요. 지금은 중앙아트홀이 있는 자리지요. 그곳에서 공연할 때 연극인들이 조명을 도와주고 미술가들이 무대를 꾸며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신상률 포항예총 회장님, 김삼일 은하 극단 대표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언젠가 때가 되면 신세를 갚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포항예총 회장이 되고 보니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요. 전 : 지금도 무용 하면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 시절에 무용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 초등학교 때 학예회가 열리면 주인공으로 뽑혀 공연을 했었지요.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무대에 서는 게 좋았어요. 중학교에 무용반이 있어서 무용을 했고 경북예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경북예고 5회 졸업생입니다. 전 :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김 : 선생님들이 나더러 “너, 아양 초등학교 졸업했냐”며 웃으시곤 했어요. 내가 아양(애교)을 많이 떨어서 그랬답니다.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친구들한테는 잔소리를 많이 해서 시어머니라는 얘기를 들었고요. 피부가 곱고 뽀얘서 규율 선생님한테 볼 검사를 자주 받았지요. 가제를 손가락에 말고 볼을 싹 닦아보곤 하셨어요. 손톱도 유난히 반짝여서 무색 매니큐어를 발랐다고 혼나기도 했습니다. 전 : 어여쁜 학생이셨군요. 혹시 롤모델이 있었나요. 김 : 있었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에 무용학원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백년욱 원장님이 운영하는 학원에 가게 되었는데, 원장님의 첫인상이 근엄하면서도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가 겨울이라서 한복 치마저고리 위에 마고자까지 갖춰 입고 올림머리를 하고 계셨지요. 그때 목표가 딱 생겼습니다. 무용학원 원장이 되어야겠다고. 전 : 무용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김 : 나는 2남 1녀의 맏딸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기생으로 만들 수 없다며 극심하게 반대했어요. 그래서일까요? 아버지는 생전에 한 번도 제 공연에 오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섭섭하지는 않았어요. 무용하는 걸 묵인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지요. 내가 무용에 온 힘을 쏟는 걸 보고 나중에는 참 열심히 한다고 인정해주시더군요. 전 : 그 시절에는 아버지가 반대하면 무용뿐만 아니라 뭐라도 하기 힘든 시절이었을 것 같습니다. 김 :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뒤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머니가 너 때문에 내가 주머니를 두 개 차야 한다고 하셨지요. 아버지 눈치 보느라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 해준다며 늘 미안해하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전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김 : 군인이었습니다. 육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지요.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있는 참전용사 비문에 아버지 존함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집이 엄청나게 셌어요. 국가유공자 훈장을 받으러 오라고 했을 때 “그깟 종이 쪼가리는 받아서 뭐 하노” 하시면서 안 가셨답니다. 미군 부대에서도 표창장을 준다고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끝까지 안 가셨고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 국가유공자 가족으로 아무 혜택도 못 받았어요. 어머니께서 그 훈장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안타까워하셨지요. 세월이 흘러 막냇동생이 국방부에 의뢰했더니 아직 훈장이 있으니 찾아가라고 했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영천 호국원에 영면하셨지요. 전 : 국가유공자인데 아무 혜택도 못 받으셨군요. 김 : 연금은 물론이고 혜택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강사 지원서에도 국가유공자 자녀라 쓰면 우선권이 주어진다는데…. 지난 6월 25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74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군인들이 깃발을 들고 무대에 입장할 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전 : 포항에 오실 때 연고는 있었는지요. 김 : 없었습니다. 전 : 연고도 없는 포항에 가서 무용학원을 열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 : 아버지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저를 포항으로 시집보냈다고 생각하시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듯합니다. 전 : 포항에 온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김 : 친구가 동지여상 무용 교사였어요. 그 친구를 의지해 포항으로 왔는데 정작 그 친구는 결혼 후 포항을 떠났습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대구에서 무용학원을 열면 스승이나 선배들의 영역과 겹치게 되지요. 그걸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 : 어쨌든 용기가 대단했군요. 김 :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나이 어리다고 무시할까 봐 허리까지 긴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틀어 올려 비녀 같은 걸 꽂고 다녔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려고요. 지금은 빈말이라도 젊어 보인다고 하면 기분 좋은데…. 그저 웃음만 납니다. 전 : 그 당시 포항 분위기는 어땠나요. 김 : 죽도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슬래브 지붕의 단층주택뿐이었어요. 밤이면 시내 전체가 조용했고 제철소의 용광로에서 뿜어내는 시뻘건 빛과 용광로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들렸지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 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김동은은… 195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왜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북예고와 광주대를 졸업하고, ‘월월이청청에 관한 연구’로 중앙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제2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폐막공연에서 ‘월월이청청’을 선보이는 등 ‘월월이청청’의 가치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78년 포항에서 무용학원을 개원한 후 지역 무용의 저변을 넓히는 데 힘썼다. 포항무용협회 초대 회장, 경북무용협회장 등을 지냈으며, 제14회 금복문화대상, 제44회 경북도문화상 은상 등을 받았다. ‘충비 단량, 대를 잇다’ 등 지역에 기반한 20여 편의 창작 한국무용을 발표했다. 2024년 3월 제14대 포항예총 회장에 취임했으며, (사)한국미래예술문화진흥원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09-25

“지금도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 간절해”

구순을 바라보는 김자중 선생은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여건만 만들어준다면 가위를 다시 잡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고 했다. 김자중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는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남편과 함께 만든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돼 여한이 없다고 술회했다. 김홍제(이하 제) : 1985년 동해안별신굿이 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선생님도 지화 전승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김자중(이하 김) : 그때는 무형문화재라 했는데, 김석출과 그의 아내 김유선이 지정되었지요. 김석출은 넉살이 좋아 굿판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요. 우리 집에 대학교수들이 한창 찾아올 때는 경상도, 강원도 어촌에 풍어제나 굿이 많이 열렸고, 그 바람에 나도 바빴던 터라 무형문화재 같은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굿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많이 작고할 때여서 굿판에 사람이 부족했지요. 김석출이 2005년에 세상을 뜨자 조카인 김용택이 전승자로 지정되었고, 김석출의 딸들도 전승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도 노력을 좀 했으면 전승자로 지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왜 없겠어요? 워낙에 나서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지요. 제 : 지화를 계속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 : 이제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바람에 나부끼는 가랑잎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2021년에 지화 전시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과연 가능할까 싶었는데 막상 가위를 잡으니 힘이 나더군요. 그때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50평 정도 되는 작업실을 누가 마련해준다면 지화를 다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지화를 평생 만들어왔지만 솔직히 돈 없이는 힘든 일입니다. 화주가 내는 돈이 많을수록 힘이 더 날 수밖에 없어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지화를 만들어보고 싶군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았던 어부들을 생각하며 정성이 가득 들어간 지화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고 싶어요. 동해안별신굿은 무형유산으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지만, 지화는 개인의 솜씨에 달려 있지요. 지금 굿판을 장식하는 지화는 성에 안 차요. 지화가 사라지지 않고 예술작품으로 계속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흥과 장단이 용솟음칩니다. 동해안별신굿의 드렁갱이장단이 아직 내 몸속에 흐르듯이요. ※ 김자중 선생과 대담을 마친 후 김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와 대담을 이어갔다. 김홍제(이하 제) : 사모님도 지화를 만들 때 함께하셨습니까? 장숙자(이하 장) : 나도 지화를 잘 만들어요. 영감만큼 가위질에 능숙하지는 않지만요. 지화를 염색하고 말리는 일은 주로 내가 맡았지요. 지화는 혼자서 만들기 힘들어요. 누군가와 함께해야 할 수 있는 힘든 작업이에요. 우리는 생계가 달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진짜 열심히 했어요. 굿이 겹쳐서 잡히면 밤을 꼬박 새울 때도 많았지요. 제 : 김자중 선생이 지화를 만들며 굿판에 나선 세월이 70년 가까이 됩니다. 결혼하고 60여 년을 함께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나요? 장 : 나도 흥이 참 많았어요. 영감을 따라다니면서 사설과 가락을 배웠고, 장구와 국악기를 잘 다뤘지요. 가장 기억나는 일은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한 일입니다. 영일군이 포항시와 통합된 게 아마 1995년이지요. 그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청하면장이 찾아와서 영감한테 영일군 국악경연대회에 청하면 대표로 출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영감이 젊은 사물놀이패들과 함께 굿거리장단을 가르치고 대회에 나갔는데 나도 갔지요. 다행스럽게 영일군 경연대회에서 우리 청하면이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이 영일군 대표로 경상북도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지요, 그때 마침 영감한테 일이 들어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가 젊은이들을 인솔해 경상북도 대회에 나가 2등을 했어요. 영감과 함께 나갔으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인데 정말 아쉽더군요. 전국대회에 나가서 입상했더라면 국악으로 무형유산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제 : 굿판에서 일하는 분을 남편으로 둔 인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장 : 굿판에 가보면 양중이 장구를 치며 추임새를 넣고, 무당이 사설을 늘어놓을 때 제 신랑인 양중이가 계집질에 노름까지 한다며 신세 한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구경꾼들은 재미있다며 배꼽을 잡으며 웃지만 실은 무당 자신의 신세 한탄인 거죠. 굿판에 나선 남자들은 술과 노름, 계집질에 흥청거리며 살았어요. 그걸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속이 어떻겠어요? 까맣게 타들어갔지요. 그래도 그 험한 세월을 참고 견뎌냈습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디 가당키나 했겠어요? 모두 모성으로 버텨냈지요. 그런 세월이 다 지나자 영감도 늙고, 나도 늙어버렸군요. 꽃 같은 호시절이 다 지나갔어요. 요새는 영감이 저 없으면 꼼짝도 못 해요. 제 :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 장 : 2남 1녀를 두었어요. 큰아들은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다니고 있어요. 포항 시내에 삽니다. 가까운 곳에 살아 자주 우리 내외를 찾아온답니다. 며느리도 참 좋아요. 둘째 아들은 울산 현대자동차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옛날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요. 막내딸이 있는데, 용두리 한동네에서 살아요. 사위가 어선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지요. 의지가 많이 되는 딸 내외입니다. 제 : 아주 다복하군요. 자녀들은 자라면서 부모가 굿판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장 :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반대를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큰아들이 교회를 다녔겠어요? 이제 성인이 되어 다들 이해하지만, 한창 자랄 때는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고 봅니다. 나도 아이들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살았어요. 지화 일을 그만두게 된 것도 아이들 영향이 컸지요. 제 : 가슴에 품고 있는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장 : 그럼요. 다 이야기하자면 장편소설 몇 권을 쓸 수 있을 텐데 이젠 기억이 가물거려요.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영감이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주니 고맙지요. 영감이 얼마 전에 화장실 바닥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병원에 다녔어요. 그때는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 제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죠. 장 : 영감과 나는 지화 만드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어요. 천직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감이나 나나 생각을 미처 못한 게 있어요. 영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을 받았는데 영감은 그걸 못한 겁니다. 영감도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촌에 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어두워 그런 걸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그래도 영감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가족들 무사태평하니 한평생 고생했지만 나름 잘 살았다고 여깁니다. 영감과 내가 만들던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되니 여한은 없어요. 끝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22

“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어”

동해안별신굿에서 지화는 굿상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조상신이나 골메기신(골막이)을 모셔와 굿을 하려고 곱게 단장하는 것이다. 음식을 차리고 잔을 올려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굿의 기본이며, 맨바닥에서 잠들고 굿을 받는 것보다 꽃밭에서 굿을 받고 인간세계와 소통하라는 의미다. 김홍제(이하 제) : 어릴 때 굿판에 가보면 구경꾼이 참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자중(이하 김) : 1박 2일이나 2박 3일 동안 굿판이 벌어지면 근처 50리 반경에 사는 주민들이 소문을 듣고 구경을 많이 왔어요. 요즘의 큰 축제나 마찬가지였지요. 할머니들은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하얀 버선에 고무신을 정성껏 닦아 신고 왔답니다. 신에게 정성을 바친다는 정갈한 마음가짐이었지요. 굿을 하는 어촌에서는 사돈에 팔촌까지 연이 닿는 사람은 재우고 먹이면서 함께 밤을 새워가며 굿 구경을 했어요. 가난했지만 인심이 넉넉하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구경꾼이 많으면 우리도 신나게 굿을 했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굿판이 열리면 엿장수와 깨배기(쌀 강정의 경상도 사투리) 장수도 왁자지껄했지요. 제 : 굿이 거의 사라지면서 선생님이 좀 쓸쓸할 것 같습니다. 김 : 어쩌겠습니까,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촌이나 농촌의 풍어제와 동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IMF가 사람들 생각을 많이 바꿔놓은 것 같아요. 이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후원해주지 않으면 어촌에도 굿이 잘 열리지 않아요. 그리고 무속 일을 하던 사람들이 늘 일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흥청망청 살았던 것도 사실이지요. 굿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무속 하는 사람들이 노름을 많이 했답니다. 굿판이 열리면 많은 현금이 들어오는지라 노름꾼들이 달려들었어요. 나도 한 시절 노름으로 돈을 꽤 날렸지요. 쉽게 들어 온 돈이 쉽게 나가는 법이잖아요. 아무래도 어부들이 농부들에 비하면 돈을 쉽게 만지게 되지요. 고깃배가 만선으로 돌아오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어요. 술판이 질펀하게 벌어지고 계집질과 노름이 이어졌지요. 그 바람에 이 집 저 집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제 : 별신굿 하던 이름 있는 분들은 거의 작고하셨지요? 김 : 그렇지요. 김석출의 딸 김영희도 나와 나이가 비슷하니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굿판이나 무대에 오를 수 있겠어요? 제 : 어떻게든 별신굿의 전통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김 : 포항에서도 흥해나 청하가 별신굿을 참 잘했지요. 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포항 여남 출신인 김석출이 있었고, 그의 딸인 김영희·김동연·김동언이 부산과 울산 등에서 활동했으니까요. 이 자매들이 아버지를 이어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되기도 했고요. 포항에서 한터울을 운영하는 정연락 같은 이가 별신굿의 명맥을 이어주는 게 참 고맙지요. 국악을 전공한 젊은이들도 여기에 동참한다고 들었어요. 행정기관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해줬으면 좋겠군요. 제 : 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이 포항에 있다고 하셨는데, 근거가 무엇인가요? 김 : 동해안 세습무는 혈연과 혼인 관계로 이어져 있어요. 양중으로 활동한 부산의 김동영은 김석출의 딸 김동언과 결혼했지요. 강릉에서 활동한 신석남은 김석출의 사촌 김용출과 혼인해 세습무가 되었고, 신석남의 동생 신동해와 그의 부인 사화선, 신석남의 아들 김명익도 대를 이어 강릉에서 활동했어요. 내 사촌 김미향은 울진의 송동숙과 결혼해 세습무가 되었는데, 나중에 조카인 김장질이 후포 삼율에서 활동했어요. 그렇게 서로 인연이 이어지는 관계인데, 자세히 보면 그 뿌리는 포항에 있지요. 김석출 집안과 혈연과 혼인 관계로 얽히고설켜 세습무가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제 : 지화는 어떤 식으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까? 김 : 굿이 있는 곳에 지화는 늘 있었어요. 지화가 없거나 적은 굿판은 왠지 허전하지요. 지화를 본 사람들은 미술작품 같다고 말하곤 해요. 앞으로 지화가 미술작품으로 인정받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 : 무속 일을 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요? 김 : 이 일을 하면서 후회는 별로 안 했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지요.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무당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인물도 좋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무당과 인연이 되었지요. 호흡이 잘 맞아 여기저기 몇 년을 같이 다녔어요. 그때 7번 국도가 확장돼 포항으로 가는 직통 시외버스를 타고, 지금 청하 사거리에서 버스를 세워달라고 해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곤 했지요. 그날도 일을 마치고 밤늦게 청하 사거리에 도착했어요. 무당과 같이 내리자마자 나는 어둑한 논둑 가에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섰는데 여자가 안 보이는 겁니다. 한참을 찾았지만 끝내 못 찾고 용두리로 왔는데 청하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무당이 청하 사거리에서 월포리 방향으로 가지 않고, 포항 시내 쪽 7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 무당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속 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한동안 술로 슬픔을 달랬지요. 제 : 선생님은 청하 용두리에서 70여 년 사셨는데, 용두리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김 : 청하 용두리는 월포리에 인접한 어촌입니다. 월포 해수욕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요. 동해중부선 월포역이 생겼고,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우리 집 앞에 북포항 IC가 생긴다고 공사가 한창입니다. 그만큼 동네가 많이 바뀌었어요. 외지인이 상가나 건물을 지어 많이 살고 있고 토박이는 노인들밖에 없다고 보면 됩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핵폐기물 설치 반대 운동 때문에 정말 시끄러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마침 내가 용두리 이장을 할 때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답니다. 정부가 핵폐기물 처리 장소로 청하를 지정해 밀어붙였지요. 온 면민이 나서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7번 국도를 막고 장기간 데모를 했으니까요. 제 : 그전에는 고기가 많이 잡혔지요? 김 : 그럼요. 댕구리배(저인망 어선)나 목선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지요. 어종도 다양했고요. 사고가 잦아 위령제를 자주 했어요. 월포리와 용두리는 전통적으로 후릿그물(어선 두 척이 저인망 그물을 끌고 나가서 그물을 끌고 들어오면 해안에서 동네 주민이 모여 그물을 당겼는데, 이를 후리라고 부름)로 멸치를 많이 잡았어요. 아귀 같은 게 그물에 걸려들면 가시가 있고 못생겼다며 바다에 버렸는데 요새는 없어서 못 먹는 고기가 되었지요. 요즘 남해안에서 잡힌 멸치가 인기가 좋다더군요. 그런데 그 맛이 우리가 후릿그물로 당겨 잡아 바로 삶아서 말려 먹던 멸치 맛에 비하겠습니까? 이젠 그 맛을 볼 수 없게 되어 좀 씁쓸하지요. 언제부턴가 후리가 불법으로 금지되었어요. 지금은 여름철에 해수욕장 관광객을 위해 한 번씩 후리를 하게 해주는데, 인기가 좋다고 들었어요. 후릿그물에 든 싱싱한 횟감을 관광객들에게 나눠 주는 행사도 있다고 하더군요. 후릿그물에 멸치와 싱싱한 횟감이 많이 잡히면 관광객들이야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런데 월포가 유명한 해수욕장이 되면서 동네 인심은 예전만 못해요. 여름철이면 차량이 많이 밀려서 불편하기도 하지요. 가난하지만 함께 나눠 먹던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18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지화의 예술적 가치

지화는 예술작품으로도 훌륭하다. 가위와 손으로 한지를 수없이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색을 입혀야 지화는 아름답게 피어난다. 따라서 굿청을 장식하는 지화는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배어야 한다. 굿판이 열리면 구경꾼들은 무당과 양중의 솜씨와 함께 지화를 평가하며 굿의 수준을 논했다. 물론 화주(굿을 맡긴 사람)의 돈 씀씀이에 달라지지만, 지화를 만들 때는 온 정성을 다해야 했다. 김홍제(이하 제) : 지화를 어떻게 만드는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자중(이하 김) : 지화는 원래 바닷가의 위령제에 많이 썼어요. 그 위령제를 수망(水亡) 오구굿이라 했지요. 바다에서 죽은 어부의 영혼을 불러내고, 좋은 곳에 보내주는 굿입니다. 동해안에는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많아서 굿이 많이 들어왔어요. 굿이 잡히면 우선 재료를 구하러 갑니다. 한지와 염색약이지요. 대개는 부산 범일동 시장으로 갔어요. 그리고 날짜에 맞춰 몇 날 며칠 지화를 만들지요.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손으로 만듭니다. 지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풀 먹임을 한 후 종류별로 색을 입히고 마당에 내놓아 햇볕에 색이 잘 들도록 말려야 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두 명 이상이 하지요. 대개 부부가 같이합니다. 굿을 장식하는 굿청은 꽃이 병풍처럼 두르는 형태로 복잡하고 화려합니다. 제 : 지화의 종류가 다양할 것 같습니다. 김 : 전국화, 가시게국화, 청계작약, 추라작약, 다래화, 든불국화, 외든불국화, 매화, 산함박, 함박, 불도화, 외추라작약, 한지추라통, 반연봉, 연봉, 연등, 외박꽃, 강화, 허드레꽃 등등 셀 수 없이 많아요. 보통 우리가 지화를 말할 때 한 묶음을 한 병이라고 표현하는데, 아홉 송이 또는 열 송이, 많게는 스무 송이 정도 됩니다. 이 한 병을 만드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릴 때도 있어요. 그리고 지화는 아니지만 굿판을 장식하는 제일 크고 아름다운 연등이 있어요. 신태집(신(神)광주리의 사투리)과 용선(龍船)도 아름답지요. 굿청에 이런 지화를 스무 병 이상 장식하니 지화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되시겠지요. 제 : 수망 오구굿에 지화를 많이 쓴다고 하셨는데, 오구굿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김 : 예전에는 뎅구리(머구리)나 목선에 장비가 부족해서 해난 사고가 잦았어요. 그래서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위령제인 오구굿을 많이 했지요. 오구굿은 우선 바닷물에 들어가 망자의 넋을 달래고, 조상굿, 베리데기(바리데기)굿을 하지요. 오구는 바리데기 공주 설화에 나오는 저승 왕의 이름입니다. 제 : 바리데기에 대해서도 좀 더 말씀해주세요. 김 : 바리데기를 경상도 사투리로 베리데기라 했어요. ‘버린다’는 뜻이죠. 옛날에 딸만 여섯 낳고 아들을 간절하게 원하던 왕이 있었는데, 왕비가 또 딸을 낳자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베리데기입니다. 훗날 왕과 왕비가 불치병을 앓게 되자 여섯 딸은 아예 나 몰라라 했답니다. 그런데 베리데기 공주가 저승의 오구대왕(염라대왕)을 찾아가 저승 문지기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되었고, 오구대왕이 베리데기 공주에게 불로초를 주어 이승으로 돌아와서는 왕과 왕비를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속에서는 바리데기 굿을 발원굿이라고도 하지요. 지역마다 다르지만 우리나라 거의 모든 굿에 펴져 있는 한국 굿의 원형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제 : 지화를 만들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이 있는지요? 김 : 지화는 대대로 전수되어온 기술을 몸으로 체득하고, 특히 손으로 익혀야 하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굿을 주문한 화주나 구경꾼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하고요. 제 : 지화 중에 어떤 게 가장 아름다운가요? 김 : 나는 추라작약이 가장 아름답다고 봅니다. 추라는 종이를 잘게 썬다는 뜻이고 작약은 붉은 꽃입니다. 가위로 오려 잘게 썬 추라작약은 염색해서 꽃병에 담아놓으면 정말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 같아요. 추라작약의 꽃심은 꽃의 암술이나 수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지화의 가운데를 풍성하게 장식하지요. 또 살잽이꽃이라고 있어요. 이 꽃은 바리데기 설화에 등장하는 존귀한 꽃입니다. 불등화라고도 하는데, 만들기가 참 어려워요. 죽은 목숨을 살려낸다는 바리데기의 다부살이(다시 산다는 뜻) 전설이 담긴 꽃입니다. 제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화 제작은 맥이 끊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제자는 있는지요? 김 : 나이 들면서 굿이나 지화 만드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어요. 정연락(동해안별신굿 전승 교육사)이라는 이가 지화에 관심을 가져서 지화 만드는 도구와 기술을 거의 다 전수했어요. 정연락이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요. 제 : 과거에 굿 연구자들이 선생님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 :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교수들이 집이나 굿판으로 찾아왔어요. 지화 만드는 과정과 굿에 대해 많이 물어보더군요. 그 무렵에 정연락이 찾아왔지요. 경북대학교 최경희 교수도 자주 찾아왔고요. 한번은 최 교수가 외국인을 데려오기도 했어요. 내가 만든 지화를 촬영해서 프랑스의 유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대구의 한 화가는 지화를 본떠 화폭에 담아 유럽에서 전시했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내가 시골에 살다 보니 그런 정보에는 어두웠지요. 하지만 지화가 그런 방식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제 : 2021년에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지화 개인전을 하셨지요? 김 : 예, 그랬지요. 포항문화재단 관계자들이 찾아와 지화 전시회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요. 손을 놓은 지 꽤 되었지만 마음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화 20여 개를 만들어 전시했지요. 작은 작품은 집에서 만들고, 연등과 용선처럼 큰 작품은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했어요. 제 : 굿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군요. 포항과 다른 지역의 굿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만. 김 : 동해안 어촌마다 굿이 비슷하면서도 지역에 따라 무당의 사설과 노래가 조금씩 다르고 양중 또는 화랭이가 연주하는 박자와 춤도 차이가 있어요. 동해안 마을굿 중에서 포항의 흥해와 청하 굿이 가장 좋았지요. 전통이 잘 보전되어 있으니까요. 후포 삼율의 무당이 영덕과 울진에서 활동했는데, 뚱띠 무당이라 불렀어요. 가락이나 사설, 춤은 포항 무당에 비해 좀 떨어졌지만 사설할 때 촉성(초성의 경상도 사투리)이 좋아서 인기가 높았어요. 뚱띠 무당은 놋동이굿(별신굿에서, 무녀가 놋동이를 입에 물고 장군신을 모시는 굿)도 아주 잘했어요. 8단까지 쌓아 입에 물었지요. 강원도 임원, 호산, 삼척에서도 굿이 활발했어요. 북쪽으로는 강릉과 주문진 그리고 속초에도 강릉을 거점으로 굿을 하는 무당이 있었지요. 강원도는 가락이나 장구로 치는 드렁갱이 굿거리장단이 약했어요. 포항 무당들이 많이 가르쳐줬지요. 내가 젊은 시절에는 강원도 고성까지 불려 다녔어요. 강릉 단오제도 별신굿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도 강릉 단오제에 수없이 참여했어요. 제 : 이제 별신굿은 바닷가 마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죠. 하지만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예술공연으로 가끔 무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김 : 안동 하회마을에서도 별신굿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굿을 예전처럼 며칠씩 안 해도 사람들에게 이런 굿이 있었네, 하고 기억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또 젊은 사람들이 국악을 배울 때 동해안별신굿도 배우는 모양인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11

무당 고모의 권유로 굿판에 뛰어들다

우리나라는 굿을 통해 동제(洞祭)를 지내는 풍습을 오랜 세월 이어왔다. 수심이 깊고 파도가 높은 동해안에서는 별신굿이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동해안별신굿의 한 요소인 지화(紙花, 종이로 만든 꽃)를 70여 년간 만들어온 김자중 선생을 댁에서 만나 어릴 때부터 지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동해안별신굿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김홍제(이하 제) :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김자중(이하 김) : 지화 만드는 걸 그만둔 지 좀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지화를 만들 수 있는 기력은 있지요. 제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김 : 지금은 청하 용두리에 사는데, 태어난 곳은 흥해 대벌리(현 죽천리)였어요. 광복 후에 죽천초등학교(1940년 5월 개교)에 입학했고 8회 졸업생입니다. 할아버지는 굿판의 양중(兩中, 남자 악사)을 했고, 아버지는 한평생 한량과 어부로 사셨지요. 그 때문에 집이 가난했어요. 나는 아버지가 사십을 넘겨 얻은 늦둥이 외동아들로 자랐어요. 위로 형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외동이 되고 말았지요. 제 :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김 : 부산으로 가서 택시회사에서 일했어요.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스따찡’(자동차 엔진 스타터의 일본식 발음)을 돌려야 하는 시절이어서 기술 배우기가 엄청 힘들었지요. 제 : 그러면 굿은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나요. 김 : 고모가 무당이었는데 이름은 김일향입니다. ‘무숙’이라고도 하고, ‘간데기 무당’이라고도 했지요. 흥해, 청하에서는 꽤 유명한 무당이었어요. 내가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하고 있을 때 고모가 같이 일하자고 꼬드겼어요. 아버지는 엄청나게 반대했고요. 당시에도 굿판에서 일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인식이 무척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고모는 집요하게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고모와 일을 하게 됐어요. 제 : 고모님의 설득으로 굿과 인연이 되었군요. 선생님은 오랫동안 동해안별신굿의 지화를 만드셨는데, 요즘은 동해안별신굿을 보기 힘들지요. 김 : 아마 그럴 겁니다. 부산 기장에서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 대부분의 마을에서 별신굿을 했어요. 별신굿은 ‘벨신’, ‘별손’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형편이 넉넉한 마을은 격년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마을은 5년에 한 번씩 했어요. 굿이 열리면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3박 4일 했고요. 젊은 날의 김자중 제 : 일반인들은 지화를 잘 모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김 : 지화는 굿판에서 생화 대신 종이로 만든 꽃을 말합니다. 원래 동해안별신굿에서는 지화를 많이 쓰지 않았고, 위령제인 오귀굿(오구굿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많이 썼지요. 예전 별신굿에서는 지화 몇 병을 만들어 제당인 굿청을 소박하게 장식했는데, 오귀굿이 점차 줄어들자 무당들이 수입을 늘리려고 별신굿에서도 지화를 많이 장식했어요. 제 : 선생님과 고모님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김 : 고모는 강신무(降神巫, 신이 내려서 된 무당)가 아니라 세습무(世襲巫, 조상 대대로 무당의 신분을 이어받아 된 무당)였어요. 동해안별신굿에서 강신무는 보기 어렵고 거의 다 세습무지요. 고모는 할아버지 영향을 받았는데, 포항 여남의 3대째 세습무 집안과 인연이 있었어요. 동해안별신굿이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포항 여남 출신으로 부산 기장에 살면서 동해안별신굿을 한 김석출 씨가 전승 보유자로 선정되었지요. 그분의 호적(태평소) 산조가 아주 유명했어요. 김석출은 형과 남동생이 있었지요. 형은 김호출이고 동생은 김재출입니다. 삼 형제 모두 굿을 했는데, 남자는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장구, 태평소 등을 연주했어요. 고모는 김호출과 같이 살면서 세습무를 했지요. 김호출에게는 김용택이라는 막내아들이 있었고 나보다 여덟 살 아래였어요. 용택이는 초등학교 3학년만 다니고는 아버지를 따라 굿판에 나섰지요. 나와 용택이는 비슷한 시기에 지화 만드는 일을 시작했어요. 용택이는 장구를 비롯해 악기를 잘 다루었지요. 용택이도 삼촌인 김석출에 이어 동해안별신굿 보유자로 인정되었어요. 그런데 2018년 5월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참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제 : 고모님이 김석출의 형과 결혼하면서 선생님이 김석출 집안과 인연이 되는군요. 김 : 그렇게 되었지요. 원래 무속 일은 남녀 기본 2인 1조로 하고 큰 굿은 몇 팀이 모여 했어요. 당시엔 수입이 꽤 괜찮았고요. 고모는 김호출과 살다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헤어졌는데, 그 후로 독립해 굿을 생계로 살았어요. 굿판에는 준비 과정부터 일손이 많이 필요해요. 특히 굿을 할 때는 양중이나 화랭이, 즉 남자 악사 겸 조력자가 있어야 하는데 고모는 피붙이인 내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고모가 몇 년을 졸라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내면서 내가 고모 밑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게 되었지요. 내 나이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제 : 지화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 : 내가 만들어온 지화도 어쩌면 김석출 집안에서 내려오던 기술을 습득했다고 볼 수 있어요. 김호출이 지화를 참 잘 만들었거든요. 그때는 김호출과 고모 사이가 좋을 때라 김호출에게 지화 만드는 기술을 직접 배웠지요.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굿판에 필요한 지화를 만들려면 수천, 수만 번의 가위질을 해야 하는데, 나한테 남들보다 눈썰미도 있고 손재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만든 지화를 보고 김호출이 탄복했거든요. 가락에 맞춰 장구를 메는(장구를 친다는 경상도 사투리) 것도 내가 잘했지요. 나는 처음 굿판에서 일할 때는 비우(비위의 사투리)가 없고 남사스러워서 굿판에 얼씬도 안 했어요. 고모를 도와 지화를 만들고 굿판을 준비하는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지요. 제 : 남자가 그 나이에 지화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군대도 가야 했을 테고. 김 : 입대 영장이 나와 스물한 살에 입대했어요. 그때 부모님은 환갑이 넘었고 죽천을 떠나 청하 용두리에서 사셨지요. 일은 못 하고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강냉이 배급을 타서 끼니를 때웠어요. 전쟁 직후 보릿고개가 있던,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지요. 제대 1년을 앞두고 휴가를 나왔을 때 고모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장가를 들게 되었어요. 군복을 입고 경주에서 혼례를 치렀지요. 그런데 신부가 썩 맘에 들지 않는 겁니다. 게다가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귀대했는데, 신부가 고모와 다투고 집을 나가버렸다고 하더군요. 내키지 않는 결혼을 했는지라 솔직히 그 여자에게 정이 없었어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당시에는 호리호리하고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듣던 터라 여자 보는 눈이 높았지요. 제 : 선생님 삶에는 고모님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군요. 김 : 그런 셈이지요. 제대 5개월을 앞두고 서울에 있는 사촌이 편지를 보냈는데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바빠서 문상을 못 왔다는 겁니다. 아버지 부고를 그 편지로 알게 된 것이지요. 고모는 부대에 관보(기관으로 보내는 전보)를 보냈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도착하지 않았어요. 워낙에 어수선한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대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집에 왔더니, 아버지는 산에 묻히시고 어머니는 혼자서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어렵게 지내시더군요. 당장에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그래서 귀대를 못 하고 고모를 따라다니며 본격적으로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일했어요. 나중에 부대에서 인사계가 찾아왔더군요. 사정을 고려해 다행히 탈영 처리는 안 되고 제대증을 직접 갖다주었습니다. 김자중 명인은… 1939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죽천에서 태어나 죽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8세에 고모를 따라 동해안별신굿의 세습무가 일을 시작했다. 70여 년간 동해안별신굿을 장식하는 지화(紙花) 제작과 굿판의 양중(兩中)으로 활동했다. 은퇴 후 청하면 용두 2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2021년 12월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대안공간 298에서 지화 개인전(‘바다에 핀 종이꽃’)을 개최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202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