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구사진 감독은 줄곧 시대의 금기를 화두로 꺼내왔다. 1970∼80년대에는 정치와 노동을 무대에 올렸고, 1990년대에는 연극 ‘미란다’로 ‘성(性)’을 파격적으로 다뤘으며, 2000년대에는 영화 ‘원죄’로 종교의 위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연극영화계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문 감독은 2023년에 고향 포항을 스크린에 담아 지역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포항 원도심의 오래된 커피숍에서 문 감독을 만나 연극과 영화에 바친 한평생을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작년에 영화 ‘2퍼센트’ 개봉으로 바쁜 한 해를 보내셨고, 이 작품으로 2023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문신구(이하 문) : ‘2퍼센트’는 고향 포항에서 만든 첫 작품이지요. 이 작품으로 국제 영화상을 받게 돼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전에 영화 ‘원죄’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적은 있지만 감독상은 처음이라 더 기뻤습니다. 지금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호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안동포 짜기’를 다큐멘터리 영화 ‘베틀소리’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여인네들의 삶을 노래한 ‘베틀소리’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수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두 분이 요양원에 계시지요.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담아보려 합니다.배 : ‘2퍼센트’는 한마디로 ‘메이드 인 포항’ 영화인데요. 영화의 배경으로 포항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문 : ‘2퍼센트’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포항지부가 발족하고 지역 영화인들이 합심해 만든 영화입니다. 시민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공모와 신인 배우 공모 등의 과정을 거쳤고, 경상북도와 포항시가 제작을 지원했습니다. 나는 포항 흥해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갔고, 그 때문에 늘 마음에 포항을 품고 있었습니다.배 : 어릴 적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문 : 포항시 흥해읍 남송2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20여 년 전에 가보니 마을은 숲으로 우거지고, 고향집은 사라졌더군요. 그땐 1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어요. 산 넘고 곡강천을 건너 들판을 지나다녔지요.배 : 시골 소년이 영화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문 :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영화관을 들락날락했어요. 수업을 마치면 이른 저녁을 먹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지요. 외국영화는 1962년에 국내에 개봉된 ‘벤허’와 ‘십계’ 등을 봤고, 국내 영화는 ‘빨간 마후라’(1964), ‘광야의 호랑이’(1965) 등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신작만 나오면 영화관으로 냅다 달려갔죠. 상영작을 보려면 저녁을 서둘러 먹고 영화관으로 뛰어야 했어요.배 : 지금은 흥해에 영화관이 없는데 당시에는 있었군요. 관람권은 어떻게 구했나요.문 :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읍내에 영화관이 있었어요. 그러니 산 넘고 강 건너 들판을 뛰어야 했지요. 어린 나이에 돈이 어디 있었겠어요. 표 살 돈이 없으니 쌀이나 달걀을 훔쳤지요. 쌀은 한 되 정도, 달걀은 한 판을 팔아야 표를 살 수 있었어요. 혹시나 학교 선생님들과 마주칠까 봐 숨어서 관람했죠. 기가 막힌 추억도 꽤 있습니다. 하루는 달걀을 보자기에 싸서 영화관으로 뛰어갔는데 거의 다 와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거예요. 티켓값이던 달걀이 깨졌으니 어떻게 되었겠어요? 영화관 문턱에서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지요. 영화인을 꿈꾸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1960년대 포항의 영화관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영화관 현황을 ‘포항시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96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활성화되면서 포항시, 영일군 지역에는 사설 영화관 개설 붐이 일어나 관내에 총 13개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포항시에는 포항극장(대흥동, 1964년 개관), 시민극장(상원동, 1964년 개관), 대신극장(대신동, 1964년 개관), 아카데미극장(여천동, 1965년 개관), 부민극장(죽도동, 1966년 개관)이 있었고, 영일군에는 흥해극장(흥해읍 성내리, 1960년 개관), 오천극장(오천읍 세계리, 1961년 개관), 양포극장(장기면 양포리, 1962년 개관), 연일극장(연일읍 생지리, 1963년 개관), 구룡포제일극장(구룡포읍 중앙리, 1963년 개관), 지행극장(장기면 읍내리, 1963년 개관), 흥해제일극장(흥해읍 성내리 1964년 개관), 동보극장(청하면 미남리, 1965년 개관)이 있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제2권, 2010, 26~27쪽.배 : 영화관이 감독님의 ‘시네마 천국’이었군요.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걸 넘어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였나요.문 :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성적도 괜찮았고 글과 그림, 운동 등 다방면으로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집안의 기대가 컸지요.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철학 개론서나 융의 심리학 등을 읽었습니다.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에 매료됐지요.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무작정 서울에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배 : 집안의 반응은 어땠나요.문 : 원래 본명은 최명효로 경주 최씨 종갓집 종손입니다. 당시 조부는 상투를 틀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딴따라’ 할 거면 호적을 파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어쩌려고 그러냐고 걱정했죠. 그래도 봇짐 하나 메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촌놈이 빈털터리로 갔으니 결론이야 뻔하죠. 남산 야외 음악당 벤치 밑에서 노숙했어요. 새벽에 시장에서 식은 연탄을 끌어안고 몸을 녹이고,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를 채웠어요. 결국 3개월 만에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호적을 판다던 부모님도 포기하시더군요. 말려서 될 일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고향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했더니 논을 팔아 방 하나 얻어주셨지요.배 : 열예닐곱에 혼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갔다니 대단했군요.문 : 영화배우 이혜영의 아버지이자 영화 ‘만추’로 유명한 이만희 감독을 찾아갔어요. 영화 잡지를 뒤져보면서 이 사람을 찾아가면 되겠다 싶었거든요. 충무로에서 물어물어 이만희 감독의 단골 다방 앞에서 일주일을 기다렸어요. 그러다 지인들과 다방으로 들어가는 이 감독님을 본 거예요. 들어갈 때 인사하고 바깥에서 기다렸다가 나오면 인사하기를 사나흘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혼자 계실 때 따라 들어가 배우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차를 시켜주면서 나이를 묻더군요. 나이를 말하니 감독님이 웃으며 “학교는?” 하시길래 그만뒀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이 감독님이 배우는 영화를 알아야 한다며 연출부로 들어오래요. 그렇게 스크립터부터 시작했어요. 장면 하나 찍으면 그림 크기, 배경, 렌즈 크기, 배우 동선, 대사를 모두 기록하는 역할입니다.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여죄수와 위조지폐범으로 쫓기는 남자의 절박한 사랑을 미학적으로 그려낸 1966년도 영화로 국내 흥행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되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만추’ 이후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가 연이어 나오면서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문예영화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소영·백해린·임대근 지음,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69쪽.배 : 제작에 처음 참여한 작품을 기억하십니까.문 : 1972년에 개봉한 전쟁영화 ‘1950년 6월 25일 04시’를 포항 오천에 와서 찍었어요. 한국전쟁 때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참상을 그린 영화예요. 이 영화는 제9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지요. 영화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 고생을 많이 했어요. 총 맞아 죽는 역할만 열 번 이상 했으니까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무지했으니 용감했고요. 그걸 하면서 영화를 배웠는데, 어린 눈에 감독이 멋있었나 봐요. 언젠가 감독이 되어야지 다짐했고 결국은 이루어냈지요. 그 뒤로 박노식 감독과도 작업했어요. 그러다 5년간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중사로 제대했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했습니다. 주인공으로 일고여덟 작품을 했으니 연기를 계속했다면 지금쯤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겠지요. 문신구 감독은…본명 최명효. 1955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와 흥해중학교를 졸업했다. 영화인을 꿈꾸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상경했으며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연극을 주로 했다.
1994년 연출한 연극 ‘미란다’가 외설 시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며 영화 제작에 나섰다. 노동과 정치, 성(性) 등 사회적 금기를 주로 다뤘으며,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했다.
영화 ‘원죄’로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작품상 등을 받았고, 2023년에는 포항을 배경으로 한 영화 ‘2퍼센트’로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