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2퍼센트’ 불가능 아닌, 도전을 위한 출발점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영화계에서 낯선 존재였던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놀랄 만큼 높아졌다. 한국 영화는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인재들의 도전의 무대가 되었고, 포항에서도 영화산업을 일으켜보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포항의 인적, 물적 자산으로 제작된 영화 ‘2퍼센트’의 개봉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2퍼센트’는 문신구 감독의 새로운 시도이자 고향에 보내는 연서다. 배 : 본명 대신에 ‘문신구’라는 이름을 쓰고 계신데. 문 : 문신구는 필명입니다. 내가 1986년에 쓴 희곡 ‘분출구’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필명을 썼습니다. 배 : 감독님께서 연극영화계에 입문한 지 50년이 넘었습니다. 열정 하나로 뛰어들어 장르를 불문하고 역할을 가리지 않으며 활동했습니다. 지난 활동을 되돌아본다면 현재는 어느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문 : 돌이켜보니 긴 시간이 흘렀군요. 그동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했고 침잠기도 거쳤습니다. 현재는 지금까지 걸어온 예술세계를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원죄’와 ‘2퍼센트’입니다. ‘원죄’는 외부 자본의 도움 없이 내가 하고 싶고 또 해야 하는 이야기를 밀어붙인 작품이지요. ‘2퍼센트’는 고향 이야기를 하나쯤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배 : ‘원죄’는 감독님께 많은 상을 안긴 작품이고, ‘2퍼센트’는 포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문 :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포항지부를 출범하면서 지역 영화인들과 영화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았습니다. 그중 하나로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포항 단편 시나리오 공모전을 개최했어요. 수상작 한 편을 내가 각색해 장편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정된 예산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뭘까 고민했어요. 적은 예산이라고 작은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배 : ‘2퍼센트’에서는 포항의 명소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지요. 등장인물을 포항의 여러 공간에 담아내는 데 고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문 : 시나리오를 포항이라는 공간에 녹여내는 작업이 감독으로서 풀어야 할 과제였습니다. 되도록 골고루 소개하려고 애쓰면서도 배경이 스토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어요. 포항의 아름다운 풍광도 담아내고 의도하는 스토리도 잘 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심했죠. 배경 중에 월포해수욕장 인근 이가리 닻 전망대는 효과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바다 장면은 동시녹음을 했는데 소음 때문에 촬영지를 두세 번 옮겨야 했어요. 해변 도로를 지나는 차량은 CG로 지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배 : ‘2퍼센트’는 실패를 거듭하다 생존 확률 2퍼센트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영화감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연한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니 주인공으로 나오는 고집불통의 감독이 문 감독님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하더군요. 감독님은 촬영 현장에서 어떤 감독입니까. 문 : 상황을 배우들에게 주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미친놈, 무모한 놈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영화는 촬영하고 필름에 담기는 모든 순간이 최선이어야 합니다. 최선의 장면을 뽑아야 하니 현장에서는 거칠고 날카로워집니다. 충분치 않은 예산에 맞추다 보니 여유가 없기도 하죠. 사비로 제작한 ‘원죄’는 하루 3시간씩 자면서 11회차에 끝냈어요. 비슷한 시기에 백승철 배우가 ‘군함도’를 촬영했는데, 거기서 한두 컷 찍을 동안 우리는 열 컷도 더 찍으니까 “감독님, 이게 영화가 돼요? 이게 되면 감독님 천재예요”라고 했을 정도죠. ‘2퍼센트’ 촬영도 13회차로 끝냈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죠. 해 뜨는 장면을 찍느라 자동차에서 밤새고, 성당 꼭대기에서 촬영한 적도 있어요. 배 : 등장인물 중에 가장 짧고 강렬하게 나오는 남명렬 배우는 문 감독을 두고 ‘변신의 귀재’라고 하더군요. 감독님의 정체성을 묻는다면요. 문 : 1980년대 중후반은 나도 주목받는 배우였지요. 신성일 세대 다음에 신영일 세대, 그다음에 안성기 세대가 있었고, 나는 바로 그다음 세대라고 봅니다. 연기를 계속했다면 사람들에게 익숙한 얼굴이 됐을지도 모르죠. 나의 정체성을 말한다면 배우나 연극 연출가라기보다 영화감독이에요. 부러울 정도로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은 정말 많습니다. 그래도 스스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상업영화는 시류를 탑니다만 내 작업은 그렇지 않죠. 지금도 해외 영화제 관계자가 내 작업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배 : ‘2퍼센트’라는 영화 제목이 흥미로운데, 지역 영화산업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문 : ‘2퍼센트’는 불가능이 아니라 도전을 위한 출발점입니다. 포항은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인 ‘인디플러스 포항’이라는 귀중한 자산이 있습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니 안타까워요. 다른 지역에 없는 자산이 포항에는 꽤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배 : 감독님 말씀대로라면 2퍼센트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시작되는 비율인데요, 지역의 영화산업 여건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 포항은 문화예술적으로는 좀 건조한 것 같습니다.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아날로그적 사고에 갇혀 있어선 안 되겠죠. 영화 제작자의 눈으로 보면 경상북도만큼 숨겨진 명소가 많은 곳이 없어요. 하지만 행정에서는 관심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안타깝게도 경북은 영상위원회가 없는 유일한 지역이죠. 이제는 콘텐츠의 시대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앞서지는 못하더라도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배 : 콘텐츠의 시대를 포항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문 : 전국 청소년 영화제 심사를 하다 보면 실력이 출중한 친구들이 많아요.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영상교육 시스템을 갖춘 곳이 꽤 있습니다. 포항에서 훌륭한 콘텐츠 작가가 나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제2, 제3의 봉준호가 포항에서 나올 수도 있어요. 지방자치단체나 학교도 인식을 전환해 영화 관련 인재 발굴에 힘써야 해요. 세상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데 지역의 영화산업도 이런 변화를 따라갔으면 합니다. 영화는 대중 예술의 한 영역이 되었고, 앞으로 영상에 대한 소비와 제작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영상산업에 대한 교육도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 제공되어야 합니다. 배 : 감독님께서는 그동안 노동과 정치, 성(性), 종교까지 한국 사회의 굵직한 이슈를 다뤄왔는데, 앞으로는 어떤 주제를 다룰 계획인가요. 문 : 세상이 다원화되고 복잡해질수록 정치가 중요하죠. 그래서 정치 문제를 다뤄보려고 해요. 구체적으로는 태종 이방원의 장자인 양녕대군 이야기를 다뤄볼 생각입니다. 양녕대군은 왕이 되지 않을 방도를 궁리하며 스스로 비뚤어지는 독특한 인물이죠. 결국 동생인 세종이 세자에 책봉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들 간의 갈등과 투쟁이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정치 이야기는 곧 복잡다단한 인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여겨져요. 그리고 ‘안동포 짜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사라져가는 옛것에도 관심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배 : 감독님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이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문 :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위해 평생을 살아왔고, 남은 인생도 영화를 위해 살 겁니다. 앞으로 몇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남기고 싶은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으려 합니다. 영화가 세상을 바꾸지 못해도 적어도 하나의 문제를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감독이 되고 싶어요. 자식들에게도 그렇고, 가장 죄스러운 부모님께도 말입니다. 끝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9-04

“아무리 힘들어도 하고 싶은 얘기를 할 터”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는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저마다의 시절과 인연을 떠올린다. 상상과 사유의 안락의자에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지만 스크린을 직조하는 영화인에게 안락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스태프들의 일터이자 관객 수와 투자자와의 끊임없는 눈치싸움이다.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점은 자본의 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영화계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던 문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녹여내기 위해 기나긴 준비 과정에 돌입한다. 문 감독에게 이 시기의 영화는 ‘시간을 인내하는 예술’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10여 년의 공백기 끝에 영화 ‘원죄’를 세상에 내놓았다. 배 : 연극 ‘미란다’로 법정 공방을 벌이면서도 같은 제목의 영화를 내놓으며 화제를 모았는데 그 후로는 공백기가 길었습니다. 문 :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작품을 만들다 보니 저항에 부딪혔지만 감당할 자신이 있었죠. 창작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관람자의 비판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사회가 그로 인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문제는 자본입니다. 영상산업은 자본이 수반되어야 하니까요. 경제 논리와 나의 예술세계가 다르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배 : 연극 ‘미란다’가 화제성이 컸던 만큼 돈은 좀 벌지 않았나요. 문 : 그 돈으로 영화 ‘미란다’와 ‘콜렉터’를 제작했어요. 하지만 자비로 만드는 영화는 한계가 있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계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영화계 구조가 바뀌고 배우 개런티도 큰 폭으로 올랐지요.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려면 가게를 하든 사업을 해야지, 영화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깊었어요. 한국 영화는 1990년대 들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마주한다. 한국 영화가 예술에서 산업으로 거듭나는 시기였던 것이다. 영화계는 1990년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1990년대 한국 영화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95·96년 흥행 순위 10위 내 작품 대부분이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일 정도로 대기업 자본은 한국 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됐다. 대기업의 막대한 자금이 영화계로 흘러들어오자, 영화 제작비와 마케팅비는 점차 상승하고 한국 영화의 대형화가 시작됐다. 영화계에 유입된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여 영화 제작의 전문화를 이뤘으며, 영화산업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대기업 자본과 영화 인력의 결합으로 제작된 기획 영화는 영화를 예술이 아닌 상품으로 간주하면서 한국 영화는 ‘산업’으로 거듭났다. - 김소영·백해린·임대근,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100쪽·120쪽. 배 : 긴 공백을 깨고 2018년에 나온 영화가 ‘원죄’입니다. 힘든 삶을 살면서도 세상의 동정을 거부하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수녀의 이야기를 그렸죠. 문 :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진학했어요. 신학 공부를 10년 가까이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1년여 동안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영화를 만들었고, 사회적으로 터부시하는 문제여서 더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배 : 신학적인 주제를 담으려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고요.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는 각오였나 봅니다. 문 :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고 나는 하나님을 심판한다.” 영화 포스터에 이렇게 적혔습니다. 선천성 지체 불구자인 주인공은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영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목회자가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고발합니다. 가식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희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 가장 힘들고 어렵고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교회당은 헌금을 받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예배를 드립니다. 배 : 종교를 주제로 다루기 위해 종교인들과 대화도 나누었나요. 문 : 교회에 관한 주제를 담으려고 국내 유명한 목회자를 여럿 만났습니다. 서울 강남에 10만 가까운 신도가 있는 교회를 떠나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존경하는 분이죠. 그리고 두 살 아래 제 동생이 승려이기도 합니다. 배 : 그 동생도 영화를 관람하셨나요. 문 : 시사회 때는 안 왔어요. 내가 3남 1녀의 장남인데 바로 아래 동생입니다. 일찍 출가한 동생은 형제나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포항의 조그만 사찰에 있죠. 배 : 형은 목사, 동생은 승려라니 평범한 가족은 아니군요. 문 : 부모님은 순박한 분이셨어요. 내가 영화 한다고 했을 때 다른 부모라면 두들겨 패기라도 했을 텐데……. 자녀들이 하고 싶은 걸 꺾지 못하셨어요. 되돌아보면 죄스럽죠. 두 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더 아쉬워요. 배 : 영화 ‘원죄’는 주제와 서사도 충격적이지만, 흑백의 미학적인 화면과 연극적인 장면, 시적인 대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문 : 내가 남의 작품을 못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입니다. 표현은 절제하고 반어법을 많이 쓰는 편이죠. 표현하면 할수록 상상력은 줄고 절제할수록 상상력은 늘어납니다. ‘원죄’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수녀를 카메라가 멀리서 잡아요. 보통은 수녀의 표정을 클로즈업했겠지요. 표정을 모를 때 상상하게 되고 감동의 폭은 커집니다. 그런 보너스를 왜 버리겠어요. 나는 반어법도 즐겨 쓰는데, 호감 가는 사람에게 보기 싫다고 말하는 식이죠. 그러다 보니 배우들이 오해한 적이 많아요. 물론 친절한 설명을 삼가니 호불호가 갈립니다. 배 : 영화의 결말도 충격적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파격적이었어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요. 문 :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편집을 모두 끝내고 재촬영했어요. 배우들이 왜 재촬영을 해야 하는지 물었죠. 편집해놓고 보니 스스로 용서가 안 되었어요.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하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으로 끝내는 건 아니다 싶었죠. 등장인물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관객과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장면이 있어야 했어요. 춤을 통해 그들이 세상 또는 신과 화해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춤추는 내내 들리는 웃음소리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작품 ‘미궁’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배 : ‘원죄’로 2018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 작품상, 제38회 황금촬영상영화제 촬영 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유난히 상을 많이 안겨준 영화입니다. 문 : ‘원죄’시사회 때 목사님 50명을 초대했는데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리더군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일본 유바리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과 함께 초청을 받았어요. 국내에서 별 반응이 없던 영화를 일본에서는 심사위원 전원이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춘사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감독상을 받았고, ‘원죄’는 특별 작품상을 받았어요. 수상 소감에서 “‘기생충’이 300억짜리 영화인데 ‘원죄’는 1억 5천짜리 영화”라고 했더니 큰 박수가 나오더군요. 기독교윤리실천위원회에서도 움직이지 않았고요. 저들에게 빈틈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이 실수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 : 영화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문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9-01

“예술의 사명은 그릇된 통념을 깨는 것”

문신구 감독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줄기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이다. 문 감독은 1990년대 중반 연극 ‘미란다’로 외설 시비에 휘말리며 법정에 서게 된다. 이 사건은 언론의 문화면보다 사회면에 더 자주 등장했다. 이후 연극 ‘미란다’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연극보다 영화가 더 충격적이라는 세간의 평을 들었다. 문 감독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어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던 충무로 시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10대 중반에 상경한 후 이만희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하면서 영화계 경력을 쌓으셨습니다. 주로 어떤 작품을 했나요?문신구(이하 문) : 닥치는 대로 했죠. 장르도 역할도 가리지 않았어요. 글도 쓰고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하고 잠깐 록밴드에서 보컬도 했지요. 초기에는 주로 노동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김지하의 민중극처럼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무대를 만들었지요. 공연하다가 경찰에 쫓겨 도망 다니기도 했습니다.배 : 1990년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극 ‘미란다’는 울산에서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문 : 군대에서 제대하고 울산에 간 적이 있어요. 울산 지역 방송국에서 영화음악을 소개하고 울산 지역 신문사와 왕가위 감독을 주제로 한 영화제도 개최했지요. ‘포스트 극단’을 창단해 공연하고, 포항과 경주의 연극인들과 교류했습니다. 경주의 이수일 선생은 연극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으로 중앙 무대에서도 인정하는 연극인입니다. 당시 나는 이 선생의 제안으로 연극 ‘무녀도’에 출연했고, 경주시립극단 창단에도 참여했습니다. 포항의 김삼일 선생도 그때 뵈었죠.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도전 의식이 생겼고,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문제작을 하기도 했지요. 배 : 제작하신 작품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문 :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 출연까지 한 첫 연극 ‘섹스’가 기억납니다. 남녀의 성에 관한 이야기로 공연이라기보다 해프닝에 가까웠어요.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공연했는데, 조명기를 담당하던 공무원이 공연 도중에 도망가는 일이 벌어졌어요. 상상도 못 한 일이 무대에서 펼쳐지니 너무 놀랐던 거죠. 결국 4회차로 기획된 공연이 무대 인사도 없이 종료됐어요. 공연장을 대관해 준 공무원은 좌천되고 난리가 났죠. 그리고 울산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1인극으로 각색한 ‘햄릿’을 올렸습니다. 오필리어 같은 등장인물은 인형을 만들어 무대에 세워놓은 전위적인 스타일의 작품이었죠.배 : 정말 실험적인 작품이군요. 세간의 화제가 된 연극 ‘미란다’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문 : ‘미란다’의 원작인 ‘콜렉터(The Collector)’는 납치범의 이상심리를 다룬 영국 소설이지요. 사랑을 얻기 위해 여자를 납치해서 감금하고 구애하는 내용입니다. 서울에서 연극 ‘콜렉터’가 무대에 올랐을 때 나도 그 작품을 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원작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원작은 납치범인 ‘콜렉터’와 피랍자인 ‘미란다’의 두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내가 본 연극은 ‘콜렉터’의 관점에서 만든 것이지요. 하나의 사건이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나를 지금까지 끌고 온 동기입니다.배 : 연극 ‘미란다’는 외설 시비에 휩싸이며 국내 공연 예술물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도 법정 다툼을 벌이던 때여서 ‘문학계의 마광수, 영화계의 문신구’는 예술계 에로티시즘 논란의 쌍두마차로 회자되었지요.문 : ‘성(性)’은 덕과 윤리, 제도와 종교로부터 죄악으로 취급당하던 시절이었죠. 많은 예술인이 그것은 부당하다며 문제를 제기했고요. 마광수 교수와 내가 세운 기록이 있어요. 대법원까지 변호사 없이 재판에 임한 겁니다. 당당하게 작품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연극 로리타(연출 문신구)의 포스터. 1990년대 문화계의 화두는 ‘성(性)’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작품이 끊임없이 생산되면서 외설이냐 예술이냐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성’은 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 문화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문신구 감독은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언론의 반응을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급문화가 옷을 벗는다. 연극, 무용, 문학, 미술 등 대중문화와 거리를 두었던 분야에서도 누드와 에로티시즘, 섹스를 다룬 작품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성을 포함한 모든 규제에 대해 너그러워진 우리 사회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관심’이라는 90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반영하고 있다. 정신은 고상하고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체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예술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연극의 경우 현재 서울 대학로에서는 ‘벗기기 연극’으로 이름난 존 파울즈 원작의 ‘콜렉터’가 ‘어떤 고백’ ‘콜렉터’ ‘미란다’ 등의 이름으로 네 군데 극단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 중 공연음란 혐의로 고발됐던 최명효씨(문신구 감독의 본명) 제작의 ‘미란다’는 11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앞으로 벗기기 연극은 예술적 당위성이 없는 한 처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고급문화 누드-에로티시즘 홍수’, ‘동아일보’ 1996년 6월 12일.배 : 언론에 노출된 횟수도 그렇고 화제성으로 보면 전성기였군요.문 : ‘미란다’로 서울에서 장기 공연할 때는 대기업 영상사업단에서 돈다발을 들고 나를 찾아왔어요. 세금도 많이 냈죠. 현금 장사인 연극으로 돈을 가마니로 끌어왔으니까요. 미국 공연도 잡혔는데 재판이 오래가다 보니 공연이 무산되고 계약금을 돌려주는 일이 생겼어요. 배 : 연극 ‘미란다’를 각색해 영화를 제작하셨지요.문 : 예술의 테마와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음란성만을 전제로 한 사법 판결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자 제안이 있었지만 마다하고 자비로 ‘미란다’를 영화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상영하기도 전에 기독교윤리실천위에서 고발을 하더군요. 간이 더 커져서 김종학 피디가 소개한 일본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콜렉터’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주인공 할 배우가 없어서 내가 출연했어요. 변태적 성향의 남자를 그린 영화인데 센세이션을 일으켜 지금도 회자됩니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어요. 1시간 50분이 흐르고 마지막에 “물 좀 주세요” 한 마디가 전부죠. 전위적이고 획기적이긴 한데 아무래도….배 : 전위적이고 획기적인 이야기에 끌리게 된 계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문 : 전위예술 그룹인 ‘제4 집단’ 선배들을 쫓아다니다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이 그룹은 한국 전위예술의 시초라 할 수 있지요. 광화문 광장에서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을 치르고, 희곡과 무대, 조명 등의 인위적 구조와 형태를 부정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많이 했어요. 내가 구상한 걸 누가 듣고 괜찮다는 반응이 나오면 덮어버려요. 다른 사람이 괜찮다고 인정하면 굳이 해야 할 이유가 뭘까 싶어요. 반대로 말도 안 된다거나 미쳤냐는 반응이 나오면 이거 건드려볼 만하겠구나 싶은 거예요. 구상부터 그렇게 출발하니까…. 시나리오로 투자받기는 애초에 글러 먹은 거죠.배 : 사회풍속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아쉬움은 없습니까.문 : 나는 늘 당대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아름다워야 할 성을 죄악으로 여기던 시대에 예술가는 그릇된 통념을 고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예술은 논쟁의 도마 위에 이슈를 올려 그 영향으로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때문에 욕을 먹고 손가락질도 당했지만 영광의 상처인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8-28

영화가 좋아 중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 노숙하며 버텼죠

문신구사진 감독은 줄곧 시대의 금기를 화두로 꺼내왔다. 1970∼80년대에는 정치와 노동을 무대에 올렸고, 1990년대에는 연극 ‘미란다’로 ‘성(性)’을 파격적으로 다뤘으며, 2000년대에는 영화 ‘원죄’로 종교의 위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연극영화계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문 감독은 2023년에 고향 포항을 스크린에 담아 지역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포항 원도심의 오래된 커피숍에서 문 감독을 만나 연극과 영화에 바친 한평생을 들어보았다. 배은정(이하 배) : 작년에 영화 ‘2퍼센트’ 개봉으로 바쁜 한 해를 보내셨고, 이 작품으로 2023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문신구(이하 문) : ‘2퍼센트’는 고향 포항에서 만든 첫 작품이지요. 이 작품으로 국제 영화상을 받게 돼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전에 영화 ‘원죄’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적은 있지만 감독상은 처음이라 더 기뻤습니다. 지금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호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안동포 짜기’를 다큐멘터리 영화 ‘베틀소리’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여인네들의 삶을 노래한 ‘베틀소리’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수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두 분이 요양원에 계시지요.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담아보려 합니다.배 : ‘2퍼센트’는 한마디로 ‘메이드 인 포항’ 영화인데요. 영화의 배경으로 포항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문 : ‘2퍼센트’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포항지부가 발족하고 지역 영화인들이 합심해 만든 영화입니다. 시민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공모와 신인 배우 공모 등의 과정을 거쳤고, 경상북도와 포항시가 제작을 지원했습니다. 나는 포항 흥해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갔고, 그 때문에 늘 마음에 포항을 품고 있었습니다.배 : 어릴 적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문 : 포항시 흥해읍 남송2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20여 년 전에 가보니 마을은 숲으로 우거지고, 고향집은 사라졌더군요. 그땐 1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어요. 산 넘고 곡강천을 건너 들판을 지나다녔지요.배 : 시골 소년이 영화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문 :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영화관을 들락날락했어요. 수업을 마치면 이른 저녁을 먹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지요. 외국영화는 1962년에 국내에 개봉된 ‘벤허’와 ‘십계’ 등을 봤고, 국내 영화는 ‘빨간 마후라’(1964), ‘광야의 호랑이’(1965) 등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신작만 나오면 영화관으로 냅다 달려갔죠. 상영작을 보려면 저녁을 서둘러 먹고 영화관으로 뛰어야 했어요.배 : 지금은 흥해에 영화관이 없는데 당시에는 있었군요. 관람권은 어떻게 구했나요.문 :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읍내에 영화관이 있었어요. 그러니 산 넘고 강 건너 들판을 뛰어야 했지요. 어린 나이에 돈이 어디 있었겠어요. 표 살 돈이 없으니 쌀이나 달걀을 훔쳤지요. 쌀은 한 되 정도, 달걀은 한 판을 팔아야 표를 살 수 있었어요. 혹시나 학교 선생님들과 마주칠까 봐 숨어서 관람했죠. 기가 막힌 추억도 꽤 있습니다. 하루는 달걀을 보자기에 싸서 영화관으로 뛰어갔는데 거의 다 와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거예요. 티켓값이던 달걀이 깨졌으니 어떻게 되었겠어요? 영화관 문턱에서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지요. 영화인을 꿈꾸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1960년대 포항의 영화관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영화관 현황을 ‘포항시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96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활성화되면서 포항시, 영일군 지역에는 사설 영화관 개설 붐이 일어나 관내에 총 13개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포항시에는 포항극장(대흥동, 1964년 개관), 시민극장(상원동, 1964년 개관), 대신극장(대신동, 1964년 개관), 아카데미극장(여천동, 1965년 개관), 부민극장(죽도동, 1966년 개관)이 있었고, 영일군에는 흥해극장(흥해읍 성내리, 1960년 개관), 오천극장(오천읍 세계리, 1961년 개관), 양포극장(장기면 양포리, 1962년 개관), 연일극장(연일읍 생지리, 1963년 개관), 구룡포제일극장(구룡포읍 중앙리, 1963년 개관), 지행극장(장기면 읍내리, 1963년 개관), 흥해제일극장(흥해읍 성내리 1964년 개관), 동보극장(청하면 미남리, 1965년 개관)이 있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제2권, 2010, 26~27쪽.배 : 영화관이 감독님의 ‘시네마 천국’이었군요.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걸 넘어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였나요.문 :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성적도 괜찮았고 글과 그림, 운동 등 다방면으로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집안의 기대가 컸지요.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철학 개론서나 융의 심리학 등을 읽었습니다.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에 매료됐지요.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무작정 서울에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배 : 집안의 반응은 어땠나요.문 : 원래 본명은 최명효로 경주 최씨 종갓집 종손입니다. 당시 조부는 상투를 틀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딴따라’ 할 거면 호적을 파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어쩌려고 그러냐고 걱정했죠. 그래도 봇짐 하나 메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촌놈이 빈털터리로 갔으니 결론이야 뻔하죠. 남산 야외 음악당 벤치 밑에서 노숙했어요. 새벽에 시장에서 식은 연탄을 끌어안고 몸을 녹이고, 쓰레기통을 뒤져 허기를 채웠어요. 결국 3개월 만에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호적을 판다던 부모님도 포기하시더군요. 말려서 될 일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고향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했더니 논을 팔아 방 하나 얻어주셨지요.배 : 열예닐곱에 혼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갔다니 대단했군요.문 : 영화배우 이혜영의 아버지이자 영화 ‘만추’로 유명한 이만희 감독을 찾아갔어요. 영화 잡지를 뒤져보면서 이 사람을 찾아가면 되겠다 싶었거든요. 충무로에서 물어물어 이만희 감독의 단골 다방 앞에서 일주일을 기다렸어요. 그러다 지인들과 다방으로 들어가는 이 감독님을 본 거예요. 들어갈 때 인사하고 바깥에서 기다렸다가 나오면 인사하기를 사나흘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혼자 계실 때 따라 들어가 배우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차를 시켜주면서 나이를 묻더군요. 나이를 말하니 감독님이 웃으며 “학교는?” 하시길래 그만뒀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이 감독님이 배우는 영화를 알아야 한다며 연출부로 들어오래요. 그렇게 스크립터부터 시작했어요. 장면 하나 찍으면 그림 크기, 배경, 렌즈 크기, 배우 동선, 대사를 모두 기록하는 역할입니다.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여죄수와 위조지폐범으로 쫓기는 남자의 절박한 사랑을 미학적으로 그려낸 1966년도 영화로 국내 흥행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되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만추’ 이후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가 연이어 나오면서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문예영화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소영·백해린·임대근 지음,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69쪽.배 : 제작에 처음 참여한 작품을 기억하십니까.문 : 1972년에 개봉한 전쟁영화 ‘1950년 6월 25일 04시’를 포항 오천에 와서 찍었어요. 한국전쟁 때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참상을 그린 영화예요. 이 영화는 제9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지요. 영화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 고생을 많이 했어요. 총 맞아 죽는 역할만 열 번 이상 했으니까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무지했으니 용감했고요. 그걸 하면서 영화를 배웠는데, 어린 눈에 감독이 멋있었나 봐요. 언젠가 감독이 되어야지 다짐했고 결국은 이루어냈지요. 그 뒤로 박노식 감독과도 작업했어요. 그러다 5년간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중사로 제대했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했습니다. 주인공으로 일고여덟 작품을 했으니 연기를 계속했다면 지금쯤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겠지요. 문신구 감독은…본명 최명효. 1955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에서 태어나 남송초등학교와 흥해중학교를 졸업했다. 영화인을 꿈꾸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상경했으며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연극을 주로 했다. 1994년 연출한 연극 ‘미란다’가 외설 시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며 영화 제작에 나섰다. 노동과 정치, 성(性) 등 사회적 금기를 주로 다뤘으며,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했다. 영화 ‘원죄’로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작품상 등을 받았고, 2023년에는 포항을 배경으로 한 영화 ‘2퍼센트’로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

2024-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