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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어”

등록일 2024-09-18 18:15 게재일 2024-09-1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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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꽃을 예술로 승화시킨 명인  김자중<br/>&lt;3&gt; 동해안별신굿의 계보
동해안별신굿의 한 장면.

동해안별신굿에서 지화는 굿상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조상신이나 골메기신(골막이)을 모셔와 굿을 하려고 곱게 단장하는 것이다. 음식을 차리고 잔을 올려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굿의 기본이며, 맨바닥에서 잠들고 굿을 받는 것보다 꽃밭에서 굿을 받고 인간세계와 소통하라는 의미다.

굿판이 벌어지면 근처 50리 반경에 사는 주민들이 소문을 듣고 구경을 많이 왔어요. 요즘의 큰 축제나 마찬가지였지요. 할머니들은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하얀 버선에 고무신을 정성껏 닦아 신고 왔답니다. 신에게 정성을 바친다는 정갈한 마음가짐이었지요.

포항에서도 흥해나 청하가 별신굿을 참 잘했지요. 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포항 여남 출신인 김석출이 있었고, 그의 딸인 김영희·김동연·김동언이 부산과 울산 등에서 활동했으니까요.

양중으로 활동한 부산의 김동영은 김석출의 딸 김동언과 결혼했지요. 강릉에서 활동한 신석남은 김석출의 사촌 김용출과 혼인해 세습무가 되었고…. 자세히 보면 그 뿌리는 포항에 있지요. 김석출 집안과 혈연과 혼인 관계로 얽히고설켜 세습무가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김홍제(이하 제) : 어릴 때 굿판에 가보면 구경꾼이 참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자중(이하 김) : 1박 2일이나 2박 3일 동안 굿판이 벌어지면 근처 50리 반경에 사는 주민들이 소문을 듣고 구경을 많이 왔어요. 요즘의 큰 축제나 마찬가지였지요. 할머니들은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하얀 버선에 고무신을 정성껏 닦아 신고 왔답니다. 신에게 정성을 바친다는 정갈한 마음가짐이었지요. 굿을 하는 어촌에서는 사돈에 팔촌까지 연이 닿는 사람은 재우고 먹이면서 함께 밤을 새워가며 굿 구경을 했어요. 가난했지만 인심이 넉넉하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구경꾼이 많으면 우리도 신나게 굿을 했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굿판이 열리면 엿장수와 깨배기(쌀 강정의 경상도 사투리) 장수도 왁자지껄했지요.

제 : 굿이 거의 사라지면서 선생님이 좀 쓸쓸할 것 같습니다.

김 : 어쩌겠습니까,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촌이나 농촌의 풍어제와 동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IMF가 사람들 생각을 많이 바꿔놓은 것 같아요. 이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후원해주지 않으면 어촌에도 굿이 잘 열리지 않아요. 그리고 무속 일을 하던 사람들이 늘 일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흥청망청 살았던 것도 사실이지요. 굿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무속 하는 사람들이 노름을 많이 했답니다. 굿판이 열리면 많은 현금이 들어오는지라 노름꾼들이 달려들었어요. 나도 한 시절 노름으로 돈을 꽤 날렸지요. 쉽게 들어 온 돈이 쉽게 나가는 법이잖아요. 아무래도 어부들이 농부들에 비하면 돈을 쉽게 만지게 되지요. 고깃배가 만선으로 돌아오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어요. 술판이 질펀하게 벌어지고 계집질과 노름이 이어졌지요. 그 바람에 이 집 저 집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제 : 별신굿 하던 이름 있는 분들은 거의 작고하셨지요?

김 : 그렇지요. 김석출의 딸 김영희도 나와 나이가 비슷하니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굿판이나 무대에 오를 수 있겠어요?

제 : 어떻게든 별신굿의 전통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김 : 포항에서도 흥해나 청하가 별신굿을 참 잘했지요. 별신굿의 원형은 포항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포항 여남 출신인 김석출이 있었고, 그의 딸인 김영희·김동연·김동언이 부산과 울산 등에서 활동했으니까요. 이 자매들이 아버지를 이어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되기도 했고요. 포항에서 한터울을 운영하는 정연락 같은 이가 별신굿의 명맥을 이어주는 게 참 고맙지요. 국악을 전공한 젊은이들도 여기에 동참한다고 들었어요. 행정기관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해줬으면 좋겠군요.

제 : 동해안별신굿의 원형이 포항에 있다고 하셨는데, 근거가 무엇인가요?

김 : 동해안 세습무는 혈연과 혼인 관계로 이어져 있어요. 양중으로 활동한 부산의 김동영은 김석출의 딸 김동언과 결혼했지요. 강릉에서 활동한 신석남은 김석출의 사촌 김용출과 혼인해 세습무가 되었고, 신석남의 동생 신동해와 그의 부인 사화선, 신석남의 아들 김명익도 대를 이어 강릉에서 활동했어요. 내 사촌 김미향은 울진의 송동숙과 결혼해 세습무가 되었는데, 나중에 조카인 김장질이 후포 삼율에서 활동했어요. 그렇게 서로 인연이 이어지는 관계인데, 자세히 보면 그 뿌리는 포항에 있지요. 김석출 집안과 혈연과 혼인 관계로 얽히고설켜 세습무가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제 : 지화는 어떤 식으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까?

김 : 굿이 있는 곳에 지화는 늘 있었어요. 지화가 없거나 적은 굿판은 왠지 허전하지요. 지화를 본 사람들은 미술작품 같다고 말하곤 해요. 앞으로 지화가 미술작품으로 인정받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 : 무속 일을 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요?

김 : 이 일을 하면서 후회는 별로 안 했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지요.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무당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인물도 좋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무당과 인연이 되었지요. 호흡이 잘 맞아 여기저기 몇 년을 같이 다녔어요. 그때 7번 국도가 확장돼 포항으로 가는 직통 시외버스를 타고, 지금 청하 사거리에서 버스를 세워달라고 해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곤 했지요. 그날도 일을 마치고 밤늦게 청하 사거리에 도착했어요. 무당과 같이 내리자마자 나는 어둑한 논둑 가에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섰는데 여자가 안 보이는 겁니다. 한참을 찾았지만 끝내 못 찾고 용두리로 왔는데 청하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무당이 청하 사거리에서 월포리 방향으로 가지 않고, 포항 시내 쪽 7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 무당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속 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한동안 술로 슬픔을 달랬지요.

지화 제작에 쓰이는 도구.
지화 제작에 쓰이는 도구.

제 : 선생님은 청하 용두리에서 70여 년 사셨는데, 용두리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김 : 청하 용두리는 월포리에 인접한 어촌입니다. 월포 해수욕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요. 동해중부선 월포역이 생겼고,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우리 집 앞에 북포항 IC가 생긴다고 공사가 한창입니다. 그만큼 동네가 많이 바뀌었어요. 외지인이 상가나 건물을 지어 많이 살고 있고 토박이는 노인들밖에 없다고 보면 됩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핵폐기물 설치 반대 운동 때문에 정말 시끄러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마침 내가 용두리 이장을 할 때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답니다. 정부가 핵폐기물 처리 장소로 청하를 지정해 밀어붙였지요. 온 면민이 나서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7번 국도를 막고 장기간 데모를 했으니까요.

제 : 그전에는 고기가 많이 잡혔지요?

김 : 그럼요. 댕구리배(저인망 어선)나 목선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지요. 어종도 다양했고요. 사고가 잦아 위령제를 자주 했어요. 월포리와 용두리는 전통적으로 후릿그물(어선 두 척이 저인망 그물을 끌고 나가서 그물을 끌고 들어오면 해안에서 동네 주민이 모여 그물을 당겼는데, 이를 후리라고 부름)로 멸치를 많이 잡았어요. 아귀 같은 게 그물에 걸려들면 가시가 있고 못생겼다며 바다에 버렸는데 요새는 없어서 못 먹는 고기가 되었지요. 요즘 남해안에서 잡힌 멸치가 인기가 좋다더군요. 그런데 그 맛이 우리가 후릿그물로 당겨 잡아 바로 삶아서 말려 먹던 멸치 맛에 비하겠습니까? 이젠 그 맛을 볼 수 없게 되어 좀 씁쓸하지요. 언제부턴가 후리가 불법으로 금지되었어요. 지금은 여름철에 해수욕장 관광객을 위해 한 번씩 후리를 하게 해주는데, 인기가 좋다고 들었어요. 후릿그물에 든 싱싱한 횟감을 관광객들에게 나눠 주는 행사도 있다고 하더군요. 후릿그물에 멸치와 싱싱한 횟감이 많이 잡히면 관광객들이야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런데 월포가 유명한 해수욕장이 되면서 동네 인심은 예전만 못해요. 여름철이면 차량이 많이 밀려서 불편하기도 하지요. 가난하지만 함께 나눠 먹던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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