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신앙으로 여기며 포항의 풍경과 정신을 그린 화가 박수철<br/><3>무너지는 의지처, 그리고 IMF
오지호의 죽음 이후에 박수철 선생은 오지호의 둘째 아들인 화가 오승윤과 인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일요화가회를 만들어 지역 미술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가 의지하던 이들이 죽음을 맞고 사업이 실패하면서 큰 시련을 겪는다.
1983년 결혼 후 형의 도움으로 신사복 대리점을 열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형이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2006년엔 일요화가회를 만들어보라고 권유해준 오지호 선생의 둘째 아들 오승윤 선생마저 목숨을 끊었고, 기댈 언덕이 또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IMF때 신사복 대리점이 문을 닫고 우동집, 꽃집, 술집 등을 운영했지만 빚더미에 앉았는데 지인이 내어준 흥해 양백리 빈집에 터를 잡게 됐죠. 아내마저 큰 병을 앓게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십자가를 새기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십자가 연작이 만들어지더군요.
김도형(김) : 갈뫼화실을 운영하면서 일요화가회도 만드셨지요?
박수철(박) : 오지호 선생의 둘째 아들인 오승윤 선생이 포항에 가면 일요화가회를 만들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1979년에 일요화가회를 만들었는데, 10명 정도가 참여했습니다. 제1회 일요화가회 작품전 축사를 오지호 선생이 쓰셨지요.
오승윤(1939∼2006)은 1939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 8·15 광복 후 아버지(오지호)의 고향인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이사했다. 196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4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창설에 참여하여 1982년까지 교수를 지냈다. 198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00E9>mie de la Grande Chaumi<00E8>re) 등에서 공부했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전업 화가의 길을 걸으며 한국 전통의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승윤의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미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오승윤’, ‘두산백과’ 참조.
김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하신 후 오승윤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의 빈자리를 오승윤 선생이 채워주었지요. 그분께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오승윤 선생이 사기를 당하면서 그 괴로움으로 2006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로서는 기댈 언덕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지요. 그 충격과 상실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김 : 포항 출신 화가 중에는 장두건 선생이 유명한데 혹시 교류가 없었는지요?
박 : 1990년대 후반 장두건 선생이 동아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직후 선생의 본가가 있는 흥해 초곡에 집을 지을 때 형상회 동인이자 동양화가인 정대모와 함께 도와주었지요. 그 후로도 선생과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장두건(1918~2015)은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에서 태어나 흥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미술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 법과로 옮겨 졸업했다. 이때 법과에 학적을 두고 야간에는 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리며 프랑스 유학의 꿈을 품었다. 귀국 후 서울사대부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장두건은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하며 ‘르살롱(LeSalon)’전에 ‘내려다본 식탁’(1958)을 출품해 동상을 받았다. 귀국 후 세종대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 미술학과장, 성신여대 예술대학장, 동아대 예술대 초대학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미술단체인 목우회, 이형회 등을 결성했다.
- ‘서울아트가이드’ 참조.
김 :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박 : 오지호 선생이 작고한 이듬해인 1983년에 결혼했습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돈이 안 되는 화실은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형은 국민은행 최연소 차장으로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형의 도움으로 1980년대 후반 중앙상가에서 신사복 대리점(코오롱 맨스타)을 열었지요. 하지만 대리점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형이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믿던 또 하나의 의지처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김 : 신사복 대리점은 잘되었습니까?
박 : 영업을 몰랐으니 잘될 리 없었고 본사에서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요. 그래도 후배들한테 밥 사주고 술 사줄 형편은 되었습니다. 그 뒤에 제일모직 브랜드(빈체레)로 바꿨다가 IMF 때 문을 닫았습니다.
김 : 후유증이 컸겠습니다.
박 : 암담했지요. IMF 후에 우동 장사, 꽃집 등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서 누나와 막냇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갈까 고민했어요. 마침 지인이 죽도파출소 맞은편의 건물 지하를 무상으로 내주어 ‘자유인’이라는 술집을 열었습니다. ‘자유인’을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많은 예술인이 찾아왔지요. 하지만 3년을 버티다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김 : 장사하면서 기억에 남은 일이 있는지요?
박 : 신사복 대리점을 하면서 중앙상가 상인회 총무를 맡았습니다. 중앙상가 한중간에 길이 있으니 길을 중심으로 상가를 살려보자고 하면서, 메타세쿼이아 같은 나무를 심자고 했지요. 하지만 의견이 수용되지 않더군요. 지금 중앙상가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김 : ‘자유인’이 문을 닫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집을 팔아 빚을 정리하니 2000만 원이 남더군요. 그 돈으로 어디를 가겠습니까. 또 한 번 앞이 캄캄해졌지요. 그때 지인이 흥해 양백리에 자신이 소유한 빈집이 있다며 거기서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그 집에 가보았어요. 그런데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던지 수풀이 우거져 출입구를 찾을 수 없었고 집 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5개월 정도 수리해 그 집에 들어갔지요. 모든 것을 잃고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겨우 얻게 되자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고, 그림의 주제에도 반영되었어요.
김 : 흥해 양백리에서는 얼마나 사셨습니까?
박 : 7년쯤 살았는데, 어느 날 집주인이 그 땅을 판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집에서 나가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였지요. 자존심을 접고 통사정을 했지만 주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내는 큰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김 :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갔습니까?
박 : 절망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새벽 기도를 열심히 다녔어요. 새벽은 하나님께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김 : 새벽 기도 후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박 :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더군요. 2009년에 미국에 있는 누나와 막냇동생이 4000만 원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흥해에 있는 해원빌라를 매입해 4개월 동안 수리한 후 입주했습니다.
김 : 교회는 언제부터 나갔습니까?
박 : 바로 위 누나가 태어나자마자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그때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나도 어머니를 따라 나갔지요. 어릴 때야 신앙이 무엇인지 알았겠습니까. 20대 후반에 신앙을 제대로 받아들였고, 50대 들어 힘든 일을 겪으며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김 :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요?
박 : 다 쓴 물감 튜브 안쪽을 긁어서 십자가를 새겼습니다. 그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십자가 연작이 만들어지더군요.
박수철 선생은 2023년 5월 흥해 성곡리에 있는 푸른마을교회에서 개인전 ‘The Cross 40’을 열었다. 전시를 본 한 관람객은 이중섭의 은지화가 떠오른다고 했다. 또한 수명을 다한 물감 튜브가 십자가로 다시 태어난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와 중첩되며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