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영천 양향리 임고서원 은행나무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한 선량들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산 메아리로 허공을 맴돌며 패거리 문화를 양산할 뿐 아무런 감동이 없다. 국가나 국민보다 개인적으로나 자신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치우친 논리 개발로 궤변을 늘어놓고 우격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삿대질하며 남 탓을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그들은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의견을 하나로 모우고 뭉치기는커녕 서로 자기주장만 되풀이하고 파벌과 분열의 씨앗을 키울 뿐이다. 이럴 때 충절과 신념의 표상이 된 포은 정몽주 선생이 더욱 그립다.
키 30m·가슴둘레 5.95m·앉은자리 폭 22m에 달하는 500년 된 거목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임고서원’과 함께 자리해
가을빛이 완연한 영천의 임고서원. 그 입구에 이르면 은은하게 노랗게 물든 잎사귀들이 반기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은행나무는 키 30m, 가슴둘레 5.95m, 앉은자리 폭 22m에 달한다. 거인의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오랜 세월과 굳건한 신념을 상징한다. 무수한 계절을 지나오며 바람과 비를 견뎌낸 그 자태는 흡사 살아 숨 쉬며 말 없는 교훈을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나무 곁에 서면 은행나무의 물음이 들려온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은 이 고장 출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아는가? 라는 물음으로 들린다.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그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킨 충신으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애를 걸었던 역사적 인물이다. 고려가 흔들리던 시절, 그는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물결 속에서도 그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은행나무로 변신하였다. 그의 길은 외롭고도 험난했으며,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충절은 후대에 빛나는 유산으로 남았다. 임고서원은 그가 남긴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진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을 지켜온 은행나무는 그의 이야기를 말없이 이어가고 있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포은 선생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충절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선생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읊조려 본다. 단심가에서 드러나는 신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는 단순한 충성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고백이자 헌신이다. 이에 포은 선생 자당이 지은 ‘백로가(白鷺歌)’를 보면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울세라/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는 시조에서 보듯이 포은의 충절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가정교육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그 어머니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은 단지 왕조에 충성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킨 것은 바로 자신의 신념이었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고려를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에게 충절이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고, 그의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삶을 보며 진정한 충성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내린 신념은 어떤 시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신념이 있기에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중에 부래산에 세워진 서원이 소실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불길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서원 앞을 지키고 있다. 마치 충절의 상징처럼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가을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무가 지닌 고귀한 가치를 마음에 새긴다. 이곳을 지키며 자라는 은행나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이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조상들이 물려준 정신의 상징이다. 그 정신은 바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지킨 충절과 신념이다.
노랗게 물던 우람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곱씹어본다. 마치 뿌리 깊이 내린 은행나무처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신념과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은행나무는 5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서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과 보호 덕분이었다. 공직에 있을 때 모셨던 이곳 출신 이남철 선배님은 여러 지역의 자치단체장을 역임하고 퇴직 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숭모사업회장과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장을 역임했다.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선생의 충효 정신을 늘 강조했다.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나무를 보호하며 그의 신념을 이어갔다. 충절과 신념이란 거창한 말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가야 하는 일상의 다짐임을 은행나무는 조용히 일러준다.
우리는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쉽게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와 서원 앞에서는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은 단지 왕조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가 은행나무처럼 뿌리 깊이 신념을 내렸기에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포은 선생을 대신하여 은행나무는 말없이 우리에게 전한다.
임고서원과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선 명종 1553년에 경상북도 영천시의 부래산에 처음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 160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고, 여러 번 중건과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서원은 고종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으나, 1965년에 복원되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1337년에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고려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정을 바로잡고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를 원만히 하고, 내부적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등 고려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 개국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1392년에 이방원에 의해 피살당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여겨져 후세에 큰 영향을 남겼다. 선생의 비문에는 그의 출생, 학문적 업적, 정치적 기여, 그리고 그가 고려 말기 혼란 속에서도 충절을 지킨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행적을 기리는 동시에 후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충절을 본받기를 기원하는 문장들이 기록되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