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화를 쓰는 아동문학가 김일광 <br/> <2> 한흑구, 이오덕, 손춘익과 만나다
김일광 작가는 2019년에 산문집 ‘호미곶 가는 길’(단비)을 내면서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다.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쌓이고 쌓여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다. 늘 그리운 인연들과 앞으로 만날 새로운 인연들에게 이 글을 전하고 싶다.”(작가의 말) 그렇다면 김일광 작가를 문학의 세계로 이끈 인연은 누구이며, 작가는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지역 원로인 박이득 선생의 동화책 출판기념회가 지난 8월에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 동화책 발간을 추진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일광(이하 김) : 1981년에 창간된 ‘포항문학’에 박이득 선생이 동화를 발표했습니다. 그 동화를 43년 만에 책으로 낸 겁니다. 포항은 원래 아동문학의 뿌리가 깊은 곳인데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박이득 선생은 그 1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서가 남지 않으면 후대에는 잊히기 마련이지요. 작품에서 몇 군데를 수정하고 내용을 줄여 포항의 동화 전문출판사에서 발간했어요. 박이득 선생의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될 듯하군요. 올해 ‘포항문학’ 51호 발간을 앞두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82년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심사를 맡았던 이오덕 선생이 저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주었어요. 2년 뒤 1984년에 ‘훈이의 손’으로 창주문학상을 받았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됩니다. 선생이 제 작품을 창작과비평사에 보냈는데 1990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 책이 ‘아버지의 바다’입니다. 사람보다 작품이 먼저 서울로 걸음을 해야 한다던 선생의 말씀대로 시골내기였던 저보다 작품이 먼저 인정받게 되었지요. 이오덕 선생이 디딤돌을 놓아준 겁니다.
이 : 선생님은 소설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셨는데, 동화를 쓰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이오덕, 손춘익 두 분과의 인연입니다. 이오덕 선생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 동화를 쓰면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갖게 된다며 적극 추천했지요. 이오덕 선생이 주도한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무크지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창작보다 운동으로 기울어진 경향이 강했지요. 아동문학 무크지 ‘우리들이 뽑은 대장’, ‘지붕 없는 가게’ 등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이오덕 선생님과의 인연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김: 1982년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심사를 맡았던 이오덕 선생이 저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주었어요. 2년 뒤 1984년에 ‘훈이의 손’으로 창주문학상을 받았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됩니다.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은 이오덕 선생은 과천으로 거주지를 옮기셨고, 대구·경북의 아동문학은 권정생 선생이 이끄셨지요. 이오덕 선생이 제 작품을 창작과비평사에 보냈는데 1990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 책이 ‘아버지의 바다’입니다. 사람보다 작품이 먼저 서울로 걸음을 해야 한다던 선생의 말씀대로 시골내기였던 저보다 작품이 먼저 인정받게 되었지요. 이오덕 선생이 디딤돌을 놓아준 겁니다.
이 : 포항의 문학을 얘기할 때 한흑구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한흑구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을 텐데 어떤 분이셨는지요?
김 : 인편으로 저를 부르시곤 했는데 항상 죽도시장에 있는 튀김집에 계셨어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식육점에서 간이나 천엽을 사 오게 해서 먹이셨죠. 평양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이광수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셨어요. 1960∼70년대 중앙 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연결고리가 한흑구 선생이었고, 선생 덕분에 포항 문화예술의 격이 높아졌지요. 한흑구 선생을 정점으로 ‘흐름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지역 문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선생은 누구를 흉보거나 싸운 적이 없었어요. 유신 시절에 한 후배 문인이 ‘이 참혹한 땅에서’라는 프린트판 시집을 냈을 때 다른 문인들이 “제목이 왜 그렇노”라며 나무랐지만, 선생만은 “왜 제목 탓을 하는가. 세상을 탓해야지…”라며 다독이셨죠. 포항 문인들은 여전히 그분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
한흑구가 작성한 ‘흐름회’ 결성 취지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향토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다음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난 1968년 12월에 첫출발한 ‘흐름회’. 이름마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인생은 그림자같이 흘러간다”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 연유한 것이며, 동해바다도 흐르고, 형산강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해서 항상 흘러서 새롭게 살고, 새롭게 성장하라는 뜻에서 문화예술인 5명이 주동이 되어 만든 모임. 예술을 애호하고 창작하는 사람끼리 오붓하게 모여서 표면에 나타내기보다 조용하게 숨어서 상호 연마하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실질적인 일을 해나가려 하는 ‘흐름회’ 회원들.
이 : 포항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손춘익 선생과의 일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지요. 2000년에 손춘익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함께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개풍약국 앞에서 만나 죽도시장으로 가 술잔을 기울였어요. 여름이면 구룡포 난전에 가서 고래고기를 놓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요. 구룡포는 포항 시내보다 2∼3도 기온이 낮아서 시원했어요. 1958년 박경용, 1966년 손춘익의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중앙 문단에 진출하는 문인들이 생겨났지요. 당시 박이득 선생은 문학에 뜻을 둔 시인이나 교사, 동화작가 등과 ‘청포도 문학동인’을 결성합니다. 이에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조직과 체계적인 운영이 필요해지면서 1968년 흐름회가 결성되고, 1979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가 만들어집니다.
이 : 선생님은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을 맡는 등 포항문인협회에서 많은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김 : 성홍근 동지고등학교 교장과의 인연으로 포항문인협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1985년 전국소년체전이 포항에서 열리면서 ‘포항문학’에 포항의 역사를 정리한 원고가 특집으로 실립니다. 그때 시 예산을 지원받으면서 ‘포항문학’의 격이 한층 높아졌지요. 그에 따라 회원 관리도 본격적으로 하고 제대로 된 문학인을 육성하자는 뜻에서 편집팀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회원 대부분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이기도 했고, 작품 경향이나 회원 성향이 민족작가회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이 시기는 노동운동이 활발해 ‘포항문학’ 8호에 노동운동을 특집으로 좌담과 관련 작품이 실렸습니다. ‘포항문학’ 10호까지 고은, 김지하, 이호철, 염무웅, 신경림 등의 글이 실렸고, 포항문인협회의 움직임이 주목받는 힘든 고비를 거쳤지요.
이 : 포항문인협회에서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습니까?
김 : 1998년 포항문인협회 주관으로 수도산에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를 세웠습니다. 재생 이명석 선생이 작사하고 장남 이진우 국회의원이 작곡한 ‘옛 포항시민의 노래’가 이 공덕비에 새겨 있지요. 이진우 의원은 법학 전공자인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이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할 때 ‘시민의 노래’를 공모해서 새로 만들었는데 작품성이 떨어집니다. 그 밖에 한흑구 문학비, 청포도 시비, 노계 박인로 시비, 손춘익 문학비 등이 포항문인협회와 포항시의 어려운 조율 과정을 거쳐 세워졌습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