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달을 보며 함께 춤을 추고 싶은 무용가 김동은<br/><2> 기초를 강조한 무용교육, 그리고 무용문화의 확산
개척자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영역, 운명, 진로를 처음으로 열어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용가 김동은이 포항 무용을 개척했다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개척은 남모를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포항에 무용을 뿌리내리고 그 저변을 넓혀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은주(이하 전) : 회장님은 포항에 무용이라는 예술 영역을 개척하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동은(이하 김) :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하다 보니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내가 우겨서 한 무용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말을 못 했지요. 진짜 힘들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집에 전화도 안 했어요.
전 : 그 시대에는 예술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무용은 어땠나요.
김 : 무용학원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딴따라’라며 대놓고 비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무용도 열심히 가르쳤지만 몸가짐, 말투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잘 가르쳐야겠다, 반듯하게 키워내야겠다, 얼른 그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억척스럽게, 혹독하게 가르쳤지요. 대학입시에는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등을 다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본기부터 확실하게 가르쳤지요. 한 동작 한 동작, 완성될 때까지 붙잡고 시켰어요. 팔꿈치를 교정해야 한다면 팔꿈치에 멍이 들 정도로 내 손아귀에 꽉 힘을 주고 교정했습니다.
전 : 회장님은 어떤 무용 선생님이셨습니까.
김 : 제자들이나 수강생들은 내가 그렇게 무서웠다고 합니다. 잘 가르쳐야겠다, 반듯하게 키워내야겠다, 얼른 그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억척스럽게, 혹독하게 가르쳤지요. 대학입시에는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등을 다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본기부터 확실하게 가르쳤지요. 한 동작 한 동작, 완성될 때까지 붙잡고 시켰어요. 팔꿈치를 교정해야 한다면 팔꿈치에 멍이 들 정도로 내 손아귀에 꽉 힘을 주고 교정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폭력으로 신고당하겠지요.
전 : 열정이 대단하셨군요.
김 : 그럼요. 무용은 물론 악기도 가르쳤습니다. 음악을 알아야 무용 동작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가르쳐서 대학에 보냈더니 기본이 잘된 학생들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대학교수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콩쿠르에 나갈 때는 다리미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 무대의상을 구김 하나 없이 다려 입혔어요. 무대 위에 세워놓으면 인형같이 예뻤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말만 하면 사람들이 확 깨는 거예요. 아이들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퐝서 왔는데예”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면 “퐝? 퐝이 어디야?”라고 사람들이 되묻곤 했지요. 지금은 나도 포항 사투리를 많이 씁니다만 그때는 그게 참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아이들 말투를 고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전 : 제자들이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할 때 참 뿌듯했겠습니다.
김 : 말할 수 없이 뿌듯했지요.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가르쳐 원하는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첫 제자 둘(경북무용협회 지회장을 지낸 손현, 조은정)이 대학에 갔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딸을 시집보내면 그런 기분이 들까 싶었지요. 허전함과 허탈함에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입시를 한두 해 치르는 것도 아닌데 늘 적응이 안 됐어요. 한번은 너무 힘들어하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물이 함지박 같은 큰 그릇에 담기는 속도와 종지처럼 작은 그릇에 담기는 속도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 채워진다.” 에너지를 많이 쓴 만큼 채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픈 시간이 반복되어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고 포항무용협회, 포항시립무용단도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전 : 학원을 운영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김 : 지금도 인간관계가 어렵습니다만 젊어서는 더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학부모들과 좀 더 잘 지낼 수 있었겠지요. 그때는 나무 사이에도 간격이 필요하듯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적당함이 얼마만큼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학부모와 저와의 관계는 아이들이 없으면 남이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저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선택했어요.
전 : 묘령의 무용 선생님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학부모들이 더 좋아했겠는데요.
김 :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2층 학원에서 내려다보면 길 하나만 건너 바로 제자인 혜승이네 집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누구네 집, 또 그 옆에는……. 그 동네 원생들이 많았지요. 누구 집에 제사를 지내거나 큰일이 있으면 음식을 가득 차려 보내주시곤 했어요.
전 : 무용의 불모지에서 어떻게 단시간에 학원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는지요.
김 : 지금처럼 홍보 수단도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열심히 가르치면 알아줄 거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표회를 했지요. 1979년 3월 11일. 그 날짜는 잊을 수가 없어요. ‘김동은 무용학원’의 1회 발표회 날입니다. 1978년 6월에 정식으로 학원을 열었는데 채 1년도 안 된 시점이었지요.
전 : 발표회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김 : 무용은 종합예술이잖아요. 그런데 미술, 음악, 무용, 의상 등 포항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음악 녹음 편집도 매번 서울 가서 해야 했지요. 서울에 갔다가 타이밍이 안 맞으면 날밤을 새워 직접 음악 편집을 해야 했어요. 의상도 작품마다 다르게 맞춰 입혔지요. 학부모님들이 많이 협조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아요. 그저 아이들이 예뻤습니다. 1회 발표회의 첫 무대는 <꼬마 신랑>이었는데 내가 무용학원 1호 등록생인 여섯 살 초슬이를 업고 춤을 췄지요. 힘들었지만 그 시절이 참 인간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 : 첫 공연 후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첫 공연을 시공관에서 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포항 KBS 김순명 아나운서가 사회를 봐주셨어요. 반응이 뜨거웠지요. 발표회를 마치고 나오면 온 시내가 시끌벅적했습니다. 무용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장구를 배우러 오시는 분도 있었고 며느리 하자는 분도 많았어요. 공연했던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또래의 우상이 되었고, 공연을 본 아이들은 집에 가서 무용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지요. 그 후 해마다 발표회를 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어요. IMF를 겪으면서 2년에 한 번씩 하게 되었죠.
전 : 황당한 일도 겪으셨다면서요.
김 :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첫 무용학원은 죽도성당 골목 안에 있는 2층집이었어요. 그 일대의 유일한 2층 건물이었지요. 1층은 합기도 학원이었고 2층이 무용학원이었습니다. 그 골목은 비만 오면 장화 없이 못 지나다닐 정도로 진창이었어요. 그런 골목에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면 검정 세단이 줄을 지어 대기하곤 했습니다. 자가용이 귀할 때였으니 도대체 저기가 뭐 하는 곳인지,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았지요. 그러다 보니 세무조사 리스트에 올랐나 봅니다.
전 :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무용 공연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김 : 늘 아쉽고 안타까운 점은 무용에 대한 이해도가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대사가 있어 쉽게 이해되고 빨리 공감할 수 있어요. 반면에 무용 공연을 본 관객 중에는 “뭐, 나와서 뺑뺑 돌기만 하다 들어가는구먼”이라고 하는 분도 있지요. 1986년인가 강선영 선생님이 무용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매방 선생님 순회공연을 포항에서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려 성사된 일이 있습니다. 공연 당일 관객들 줄이 동빈동까지 이어질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요. 사진 섭외를 미처 못 해서 그 귀한 자료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더군요.
전 :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김 : “야, 실컷 졸다가 봐도 아직도 북을 두드리고 있네.” 이매방 선생님이 공연하는데 객석에서 그런 말이 오가는 거예요. 내용을 모르면서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무용인들에게는 주옥같은 시간인데 말입니다. 또 박재근 선생님이 조승미 선생님하고 파드되(pas de deux, 남녀 2인무)를 공연하려고 발레복을 입고 등장했을 때는 “민망하게 꼬락서니가 저게 뭐꼬?” 하며 객석에서 쑤군댔습니다. 공연 후 박재근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발레리나를 리프트 한 상태로 퇴장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순간 몸에 힘이 다 빠져 상대를 들어올릴 힘이 없어서 간신히 들어왔다고. 정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대담·정리 : 전은주(동화작가)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