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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 눈물바람 난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등록일 2024-10-06 18:14 게재일 2024-10-0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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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달을 보며 함께 춤을 추고 싶은 무용가  김동은<br/>&lt;3&gt; 포항무용협회 발족과 무용의 미래
제4회 전국무용제 커튼콜 장면(1995).

무용은 전용 공연장 없이는 관객들과 만나는 데 어려움이 있다. 1980년대 무용 공연은 육거리에 있는 시공관에서 열렸다. 하지만 시공관은 수준 있는 무용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무용 공연이 열리면 웃지 못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동은은 지역 무용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다.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했지요. 지금 열리는 전국무용제를 그때는 대한민국 무용제라고 했어요.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대상을 받은 팀은 3개 지방을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 후 한 해도 빼먹지 않고 그 순회공연을 유치했어요. 시민들이 공연을 많이 봐야 무용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기고 무용에 대한 수준도 높아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전은주(이하 전) : 이매방 선생의 포항 공연 이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김동은(이하 김) : 그 공연을 계기로 포항에서 무용의 저변을 넓히려면 하루빨리 무용협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87년에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했지요. 지금 열리는 전국무용제를 그때는 대한민국 무용제라고 했어요.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대상을 받은 팀은 3개 지방을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포항무용협회를 발족한 후 한 해도 빼먹지 않고 그 순회공연을 유치했어요. 시민들이 공연을 많이 봐야 무용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기고 무용에 대한 수준도 높아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전 : 특히 인상 깊었던 공연이 있습니까.

김 : 국립무용단 초청공연 ‘그 하늘 그 북소리’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만 해도 책 몇 권은 될 거예요. 당시에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조명을 비출 수가 없었습니다. 시공관 앞마당에 발전차를 불렀는데 주변 상가에서 시끄러워서 장사가 안된다며 시에다 진정을 넣어 공연을 못 할 뻔했지요. 그때 무용단이 20∼30명 정도 내려왔는데, 시공관 안에 분장실이 없어서 남자들은 바깥 골목에서 빗방울을 맞으며 화장하고 분장하고 그랬습니다.

제3회 전국무용제 어느 하늘 아래에서 열연 중인 남성 무용수들(1994).
제3회 전국무용제 어느 하늘 아래에서 열연 중인 남성 무용수들(1994).

전 : 믿기지 않는 얘기입니다.

김 : 돌이켜보면 힘들었지만, 가슴 벅찬 일이기도 했지요. 국립무용단을 초청해놓고 제가 학교마다 표를 팔러 다녔습니다. 교장 선생님들께 문화교실 때 무용 공연을 봐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객석 수는 생각하지 않고 표를 너무 많이 팔아버렸어요. 사실 표가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도 몰랐지요. 공연 당일 국립무용단 단장님이 관객을 더 입장시키면 너무 복잡해서 공연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밀려드는 관객을 보면서 저도 대책이 없었습니다. 통로는 물론이고 무대 바로 앞에까지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지요. 그런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다들 몰입하니까 숨소리만 나고 잡음 하나 없었습니다. ‘그 하늘 그 북소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무용 극화한 공연입니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한테 너희 북을 찢으라고 시키잖아요. 그걸 두루마리 편지로 연출해서 낙랑공주가 그 편지를 펼쳐 읽는데 무용수가 눈물을 흘리니 객석에서도 훌쩍거리면서 난리가 난 거예요. 공연이 끝나고 감사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전 : 많은 학생을 지도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는지요.

김 : 제자들은 하나같이 다 기억에 남지요. 무용가로 남아 있든 아니든 스쳐 간 인연이든 다 소중합니다. 1994년에 전국무용제가 대구에서 열렸을 때였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데 남자 무용수가 없어서 무용학원 1층에 있던 합기도 도장에 가서 남학생 몇 명만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관장은 아이들이 말을 듣겠냐며 난색을 보였는데 다행스럽게 남학생 7∼8명이 하겠다고 나섰지요. 그중 한 명이 경찰이 되었는데 오늘 전화가 왔어요. 스승의 날이라고 꽃을 보내주면서 제가 포항예총 회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며 축하해주더군요. 전국무용제가 열렸을 때 저 멋있는 남자 무용수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해병대 군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연습실에 오면 늘 배고프다고 했어요. 전기밥솥 세 개에 밥을 하고 찜통에 닭을 몇 마리씩 삶아서 닭개장을 끓여놓으면 순식간에 먹어치웠지요. 과일도 한 상자씩 넣어놓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다 사라졌고요. 그래도 그때가 정말 행복했습니다.

전 :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군요.

김 : 그 남학생들 중에 무용을 전공한 친구도 있습니다. 말을 좀 더듬는 친구였어요. 이따금 짜장면을 시켜줬는데 먹고 나면 다른 아이들은 그냥 나가버렸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뒷정리를 깔끔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선생님, 저 무용 전공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똑같이 동작을 가르쳤지만, 그 친구는 감정이 탁 나왔어요. 딱 무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전공을 하겠다고 나서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더군요. 그때도 무용을 하겠다는 남학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극히 드물었지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무용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 현장에 들어와서 하는 것이 정말 다르다. 결코 화려하지 않으며 자신과 끊임없이 싸움을 해야 한다. 많이 힘든 일이라 권하고 싶지 않다.”

전 : 그 학생이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김 : 이미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말을 더듬으니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은 가지기 힘들 테지만, 춤은 몸으로 하는 것이니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가정도 이루어야 하는데 무용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레슨비를 받지 않고 그냥 한번 해보고 그래도 할 수 있겠으면 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정말 열심히 하는 거예요. 무용하는 사람은 몸이 악기니까 안경을 끼면 얼굴형이 변할 수 있으니 렌즈를 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실행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렌즈 끼우는 게 적응되지 않아서 나뿐만 아니라 학원의 여학생들도 다 같이 들여다보며 렌즈를 끼워주곤 했지요. 그 친구는 결국 서울로 진학했고 무용수로 성공했습니다. 우연히 접한 무용이 인생을 바꿔놓은 거죠.

전 :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생각납니다.

김 : 그렇지요. 저도 영화 수십 편을 찍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특히 그 남학생들과 전국무용제를 준비하면서 희열을 느끼곤 했답니다. 무대 세트를 밤새도록 만들어서 트럭에 싣고 대구까지 갔지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서 감격해하곤 합니다.

전 : 혹시 무용교육을 하면서 회의를 느낀 적이 있나요.

김 : 예전에는 학부모와 진로 상담할 때 아이가 학교 무용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국립무용단이나 시립무용단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어요. 무용학원 원장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을 거라고 합니다만, 무용과는 그보다 빨리 문을 닫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춤은 더 그래요. 아이들이 전공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제가 말렸어요. “전공은 안 된다, 춤이 좋으면 그저 춤만 추러 와라, 밥벌이도 안되는 게 무용이다” 하고요. 기존에 전공하려고 연습하던 애들은 가르쳐서 진학시켰지만, 그 후로 전공하려는 학생들은 아예 받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기수 중 한 명은 경기도립무용단에 들어갔지요. 예쁜 제자들이 참 많았어요. 여제자들이 결혼해서 다른 지역에 살다가 친정에 와서 무용학원 간판을 볼 때면 “우리 선생님 아직 저기 계시구나”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원 운영이 진짜 힘들 때도 학원 간판을 못 내렸습니다.

전 : 무용교육의 현실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김 :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춤에는 ‘강강술래’, ‘월월이청청’이 있습니다.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며 걷기만 해도 춤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춤이라고 하면 “나는 춤을 못 춰” 하며 거부 반응부터 보여요. 왜냐하면 요즘 무용이 너무 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만들어서 하다 보니 무용 인구가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무대라는 공간에 가둔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무용이 극소수의 사치스러운 취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거죠.

일본 후쿠야마 미술관 개관 기념 초청 공연(1992).
일본 후쿠야마 미술관 개관 기념 초청 공연(1992).

전 : 그렇다면 무용교육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 : 우리 춤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움직임이 곧 춤이다!’ 특히 우리 춤은 자연과 닮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지요. 돌담체가 뭔지 아시나요? 길을 가다 돌담이 가로막혀 있으면 돌아서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 춤에서 이 동작을 돌담체라고 부릅니다. 또 날아가는 기러기를 형상화해서 기러기체, 성주신을 받드는 모양이라고 성주체라고 하고요. 일상에서 우리 자세나 자연의 형상을 모방해서 박금슬 선생님이 우리 춤 동작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생활, 자연과 닮았습니까? (김 회장은 이 대목에서 직접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전 : 직접 보여주시니 바로 이해가 되는군요.

김 : 이 동작에 음악만 틀면 저절로 춤이 되지요. 음악은 ‘김동은 무용단’이 포항 대잠홀 상주단체로 활동할 때 만든 ‘포항의 노래’입니다. “파란 동해 바다 너머 너머∼”

전 : 노래를 들으니 저절로 몸이 들썩이네요.

김 : 그게 바로 춤이지요. 춤이 별거 있나요.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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