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죽도시장 그리며 문인화의 새 지평을 여는 작가 이형수<br/><2> 포항 정착과 국내외 전시
이형수 선생은 20대 중반인 1976년 포항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간다. 1979년 포항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후로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초대전을 꾸준히 열었다. 일기처럼 그린 작품을 모아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엮어내기도 했다.
이형수 선생이 이런 활동을 펼치며 어떤 작품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는지 들었다.
1973년 군 입대 전까지 옥산 선생 문하에 있었습니다. 집사처럼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그림을 배웠죠. 제대하고 1976년에 포항으로 왔어요. 1979년 육거리 근처에 있던 용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경주 동국대 조경학과를 1992년에 졸업했습니다. 1996년에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가 됐고 경북문인화협회와 한국서가협회 경북지회회장을 10년 동안 맡았어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을 맡은 후로는 두문불출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포항문화예술회관 개관, 포항시 신청사 개청 당시 모두 전통 문인화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독일서도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유럽의 폭넓은 문화를 체험하게 된 좋은 기회였죠.
김도형(이하 김) : 옥산 선생의 주변에도 유명한 예술인이 많았겠습니다.
이형수(이하 이) : 옥산 선생과 가까운 분으로 이상재, 문장호, 김춘, 최범술, 김범부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옥산 선생이 전라남도 진도 출신이다 보니 선생 주변에는 호남 사람이 많았어요. 호남 수묵화의 저변이 굉장히 넓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지요.
김 : 옥산 선생 문하에서는 언제까지 계셨는지요?
이 : 1973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문하에 있었습니다.
김 : 당시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힘들었지요. 집사처럼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따금 그림을 팔아서 생기는 돈과 선생님이 간혹 주시는 용돈이 수입의 전부였어요. 군대 가니까 오히려 편할 정도였습니다.
김 : 옥산 선생 문하에 있을 때 기억에 남은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옥산 선생이 차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의제(毅薺) 허백련 선생이 만든 춘설차를 좋아했어요. 그 덕분에 저도 차 맛을 좀 알게 되어 다인(茶人)이 되었습니다.
김 : 선생님은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대가들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셨습니다. 혹시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걸 후회하신 적은 없는지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진학했더라면 좋은 대학에도 가고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하지만 문인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이니까요. 다만 당시 큰 스승 밑에서 더 열심히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김 : 포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이 : 군에 입대하면서 서울 생활은 마무리되었지요. 충북 조치원에 있는 32사단에서 군수처에 근무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1976년에 포항으로 왔어요. 영덕에 계시던 부모님이 거주지를 포항으로 옮기셨거든요.
김 : 당시 포항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이 : 그때는 해도가 늪지대였습니다. 포항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도시에 활력이 넘쳤지요. 포항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고 보면 됩니다.
김 : 포항에서 작품 활동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해도동 집에서 작업했습니다. 1979년 육거리 근처에 있던 용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산수 여덟 폭과 기러기 병풍을 전시했습니다. 작품이 팔리긴 했는데 전시 경비를 제하고 나니 남는 게 없더군요. 당시에는 그림 전시회 등 웬만한 문화예술 행사를 다방에서 했어요. 그런 행사를 소화할 만한 문화 공간이 없었거든요.
김 : 사모님(효원(曉園) 최영란)이 서예가이시죠?
이 : 포항에서 금강연묵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1982년에 결혼했어요. 제가 아내가 쓴 금강경에 반했지요. 결혼 1년 후에 아내가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지요.
김 : 서실도 열었을 것 같습니다만.
이 : 1990년에 두호동 해변가 상가에서 서실을 열었습니다. 뒤늦게 대학에도 갔지요. 검정고시를 거쳐 경주 동국대 조경학과를 1992년에 졸업했습니다.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문인화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더군요.
이 : 1996년에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 경북문인화협회가 창립되었는데, 협회 회장을 10년 동안 맡았지요.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경북지회가 창립되면서 역시 10년 동안 지회장을 맡았고요. 그리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을 맡았는데, 그 후로는 두문불출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문인화와 서예 쪽에서 심부름을 많이 한 셈이지요.
김 : 전시도 꾸준히 하셨지요?
이 : 1995년 포항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할 때, 그리고 2007년 포항시 신청사가 개청할 때 초대전을 했습니다. 두 번 모두 전통 문인화를 소재로 전시했지요. 지금도 포항문화예술회관 1층에 ‘청매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2008년에는 대구 동아미술관에서 ‘먹빛이 마음빛’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어요. 성타 스님이 낸 생활법문집 ‘모래 한 알에 우주를 담다’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김 : 해외에서도 전시하셨지요?
이 : 2010년 12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19일까지 독일 베를린 스판다우 문화의 집 갤러리에서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鵲知孤虎)’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습니다. 독일에 있는 동포들이 환대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동포들을 위해 빨랫방망이에 까치와 호랑이 그림을 그려서 갖고 갔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그 이듬해 함부르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닷새 동안 ‘모든 사람은 꽃이다’를 주제로 초대전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묵죽(墨竹)을 좋아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김 :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까치와 호랑이가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뜻을 담은 것인지요?
이 :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지요. 알고 보면 까치도 호랑이도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까치는 서로의 속마음을 아는 친구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김 : 유럽에서 전시하면서 문화 체험을 폭넓게 하셨겠군요.
이 : 독일 베를린에서 한 달 동안 민박하면서 독일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미술관을 찾아갔지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미술관에도 갔는데, 벽면에 새겨진 “장소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변하고, 그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면 미래가 변한다”는 영어 네온사인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셀도 둘러봤습니다.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어요.
김 : 선생님이 낸 책 중에 ‘수묵 편지’ 두 권이 눈에 띕니다.
이 : 2015년에 낸 ‘수묵 편지’는 일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의 일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능소화, 대나무, 백합, 복숭아, 나팔꽃, 토마토, 참외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지요. 그림에 딸린 화제(畫題)는 제가 쓴 것도 있고 정희성 시인, 마종기 시인, 이해인 수녀 등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2017년에 낸 ‘수묵 편지’는 영덕 출신의 역사적 인물인 장계향, 나옹선사, 목은(牧隱) 이색 세 분을 다룬 것입니다. 장계향은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女中君子, 풍모와 도량이 큰 여인)의 칭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글로 쓴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저자이기도 합니다. 나옹선사와 목은은 워낙 유명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지요. 세 분은 송천강과 인연이 있는 큰 인물입니다. 송천강은 영해평야를 가로지르며 흐르다가 동해로 빠져나갑니다. 송천강 상류에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이 있고, 중류에는 장계향의 시댁인 충효당이 있으며, 하류에서 목은이 태어났습니다.
김 : 시(詩), 서(書), 화(畵)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작품을 그리려 합니다. 시서화가 혼융일체가 되려면 쉼 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