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금기에 도전한 신념의 영화감독 문신구<br/><3> 영화 ‘원죄’와 영화에 대한 신념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는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저마다의 시절과 인연을 떠올린다. 상상과 사유의 안락의자에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지만 스크린을 직조하는 영화인에게 안락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스태프들의 일터이자 관객 수와 투자자와의 끊임없는 눈치싸움이다.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점은 자본의 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영화계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던 문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녹여내기 위해 기나긴 준비 과정에 돌입한다. 문 감독에게 이 시기의 영화는 ‘시간을 인내하는 예술’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10여 년의 공백기 끝에 영화 ‘원죄’를 세상에 내놓았다.
배 : 연극 ‘미란다’로 법정 공방을 벌이면서도 같은 제목의 영화를 내놓으며 화제를 모았는데 그 후로는 공백기가 길었습니다.
문 :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작품을 만들다 보니 저항에 부딪혔지만 감당할 자신이 있었죠. 창작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관람자의 비판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사회가 그로 인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문제는 자본입니다. 영상산업은 자본이 수반되어야 하니까요. 경제 논리와 나의 예술세계가 다르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어요.
배 : 연극 ‘미란다’가 화제성이 컸던 만큼 돈은 좀 벌지 않았나요.
문 : 그 돈으로 영화 ‘미란다’와 ‘콜렉터’를 제작했어요. 하지만 자비로 만드는 영화는 한계가 있지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계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영화계 구조가 바뀌고 배우 개런티도 큰 폭으로 올랐지요. 영화는 시스템 자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종합예술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규제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고요. 결국은 투자자와 협상하고 타협을 봐야 하는데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려면 가게를 하든 사업을 해야지, 영화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깊었어요.
한국 영화는 1990년대 들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마주한다. 한국 영화가 예술에서 산업으로 거듭나는 시기였던 것이다. 영화계는 1990년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1990년대 한국 영화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95·96년 흥행 순위 10위 내 작품 대부분이 대기업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일 정도로 대기업 자본은 한국 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됐다. 대기업의 막대한 자금이 영화계로 흘러들어오자, 영화 제작비와 마케팅비는 점차 상승하고 한국 영화의 대형화가 시작됐다.
영화계에 유입된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여 영화 제작의 전문화를 이뤘으며, 영화산업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대기업 자본과 영화 인력의 결합으로 제작된 기획 영화는 영화를 예술이 아닌 상품으로 간주하면서 한국 영화는 ‘산업’으로 거듭났다.
- 김소영·백해린·임대근, ‘한국 영화의 역사와 미래’, 컨텐츠하우스, 2018, 100쪽·120쪽.
배 : 긴 공백을 깨고 2018년에 나온 영화가 ‘원죄’입니다. 힘든 삶을 살면서도 세상의 동정을 거부하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수녀의 이야기를 그렸죠.
문 :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진학했어요. 신학 공부를 10년 가까이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1년여 동안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영화를 만들었고, 사회적으로 터부시하는 문제여서 더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배 : 신학적인 주제를 담으려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고요.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는 각오였나 봅니다.
문 :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고 나는 하나님을 심판한다.” 영화 포스터에 이렇게 적혔습니다. 선천성 지체 불구자인 주인공은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영화는 하나님의 사랑과 목회자가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고발합니다. 가식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희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 가장 힘들고 어렵고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교회당은 헌금을 받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예배를 드립니다.
배 : 종교를 주제로 다루기 위해 종교인들과 대화도 나누었나요.
문 : 교회에 관한 주제를 담으려고 국내 유명한 목회자를 여럿 만났습니다. 서울 강남에 10만 가까운 신도가 있는 교회를 떠나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존경하는 분이죠. 그리고 두 살 아래 제 동생이 승려이기도 합니다.
배 : 그 동생도 영화를 관람하셨나요.
문 : 시사회 때는 안 왔어요. 내가 3남 1녀의 장남인데 바로 아래 동생입니다. 일찍 출가한 동생은 형제나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포항의 조그만 사찰에 있죠.
배 : 형은 목사, 동생은 승려라니 평범한 가족은 아니군요.
문 : 부모님은 순박한 분이셨어요. 내가 영화 한다고 했을 때 다른 부모라면 두들겨 패기라도 했을 텐데……. 자녀들이 하고 싶은 걸 꺾지 못하셨어요. 되돌아보면 죄스럽죠. 두 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더 아쉬워요.
배 : 영화 ‘원죄’는 주제와 서사도 충격적이지만, 흑백의 미학적인 화면과 연극적인 장면, 시적인 대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문 : 내가 남의 작품을 못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입니다. 표현은 절제하고 반어법을 많이 쓰는 편이죠. 표현하면 할수록 상상력은 줄고 절제할수록 상상력은 늘어납니다. ‘원죄’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수녀를 카메라가 멀리서 잡아요. 보통은 수녀의 표정을 클로즈업했겠지요. 표정을 모를 때 상상하게 되고 감동의 폭은 커집니다. 그런 보너스를 왜 버리겠어요. 나는 반어법도 즐겨 쓰는데, 호감 가는 사람에게 보기 싫다고 말하는 식이죠. 그러다 보니 배우들이 오해한 적이 많아요. 물론 친절한 설명을 삼가니 호불호가 갈립니다.
배 : 영화의 결말도 충격적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파격적이었어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요.
문 :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편집을 모두 끝내고 재촬영했어요. 배우들이 왜 재촬영을 해야 하는지 물었죠. 편집해놓고 보니 스스로 용서가 안 되었어요.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하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으로 끝내는 건 아니다 싶었죠. 등장인물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관객과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장면이 있어야 했어요. 춤을 통해 그들이 세상 또는 신과 화해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춤추는 내내 들리는 웃음소리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작품 ‘미궁’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배 : ‘원죄’로 2018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29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24회 춘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 작품상, 제38회 황금촬영상영화제 촬영 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유난히 상을 많이 안겨준 영화입니다.
문 : ‘원죄’시사회 때 목사님 50명을 초대했는데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리더군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일본 유바리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과 함께 초청을 받았어요. 국내에서 별 반응이 없던 영화를 일본에서는 심사위원 전원이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춘사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감독상을 받았고, ‘원죄’는 특별 작품상을 받았어요. 수상 소감에서 “‘기생충’이 300억짜리 영화인데 ‘원죄’는 1억 5천짜리 영화”라고 했더니 큰 박수가 나오더군요. 기독교윤리실천위원회에서도 움직이지 않았고요. 저들에게 빈틈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이 실수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 : 영화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문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담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비트는 주제는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런 영화는 투자를 받기 힘들고 흥행도 기대할 수 없어요. 운이 좋으면 상을 받기는 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안 맞는 옷은 입지 않으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는 힘들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사진 : 김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