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지금도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 간절해”

등록일 2024-09-22 19:03 게재일 2024-09-23 16면
스크랩버튼
종이꽃을 예술로 승화시킨 명인  김자중<br/>&lt;4&gt; 지화 제작의 현실과 미래
김자중, 장숙자 부부

구순을 바라보는 김자중 선생은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여건만 만들어준다면 가위를 다시 잡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고 했다. 김자중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는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남편과 함께 만든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돼 여한이 없다고 술회했다.

우리 집에 대학교수들이 한창 찾아올 때는 경상도, 강원도 어촌에 풍어제나 굿이 많이 열렸고, 그 바람에 나도 바빴던 터라 무형문화재 같은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굿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많이 작고할 때여서 굿판에 사람이 부족했지요.

2021년에 지화 전시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과연 가능할까 싶었는데 막상 가위를 잡으니 힘이 나더군요. 그때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50평 정도 되는 작업실을 누가 마련해준다면 지화를 다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영감과 나는 지화 만드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어요. 천직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감이나 나나 생각을 미처 못한 게 있어요. 영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을 받았는데 영감은 그걸 못한 겁니다. 영감도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김홍제(이하 제) : 1985년 동해안별신굿이 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선생님도 지화 전승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김자중(이하 김) : 그때는 무형문화재라 했는데, 김석출과 그의 아내 김유선이 지정되었지요. 김석출은 넉살이 좋아 굿판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요. 우리 집에 대학교수들이 한창 찾아올 때는 경상도, 강원도 어촌에 풍어제나 굿이 많이 열렸고, 그 바람에 나도 바빴던 터라 무형문화재 같은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굿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많이 작고할 때여서 굿판에 사람이 부족했지요. 김석출이 2005년에 세상을 뜨자 조카인 김용택이 전승자로 지정되었고, 김석출의 딸들도 전승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도 노력을 좀 했으면 전승자로 지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왜 없겠어요? 워낙에 나서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지요.

제 : 지화를 계속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김 : 이제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바람에 나부끼는 가랑잎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2021년에 지화 전시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과연 가능할까 싶었는데 막상 가위를 잡으니 힘이 나더군요. 그때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50평 정도 되는 작업실을 누가 마련해준다면 지화를 다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지화를 평생 만들어왔지만 솔직히 돈 없이는 힘든 일입니다. 화주가 내는 돈이 많을수록 힘이 더 날 수밖에 없어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지화를 만들어보고 싶군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았던 어부들을 생각하며 정성이 가득 들어간 지화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고 싶어요. 동해안별신굿은 무형유산으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지만, 지화는 개인의 솜씨에 달려 있지요. 지금 굿판을 장식하는 지화는 성에 안 차요. 지화가 사라지지 않고 예술작품으로 계속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지화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흥과 장단이 용솟음칩니다. 동해안별신굿의 드렁갱이장단이 아직 내 몸속에 흐르듯이요.

※ 김자중 선생과 대담을 마친 후 김 선생의 부인인 장숙자 여사와 대담을 이어갔다.

김홍제(이하 제) : 사모님도 지화를 만들 때 함께하셨습니까?

장숙자(이하 장) : 나도 지화를 잘 만들어요. 영감만큼 가위질에 능숙하지는 않지만요. 지화를 염색하고 말리는 일은 주로 내가 맡았지요. 지화는 혼자서 만들기 힘들어요. 누군가와 함께해야 할 수 있는 힘든 작업이에요. 우리는 생계가 달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진짜 열심히 했어요. 굿이 겹쳐서 잡히면 밤을 꼬박 새울 때도 많았지요.

제 : 김자중 선생이 지화를 만들며 굿판에 나선 세월이 70년 가까이 됩니다. 결혼하고 60여 년을 함께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나요?

장 : 나도 흥이 참 많았어요. 영감을 따라다니면서 사설과 가락을 배웠고, 장구와 국악기를 잘 다뤘지요. 가장 기억나는 일은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한 일입니다. 영일군이 포항시와 통합된 게 아마 1995년이지요. 그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청하면장이 찾아와서 영감한테 영일군 국악경연대회에 청하면 대표로 출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영감이 젊은 사물놀이패들과 함께 굿거리장단을 가르치고 대회에 나갔는데 나도 갔지요. 다행스럽게 영일군 경연대회에서 우리 청하면이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이 영일군 대표로 경상북도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지요, 그때 마침 영감한테 일이 들어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가 젊은이들을 인솔해 경상북도 대회에 나가 2등을 했어요. 영감과 함께 나갔으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인데 정말 아쉽더군요. 전국대회에 나가서 입상했더라면 국악으로 무형유산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제 : 굿판에서 일하는 분을 남편으로 둔 인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장 : 굿판에 가보면 양중이 장구를 치며 추임새를 넣고, 무당이 사설을 늘어놓을 때 제 신랑인 양중이가 계집질에 노름까지 한다며 신세 한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구경꾼들은 재미있다며 배꼽을 잡으며 웃지만 실은 무당 자신의 신세 한탄인 거죠. 굿판에 나선 남자들은 술과 노름, 계집질에 흥청거리며 살았어요. 그걸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속이 어떻겠어요? 까맣게 타들어갔지요. 그래도 그 험한 세월을 참고 견뎌냈습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디 가당키나 했겠어요? 모두 모성으로 버텨냈지요. 그런 세월이 다 지나자 영감도 늙고, 나도 늙어버렸군요. 꽃 같은 호시절이 다 지나갔어요. 요새는 영감이 저 없으면 꼼짝도 못 해요.

무당이나 양중이의 사설. 김자중 명인이 작성했다.
무당이나 양중이의 사설. 김자중 명인이 작성했다.

제 :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

장 : 2남 1녀를 두었어요. 큰아들은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다니고 있어요. 포항 시내에 삽니다. 가까운 곳에 살아 자주 우리 내외를 찾아온답니다. 며느리도 참 좋아요. 둘째 아들은 울산 현대자동차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옛날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요. 막내딸이 있는데, 용두리 한동네에서 살아요. 사위가 어선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지요. 의지가 많이 되는 딸 내외입니다.

제 : 아주 다복하군요. 자녀들은 자라면서 부모가 굿판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장 :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반대를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큰아들이 교회를 다녔겠어요? 이제 성인이 되어 다들 이해하지만, 한창 자랄 때는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고 봅니다. 나도 아이들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살았어요. 지화 일을 그만두게 된 것도 아이들 영향이 컸지요.

제 : 가슴에 품고 있는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장 : 그럼요. 다 이야기하자면 장편소설 몇 권을 쓸 수 있을 텐데 이젠 기억이 가물거려요.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영감이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주니 고맙지요. 영감이 얼마 전에 화장실 바닥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병원에 다녔어요. 그때는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

제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죠.

장 : 영감과 나는 지화 만드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어요. 천직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감이나 나나 생각을 미처 못한 게 있어요. 영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형유산 전승자로 지정을 받았는데 영감은 그걸 못한 겁니다. 영감도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촌에 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어두워 그런 걸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그래도 영감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가족들 무사태평하니 한평생 고생했지만 나름 잘 살았다고 여깁니다. 영감과 내가 만들던 지화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동해안별신굿도 전승이 잘되니 여한은 없어요. <끝>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Artists Of Pohang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