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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5000 결사대는 떼죽음을 맞았고…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4-11-05 19:33 게재일 2024-11-0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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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그 쓸쓸한 역사
Chat GPT가 단풍이 물들어가는 칠갑산을 묘사했다.

우뚝 선 부처와 보살이 장엄함을 보여주는 마애여래삼존불과 줄줄이 늘어선 왕릉, 여기에 국가의 시작을 알린 성모(聖母)의 전설이 떠도는 선도산. 신라는 56명의 왕이 통치하며 992년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였다.

하지만 백일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어쩔 수 없는 순리. 말기에 들어서며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이 다스렸으나, 지역에선 반란 세력들이 들끓었다. 중앙집권 정치의 힘을 잃고 있었던 신라.

이윽고 918년엔 궁예를 무너뜨린 왕건(王建)이 후백제와 비교해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신라의 마지막 집권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이름을 지우게 된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백제에 비해 신라의 멸망은 피비린내가 덜했다. 왕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새로운 실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반면 백제의 멸망 과정은 참혹했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맞서겠다고 황산벌로 나섰던 5천명의 결사대가 떼죽음을 맞았고, 이후 백제 수도로 쳐들어온 나당 연합군에 백성들은 혼비백산했다.

계백과 결사대의 피비린내 나는 항전 중에도

무력한 의자왕은 적을 피해 웅진성으로 도망

사비성 점령한 나당연합군 극심한 횡포·약탈

백제 유민들 칠갑산 일대를 주요거점 무대로

흑치상지·복신·도침 등 중심 부흥운동 일으켜

이후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왕위에오르지만

부흥군 사이 반목… 짧았던 3년의 역사 막내려

◆지는 해처럼 사라진 고대 왕국 백제는...

백제의 멸망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 등에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이를 요약해 옮기면 아래와 같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660년 6월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을 무사히 통과했고,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에 상륙했다. 의자왕은 계백을 출전시켰다. 하지만, 결사대 5000명은 황산벌전투에서 전멸했다. 이후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무너뜨리고…(후략)”

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인 의자왕은 무력했다.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 지척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왕자 중 한 명인 태(泰)가 끝까지 사비성을 사수하고자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남은 군대에선 이탈자가 속출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왕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한때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백제는 그렇게 지는 해의 형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자리했다. 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칠갑산 일대는 백제의 사라짐을 통곡하며 그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고자 했던 세칭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청양군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뒤편으로 칠갑산이 보인다.
청양군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뒤편으로 칠갑산이 보인다.

◆나당 연합군의 횡포로 촉발된 백제부흥운동

그렇다면 백제부흥운동을 촉발시킨 매개체는 무엇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들려주는 해답은 이렇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 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했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했다. 백제부흥군의 주요 인물로는 정무·지수신·흑치상지·복신·도침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또한 길었다. 그래서일까? 10월 중하순에 찾아간 청양 칠갑산엔 드문드문 물들어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보였을 뿐, 제대로 된 단풍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칠갑산의 초입과 등산로를 제법 오랜 시간 거닐었다. 한때는 신라와 고구려 못지않은 힘과 세력을 과시하며 일본으로까지 이른바 ‘문화 수출’을 했던 예술지향의 백제 왕조. 하지만, 사라짐의 순간은 찰나처럼 덧없고 짧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깨진 사발의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몰락한 국가를 재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백제부흥운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흥운동 초기 백제의 복신은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군을 압도하기도 했고, 661년 가을엔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일본에서 돌아와 왕에 오르며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부흥군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고, 주요 수뇌부가 암살되기도 한다.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부로부터의 불화와 같은 편끼리의 암투, 나당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 풍왕의 고구려 도피, 신라군에 의한 주류성과 임존성의 함락….

백제부흥운동의 짧았던 3년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직까지 백제의 서러운 멸망사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내려오는 길에 본 칠갑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유독 핏빛으로 붉었다. (계속)

토기가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전시물.
토기가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전시물.

절제되고 간결한 백제토기

고구려·신라 등과 비교하면 기종 다양

장식성 강하지 않고 실용적인 면 선호

‘백제부흥운동의 본산’으로 불리는 청양군. 그곳에 건립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가장 주목되는 건 토기다. 흙으로 만들어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던 그릇과 병은 1천 년 전 먼 옛 시대 백제인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용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엔 백제의 토기가 출토된 지역을 아기자기하게 복원해놓은 전시 공간이 있고, 흥미로운 형상을 지닌 여러 가지 토기를 모아 선보이고 있다. 박물관을 찾는 학생들이 토기 제작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전시물도 확인 가능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제 토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백제 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기종이 확인된다. 장식성이 강하지 않고 단순하며 색조, 유려한 선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인들이 보다 절제되고 간결함을 추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성기부터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 토기가 고분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됨으로써 실용적인 면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찾아 살펴본 백제의 토기는 위의 설명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많지 않은 소박함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가에서 봤던 그릇이나 항아리처럼 투박했지만 단아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

거기에 더해 연꽃무늬 수막새, 오수전무늬 벽돌, 귀면전, 암막새, 토제직구호처럼 신라와는 구별되는 백제만의 향기가 담긴 여러 생활용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인상적인 체험으로 다가왔다.

패망한 왕국 백제를 다시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지금의 청양 지역엔 청남면 왕진리 가마터, 장평면 관현리 가마터, 정산면 학암리 가마터, 목면 본의리 가마터 등에서 다양한 기와, 와당(瓦當), 토기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것들은 현재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다수 전시돼 있다.

‘고고학사전’에 따르면 ‘백제 토기는 백제라는 특정 정치체의 시공적(時空的) 영역 안에서 제작·사용되었던 것으로 여타 토기와 식별할 수 있는 일정한 양식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토기군’을 지칭한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와 특정 토기의 양식이 가진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일정 양식 토기의 성립이 반드시 국가의 형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정치적 긴장 상황이 매우 증대되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고구려나 신라 모두 그 시공적 영역 내에서 식별할 수 있는 토기양식이 등장하고 있어 이 무렵 국가와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 토기의 형성은 곧 백제라는 국가 형성의 한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청양군을 찾게 된다면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생활물품 가운데 하나였던 토기를 통해 백제의 실체와 그림자를 살펴보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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