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화를 쓰는 아동문학가 김일광<br/><1> 문학과의 인연
안데르센은 환상이 들어 있는 놀라운 이야기가 동화라고 했다. 드넓은 바다를 향해 청보리가 출렁이는 호미곶에는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이한 김일광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김일광 작가의 작업실 ‘서경와’에서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동해를 굽이치던 한국 귀신고래를 다시 발견한다면, 그것은 한국 귀신고래의 본래 이름을 되찾는 큰 전환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동해’라는 우리 바다의 이름도 함께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김일광, 「작가의 말」, 『귀신고래』, 내인생의책, 2008.
4학년 때 특활반을 구성했는데 고학년으로 구성된 혼합 축구부가 유명했습니다. 축구부에 들지 못한 학생들 중에서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아 반 칸짜리 교실에서 문예반을 만들었어요. 그때 「소나기」라는 시를 썼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보리타작 중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허둥지둥 거둬들이는 내용이었어요. 문예반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그 시를 판서해놓으셨더군요. 내 시 한 편으로 한 시간 동안 수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를 경험하고 감상했던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이희정(이하 이) : 등단하신 지 40년이 되었고 40권이 넘는 책을 내셨습니다.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실 텐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김일광(이하 김) : 코로나 이후 1년에 한 번 이오덕 제자 1기 문우들(서정오 외 7인)과 주제 없이 독후 감상과 근황, 일상의 안부를 나눕니다. 그리고 ‘햇살 동화문학회’에서 지역 동화작가들과 합평 만남을 갖습니다. 20여 년이 된 문우들이라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합니다. 종종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을 오가며 출판 담당자와 만나기도 합니다. 일상의 대부분은 호미곶의 작업실과 송도에서 보냅니다. 걷고, 읽고, 쓰며 시간을 보내지요.
이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줄곧 송도에서 사셨는지요?
김 : 1952년 12월 저녁 예배 종소리를 들으며 태어났습니다. 당시 선친께서는 6·25 전쟁에 징집되어 보급물자인 탄환을 수송했습니다. 전쟁 중이라 난방이 안 되어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 세 분의 체온으로 언 몸을 녹이며 자랐지요. 어릴 적 내 놀이터는 형산강과 섬안, 들녘 곳곳에 흩어져 있던 둠벙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옛강이라는 뜻의 구강이었는데 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커다란 못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즘도 그 강 자락에 자주 가곤 해요. 지금은 남의 땅이 되었지만, 거기에는 아버지가 분가루처럼 매만지던 흙이 남아 있어요. 물론 강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 강은 여전히 맑고 곱기만 합니다. 빛 고운 모래로 다져진 외가로 가던 오솔길, 달을 떠받치듯 서 있던 키 큰 미루나무, 물풀 사이에서 지지대던 개개비, 뜸부기 등 이제는 다 사라지고 나만 남은 것 같군요.
이: 부친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셨고, 어머니도 농사꾼의 딸이었습니다. 선대는 경주 양남면 나아리 마을의 유서 깊은 유학자 집안이었지요. 1883년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맺기 전부터 일본이 우리 바다에 와서 어로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바닷가에 움막을 만들고 반일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집안이 몰락했어요. 그 바람에 양남 고개를 넘어 장기에서 오천으로 와서 자리를 잡게 되지요. 증조부 때부터 쫓겨 다니게 되지만, 6·25 전쟁 피난길에도 1800년대 조상들의 문집은 잃어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시면서 부친은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여덟 살에 가장이 되어 농사일을 하셨지요.
이 : 선생님의 성함인 ‘일광(日光)’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김 : 원래 집안 족보에 올린 이름이 따로 있었어요. 항렬대로 진환(鎭煥)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전쟁 후에 돌아와 보니 체격이 미숙해서 족보대로 하자면 아이가 이름에 눌려 죽을 것 같은 염려가 들었던 게지요. 그래서 태양처럼 살아나라는 의지를 담아 일광(日光)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호적에 올렸답니다. 이후 문학의 인연으로 몇 개의 호를 받았지요. 은사이신 손춘익 선생이 일광이 산야에 가득하라는 뜻을 한글로 풀어 ‘들뫼’를, 아촌 이삼우 선생이 동촌(童村)을, 진촌 배용일 교수가 동진(童津)이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후배 시인이 “나이 들수록 귀는 높이 매달아두고 입은 나무 아래에 묻어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속담을 빌어 ‘이수(耳樹)’라고 지어 낙관에 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문학적 DNA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듯하군요.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집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봤어요. 1960년대 우리 동네에 책이 많은 목사님 집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 손자가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목사님 집에서 책을 빌려볼 수 있었지요. 큰 기쁨이었습니다. 당시 편은범 목사님께 선물 받은 책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연극 어린이 대본이었어요. 1930년에 발행된 번역본이었죠. 부산 곰곰이서점에 어린이 책 박물관 건립 계획이 있어 기증했습니다. 4학년 때 특활반을 구성했는데 고학년으로 구성된 혼합 축구부가 유명했습니다. 축구부에 들지 못한 학생들 중에서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아 반 칸짜리 교실에서 문예반을 만들었어요. 그때 「소나기」라는 시를 썼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보리타작 중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허둥지둥 거둬들이는 내용이었어요. 문예반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그 시를 판서해놓으셨더군요. 내 시 한 편으로 한 시간 동안 수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를 경험하고 감상했던 것이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자신감이나 재능보다는 책과 친해지게 되고, 글쓰기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지요.
이: 선생님의 청년기는 어땠나요?
김 : 우리 세대는 청소년기는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진학률이 낮았지요. 집안을 도와 사회로 나오는 예가 많았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버지는 자식 교육열이 높았던 덕분에 대학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비 부담이 없었던 대구교대로 진학했습니다.
이 : 그러면 문학과의 인연은 대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나요?
김 : 대구교대에 다닐 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경북고등학교 출신 친구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시월유신이 발표될 무렵, 야학 활동을 했는데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시와 산문을 습작하고 막걸리집에서 그 친구와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야학이 불량 서클로 찍혀서 중단되고 말았어요. 그 후 지산교회 장로님이 양계장 한 동을 빌려서 야학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버려진 책상과 의자를 수거해 교실을 만들었지요. 화가였던 유병우가 교감, 유익종 씨가 교무 그리고 나는 학생과 일을 맡았습니다.
이 : 선생님의 문청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포항의 박수철 화백과 김원택 등이 모여서 ‘형상회’라는 동인 활동을 했어요. 시내 백양식당에서 500원 하던 빈대떡을 놓고 소주를 마시며 시와 산문 습작을 읽고 토론했지요. 글과 그림과 음악을 혼합해 시화전도 세 차례 열었습니다. 김원택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르는 등 그 시절 작가 지망생들의 열정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문학 등단 플랫폼이 넘쳐나는 요즘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요.
김일광은…
1952년 12월 포항 남구 섬안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창주문학상 동화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바다’를 비롯해 동화와 청소년소설 등을 40여 권 발간했다.
‘귀신고래’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됐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과 ‘포항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애린문화상(2018)과 경상북도 문화상(2014), MBC삼일문화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