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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

등록일 2024-10-27 18:54 게재일 2024-10-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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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죽도시장 그리며 문인화의 새 지평을 여는 작가  이형수<br/>&lt;1&gt; 영덕에서 서울로, 대가의 문하생이 되다

어린 나이에 고향 영덕을 떠나 서울로 갔고, 동양화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웠다. 20대 중반 포항에 정착한 후로 작품 활동에 정진했으며 환갑이 넘어서는 죽도시장과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흔이 넘어서도 풍경 좋은 곳을 오래도록 걸으며 작품 구상을 한다.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 선생의 이야기다. 창포동에 있는 선생의 작업실과 근처 카페에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들었다.

 

영덕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습니다. 서울서 대학 다니는 큰형을 따라 간 것이지요. 사춘기 시기 성균서예학원에서 이철주 화백한테 수묵화 중 난초 그리기의 기초를 배우면서 수묵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중3 때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정규 교육과정을 접고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당 김은호 선생에게 편지와 매화 소품 한점을 동봉해 보냈습니다.

김도형(이하 김)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형수(이하 이) :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로 소일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포항 이곳저곳을 걷기도 하지요.

김 : 영덕이 고향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 영덕 오십천(五十川)에서 가까운 남석동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 중 넷째였지요. 부친은 농산물검사소에 다니다가 엽연초 조합에서 퇴직하셨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 있는 편이었어요.

김 : 영덕에서 태어난 분들은 오십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이 : 오십천은 영덕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어릴 때 소쿠리를 들고 오십천에 고기 잡으러 가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참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뛰놀았지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오십천이 범람해 우리 집 과수원이 물에 잠겼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일제강점기에 만든 강구대교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태풍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물난리가 났지요.

이형수 선생은 유년의 기억이 자신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유년의 살갗에 새겨진 고향 오십천의 맑은 물과 바람, 모래벌판의 풀잎과 나뭇잎, 종달새의 영롱한 소리가 내 몸과 마음속에 늘 남아 있습니다.

살다 보니 기쁨보다는 어렵고 바람 부는 날이 많았습니다. 힘든 삶을 아름답고 영롱한 유년의 추억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습니다.

나무가 뿌리의 힘으로 거센 바람을 견디듯이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이형수 ‘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서예문인화, 2015, 3쪽.

김 :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이 : 1958년에 영덕초등학교(현 영덕야성초등학교, 1911년 개교)에 입학했고 2학년 때 서울 신설동에 있는 안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큰형(1939년생)이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의과대학에 다녔는데, 큰형을 따라 서울로 간 것이지요.

김 : 어린 나이에 서울로 가셨군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 큰형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힐 수 있었지요.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한문 공부를 하면서 인문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큰형은 내가 그림에 재주가 있어 보였는지 나를 한국일보 주최 미술대회에 데리고 갔어요. 그 덕분에 그림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김 : 중학교 시절이 궁금합니다.

이 : 1964년에 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광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평안남도 출신 한경직 목사가 세운 대광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습니다. 대광중학교에서 『성경』을 접한 것도 인문적 소양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공부는 꽤 잘하는 축에 들었습니다. 정치인 김한길이 2학년 때 같은 반에 다녔어요. 그런데 중2 때 큰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충격을 받았고, 그러면서 사춘기에 접어들었지요. 그때 운명처럼 그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제운이 운영하는 성균서예학원에서 이철주 화백한테 수묵화 중 난초 그리기의 기초를 배우면서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김 : 일반적으로 어릴 때 그림을 배우면 수채화나 유화를 접하게 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문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까?

이 :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왠지 수묵의 세계에 끌렸습니다.

김 : 그 후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 중3 때 이당 김은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선생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편지에 매화 소품 한 점을 동봉했습니다.

김 :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당 김은호 같은 대가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는지 놀랍군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서 3년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고 했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을 접고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요. 동양화를 접하면서 이당 선생의 명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군자 중 국화를 치고 있는 이형수 선생.
사군자 중 국화를 치고 있는 이형수 선생.

김 : 답신이 왔던가요?

이 :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을 받았습니다. 한번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종로3가 비원 쪽(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선생 댁을 찾아가 큰절을 했더니 그날부터 당신의 수발을 들면서 그림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김 : 정규 교육과정을 포기하고 도제식 공부를 하게 된 거군요. 큰 결단이었을 텐데 집에서 반대하지는 않던가요?

이 : 반대는 안 했지만 밥벌이가 되겠느냐며 걱정하셨지요.

김 : 이당 문하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 : 선생이 바깥나들이 할 때 모시고 나가고 잔심부름도 했어요. 선생이 작품 구상에 필요해 고등어를 사 오라 하면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 왔지요.

김 : 이당 주변에 유명한 화가가 많았겠습니다.

이 : 오죽 많았겠습니까. 이당 선생 문하에 있으면서 운보(雲甫) 김기창, 혜촌(惠村) 김학수, 오당(吾堂) 안동숙, 유천(柳泉) 김화경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김 :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이 : 이당 선생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선생에게 감정을 의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가짜가 많았어요. 선생의 작품을 비싸게 매입한 사업가가 사업이 어려워져서 작품을 팔려고 감정을 부탁했는데 작품이 가짜여서 낭패를 보기도 했습니다.

김 : 이당의 작품은 고가였겠지요?

이 : 메이란팡(梅蘭芳)이라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 배우가 있었는데, 이당 선생의 작품 중 메이란팡을 그린 큰 작품이 있었어요.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 작품을 삼성 이병철 회장이 갖고 가면서 백지수표를 건넨 기억이 납니다.

김 : 이당 문하에서 공부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서화의 세계에 ‘체본(體本)’이라는 게 있어요. 배우는 사람이 따라 쓰거나 그리게 하려고 가르치는 사람이 써 준 글씨나 그림을 말하지요. 이당 선생은 세밀함이 특징인 북종화(北宗畵)의 대가였습니다. 이당 선생에게 처음 받은 체본이 참새였는데, 참새를 정밀하게 그리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내가 어려서인지 그 화풍이 갑갑하게 느껴지더군요.

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이당 선생 문하에서 1년이 지날 무렵에 더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방향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종화(南宗畵)에서 명성이 높은 옥산(沃山) 김옥진 선생을 찾아가기로 했지요. 옥산 선생의 작품은 먹색과 운무가 좋았거든요.

김 : 이번에도 편지를 보냈나요?

이 :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북가좌동 32번 버스 종점 앞에 댁이 있었지요. 인사를 드리고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이당 선생에게 허락을 받고 오라고 하셨어요.

김 : 이당 선생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 : 뜻대로 하라고 선선히 말씀하시더군요.

이형수는…

1952년 경북 영덕군 남석동에서 태어나 영덕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해 안암초등학교와 대광중학교를 졸업했다. 마

지막 어진(御眞) 화가인 이당(以堂) 김은호와 남종화의 대가인 옥산(沃山) 김옥진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다.

1976년 포항에 정착한 후 네 번의 개인전과 세 번의 초대전을 국내외에서 가졌으며,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냈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한국서가(書家)협회 초대작가가 되었고,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과 경북지회 초대 지회장을 지냈다. 경북문인화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871 영해동학혁명 기념사업회 고문으로 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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