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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미술 선생님을 보며 화가를 동경

등록일 2024-11-10 18:37 게재일 2024-11-1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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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신앙으로 여기며 포항의 풍경과 정신을 그린 화가  박수철<br/>&lt;1&gt; 6·25 전쟁둥이, 화가를 꿈꾸다
박수철  화가
박수철 화가

포항 미술계는 배원복, 김두호 선생이 첫 장을 열고 이방웅(동아미술학원), 강문길(현대미술학원), 박수철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박수철 선생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해 호미곶 구만리, 포항역, 철길 같은 포항의 풍경을 깊고 따듯한 색채로 그려냈다. 또한 1979년 일요화가회를 창립하는 등 지역의 화단을 두텁게 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중앙동에 있는 그의 화실과 오래된 커피숍 그리고 죽도시장의 보리밥집을 오가며 선생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집 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송림이 보였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이전에 풍경을 먼저 봤습니다. 이런 환경이 미술의 세계로 이끌어었던 것 같습니다. 포항중학교 다닐 때 권영호 미술선생님은 자유분방한 분이었어요. 그런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미술실의 책걸상을 모두 빼내고는 마음대로 그리라고 하셨죠. 지금도 그림에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김도형(김) : 이 화실에는 언제쯤 들어오셨는지요?

박수철(박) : 7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식당을 하다가 비어 있던 곳인데, 고쳐서 화실로 만들었습니다.

김 : 근사한 화실이군요.

박 : 생계를 위해 집수리하는 일을 20여 년간 해왔습니다. 덕분에 이런 일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6·25 전쟁이 터진 1950년에 태어나셨더군요.

박 : 전쟁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울산 호계동 근처의 신답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 배 속에 있었어요. 박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9월 말(음력 8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4남 1녀 중 셋째였지요.

김 : 전쟁통에 태어난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 선린병원과 나루끝 사이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은 기와집이었지요. 아버지는 페인트 판매업을 준비하다가 친척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힘든 처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페인트칠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지요. 집 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장독대 주변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어요. 모란, 작약 등이 핀 작은 꽃밭도 있었지요. 집 주변 텃밭에는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포플러가 우리 집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마루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면 포플러 사이로 송도 송림이 보였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이전에 풍경을 먼저 봤습니다. 이런 환경이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김 :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아름다운 풍경화 한 점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박 :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의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연장자이고 마당이 넓은 편이었기 때문이지요.

김 : 댁 주변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습니까?

박 : 지금 선린병원 자리에 선린애육원이 있었어요. 미 해병대에서 선린애육원에 지원을 많이 해줬는데, 여러 가지 물품 중에 종이 팩에 담긴 우유를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포항세무서 자리에 덕수교회가 있었고, 근처에 구세군교회가 있었습니다. 점심때 구세군교회에서 강냉이죽을 배급했어요. 나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그 강냉이죽을 먹었습니다.

김 :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도 배급이 있었나요?

박 :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옥수수빵을 무상으로 주더군요. 배가 고프기도 했고 빵을 난생처음 맛보았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우리 집에서는 시래기와 쌀을 섞어 끓인 시래기갱죽을 자주 먹었습니다. 집 근처 술도가에서 달착지근한 술찌끼를 받아먹고 취했던 게 떠오르는군요.

김 : 당시 포항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박 :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 앞에 북부시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요. 시장 바닥이 질퍽질퍽했고 주변에 오리가 뒤뚱뒤뚱 다녔지요. 그리고 칠성천 옆 뻘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좌판을 놓고 장사했어요. 그곳에 엉성한 판잣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죽도시장은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 고아나 소아마비, 언청이가 많았어요. 걸인들이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연민을 느꼈지요.

김 : 미술을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박 : 포항중학교 다닐 때 미술 교사인 권영호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권 선생님은 한마디로 자유분방한 분이었어요. 미술실의 책걸상을 모두 빼내고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화가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림에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권영호(1936∼2012)는 경주에서 태어나 포항 구룡포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항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미술과로 전과해 2년 과정을 마쳤으며, 그 뒤 영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부터 경북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부임해 2001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 「권영호」,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수철作 ‘눈 내리는 거리’
박수철作 ‘눈 내리는 거리’

김 : 중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박 :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대구매일신문을 돌렸는데, 한 달에 450원을 받았어요. 석 달 치를 모으면 한 분기 공납금을 내고 50원이 남았지요.

김 : 고등학교는 동지상고로 가셨지요?

박 : 동지상고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야간부로 옮겼습니다. 학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당시 야간부는 한 학년에 한 학급이 있었어요. 1학년 때는 대신동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0원을 받았고, 2학년 때는 포항경찰서 정보과에서 한 달에 2000원을 받았지요. 3학년 때는 서경도서관(훗날 포항문화원이 되었던 곳)에서 한 달에 3000원을 받고 일했습니다. 그때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돈을 벌어가며 학교에 다녔어요.

김 : 고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박 : 2학년 때 200일가량 결석했어요. 사춘기의 방황이었지요. 왠지 학교에 가기 싫었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빠졌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 게시판 유급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지요. 다행히 담임교사였던 손춘익 선생이 손을 써서 유급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김 : 중고등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가 있는지요?

박 : 중학교 다닐 때부터 새벽마다 수도산 자락의 철길을 따라 수도산에 올라갔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는데, 당시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덟 살 터울의 누나도 시집갈 때 철길을 걸어서 포항역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기차를 타고 포항을 떠났지요. 철길에 많은 추억이 묻혀 있는데, 철길이 사라지면서 추억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대입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지자 군 입대 영장이 날아왔습니다. 서울 거여동에 있는 30사단에서 근무했지요. 군에서 제대한 후 집 안의 헛간을 개조해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네 살 터울의 형이 대학 다닐 때 보던 영문 소설책의 표지를 복사해 드로잉 연습을 했지요. 형도 동지상고 야간부를 나와서 서경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서경도서관에 형의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을 정도였지요.

김 : 이제 선생님의 미술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박 : 20대 중반 무렵 포항에는 미술학원이 하나뿐이었어요. 바로 시민제과 2층에 있던 현대미술학원이었습니다. 강문길이라는 사람이 원장이었는데 형을 무척 따랐지요. 형 덕분에 나보다 한 살 많은 강 원장과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레슨비를 낼 형편이 안 되어 돈이 생기면 소주 한잔은 사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학원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미술학원은 예술을 하는 청년들의 아지트가 되었어요. 난로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삶과 예술에 관한 열띤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러면 누군가 옆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지요.

박수철은…

1950년 6·25 전쟁 때 포항에 살던 가족이 피난을 간 울산 신답에서 태어났으며, 9·28 서울 수복 후 포항으로 돌아왔다.

포항중학교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고,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갈뫼화실을 운영했으며, 1979년 포항일요화가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 포항문화예술회관 기획 초대 개인전, 2017년 포항 우수작가 초대전(포항문화재단), 2023년 ‘The Cross 40’(개인전), 2024년 ‘Still Life’(개인전)를 열었고, 그 밖에 여러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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